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수필>
지켜주지 못한 약속
김은철
나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 중학교 때에는 조선의 노래들을 무척 즐겼는데 리면상이나 김옥성같은 음악대가들의 노래를 부를 때면 나도 꼭 음악대가가 되어 좋은 노래를 작곡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래서 고중을 졸업한 그해 심양음악학원 작곡계를 지망하고 시험을 치렀으나 락방되고 말았다. 나는 일반대학시험을 다시 쳐보라는 아버지의 분부를 듣지 않고 조선에 가서 평양음악대학에 붙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집에서 음악책이나 뒤지면서 울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이 1961년 겨울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소학교 엄교장이 나를 찾아왔다.
“은철이, 채옥선생이 곧 해산하게 되는데 서너달 대과를 해줄 수 없겠소?”
채옥선생이란 엄교장의 부인이였다.
“그렇게 하지요.”
나는 첫마디에 응낙했다. 조선류학을 가려면 돈이 수요되였는데 대과선생을 하면 한달에 31원 50전을 현금으로 받을 수 있었다. 얼마 벌지 못하는 생산대 일이 싫도록 지겨웠던 나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며칠후부터 출근하게 되였다.
학교에는 다섯분의 선생이 있었다. 다섯선생중에 희숙이라는 처녀선생 한분이 있었다. 그녀는 내가 초중을 다닐 때 웃반 학생이였다. 이쁘장 하게 생긴 그녀는 초중을 졸업하고 목단강시 조선족사범학교에 갔다가 그 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마을학교에 분배되여 교편을 잡고있었다. 그녀는 사랑을 약속한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남자친구는 어느 공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이였다. 외지 처녀인 그녀는 학교옆 가까이 있는 늙은 양주가 살고 있는 집에서 웃방을 차지하고 하숙을 하고있었다.
온 마을의 남녀로소가 한곳에 모여 하루 세끼식사를 하던 대대 공공식당은 식량이 극도로 긴장하여 이젠 밥이나 죽을 쑤어 가정 인구에 따라 배정해주는 식당으로 변했다. 집집마다 식당에 가 밥이나 죽을 타 가지고 집에 와서 국이나 혹은 간단한 채를 하여 먹군하였다. 그녀는 홑몸이여서 하루 세끼 ‘위인민복’라고 쓴 큰 고뿌를 가지고 식당에 가서 밥이나 죽을 타 가지고 학교에 와서 먹군하였다. 하숙집 늙은이들과 함께 식사할 수도 있었으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늙은이들과 젊은들에게 공급하는 밥량이 달랐다. 로동력을 상실한 늙은이들한테 주는 량이 젊은이들보다 적었다. 그래서 주인집 늙은이들은 타온 밥이나 죽에다 시래기나 무우쪼가리 같은 것들을 더 넣고 끓여먹군했다. 서로 밥을 타오는 량이 같지 않으니 그녀는 불편하게 여겼는지 교무실에 가지고 와서 따로 먹군 하였다. 때로는 교무실 난로에다 된장국같은 것을 끓이군 했는데 선생들은 그 구수한 된장냄새에 군침을 삼키며 굶주림을 달래기도 했다. 아.얼마나 굶주렸던 년대였던가!
그러던 어느날 저녁 나는 어머니가 식당에서 타온 옥수수죽을 아버지랑 셋이서 나눠먹고 학교로 갔다. 때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단 한숫갈이라도 내 밥그릇에 밥을 더 얹어주었지만 혈기충천하던 한창때라 나는 늘 굶주림에 허덕이군 하였다.
내가 학교에 나가보니 교무실에는 그녀 혼자뿐이였다. 책상위에 잉크병으로 만든 석유등을 켜놓고 책을 보는 척 하던 그녀는 내가 교무실에 들어서자 무언가를 서랍에 쓸어넣고 급급히 밀어넣는 것이였다. 그 행동이 무척 의심스러워 보이였다. 책을 보는 것처럼 하면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가?
“풍금치러 왔소?”
그녀는 태연한척 하면서 물었다. 책상우를 훑어보니 등잔불이 어두운데다 내 책상에서 거리도 좀 멀어 똑똑하게 보이지 않았다.
