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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5 ]

15    비오는 계절 댓글:  조회:1316  추천:1  2020-06-17
1   민머리를 한 남자애가 주먹을 쳐드는 순간 빈이는 쏜살같이 뛰여가 그 애의 허리를 겨냥하고 오른발을 날렸다. “윽” 하는 소리와 함께 민머리를 한 남자애가 보기 좋게 옆으로 나가 널부러졌다. 빈이는 순간 몸으로 녀자애를 막아서면서 괴성을 지어올렸다. “뭣들 하는 거냐?”  “이…이건 어디서 굴러온 놈이냐?” 민머리를 한 남자애의 옆에 서있던 남자애 둘이 빈이에게로 달려들었다. 왼쪽에 선 남자애는 머리에 노란 물감을 들였는데 키가 늘씬했고 오른쪽에 선 남자애는 상고머리를 했는데 가슴이 탁 튀여나온 것이 박달나무처럼 단단해보였다. 달려드는 품이 례사롭지가 않았다. 단번에 빈이를 짓뭉개버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빈이는 오른손으로 녀자애를 보호하면서 뒤로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남자애들은 빈이가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숨막히게 앞으로 박근해왔다. 민머리를 한 남자애가 기신기신 기여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죽여라, 당장 잡아 죽여라.” 그 소리에 힘을 입었던지 머리에 노란 물감을 들인 남자애가 빈이에게 달려들었다. 빈이는 슬쩍 옆으로 몸을 뽑았다가 눈 깜빡할 사이에 오른주먹을 번개같이 날려 머리에 노란 물감을 들인 남자애의 가슴에 한주먹을 안겼다. 머리에 노란 물감을 들인 남다애가 삽시에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르면서 “아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았다.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빈이는 오른발을 날려 오른쪽에 선 상고머리를 한 남자애의 배를 걷어찼다. 민머리를 한 남자애는 그 기세에 지레 겁을 먹었던지 연신 “죽여라, 죽여라.” 하고 소리치면서도 감히 빈이에게 달려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짜식들, 그 재간을 가지고 뭐…” 빈이가 옆에다 “퉤” 하고 침을 뱉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썩 꺼져라.” 남자애들은 대단한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던지 간신히 기여일어나 “씨발, 재수 없군.” 하고 씨벌이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빈이는 오른주먹을 왼손바닥에 대고 썩썩 비비면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짜삭들, 까불고 있네…” 빈이는 말하다 말고 머리를 돌려 목석처럼 굳어져있는 녀자애에게 눈길을 돌렸다. 녀자애의 두 눈동자는 당금 튀여나올 것만 같았다. 얼굴에 경이로움이 가득차있었다. “너 몹시 놀랐지?” 빈이가 히쭉 웃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좀… 와— 대단하다. 멋졌어!” 녀자애가 갑자기 손벽을 짝짝 치더니 빈이의 앞으로 다가섰다. “대단하구나. 싼다(散打)를 배웠니?” “아니, 이 정도야 뭐… 방금 너 아는 애들이니?” 빈이가 멋스럽게 주먹으로 코 밑을 쓱 쓸면서 물었다. “아니. 모르는 애들이야. 하학하여 집으로 가는 길이였어. 저 굽인돌이를 금방 돌아서는데 걔들이 앞에서 마주오는 거야, 나는 그저 길 가는 애들이겠지 하구 관심이 없었거든. 그런데 그 뺀뺀대가리를 한 애가 나의 옆을 지나가는 것처럼 하다가 나와 부딪치더니 팔을 상했다면서 치료비를 내라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 돈이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랬더니 그 애들이 나의 팔이며 옷섶이며를 잡아쥐고 돈이 없으면 보내주지 않겠다는 거다.” 녀자애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말꼬리를 이어갔다. 빈이는 방금 아무 일도 당한 적이 없는듯 너무도 태연한 녀자애를 살펴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조금도 무서워하는 눈치가 없구나.” 녀자애는 그제야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얼굴을 쳐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짜식들, 걔들이 셋이였으니 내가 참은 거지, 딴따(单打)를 했더라면 흥, 이래뵈두 난 태권도를 배운 녀자란다.” 녀자애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면서 자부심에 넘친듯 말했다. “와— 우!” 빈이는 일부러 과장스러울 정도로 두 팔을 쫙 폈다가 두 손바닥을 탁 마주치면서 함성을 지어올렸다. “고마웠어, 너두 참 대단했다. 멋졌다구. 나는 은지야, 서은지, 5중에 다닌단다. 3학년이야, 넌?” 은지가 도전적으로 물어왔다. 빈이는 다시 한번 히쭉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제1고중에… 1학년이야. 집으로 가는 길이였다. 멀리서 걔들이 너를 에워싸고 있길래 필경 무슨 일이 생겼겠다 싶어서… 아니나 다를가… 녀자애가, 아무리 태권도를 배웠다고 해도 혼자 다니지 말아라.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데. 오늘 너 운이 좋은 줄 알아라.” “하하하… 그 말투 제법이네, 어쩜 내 오빠라도 되는 것 같단 말이다. 줘봐라.” 은지가 빈이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뭘?” 빈이는 은지에게 눈길을 돌리면서 모르겠다는듯 물었다. “모르겠니? 우리 저 쪽에서 가서 천천히 얘기하자.”  은지는 말을 마치고 빈이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개울 가로 걸어갔다. 빈이는 은지의 뒤모습을 잠간 지켜보다가 소리없이 은지를 따라섰다. 파란 풀이 미풍에 하느작이는 개울가는 유난히도 고요했다. 졸졸졸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와 함께 가끔 “삐쭁—삐쭁—삐삐—쭁—” 하는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올 뿐이였다. 은지가 먼저 개울가의 펑퍼짐한 돌 우에 엉뎅이를 붙아고 앉았다. 빈이는 앉지 않고 은지의 뒤에 다가서며 다시 물었다. “뭘 줘보라는 거니?” 은지가 빈이 쪽으로 얼굴을 돌리면서 말했다. “위챗이지. 앞으로 우리 친구하자.” 빈이는 깜짝 놀라는듯 순간적으로 야릇한 눈길을 은지에게 주었다가 당기면서 말했다. “녀자애가 겁도 없이. 가져라.” 빈이는 말을 마치고 핸드폰을 꺼내 위챗을 찾아 보여주면서 말했다. “네가 스캔해라.” 빈이는 은지에게 핸드폰을 넘겨주고는 옆에 앉으면서 자기의 QR 코드를 열심히 스캔하는 은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국보급 보호동물이라도 지켜보는듯 진지했다. 은지가 핸드폰을 빈이에게 넘겨주면서 말했다. “인젠 물리지 못한다. 워이신 까지 추가했으니까.” “뭘? 너 3학년이라면서? 오라지 않으면 고중입학시험인데 이렇게 한가하게 돌아다녀도 되니?” 빈이가 근심스러운듯 물었다. 그러자 은지가 얼굴에 활짝 웃음을 띠우면서 말했다. “이런 샌님이라구야. 