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 때면 나는 왕왕 내가 살고있구나 라고 느끼군 한다. 힘든 마음의 빗장을 열고 수많은 사색의 끄나불들이 스멀스멀 뇌리를 향해 기여오르기때문이다. 스멀스멀의 그 절주를 따라 살펴보면 그 리듬에는 40대 마지막역을 벗어난 나그네의 성숙함이 아니라 십대의 유치함과 이십대의 정열과 삼십대의 방황과 40대의 막무가내가 차곡차곡 쌓여져있는듯싶다.
래일이면 50살인데, 돌아보면 해놓은 일은 아무것도 없고 래일이면 50살인데 앞을 내다보아도 막막하기만 하고… 내 일생은 그저 요 모양 요 꼴로 끝나는것일가? 하는 우려가 가슴을 지지눌러 숨이 가쁘다.
40대의 막바지를 사시던 아버지를 가끔 떠올리군 한다. 시골에서 지지리도 힘들게 살아오셨던 아버지의 40대 마지막역은 십대를 살아가던 나에게 그 자체가 반면교재였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면 시골을 벗어나야 한다는게 아버지의 삶이 나에게 시사해준 전부의 의의였다. 고향집 마당의 울바자 둘러진 남새밭에서 마늘밭김을 매면서 아버지도 40대 마지막역을 달리는 당신의 인생렬차를 두고 한번쯤 슬퍼하고 감동하고 회의를 느끼셨을가?
지난 추석에 부모님산소에 갔다가 고향친구를 만난적이 있다. 밤낮으로 이마를 맞대고 서로의 십대를 보아오던 친구였다. 친구는 내 부모님산소가 있는 그 산에서 100년을 묵묵히 살아왔다는 소나무만치나 듬직하게 여전히 고향을 지키고있었다. 아니, 고향을 떠니지 못하고있다고 함이 더 옳을가?
너네 시내사람들은, 너네 간부들은… 마치도 “너네”는 그 시골과 하등의 상관도 없는것처럼 말하는 친구가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 그 때문이 아니라 오랜만에 보는 그 친구의 몸에서 흘러간 내 십대의 그림자를 찾아보기 싫었다는것이 진심이였을것이다. 아픔과 방황과 실패와… 과연 아름답지 못했던 십대의 시간들을 반추하며 가슴을 뜯기 싫어서였을가? 몸도 마음도 힘든 오늘에야 나는 친구의 눈에 “너네 시내사람, 네네 간부”로 비쳐지는 내가 친구가 부러워 하는 “너네”로 당당하지 못함을 스스로 느꼈기때문이라는것을 알것 같다.
친구에게 이 말을 한다면 그는 과연 어떤 눈길로 나를 보아줄가?
모든것을 내려놓고 현실에 안주하면 나는 친구가 부러워 하는 “너네”로 그럭저럭 살아갈수 있을것이다. 그렇게 살아가고싶다가도 다시 20대의 정열이 고패쳐오름에 나는 슬프다. 내 마음에 아직 살아있는 20대를 보는것이 시골을 벗어나려고 고열을 앓던 나의 십대를 보는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남자는 두번 사춘기를 앓는다는 글을 읽은적이 있다. 40대중반에서 50대로 가는 이 길에 바로 남자의 두번째 사춘기가 자리하고있지 않나 새삼 느껴진다.
바야흐로 사회에 발을 들여놓게될 내 아들앞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놓여져있을가가 두렵다.
나에게 이런 감성이 남아있는것을 진정 기뻐해야 할가?
몸도 마음도 유난히 지쳐있다.
나는 오늘도 살아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