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력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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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우크라이나군의 철수 댓글:  조회:428  추천:2  2024-02-27
  아우디이우카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철수했다. 제2의 바흐무트라고까지 불리던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전과를 올렸다. 이제 우크라이나의 힘이 다하고 러시아가 우세를 잡았다. 더 불리해지기 전에 우크라이나가 휴전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성급한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러시아군도 공세를 확장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지원안이 하원을 통과하지 못하면서 우크라이나군이 수세로 돌아선 건 작년 말부터였다. 그러나 러시아군 역시 화력의 우위 속에서도 심지어 아우디이우카를 집중적으로 공격했음에도 우크라이나군이 꽤 오래 버텼다. 러시아군은 작년 2차 징집 이후로 군의 전술적 역량은 여전히 답보 상태이다. 주어진 기회와 시간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도 군수와 무기에는 여유가 많지 않은 듯하고, 군의 전체적인 역량, 조직의 경직성, 정치적 압박 등은 쉽게 개선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 전쟁이 과거 독소전쟁과 유사한 점은 어느 쪽이든 공세로 나갈 때, 희생이 급증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러시아가 훨씬 심하다. 이것도 러시아군이 공세를 확장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우크라이나군은 미국의 군수 지원이 끊어지고, 유럽은 아직 군비가 충분치 않다. 병력도 많이 소진되었다. 상황이 좋던 시절에도 극심한 전술적 불균형이 있었다. 제공권, 기갑부대, 기타 여러 부분에서 한계가 너무 많았다. 이런 불균형 속에서 지난 한 해 러시아를 상대로 공세를 유지한 것 자체가 기적적인 일이다. 미국이 완전히 지원을 끊진 못할 것이다. 다만 지원의 내용과 질이 좀 더 과감해질지, 이전 형태를 유지할지, 우크라이나가 함락되어서도 안 되지만, 러시아를 지나치게 자극해서도 안 된다는 입장을 유지할지가 관건이다. 전쟁은 상대를 먼저 파괴하는 전쟁이 될 때도 있고, 누가 더 늦게 파괴되느냐는 싸움이 될 때도 있다. 안타깝게도 이 전쟁은 후자에 속한다. 최근 양국에서 동시에 파열음이 들린다. 그것은 한쪽이 결정적으로 불리해지는 신호가 아니라 서로 부서져 가는 싸움이 진행되는 과정이다. 무장 국가로서 유럽의 신속한 변신, 미국의 각성 속도가 관건이다.
8    대량학살 못 막은 집단지성 댓글:  조회:570  추천:0  2024-02-26
2월 21일은 1916년 베르됭 전투가 발생했던 날이다. 뫼즈강의 요새 도시 베르됭을 두고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베르됭 전투는 1차대전 사상 최대 희생자를 낸 전투였다. 단일 면적당 희생자가 제일 많았던 전투이기도 하다. 서부 전선에 배치한 사단의 3분의 2가 이 좁은 땅에 투입되었고, 독일과 프랑스군 합쳐서 3500만 발이 넘는 포탄이 발사되었다. 그중에는 포스겐 가스탄도 있었다. 양측 합쳐서 사상자는 60만 명에서 100만 명에 달한다. 1962년에 앨리스터 혼이 쓴 ‘베르됭 전투’는 이 전투에 관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혼은 이 전투를 주도한 지휘관들에 대해서도 상세하고 비판적인 고찰을 남기고 있다. 작가가 이런 분류를 하진 않았지만, 등장인물들은 이런 분류가 가능하다. 전투가 전략적 목표를 잃고 오직 지옥 같은 소모전이 되고 있음에도 잘못을 알지 못하고 무조건 공격과 승리에 집착하는 장군, 전투가 잘못된 줄 알면서도 우유부단하고 책임만 전가하는 장군, 잘못된 전투임을 알고 병사들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창의적인 전술과 방법을 모색하는 장군이다. 기묘한 사실은 베르됭 전투가 처음의 전술적 기교를 잃고, 맹목적인 학살극으로 바뀌어 가자 경악하고 진절머리를 내는 장군들이 많았음에도 전투는 중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처음 공격을 시작한 독일군은 제5군으로 사령관은 국왕 빌헬름 2세의 황태자 빌헬름 폰 프로이센이었다. 황태자도 처음에는 의기양양했지만, 나중에는 이 전투에 진절머리를 냈고, “공격하자,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군들을 경멸했다. 그러나 황태자 자신도 이 전투를 중단시키지 못했다.   대중들은 현명했을까? 전시의 보도 통제나 선전에 휘둘렸던 것일 수도 있지만, 대중들은 승리의 소식을 가져다주는 ‘피의 도살자’형 장군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신중하고 고뇌하는 지휘관들은 비난을 받았다. 인간은 절대 현명하지 않다. 집단지성은 더욱 그렇다. 공포와 욕망에 사로잡힐 때, 이성은 눈을 감는다. 베르됭은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도 그렇다.
