리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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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동북아 4국지》

15. 일본의 싱크탱크에서
2013년 03월 04일 07시 43분  조회:2450  추천:1  작성자: 리강철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15.
일본의 싱크탱크에서
 
2000년 봄에 나는 박사과정을 졸업하였으나 다음의 발자국을 어떻게 내디뎌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인생의 갈림길이었다. 이 때는 일본에서 박사를 졸업해도 취직이 아주 힘든 때였다. 일본인도 취직하기 힘든데 외국인이야 더 말이 있으랴. 또한 내가 연구한 동북아경제협력에 관해서는 일본의 동경권의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는 큰 관심이 없는  전공이기에 취직이 더욱 힘들었다.
 
동아시아종합연구소와의 인연
그러던 중에 동아시아종합연구소(동경)라는 재일한국교포가 운영하는 연구소 강영지 소장과 이전에 니이가타국제회의에서 만난 적이 있어 찾아 갔다. 이 연구소는 두만강개발이 화제가 되기 시작한 1991년에 당시 재일교포신문사 기자를 하고 있던 강영지 소장이 기자를 그만두고 설립한 민간연구소였다. 강소장은 나를 열정적으로 맞아주면서 연구소에서 [북조선년감]을 번역출판할 예정이니 도와달라는 것이였다. 나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이 연구소에서는 그해 8월에 대만에서 동북아시아의 국제협력을 테마로 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할 예정이였는데 준비 사무국장도 맡아달라는 것이였다. 민간의 연구소로 재정이 부족하기에 월급은 얼마줄 수 없다는 것이였다. 일주일에 2,3일 정도 출근하여 밥먹고 살만하면 되니 월급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였다. 배울 수 있는 기회이고 인맥을 넓힐 수 있는 기회면 나한텐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연구소에서 임시로 일했으나 배우는 것은 많았다. 특히 그해 8월에 대만의 타이페이(臺北)에서 개최하는 동북아국제심포지엄의 준비를 해야했는데 전반사무에 관여했기에 심포지엄의 기획부터 대회를 조직하는 귀중한 경험을 얻게 되였다. 또한 대만에 갈 기회도 얻었고 동북아 각국의 유명한 학자 전문가 외교관 등을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그번 심포지엄을 조직한 경험을 빌어 그 이듬해 동경에서 처음으로 조선족 국제심포지엄을 기획하고 조직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국적인 경우 대만에 입국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였다. 입국허가를 맏기 위하여 산더미같이 서류를 준비하여 일본에 있는 타이페이 주일본경제 문화교류처에 한달 전에 제출해야 했다. 제출은 했어도 허가가 나올지 자신이 없었다. 회의 예정기일이 5일밖에 남지 않아 안달아 하고 있는데 다행이도 입국허가가 내려왔다. 만약 중국대륙에 있었다면 대만 땅에 발을 들여놓을 기회는 나한테 오지 않았을 것이다. 대만에 가서 구경도 잘했고 많은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은 것은 물론이고 대회에 참가한 외빈들과 함께 대만의 전 총통인 리등휘(李登辉)사무실을 방문하고 1시간가량 좌담회를 가졌다. 리총통은 일본에서 류학하고 박사를 딴 분이기에 일본말이 능통하고 일본문화에 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수시로 웃음소리가 터지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좌담회는 진행됐고 나중에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몽골 주일본대사도 이번행에서 친구로 되였다. 그가 공항에 도착하여 언어도 안통하고 길을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내가 찾아가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였다. 나중에 몽골을 방문할 때에도 대사의 따뜻한 대접을 받고 신문기자의 인터뷰도 받아 생각밖에 몽골신문에 게재되였다. 또한 내가 지금 근무하는 호쿠리쿠대학의 이사장도 대회에 참가하여 식자자리를 함께 할 수 있었고 내가 하는 통역과 사무에 대해 높은 평가를 주면서 기회가 있으면 자기네 대학에 와서 사업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6년 후 이 대학에서 다시 교편을 잡게 되였다. 
  
   일본의 정책연구전문가로
위의 연구소에서 일을 돕는 한편 환일본해종합연구기구의 사무국장과 함께 일을 하기도 했다. 허나 이 연구소도 학회와 마찬가지로 민간조직이기에 재정이 아주 딸렸고 나는 그곳에서 보란티어로 일을 했었다. 그래서 사무국장은 나와 상의하여 연구프로젝트를 신청해 보자고 하였다.

