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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와 수석(2) / 신철호
산에 취한 사람 돌에 빠진 사람
- 인민공원님 인상기
두만강수석회 성원중에는 산악인이 여럿이 있다. 우선 현임 사무장 한태익선생은 필자와 더불어 백두산문인산악회 성원이고 제2임 회장 리광인선생은 지금 절강월수외국어대에서 일변 강의를 하고 일변 절강연우산악회를 령도하느라 드바삐 보내고있다. 다들 산에 취한 사람이고 돌에 빠진 사람들이다.
과연 산과 돌을 떠나 그보다 더한 취미가 어데 따로 있으리오.
술먹고 취한 후에 얼음에 찬 숭늉과
새벽에 님 가려거든 고쳐 안고 잠든 맛과
세간에 이 두 재미는 남이 알까 하노라
주색을 좋아하는 어떤 한량(閑良)의 넋두리인지 진담인지 알바가 아닌 옛시조이지만, 수석인들의 넋두리는 산과 돌이고, 진담도 산과 돌이다. 특히 산이나 강가에 가서 수석 한점을 얻은 날이면 안해를 멀리하고 그 수석을 고쳐 안고 잠든 맛이 과히 일품이라고 한다. 두만강수석회에서 산이고 돌이고 모두 아우러 “넋두리”의 일인자는 당연 인민공원님이다.
인민공원님은, 필자가 2007년 3월에 공부에 늦바람이 들어 한국에 류학을 온 후 두만강수석회에 참가하신 분이다. 연길시인민공원에 출근한다고 하여 아호가 인민공원님인데 조글로(ckywf)의 수석코너에 리광인선생이 “송화석과 화석류 소유자 - 인민공원님”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사진으로 인민공원님의 모습 및 부분적 송화석과 화석들을 소개한바 있어, 단지 인터넷을 통해 한두마디 문안이 오고갔을뿐 일면지교는 전혀 없었다. 두만강수석회 규약이 “딱딱”하기로 삼년 묵은 박달나무를 우습게 보는터인데 김대현고문님, 김봉세회장님, 리광인 전임회장님들께서 그 화강암같은 규약을 드텨서 인민공원님을 회원으로 받아들인데는 기필코 인민공원님께 남다른 우세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방학에 비로소 기회를 얻어 일년반만에 귀국하여 6월 29일 소하룡에 있는 박식 사장님의 한증막에서 수석회 회원들과 마주앉게 되면서 인민공원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고, 어데서 금방 후치질을 끝내고 온 순수한 농사군같은 모습에 만나자마자 어쩔수 없이 푹 빠져들어가는데는 제동할 재간이 없었다.
인민공원님은 움직이는 지도였다. 연변산천의 골골을 머릿속에 질서정연하게 입력하고 도보로 주름잡고있는 사람이였다.
일년반만에 만나 그 동안의 회포들을 풀면서 점심상을 기다리는데 김봉세회장이 자연수정을 세덩이 내놓으면서 필자와 박식선생, 김대현고문께 나눠주었다. 그리고는 훌렁 벗어진 이마에 반짝반짝 빛을 내면서 아주 흥분하여 수정채취과정을 소개하였다. 그는 일단 흥분하면 첫마디에 언제나 “하, 글쎄”를 앞세우는데 그 흥분도가 일정한 정도를 넘으면 “하, 글쎄”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련발된다.
“하, 글쎄 연변에도 수정이 나온다는게 신기하지. 하 글쎄 저분(인민공원님)이 모르는데 없다니. 하 글쎄 처음에는 진흙덩이리가 나오니 마구 벼렸는데 하 글쎄 그 속에 수정이 들어있지. 하 글쎄 ….”
알고보니 인민공원님은 위만주국때 일본군들이 사용하던 낡은 지도 한 장을 언젠가 어데서 구하였는데 그 지도에 연변산천의 골골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고 어느 골에 무슨 광석이 난다는 것까지 낱낱이 표기되여있다고 한다.