7    뉴 밀레니엄과 가자지구의 폭음 댓글:  조회:302  추천:0  2023-10-31
이유는 모르겠는데, 세기가 바뀔 때마다 인류는 장밋빛 꿈을 꾼다. 19세기 때도 그랬고, 20세기, 21세기도 그랬다. 사람들은 기술의 혁신, 인류의 이성과 양심의 진보라는 기대로 가득 채워진 밀레니엄이란 애드벌룬을 띄웠다. 그러나 이 풍선이 벌집이 되고 피를 쏟아내는 데는 10여 년이면 충분했다. 벌써 3번째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공습하면서 최대한 정밀타격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더라도 민간인 희생이 없지는 않겠고, 더 큰 희생은 전기, 식수, 의료, 생필품의 결핍에 의해서 발생하겠지만, 반세기 전에 도시 상공에 떨어지던 무자비한 공습과 비교하면 놀랍기는 하다. 정밀타격 기술이 발전한 건 인정해야 한다. 과거에 전쟁은 발생 자체를 막아야지,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약탈, 폭력, 무자비한 전쟁범죄를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군용식량이 보급되었지만, 전쟁의 잔인함을 막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전자유도 폭탄, 위성카메라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인류는 이제 전쟁도 야수의 얼굴을 벗고, 폭력의 최소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기대도 무너졌다. 절대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인간의 이기적인 사고이다. 다른 나라 전쟁에는 수십만 명이 죽고 고통을 받아도, 지극히 이상적이거나 이성적인 평가를 내리던 사람이 자기 손가락에 작은 가시만 박혀도 바로 이기적이고 감정적인 인간으로 돌변한다. 가시가 작은 가시가 아니라 폭탄이면 이성의 붕괴는 상상을 초월한다. 팔레스타인에서 우리는 폭탄에 의한 합리의 붕괴를 보고 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논의는 진영논리와 이념에 의한 지성의 붕괴를 보여준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정말 답이 없다. 앞으로 오랫동안 우리는 반복되는 비극을 보며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분열은 아직 기회가 있다. 우리 사정과 전쟁 중인 저쪽 상황을 비교하는 건 너무한 것 아닐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인간이 이기심을 버리고, 합리를 붙잡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더욱 저곳의 극렬함을 남의 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6    머스킷을 왜 못 만들었나 댓글:  조회:205  추천:0  2023-10-25
뒤마의 소설, 삼총사의 주인공들과 달타냥은 검술의 달인들이다. 그런데 이 ‘총사’란 원래는 검이 아니라 머스킷으로 무장한 보병(Mousquetaires)이다. 머스킷은 임진왜란 때 들어온 조총에서 진일보한 총이다. 조총은 화약 접시에 흑색 화약을 뿌리고, 담뱃불처럼 끈으로 만든 심지에 붙인 불로 점화했다. 심지가 젖거나 바람이 불면 발사할 수가 없었다. 머스킷은 심지가 아니라 부싯돌을 사용한다. 방아쇠를 당기면 격발 장치가 부싯돌을 마찰하고, 여기서 발생한 불꽃이 화약을 점화한다. 간단한 아이디어 같지만 이 발사 장치를 만들려면 나사와 정밀한 금속 가공 기술이 필요했다. 조총은 왜군이 조선에 소개했지만, 머스킷은 하멜 표류기로 알려진 하멜 일행이 가지고 왔다. 머스킷을 본 조정의 대신들은 좋아 보이기는 하는데 복잡해서 만들 수 없는 총이라고 제작을 포기해 버렸다. 그러고는 19세기 말 열강의 침략이 닥쳤을 때까지 화승총에 만족하며 버텼다. 이젠 제발 이런 이야기를 부끄러워하지 말자. 현재 한국은 제철, 금속 기술 강국이다. 나사를 못 만들지도 않는다. 머스킷은 포기했어도 K9 자주포는 세계 1위 제품이고, 방산은 전차, 전투기로 발전하고 있다.   그래도 궁금해진다. 이런 저력을 가진 나라와 국민이 300년 전에는 왜 그랬을까? 가장 중요한 원인은 농본사회와 통제경제 체제이다. 국가가 전 산업을 관장하고 자원과 산물을 분배한다. 이익을 죄악시하고, 초과이윤이란 요상한 개념을 만들고, 자본은 범죄시한다. 평민, 노비가 돈을 벌면, 아니 돈을 벌 자유로운 기회를 주면 신분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술자, 상인을 천시하고 육성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기술을 천시하게 되고, 공무원 시험에만 목을 맨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어리석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면 누군 장영실과 거북선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국가가 신무기와 기술 개발에 노력은 했다. 하지만 자유와 경쟁의 가치를 부정하고, 민간의 자유로운 경쟁과 노력을 막으니 머스킷에서 막혀 버린 것이다. 차라리 그때는 이해가 가는데, 21세기인 지금도 꽉 막힌 사고를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걸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임용한
5    전쟁의 진정한 무서움 댓글:  조회:296  추천:0  2023-09-07
  초패왕 항우가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던 유방에게 패배한 이유로 항우가 포로로 잡은 진나라 군사 20만을 살해한 사건을 든다. 20만이란 숫자가 믿을 수 있는 숫자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대학살을 벌인 것은 틀림없다. 이들은 진나라의 중심인 관중 지방에서 징병한 병사들이었고, 그들의 유가족들은 항우에게 분노했다. 항우뿐 아니라 고대의 전쟁에서 포로 학살은 곧잘 벌어졌다. 그러나 이 시대 사람들도 마음속의 가책은 있었다. 조나라 포로 40만을 학살했던 진나라의 명장 백기는 모함을 받아 죽게 되자 이 학살의 죗값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의 명장 이광도 자신의 불운이 과거에 저지른 포로 학살의 대가라고 했다. 이처럼 이성과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왜 이런 몰상식한 일을 저질렀을까? 항우에게 묻는다면 이유가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20만이나 되는 포로를 먹이고 관리할 수 없다. 그들을 석방하면 다시 적군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승리하고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이다. 아마 다른 장수들도 똑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누구는 비장하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내 부하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이 책임과 마음의 고통은 나의 평생의 업보로 지고 가겠다.”   전쟁은 비합리가 합리를, 몰상식이 상식을 이기게 만든다. 여기서 이긴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넘어서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확신하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이 포로들을 죽이면 안 된다. 당신이 이 전쟁을 하는 이유가 천하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포로를 죽이면 전투에서 승리해도 천하를 잃게 된다’는 말로 항우를 설득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하다. 미국이 우크라이나군에 집속탄을 제공하기로 했다. 러시아군은 이미 백린탄과 집속탄을 사용하고 있다. 자포리자 원전의 폭파 위협이 시작되고, 핵 위협도 계속되고 있다. 도저히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행위들이지만, 합리와 상식의 계단이 하나하나 점거되고 있다. 이것이 전쟁의 진정한 무서움이다. 이성의 마지노선은 어디일까?
