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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 聖人이 된 프랑스 국왕, 그러나 국민은 고단했다
2022년 08월 30일 14시 06분  조회:272  추천:0  작성자: 력사공부
[신성했지만 가혹했던 聖王 루이 9세]
 
- 빈민과 함께 식사, 유대인은 敵
나병환자·매춘부 위한 시설 지어 “유대인은 고리대금업자” 박해… 신성모독하면 혀와 입술 잘라

- 괴질서 살아난 뒤 십자군 원정
"생명 되찾은 건 하느님의 뜻" 2만5000명 끌고 출전했다 포로로… 40만 리브르 거액 내고 풀려나

- 몽골군과 동맹, 改宗까지 시도
"이슬람 협공하자" 몽골에 선교사


국민 뜻 무시하고 다시 출전, 病死… 아들 필리프 3세, 뼈만 추려 귀국

루이 9세(1214-1270)보다 신심 깊은 왕이 또 있을까? 그는 두 차례나 십자군에 직접 참전하여 이슬람 세력과 싸우다가 끝내 아프리카에서 죽었고, 교황청은 이를 기려 성인(聖人)으로 시성하였다. 국왕이자 성인인 루이 9세는 성왕(聖王·생루이 Saint Louis)으로 불린다. 성스러운 왕이 통치하는 나라는 어떠했을까?

1226년, 부왕 루이 8세가 사망했을 때 루이는 고작 12세. 성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 카스티야의 블랑슈(Blanche of Castile·1188-1252)가 섭정을 맡았다. 루이에게 한량없이 깊은 신앙심을 불어넣은 분이 바로 어머니다. '네가 죄를 짓는 걸 보느니 차라리 내 발밑에 쓰러져 죽는 걸 보겠다'는 섬뜩한 경고를 하고,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의 위협에 늘 대비하라고 가르쳤다. 루이는 말총으로 만든 참회용 속옷을 입고, 침대 머리맡에서 하룻밤에 50번씩 무릎 꿇고 기도드리고, 자주 금식했다. 루이는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를 왕비로 맞았는데, 부부 사이가 너무 좋아서 늘 붙어 있는 게 오히려 문제였다. 국왕께서 헛된 쾌락에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 모후는 아들 내외가 자는 방에 불시에 찾아와서 감시했다. 국왕 부부는 어머니의 불심검문을 피해 계단에서 동침하곤 했다는데, 그렇게 하여 아이를 11명 낳았다.

국왕은 또한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감화를 받아 청빈의 삶을 실천했다. 옷과 음식을 최대한 검소하게 차리는 한편, 궁정에 빈민들을 데려와 몸소 세족식을 하고 함께 식사했다. 나병 환자와 맹인을 돕는 시설과 매춘부들을 교정하는 시설도 지었다. 다른 한편 신앙의 적에 대해서는 철저히 억압했다. 예컨대 신성모독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혀와 입술을 잘라내도록 조치했다.

루이 9세가 성지(聖地) 예루살렘 탈환을 명분으로 이끌었던 제7차 십자군 원정(1248~1250).
 
루이 9세가 성지(聖地) 예루살렘 탈환을 명분으로 이끌었던 제7차 십자군 원정(1248~1250).

이처럼 기독교 정신에 철두철미한 국왕에게 고리대금업자, 특히 유대인의 존재가 달가울 리 없다. 그는 원금 이상으로 받는 돈은 모두 고리대금이며 결국 도둑질이라고 선언했다. 유대인들은 증오할 만한 고리대금업자일 뿐 아니라, 그들이 읽는 탈무드에 기독교 교리를 매도하는 사악한 내용이 들어 있다는 고발이 제기되었다. 루이는 철저한 반유대주의 정책을 폈다. 탈무드 1만2000권을 공개 소각하고, 유대인 표지를 달게 하고, 재산을 빼앗더니 급기야 모든 유대인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700년 뒤 20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주앵빌(Joinville)이 쓴 성왕의 전기에 따르면 국왕은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표현했다. "유대인들과는 논쟁하지 말라. 그들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 비방하는 말을 들으면 칼을 배 속 깊숙이 찔러 넣어라."

30대 중반에 국왕이 십자군 참전을 결정한 데에는 죽음 직전까지 간 경험과 관련이 있다. 1244년 겨울, 그는 괴질에 걸려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는데 몇 주 후 기적같이 완쾌했다. 하느님 뜻으로 생명을 되찾았다고 판단한 국왕은 감사의 표시로 십자군 원정을 결정했다. 당장은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떠나지 못했지만, 4년 후인 1248년, 2만5000명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했다. 이곳의 이슬람 세력을 무찌른 후 성지(聖地)로 행군하겠다는 계획이었으나 무모한 군사작전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신앙의 적을 무찌르기는커녕 오히려 포로로 잡혀 40만 리브르라는 거액을 내고서야 겨우 풀려났다. 그 후 4년 가까이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분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던 중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히 귀국했다.

