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따르릉~>>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군이는 두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앉았다. 그새 깜빡 잠이든것 같았다. 낮에 의란강변에서 웃고 떠들며 규호랑 미림이랑 은경이랑 어울릴 때는 힘든 줄을 몰랐었는데 집에 와서 침대에 누우니 한낮의 피로가 한곬으로 몰려든 모양이였다. <<따르릉따르릉…>> 전화벨소리가 쉬지않고 울렸다. 군이는 침대에서 내려가 수화기를 잡아들었다. <<군이니? 나, 승화다, 빨리빨리…>> 승화는 몹씨 급한듯 뒤말도 제대로 잊지못하고있었다. <<오, 승화. 웬 일이니? 천천히 말해라.>> <<군이야, 빨리 여기로 나오라, 빨리!>> <<그게 어딘데?>> 군이도 저으기 긴장해나서 수화기를 바꿔들며 다급히 물었다. <<제1백화 동쪽에, 만남다방 앞이다. 빨리 나와야 한다.>> <<만남다방>>이라는 말에 군이는 괜히 신경이 긴장해졌다. 군이의 목소리가 저도몰래 높아졌다. <<웬 일인데? 다방엔 왜 가있니?>> <<잡았다. 방금 너네 아버지하구, 우리 엄마하구 다방에 들어갔다. 빨리 와야 된다. 네에게 확인시켜준다구 했잖니?>> 승화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불안이 깔린듯싶으면서도 그렇지! 하는 흐믓함이 느껴졌다. 군이는 구경을 알고싶은 생각이 머리를 쳤다. <<그래, 알았다. 지금 갈게.>> <<오, 내가 지키고있을게, 빨리와야 한다.>> <<기다려라.>> 군이는 수화기를 놓고 벌떡 일어섰다. 층계를 내리자 바람으로 군이는 택시를 잡아탔다. 운전수는40대초반으로 보이는 상고머리아저씨였다. 아저씨는 군이가 혼자 택시에 오르는것이 이상했던지 상냥하게 물었다. <<너, 혼자냐?>> <<네, 아저씨 일백화청사 앞의 만남다방으로 가주세요.>> <<만남다방? 너 혼자서?>> <<네, 아저씨 급해요. 빨리 몰아주세요.>> <<알았다. 그곳까지 5원이다.>> 아저씨는 부르릉~ 하고 출발을 하더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승화는 만남다방 앞에서 진정을 못하고 서성거리고있었다. 택시에서 내리는 군이를 보자 승화는 한달음에 군이의 옆으로 뛰여왔다. <<있다. 아직 안나왔다.>> <<너 어떻게 발견했는데?>> 군이가 못믿겠다는듯 급히 물었다. <<저녁밥을 다 해놓구두 우리 엄마, 밥먹을 궁리를 안하는거야. 나보구 먼저 먹으라면서, 점심 먹은게 뜨직해난다는거야. 그래서 나두 혼자 먹기 싫어 대수 한술 뜨네 하구 말았지. 저녁밥을 먹구 객실에 나와 보니 엄마가 얼굴에 화장을 하고 있는거야.>> 승화가 제 얼굴을 쓱 문대며 아래말을 이었다. <<엄마는 그러면서 자꾸 벽시게를 쳐다보는거야,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아니나다를가 잠간 지나자 엄마의 핸드폰이 울렸어. 엄마는 뭐라고 잠간 말을 하더니 가방을 들고 나가면서 말하는것이였어. 편집선생님이 보잔대.>> 승화는 일부러 <<편집선생님>>에 악센트를 주면서 군이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올것이 왔구나 하고 판단했지. 인차 엄마의 뒤를 밟은거야. 지난번에도 바로 이 다방에서 너의 아버지와 만났더랬어. 너의 아버지가 진작 이 앞에 와 있었어. 우리 엄마를 보자 둘은 약속이나 한듯이 나란히 다방안으로 들어가는거야.>> 승화는 손으로 다방입구를 가르키며 흥분에 들떠있었다. 