“풍금도 칠겸 심심해서 나왔소.”
나는 대답을 하면서 저 책상서랍속에 무엇이 있을가하며 추측해 보았다. 어쩐지 그 책상서랍속에 먹을 것을 숨겨놓고 있는 것 같아 자꾸 군침을 삼키게 되였다. 마침 풍금이 놓여있는 벽에 큰 거울이 걸려있어 나는 풍금을 치는척 하면서 거울속에 어슴프레 비낀 그녀의 행동을 주시해 보았다. 드디어 그녀는 책상서랍을 살며시 열더니 무언가를 한줌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솜옷 품속에 넣어 가지고 난로 앞으로 가더니 난로 뚜껑을 열고 집어넣는 것이였다.
“어, 손시려!”
나는 풍금을 치다 말고 손을 입김으로 불면서 난로앞에 다가갔다.
“교무실이 춥지도 않은데….”
그녀는 멈칫 나를 마주 보았다.
“석탄을 좀 더 넣어야지.”
그러면서 나는 부삽에 석탄을 담아들고 난로뚜껑을 열었다. 퇴근후의 난로불은 왕성하지 못했다. 석탄을 더 넣지 않으면 얼마 못가 꺼질 상태였다. 나는 눈이 데꾼해 졌다. 난로안에는 한줌은 잘될 알을 까낸 빈 벼이삭들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여나고 있었다. 나는 대번에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그녀를 암전한 처녀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피뜩 내 머리속에 먼저 떠오른 것은 “밑구멍으로 호박씨를 깐다”는 속담이였다. 그랬건만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내 책상에 가 앉아 노래책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노래가 머리에 들어올리 없었다. 배가 고팠다. 무엇이든 먹고 싶었다. 나는 끝내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엉큼한 마음을 가지고 교무실 서쪽벽구석에 놓여있는 벼이삭마대에 눈을 밖았다. 그렇게 한참을 보다가 일어서 거기에 갔다. 마대안에는 벼이삭들이 반쯤 들어있었다. 그 벼이삭은 낮에 선생들이 학생들을 데리고 논밭에 나가 이삭주이를 해서 모은 것이였다. 매일 오전에는 상과하고 오후에는 학생들을 데리고 이삭주이를 하군했다. 그날 나도 내가 맡은 2학년애들을 데리고 이삭주이를 갔다. 그날 나는 코흘리개 애들을 데리고 마을에서도 3~4리 잘되는 묵혀버린 잡초밭으로 갔다.
그 밭은 농중 시험전이였다. 한쌍에 8만근의 소출을 낼 수 있다면서 작년 겨울내내 농중선생들과 학생들은 그 언땅을 1메터 깊이로 파서 심경을 했다. 그리고 학교변소의 분변과 학생들이 주은 똥거름을 편후 봄이 되자 물을 대고 벼씨를 뿌렸다. 그런데 벼씨가 똥물에서 썩고 논밭이 허리를 넘는 흙구덩이가 되여 사람도 소도 들어갈수 없어 벼이삭 하나 수확하지 못하고 그대로 잡초밭을 만들고 말았다. 온갖 풀들이 무성하게 자랐는데 그속에 간혹 벼이삭들이 간신히 숨어있었다. 그래도 코흘리개 애들은 그 잡초밭속에서 어쩌다 보이는 벼이삭들을 용케도 찾아내였다. 그리고 그 잡초속에서 쥐들이 다른 논밭에서 물고 온 벼이삭을 숨겨놓은 굴도 몇개 찾아냈다. 그렇게 주은 벼이삭은 모두 식당에 바쳤는데 식당에서는 그것을 발방아에 찧어 쌀을 내여 밥짓는데에 보태였다. 식당관리원은 그렇게 보탠 쌀로 밥을 지을 때면 어김없이 학생들을 칭찬하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군하였다. 그런 날에는 분배되는 밥량도 좀 많아지기도 했다. 그런데 선생들이나 학생들은 그렇게 배를 곯으면서도 그 벼이삭을 까서 밥이나 죽같은 것을 쑤어 먹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오직 집체에 바쳐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하기야 그때는 사(私)자를 뽑아버리고 뢰봉을 따라배우는 열조가 백열화 되던 때라 코흘리개 애들이 손을 홀홀 불며 주은 벼이삭을 밥이나 죽을 해 먹겠다고 훔쳐서 손으로 비벼깔 생각을 가지고 있은 선생은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벼이삭을 손바닥으로 비벼까고있었던 것이였다. 만일 이 일을 교장이 알거나 학생들이 알면 뭐라 할가? 도둑놈? 