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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화산서 알게 된 양명선생
세월은 류수와 같다더니 지장보살 찾아 안휘 구화산에 다녀온지도 어언 옹근 2년철이 흘렀다. 구화산행에서 고대 우리 겨레 지장보살—김교각님의 발자취를 추적답사한것이 엄청 성과라면 지장보살님을 존중하면서 구화산에 두번이나 올라 동암안좌에서 지장보살님 안좌기도를 그대로 몸소 행한 명나라 시절 대성현 왕수인—양명선생을 알게 된것도 엄청 성과라 하겠다.
북방사람인 내가 생소하기만 했던 옛 강남사람 왕수인—양명선생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한것은 2007년 7월 초 지장보살—김교각님의 발자취 좇아 안휘 구화산으로 갔을 때였다.
구화산을 찾은 이튿날 7월 10일, 나는 첫 스케줄을 화성사 동쪽의 동애선사부터 잡아두고 산아래서 관광전동차에 앉아 산우로 올라갔다. 전기로 끌어올리는 관광전동차여서 아츠랗게 보이는 산비탈길을 12분만에 끝내주었다.
희한한것은 상승고도가 높아지면서 짙은 안개가 바닥쪽으로 몰려가는것이라 할가. 삽시간에 비행기에 앉아 구름우에 오른듯 산아래 경치가 죽여준다. 산의 정상 “백세궁”에 이르자 나는 지체할세라 동쪽의 깊은 골짜기며 바깥산을 일별했는데 안개가 골짜기를 덮어주는 경치는 그야말로 신선세계였다.
아뿔싸, 부지런히 디지털사진기 셔터를 누르는 사이 짙은 안개가 다시 산천을 덮어버린다. 시무룩해진 나는 안개 흐르는 운무속에 나 자신을 내맡기다가 산의 정상 따라 남쪽의 동애선사로 발걸음을 터벅터벅 옮겨놓는데 사방으로 10여메터밖에 보이지 않는 안개는 도무지 걷힐줄 모른다. 어쩔수 없이 안개속 산정의 바위우 동애선사요, 지장전이요 발가는대로 돌아보다가 동애선사 층계아래 어구에 세워진 “동암안좌”소개표를 보고 발길을 멈추었다. 소개표에는 분명히 “김지장님이 처음으로 구화산에 와서 늘 암두(巖斗)에 앉아 경을 외우면서 경치를 감상”하였다고 씌여있었다.
“석굴이라, 안좌라……”
불현듯 나의 시야에는 동애선사 바위아래 서쪽가 석굴에서 도를 닦다가 여기 반석같은 기반석에 올라 계속 경을 외우면서 사방경치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김지장님이 보이는듯 싶었다.
“그러면 그렇겠지, 구화산에 오른 내가 동암에서 퉁을 맞을수야 없지!”
흥분에 잠긴 나는 동애선사가 자리잡은 바위 아래우를 깐깐히 훓어나갔다. 동애선사가 바위우공간을 다 앗아간데서 동애안좌의 참모습을 볼수없음이 안타까왔으나 동애안좌는 거대형 바위로 이루어졌고 남쪽가에서 볼 때 불쑥 하늘에 치솟은 기암괴석이요, 북쪽가에서 볼 때 점차 경사져 돌을 가득 채워올려 넓은 평지를 만들고 동애선사를 일떠세웠다는 정도는 알아낼수 있었다.
뒤늦은 발견은 나를 흥분의 절정에로 떠밀어올렸다. 안내패말에는 “동암은 절벽위에 우뚝 솟은 하나의 거석으로 창룡이 머리를 쳐들고 있는듯한 모양과 흡사, 암벽이 치솟은듯한 자세를 하고있다.”고 밝히였는데 동암의 남쪽가에서 바라보는 동애안좌는 과연 이 모습이요, 동쪽기슭에서의 동애안좌는 수십길 높이를 이루는 절벽강산이였다. 동애의 여기저기를 눈주어보니 유독 동애안좌구간만이 하늘에 떠오른 바위무리인데 이런 절경을 선택해 도를 닦으며 안좌하신 김지장님이 그지없이 우러러 보인다. 김지장님의 이런 모습을 상상하여 청나라때 한 시인은 시 “동암”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나 홀로 구름우에 올라서니
동암이 뭇봉우리보다 기이하구나
안개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참모습
하늘에 핀 련꽃과 흡사하거늘
밀림속에 금빛과 푸른빗 현란한데
멀리서 종소리 은은히 들려오누나
위인이 안락히 앉아있으니
어찌 신선과 흡사하지 않으랴.