프랑스의 왕 루이 9세(1214~1270)

 
 

이집트로 십자군 원정을 떠난 배경에는 몽골 제국과의 외교 협상 문제가 있다. 페르시아에 주둔하던 몽골군 사령관 엘지기데이(Eljigidei)가 사신을 보내와서 프랑스가 이집트를 공격하고 자신은 바그다드를 공격하여 이슬람 세력을 양쪽에서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몽골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했다. 아시아 먼 지역에 있는 엄청난 군사 강국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 나라의 정확한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루이는 몽골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동맹을 맺자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프란치스코회 사제 루브룩이 선교사로 파견됐다. 예수의 생애를 그린 비단 텐트도 선물로 보냈다. 루브룩은 몽케 칸을 직접 만났지만 물론 칸의 기독교도 개종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미션이었다. 다만 루브룩은 귀국 후 유럽에 몽골 사정을 처음으로 자세히 소개한 '여행기(Itinerarium)'를 저술했다.

한 번은 몰라도 국왕이 두 번째로 십자군 원정을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모든 사람이 다 반대했지만 국왕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자금 사정도 안 좋고, 이미 십자군 열기가 많이 사그라져서 동맹을 구하는 일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이미 50대에 들어선 국왕 자신의 건강 상태가 나빴다. 1267년, 아들들과 함께 배에 올랐을 때 국왕은 이미 이질에 걸린 상태였다. 목적지는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였다. 고대 카르타고 유적지 부근에 캠프를 차리고 국왕의 동생 샤를 당주(Charles d'Anjou)가 지휘하는 응원군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북아프리카의 열기 속에 이질에 걸린 병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왕자 트리스탕이 쓰러졌고, 곧이어 국왕 자신도 사망했다.

살아남은 아들이 필리프 3세로 등극한 후 부친의 시신을 수습해 프랑스로 귀국했다. 먼 외지에서 사체를 옮겨가기 위해 중세 관습에 따라 육탈(肉脫, mos Teutonicus·décarnisation) 과정을 수행했다. 팔다리를 잘라낸 국왕의 사체를 포도주에 몇 시간 푹 삶아 살을 떼어내고 뼈만 깨끗이 추려서 프랑스로 옮겨갔다. 국왕의 시신은 파리 북쪽에 있는 생드니 국왕 묘지에 안장했다. 일반 병사들은 제대로 장례를 치를 여유가 없었으므로 푸대에 시체를 담아 바다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 난 후 남은 병력으로 이슬람군과 전투를 하려니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렇지만 당시 적군도 질병에 시달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양측은 서둘러 휴전 조약을 맺었다. 파리 국립문서보관소에 보존된 휴전 문서를 보면 포로를 석방하고, 튀니지 태수가 거액의 배상금을 물고, 기독교 전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이슬람 측이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는 내용이다. 물론 이슬람 측이 그런 내용을 정말로 지킬 의도는 없었다. 십자군이 프랑스로 돌아간 후 튀니지에서는 불명예스러운 카르타고 유적지를 완전히 파괴했다. 기독교 자유 선교 같은 건 당연히 거부했고, 오히려 강력한 이슬람 성전(지하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쪽은 그쪽 나름대로 정당화가 필요했던지라 루이 9세가 사실은 튀니지에 와서 이슬람교도로 개종했으며, 오히려 이슬람의 성인이 되었다는 근거 없는 신화가 유포되었다.

국왕이 사망한 후 프랑스 전역에서 성인 추대 움직임이 일어났고, 결국 30년도 안 지난 1297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루이 9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국왕 자신은 성스러운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종교 갈등과 전쟁, 인종 갈등으로 얼룩진 그의 치세는 선정(善政)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예수의 가시관을 거액에 구입… 보관 위해 성당 지어]

1239년 루이 9세가 사들인 예수의 가시면류관.
 
1239년 루이 9세가 사들인 예수의 가시면류관.

성왕 루이가 후대에 남긴 중요한 유산으로는 파리 시테 섬에 있는 생트샤펠(Sainte Chapelle)이 있다. 이곳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때 이마에 둘려 있던 가시관을 보관하기 위해 특별히 지은 소성당이다. 원래 이 가시관은 비잔틴 제국의 국보였다. 이 성물(聖物)이 파리에 오게 된 계기는 말썽 많은 4차 십자군이다. 1204년, 비잔틴 제국을 돕겠다며 떠난 십자군이 오히려 이 나라를 정복하고 소위 라틴 제국을 세워 50년 넘게 통치했다(1204~1261). 그러던 중 라틴 제국 황제 보두앵 2세가 재정 상황이 악화되자 베네치아의 은행가에게 거액을 빌리면서 가시관을 담보로 내놓았다. 이 소식을 접한 성왕 루이는 13만5000리브르라는 엄청난 거액을 갚아주고 이 성물을 파리로 가져왔다. 이로써 파리는 새로운 예루살렘이며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임을 천명하게 됐다. 가시관뿐 아니라 십자가 일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 예수의 입에 물렸던 해면 등을 함께 확보한 성왕 루이는 이 보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왕실 예배당인 생트샤펠을 지었다. 이 건물은 13세기 고딕 건축의 보석으로서, 특히 벽면을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구약의 첫 부분부터 신약의 마지막 부분까지 모두 1100장면을 표현한 후, 마지막 부분에 성 유물을 파리로 모셔오는 루이 국왕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 가시관은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보존하며 특별 미사 때 신자들에게 공개했다. 2019년 노트르담 성당에 큰 화재가 났을 때 소방관들은 매뉴얼에 따라 가장 먼저 가시관을 구해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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