그래 도둑놈이라 할테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망설이다가 끝내는 마대속에 손을 넣었다. 굶주림이 정직과 공성을 잃는 순간이였다. 사익(私益)이 공익(公益)을 깔아뭉개는 순간이였다. 아니, 비리가 의리를 더럽히는 순간이였다. 나는 눈앞에 추위에 손을 홀홀 불면서 이삭주이를 하던 코흘리개 애들이 떠올랐으나 리지를 잃고 한줌 푹 꺼냈다. 그리고 내 책상에 와서 손바닥으로 벼이삭을 비벼서 까기 시작했다. 량심이 꺼렸다. 도둑놈의 짓을 하고있다는 죄의식에 도루 가져다 넣을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내가 말없이 그렇게 하얀 쌀을 일어내자 그녀도 책을 보다 말고 책상서랍을 열고 손바닥으로 쌀을 일어냈다. 나는 또 벼이삭 한줌을 푹 꺼내다가 쌀을 일어냈다. 그녀도 말없이 또 마대속 벼이삭을 꺼내였다. 말없이 나와 그녀의 행동은 일치했고 비리가 빚어낼 미식에 마음은 황홀하기만 했다. 손을 홀홀 불며 벼이삭주이를 하던 코흘리개 애들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눈앞에는 하얀 이밥이 둥둥 떠다녔다. 그녀는 담담히 앉아 부지런히 손놀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저 선생도 나처럼 죄의식에 가책을 느끼고 있을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녀가 뻔뻔스레 보이였다. 참 똥벌레가 제 몸 더러운줄 모르는 겪이였다.
그렇게 까낸 쌀을 그녀는 평시 국같은걸 끓여목던 솥에 넣고 조심스레 씻기시작했다.
“이것두 같이 씻소.”
나는 내책상우에 내가 까낸 쌀도 함께 씻게 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쌀짝 웃더니 한데 넣어 씻기시작했다. 아, 그때 마음맞아 웃어주던 웃음, 그 웃음은 나한테서 그녀에 대한 불신임을 소리없이 기셔주었고 숫총각인 나의 마음속에 미묘한 감정까지 불러일으켰다. 그래서60여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그때 그녀의 웃음은 내 추억속에 그대로 간직되여 있다.
나는 그녀를 거들어 밥을 짓기 시작했다.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굶주림에 시달려 본 사람은 그 냄새가 어떠했음을 짐작하리라!
드디여 밥이 다 되였다. 그해 생일날에도 구경못한 하얀 밥이였다. 시래기를 듬뿍 섞은 밥이나 두병을 섞어 끓인 옥수죽 따위만 먹던 때라 나는 그 밥을 보자 금덩어리를 주은 것보다 더 기뻤다. 우리는 난로위에 벽돌장을 놓고 그 우에 솥을 놓은후 마주앉아 먹기시작했다. 숱갈이 없어 나는 긴 잣대로 밥을 퍼 먹었다. 나는 누군가가 당장 교무실에 뛰어들것 같아 마음이 두근거리였으나 맛나게 먹었다. 그렇게 맛있는 밥을 먹어보기는 난생처음이였다.
밤이 깊어갔다. 온 마을이 깊은 잠에 잠겨있는 고요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이야기도 소곤소곤 나누었다. 굶주리던 때라 전부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고기 돼지고기 개고기로부터 시작해서 사과 배 귤 포도등 과일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학교다닐 때 배가고파 산에 가서 뱀을 잡아 구워 먹던 이야기며 사해소멸 때 참새를 잡아 숙사난로에 구워먹던 이야기며를 밤가는줄 모르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우리둘 사이에 이성관계나 사랑따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때 우리들의 애정관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순결한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신조였다. 먹거리에 대하여 말하다가 나는 그녀에게 물고기를 한때 대접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물고기대접을 해주겠다니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상긋 웃었다.
