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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소감】
불현듯 쓰고 싶은 글
리광인
여기는 남방 절강 소흥땅.
하늘이 밑창이라도 뚫렸나, 어제 내내 간밤에 이어 이 오전도 주룩주룩 비가 그칠줄 모른다. 6층아빠트 베란다에 앉아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노라니 불현듯 젊음이 싱싱 피여 나던 나의 20대시절—20세기 70년대의 한 신문기사가 새삼스레 떠오른다. 그 시절 나는 한창 푸른 꿈을 안고 연변 두만강 상류—백두고원의 화룡현 광평농장(목축장)에서 나 인생의 어리숙 설계도를 펼쳐가고있었다.
재난의 운명이라고나 할가, 철부지 4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홑어머니 슬하에서 자라야 했던 나. 그것도 나 하나만이 아닌 녀동생 하나에 우로 형님, 누나 줄레줄레 넷이니 6남매가 대롱대롱 어머니란 갸날픈 넝쿨에 매달려야 했으니.
어유,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나의 소시적.
생활이 하도나 궁색했으면 소학교졸업사진 때 변변한 옷 한벌도 없어 마음씨 착한 이웃이 건네주는, 등이 휭 나간 웃옷을 걸쳐 입어야 했을가.
생활이 하도나 궁색했으면 중학교시절 내내 엉뎅이, 무릎 창이 나간 옷을 기워입으며 몇리밖 중학교를 오가야 했을가.
그래도 그 모진 생활고속에서도 다가오는 따스한 봄은 막을수가 없고 피여나는 젊음은 짓밟을수가 없었지. 소학교시절 학습위원으로부터 반장에 이르기까지, 중학교시절 반장으로부터 학교학생회(그시기는 홍대회라 불렀음.) 부주임에 이르기까지 끼끗한 소년, 청년으로 제딴에는 멋있게 인생의 청소년시절드라마를 엮어가느라 버둥이였다.
중학교를 졸업했던 1970년 12월 그때, 우린 행운스럽게도 “네가지 지향(四個面向)”에 맞띄워 시골졸업생 86명중 24명이나 훌 시골을 벗어나 날아가버렸다. 명색이 학교학생회 코치인 나는 사상이 빨개빨개서 선참으로 대자보를 써 붙이고 고향땅을 건설하겠노라며 귀향의 인생로를 택했다. 그런중 어쩌구려 13살우 큰형님의 주선으로 백두고원의 광평농장에 삶의 터를 옮겨야 했으니 그때가 17~18살의 10대후반, 모택동시대로 특징지어지는 년대의 70년대초반.
세상 인생사에는 극적인 변화가 때때로 주어지는가부다. 새농촌건설의 푸른꿈 펼치려던 내가 농장과 큰형님의 배려로200리밖의 현성—화룡2중 고중에 다니게 되였으니 ~ 그때까지도 나는 화룡2중시절이 오늘날 나 인생의 밑거름, 주추돌이 되여줄줄은 미처 몰랐다. 화룡2중에서도 나는 1000여명 학생들의 새별로 떠올라 동창 박세권, 지천 셋이서 학교 공청단위원회와 학생회를 이끌어가며 들썽이였다.
1973년 1월, 나는 화룡2중(고중)을 마치고 다시 나의 사랑—백두고원에 삶의 터를 잡아갔다.
“농장에 뿌리박고 혁명하리!(扎根农场干革命!)”
젊음과 패기로 싱싱 끓던 20살 젊은이의 호언장담, 지금 생각하면 허구픈 웃음이 절로 나지만 70년대초반의 그 시절은 호언장담이자 나의 결심, 나의 행동의 지침이였다. 그런속에서 나는 호언장담을 행동화하며 현실로 펼쳐가고있었다.
허~허, 50대 나에게도 이같이 아리송한 력사가 있었다면 우리 후배들은 어떻게 생각할가, 허나 이는 지울수 없는 내 인생사의 20대의 한페지이고 나를 키워낸 시대인것만은 틀림이 없다.
