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운학원(현’중국노동관계학원’)은 중국의 노동조합총회인 중화전국총공회 산하에서 전국 각 지역 노동조합의 간부를 양성하는 대학이다. 나는 이 대학의 공회학부에 배치받아 전임강사로 철학, 국제노동운동사, 공회학 등 과목의 강의와 반주임(반급담당)을 맡았다.
그 때 당시 우리대학에는 4개의 학부와 고급간부 양성학부가 있었다. 학원들은 전국 각지의 성,시,현의 국영기업이나 정부기관의 공회간부 또는 간부후보자들이 추천과 시험으로 입학하여 2년동안 재교육을 받은 후 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들의 평균년령은 약30세로 그 때 27세밖에 안되는 나로서는 형님누나같은 사람들을 교육해야 했다. 대부분 학생은 나보다 사업경험이 풍부하고 사회적으로 일정한 지위가 있는 중견 간부들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급간부 양성학부에는 국영 대기업이나 정부 사업단위의 공회주석, 부주석(노동조합회장 부회장)들이나 처장급 국장급 간부들이 대부분이였고 평균 연령은 약 50세였다. 그들은 반년이나 1년정도 파견받고 이 대학에서 재교육을 받았다.
나의 셋째 매형이 국영기업인 연변개산툰섬유팔프 공장의 공회주석이였는데 우리 대학에 와서 연수하게 되였다. 매형이라고 해도 나보다 20여세 연상이였으나 나의 학생으로 되였기에 고향에 돌아가도 그냥 선생님 취급을 받았다.
대학강사가 된 후에 나는 곧 결혼하게 되였다. 내가 당교에서 연구생공부를 할 때 형님(연변대학교수)이 연길시 모 소학교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던 여성을 소개해주어 2년남짓이 장거리 연애를 한 후 결혼하게 되였다. 결혼생활은 원활하고 행복하였으나 북경과 연길이라는 3천리 떨어진 두 곳에서 살며 부부간에 동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였다. 그 이유는 중국의 호적제도 때문이였다.
중국에서는 1949년 새 중국이 건립된 이래 도시와 농촌의 인구유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특수한 호적제도를 실시하여 농업호구(호적)와 비농업호구로 나누었다. 농업 호구를 가진 사람은 국가나 지방의 공무원(간부), 군인, 대학생, 전문학교 학생 등을 거쳐 국가공무원이 되면 비농업호구(즉 도시호구)로 전환될 수 있고 그 외의 경우에는 영원히 농업호구를 개변할 수 없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뿐만아니라 도시간의 호구이동과 인구이동도 제한되여 있었다. 특히는 대도시와 중소 도시간에 호구 이동은 상당히 힘들었다. 대도시에서 중소도시로 또는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동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가능하였으나 그 반대로의 이동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더 어려웠다. 나의 안해는 비농업 도시호구였으나 연길시에서 북경시로의 호구이동은 거의 불가능 하였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호구가 이동되지 못하면 안해는 북경에서 직장을 찾을 수 없고 북경의 직장에 있는 나는 단위(직장)에서 분배해주는 공동주택도 배분 받을 수 없으므로 동거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때 당시에는 민간주택을 자유롭게 임대주는 제도도 없었기에 가령 돈이 있다고 해도 주숙할 집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외에도 부부간의 호구가 분리되여 있으면 어린애가 태여나도 아버지의 호적에 등록할 수 없고 어머니의 호적에 등록되는 제도를 실시하였기에 성은 아버지를 따르나 호적은 어머니를 따른다는 모순되는 제도가 되여 있었다. 그렇게 되면 가령 북경시에서 아이를 기른다고 해도 공립보육원이나 공립유치원에 들어갈 수 없고 공립소학교와 중학교,고중도 들어갈 수 없게 되여 있다. 1980년대까지는 사립유치원이나 사립학교는 허용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 대상자를 찾으려면 같은 도시에서 찾는 것이 제일 합리한 선택이였다. 나도 이런 사안을 고려하여 합리한 선택을 하려고 중매를 통해서 북경에 사는 조선족 처녀들을(인수가 아주 적고 또한 그중에는 조선말도 모르는 2세들이 있었다) 몇 명 선보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이상적인 파트너를 찾을 수 없었다.
