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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건군90돐기념 기획련재-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1)
◈ 리 함
건군90돐기념 기획련재를 시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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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연변대학 조문학부 재학시절에 조선문학사 강사 리정문선생한테서 1927년 남녘땅 광주봉기에서 100여명 조선족전사들이 싸우다가 희생되였다는 비장한 이야기를 듣고 광주로 달려가고픈 마음을 어찌할수 없었다. 종내 기회가 오고야 말았다. 대학을 마친 이듬해 1983년 5월말, 개자귀나무꽃이 붉게 피는 계절에 남녘땅 광주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였다. 처음 광주에 가는 사람들 치고 양성(羊城)이라 이름 높은 광주시 전경을 눈아래 굽어볼수 있는 월수(越秀)공원을 돌아보지 않으면 유감이라 하지만 나는 선참 광주봉기렬사릉원을 찾았다.
그날이 어제런듯 해맑은 6월 1일. 중국출국상품교역회를 벗어난 광주시내 1호전차는 동으로 동으로 달리였다. 차창밖으로는 사시절 봄과 같은 아열대풍취가 안겨들고 남녘땅에 특유한 오동나무가로수들이 줄달음쳐 왔다가는 소리없이 뒤로 물러선다. 1호전차는 어느덧 중산기념당, 광주농민운동강습소를 지나 광주봉기렬사릉원앞에 멈춰섰다. 때는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83년 여름의 일이였다.
광주봉기렬사릉원은 당년에 봉기전사들이 피 흘리며 싸웠던 시안의 홍화강(红花岗)에 자리잡고있었다. 1954년에 벌써 수건된 이 렬사릉원은 릉원과 원림 두개 부분으로 나뉘여졌는데 전체 릉원 면적은 26헥타르에 달했다. 렬사릉원밖은 그 세월 내 고향 연변에서는 흔치 않은 잘 가꿔진 잔디밭이고 릉원 정문 량쪽은 짙은 민족풍격을 띤 정자지붕형 대형기둥벽으로서 대형기둥벽에는 주은래의 친필로 된 “광주봉기렬사릉원”이란 금빛 글발이 새겨졌다. 대문에 들어서면 휘넓은 광장이다.
광주봉기렬사릉원내의 광주봉기 렬사묘 /2007년 5월 18일 현지촬영
광장량켠에는 뭇꽃들이 다투어 피는 20개의 큰 화단들이 펼쳐지고 측백나무를 비롯한 나무들이 우중충하여 한결 장중하고 숙연한 감을 안겨준다. 광장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푸른 송백속에 모셔진 광주봉기렬사묘가 나타난다. 렬사묘는 옛 황릉들처럼 거대한 하나의 웅위한 묘인데 렬사묘를 둘러싼 콘크리트담장 정면에는 “광주봉기렬사지묘”라고 쓴 주덕동지의 친필제사(题词)가 숙연히 안겨든다. 높은 콘크리트담장에 둘러싸인 기둥체 꼭대기마다에는 앞발을 척 뻗친 40마리 돌사자가 올려져있었는데 렬사묘를 옹위한 그 위용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렬사릉원 안내자의 소개에 따르면 광주봉기에서 쓰러진 용사들이 많은데다가 한데 쌓여 누가 누군지 분간할수 없어 무덤군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이 렬사묘에는 조선족렬사들도 적지 않게 묻히였다고 동을 달았다.
“?!”
나는 일순 할말을 찾지 못하고 정면에서 머리 숙여 묵도하고는 숙연한 기분으로 렬사묘 둘레를 천천히 거닐었다.
(이름 모를 조선족 전사들은 누구누구일가?…)
머리에는 온통 이 생각뿐이였다. 그러면서 두어깨에 지워진 조선족력사탐구자의 책임이 자못 무겁다는것을 새삼스레 깊이 느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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렬사묘를 내려 고색이 짙은 울창한 푸른 송백속을 지나면 넓은 호수속에 2층의 정자지붕으로 된 호수 정자가 나타난다. 호수에서는 천진란만한 아이들과 어린이들이 마침 6.1절이라 명절배놀이를 하고있는 모습들이다. 그 모습들을 지켜보니 저 아이들은 얼마나 복 많은 세대들인가 하는 생각이 북받쳤다.