고중입학시험은 너 같은 글벌레들에게나 어울리구. 난 이미 결정했다. 직업고중에 가려구.” “직업고중? 왜? 너, 공부는 별로구나…” 순간 빈이는 자기가 실수했음을 느꼈던지 혀를 홀랑 내밀어보이고는 자기의 말을 중둥무이했다가 이렇게 얼버무렸다. “직업고중도 괜찮지 뭐. 꼭 고중에 가야 맛이냐? 사실 나도 지루해, 고중 공부가…” “공부에 소질이 있으면 계속 공부하는 게 원칙이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소학교 때 부터 공부에 관심이 별로 없었어.” 중학교 3학년 학생이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는 은지가 괴물이라도 되는듯 빈이는 잠간 그를 살펴보다가 물었다. “너의 어머니는 뭐라구 안하니?” “어머니가? 말루야 공부를 잘하면 나를 류학까지 보내준다고 하지. 그래서 내가 일곱살 때 나를 외할머니에게 맡겨놓구 한국에 갔단다. 내 류학경비를 벌어온다구 말이다. ‘네가 아니면 내가 왜 이러구 다니겠니?’ 이게 우리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란다. 흥…” 은지는 남의 말을 하는듯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빈이는 알겠다는듯 머리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너의 어머니두 한국에 가셨구나. 무척 고생하셨겠네. 쯧쯧…” 빈이는 제법 성숙된 이웃집 아저씨마냥 혀까지 찼다. “그런데 내가 직업고중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요즘 돌아왔다. 개고생을 한 보람이 없대, 벌어온 돈으로 호강하며 여생을 산대. 내가 우리 엄마 로후를 위해 돈을 절약해준 셈이지. 하하하…” 은지가 막무가내라는듯 사람 좋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이어 빈이가 한술 떴다. “너의 아버지가 좋아하시겠구나. 어머니가 돌아와서.” “아버지?” 은지의 어조가 뒤끝이 높아졌다. 빈이는 흠칫하면서 은지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없어. 인젠 그 사람의 얼굴도 기억 나지 않아.” “아, 미안. 너의 어머니가 더욱 고생 많았겠구나.” “고생은 뭐, 그 녀자가… 우리 외할머니가 고생했지, 나 때문에.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외할머니를 내처 못 살게 굴었거든. 어느 날인가 내가 또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발버둥질을 치니 외할머니가 큰 마음을 먹고 어머니에게 국제전화를 한 거다. 나는 전화가 통화자마자 외할머니의 손에서 수화기를 빼앗아들고 대성통곡하기 시작했어. 어머니는 전화 저 쪽에서 ‘뭘 갖고 싶니? 엄마가 돈을 보내줄 게 갖고 싶은 것을 다 사가져라.’라고 말하면서 나와 함께 펑펑 우는 것이였어. 그 후부터 어머니는 진짜 많은 돈을 보내주었구. 그 덕에 나는 돈을 펑펑 쓰면서 호강을 하긴 했지만…” 침 한번 삼키지 않고 술술 내리 엮는 은지를 바라보면서 빈이는 풍상고초를 다 껶은 어느 할머니의 인생담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였다. 은지도 그러는 빈이의 얼굴이 너무나 진지하다고 생각했던지 말끝을 흐리면서 말했다. “내가 참, 웬 주책이냐, 오늘 처음 보는 애한테. 그래도 네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걸 어쩌니. 나의 구명 은인!” “뭐? 구명 은인?” “아니니? 넌 1대 3으로 나서서 남모르는 녀자애를 위험에서 구해준 호걸인데.” “뭐? 어… 하하하…” 빈이는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소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 은지가 빈이의 곁으로 한뽐 다가 앚으며 말했다. “인젠 너도 말해야지.” 빈이가 무슨 말이냐는듯 되물었다. “뭘?” “우리 공평해야지. 내가 나의 신상을 이 정도 밝혔으니 너도 너의 신상을 털어야지.” 은지는 당연하지 않느냐는듯 빈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빈이는 쑥스러운듯 눈길을 돌렸다가 입을 열었다. “그저 그렇지 뭐. 별루 없어. 털 게.” “내가 어머니에 대해 말했으니까 너도 그 쯤은 털어야잖아?” 은지가 뚱겨주었다. “어머니?” 빈이가 잠간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평범한 사람이야, 고정 직업이 없어. 개인 식당에서 주방보조로도 일했구 슈퍼에서 물건도 팔았댔다. 그러나 지금은 잠간 집에서 쉬고 있어.” “오, 넌 그래두 어머니 곁에서 자랐으니 사랑은 듬뿍 받았겠네. 생활은 유족하지 못해두.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크는 애들이 제일 부러웠단다. 사는 게 좀 힘들어두 어머니 곁에서 자란다는 게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니? 외할머니도 물론 의지가 되지만… 지금은 나도 괜찮아.” “왜?” “뼈가 굵어졌거든. 그래서 어머니의 품이 아니래두 외할머니의 품이 아니래두 홀로 날 수 있으니까.” “홀로 날 수 있다구?” “왜 아니니? 너 자신 없니? 마음 여려가지구. 너 아까 걔들 셋을 족치던 용기는 어디갔니? 하하하… 하긴 너의 얼굴에 쓰여져있단다.” “뭐가?” “난 첫눈에 너의 얼굴에서 흐르는 사랑을 보아냈단다.” “그런 것두 얼굴에서 보이니?” 빈이는 모르겠다는듯 은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론이지. 눈이 말해주거든. 너의 눈은 내 눈 같지 않아.” 은지가 자기의 두 눈을 끔뻑거리면서 말했다. “너의 눈이 어떤 데?” 은지를 바라보는 빈이의 눈이 기대에 차보였다. “나의 눈? 하하하…” 은지는 잠간 통쾌하게 웃어제끼고는 정색해서 말을 이었다. “날카롭겠지. 난 말이야, 누가 나를 업신 보면 사정을 두지 않아, 애비 없는 년이라구 애들이 놀리면 목숨을 걸구라두 덤벼, 그래서 태권도도 배웠구. 그런데 넌 아니잖아… 분명 사랑 받으면서 자란 아기염소 같은 눈이잖아…” 빈이는 도도하게 열변을 토하는 은지를 이윽토록 살펴보다가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잠간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은지는 빈이의 다음 말에 무척이나 기대가 되는듯 초조한 눈길로 머리를 숙인 빈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졸졸졸…”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삐쭁…삐삐쭁…” 이름 모를 새들이 빈이와 은지를 내려다보면서 뭐라고 지저귀였다. 빈이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 지저귀는 새들을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늦었네. 그만 가봐야겠다.” “아, 그래… 오랜만에 동지가 생겼다구 한참이나 너스레를 떨었더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갔네. 오늘 즐거웠다. 우리 다시 만나는 거지?” 은지가 빈이를 따라 일어서면서 물었다. “글쎄, 만날 수도 있겠지. 아니, 꼭 만날 거야. 우린 다시 만나야 해.” “하하하…빈이야, 너 말투를 봐서는 무척이나 인연을 믿는 것 같다. 좋아. 다시 만나자. 내 먼저 갈 게. 너 나의 뒤 모습을 바라봐라. 영화에서처럼.” 말을 마친 은지는 길지도 않은 단발머리를 손으로 멋스레 빗어넘기면서 몸을 돌렸다. 