4    〈275〉진정한 게임체인저 댓글:  조회:234  추천:0  2023-08-08
1632년 독일 라이프치히 남쪽 뤼첸이란 작은 마을에서 ‘30년 전쟁’(1618∼1648년) 역사상 가장 크고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다. 신교의 영웅이던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와 구교를 파멸에서 구해낸 용병 대장 발렌슈타인과 용장 파펜하임 백작이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파펜하임이 전사하고 신교 측이 승리했지만, 구스타프도 전사하면서 신교 측도 패배나 다름없는 손실을 입었다. 양측은 병력은 각각 현재의 사단 규모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전투였다. 그러나 당시 구교 측의 대포는 겨우 60문이었다. 신교 측은 더 적었다. 현대 기준에서 보면 60문은 대단한 양이지만, 당시 대포의 화력이나 발사 속도로 보면 야포 6문 정도를 보유한 현대의 포병 중대의 화력에도 훨씬 못 미칠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 화력으로도 단 하루에 각각 3000명 이상이 전사하고, 사령관까지 전사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20세기 전쟁에서 대포의 위력과 역할은 상상 이상으로 발전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후 연합군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여러 번의 공세를 반복했다. 하지만 독일군 대대는 단 4문의 88mm 포와 2문의 75mm 돌격포로 단 하루 동안 영국군 전차 40대 이상을 파괴함으로써 영국군 전차 연대의 공격을 좌절시켰다.   함포의 위력은 더 대단했다. 독일군은 여러 번 성공적인 반격 작전을 펼쳤지만, 연합군을 바다로 밀어내기 전에 해상에 자리 잡고 있던 함선에서 발사하는 함포에 번번이 격퇴당했다. 함포가 엄호하는 연합군 교두보는 난공불락이었다. 아무리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용감한 병사도 주변에서 함포가 작렬하기 시작하면 버텨내지 못했다. 드론, 재블린, 하이마스 등 온갖 첨단 무기가 활약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정작 화제가 되고 있는 건 155mm 포탄이다. 우크라이나군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연간 생산량의 3배에 달하는 100만 발의 포탄을 소모하고 있다. 러시아는 포탄이 부족해지면서 조선에까지 손을 벌리고 있다. 이러다가 진정한 게임체인저는 포탄, 아니 포탄 생산능력이 될 것 같다. 첨단 무기 못지않게 재래식 무기, 기본에도 충실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동아일보 입력 2023-08-07 23:33
3    [3] 잔다르크·나폴레옹·드골… 800년을 지켜본 聖母 댓글:  조회:344  추천:0  2022-09-16
[파리 노트르담 성당] - 켈트 시대 처녀를 제물로 바치던 곳 로마 시대엔 주피터 신전 자리… 기독교化 된 뒤 생테티엔 소성당, 12세기에 마리아 대성당 들어서 - 200년간 건축, 프랑스 국민 성당 루이 7세, 헝가리 등 지원받아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 1944년 파리 해방 날 ‘테데움’ 연주 - 800년 된 벽돌이 내는 빛과 소리 장미창으로 비치는 신비한 빛과 24㎞ 오가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 마치 건물이 춤을 추는 듯 ‘황홀’ 파리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시테섬은 종교적으로 늘 중요한 성지였다. 켈트 시대에 이곳은 드루이드 사제가 처녀를 희생물로 바치던 곳이었다. 로마 시대에는 황제와 주피터 신을 기리는 신전을 지었지만 동시에 켈트 신들도 함께 모셨다. 기독교화 이후에는 생테티엔(Saint-Etienne·스테판 성인) 성당이 자리 잡았다. 이 성당이 너무 협소해지자 12세기에 성모 마리아를 모시는 대성당을 증축하게 된 것이다. 서기 1000년경부터 큰 변화가 일어났다. 수백 년 동안 유럽을 괴롭히던 이슬람·바이킹·마자르족 등 외부 세력의 침략이 끝나 안정 단계에 들어가면서 경제가 살아났고, 동시에 종교적 열기도 달아올랐다. 이 무렵 각지에서 석조 성당을 건축했다. 글라베르(Radulfus Glaber) 수도사가 이 사실을 흥미롭게 기록했다. "마치 온 세상이 과거의 짐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되어 교회라는 하얀 망토를 입은 듯했다." 그러니까 유럽 도시마다 중심부에 돌로 지은 흰 성당이 자리 잡은 것은 대략 이 시기에 시작된 일이다. 그 돌들은 근처 채석장이나 도시 지하에서 캐냈다. 파리만 해도 시내 여러 지역에서 돌을 캐내 석재로 썼기 때문에 지하가 공동(空洞) 상태인 곳이 많다. 유럽에서 많이 나는 석회암이나 대리석은 캐낸 직후에는 비교적 연해서 톱으로 썰고 다듬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유럽 각지에 석조 건물이 들어설 수 있었지만, 너무 단단해서 손질하기 힘든 화강암이 나는 우리나라에는 석조 건물이 많지 않다. 노트르담 성당 외벽의 54개 괴물 석상(가고일·Gargoyle) 중 가장 유명한 '라 스트리주(La Stryge)'. 그리스어로 '야행성의 새'를 의미하며 성당 꼭대기에서 아름다운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는 듯하다. 성모를 기리기 위해 200년 동안 건축 이 시기에 건조된 성당 중에는 마리아에게 바치는 성당이 많다. 이전에는 순교자나 성인에게 바치는 성당 위주였는데, 이제는 사방에 노트르담(Notre-Dame·성모, 영어로는 Our Lady) 성당들이 들어섰다. 마리아 숭배가 크게 확산된 것이다. 죄를 이기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마리아는 어머니 같은 따뜻한 위안을 준다. "예수는 성모의 뜻을 조금도 거부하지 않으며, 성모께서 바라는 바를 다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퍼졌다. 