“어쨌든 일본놈들이 못되기는 지독하게 못된 놈들이꾸마. 천보산에랑 가보면 일본놈들이 아주 배구그물처럼 산을 싹 파헤친 자리들이 있는데 그게 광맥을 찾은 자립지뭐.”
인민공원님은 그 보배같은 지도를 갖고 여러해 전부터 짝을 뭇거나 홀로 연변내의 크고 작은 산발들을 찾아 풍찬로숙하면서 지질탐사대마냥 골골이 답사를 하였는데 그 일이 지금도 진행중. 완전히 산에 취한 억센(硬骨頭) 산악인이다. 그 누렇게 색이 싹 날대로 난 지도에 연길시에서 별로 멀지 않은 어느 골안에 수정이 있다고 표기되여 있었고 그 표기가 한메터의 오차도 없어서 가자마자 감자를 파듯이 수정을 채취하였다는것이다. 물론 일본놈들이 다 해먹을대로 해먹은 자리를 뒤지기는 하였지만도.
인민공원님은 이미 앞에서 살짝 썼지만도 송화석(松花石)과 화석(化石)류에 각별한 애착을 가진 분이였다.
송화석이란 송화강에서 나는 돌이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인데 송화석으로 만든 벼루는 중국에서도 이름이 있다. 송화석은 연질이기에 변화가 다양하며 산수석으로 잘 알려져서 관상석(觀賞石)으로도 국내에서 이름이 있다.
“안도 량강에 가면 송화석이 많습꾸마. 산에 바위도 송화석이고 강바닥에 널린 것도 송화석인데 그곳은 길이 험해서 어지간해서는 가기 힘들꾸마. 한 20리 걸어들어가야 하는데.”
“왕청 라자구에 가면 묘하게 나무화석이 많이 나꾸마. 한 10년전에만두 별로 찾아 가는 사람이 없어서 잠잠했는데 지난해에 다시 가보니 그곳 한족들이 돈냄새를 크게 맡았는지 마당에다 무져놓고 값을 홍정합더구마.”
나도 왕청쪽에서 화석이 난다는 소문을 들을지 아주 오래고 또 직접 얻은 일도 있었다. 1998년도엔가 단위에서 봄철 야유회를 왕청배초구에서 조직하였는데 그 때 따라갔다가 강가에서 아주 오석(烏石)으로 되어버린 나무 화석 한점을 얻어본 일이 있었다. 신기하리만큼 무늬가 흰점들로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술을 기껏 먹고 나니 어데다 떨구었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 때는 수석에 대한 취미가 없었을 때이니 “그까지 것” 했지만 지금에 와 보면 맹랑하기를 이를 데 없는 짓거리였다.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에 후회막급이다.
인민공원님같은 선배들을 일찍 만나 문하생으로 있었더라면 이런 후회가 어찌 있을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나마 다행인것은 백두산문인산악회에 참가하여 김학송선생을 따라다니면서 수석에 진짜 취미를 붙였고 두만강수석회가 설립된후 김봉세선생과 리광인선생을 묻어다니면서 비로소 체계적인 탐석을 하게되었으니 한참 늦었지만 그래도 정도-옳바른 수석인의 길에 들어섰다고 해야 할것이다.
두만강수석회의 규약이 화강석임을 이미 우에서 언급한바 있다. 그러나 인민공원님같은 “천리마”들이 나타날 경우 드텨서 대문을 활짝 열어놓을것을 회장단에 간절하게 부탁하는바이다. 부기미(付驥尾)란 파리가 명마의 꼬리에 붙으면 천리길도 쉽게 갈수 있다는데서 생겨난 말이다. 나같은 어섯눈이 뜬 새내기에게 지당한 말이다.
“천리마”님들을 따라 산을 누비고 강을 누비며 수석을 찾아 떠도는 것이 이미 내 생애의 최고의 즐거움으로 되었으니 말이다. (*)
- 2008.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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