은지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워보였다.   … 열일곱살 그 해의 비오는 계절에 흘러간 동년을 떠올리면서 나는 내가 커가고 있음을 알았네. 열일곱살 그 해의 비오는 계절에 우리는 공동의 기대가 생겼네 …   향항 가수 림지영이 부른〈열일곱살 그 해 비오는 계절에〉라는 노래의 한 구절이였다. 그린듯이 굳어진 채 은은한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멀어져가는 은지의 뒤모습을 바라보는 빈이의 얼굴에 착잡한 기운이 괴여올랐다.       2   “아빠—” 챙챙한 목소리가 빈이의 귀구멍으로 날아들었다. 빈이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 목소리의 임자를 찾았다. 목소리는 빈이로 부터 서너메터 밖에 있는 개울에서 들려오는 것이였다. 남자애는 개울가에 서있는 중년 남자를 향해 까르르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면서 찰방찰방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중년 남자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이였는데 실로 입이 귀에 가 걸릴 지경이였다. “아빠두 내려와요, 물이 하나도 차지 않아요. 완전 시원하다니까요.” 남자애가 재촉했다. “조심해라, 넘어질라. 넘어지면 무릎을 상한다.” 중년 남자가 짐짓 근심스러운듯 남자애에게 소리쳤다. 남자애가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중년 남자에게 뿌리면서 소리쳤다. “해해해… 아빤 겁쟁이, 겁쟁이구나.” 남자애의 웃음소리가 너무 맑아서 빈이는 귀에 거슬렸다. 괜히 부아통이 터지는 것 같았다. ‘뭐가 저렇게 좋아. 오줌줄기 같은 개울에서 청개구리처럼 첨벙대면서두…’ 빈이는 그림과도 같은 그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아 두 눈을 지긋이 감으면서 잔등을 풀밭에 대고 큰 대(大)자로 누워버렸다. 온몸이 나른해나면서 저도 몰래 몹시 피곤하게 느껴졌다. 빈이는 고통스럽게 심호흡을 하면서 생각했다. ‘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가? 아버지는 워낙 그런 사람이였을가?’ 갑자기 얼굴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빈이는 두 눈을 번쩍 뜨면서 무의식적으로 손바닥을 쫙 펴 얼굴을 만져보았다. 찐득찐득한 것이 손바닥에 만져졌다. 빈이는 손바닥을 눈 앞에 당겨다댔다. “앗, 재수가…” 빈이는 벌떡 일어나 앉아 눈길을 공중으로 날렸다. 이름 모를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중 어느 놈이 대담하게도 빈이의 얼굴에 똥을 쐈던 것이다. 빈이는 부랴부랴 호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얼굴에 묻은 새똥을 닦았다. 저도 몰래 두 눈에서 맑은 것이 괴여올랐다. 빈이는 무기력하게 다시 풀밭에 등을 대며 벌렁 누워버렸다. 고통스럽게 두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퍼런 불이 뚝뚝 떨어질 것 같던 아버지의 그 눈길만은 도무지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토요일이라 빈이는 실컸 늦잠을 자고 싶었다. 어머니가 들어와 이불을 당기면서 “일른 일어나 밥 먹어야지.” 할 때까지 이불을 다리 사이에 끼고 누워 실컸 어리광을 치고 싶었다. 그 때 객실에서 아버지의 괴성이 들려왔다. “쌍년이, 점점 담이 배 밖으로 나오고 있구만. 남정 무서운 줄도 모르는 년.” “왜 또 욕해요? 내 말이 틀렸어요?” 어머니도 몹시 화가 났던지 호락하락하지 않았다. “짤랑” 하고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건은 왜 메쳐요? 내 말이 과분한가요? 한국에서 돌아와 두달간 여태까지 밖으로만 돌지 않았어요? 아침밥술이 떨어지면 밖에 나갔다가 밤 늦게야 들어오지 않구 어쨌나요? 그 새 가시집에는 시퍼런 바나나 서너근 사가지고 한번 다녀온 게 고작이 아니구 뭐예요. 오늘 가시집 가서 밭일이나 좀 돕자는 게 뭐가 잘못됐나요? 우리 아버지 인젠 허리가 다 나가서 밭일이 힘들단 말이예요.” 어머니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감수 같은 것은 뒤전이라는듯 이죽거렸다. “왜? 둥글소 같은 당신의 오빠가 곁에 있지 않소? 그 황소가 어련히 알아서 돕지 않을라구. 출가집 외인이 웬 오지랍이 그렇게 넓어서 본가집 일까지 신경 쓰는 거요.” “이 사람아, 말을 그렇게 하는 게 아니네.” 할머니의 목소리도 들렸다. “어마이는 좀 가만 있습소. 무슨 도움이 된다구.” 아버지가 할머니를 향해 고함치는 것 같았다. 그 소리에 빈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소리치는 것은 그냥 부부싸움이겠거니 하고 지나치려했지만 할머니에게까지 큰 소리를 치는 것은 그냥 듣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빈이는 침실 문을 차고 나가면서 버럭 소리쳤다. “모두 그만하세요, 아침부터 왜 이러세요.” 모두들 깜짝 놀라 빈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 자식이, 너야 말로 아침부터 어른들에게 웬 훈계냐?” 아버지가 민이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아버지가 뭘 잘했다구 그러세요? 이 집에 관심이나 있어요? 엄마 생각 조금이나 하세요? 량심에 꺼리끼지도 않아요?” “뭐가? 뭐가 어쩌구 어째?” 아버지가 빈이의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조심해요,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는 줄 아세요? 지난 번에…” 빈이는 무엇인가를 더 말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순간 아버지의 손이 번쩍 하고 빈이의 얼굴에 날아올랐다. “짜식, 소처럼 벌어 기껐 키워줬더니 한다는 소리가?” 아버지는 분을 사기지 못하겠다는듯 힘겹게 모두숨을 몰아쉬였다. “왜 아침부터 애는 때리고 그래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향해 바락바락 소리질렀다. “에잇, 참 시끄러워 못 살겠다. 이렇게 살 게면 갈라지자.” 아버지가 바닥에 놓인 맥주병을 걷어차면서 악에 받쳐 소리쳤다. “저걸, 저것 좀 보우. 아무 소리나 하는 것을…” 할머니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후둘후둘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옮겨 밖으로 나가는 것이였다. 아버지는 못 마땅한듯 할머니의 뒤모습을 찍어보다가 다시 어머니 쪽에 눈길을 돌렸다. 어머니를 쏘아보는 아버지의 눈길에서 퍼런 불꽃이 탁탁 튀여나오는 것 같았다. 빈이는 더럭 겁이 났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바라보는 눈길에서도 저런 불꽃이 튈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여태 집이라 믿고 살아온 그 곳이 당금 자기를 삼켜버릴 심연처럼 느껴져 온몸으로 소름이 끼쳤다. 빈이는 홱 몸을 돌려 어머니의 손을 와락 잡아끌고 침실로 들어가면서 소리쳤다. “상대하지 말아요, 엄마, 저런 사람을…” “이…이것들이…” 아버지는 실망한듯 빈이와 어머니의 뒤모습을 바라보면서 악청을 뽑았다. “탕” 하고 문을 차는 소리와 함께 빈이는 자기의 가슴을 지지누르던 돌덩이가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였다. 