당시 일본의 사사카와평화재단(笹川平和財団)의 산하에는 동경재단 (東京財団) 이 설립되여 민간, 비영리, 독립단체로서 일본의 정책연구와 외국의 대학생 수천명을 대상으로 장학금지원 사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동경재단에 연구프로젝트 신청을 했다. 연구테마는 [동북아시아개발은행(東北亜開発銀行) 설립과 일본의 대외정책] 이였다. 국내외에 유명한 학자 전문가 10여명을 조직하여 연구팀을 구성하였다. 그때 당시 나는 아직 무명소졸(無名小卒)의 대학원 졸업생이며 사무국의 보조일군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밖으로 연구프로젝트가 입선되여 3천만엔의 연구비가 지급되기로 되였다. 이 연구비속에는 나를 동경재단의 연구원으로 채용하는 비용도 포함되여 있다고 담당자가 알려주고 만약 다른 직업이 없으면 연구원으로 들어와 달라는 것이였다. 나는 너무나 놀랐다. 생각밖의 운이 닥쳐와 나의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되였다. 일시적이기는 하나 나의 직업문제와 생활문제가 동시에 풀린 것이다. 지금까지 꾸준히 노력하고 환일본해종합연구기구에서 열심히 일을 한 것이 이런 식으로 나에게 크나큰 보답을 해주었던 것이다.

드디여 2001년4월 1일부터 동경재단의 연구원으로 일본에서의 첫 출근을 하게 되였다. 우리 연구팀의 대표는 환일본해종합연구기구의 이사장 도조언(대만출신) 교수이고 나는 사무국장을 맡았으며 연구팀 멤버로는 미국인, 중국인, 한국인, 러시아인, 일본인 등9명의 금융개발 전문가로 형성되여 그야말로 국제적 연구팀이였다. 사무국장인 나는 전력을 기울이여  국제적 조사연구를 조직했다. 우리 연구팀은 분조를 나누어 일본정부의 금융 및 정책관계부문, 동북아 각국의 금융 및 정책관계부문을 방문하고 조사연구를 벌이는 동시에 세계 각 지역의 개발금융 국제기관을 방문조사하였다. 필리핀마닐라의 아시아개발은행, 싱가포르의 APEC사무국, 미국워싱턴의 국무성과 세계은행 총부, 뉴욕의 련합국 총부 아시아태평양사무국, 하와이 동서연구센터, 플로리다주의 아시아개발은행 원부총재, 그리고 영국런던의 유럽북흥개발은행 등을 방문조사하여 동북아개발은행 설립의 근거와 가능성을 론증하였다.

드디여 조사연구결과를 종합하여 일본정부에 정책보고를 준비하였다. 이듬해(2002년) 7월29일 주밀하게 안배된 일정에 따라 연구팀대표와 나는 일본정부 관청에 들어가 내각부 관방장관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2007년에 수상으로 됨)씨와 만나 우리의 정책제언에 대해 설명하고 일본정부가 동북아시아개발은행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을 요망했다. 후쿠다 장관은 “훌륭한 연구성과에 감사드리며 정부로서 꼭 노력해 보겠습니다”고 전향정 답복을 주었다. 이 회견을 알선한 것은 사회민주당의 2명의 국회의원이였는데 그들은 1990년대에 결성된 환일본해 초당파 국회의원 포럼의 멤버들이였다. 회견이 끝난 후 국회기자 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우리의 정책건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 모든 것은 나에게는 처음 체험하는 일이고 또한 일본이라는 외국에 와서 외국인으로서 일본정부의 중추에 들어가 중요한 인물과 회담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본에서도 드문일이다. 력사의 한페지에 기입해도 될 일이 아닌가.
 
아시아인개발연구센터 설립
그해 9월 동경재단의 연구과제는 끝나고 나는 다시 실업자로 되였다. 나이 40이 넘어서 박사급으로 일본사회에서 취직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였다. 1년반동안 멎지게 일해왔는데 금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1년전에 일본친구를 통해 만났던 스기야마(杉山)라고 하는 작은 회사의 사장한테 연락하니 식사 한 번 하자고 했다. 그 사장이 이전에 만났을 때 ‘동북아시아인’이라는 말에 감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함께 아시아를 위한 사업을 하자고 자기의 생각을 말해 주었다. 사장은 당장에서 돈100만원을 내주면서 생활이 곤난할텐데 보태쓰라고 하며 자기의 회사에 나와서 싱크탱크를 설립하여 운영해 달라고 했다. 너무나도 놀랍고 반가운 일이였다. 그래서 그 회사의 사무실 한칸을 내여서 나에서 자유롭게 쓰도록 했다. 그리고 매달 나에게 생활비를 지급하기로 했다.

