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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22)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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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1월 25일부터 12월 3일까지의 상강전역을 보면 광서 흥안과 전주 사이의 상강과 그 부근에서 벌어짐을 보이였다. 그러나 상강은 그 발원지를 흥안현의 백석향(白石乡) 경내에 두고 있기에 흥안과 전주 사이의 강폭은 그리 넓다고 볼 수 없다. 상강전역 3대 저격전의 하나인 광화포저격전의 경우를 보아도 이 고장의 계수나루터는 본격적인 우기가 아닌 이상 강폭이 호남 경내를 흐르는 상강에 비하여 현저하게 좁은 편이다. 그래서 나는 택시운전사와 잠간 대화를 주고받았다.
“계수나루터 구간 상강보다 더 넓은 구간의 상강전역 관련 상강을 보고 싶은데요.”
“당년의 상강전역은 3대 저격전 외에도 여러 도강점들을 갖고 있지요. 봉황취 구간도 하나의 홍군 도강점인데 이 구간의 상강이 꽤나 넓어요.”
“와아-그래요?!”
계수나루터 답사 이후 전주현 봉황향 화평촌(和平村) 구간 봉황취(凤凰嘴) 답사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봉황취는 계수 구간 광화포저격전 현지에서 북으로 6키로메터 쯤 되는 거리로서 이 구간 상강은 계수나루터 구간 상강보다 강폭이 훨씬 넓어보였다. 그만큼 그제날 이 구간에서의 중앙홍군의 상강 강행도하는 적정이 없다 해도 보다 어려울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렷다.
광서 전주현 봉황향 화평촌 봉황취 구간의 상강과 옛 홍군 도강 나루터
인상적인 것은 봉황취 구간 상강에는 다리가 없어 모든 차량과 사람들은 상강을 오가는 특정된 배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라 할가. 차량 몇대와 소소한 동력차들 그리고 약간의 사람들이 오가는 특정 배에 오르는 모습이 시야에 안겨드는데 그 움직이는 속도가 아주 느리여 이곳 상강을 한번 넘나드는데 시간이 꽤나 소요될 것으로 보였다.
지금까지 봉황취 구간 홍군 도강점으로 중앙홍군의 어느 홍군부대가 도강하였는지를 모른다. 어찌하든 ‘좌’경로선의 지배로 움직이는 우리 홍군대오가 홍군 장정길 상강전역이란 이 국민당군의 제4봉쇄선에서 3만여명이란 엄청 희생을 내여 너무나 통분할 뿐이다. 광화포저격전, 신우저격전, 각산포저격전은 물론 봉화취 홍군 도강점을 비롯한 거구(渠口), 대평(大坪), 병산도(屏山岛) 홍군 도강점도 례외일 수가 없지 않는가.
상강에 너무나 심취됨은 상강이란 이 강이 이곳 흥안현에서 발원하여 광서 최북단을 흐르다가 호남성의 최대 하류로 되여 나중에 악양시 경내에서 동정호에 흘러들기까지 장장 840여키로메터라는 데도 있겠지만 주되는 흥미는 상강을 보다 리해함으로써 홍군 장정길 상강전역에 대한 전방위적 리해를 보다 깊이하자는 데 있었다. 그래서 상강을 보면 상강전역을 깊이 떠올리게 되고 상강을 보면 중앙홍군대오, 그 대오 속의 무정과 양림을 더더욱 떠올리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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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현 경내 봉황취 홍군 도강점을 지난 택시는 303성도(省道)에서 점차 322성도로 달림길을 바꾸더니 관양현 경내 신우저격전 현지를 바라고 달리고 달린다. 이 구간 길은 6월 8일 오후 현지답사길에서 가장 먼 길로서 달리고 달리여도 답사의 목표가 쉬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죽하면 지력장애로 철부지에 지나지 않는 아들애가 “야, 멀기도 멀다!”고 할가.
어느덧 택시는 그닥 높지 않은 구릉지대를 넘나 싶더니 미끄러지듯 경사도가 느린 내리막길에 들어선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던지 저 앞 큰길 오른쪽가에 집채 같은 커다란 건물체가 보인다. 목적지에 이른 것 같더니 건물체 부근 큰길가에 이르러 택시는 오른쪽 넓은 공지로 떨어진다. 과연 우리가 바라는 신우(新圩)저격전 현지요, 주해정(酒海井) 홍군렬사기념비가 일어선 구간이였다.
관양현 서북부 도로가에 위치한, 신우저격전 현지에 새로 일어선 웅장한 홍군렬사묘.