또 한고개를 넘겼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눈길을 돌렸다. 어머니는 그 시각 걸상에 주저앉아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무엇이라고 어머니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일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빈이는 “어머니…” 하고 불러놓고는 잠간 주밋거리다가 말 없이 몸을 돌려 어머니의 침실에서 나왔다. 지난밤에 아버지가 텔레비죤을 보면서 비운 맥주병이며 안주로 했던 명태껍질 같은 것들이 객실바닥에 그대로 널려있었다. 빈이는 허리를 굽혀 맥주병과 명태껍질을 주어들고 주방으로 갔다. 아침반찬으로 감자채를 볶으려고 했던지 썰다만 감자가 그대로 도마 우에 놓여있었다. 빈이는 퀭하니 두 눈을 뜨고 멀거니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맥 없이 걸상에 주저앉았다. ‘어쩌면 좋아, 아버지를 과연 어쩌면 좋아.’ 아들로서 빈이는 자기가 어떻게 해야 금이 가는 이 가정을 지켜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빈이가 아버지의 외도를 발견한 것은 너무나도 우연한 기회였다. 그 날은 일요일이라 빈이는 친구들과 함께 공원으로 산책을 갔었다. 5월에 접어든 공원은 곳곳에 록음이 짙었다. 풋풋한 록음 속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런 곳이면 옆에 큰 양산을 세워놓고 아래에 상 몇개와 걸상을 마련한 간이점들이 보였다. 혹은 한두 사람이 혹은 서너 사람이 상에 둘러앉아 음료도 마시고 맥주도 마시고 있었다. 그 날 빈이는 공원 뒤산의 미니광장에 갔다가 간이점에 앉아 음료를 마시는 아버지를 발견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앞에는 생머리를 어깨까지 내리드리운 통통한 얼굴의 한 녀인이 앉아있었다. ‘누굴가?’ 빈이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친구들 뒤에 몸을 숨기고 아버지와 그 녀인을 지켜보았다. 녀인은 새물새물 웃으면서 휴지로 아버지의 입가를 닦으면서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무엇이라 말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버지는 분명 벙글써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이더니 귀여워 죽겠다는 식으로 주먹을 내밀어 녀인의 이마에 꿀밤을 한대 먹이는 것이였다. “아우- 닰살, 다 늙은 것들이.” 함께 갔던 친구 민호가 그 장면을 보고 심사가 꼬였던지 입속으로 씨부렁거렸다. “왜, 보기 좋기만 하구먼. 너의 아빠, 엄마는 저런 애정표현을 하지 않니?” 친구 수호가 민호를 보면서 도전적으로 물었다. “짜식, 너의 눈엔 저게 정상으로 보이니? 너의 아빠, 엄마면 공원에 와서 저러구 놀겠니? 저건 무조건 불륜이야.” 정민이가 자신 있다는듯 찍어말했다. “맞아, 정민이의 눈이야 말로 레이저라니까. 척 하면 문제의 정곡을 찔러내거든, 하하하하…” 민호가 과장스럽게 머리를 뒤로 하면서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하긴, 세상이 어쩌자구 저러는지, 쯧쯧쯧…” 수호가 애들에게 뭐라고 한칼 더 박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너무나 순순히 수긍하는 것이였다. “그러게, 봐라, 좋단다. 흐흐흐…” 정민이가 뒤에 선 빈이의 어깨를 톡 치면서 말했다. “가자, 짜식들. 뭐 볼 게 있다구.” 빈이는 친구들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픽 돌려 씨엉씨엉 걸음을 옮겨놓았다. 친구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씨구 좋네, 바람이 났네 온 세상이 모두 바람이 났네 신바람 났네 색바람이 났네 …   수호가 괴상하게 목소리를 뽑아댔다. ‘누굴가? 그 녀자는… 설마 아버지가 정말 바람이 난 걸가?’ 빈이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공원에서 보았던 그 장면은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빈이는 사실 아버지에 대해 잘 몰랐다. 빈이가 열살 나던 해 한국으로 나간 아버지가 그 사이 서너번 집에 다녀간 외에 빈이가 열일곱살을 먹도록 밖으로 돌기만 했던 것이다. 그 사이 어머니는 집에서 빈이를 키우고 할머니를 돌보면서 뒤바라지를 해왔었다. 눈치로 보아 아버지는 집에 생활비도 얼마 보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그 사이 대부분 시간을 바삐 보냈다. 집안일을 하랴, 출근을 하랴 하루도 편히 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아버지가 두달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말로는 일을 하다가 허리를 상했는데 더 이상 한국에서 중로동을 할 수 없어 돌아왔다는 것이였다. 아버지는 집에 와서 사흘 후인가 어머니와 함께 외가집에 한번 다녀온 후로는 어머니의 말처럼 거의 밖으로 돌았다. 어머니는 처음에 아버지가 그 새 만나지 못한 친들을 만나러 다니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차수가 너무 잦아지자 어머니가 아버지의 행적을 캐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차츰 어머니의 관섭을 못 마땅해 하는 눈치더니 차츰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였다. 필경은 어른들의 일이라 빈이는 남들이 말하는 ‘부부싸움’이겠거니 하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낮에 우연하게 보게 된 그 장면은 너무나 보기 좋게 정면으로 빈이의 머리를 들이쳤던 것이다. 아버지는 분명 외도를 하고 있는 것이였다. 빈이는 그래도 믿고 싶지 않았다. ‘드라마에서나 있음직한 일이 우리 집에 발생하다니?’ 빈이는 사실을 똑똑히 밝혀내고 싶었다. 그 날부터 빈이는 기회만 되면 아버지의 뒤를 밟았다. 아버지가 거울 앞에 마주서서 머리를 다듬고 옷을 손질하고 나가는 날이면 거의 번마다 그 녀자를 만나고 있었다. 코스도 거의 비슷했다. 아버지가 하남 공공뻐스정거장으로 가면 그 녀자가 기다리고 있었고 함께 39선 공공뻐스를 타고 공원으로 가서는 진종일 춤도 추고 음료도 마시고 숲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던 것이다. 빈이는 그 녀자가 어디에 사는 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고 싶어 그 녀자의 뒤를 밟은 적도 있었다. 녀자는 제3소학교 뒤골목에 있는 서원아빠트에 살고 있었다. 얼마전에는 빈이 또래의 녀자애와 함께 아빠트에서 나오는 것을 보기까지 했었다. ‘흥, 딸까지 있는 년이 남의 가정을 파괴하려고 해?’ 빈이는 지대한 분노를 느꼈다. 생각 같아서는 당금 달려나가 그 녀인의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였다. 아버지도 성인 군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쳤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분을 풀 수 있을가?’ 