천사와 성인들이 보기에 끔찍한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서도 성모께서 개입하시어 사면해 주시니, 그 앞에서 사람들은 비통함을 내려놓는다. 신학자와 수도사들이 이런 종교적 열정을 다듬어 체계적 교리와 의례를 만들어 갔다. 예컨대 스콜라 철학의 비조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1033~1109)가 주창한 '하느님 아들의 육화(肉化·Incarnation)의 필연성'이라는 교리에서는 마리아가 핵심 역할을 맡는다. 샤르트르 성당 학교에서 활동한 주교 풀베르(Fulbert)는 성모 탄신 축일을 강조하고 거기에 맞는 의례와 설교를 마련했다. 이 성당 학교 문헌에는 심지어 풀베르 주교가 병에 시달릴 때 성모가 현현하여 젖을 먹여 구원해 주었다는 기적 이야기도 전한다.   파리에 성모를 기리는 성당을 건축하기로 결정한 국왕은 루이 7세다. 그는 왕국의 수도에 걸맞은 대성당을 짓기 위해 국고에서 거액을 지원하고 국내외에서 많은 자금을 끌어왔다. 이슈트반 국왕(재위 1000~1038) 아래 기독교를 받아들인 헝가리는 아예 나라 전체가 마리아의 봉토(封土)라고 선언했고, 파리에 노트르담 성당을 건축한다고 하자 기꺼이 헌금을 보냈다. 1163년 교황 알렉산더 3세의 축성과 함께 기공식을 한 이후 200년에 걸쳐 건축을 해나갔다. 돌을 다듬어 벽, 기둥, 아치를 쌓아 올리고, 성모·성부·성인·구약시대 족장들의 조각상을 만들어 붙이는 일은 그야말로 돌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작업이었다. 프랑스 역사와 함께한 성당 노트르담 성당은 단지 파리를 위한 성당이 아니라 프랑스 국민 성당으로 자리 잡아 갔다. 프랑스 역사의 중요 사건들이 대성당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다. 루이 13세는 결혼 후 20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만일 후계자 아들을 주신다면 프랑스를 마리아에게 바치겠다고 서원했다. 마침내 장래의 루이 14세가 될 아들을 얻자 '신이 주신 아이'라는 의미로 디외도네(Dieu-Donné)라 불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노트르담 성당 중앙 제단의 성모상 오른쪽에 왕관을 바치는 루이 13세상, 그리고 반대쪽에 손을 심장에 얹어 신심을 표시하는 루이 14세상을 세웠다. 이 성당에서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고, 1909년 잔다르크를 복자(福者)로 시복했으며, 파리가 해방된 1944년 8월 26일에는 시민들이 모여 테데움(Te deum·신을 찬미하는 성가)을 연주했고, 1970년에는 드골 장례식을 거행했다. 동시에 예수의 가시관을 노트르담으로 옮긴 19세기 이후부터는 중요한 순례 장소로 떠올랐다(생트샤펠 편 참조).   중세 고딕건축 최고의 걸작 파리 노트르담 성당 앞 광장.   8000개가 넘는 파이프로 만든 거대한 오르간. 2019년 여름 대화재로 큰 손상을 입기 전, 노트르담 성당은 분명 현존하는 성당 중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 중 하나였다. 사방의 장미창을 통해 들어온 신비한 빛으로 물드는 내부 공간은 경이감을 느끼게 한다. 성스러운 분위기를 완성해 주는 것은 종교음악이다. 노트르담 성당 건축은 서양음악의 새로운 발전과 궤를 같이했다. 특히 1403년 이후 설치된 파이프오르간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8000개가 넘는 파이프를 통해 나오는 오늘날의 오르간 소리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노트르담 성당의 '대오르간 담당자(titulaires des grands orgues)'는 올리비에 라트리(Olivier Latry) 같은 세계 최정상급 연주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연주를 시작하면 파이프를 떠난 소리가 길이 120m, 폭 48m, 높이 69m의 공간을 날아가 반대편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고 다시 이쪽 벽에 부딪혀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파동이 벽에 충돌할 때마다 약간씩 에너지를 잃어가므로 결국 우리 귀로 들을 수 있는 범위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러기까지 오르간 소리는 24㎞를 여행하며 수초 동안 반향(反響)을 이룬다. 이 과정에서 주파수가 높은 고음부터 먼저 지워지고 저음은 약간 더 늦게까지 남아서 독특한 효과를 얻는다. 각각의 성당은 모두 다른 구조와 재질을 하고 있으므로 오르간 음악 또한 다른 음색을 낸다. 오르간 주자는 '악기만으로 연주하는 게 아니라 건물과 함께 연주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800년 된 돌집이 만들어내는 웅장한 음악이 가득 찬 그곳에서는 귀로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온몸이 음악 속에 들어앉아 있는 느낌을 받는다. 몇 년 전 여름, 노트르담 성당에서 들었던 오르간 연주를 잊을 수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나 보수 작업을 마치면 노트르담 성당은 다시 황홀한 빛과 소리의 조화를 만들어내겠지만, 그것은 분명 예전과는 또 다른 모습, 또 다른 소리일 것이다. [비올레르뒤크, 20세기 건축 혁신 불러] 현재 우리가 보는 노트르담 성당은 엄밀히 말하면 중세 건물이 아니라 19세기 후반에 개축한 건물이다. 예전 건물은 프랑스혁명기에 많은 손상을 입어 폐허처럼 변했다. '파리의 노트르담'을 쓴 빅토르 위고 같은 사람들이 성당을 비롯한 구(舊)파리의 모습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폈다. 1843년 프랑스 문화부는 노트르담 성당 보존 사업 콩쿠르를 열었는데, 비올레르뒤크의 안이 채택되었다. 특별법으로 이 사업을 지원하는 가운데 30년에 걸친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서쪽 정면의 조각들, 첨탑, 내부 벽화가 새로 제작되었다. 