택시에서 내리자 커다란 건물체로 보이던 건물은 하나의 웅장한 홍군렬사묘였다. 홍군렬사묘는 붉은 오각별이 박힌 홍군모를 떠이고 우뚝 일어섰는데 그 정면에는 검은 판에 붉은 글씨로 된 ‘홍군렬사 영생불멸’(红军烈士永垂不朽)이란 중문 여덟자가 씌여져 숙연한 기분 속으로 이끈다. 내가 홍군렬사묘에 여념없을 때 택시운전사가 다가왔다.
“이 홍군렬사묘는 근래 새로 일떠선 거구요. 원 홍군렬사기념비는 저쪽에 있어요”
택시운전사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홍군렬사묘 앞 넓은 공지를 이룬 안팎 한켠에 세워진 지도 오래여 검실검실한 ‘홍군렬사기념비’가 보였다. 보매 신우저격전에서 희생된 홍군렬사들을 기리는 기념비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홍군렬사기념비 앞에는 제사대가 마련되여 제사를 지낸 지 얼마 되지 않는 흔적이 그대로 나타났다.
원 홍군렬사기념비를 배알한 후 다시 새로 일어선 홍군렬사묘로 돌아왔다. 선전란을 이룬 홍군렬사묘 앞 전망도를 보니 홍군렬사묘 주위와 렬사묘 앞 넓은 공지는 엄청 큰 규모로 일떠설 전망이였다. 하다면 이곳 관양현에서 어이하여 전망이 엄청 밝은 홍군렬사묘 군체를 건설하고 있을가? 이를 알자면 그제날 상강전역 신우저격전의 자초지종을 개략적으로나마 알고 지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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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는 광서 관양현(灌阳县) 서북부에 위치한 고장으로서 남으로 관양현성과 15키로메터 떨어져 있다. 상강 도하점과의 거리는 30~40키로메터로 헤아려진다. 관양에서 전주(全州)로 통하는 도로가 신우를 지나는데 홍군이 거치게 되는 서진로선(西进路线)의 최단거리인 대교촌 고령두(大桥村古岭头)와의 거리는 5키로메터 정도로 나타난다. 신우 이북으로부터 상강가까지는 모두 평탄한 지구라지만 신우와 그 이남 지대의 마도교(马渡桥)까지 10키로메터 되는 도로 량측은 구릉지대이고 초목이 무성하여 저격지대로서는 제격이였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홍군 서진로 저지를 막고 북상하는 관양현성 쪽의 적들을 물리치고저 홍3군단 제5사에 명령하여 마교도를 지키면서 적들을 신우 이남으로 막아내도록 하였다.
홍3군단 제5사 사장 리천우(李天佑)와 정위 종적병(钟赤兵)은 14퇀 15퇀 그리고 무정이 지휘하는 군위포병영 도합 3900여명을 이끌고 11월 27일 오후 4시 쯤에 계림군 먼저 신우에 나타났다. 신우와 그 남쪽 도로 량켠 산지대는 신속히 홍군의 점령지로 되였다. 잇달아 계림군 정찰련과의 조우전도 벌어지고 신우 쪽에 투입된 국민당 계림군은 7개 퇀 병력으로 알려졌다. 계림군의 주공부대는 계림군 제15군 44사로 나타났다.
신우저격전 현지에서 그닥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신우저격전진렬관
앞에서도 스치고 지났지만 이미 신우와 그 일대에 나선 홍3군단 제14퇀과 제15퇀은 관련 진지에 이르러 신속히 공사를 수축하면서 싸울 준비를 다그쳤다. 아군의 앞은 전주 쪽에서 관양(灌阳)으로 이어진 도로여서 적들이 상강 대안에 접근하자면 꼭 이 길을 거쳐야 했다. 도로 량켠은 구릉지대이고 수풀이 무성하여 매복하기가 좋았다. 홍14퇀은 좌익에 매복하고 홍15퇀이 우익에 매복하였다. 작전포치를 끝낸 아군은 정찰병을 파견하니 광서군 제7군 2개 사가 아군과 약 20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아군은 3~4일 간을 견지하면서 적군의 진공을 막아내야 하였다. 이럴 때 진지매복중인 홍 14퇀과 15퇀이 사수장으로부터 무정이 이끄는 군위포병영이 함께 싸우게 된다는 희소식을 알리였고 2개 퇀의 장병들은 적들을 물리칠 신심이 보다 굳어졌다.