1973년 초겨울의 어느날, 350리밖 자치주 수부에서 연변일보사 한족기자 한분이 백두고원의 우리농장으로 취재를 왔다. 농장지도부를 통해 소개를 받은 손기자는 나를 농장젊은이들의 코기러기요, 농장의 미래라며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이런속에서 이해 12월 13일부 “연변일보”에 실린 기사가 “흥성하는 광평목축장”이고 농장의 미래속 나도 기사의 한 주인공으로 둔갑했었다. 허둥지둥시절의 산물이라지만 필경은 신문에 처음 실려본 “사적”이요, 사회로부터 처음 받아본 나 평가라 할가.
그로부터 세월은 흘러 30여년~ 50대에 접어들어 비내리는 날 왜 문뜩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고 싶을가, 왜 그때 그 시절 신문기사가 상기될가? 아마도 스스로 인정하기는 싫어도 추억속에 들어가 사는 상정을 떠날수 없는가부다. 음, 싫어도 피해갈수 없는 인생드라마의 한페지는 나 추억속에, 동년배들의 인상속에 또렷이 흔적을 남기였으니까. 그때의 적극적이고 향상적인 인생태도와 락관적인 현실태도가 오늘의 나를 잉태하지나 않았을가 생각해본다.
밖에서는 아직도 내가 그칠줄 모른다. 안해는 비내리는 바깥세계를 내다보며 비가 내리면 왜 상념이 떠오르고 흘러간 나날이 떠오를가고 묻는다. 그러면서 쌍둥이 생각이 더 간절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오 ,나의 쌍둥이~랑랑 18세! 고향에 두고온 그애들은 지금 뭘 생각하고 있을가. 금방까지 웃학년생의 대학시험이 끝났다고, 인젠 고중졸업생이 된다고, 벌써부터 긴장된다고 하는 그애들은 지금 뭘 꿈꾸고 있을가, 명문대? 아니면 미만한 래일의 그 무엇? 18살쯤 그 나이에 새농촌, 새농장의 푸른 설계도 그리며 신문기자의 우스운 포착물로 되였던 나도 그 나이에 그랬었지.
30여년전 그나날, 신문기사속의 “나는” 푸른꿈 펼쳐가는 영준한 청년으로 나타나지만 지금보면 “광란의 년대”의 나~우습기만 하다.올해로 대학시험제도 회복 30년을 맞이하지만 그 시절 대학에 가지 않고 새농장건설에 한생을 바쳐갔더라면 그후의 내 인생을 어떠했을가.
아, 아~ 그래도 그래도 그 년대, 그 시절이 그리워난다. 50년대 중반에 들어선 나도 벌써 추억에 사는 삶을 맞았나? 아니지 아니지~ 나는 아직 할일이 많고 그 일속에서 걸어가야 할길이 멀고도 먼데, 올해로 대학졸업 25년을 맞아 사회진출 25년이라지만 아직도 20년-푸른꿈 제2인생을 살아갈수가 있는데……
(2007년 6월 14일)
【부록】(1)
흥성하는 광평목축장
야 국(연변일보사 기자)
지난 국경절 직후에 우리는 장백산기슭에 자리잡고있는 신흥목장—화룡현 광평목축장을 찾아갔다. 지난날에 승냥이떼가 욱실거리던 황량한 이 초원은 지금 살진 양떼, 소, 말, 사슴들이 무리를 이루고 뜨락또르의 동음이 하냥 우렁차다.
광평은 장백산기슭에 자리잡고있는데 12만무의 무성한 초원과 2만 2,000여무의 비옥한 땅을 끼고있어 목축업을 발전시키기 좋다. 일찍 1958년과 1961년에 선후로 두번이나 농장을 꾸렸었으나
………
금년초에 목축장에 많은 지식청년들이 새로왔는데 어떤 청년들은 양몰이가 간고하고도 어지럽다는 말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당지부에서는 이런 문제를 발견한후 세심하게 교육하여 《양몰이는 전도가 없다》는 그릇된 사상을 극복하고 무산계급후계자를 배양할데 관한 다섯가지 조건으로 자기들을 엄격히 단속하도록 하였다. 단총지 부서기 리광인은 금년 1월에 고중을 마치고 양방목대에 왔었는데 신심이 아주 높았었다. 그런데 양몰이를 나선 첫날에 양 한마리를 잃어버린 다음부터는 이 일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오랜 양몰이군은 《양을 잃은것은 손실이 적지 않지만 이후부터 주의하면 되오. 앞으로 혁명적 책임감을 더 가지는것이 중요하오》라고 말하면서 인내성있게 교육하였다.
