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차림에 대한 단상
맹영수
인류의 발전력사를 보면 초기의 인류는 실한오리 걸치지 않고 그냥 라체로 살았었다. 그 영향으로 해선지 지금도 일부 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은 풀잎따위나 혹은 끈으로 일부 은밀한 부분만 가리우고 원시인생활을 하고있다. 그만큼 그들에겐 이성적 매력이나 부끄러움따윈 별로 존재하지 않고있다
. 그로부터 볼수 있는것 처럼 현재 인류의 옷차림은 인간 지혜발단의 한 측면이 아니겠는가
. 환경에 따라 벗고 살아도 능히 살수가 있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왜서 굳이 돈을 팔면서 옷차림을 해야 할까?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말할수가 있고 사색을 할수가 있는 고급동물이다. 다시말해서 인간은 아름다움을 알고 남녀간의 구별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동물이다. 그밖에도 인간이 옷차림을 하는 리유는 대개 네개 방면에 있다고 느껴진다
. 첫째로 인간은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옷차림을 하고있다. 고온이나 엄한…등에 대비하기 위해 인간은 옷차림으로 자기를 보호해야 한다. 둘째로 인간은 바른 례의를 지키기 위해서 옷차림을 하고있다. 인간은 남녀구별을 알고 속되고 야한것에 수치심을 알기에 적당한 옷차림으로 그러한것을 배제 하고있다. 세째로 인간은 옷차림으로 자기의 개성을 나타내고있다.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부동한 차림을 한것은 옷차림으로 자기의 개성을 밝히는것과 다름없는것이 아니겠는가? 네째로 옷차림은 사회적신분을 나타낸다. 이를테면 군복은 군인신분을 교복은 학생신분을…필자는 옷을 입는 리유가 대개 이상 네가지리유가 아닐가고 생각한다.
그런데 거리를 걷다보면 요즘 세상엔 상술한 리유외에도 또 다른 리유가 따르지 않는지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누군가 여름은 로출의 계절이고 시각의 계절이라더니 거리에서나 혹은 공공장소에서 시원한 옷차림들을 종종 볼수가 있다. 미끈한 다리를 자랑하듯 녀성들의 짧은 바지들과 그에 어울리는 상의는 어느정도 여름의 거리에 상쾌함과 아름다운을 받쳐주고있다. 그러나 뭐든 한계가 있다고 지나친 로출은 자신의 품위를 망가지게 하는 천박한 유혹으로 밖에 더 볼수가 없다. 입은것인지? 아니면 벗는것인지? 그렇찮으면 걸친것인지?...
며칠전 필자는 친구와 함께 청년광장을 거닐다가 바로 그런 야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대지에 서서히 어둠의 장막이 내릴쯤이면 강변에 잇닿은 마루광장에서는 은은한 원무곡이 울려퍼지군 한다. 원무곡에 맞춰 쌍쌍히 돌아가는 춤군들속에서 나는 오십대의 한 녀성이 미니 치마를 입고 돌아가는것을 보게 되였는데 치마 길이가 어찌도 짜른지 움직일 때마다 팬티마저 보여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한창 물덤벙 술덤벙 하는 십대나 이십대들이라면 그쯤에서 청춘의 오기와 광열로 보아줄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성숙되고 안정된 오십대 녀성이 그런 옷차림을 했다는 자체에서 나는 도무지 변명의 끈을 풀수가 없었다. 맹목적인 류행이라할까? 생각이 없다고 할까? 아니면 오망이라할까?...
솔직히 나이와 녀성이라는 신분마저 모르는 이런 사람에게 생각이 있은들 어찌 건전한 생각이 나올까?
옷차림은 하나의 류행이면서도 하나의 신분에 대한 상징이라고 했다. 솔직히 서양의 옷차림은 몸매를 두드려지는데 있다면 동양의 옷차림은 전통적으로 감추려하는데 있다고 했다. 그 실례로 우리민족의 전통적 한복이 바로 그런 류형에 속하고있다
. 지금은 글로벌세상이다. 그만큼 옷차림 역시 세계적 조류에 따라가야 한다고 느껴진다. 허나 서양과 동양은 필경 다르고 민족과 민족은 필경 다르고 사람과 사람사이도 필경 다르지 않겠는가? 남이 입었다고 해서 자기에게도 고운것이고 어울리는것이 아니다. 옷차림은 그야말로 사람에 따라 하나의 아름다움이고 예술이 아니겠는가? 때론 가장 보수적이고 전통적인것이 가장 어울리고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맹목적인 류행보다는 자기의 몸매와 자기의 나이, 그리고 자기의 신분에 맞는 옷차림이 가장 아름답고 편하고 즐거운 옷차림이 아닐까?
천자만홍이 피듯 알룩달룩 아름다운 옷차림으로 우리의 거리가 보다 아름답고 우리의 시선이 보다 즐겁길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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