주의할 점은 완벽하게 중세 건물을 복원한 게 아니라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원래의 노트르담 성당에 어울린다고 생각한 모습,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이상화된 성당(cathédrale idéale)’을 구현했다는 점이다. 다만 괴물 형상을 한 가고일(gargoyle) 석상 54개를 제작해서 붙인 것은 건축가의 과도한 상상의 산물이다. 성당 주변 지역도 원래는 주택과 소성당 등이 얽힌 복잡한 구역이었는데, 개축 과정에서 많이 정리하여 오늘날과 같은 넓은 광장을 조성했다. 비올레르뒤크는 자신의 작업 내용을 책으로 출판했는데, 이것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건축을 혁신한 르코르뷔지에가 이 책을 탐독했고, 가우디도 그 영향을 받아 바르셀로나에서 자신의 ‘이상화된 성당’ 건축을 시도했다.
[프랑스 생드니 성당] - 이교도에 참수당한 파리 초대 주교 자신의 목 들고 찬송가 부르며 몽마르트르 언덕 위를 걷는 기적… 200년 지나 5세기에 수도원 성당 - 사파이어·루비 반짝이는 지상 천국 고트족 이름 딴 고딕 건축의 효시… 12세기 국왕 고문인 원장이 개축 베르나르두스 “화려하다” 비판 생드니 성당(Basilique royale de Saint-Denis)의 역사는 영험한 성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서기 250년경, 드니(Denis)가 두 동료와 함께 파리에 초대 주교로 파견되었다. 그렇지만 드니는 이교(異敎)를 신봉하던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로마제국 관리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참수되었다. 그가 순교한 몽스 마르티스(Mons Martis, ‘순교자 언덕’)는 후일 몽마르트르(Montmartre)로 불리게 된다. 이때 드니 성인은 천사로부터 놀라운 권능을 부여받아, 자신의 잘린 머리를 손으로 받쳐 들고 언덕 위로 걸어 올라가는 기적을 선보였다. 그냥 걷기만 한 게 아니다. 입에서는 계속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몽마르트르 언덕을 넘어 파리 북쪽 외곽까지 먼 길을 걸어가서 쓰러진 곳이 현재의 생드니 성당 자리다. 200년 후, 파리의 수호 성녀 주누비에브가 이 근처의 땅을 얻어 수도원 성당을 지었고, 7세기에는 다고베르트 왕의 명령으로 드니 성인의 유물들을 안치하여 이곳이 순례 장소로 각광받았다. 다고베르트 왕 자신이 사후에 이곳에 묻힌 것을 계기로 이 성당은 프랑스 왕실의 묘소가 되었다. 이때의 생드니 성당은 현재 보는 바와 같은 장대한 건물은 아니었다. 우리 생각과 달리 중세 초기 성당들은 대부분 작은 목조건물이었다. 서기 1000년이 지나 인구가 크게 늘면서 기존 성당이 너무 협소해져 더 큰 공간이 필요해졌고, 그로 인해 각지에 성당 재건축 붐이 일었다. 특히 파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북부 지방에서는 고딕 양식이라 부르는 새로운 형태의 대형 성당들이 지어졌다. 생드니 성당이 바로 이 고딕 양식 건축의 효시에 해당한다. 고딕(Gothic)이라는 용어는 게르만족 일파인 고트족(Goth)에서 유래했다. 다음 시대인 르네상스 시기에 만들어낸 이 말은 중세 예술을 야만적이라고 조롱하는 의미였다. 고트족이 로마를 공격하고 파괴하여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적 규범과 미적 균형이 깨져서 '괴물 같은 무질서'가 시작되었으며, 고딕 성당이 바로 그런 데서 나온 저급한 건축물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장엄하고도 화려한 고딕 성당을 지은 당시 사람들은 자부심이 가득했다.   수호성인 드니가 쓰러진 파리 북부 외곽에 세워진 생드니성당. 고딕 건축 양식의 초기 걸작으로 꼽힌다. 생드니 성당의 개축 사업을 주도한 사람은 쉬제(Suger, 1081~1151) 수도원장이다. 그는 1122년 수도원장으로 선출된 후 1151년에 죽을 때까지 30년 가까이 이 직을 수행했으며, 동시에 루이 6세와 루이 7세 두 국왕의 고문 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종교와 정치 양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1136년 재건축이 시작되어 1144년에 마침내 새로운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국왕 루이 7세와 왕비 알리에노르를 비롯하여 이 웅대한 성당을 둘러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단지 건물의 규모가 컸기 때문이 아니다. 쉬제는 내부 장식에도 엄청난 공을 들였다. 프랑스 전역에서 최고의 목수, 금 세공업자, 보석 장인, 주물공들을 모아서 벽들을 찬란하게 꾸몄다. 하늘 높이 솟구쳐 있으면서 널찍하게 탁 트인 성당 내부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사방에서 빛이 흘러들었다. 이전에 어두컴컴하고 비좁았던 교회 내부는 빛으로 가득한 황홀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프랑스혁명 때 파괴당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었더라면 이 건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라는 칭송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토록 화려하게 교회를 꾸미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 시대 최고의 신학자이자 금욕의 수도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us of Clairvaux, 1090~1153)가 정색하고 비판했다. 수도자와 신자들은 이 세상 너머 영원한 구원의 길을 보아야지 현세의 아름다움에 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실제로 베르나르두스는 오직 신앙 속에 파묻혀 있을 뿐, 이 세상의 일들에는 눈을 감았다. 