군이는 그러는 승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건만 보고싶지않은 일이 현실로 눈앞에서 벌어지고있다는것이였다. <<가자, 내가 다 정찰을 해놨다. 다방문은 나무로 됐는데 웃켠에 손바닥만한 뽀얀유리를 넣었거든. 그 뽀얀유리에 입쌀알 만한 맑은 점이있어. 그 맑은점으로 안을 들여다 보면 다 보여.>> 승화는 군이의 손을 끌고 다짜고짜 다방안으로 들어갔다. 어둑시그레한 빨간색 불빛아래서 멍하니 탁자뒤에 앉아있던 호리호리한 몸매의 아줌마가 웬 일이냐는듯 군이네를 바라보았다. <<우리 엄마를 찾으러 왔어요. 얼마 전에 들어오는것을 봤어요.>> 승화가 목소리를 낮추며 앞질러 대답했다. 아줌마는 이상하다는듯 군이네를 바라보며 별말이 없었다. 승화는 군이를 뒤에 달고 <<장미방>>을 지나 <<백합방>>을 건너 <<씀바귀방>>앞에 와 섰다. 승화는 조용하라는듯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더니 먼저 살금살금 문가로 다가갔다. 문에는 정말 손바닥만한 뽀얀유리가 있었다. 승화는 조용히 그 유리에 눈을 가져다 댔다. 잠간 지나자 승화가 군이의 옆으로 다가와 군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한창 열이 올랐다. 너네 아버지, 우리 엄마께 뭐라고 말하고있다.>> 군이도 승화처럼 살금살금 문가로 다가가 뽀얀유리에 눈을 가져갔다. 뽀얀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군이는 머리를 돌려 승화를 건너다 보았다. 승화가 손가락으로 뽀얀유리 아래 쪽을 가리켰다. 군이는 뽀얀유리 아래 쪽으로 눈길을 가져갔다. 아니나다를가 유리를 갈 때 잘못되였던지 정말 뽀얀유리 아래 쪽에는 입쌀알만한 맑은 점이있었다. 군이는 그 맑은 점에 눈을 가져다 댔다. 아버지 맞은 켠에 앉은 녀자가 키득키득 웃으며 손으로 아버지의 손등을 툭 치고있었다. (저 분이 승화의 어머니구나.) 이런 생각과 함께 군이는 그 녀자에 대해 말못할 거부감을 느꼈다. 승화 어머니의 말이 끝나자 아버지가 손으로 책상우에 놓여진 종이장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목소리가 낮아서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들을수 없었다. 승화의 어머니는 또 손으로 아버지의 손등을 톡 치며 얼굴에 웃음을 날렸다. <<흥!>> 군이는 낮으막하게 코방귀를 뀌며 흥미없다는듯 몸을 돌렸다. 그러자 승화는 군이를 보고 혀를 홀랑 내밀어보이며 무슨 볼거리라도 난듯이 또 문가로 발볌발볌 다가갔다. 군이는 아니꼬운 눈길로 그러는 승화를 쏘아보고는 혼자서 밖으로 나와 버렸다. 잠간후 승화도 밖으로 나왔다. <<군이야, 봤지 방금두 너네 아버지가 뭐라고 껄껄 웃으며 우리 엄마에게 말했다.>> 그말을 하는 승화의 목소리는 마치도 <<봐라, 너네 아버지가 우리 엄마를 꼬시고있다.>>는 식으로 들렸다. 군이는 그러는 승화가 아니꼬와 못들은듯 걸음만 옮겼다. 하지만 승화는 군이의 그런 정서도 읽어내지 못했는지 계속 입을 놀렸다. <<지난번에도 그랬다. 너네 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우리 엄마에게 뭐라구 온 하루 이야기 했다.>> 승화는 특별히 <<온 하루>>에다 힘을 주어 말했다. 군이는 걸음을 뚝 멈추고 승화를 쏘아보았다. <<말 다 했니?>> <<어, 그래.>> <<왜 말끝마다 우리 아버지냐? 너네 엄마는 못봤니? 입이 크담해가지구 키득키득 웃으며 우리 아버지 손등을 치는걸. 두번이나 치더라. 빨간립스틱이 뭐야, 빨간게, 쥐를 잡아 먹었다니? 촌스럽긴, 네가 어째 촌스럽게 노는지 알겠다.