적들은 도로를 따라 신우(新圩)를 바라고 달려들었다. 적들이 매복권 내에 들어서자 아군은 일제히 몰사격을 퍼부었고 서로간의 맹렬한 사격과 포격 연기로 적아전선마저 가려보기 어려웠다. 홍15군 제1영 장병들이 진지의 제일 앞에서 치렬한 싸움을 벌리면서 달려드는 적 1개 영의 진공을 물리쳤다. 옹근 영, 옹근 퇀의 적들이 아군의 진지 앞에 나타나자 조선인 무정이 지휘하는 군위포병영의 대포와 박격포가 포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포탄의 포격소리, 수류탄 작렬소리가 적진을 여지없이 들부셨다. 적들도 만만치가 않아 적기까지 무시로 폭격을 들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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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아간의 일대 격렬한 싸움이였다. 혼비백산한 적들은 무리로 쓰러지고 사상이 막심하여 내 꼴 봐라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아군의 보병들은 이때라고 보총, 기관총 소사를 들이대여 적들을 쓸어눕히였다. 첫날 전투에서 광서군 제7군 2개 사의 적들은 거듭 진공을 들이대다가 거듭 격퇴당하였다. 아군 진지 앞은 온통 적들의 시체로 덮였다. 아군도 극심한 희생을 내였다. 적아간의 싸움이 얼마나 가렬처절하였는가는 신우저격전 현지의 홍군렬사묘와 얼마 떨어진 관양현성 쪽 신우저격전진렬관 ‘홍군렬사영명록’(英名录)에서도 잘 알려진다.
신우저격전진렬관 구내는 역시 도로가이고 상강전역 첫 총성 석비, 신우저격전을 형상화한 군체 돌조각상, 신우저격전진렬관 등으로 구성되여 있다. 진렬관 입구 왼쪽가에는 ‘중국로농홍군 만세’ 글발이 새겨져 인상적인데 크지 않은 진렬관 내에는 신우저격전을 알리는 여러 사진과 문자설명, 실물들과 더불어 ‘홍군렬사영명록’을 전문 배치하여 보다 깊은 인상을 안겨준다. 영명록에 나타나는 하나하나의 홍군장병들 희생자 이름이 신우저격전 가렬처절함에 대한 가장 어울리는 대답이라고 보아진다.
신우저격전진렬관 구내 홍군의 전투모습을 형상화한 군체 돌조각상
신우저격전진렬관 내 홍군렬사영명록을 보면 홍6군단 홍군 희생자들도 일부 보이지만 그 거개가 홍3군단 홍군 희생자들로 밝혀져 있다. 11월 30일 오후 3시에 홍3군단 제6사 18퇀이 신우저격전 진지를 바꾸어 나섰다지만 그 때는 이미 제5사 참모장, 14퇀 퇀장, 부퇀장, 참모장, 정치부주임이 희생되고 15퇀 퇀장, 정위와 14퇀 정위가 중상을 입고 영 이하 간부 대부분이 희생되였었다. 신우저격전에 뛰여들 때 제5사는 3,000여명이였지만 신우저격전 진지를 물러설 때는 부상병들까지 하여 1000명을 웃돌 뿐이였다.
밤낮 3일 간의 격전에서 홍3군단 제5사 홍 14퇀과 15퇀은 도합 2000여명의 상망을 내였으니 그 손실은 막심하였다. 진지를 바꾸어 나선 홍6사 제18퇀의 손실도 극심한 형편이였다. 무정이 이끄는 군위포병영의 사상에 대해서는 알려지는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부부는 신우저격전진렬관을 돌아보면서 마음이 더없이 무겁기만 하였다. 밖에 나와서 신우저격전 홍군장병 군체 조각상이며 신우저격전 첫 총성 석비며를 다시다시 답사하면서도 마음은 개운하지가 못하다. ‘좌’경로선 지배하의 중앙홍군은 전체 상강전역에서 신우저격전의 희생을 망라하여 도합 3만여명의 손실을 내였으니 그지없이 통분하기만 하다.
신우저격전진렬관 구내 신우저격전 첫 총성 안내비 /이상 사진 2017년 6월 8일 현지촬영
그 때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하여보았다. 만약 상강전역에서의 첫 총성으로 되는 신우저격전에 무정이 지휘한 군위포병영이 참가하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가. 이것이 사실이였다면 신우저격전에 나선 홍3군단 홍5사의 손실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판국이였을 것이다. 그러면 무정과 군위포병영이 신우저격전에서 불멸의 위훈을 세웠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 아닐가.
무정, 중국로농홍군의 이 고급장령이 광서 흥안현성의 상강전역기념관에 한장의 사진으로 올려짐은 이같은 결과에 기인된다. 그 한장의 사진은 무정이란 이 국제주의 전사를 중국혁명사의 하나의 거룩한 기념비로 떠오르게 하였으니 사람들은 어제도 오늘도 상강전역 여러 현지와 상강전역기념관을 찾고 또 찾는다. 그럴 때면 무정의 사진은 조선인 국제주의 전사라고 알리고 또 알린다.
2017년 6월 13일 광서 계림에서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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