이로부터 그는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혁명을 위하여 보다 큰 공헌을 할것을 결심하였다. 그뒤 그는 로방목원들에게서 허심히 배우면서 반복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서 양을 사양하고 방목하는 여러가지 요령을 장악하였다. 그는 또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의 저작과 모주석의 저작을 참답게 학습하였는데 이미 《공산당선언》 등 5편의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의 저작과 모택동선집가운데의 많은 문장을 학습하고 계속 혁명일기를 썼다. 그는 또 정치야학교를 꾸리는데 열성적으로 나섰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젊은이가 있음으로 하여 우리는 시름을 놓게 된다》고 말하였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리광인은 《나는 아직도 다른 사람들보다 퍽 못합니다》고 하였다.
실로 그렇다. 리광인과 같은 젊은이는 한두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혁명의 중책을 떠메고 힘있게 전진하고있다.
1973년 12월 13일 부 《연변일보》
【부록】(2)
(삶의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인생관 문제에 관한 지상토론 12)
생활의 개척자로 되여야 한다
고향마을을 건설하는 로력적투쟁에서 청춘의 리상을 활짝 꽃피워가리라 마음먹은 나는 1970년에 중학교를 마치고 발걸음도 가볍게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나는 단총지 부서기사업을 하면서 흑판보도 꾸리고 선전대도 조직하여 용솟음쳐 나오는 모범인물들을 선전했다. 짬을 타서 원고도 썼는데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나는 농장을 사랑했고 농장의 래일을 동경했다. 1976년 9월에 나는 뜻밖으로 억울한 사건에 걸려들어갔다. 하루밤사이에 비판, 투쟁 대상으로 되였다. 앞가슴에 늘 달고 다니던 공청단휘장을 떼야 했고 기간민병에서 쫓겨났으며 무르익던 입당도 물거품으로 되였다. 내가 《죄》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나를 현공안국 수용소 철창속에 걷어넣었다.
한 청년에게 있어서 뜻하지 않는 좌절도 불행이라 하겠지만 가장 큰 불행과 고통은 자기의 리상을 실현할수 없는것이 아니겠는가. 뜻있는 청년이라면 넘어지면 일어서고 일어서면 자기 분투목표를 향하여 내달려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수용소에서 나온후 들끓는 생활에 뛰여들었다. 내가 직심으로 일하니 농장에서는 나를 선진생산자로 선거했다. 나는 또다시 삶의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1977년에 나는 대학교시험을 쳤다. 신체검사에도 합격되였는데 대학교로 갈수 없었다. 나는 맥을 버리지 않고 또 시험공부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 말라고 무슨 대학시험공부를 하는가》고 놀려도 주었고 어떤 사람들은 나같은 사람은 대학교에서 요구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였지만 과학의 전당에 가서 더 많은 지식을 장악하고싶은 불타는 구지욕만은 식지않았다. 낮에 일하고 밤에 등불밑에서 공부하려 하니 졸음이 오고 피곤했지만 나는 머리에 찬물을 끼얹으며 공부했다.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였다. 나는 1978년에 연변대학에 입학하였다. 1979년 7월에 조직에서는 나에게 들씌웠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었다. 나는 다시 공청단휘장을 앞가슴에 달고 다니게 되였다.
생활은 나를 희망찬 래일에서 살도록 가르쳐주었다. 나는 파란과 곡절 많은 생활을 바랄지언정 잔잔하고 안일한 생활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전자만이 삶의 희열과 쾌락을 가져다주기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대학생으로 된 영광을 한가슴에 안고 시간을 아껴가며 공부하고있으며 삶의 길을 개척하고있다.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78년급 학생 리광인
1980년 12월 20일 부 토요일 3면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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