유람지를 지나 조금 나아가면 푸르른 나무들과 꽃밭속에 잠겨있는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谊亭)”이 시선을 잡는다. 중조인민혈의정은 장방형모양의 2층 정자형으로 되였는데 혈의정 복판에는 거대한 대리석비석이 모셔지고 비석 정면에는 “중조 두 나라 인민의 전투적우의는 만고에 길이 빛나리!”(中朝两国人民的战斗友谊万古长青!)라는 엽검영동지의 금빛 제사가 새겨져 있다. 대리석 비석 뒤면의 비문은 이런 글로 엮어졌다.
1927년 12월 11일, 광주 로동계급과 혁명사병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서 기세 드높은 무장봉기를 단행하였다.
봉기에 참가한 혁명사병들 가운데는 조선청년 150여명이 있었다. 이들은 중국전우들과 더불어 의기(义旗)를 높이 들고 어깨 겯고 싸웠으며 나중에 사하전투에서 진지를 고수하다가 대부분 영용히 희생되였다. 이들은 위대한 무산계급국제주의정신과 두려움 모르는 혁명영웅기개를 표현하였다!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동지들은 영생불멸하리!
중조 두 나라 인민의 전투적 우의는 만고에 길이 빛나리!
중조인민혈의정내 대리석비석, 정면에 엽검영동지의 제사가 씌여져 있다. /2007년 5월 18일 현지촬영
정말이지 숙연한 기분속에서 인차 헤여나오지 못했다. 이 세상에 태여나 20대 후반을 잡으며 그때 그 시각처럼 조선족의 자부심을 느껴본적은 없었다. 남녘땅 광주봉기와 그에 앞선 위대한 북벌전쟁에 수백명에 달하는 조선족전사들이 참가했고 광주봉기에서만 150여명 아닌 200여명이 희생되였다는것은 대단하고도 획기적인 일이 아닐수가 없었다.
그 시각 “중조인민혈의정”을 천천히 거닐다가도 가까이 “중쏘인민혈의정”에도 가보고 민족풍격이 짙은 혈의정 뒤 정자군체의 유람지에도 들어가 보았다. 그 가운데서도 유난히 시선을 끄당기는것은 중조인민혈의정 정자도안으로 된 진달래도안이다. 진달래도안은 중조 두 나라 인민의 친선을 상징하고있었는데 그 의미는 자못 깊었다.
오늘날 진달래는 동북변강의 내 고향 연변에서 자치주 주화(州花)로 높이 받들리고있다. 일찍 30년 썩 전인 1980년대 초반에 남녘땅 광주에서 진달래도안을 흔상하였다는것은 그저 스치고 지날 일이 아니다. 진달래는 조선민족을 상징하고 선렬들의 붉은 피를 상징한다고 할 때, 또 저명한 하경지시인이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라고 읊조렸을 때 50년대 그 세월 진달래도안 설계자와 결책자들에게 머리가 수그러지지 않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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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조인민혈의정”에로 다시 돌아오면 혈의정 중심정자 량켠엔 각기 L자형 길다란 랑하와 정자가 있어 휴식의 한때를 보낼수 있다. 혈의정앞 작은 인공못에는 갓 피여난 소담한 연분홍 련꽃-수련송이가 물에 동동 떠있고 분수는 반공중에 새하얀 포물선을 그으며 인공못에 이채를 더해준다.