동암우에 안좌하여 열심히 경을 읽는 김지장님의 참모습을 신선에 비유한 그럴듯한 시이다. 나는 시속경지에 완전히 빠져들고말았다. 안개속 거니는 나도 시인의 감수 그대로이며 서쪽가 수직바위에 새겨진 운승방(雲昇方), 비신처(飛身處), 운심처(雲深處) 모두가 안개속 운무의 경지를 가리키고있었다.
해당자료를 보면 동암선사는 구화산 중봉의 정상에 우뚝 솟아 올랐는데 해발은 871메터를 기록했다. 당나라 때 김지장님이 신라에서 구화산에 이르러 동암에 안좌하여 경을 읽거나 사방경치를 바라보며 “비신처” 등 거룩한 발자취를 남긴 력사의 고장이다. 이런 성스러운 고장을 두고 명나라때 사찰이 일어서고 청나라에 이르러 대웅보전, 만불루, 지장전 등으로 크게 확건되더니 1933년에 의외의 화재로 훼멸, 1995년에 다시 수건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것이 쭈욱 펼쳐진다.
나는 동애선사 최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가 동쪽가 벽을 채운 “동애력대시선”들을 오래오래 눈박아보았다. 1200여년전의 김지장님이 여기 동암에 안좌한후 력대의 허다한 문인들이 그 본을 받으며 안좌하면서 많고많은 불후의 시편을 남겼음이 한눈에 안겨들었다. 그중에서도 나의 마음을 무척이나 끄당긴 이는 우리에게 양명선생으로 다가서는 명나라 대성현 왕수인이다.
왕수인(王守仁)은 절강 여요사람, 자는 벽안, 명나라때 철학가, 교육가, 관직은 명나라 남경의 병부상서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양명(陽明)선생으로 알려지며1501년과 1620년 선후 두차례나 구화산 동암에 안좌하여 김지장님을 그지없이 존경하며 본받은 진지한 모습을 보이였다.
그는 시 “바위에 앉아 내키는대로 쓰노라”에서 “온종일 바위에 앉아/락화를 바라보고나니/어디가 내 집인지 도무지 알수가 없어라”라고 시작하면서 주위 모습을 시에 담다가 나중에 부패한 정권, 부패한 벼슬아치들을 단죄한다.
멍청이같은 벼슬아치들은
무슨 일이 저토록 다사하단 말인고
나의 일생도 끝났음을
믿지 않을수 없는가 하노라
왕수인이 시까지 써가며 당대의 벼슬아치들을 단두대에 올려놓을 때 시인은 십상팔구는 청관(淸官)으로 알려진다. 자료가 없어 구체적인것은 파악할수 없으나 벼슬에 뜻이 없음이 한 자료에서 잘 알려진다.
정덕 15년, 즉 기원 1520년 정월부터 3월에 이르기까지 왕수인은 두번째로 구화산 동암에 올랐는데 조정의 환관은 금의석(錦衣石)이라는 심복을 파견하여 가만히 뒤따르며 왕수인의 일거일동을 감시한다. 왕수인은 그래도 모른척하며 동암에 안좌하여 김지장님의 모습을 취한다. 금의석이 동애의 한 바위우에 앉아 왕수인을 감시하던 자리를 후세에 “금의석”으로 불렀는데 내가 그토록 주의를 돌려도 금의석을 찾아볼수가 없었다.
왕수인을 알리는 자료요, 구화산서 알게 된 양명선생 이해 전부. 그때부터 당나라 시절 일대 문화거장--지장보살 김교각님의 동암안좌를 본받은 양명선생의 거룩한 형상이 나의 마음을 파고들었으니 2년전 구화산행은 2009년 5월을 하지장, 왕양명 답사의 달로 떠올린 전주곡이였다. 이땅의 고대 우리 겨레와 이어지는 명나라 시절 일대 성현이였다.
2009년 5월, 강남땅 두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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