빈이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날마다 하학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이 생각 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 녀자가 아버지에게 꼬리질을 하는 것 같았고 순진한 아버지는 꼬리가 아홉개 달린 그 불여우한테 놀아나는 것 같았다. 빈이는 밤이면 밤마다 어떻게 그 녀인에게 복수하고 가정을 지켜내며 어머니를 지켜낼 것인가만 궁리하였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곬은 점점 더 깊어지고 아침에는 끝내 갈라지자는 말까지 아버지의 입에서 튀여나왔던 것이다. 빈이는 더 이상 복수계획을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손을 쓰지 않으면 가정이 그 녀자의 손에서 정말 파탄 될 것 같았던 것이다. ‘내가 우리 가정을 지켜야 한다. 내가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 갈라진다구? 안된다. 갈라지면 할머니는 어쩌구? 아버지와 어머니가 갈라지면 할머니가 더 이상 나의 할머니가 아닐 수도 있다.’ …   “아빠, 새들이 노래하고 있는 게 맞지?” 개울물 흐르는 듯한 소리가 빈이의 귀를 파고 들었다. 아까 물놀이를 하던 남자애와 그 애의 아버지가 어느새 개울가에 올라와 앉아 “삐쭁—삐쭁—” 노래하면서 날아지나는 새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넌 어떨 때 노래하니?” 남자애의 아버지가 사랑이 듬뿍 담긴 눈길로 남자애를 바라보면서 자애롭게 되 묻는 것이였다. “난…난 선생님이 노래하라고 할 때 그리고 기분이 좋을 때.” “그럼 저 새들의 선생님도 쟤들 보고 노래하라고 했겠지, 아니면 쟤들이 무척 기분이 좋으나…” “그렇구나, 그런데 쟤들은 왜 기분이 좋을가?” 남자애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계속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치하기는…” 빈이가 괜히 중얼거리고 있을 때 호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으로 메시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빈이는 인차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은지가 보낸 메시지였다. “안뇽? 이 토요일엔 뭐하구 있니? 나의 구명 은인.” 은지는 거의 매일 한번 꼴로 문안 메시지 같은 것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래, 오늘이야.’ 빈이는 결심을 내린듯 건반에 대고 손가락을 놀렸다. “은지야, 오늘 만나자. 나 지금 우리 지난번에 만났던 그 개울가에 나와 있다. 너 당금 달려오는 거지?”     3   “빈이야—” 반가움에 한껏 들뜬 목소리가 바람결에 날려왔다. 빈이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은지였다. 은지가 빈이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장면이였다. 무척이나 랑만적으로 느껴졌다. 빈이는 다가오는 은지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빈이야—” 은지가 빈이의 앞에 달려와 서면서 다시 한번 불렀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빈이가 짐짓 눈을 흘기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급하게 뛰여오기는… 다 큰 계집애가. 몹시 힘들지?” “아니, 한시가 급했어.” 은지가 말하면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은지의 손에는 분명 연분홍 꽃 몇송이가 들려있었다. 산이나 들 그리고 개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꽃이였다. 은지가 빈이의 옆으로 다가서서 어깨를 들먹이며 쌕쌕 숨을 고르는 소리가 귀전을 스쳤다. 얼굴이 발가우리하게 상기되여있었다. 은지가 연분홍 꽃을 쥐고 있는 손을 약간 떨면서 빈이를 향해 방긋 웃었다. “오다가 꺾었어.” 은지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렸다. “꽃은 왜? 너의 얼굴이 꽃보다 더 예쁜데.” 빈이의 롱담에 은지가 까르르 웃으면서 말했다. “내 얼굴이 꽃보다 더 예쁘다구? 하하하… 너 참 선수구나.” 은지가 머리를 약간 외로 돌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찔레꽃이야.” “뭐, 찔레꽃이라구?” “맞아. 찔레꽃. 개울가에 듬성듬성 꽤 많이 피여있더라.” 은지의 얼굴이 행복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너 찔레꽃을 좋아하니?” 빈이가 한발 다가서며 물었다. 얼굴에 왠지 모를 야멸찬 웃음 같은 것이 스치는 것 같았다. 은지는 빈이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고 꽃송이를 내려다보면서 여전히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하지 그럼, 나도 녀자거든. 나는 꽃 중에서도 찔레꽃을 더 좋아해.” 은지는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면서 제법 녀성스러운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렇게 고운 줄도 모르겠구나 뭐, 찔레꽃이.” 빈이는 한마디 던지고는 힐끗 은지의 표정을 살폈다. 은지가 타는 듯한 눈길로 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빈이의 입가에서 묘한 웃음이 피여올랐다. “그새 어떻게 지냈니? 우리 지난번에 만난 것이 한 사나흘 전인가?” “오늘이 여드레째야.” 은지가 확실하게 대답했다. “벌써 그렇게 됐니? 난 며칠 안되는 것 같은데.” “우리 날마다 메시지를 주고 받았잖아. 속에서 서로를 잊지 않고 있은 때문이겠지.” 은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잊지 않고 있었어? 속으로…” 은지가 말 없이 빈이를 쳐다보면서 머리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빈이야. 너 찔레꽃 꽃말이 뭔지 알고 있니?” “찔레꽃 꽃말? 뭔데?” 은지가 방긋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찔레꽃의 꽃말은 고독이래.” “고독?” 빈이는 너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는듯 ‘독’자를 길게 뽑아올렸다. “왜? 나는 고독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니?” 은지가 풀바닥에 엉뎅이를 대고 앉으며 물었다. “고독은 아무나 하는 줄 아니?” 빈이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은지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이번에는 빈이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은지는 분명 그 목소리의 변화를 감지한 것 같았다. 은지는 빈이의 곁으로 다가앉아 손에 든 찔레꽃을 빈이의 얼굴에 가져다대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너에게는 어울릴가?” “어울리겠지. 