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에서 있은 흘러간 역사사건 치고 3.13반일운동처럼 이땅을 들썽한 역사사건은 없을것이다. 1919년 3월 13일에 벌어졌던 2만여명(혹은 3만여명) 군중이 참가한 그번 반일운동은 천지를 진감하며 어언 85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제날 부른 3.13독립만세소리는 오늘도 귀전에 들리는듯싶다.
며칠전 필자가 85년전의 만세사건으로 선참 찾은곳은 용정시중심유치원이다. 이 중심유치원마당 한쪽에 커다란 자연석으로 된 기념석비가 세워졌는데 석비정면에는 한자로 《서전대야(瑞甸大野)》라고 새겨졌고 석비 뒤면에는 《1919년 3월 13일 연변인민 3만여명이 이곳에서 회집하여 반일대회를 거행하였다. 1995년 4월 15일 용정 3.13기념사업회》라는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용정시 중심유치원자리는 당년 용정촌 천주교교회당 자리이다. 3.13반일집회의 시작을 선고하던 역사의 종소리는 바로 여기에서 울리였는데 이 종소리에는 한 홍안소년의 진실한 이야기가 깃들어있다.
85년전의 3월 13일 그날 정오가 가까와오자 이곳 회장은 점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용정촌의 조선인은 물론 부근 100리안팎의 달라자, 개산툰, 평강벌 각지의 학생들과 남녀로소가 모이다보니 상부국 동산기슭엔 어느덧 2만여명의 군중이 모이였다. 그들속에는 320명의 학생충혈대와 국자가 도립중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1,000여명의 《자위단》단원들이 들어있다. 대오에는 일본간도총령사관 소속 간도보통학교의 200여명 남녀학생들도 섞이였다. 그들은 학교당국의 엄한 저애에도 불구하고 문을 박차고 나와 철조망담장을 짓부셨는데 일본인교장은 《10년교육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애탄해마지않았다.
그날 대회소집은 천주교교회당 정오 종소리를 계기로 시작하기로 약속되였다. 이 소식에 접한 맹부덕퇀장과 상부국국장 장은적은 교회당 일체출입을 엄금하라고 교회에 알리였다. 용정촌의 반일지사 김일룡 등 3명이 장은적을 찾아 도리를 따졌지만 막무가내였다. 김일룡이 단신으로 교회당에 찾아가 보았으나 꾹 닫긴 교회당의 문은 좀처럼 열릴줄 몰랐다.
헌데 정오가 좀 지나자 대회시작을 알리는 교회당의 종소리가 대회참가자들의 마음마음을 흥분시키며 《땡, 땡》 울려퍼지지 않겠는가.
이게 웬일인가, 김일룡은 벙벙해지고말았다. 그 시각 그는 우리 조선족항일투쟁사의 한개 기원으로 되는 이 역사의 종소리가 나어린 두 소년에 의해 울리였음을 상상할수도 없었다.
그날의 소년이고 3.13목격자이며 원 연변대학 전임 부교장이였던 림민호선생은 후에 이렇게 회억하였다.
—나는 그해에 15살밖에 안되는 소년이였다. 우리 집은 바로 용정촌 천주교교회당 울안에 있었고 아버지는 그 교회에서 심부름을 하였다. 이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바삐 먹은후 동네의 다른 한 동무와 함께 교회당종루로 올라가 숨어있었다. 거의 정오가 될 때 우리는 국자가, 투도구 방면으로부터 용정을 향해오는 대중대렬을 구경하며 대회장의 정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대회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대회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나는 같이 구경하던 동무와 함께 종루의 종을 번갈아가면서 힘껏 쳤다. 종소리는 천공과 사변에 련속 울려퍼졌다… 우리 둘은 계속 종을 울렸던것이다. … 그때 종을 울린것은 우리 둘이였는데 우리는 누구의 지시를 받은적도 없었다. 그저 대회의 선포를 독촉하기 위한것이였다.
우연이라할가, 그 누구의 지시도 없이 오직 홍안소년의 호기심과 갈망으로부터 울려퍼진 역사의 종소리는 수천수만 대회참가자들의 부푼 정열을 안정시키고 연변 각지에서 모여든 우리 겨레들을 본세기 10년대 우리 민족투쟁사에서 가장 뜻깊은 반일집회개막식에로 이끌었다.
그날 3.13반일집회는 김영학, 구춘선 등 33명 대회조직자측에 의해 종루의 종소리와 함께 시작되였다. 대회가 끝나자 성세호대한 시위행진이 열을 올리였는데 시위군중과 군경들사이엔 일대 충돌이 벌어졌다. 결과 어지러운 총소리속에서 10명 투사가 당장에서 숨을 거두고 2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튿날 제창병원 치료도중 또 4명 투사가 숨을 거두었다. 그중 한 투사는 《죽는것은 아깝지 않으나 일본 사람의 손에 죽지 못한것이 한이로다!》라고 유언을 남기였다.
3월 13일 오후 대회해산후 조직자들은 구춘선, 강봉우 등 5명 대표를 국자가에 파견하여 연길도윤공서에 엄정한 항의를 제기하였다. 그날밤 국자가로 전이한 대회조직자들은 적암령에 모여 김영학을 회장으로 하는 《국민의사회》를 조직하고 17일에 국민장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이에 연길도윤공서와 용정상부국과 교섭하여 상부지구역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동의를 얻어내고 장례의 순조로운 진행을 담보하였다.