정녕 잊지 못할 광주봉기렬사릉원이였다. 허나 대학을 마친지 얼마 안되는 나로서는 위대한 광주봉기와 우리 겨레 전사들에 대해서 깊은 연구와 자료가 따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렬사묘 아래에 자리잡은 광동성혁명렬사박물관을 찾아 해당 연구일군들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박물관의 일군들은 내가 머나먼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왔고 조선족이라고 소개하자 대번에 엄지손가락을 내들며 “당신들 조선민족은 대단한 민족!”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 중년을 잡은 한 녀성연구일군은 중조인민혈의정 대리석 비석에는 조선청년 150여명중 거의가 희생되였다고 씌여있지만 계속되는 연구에서 보면 희생자가 200명을 넘어선다고 조용히 말하였다. 그러면서 그 녀성은 박물관내 한 진렬대로 안내하였다. 진렬대 유리안에는 한 조선족전사가 사용했다는 막심기관총이 진렬되여 있었는데 이름도 모를 그 전사는 광주쏘베트정부와 총지휘부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하여 이 막심기관총을 휘두르며 적진에 돌입하여 적들을 무더기로 쓰러눕혔다고 한다. 그리곤 자기의 나젊은 생명을 바쳤단다.
이야기 도중 중년녀성이 특히 마지막까지 사하를 지켜서고 철거를 엄호한것은 조선사람들로서 광주봉기연구에서 조선족은 주요한 연구대상이라고 이야기 할 때 나는 눈굽이 찡 젖어들었다. 그때로부터 나의 조선족연구의 한 주요과제는 북벌전쟁과 광주봉기로서 관련 론문이나 소개글들을 해당 학보나 조선문 신문, 잡지들에 발표하여 조선족사회에 광주봉기와 조선족을 널리 알려왔다.
더우기 광주봉기 61돐 기념일을 맞으며 1988년 12월 10일부 《길림신문》 제3면에 “광주봉기에서의 조선사람들” 장편글을 실었는데 편집부를 대신하여 쓴 “편집자의 말”에서 필자는 광주봉기와 조선족을 이렇게 개괄하였다.
12월 11일은 광주 봉기 61돐 기념일이다.
위대한 광주봉기에 200여명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참가하였는데 그들은 조선본토와 동북, 쏘련 연해주, 모스크바, 일본 등지에서 모여든 20대의 열혈청년들이였다. 거개가 이름있는 정치, 군사, 활동가들인 그들은 1919년 조선 3.1 운동전후 일제의 기반에서 조국을 구하고저 중국에 모여든 당년의 조선혁명의 선구자들이였으며 중국에서 활약한 조선인들의 정화(精华)였다.
애석한것은 철퇴의 명령을 제때에 받지 못하여 봉기에 참가한 우리 겨레 200여명이 남녘땅에 쓰러졌다. 그후 중앙쏘베트구역에 조선동지들이 희소했고 2만 5천리 장정에 참가한 조선인이 10여명밖에 안된것은 그번 봉기에서 조선인 혁명선각자들 거개가 희생된데 기인될것이다.
중국의 절반땅을 누빈 위대한 북벌전쟁에 우리 겨레 수백명이 참가하였고 남녘땅 광주봉기에서 우리 겨레 200여명 혁명자들이 장렬히 붉은 피를 뿌렸다. 이는 세인들앞에서 너무나도 떳떳이 납함할 겨레의 긍지와 자랑이다.
아마 신문지면으로 처음 상세히 소개되는 광주봉기 글이 진동이 꽤나 되는 모양이였다. 연변력사연구소 시절인데 《길림신문》 편집부를 통하여 문의하거나 감사하다는 전화나 전갈이 가끔 전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큰 위안을 느끼군 하였다.
광주봉기렬사릉원내에 있는 중조인민혈의정 /2007년 5월 18일 현지촬영
력사로 보아도 1927년 12월 11일 이른새벽에 폭발한 광주봉기에는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던 수백명 조선민족전사들이 참가하였었다. 조선인 김규광이 당책임자로 있던 교도퇀 제2영 제5련은 모두가 조선동지들로 이루어졌다면 황포군관학교 특무영의 200여명 전사들중에도 조선민족전사가 150여명이였다.