제네바로 여행을 갔지만 그곳에 호수가 있는지조차 몰랐고, 4년 세월을 보낸 수도원의 식당 천장이 둥근지 네모난지 알 바 아니고, 백마를 타고 나흘간 프랑스를 가로질렀지만 그 말의 생김새나 색깔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구도자의 눈에 휘황찬란한 성당이 마음에 들 리 없다. 그는 이렇게 일침을 가했다. "생드니에서는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돌렸지만, 신의 것을 신에게 돌리지는 않았노라."   (왼쪽부터)파리 초대 주교 성인 드니가 처형된 후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걸어가는 모습. 생드니성당 내부의 아치형 스테인드글라스. 프랑스 역대 국왕과 왕비, 대귀족 등이 안장된 성당 지하의 왕실 묘지. 성당 내부 중앙의 아치형 천장과 신도석. 베르나르두스와 쉬제는 대척점에 서 있다. 둘의 대립은 단지 믿음의 자세나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기본 질서가 어떻게 짜여야 마땅한가 하는 정치적·신학적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실을 이해하려면 쉬제가 수도원장이 된 1122년이 마침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와 로마 교황 칼리스투스 2세 사이에 보름스협약(Concordat of Worms)이 체결된 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황제와 교황 양측은 오랫동안 소위 서임권(敍任權) 투쟁을 벌여왔다. 주교와 대수도원장 임명을 누가 하느냐, 교황에게 권리가 있느냐 아니면 황제에게 권리가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지방 차원에서 보면 교회 재산을 놓고 벌이는 속된 싸움일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세상의 질서를 짜는 데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를 놓고 벌어지는 거대한 투쟁이었다. 교황(교회 권력)이 최고 권위이고 황제(세속 권력)가 이에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보름스협약은 이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양측이 적당히 권리를 양분해 갖는다는 식의 어정쩡한 타협에 그쳤다. 생드니 성당은 이 문제에 대한 프랑스 왕실의 답변이다. 생드니 성당을 최대한 웅장하고 아름답게 짓는 것은 단순히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차원이 아니다. 이곳은 천상의 예루살렘을 보여주는 지상의 모형이었다. 벽면의 사파이어와 루비가 영롱하게 반짝이고, 드넓은 공간에 밝은 빛이 가득 넘치는 성당은 천국의 예시다. 이곳에 들어온 신자들은 지상에 있는 동안 천국을 부분적으로 느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이 중간 경유지에 왕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수호성인인 드니 성인의 품 안에 역대 국왕들이 함께 누워 있다. 하늘나라와 지상 세계의 중개자인 성인이 국왕과 함께 모든 백성을 인도한다. 세속 권력과 무관하게 교회가 독자적으로 영적인 인도를 해야 한다는 베르나르두스의 견해에 맞서 쉬제는 '제2의 그리스도'인 국왕이 신성한 힘을 받아 백성을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쉬제는 고딕 성당 속에서 왕권과 교회의 새로운 동맹을 추구한 것이다. 유럽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중 하나는 정치와 종교의 관계다. 고딕 성당은 종교의 힘을 끌어와 왕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연구자들은 고딕 성당 건축의 첫 번째 흐름이 1135~1225년에 파리 주변 200㎞ 내에서 퍼졌다가, 그 후 2차적으로 스트라스부르, 리옹, 알비 등 더 먼 지역으로 퍼져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국왕 권력의 확산과 고딕 성당의 건립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국왕 42명, 왕비 32명, 대귀족 63명, 충신 10명이 잠들어 있는 생드니 성당은 왕실이 주도한 고딕 혁명의 선구자였다. 프랑스 왕권이 성장해 가고, 또 혁명에 붕괴되는 역사가 성당의 돌에 오롯이 스며들어 있다. [佛혁명 때 공격당한 성당] 국왕 42명·왕비 32명 시신은 파헤쳐지고… 생드니 성당은 프랑스 왕실과 연관된 핵심 장소라는 이유 때문에 프랑스혁명 당시 공격당했다. 혁명이 정점에 이른 1793년, 국민공회(國民公會, 1792~1795년 존립했던 혁명 의회)는 '지난 시대 왕들의 끔찍한 기억들을 완전히 지워버리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미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선언한 마당에 지난 왕정을 상기시키는 기념물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베르트랑 바레르 의원의 발의로 '혁명적 파괴' 운동이 시작되었다. 군중이 들이닥쳐 국왕 묘들을 열고 시체들을 손상한 후 공동묘지에 던져 넣었다. 푸아리에(Dom Poirier)라는 베네딕트회 출신 인사가 당시 사태를 관찰하고 기록을 남겼다. '루이 13세의 시신은 잘 보존되어 있었고 특히 수염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루이 14세의 시신도 비교적 잘 보존되었지만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국왕의 수염을 한 올 뽑아서 기념으로 가져갔다. 왕관과 왕홀 등 많은 보물이 발굴되었지만 대부분 녹여서 다른 용도로 썼다. 성당 건물 자체도 끔찍한 파괴를 겪었다. 한동안 성당 건물은 ‘이성의 전당’이라는 인위적 혁명 종교의 숭배 장소로 사용되었지만 곧 폐허로 변했다. 나폴레옹 시대와 왕정 복고기를 거치며 국왕들 시신을 수습하고 건물을 수리하여 오늘날 모습을 되찾았다.