나, 지금 정말 고독해. 고독해서 미칠 것 같아.” 빈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왜? 왜왜왜?” 은지가 흠칫 놀라면서 ‘왜’자를 수없이 반복했다. “고독해서 말동무를 찾고 싶었다. 분출구를 찾고 싶었다. 마음속의 울화를 털어놓을 상대를 찾고 싶었다…” “왜왜왜, 왜냐구?” 은지가 찔레꽃송이를 꽉 움켜잡으며 급히 물었다. “울 아버지가 바람 났어.” “뭐라구?” 은지가 벌떡 일어섰다. 눈길이 복잡해졌다. “그래서 미칠 것 같아, 누구에게 이 울화를 털어도 못 놓구… 오늘 너 나의 상대를 해줘라. 너라면 괜찮을 것 같아. 우리 오늘 두번째 만남이지. 그러니 남과 같은 사이잖아. 내 이 속마음을, 내 이 고독한 심정을, 내 이 터지려는 울화를 네가 싹 다 쓸어서 안아주란 말이다. 그런 다음 툭툭 털구 가버리란 말이다. 그럼 내 속이 좀 가벼워질 것 같다.” 빈이가 열변을 토했다. 은지는 미처 말꼬리를 잡을 새가 없어서인지 한마디 께끼지도 못하고 빈이의 입을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였다. “미치겠다. 다 그 나쁜 년 때문인 것 같아. 울 아버지, 그 정도로 형편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니, 울 아버지가 워낙 그렇게 형편 없었을 수도 있어. 아니, 아니, 울 아버지 한국에서 나쁜 물을 먹었을 거야…” “너 뭘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잖니?” 은지는 그제야 사태의 엄중성을 실감했던지 손에 들려있는 찔레꽃을 한켠에 던지면서 한술 더 떴다. “어른들의 일이잖아? 우리는 아직 애들이구. 어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하잖아?” “하지만 그 사람은 나의 아버지란 말이다. 지금 우리 엄마와 가라진다고 하잖니? 리혼한다고 하잖니?” “어른들은 왜 그러는지 참…”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돌아온 뒤 쭉 그랬어. 밖으로만 나돌았단 말이다. 아마도 한국에서부터 그 녀자랑 만났던 것 같아.” “너의 어머니는 어쩌니?” “울기만 하지, 악에 받쳐 바락바락 소리만 지르지. 아버지는 어머니와 리혼할 거래. 오늘 아침에 대판 싸우고 나갔어.” 빈이는 말을 마치고 두 손을 옆구리에 찌르면서 머리를 쳐들었다. 하늘 저쪽으로부터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비가 오려는가 봐.” 빈이가 중얼거렸다. 은지도 빈이의 눈길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비오는 계절이잖아. 그런데 너 어쩔 건데?” 은지가 근심스러운듯 넌지시 물으면서 빈이의 팔을 잡았다. 빈이가 은지에게 잡힌 팔을 빼서 휘두르며 소리쳤다. “복수 할 거야.” “어떻게?” 은지가 빈이 쪽으로 한발 다가섰다. “몰라.” 빈이는 한마디 던지고 다시 풀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늘에서 후둑후둑 비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은지가 웃옷을 벗어 빈이와 자기의 머리를 가리며 말했다. “정말 떨어지네, 비방울이…” 은지가 빈이의 곁으로 좀더 다가앉으며 엉뚱하게 물었다. “아버지가 널 사랑하니?” “사랑? 아버지가?” 빈이가 의아한 눈길로 은지를 건너다보면서 되물었다. “그러잖아, 사람들이. 바람나면 새끼도 모른다구.” 은지는 말하면서 살그머니 바지가달을 걷어올렸다. 오른다리 종아리에 반뽐 쯤 되는 상처자국이 나있었다. 빈이가 웬 일이냐는듯 은지의 얼굴을 찍어보았다. “우리 아버지도 사실 내가 여섯살 때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단다. 나는 지금도 그 날 아침만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끼쳐.” “…” 빈이는 말 없이 은지의 기색만 살폈다. 은지가 잠간 입술을 감빨더니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봐서라도 가정만은 깨지 말자고 그렇게 매달렸는 데도 아버지는 기어코 나와 어머니를 버리고 집을 나갔지. 그것은 하늘에 검은 구름이 짙게 드리웠던 어느 오전이였어. ” 은지는 또 그 소름이 끼치는 오전을 생각하는지 지긋이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회억을 더듬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가방을 들고 객실에 나왔어. 그 뒤로 어머니가 따라서구. 어머니는 제발 다시 한번만 더 생각해달라고 울면서 비는 것이였어. 하지만 아버지는 옷섶을 잡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면서 소리쳤어. 늦었다고 말이야, 모든 것이 만구할 수 없다는 거야. 어머니는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어깨를 들먹이는 것이였어.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집을 나가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소리쳤어. 아버지를 가지 말라고 말이야, 앞으로는 아버지 말도 잘 듣고 어머니 말도 잘 듣겠다고 하면서 애걸했지. 아버지는 처음에 잠간 머뭇거리는 것 같았어. 하지만 인차 허리를 굽혀 자기의 다리를 안은 나를 뜯어 옆에 던져놓는 거야. 나는 엉금엉금 기여가 다시 아버지의 다리를 부여잡았더랬지. 그러자 아버지가 인내심을 잃었던지 그대로 다리를 날려 나를 한쪽에 팽개치는 거야. 나는 허망 뿌리워나가 유리로 된 차탁 우에 떨어졌어. 일이 커질라고 그랬던지 차탁이 그만 깨지면서 유리 쪼각이 나의 종아리를 찔렀어. 나는 새된 소리를 질렀지. 어머니가 달려와서 나를 품에 안았어. 나의 종아리에서는 피가 샘솟듯 솟아올랐어. 어머니는 너무도 당황스러워 나를 안은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였어. 애가 다 죽어간다고 미친듯이 소리치는 것이였어. 하지만 아버지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나가버렸어.” 말하는 은지의 눈에서 독기가 서려올랐다. “아버지는 내가 죽든 살든 관계하지 않았어. 그렇게 집을 나간 아버지는 한번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구. 설상가상으로 유리에 긁힌 나의 상처가 곪으면서 진물이 흘렀어.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다니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 그 때면 나도 어머니를 따라 펑펑 눈물을 쏟아더랬지. 시간이 흐르면서 종아리에 난 상처가 차츰 아물었고 그 날 오전의 그 악몽도 차츰 색이 바래졌어.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옅어지지 않았어. 그 어린 가슴에서도 아버지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이 꿈틀꿈틀 했어.”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니?” 빈이가 다잡아 물었다. 은지가 잠간 생각을 굴리는듯 싶더니 입을 열었다. “얼굴도 기억 나지 않는 사람을 붙잡고 지금도 미워해서는 뭘 하니? 지금은 아버지라는 그 이름이 그저 담단하게 느껴질 뿐이야. 하지만 아마 지금 그런 일을 당한다면 너처럼 이를 갈고 복수를 꿈꾸었을지도 몰라.