또 그때 당시에는 다른 민족과 결혼한다는 것은 관념상으로 접수할 수 없거니와 고향의 부모형제들이 기본상 동의하지 않았다. 이유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족과의 문화차이가 너무 많고 (언어는 통한다고 할지라도) 생활습관이 잘 맞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조선족 여성들은 여성다운 수양과 매력을 가지고 있으나 한족 여성들은 기가 강하고 남녀평등 의식이 강하여 남편을 남편답게 대우해주지 않는다는 의식이 조선족에게는 특히 남성들의 머리에는 강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북경에서 대상자를 찾기 힘들고 합리한 선택을 하기는 힘들었다. 나이는 먹어가고 기회는 적으니까 고향 연변에서 대상자를 소개받고 결혼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러나 3천리 떨어진 두 곳에서 평생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일본으로 출국유학을 선택한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부부별거 생활에 종말을 지으려는 타산과도 관계된다.
북경이라는 대도시에서 대학강사이니 당연히 좋은 직업이였고 안정되여 있었다. 허나 결혼한 부부가 장기적으로 갈라져 살아야하니 가정생활은 안정될 수 없었다. 그래서 갖은 방법을 생각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시장경제가 중국에서도 침투되기 시작하고 개인(사영)기업이 허용되였으므로 나는 자금을 조달하여 북경에서 안해의 직장으로 식당(레스토랑)을 만들어 주려고 한 때 동분서주 하였으나 여러가지 여건이 잘 맞지않아 결과적으로는 성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대학의 부속 유치원에 보육원으로 넣어서 임시공(비정식직원)으로 한동안 출근하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분배받은 단신숙소(젊은 교원 2명이 한방임)를 잘 조절하여 일단 부부가 한방에서 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다.
대학교원의 생활은 그래도 재미가 많았다. 강의와 학생관리 등 일을 하는 외에도 매주 대학강당에서 무료로 영화를 구경할 수 있고 매주 대학의 공용뻐스로 해군총부의 수영장에 가서 수영도 할 수 있었으며 주말이면 대학에서 주최하는 댄스 파티에 참가할 수도 있었다. 월급은 적었으나(당시돈으로 75원부터 시작되여 4년후에는120원으로 증가됨) 모든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또 대학의 공회에서 계절에 따라 채소나 과일,육류,해산물 등 부식품들을 외지에서 조달해 무료로 공급하였다. 그러니 적은 월급이지만 그것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기에는 충분하였다.
1990년 8월에 북경에서 아시아 운동대회가 열렸는데 한국의 연합뉴스의 기자가 나의 한 친구를 통하여 나를 찾아왔었다. 외국손님이라 중심거리인 왕푸징 일각의 한식 레스토랑에 가서 초대를 했다. 나중에 계산해보니 150원이 나왔다. 내 월급의 두배가 되는 돈으로 외국손님을 접대한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초대도 해보았다.
이것이 북경이라는 대도시의 생활이고, 또한 북경시의 주민이나 직원이 되면 권력의 중심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생활보장과 사회보장을 잘 받고 있다는 것을 그 때에야 리해할 수 있었다. 연길시나 특히 농촌과 비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었다.
4년동안의 대학강사로써 북경시민으로써의 생활을 거쳐 중국의 차별적 사회구조를 가슴깊이 느꼈으나 나에게는 그것을 개변할 방법은 없었다. 정치가의 꿈마저 접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와중에 전세계를 놀래우는 사건이 수도북경에서 또 한번 일어났다. 천안문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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