[신성했지만 가혹했던 聖王 루이 9세]   - 빈민과 함께 식사, 유대인은 敵 나병환자·매춘부 위한 시설 지어 “유대인은 고리대금업자” 박해… 신성모독하면 혀와 입술 잘라 - 괴질서 살아난 뒤 십자군 원정 "생명 되찾은 건 하느님의 뜻" 2만5000명 끌고 출전했다 포로로… 40만 리브르 거액 내고 풀려나 - 몽골군과 동맹, 改宗까지 시도 "이슬람 협공하자" 몽골에 선교사 국민 뜻 무시하고 다시 출전, 病死… 아들 필리프 3세, 뼈만 추려 귀국 루이 9세(1214-1270)보다 신심 깊은 왕이 또 있을까? 그는 두 차례나 십자군에 직접 참전하여 이슬람 세력과 싸우다가 끝내 아프리카에서 죽었고, 교황청은 이를 기려 성인(聖人)으로 시성하였다. 국왕이자 성인인 루이 9세는 성왕(聖王·생루이 Saint Louis)으로 불린다. 성스러운 왕이 통치하는 나라는 어떠했을까? 1226년, 부왕 루이 8세가 사망했을 때 루이는 고작 12세. 성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 카스티야의 블랑슈(Blanche of Castile·1188-1252)가 섭정을 맡았다. 루이에게 한량없이 깊은 신앙심을 불어넣은 분이 바로 어머니다. '네가 죄를 짓는 걸 보느니 차라리 내 발밑에 쓰러져 죽는 걸 보겠다'는 섬뜩한 경고를 하고,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의 위협에 늘 대비하라고 가르쳤다. 루이는 말총으로 만든 참회용 속옷을 입고, 침대 머리맡에서 하룻밤에 50번씩 무릎 꿇고 기도드리고, 자주 금식했다. 루이는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를 왕비로 맞았는데, 부부 사이가 너무 좋아서 늘 붙어 있는 게 오히려 문제였다. 국왕께서 헛된 쾌락에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 모후는 아들 내외가 자는 방에 불시에 찾아와서 감시했다. 국왕 부부는 어머니의 불심검문을 피해 계단에서 동침하곤 했다는데, 그렇게 하여 아이를 11명 낳았다. 국왕은 또한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감화를 받아 청빈의 삶을 실천했다. 옷과 음식을 최대한 검소하게 차리는 한편, 궁정에 빈민들을 데려와 몸소 세족식을 하고 함께 식사했다. 나병 환자와 맹인을 돕는 시설과 매춘부들을 교정하는 시설도 지었다. 다른 한편 신앙의 적에 대해서는 철저히 억압했다. 예컨대 신성모독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혀와 입술을 잘라내도록 조치했다.   루이 9세가 성지(聖地) 예루살렘 탈환을 명분으로 이끌었던 제7차 십자군 원정(1248~1250). 이처럼 기독교 정신에 철두철미한 국왕에게 고리대금업자, 특히 유대인의 존재가 달가울 리 없다. 그는 원금 이상으로 받는 돈은 모두 고리대금이며 결국 도둑질이라고 선언했다. 유대인들은 증오할 만한 고리대금업자일 뿐 아니라, 그들이 읽는 탈무드에 기독교 교리를 매도하는 사악한 내용이 들어 있다는 고발이 제기되었다. 루이는 철저한 반유대주의 정책을 폈다. 탈무드 1만2000권을 공개 소각하고, 유대인 표지를 달게 하고, 재산을 빼앗더니 급기야 모든 유대인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700년 뒤 20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주앵빌(Joinville)이 쓴 성왕의 전기에 따르면 국왕은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표현했다. "유대인들과는 논쟁하지 말라. 그들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 비방하는 말을 들으면 칼을 배 속 깊숙이 찔러 넣어라." 30대 중반에 국왕이 십자군 참전을 결정한 데에는 죽음 직전까지 간 경험과 관련이 있다. 1244년 겨울, 그는 괴질에 걸려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는데 몇 주 후 기적같이 완쾌했다. 하느님 뜻으로 생명을 되찾았다고 판단한 국왕은 감사의 표시로 십자군 원정을 결정했다. 당장은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떠나지 못했지만, 4년 후인 1248년, 2만5000명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했다. 이곳의 이슬람 세력을 무찌른 후 성지(聖地)로 행군하겠다는 계획이었으나 무모한 군사작전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신앙의 적을 무찌르기는커녕 오히려 포로로 잡혀 40만 리브르라는 거액을 내고서야 겨우 풀려났다. 그 후 4년 가까이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분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던 중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히 귀국했다. 프랑스의 왕 루이 9세(1214~1270)     이집트로 십자군 원정을 떠난 배경에는 몽골 제국과의 외교 협상 문제가 있다. 페르시아에 주둔하던 몽골군 사령관 엘지기데이(Eljigidei)가 사신을 보내와서 프랑스가 이집트를 공격하고 자신은 바그다드를 공격하여 이슬람 세력을 양쪽에서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몽골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했다. 아시아 먼 지역에 있는 엄청난 군사 강국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 나라의 정확한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루이는 몽골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동맹을 맺자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프란치스코회 사제 루브룩이 선교사로 파견됐다. 예수의 생애를 그린 비단 텐트도 선물로 보냈다. 