>> 한번에 이 많은 말을 다 퍼붓고 나니 군이는 어딘가 속이 후련해나는것 같았다. 승화는 군이의 청산류수같은 반격에 어정쩡 해서 할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군이의 입만 바라 보았다. <<인젠 됐지? 속시원하지? 구렁이같은 자식.>> 군이는 몸을 픽 돌려 앞을 바라고 잰걸음을 놓았다. <<야, 군이, 군이야~>> 승화가 소리치며 군이의 옆으로 뛰여왔다. <<방금 너 뭐라구? 그래, 우리 엄마가 너네 아버지를 꼬신단 말이니? 흥!>> <<그래, 너네 엄마는 우리 아버지를 꼬시면 안되니? 킥킥 웃음을 날리는게, 꼬시구두 남겠더라.>> 군이는 아니꼽게 승화를 쏘아보며 아버지의 손등을 치던 승화 어머니의 동작을 그대로 흉내냈다. 승화의 얼굴이 단통 지지 벌개졌다. <<너, 정말 발뺌을 하는구나. 남은 좋은 뜻에서 불러줬더니.>> <<그래, 저 잘난 장면을 보구 어쩌겠다는 거니? 뭘 하자는 거니? 왕구렁이 같은 자식!>> <<너, 점점… 사람을 욕까지 하는구나. 뭘 잘 한게 있다구. 지난번에 너하구 싸움을 한 다음 부터는 너를 잘 대해 주자 했는데…>> <<뭘 잘 대해 주는데. 또 붙겠니? 네같은 놈하구는 백번이라두 붙겠다.>> <<백번이라두 붙는다구? 너, 규호에게 또 말하면 엠나(계집애)다..>> <<얌마, 네사 바로 엠나다.>> 서로 대방의 자존심을 발기발기 찢지못해 어르렁거리던 군이와 승화는 누가 먼저랄것 없이 한덩어리가 되여 돌아갔다. 군이는 눈앞에서 노란별들이 반짝이는것을 보았다. 얼굴 여기저기가 아프고 화끈거렸다. 여겨보니 승화의 코에서는 어느새 뻘건피가 흐르고있었다. 피를 보자 더 흥분했는지 군이는 악악 소리치며 기승스레 승화에게 달려들었다. <<야, 그만들 해!>> 갑자기 누군가 군이네를 향해 꽥 소리쳤다. 군이와 승화는 그 소리에 날리던 주먹을 뚝 멈췄다. <<이 놈들아, 담이 배밖에 붙었냐? 파출소 곁에서 웬 싸움질이냐?>> 방금 소리를 친 사람은 경찰이였다. 그제야 군이와 승화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신광파출소>>라는 간판이 보였다. 허무했다. 서로 소리치고 욕하며 오느라고 자기들이 어느새 파출소 곁에까지 온것도 모르고있었던것이다.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군이의 머리를 스쳐지났다. 경찰은 군이와 승화를 나란히 세워가지고 파출소로 몰아갔다. 군이는 다리맥이 풀려서 후둘후둘 떨렸다. 피뜩 건너다 보니 승화도 얼굴에 비지땀을 흘리며 두눈을 퀑하니 뜬채 허둥대고있었다. 군이는 두려움이 꼴똑 찬 눈으로 파출소 안을 훔쳐 보았다. 군이가 서있는 맞은 쪽 칸 철문에는 쇠창살이 꽂혀있었다. 머리에 회색물감을 들인 20대의 청년이 쇠창살 저쪽에서 퀭하니 군이네를 훔쳐보고있었다. <<웬 놈들이오?>> 책상앞에 앉아 있던 나이 들어보이는 경찰이 물었다. <<허허허… 장군들입니다. 방금 파출소 곁에서 죽기내기를 하는걸 끌고 옵니다.>> <<장군은 장군이네. 파출소를 저희들 유희청 만큼이나 아는가? 허허허…>> 나이 들어보이는 경찰이 어이없다는듯 허허허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무서운게 없는가 봅니다.>> 군이네를 잡아 온 경찰이 심문기록부를 꺼내 책상우에 올려 놓으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곧이 곧대로 불어라, 아니면 콩밥을 먹을 줄 알어.>> 경찰은 먼저 무섭게 한마디 하고는 이름이며 학교며 부모들의 련계전화며 하는것들을 물었다. <<자식들, 한반에 다니는 놈들이 무슨 원한이 있다구 이렇게 싸우냐. 자, 말해 봐. 왜 싸웠는가를.>> 경찰의 말에 군이와 승화는 서로 얼굴을 쳐다 보았다. <<안 말할래?