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은지는 자기를 버린 아버지가 앞에 있기라도 하듯 이사이로 한마디한마디 내뱉었다. “복수 할 거야.” 빈이가 다시 그 말을 반복했다. “세상 일이란 그런 것 같아. 두려워하면 두려워할수록, 근심하면 근심할수록 점점 더 커지고 현실로 다가오 것 같아.” 은지가 머리를 가렸던 웃옷을 활 내치면서 말했다. “우리 아예 이 비를 다 맞고 말자. 실컷 맞아보자. 비물이 너의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들을 말끔히 씻어가라지 뭐.” “결심했다, 난 어떤 수를 써서라도 복수 할 거야.” 빈이가 또박또박 말에 그루를 박았다. “그래, 복수해라. 그럼 나는 너를 도와 무엇을 할 수 있을가?” 은지가 빈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몰라.” 은지는 더 이상 빈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결심한듯 말했다. “속시원히 망신주자, 그 녀자를. 감히 머리를 쳐들구 다니지 못하게 사람 많은 곳에서 톡톡히 망신을 주잔 말이다.” “어떻게?” 빈이가 머리를 돌리면서 다급히 물었다. “몰라.” 은지가 머리를 흔들었다. 빈이가 피식 웃으면서 입을 다셨다. “나는 또…” “하지만 확실해, 망신을 주는 거야. 그 녀자가 다시는 그런 일을 못하게 확실하게 경고하는 거야.” 은지의 목소리에는 빈이에 대한 동정과 련민과 관심 같은 것이 다분히 담겨져있는 것 같았다. 동병상련이라고 할가? 빈이는 복잡한 눈길로 은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불렀다. “은지야.” 빈이가 으스러지게 은지를 품에 안아주었다. 은지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빈이는 은지를 안은 채 한참이나 거친 숨을 몰아쉬였다. 은지는 놀란 토끼처럼 빈이의 품에 안겨있었지만 목소리에만은 예리한 가시를 품고 있었다. “그 녀자를 찾아가 시비를 거는 거야. 사람들이 가득 구경하러 모여들었을 때 그 녀자가 남의 가정을 파괴했다고 소리치는 거야. 아무리 개방된 세상이라 하지만 여전히 바람 나서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녀자에게는 그렇게 관대하지 않아.” “그래?” 빈이는 품에 안겨 앙칼지게 쏘아대는 은지를 내려다보았다. “난 말이야, 누가 나를 업신 보면 사정을 두지 않아, 애비 없는 년이라구 애들이 놀리면 목숨을 걸구라두 덤벼, 그래서 태권도도 배웠구…” 지난번에 은지가 하던 말이 다시 귀전에서 쟁쟁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빈이의 입가에서 가는 웃음이 스쳐지났다. 빈이는 방불히 그 어떤 장면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좋아, 그게 참 좋을 것 같아. 매장해버려야지. 완전히 이 세상에서 그년을 매장해 버려야지.” 빈이가 으드득 이를 가면서 품에 안았던 은지를 밀어내고 벌떡 일어섰다. 빈이의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확실하게 그 어떤 결심을 다지는 것 같았다. 푸들푸들 떨리는 두볼을 타고 비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하하…” 은지가 빈이의 몰골을 바라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웃느라 약간 흔들리는 은지의 얼굴에서도 비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빈이가 손가락으로 은지의 얼굴에서 흐르는 비물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완전히 물병아리가 되였구나.” “비오는 계절이잖아.” 은지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러나 괜찮아, 인차 비가 그칠 거야.” “그치겠지. 그쳐야지…” 빈이는 중얼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비 속을 걷는 빈이의 모습이 은지의 눈에 클로즈업되는 것 같았다. 은지도 빈이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개울가에 피여난 찔레꽃들이 비 속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4   빈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 제법 진지한 빛이 어려있었다. 그는 잠간 친구들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감사하다, 정말 감사하다. 너희들의 도움으로 나는 이번 복수계획을 원만하게 완수할 수 있었다. 자, 들자.” 빈이는 말을 마치고 잔을 높이 쳐들었다. “축하한다!” “마시자!” “통쾌하게!” 빈이를 빼고 나머지 세 친구의 잔에는 맥주가 들어있었다. 민머리를 한 남자애가 먼저 맥주잔을 입에 가져다 대더니 단숨에 굽을 냈다. “와— 민호, 대단하다.” 그러자 민호가 머리에 노랑물감을 들인 남자애를 향해 소리쳤다. “정민아, 넌 뭐 빠질 수 있을 것 같니? 소리만 치지 말구 쭉 굽을 내라.” 정민이가 감히 술잔을 들 생각을 못하고 고수머리를 한 남자애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호가 먼저 내면 나두 내지.” “자식, 튕기기는. 자, 봐라.” 수호가 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셔댔다. 그러자 정민이도 따라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빈이야, 이렇게 기쁜 날에 너도 맥주를 마셔야 하는데.” 민호가 빈이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빈이가 민호의 눈길을 피하면서 입을 열었다. “나도 마시고는 싶지만 아직 학생이니 별 수 없지. 그만 사정을 봐줘라. 대신 나도 이 음료를 굽 낼게.” 빈이는 말을 마치고 잔을 입가에 가져다댔다. “그래서, 그년이 제 에미를 부르고는 기절했다구” 정민이가 빈이에게 물었다. “아니, 빈이는 걔가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냥 돌아섰다고 하지 않았니?” 수호가 한술 떴다. 빈아가 입가에 실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무튼… 그 애가 ‘어머니!’ 하고 피터지게 소리치더니 어디론가 허둥지둥 달려가는 것이였어. 그 뒤로 걔 엄마가 쫓아가면서 걔 이름을 부르구. ‘은지야, 은지야—’ 하구 말이다…” “하하하하…” “에잇, 통쾌해.” 민호가 짝짝 손벽을 쳐댔다. 빈이가 그러는 민호를 멀거니 바라보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나는 사실 내가 정말 통쾌한지는 잘 모르겠다. 너희들에게 무지 고맙기는 하지만.” 빈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민호의 눈길이 확 도는 것만 같았다. “너 그게 무슨 말이니? 너 진짜 통쾌해 해야 정상이 아니니? 그년들을 완전히 철저히 무너뜨려야 정상이 아닌가구?” 민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있었다. 빈이의 심성이 여리다고 탓하는 것 같았다. “그래, 맞아. 빈이야, 넌 진짜로 통쾌하게 생각해야 해. 그 애 엄마가 너네 가정을 파탄시키려고 작정하고 달려든다면서.” 정민이가 빈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빈이야, 그 복수를 위해서 우리 함께 머리를 짠 게 아니니?