“정말? 이 추운 겨울에 어디 가서 물고기를 잡소?”
“밤에 보뚝에 가서 잡소. 운수 좋으면 하루저녁에 몇십근도 잡을 수 있소.”
“아이,어떻게?”
그녀는 눈이 동그래서 나를 마주 보았다. 흉년세월이라 강이나 늪에는 고기나 가재따위를 짭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많던 고기와 가재들은 이젠 하루종일 잡아도 빈손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은 물이 고여있는 늪이나 보뚝아래에 얼음구멍을 벌집둥지처럼 파헤치고 하루종일 그물로 훑어냈다. 그랬건만 얼마 잡아내지 못했다. 고기보다 사람수자가 더 많았으니까.
그러나 마을의 몇몇 고기잡이 능수들은 그래도 고기를 남보다 많이 잡아냈다. 그들은 고요한 밤에 고기잡으러 다녔다. 보뚝아래 가까이 얼음구멍을 파면 보를 막은 돌쯤이나 버들시이로 물이 흐르는것이 보인다. 하루종일 사람들이 흐려놓은 흙탕물속에서 요행 숨어서 살아있던 고기들이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을 찾아 올라온다. 손전등으로 비춰보면 어떤 때에는 고기들이 줄을 지어 오르는데 그때 나무가지에 얽어맨 낚시로 고기를 보면서 낚아내면 된다. 운수좋으면 몇십근 잡기는 쉬운 일이였다.
“아니, 그렇게 쉽게 고기를 잡소? 나두 한번 따라가 볼가?”
흥미있게 내 말을 듣던 그녀가 신기해서 고기잡으러 같이 가자고 청들었다. 한밤에 대상이 있는 처녀와 고기잡으러 가다니? 숫총각인 나로서는 약속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고기를 잡아오면 난로앞에서 함께 구워먹자는 약속은 해주었다.
낚시질을 갔다가도 처음에 낚은 붕어를 껍질을 쪽 발라내고 가지고 간 고추장에 푹 찍어먹으면 독특한 맛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벌판에서 고기를 고추장에 끓여먹어도 좋고 꼬챙이에 꿰여서 구워먹은면 그 맛이 더욱 별미이다.
온 마을이 깊이 잠든 고요한 밤, 그녀와 난로에 마주앉아 물고기를 구워먹는 일이 얼마나 흥미있고 랑만적일가!
그러나 나는 수십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녀와의 약속을 지켜주지 못했다. 난로를 가운데 놓고 무언중에 어울린 도둑의 마음으로, 랑만적 련인처럼, 재미있고 맛나게 밥까지 지어 먹었는데도. 아니, 그후 몇번이나 고기 몇마리씩 잡아 오면서도, 나는 그녀와의 약속을 지켜주지 못했다.
리유는 간단했다. 잡은 고기를 보면 다음에 좀 더 잡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아니, 솔찍이 말하면 때마다 밥술을 먼저 놓으시면서 밥을 남기여 나한테 밀어놓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먼저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대상이 있는 외딴 처녀와 잡아온 물고기를 남몰래 난로불에 구워먹을 순 없었다. 비리를 저지르면서 밥을 지어먹던 일이 그토록 랑만적이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겨울방학을 하게 되였다. 방학하는 날 그녀가 물었다.
“물고기 잡으러 다녔소?”
“둬번 갔는데 잡지 못했소.”
그녀는 그렇게 묻고는 그날 오후차로 집에 갔다.
개학을 며칠 앞두고 그녀가 남자친구가 있는 성시학교로 조동되어 갔다고 엄교장이 나한테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그녀를 대신해서 계속 대과선생을 해 달라는 청을 들었다. 나는 엄교장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새해 봄이오자 나는 조선으로 갔다. 그리고 3년후 다시 집에 돌아왔다. 집에 와서 얼마 안되어 문화운동이 일어났고 나는 마을의 학교에서 민반교원으로 선생노릇을 하게 되였다.
60여년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그녀에게서 학교에 문안편지가 오긴 했으나 지금껏 한번도 그녀를 본적은 없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약속을 지켜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나는 지금까지 그녀를 그리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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