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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72돐기념】 단재 신채호 (2)
2008년 04월 12일 18시 13분  조회:4055  추천:77  작성자: 리함


 【순국72돐기념】

                                       
단재 신채호 (2)



                                             3

 

신채호는《대한매일신보》재직기간 언론인, 력사연구가, 애국계몽사상가, 전기작가로 활약하면서 국권회복과 민족자강에 토대를 둔 전기 민족주의사상을 확립하였다. 그는 《대한협회 회보》에만도 《대한의 희망》, 《력사와 애국심의 관계》, 《성력(誠力)》과 공업(功業), 《대아 (大我)와 소아(小我)》 등 계몽론설을 발표하였다. 그가《황성신문》과《대한매일신보》의 론설기자와 론설주필로 있는 사이 한편 또 한편의 글들이 그대로 육탄되여 적진을 쪼개며 민족의 심장을 움직여 놓았다.

당시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는《조선의 신문이 가진 권력은 강대한바 나의 백언 (百言)보다 신문의 일필이 조선인민을 감동케 하는 힘이 더 크다》고 비명을 올리였다.

1907년《정미7조약》이 또 강압체결되여 군대마저 해산당했다. 신채호는 필봉을 무기로 일제와 날카롭게 맞서 싸우는 한편 리회영, 전덕기, 량기탁, 리동녕, 안창호, 리갑, 김구, 려준, 리동휘, 김진호, 김영선, 리관직 등 12명의 반일지사들과 함께 1909 9월에 비밀결사관체《신민회》를 창립하였다. 신민회의 취지와 목적은 신채호가 집필했다.

비밀결사《신민회》가 조직된후 신채호는《대한매일신보》주필로 신민회의 대변인일을 하면서 《신민》의 표본이 되였다. 어느날《대한매일신보》사장 베델이 신채호를 찾더니 미국 유학갈 생각이 없는가고 물었다. 그가 나라 이 판국에 외국류학이 다 뭔가고 하자 베델은 사양하는 줄 알고 《세계적인 대학자가 되도록》주선해주겠다고 했다. 이때 그는 우선 감사를 드린 뒤 《우리 이 겨레와 나라속에 몸담고 있는 나로서 운명을 같이해야 하는 관계》라고 하면서 단호히 막아버렸다.

사실 그러했다. 신채호가 세계로 진출하여 세계적인 대학자로 될 그런 힘을 갖고있었으나 조선수난의 현실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민족수난의 년대에 신채호의 생활은 고달프기만 했다. 서울에 올라 온 후 그는 북악산아래 삼청동구석에서 세방살이를 하였는데 그 무렵에 어머니가 사망한데서 집식구는 부인 조녀사와 갓난아이 관일 그리고 조카 향란이였다.

헌데 부부생활은 종시 어울릴줄 몰랐다.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주선한 조혼이여서 마음없는데다가 가정이라는 이 세계에 좀처럼 맘을 두지 않고 학문 등에만 몰두하니 몽매하고 무디기만 느껴지는 안해가 고울리 없었다. 하기에 그의 안해는 서울에서 해산할 때 남편이 산모를 위해서 병풍을 사서 쳐주었다고 평생 처음으로 호사했다고 하면서 저런 위인이 자식을 귀여워 하겠는지 알길없다고 자기 신세를 한탄까지 했다.

이러던 조녀사는 끝내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아들이 태여난후 젖이 부족하다고 남편이 《독수리표》우유 10여 통을 사왔는데 조녀사는 분량과 온도를 조절할줄 몰라 젖먹이를 죽이고 말았다. 젖에 체해 죽었던것이다.

신채호는 분노했다. 그는 우유통들을 삼청동내가에 내다가 도끼로 란도질했고 1909년에는 안해에게 약간평을 사주어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이렇게 부부인연을 영원히 끊어버렸다. 여기에는 불만, 불신이 크게 역할했겠지만 해외로의 망명을 앞둔 지사의 결심도 홀시할 수 없다.

신채호는 빈약한 풍채에 허식이나 외모를 모르는 기이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두눈만은 날카롭게 빛나고 비범한 예지가 빛발쳤다. 사회를 대할 때면 추상같이 범접 못할 인상이다가도 사람을 대할 때면 아주 화기로왔다.

그는 당시 진보적신문, 잡지들인《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대한협회월보》, 《기회학회월보》, 《가정잡지》, 《소년》 등에 수십편의 정론을 발표하고 《을지문덕》(1908), 《이순신전》(1908), 《동국거걸 최도통》(1910) 등 전기문학을 발표하여 옛 영웅을 새 영웅으로 받아들여 국권을 찾자는 의도를 표명하였다. 특히 사론(史論), 《독사신론(讀史新論)(《대한 매일신보) 1908 8 27~12 13)과 론문《동국고대선교고) (《대한매일신보》1910 3 31일》》  등을 발표하여 애국적인 사학견해와 근대사학의 개척자로서의 체계적인 사관을 보여주었다. 하여 그는 당시《조선유일의 사학가》, 《한문학계의 태두》, 《대도활부적(大刀活釜) 평론가》로 소문 높았다.  그는 민족혼을 부르짖으며 력사의 한복판에 나선 조선의 대표적 력사학가였다.

1909 12월 일제는 친일단체《일진회》를 내세워 한일합병 건의성명을 채택한뒤 황제, 통감, 리완용에게 소위《합방상주문 및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신채호는《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이란 론설을 발표하여 일제놈들의 광분과 친일단체의 매국행위를 세상에 까밝아놓았다. 허나 일제놈들은 무력강압으로 합병절차를 다그쳤다. 8 22일에《한일합병》조약을 강압체결하고 8 29일에 세상에 공포하였다.