둘이서 상의한 끝에 ‘아시아인 개발연구센터’라는 이름으로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하고 내가 알고 있는 사회명류 몇 명을 조직하여 조직체계를 만들기로 했다. 내가 이사장을 맡고 스기야마는 전무리사를 맡아 아시아의 발전을 위한 사업을 전개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여러가지 사업기획을 짜고 활동을 시작하려하는 중에 국립 나고야 (名古屋大学)대학의 히라카와(平川)교수로부터 대학에 와서 반년동안 외국인 연구교수를 맡아 달라는 것이였다. 연구소를 설립하여 사업을 해보려던 나는 망설이게 되여 스기야마사장과 상론하였다. 그는 ‘너한테는 대학에 가는 것이 적합하니 연구소는 업여로 하고 대학에 가는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주어 그 말대로 나는 2003년3월부터 나고야대학으로 들어갔다. 외국인이지만 일본의 교수들과 똑 같은 대우를 해주고 연구실도 내주었다. 가족은 쉽게 이사할 수 없으니 집을 떠나 단신으로 나고야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반년동안 자유롭게 자기의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NIRA연구원으로
나고야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는 중에 인터넷에서 인재모집 광고가 눈에 띄웠다. 종합연구개발기구(NIRA: National Inatitute for Research Advancement)라는 연구소에서 지역개발전문의 연구원을 모집한다는 것이였다. 이 연구소는 일본정부 경제기획청(経済企画庁,중국의 国家发改委에 상당함)이 1960년대에 설립한 국가발전정책에 관한 연구를 하는 국책연구소로 일본의 최고급 연구기구이며 국제상에서도 유명하다.중국에서 말하면 국무원발전연구중심이나 국가발전개혁위원회산하의 연구소와 같은 위치였다.

국책연구소이니 외국인으로서는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모집요항에는 외국인에 관한 제한이 없었다. 동북아지역에 관한 개발연구의 전문가를 모집한다기에 한번 신청해보자고 생각했다. 선제 모집조건은  박사급 40세이하로 영어로 연구교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였다. 이미43세인 나는 년령조건에서 이미 가능성이 없었다. 허나 정책연구에는 이미 실적이 있고 또 동북아경제에 관한 전문에서도 실적이 있으니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환일본해종합연구기구의 사무국장한테 상의하였다. 사무국장이 이 연구기구의 전무리사를 하고 있는 원국회의원 한테 상의해 보겠다고 했다. 며칠 후에 답이 왔는데 원국회의원이 NIRA의 이사와 상담해보았는데 일단 년령조건은 제외하고 연구업적과 능력으로 선발하기로 했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인츰 신청자료를 준비하여 보냈다.

1개월가량 지나서 1차의 서류심사에 합격되였으므로 면접시험에 참가하라는 연락이 왔다. 이젠 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소정한 날에 면접시험에 참가했는데 시험 후 1시간가량 기다리고 있었더니 이사장이 면담한다는 것이였다. 합격이 되였다는 의미라고 판단하고 마음속으로는 격동됨과 동시에 긴장하기도 하였다. 이사장은 원경제기회청의 사무차관으로서 중국에서 말하면 부부장급의 고관이였다.  

 이사장사무실에 들어가니 이사장이 상냥하게 인사하고 “이선생의 훌륭한 연구업적으로 우리연구소의 사업에 관하여 많이 지도를 부탁드립니다”고 말하니 너무나 송구스러웠다. 나같은 미숙한 연구자한테 겸손한 어투로 지도를 부탁한다니 말이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제가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다. 이렇게 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일본국책연구소의 연구자로 되였다. 이 연구소의 력사상 처음으로 되는 외국인 연구원이였다.
 
동북아 공동체의 장래비젼과 ‘동북아인’
연구소에서의 나의 담당은 동북아 연구였다. 여러가지 연구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조직했는데 핵심적 연구프로젝트는 일중한이 공동연구하는 ‘동북아 그랜드 디자인(원경 발전설계)’였다. 동북아시아 지역통합을 실현하기 위한 개발계획에 관한 연구였다. 중국과 한국의 연구 파트너로는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산하의 국토연구소와 한국의 국토연구원이였다.