>> 경찰이 손으로 책상을 탕 내리쳤다. <<내가 먼저 때렸씀다. 놀다가 저 애가 너무 하는 바람에. 그랬씀다.>> 승화가 또 엉뚱한 소리를 할것같아서 군이가 앞질러 대답했다. <<옳씀다. 내가 너무했씀다. 잘못했씀다.>> 승화도 후들후들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한술 떴다. <<야. 이 자식아, 어쩜 싸움질을 할 정도로 너무하냐?>> 경찰이 시무룩이 웃으며 승화의 머리에 꿀밤을 한대 먹였다. <<경찰아저씨, 내, 까불기를 좋아해서 자주 그램다. 그래서 우리반 애들이 날 좋아하지 않씀다. 잘못했씀다. 다신 안그러겠씀다.>> <<아저씨, 저도 잘못했씀다. 우릴 보내주시오. 네?>> 군이가 경찰의 표정이 좀 풀린것을 보고 애원에 찬 목소리로 간청했다. 군이와 승화를 번갈아 보던 경찰이 심문기록부를 덮으며 입을 열었다. <<됐다. 이 자식들아. 친구끼리 싸움은 무슨 싸움질이냐? 맹세할수 있지? 다신 싸움질을 안하겠다구!>> <<옛!>> 군이도 승화도 자기들의 어디에 그렇게 큰 목소리가 숨어 있었는지 몰랐다. <<돌아가라. 어릴 때부터 싸우길 좋아하면 그게 습관이 된다. 그게 습관이 되면 커서 건달밖에 뭐가 더 되겠냐? 자식들!>> 경찰이 군이의 머리를 툭 쳐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군이는 경찰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불이나게 파출소에서 나왔다. 밖은 벌써 어둠이 깔려있었다. 군이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정신없이 뛰여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까지도 가슴은 방망이질을 하듯 두근두근 뛰고있었다, 군이는 전등불을 빌어 <<신광파출소>>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3층짜리 건물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길지는 않았지만 파출소안에서의 무섭고 긴장하던 기억이 또렷이 군이의 눈앞에서 주마등처럼 흘러지났다. <<후~>> 막혔던 수문이 터졌을 때처럼 긴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생각만해도 눈앞이 아찔했다. (내가 파출소에 들어갔댔구나. 파출소에! 감옥에라도 갇더면 어쨌을가?) 이런 생각이 들자 또 다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간신히 지탱해 서고있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군이는 맥 없이 몸을 돌려 앞을 행해 걸음을 옮겼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군이는 누가 볼가 두려운듯 머리를 숙이고 주먹으로 연신 눈물을 닦았다. 머리속이 텅빈듯 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빨리 집으로 가야한다는 일념뿐이였다. 집에 가서 침대에 누워 이불을 푹 덮어쓰고 실컸 자고 싶었다. 그렇게 자고 나면 어둠이 가셔질것 같았다. 어둠이 가셔지면 새날이 올것이고 새날이 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듯 학교에 가고싶었다. 군이는 어둠을 헤치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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