루브룩은 몽케 칸을 직접 만났지만 물론 칸의 기독교도 개종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미션이었다. 다만 루브룩은 귀국 후 유럽에 몽골 사정을 처음으로 자세히 소개한 '여행기(Itinerarium)'를 저술했다. 한 번은 몰라도 국왕이 두 번째로 십자군 원정을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모든 사람이 다 반대했지만 국왕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자금 사정도 안 좋고, 이미 십자군 열기가 많이 사그라져서 동맹을 구하는 일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이미 50대에 들어선 국왕 자신의 건강 상태가 나빴다. 1267년, 아들들과 함께 배에 올랐을 때 국왕은 이미 이질에 걸린 상태였다. 목적지는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였다. 고대 카르타고 유적지 부근에 캠프를 차리고 국왕의 동생 샤를 당주(Charles d'Anjou)가 지휘하는 응원군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북아프리카의 열기 속에 이질에 걸린 병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왕자 트리스탕이 쓰러졌고, 곧이어 국왕 자신도 사망했다. 살아남은 아들이 필리프 3세로 등극한 후 부친의 시신을 수습해 프랑스로 귀국했다. 먼 외지에서 사체를 옮겨가기 위해 중세 관습에 따라 육탈(肉脫, mos Teutonicus·décarnisation) 과정을 수행했다. 팔다리를 잘라낸 국왕의 사체를 포도주에 몇 시간 푹 삶아 살을 떼어내고 뼈만 깨끗이 추려서 프랑스로 옮겨갔다. 국왕의 시신은 파리 북쪽에 있는 생드니 국왕 묘지에 안장했다. 일반 병사들은 제대로 장례를 치를 여유가 없었으므로 푸대에 시체를 담아 바다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 난 후 남은 병력으로 이슬람군과 전투를 하려니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렇지만 당시 적군도 질병에 시달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양측은 서둘러 휴전 조약을 맺었다. 파리 국립문서보관소에 보존된 휴전 문서를 보면 포로를 석방하고, 튀니지 태수가 거액의 배상금을 물고, 기독교 전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이슬람 측이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는 내용이다. 물론 이슬람 측이 그런 내용을 정말로 지킬 의도는 없었다. 십자군이 프랑스로 돌아간 후 튀니지에서는 불명예스러운 카르타고 유적지를 완전히 파괴했다. 기독교 자유 선교 같은 건 당연히 거부했고, 오히려 강력한 이슬람 성전(지하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쪽은 그쪽 나름대로 정당화가 필요했던지라 루이 9세가 사실은 튀니지에 와서 이슬람교도로 개종했으며, 오히려 이슬람의 성인이 되었다는 근거 없는 신화가 유포되었다. 국왕이 사망한 후 프랑스 전역에서 성인 추대 움직임이 일어났고, 결국 30년도 안 지난 1297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루이 9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국왕 자신은 성스러운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종교 갈등과 전쟁, 인종 갈등으로 얼룩진 그의 치세는 선정(善政)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예수의 가시관을 거액에 구입… 보관 위해 성당 지어]   1239년 루이 9세가 사들인 예수의 가시면류관. 성왕 루이가 후대에 남긴 중요한 유산으로는 파리 시테 섬에 있는 생트샤펠(Sainte Chapelle)이 있다. 이곳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때 이마에 둘려 있던 가시관을 보관하기 위해 특별히 지은 소성당이다. 원래 이 가시관은 비잔틴 제국의 국보였다. 이 성물(聖物)이 파리에 오게 된 계기는 말썽 많은 4차 십자군이다. 1204년, 비잔틴 제국을 돕겠다며 떠난 십자군이 오히려 이 나라를 정복하고 소위 라틴 제국을 세워 50년 넘게 통치했다(1204~1261). 그러던 중 라틴 제국 황제 보두앵 2세가 재정 상황이 악화되자 베네치아의 은행가에게 거액을 빌리면서 가시관을 담보로 내놓았다. 이 소식을 접한 성왕 루이는 13만5000리브르라는 엄청난 거액을 갚아주고 이 성물을 파리로 가져왔다. 이로써 파리는 새로운 예루살렘이며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임을 천명하게 됐다. 가시관뿐 아니라 십자가 일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 예수의 입에 물렸던 해면 등을 함께 확보한 성왕 루이는 이 보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왕실 예배당인 생트샤펠을 지었다. 이 건물은 13세기 고딕 건축의 보석으로서, 특히 벽면을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구약의 첫 부분부터 신약의 마지막 부분까지 모두 1100장면을 표현한 후, 마지막 부분에 성 유물을 파리로 모셔오는 루이 국왕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 가시관은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보존하며 특별 미사 때 신자들에게 공개했다. 2019년 노트르담 성당에 큰 화재가 났을 때 소방관들은 매뉴얼에 따라 가장 먼저 가시관을 구해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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