또 광주봉기 폭발을 앞둔 력사적인 시각에 교도퇀 사령부에서 봉기동원 연설과 전투과업 포치가 있을 때 모스크바 홍군대학을 졸업한 조선인 리용이 교도퇀의 새 퇀장(엽검영이 홍군 부총지휘로 되였음) 엽용의 군사정치고문 즉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하다. 광주봉기 주력부대인 교도퇀의 참모장이 우리 겨레라는 말이다. 이에 앞서 정규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조선인들이 국제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각 봉기부대의 군사참모, 포병지휘관, 포사격수, 기관총수로 활약하고있었다. 교도퇀 각 중대와 소대의 당대표들중 조선인 공산당원들이 적지 않았다. 군벌 장발규경위퇀의 조선인 공산당원 문손적, 김형평 등은 중국인 전우들과 함께 대부분의 관병들을 광주에로 이끌었다.
12월 4일, 중공광동성위 서기 장태뢰가 광주시내의 황화강(黄花岗)에서 교도퇀내 공산당원 활동분자회의를 열고 무장봉기의 의의와 교도퇀이 짊어져야 할 과업에 대해 피력할 때도 양달부, 김규광, 리용, 박영, 김은혁, 리빈 등 수십명 조선인 공산당원들이 참가했으니 조선동지란 존재는 광주봉기에서 특수한 의의를 띠였다.
12월 13일, 철퇴하는 봉기주력부대의 엄호를 특무영의 조선동지들이 맡았는데 그들은 사하에서 싸움을 벌리였다. 그러던 이들이 한때 사하를 점령하였으나 철퇴명령을 받지 못하여 끝내 우세한 적들에게 포위되고말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봉기사령부에서는 철퇴중에 그들을 잊고 련계하지 못했던것이다. 하여 특무영의 150여명 조선동지들이 희생되는 비극을 초래한것이다. 결과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족전사는 도합 200여명이나 된다.
당년 중국에서 활약한 조선족들의 정화가 광주봉기에서 쓰러졌다는 말이 되겠다. 이런 고로 광주봉기렬사릉원에 이르면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나도 례외가 아니다. 더우기 광주봉기렬사묘와 중조인민혈의정에서 1년이고 2년이고 서있고만 싶은 심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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렬사릉원은 진정 아름다운 유람지로, 행복의 락원으로 꾸려졌다. 명절의 분위기로 차넘치는 6.1절호수가에는 붉은넥타이들이 환락에 들끓고있었고 어린이들을 태운 놀이배들은 잔파도 일으키며 앞으로 미끄럼치고있지 않는가. 그날 6.1아동절 렬사릉원에서 어떻게 중조인민혈의정에서 발길을 떼였고 어떻게 렬사릉원 정문을 나섰는지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머리속에 온통 광주봉기 아니면 조선동지들이였으니 그렇게 된것 같다.
남녘땅 광주봉기렬사릉원, 이 렬사릉원을 다녀온지도 어언 35년이 지났다. 그 사이 강남 절강에 가서 대학교편을 잡던 2007년 5월 두번째로 광주봉기렬사릉원을 찾아보았다. 그후도 광주봉기와 홍1군단 참모장 양림, 홍군음악가 최음파 등 연구차 광주봉기렬사릉원에 수차 다녀왔다. 35년전이나 몇해전이나 광주봉기렬사릉원 구내는 정문입구 구내에 유람물들을 좀더 늘였을뿐 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광주봉기렬사묘나 중조인민혈의정은 여전하였다.
어찌 잊으랴, 광주봉기렬사릉원을ㅡ
어찌 잊으랴, 광주봉기에서 쓰러진 우리 겨레들을ㅡ
마음은 늘 젊음에 넘치던 그시절, 그후도 수차 찾아본 광주봉기렬사릉원 옛터로 달려간다. 그러면 광주봉기 우리 민족의 영웅전사들과 맘속대화를 주고받는다.
2017년 1월 17일 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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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공원님 보고 싶네요. 언제쯤 만날수 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