이에 앞서 신채호는 망국의 치욕을 예감하였다. 일제놈들의 눈초리가 따르는데서 그는 신민회간부들과 함께 서울의 리갑, 량기택의 집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해외망명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산동반도의 청도에서 회합하되 분산하여 떠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때 신채호는《대한매일신보》에 《동국거걸 최도통》을 련재하고 있었다. 하여 그는 망명을 앞두고 틈틈히 원고를 써두었다가 신문사에 나가 원고뭉치를 단꺼번에 내놓았다. 조카딸 향란이는 믿을맏한 동지에게 생활비를 주어 맡기고 모든 거래관계들을 깨끗이 청산하였다. 그러나 남한테서 얻은《동사강목(東史綱目)》만은 돌리지 않았다.

 

                                              4

 

1910 4 8, 신채호는《동사강목》한벌을 넣은 보따리를 가지고 소리없이 서울을 떠났다. 도중에 그는 정주오산학교에 한시기 체류했다가 압록강을 건넜으며 중국 안동현에서 륜선을 잡아타고 연태를 거쳐 청도로 갔다. 리동휘, 리갑, 안창호 등 신민회간부들도 여러 경로를 거쳐 무사히 청도에 이르렀다.

이해 6월 하순경에《청도회의》가 열리였다. 그러나 회의참가자들의 의견이 각이한데서 일치한 결론을 가져오기 어려웠다. 리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급진론자들은 나라가 망한 때에 당장 싸움터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점진론자들은 해외동포들이 산업진흥으로 교육을 보급시켜 힘을 기른 뒤 다시 보자고 하였다. 신채호는 실력양성이나 독립투쟁이 모두 중요하지만 력사의식의 무장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무장투쟁로선을 견결히 주장함으로써 그의 급진적인 민족주의립장과 열렬한 애국사상을 보여주었다. 재정실력자 리종호도 급진론에 기울었다.

청도회의는 한주일이 걸려서야 자금을 모아 중국 북만의 밀산현에 땅을 사고 사관학교를 세우며 그곳을 모든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자는것과 신채호 등을 사관학교 교관질을 시키자는데로 합치되였다.

신채호는 회의후 대부분 인사들과 같이 영국기선을 잡아타고 울라지보스또크의 신한촌으로 갔다. 그는 울라지보스또크에서 《해조신문》복간과 《청구신문》출판에 참여하면서 또다시 언론활동에 나섰다.

신채호는 1910 8월의 망국비보를 접하고 비분에 떨었으나 거꾸러질수는 없었다. 그는 1911년에 울라지보스또크에서《광복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광복회는 본부를 울라지보스또크에 두고 서북간도 등지에 지회를 설치했는데 회원이 2만여명에 달했다.

1911 12월에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조선인단체《권업회》가 조직되고 기관지《권업신문》이 창간되자 신채호는 초빙을 받고 주필로 나서서 연해주와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인들에게 민족독립사상을 선전하는데 큰 역할을 놀았다. 이밖에 《대양보》의 주필로 나서기도 했다.

1913년에 신채호는 신규식의 전갈을 받고 이해 겨울경에 북만의 밀산일대를 거쳐 상해에 가서 신규식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ㅡ《동제사》의 중심인물로 나섰다.

상해에서 신채호는 박은식 등 여러 동지와 함께《박달학원》을 개설하였다. 박달학원은 단군의 얼을 살려 민족의 독립정신을 키우자는데 취지를 둔 교육기관이였는데 신규식이 뒤바라지 등 후원을 맡아나섰다. 이 학원에서 신채호는 청년들에게 력사를 옳바르게 가르치며 독립정신고취에 열을 올렸다.

신채호는 신규식의 거처에서 열린 영어야학반에도 열성을 올리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영어를 배워 구미에 류학하기 위해서였으나 신채호는 영어로 된 원 저서를 독파하기 위해서였다. 국내시절에 자습기초를 닦은 그는 영어야학반에서 수준이 상당히 높은 영어책을 배웠는데 그 지식으로 《로마흥망사》, 《영웅숭배론》 등 원 저서를 자습으로 독파하였다.

상해시절 신채호는 울라지보스또크시절처럼 여전히 생활고와 위병에 모대기였다. 얼굴은 부은듯 늘 누르스레하고 걸어다닐 때면 위가 아파 늘 배를 지긋이 눌렀다. 시간만 있으면 언제고 거리의 책가게들에 나갔지만 돈이 없은데서 선자리에서 보군 하였다. 어떤 책은 다 볼때까지 며칠이고 다니였다. 때론 가게방주인의 싫은 소리를 들으면서 베끼기도 하였다. 한손을 아래배에서 뗄줄 몰랐다. 어떤 때는 너무도 배가 아파 갑자기 숨넘어가는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상해바닥의 책가게마다 돌며 조선에 관계되는 지식을 널리 섭렵하였고 조선력사의 한복판에 나섰다.

1914년 봄에 신채호는 경남 밀양출신의 독립지사 윤세용, 윤세복 두 형제의 초청을 받고 봉천성 환인현 흥도천으로 갔다. 윤씨형제는 1910년에 망명한 뒤 당지에 동창학교를 세우고 조선인자제를 가르치고 대종교를 포교하면서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을 손잡아주고있었다. 신채호는 여기서 《대종교》에 입교한 뒤 이곳에 머무른 몇달사이 동창학교에서 조선력사를 강의하기도 하고 반일계몽교재 《조선사》를 집필, 발간하기도 했으며 조선사연구를 위하여 집안현경내의 고구려 옛 유적지 등을 답사하고 장래 독립군활동기지건설문제로 장백산에 올라 현지답사하기도 했다.

          "겨레 항일지사들"(전4권)제3권, 민족출판사 출판,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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