3월 17일, 3,000-4,000명의 군중들이 제창병원 마당에서 14의사의 장례식을 장중히 가지였다. 오후 1시에 출빈행렬은 《조선독립수난자》라고 쓴 만장을 앞세우고 상여를 모시고 용정촌 동남쪽 4리가량 떨어진 합성리동산묘지로 서서히 향하였다.
오후 3시에 장례식이 끝나자 렬사들 묘지앞에는 나무로 정성껏 만든 묘패가 세워지고 그앞에 《충렬사제공지묘(忠烈士诸公之墓)》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14렬사로는 박상진, 정시익, 공덕흡, 김태균, 김승록, 최일선, 리유주, 김흥식, 박문호, 리요섭, 장학관, 현봉률, 현상지, 차정룡이였다.
그후 3.13에서 중상 입은 투사들중 김병영, 채창헌, 김종묵 등 3명이 또 희생되다 보니 용정 3.13반일운동에서 희생된 렬사는 도합 17명이나 된다.
1919년 7월, 간도국민회에서는 연길현 명월구에서 상해림시정부에서 17명 렬사유가족들에게 드리는 포충장(褒忠状)전달의식을 가지고 조선독립을 위해 목숨바친 17명 렬사를 추모하였다. 1945년 8.15후 용정과 국자가의 해당인사들은 연변인민의 이름으로 용정 합성리묘소에서 17명 렬사의 위령제를 지내고 렬사들에 대한 추모의식을 가지였다.
돌이켜보는 당년 용정촌 3.13반일운동의 편단들이다. 용정촌 천주교교회당 답사에 이어 필자는 용정시가지에서 남으로 4리 좀더 떨어진 합성리묘소에 자리잡은 3.13반일의사들을 찾았다.
3.13반일의사들은 용정—삼합행도로표식 2킬로메터 동남쪽부근 길가에 위치, 3.13반일의사릉 반형은 떠다심은 소나무로 둘러싸이고 13묘소가 두줄로 배렬되였다면 그 중앙엔 《3.13반일의사릉》이라고 한자로 새긴 대리석기념비가 옹위되여있었다. 기념비뒤면에는 비문과 함께 상기 17렬사와 허준언, 원인선까지 도합 19명 렬사의 이름이 새겨졌다. 아무튼 3.13렬사를 두고 17명설과 19명설이 공존해있으니 어느 한 설이라고 딱히 지적하기 어려운것도 사실이다.
필자는 기념비 뒤면의 채창헌이름에 깊은 주의를 들리였다. 한것은 최근 몇달사이 채창헌렬사의 유가족이 필자를 찾아 역사해명을 부탁했기때문이다. 최근에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채창헌렬사의 유가족 채경옥녀사를 찾게 되고 취재하는 가운데서 채창헌의사의 가족래력을 다소 헤아리게 되였다.
채창헌렬사는 오늘의 화룡시 동성진 응진촌사람이다. 20세기 10년대는 연길현 수신향 오도구 흥영촌으로 통하였다. 채경숙녀사는 올해 76살로서 1929년생인데 녀사의 친할아버지 채창묵은 채창헌의 맏형이였다. 채창묵은 오도구에서 서당툰장으로 있었고 아래 채인묵, 채창호, 채창헌 세 동생을 두었다. 즉 4형제였는데 채창헌렬사는 형제중 막내로서 장가도 못간 총각으로 있다가 3.13에서 희생되였다. 렬사의 셋째형 채창호는 반일활동에 종사하다가 로씨야 연해주로 간 뒤 종무소식이고 둘째형 채인묵은 종적을 알수가 없다.
채경숙녀사의 친할아버지 채창묵은 광복전에 당지에서 사망, 슬하에 7남매를 두었다. 헌데 험악한 세월에 차례로 여섯이 죽다보니 채경숙녀사의 아버지 채경천 하나만 생존, 지금은 저 세상사람으로 되였다. 지금 채경숙녀사는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 현철수(1955년생)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재직중이고 딸 현옥희(1993년생)는 연변주 당학교 법률학부 학부장으로 뛴다.
채경숙녀사를 통해 헤아린 채창헌의사의 가족형편과 유가족실태이다. 해당자료를 보면 채창헌은 당년 연길현 수신향 오도구사람이다. 그는 천주교계통에서 꾸린 당지 사립경애학교 교사로 근무했는데 이에 앞서 그는 철혈광복단성원으로서 와룡동 창동학교 교원인 박문호 그리고 림국정, 최봉설, 최일선 등 철혈광복단성원들과 함께 리동휘가 꾸린 라자구사관학교에서 공부했었다. 용정 3.13반일운동때는 박문호, 최일선 등과 함께 희생을 각오한 충렬대의 지휘자로 뛰다가 적탄에 맞았고 1919년 3월 17일부터 3월 22일사이 불행히 희생되였다.
알고보면 용정 3.13반일운동에서 쓰러진 17명(혹은 19명) 렬사가운데서 유가족을 찾은것은 몇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채창헌도 그 유가족을 찾기전엔 가족관계를 알수가 없어 지금껏 렬사전기를 정리하지 못하고 응당 받아야 할 렬사 등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필자의 눈길은 내내 채창헌렬사의 이름에서 떠날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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