3년간 나는 서울과 북경을 집문앞 나들듯이 출장다니고 몽골의 울란바트와 러시아 연해주 그리고 중국의 동북3성에서도 연구조사활동과 국제회의에 참가하는 나날들로 숨가쁘게 보내왔다. 또한 련합국 공업개발기구가 주최하는 두만강개발에 관한 국제워크샵에 참가하기 위하여 독일 뮨헨 경유로 오스토리아(오지리)의 윈에도 출장하였다. 이 워크샵에서는 일본을 대표하여 참가하였으며 인생 처음으로 영어로 주제발표를 하였다.    

연구소에서는 조선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참가하는 워크샵도 매년 북해도에서 개최했으며 일중한 FTA(자유무역협정)에 관한 정책가능성연구도 다년간 진행해왔다. 최근에 일중한 3개국 정상회담에서  3개국간 FTA담판을 2012년중에 시작하기로 결정되였는데 그에 관한 기초연구는 우리연구소와 중국의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및 한국의 대외정책연구원이 공동으로 10여년간 연구해서 매년 3국정상회담에 보고를 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은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일중한 3개국은 력사문제나 령토문제 그리고 국민감정의 갈등이 남아있으면서도 글로벌화 경쟁시대에 경제적 상호 의존관계가 깊어지고 있으면 장래에도 서로 협력하여 공동발전하는 것이 력사적 추세라고 생각한다. 상호간의 대외무역이나 대외투자로부터 보면 서로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공생관계로 발전해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조선이나 몽골, 러시아극동지역도 마찬가지로 동북아시아 각국간의 상호 의존관계는 전례없이 깊어지고 있으며 미래  지향적인 공생관계가 불가피한 것이다. 10년, 30년, 50년이라는 시간축에서 동북아시아지역의 원경계획을 구상하는 것이 바로  동북아 그랜드디자인이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서 ‘아시아인’이나 ‘동북아시아인’이라는 아이덴티티의 수립도 불가피한 것이다. 나는 국제회의에서 발표할 때는 언제나 “나는 동북아인입니다”라고 자아소개하는데 참가자들도 그것을 인정해 주었다.   

이 연구소는 젊은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연구원을 모집하기에 3년간 계약으로 되여 있었다. 나는 3년간 전력을 투입하여 연구활동에 참가하여 상당한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또한 동북아시아 각국의 정책연구자들과 많은 교류를 할 수 있었으며 미국이나 유럽과도 많이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그 뿐만아니라 많은 연구단체거나 시민단체에서 초청강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조선족을 일본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좋은 기회였으며 또한 언제나 민족적 자부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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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4 ]

4   작성자 : 네티즌
날자:2013-03-05 17:31:24
진짜 무식한 놈은 3번이구나. 2번은 아주 선의적으로 댓글을 올린것 같은데 그것이 어디 꼬투리를 잡는것인가?
내보건대도 "입국"인가, "입경"인가 하는것은 엄중한 정치문제라고 본다. "입국"리라면 대만을 완전히 한개 나라로 인정하는것이고 "입경"이라면 대만이 중국의 한개 지구로 볼수있다. 이런것도 모르고 3번은 2번을 질책하니 진짜 무식한 놈이 아니고 뭔가? 리강철씨도 동북아공동체를 연구를 한다는 사람이 이런것은 명백해야 하지 않겠는가?
3   작성자 : 무식한 늠들
날자:2013-03-05 00:35:16
무식한 사람은 늘 남의 글에 꼬투리를 잡고 나자빠 지는구나 2번이 뭘 입국 혹은 입경 그래 입경이라면 변경에 있단 얘기냐?
제반 글의 내용이 독자들에게 계몽되는냐?하는 것을 분석해 주는 것이 아니라 ㅎㅎㅎ
2   작성자 : 입경
날자:2013-03-04 17:26:51
리선생님, 대만에 "입국"이라고 말하는것이 아니라 대만에 "입경}이락 말해야 합니다.
1   작성자 : 감동
날자:2013-03-04 08:01:55
리강철 교수님과 같은 인재들이 있어 조선족은 자랑스럽다.리강철님 더욱 잘 나가시기 바람니다.그리고 민족을 위해서 큰 업적을 쌓기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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