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말이다. ” 수호의 말에 정민이가 또 한술 떴다. “그러게, 너는 또 얼마나 열심히 은지 그년을 거기까지 끌어갔구.” 말이 길어지는 것 같자 민호가 손을 저었다. “그만해라, 이 좋은 자리에서 술이나 실컷 마시자.” 말을 마친 민호가 친구들의 술잔에 맥주를 붓기 시작하였다. 친구들은 웃고 떠들면서 다시 맥주잔을 쳐들었다. 하지만 빈이는 진짜 그 순간을 통쾌하다고 해야 할지, 허무하다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은지가 피터지게 “어머니!” 하고 부르던 그 목소리가 칼이 되여 자기의 가슴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 무시로 뇌리를 치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 날도 빈이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그 녀인이 사는 제3소학교 부근으로 갔었다. 그 녀인에 대한 새로운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가 해서였다. 그 녀인의 활동반경도 사실 그렇게 넓은 것은 아니였다. 채소 사러 시장으로 가지 않으면 아버지와 함께 공원으로 가서 춤을 추거나 음료를 마시는 것이 고작이였다. 분명 그 녀인이 풍류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빈이는 그 녀인을 단번에 때려엎을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꼭 손에 넣고 싶었던 것이다. 빈이가 학교 담장에 기대서서 별 기대가 없이 주변을 두리벙두리벙 살피고 있을 때 제3소학교 서쪽 골목으로부터 한쌍의 모녀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빈이는 첫눈에 나이들어보이는 그 녀인이 바로 아버지와 사귀는 녀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녀인이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로 옆에 선 소녀에게 뭐라고 말하는 품이 얼핏 보아도 모녀 지간이 틀림없었다. 순간 빈이는 몰려오는 거대한 분노를 느꼈다. ‘흥, 딸까지 있는 년이 남의 가정을 파괴하겠다구? 렴치 없는 년, 량심 없는 년, 칼탕 쳐 죽일 년…’ 빈이는 당금 달려나가 그 녀인을 족쳐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였다. 하지만 빈이는 인차 자기도 다치지 않고 그 녀인에게도 더 큰 타격을 주려면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어떻게 복수하면 좋을가?’ 순간 떠오르는 이들이 바로 고중에 붙지 못한 초중 때의 동학들인 민호와 정민이와 수호였다. 그들은 모두 한 동네에 살고 한 학급에서 공부했던지라 초중에 대닐 때는 아주 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공부에서 뛰여난 성적을 자랑하는 빈이와는 달리 그 애들은 공부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결과 빈이는 고중입학시험에서 순리롭게 제1고중에 입학하였지만 그 애들은 결국 고중에도 붙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찍 사회와 접촉해서였던지 엉뚱한 궁리를 하거나 사회교제에서는 빈이를 찜 쪄 먹을 정도였다. 빈이는 할 일이 없이 맨날 거리를 휩쓸고 다니는 그들이라면 엉뚱한 방법으로 그 녀인을 골탕먹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발한 생각이 들었다. 빈이는 인차 민호에게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다. “뭐야? 우리 대수재님께서 무슨 일로 우리 같은 건달들을 다 보자구 하니?” “보구 싶어서, 청 들 일도 있구.” “좋지, 좋구말구.” 민호가 기다리기나 했다는듯이 정민이와 수호를 데리고 인차 빈이를 찾아왔다. 빈이에게서 대충 사연을 듣고난 친구들은 중구난방 떠들어대기 시작하였다. 그 녀인네 집에 돌멩이를 뿌리자는둥, 골목을 지키다가 랍치를 해서 산 속에 가져다 버리자는둥, 지어는 그 녀인에게 쥐약을 넣은 음식을 먹여 죽여버리자는둥… 그들이 내놓은 복수방법은 실로 여러가지였다. 하지만 빈이는 결코 그 방법들이 어느 한가지도 실행이 가능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빈이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그림이 바로 그 녀인이 딸과 나란히 걸어오던 장면이였다. ‘딸이 상처받는 것을 가슴 아파하지 않을 어머니가 어디에 있을가?’ 빈이는 자기의 생각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 “바로 그거야, 그 녀인의 딸을 리용하는 거야,” 정민이가 무릎을 탁 쳤다. “어떻게?” 민호가 빈이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다잡아 물었다. “몰라, 그것까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 녀인의 딸에게 무서운 고통을 주어 그 녀인도 곁에서 끙끙 속을 앓다가 우리 아버지와 헤여지게 하는 거야.” 빈이의 말에 수호가 동을 달았다. “내 생각에는 됨직하다. 빈이야, 너 그 녀인의 딸과 련애해라.” 정민이도 수호의 말에서 계발을 받았던지 한술 떴다. “맞아, 살살 잘 구슬려서 그 녀인의 딸이 너와 떨어지면 죽겠다고 할 때 너는 짠 하고 너의 아버지를 데리고 그 녀인 앞에 나서란 말이다. 그러면 그 녀인이 기혼해서 쓸어질 게 아니니? 하하하… 에미 딸이 함께 너네 부자간과 련애할 수는 없을 거니까.” “하하하… 지독한 자식, 소설을 써라.” 민호의 핀잔에 수호가 두덜거렸다. “왜, 좋기만 하구만. 그래야 그 녀자들의 가슴에 아물 수 없는 큰 상처를 줄 수 있을 게 아니니?” 빈이는 수호의 말이 그럴듯 하게 생각되였다. 자기의 인물이나 체격에 제1고중 학생이라는 간판이면 얼마든지 그 녀인의 딸을 쟁취할 자신이 있을 것 같았고 깊은 련애를 하는 척 하다가 그 애가 자기를 떨어질 수 없어할 때 아버지와 함께 은지 어머니 앞에 나타나면 은지 어머니의 두 눈이 휘딱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되였던 것이다. 그러한 계획을 가지고 지난번에 처음 은지를 만난 후 은지의 다혈적인 기질을 보아낸 빈이는 복수계획을 좀더 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자 은지의 가슴에 그 녀인에 대한 반감을 가득 심어주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녀인에 대한 은지의 반감을 빌어 그 애가 직접 어머니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한다면 은지에게도 은지 어머니에게도 더욱 큰 타격으로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빈이는 어느 기회에 어떤 방법으로 은지의 가슴에 어머니에 대한 반감을 심어줄 것인가를 두고 시종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 날 아침에 아버지가 어머니와 갈라지자고 하면서 문을 차고 집을 나서는 순간 더 이상 계획을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던 것이다. 비 내리던 그 날 찔레꽃의 꽃말이 ‘고독’아라고 하면서 자기의 고독을 빈이에게 열어보일 때 빈이는 잠간 동병상련 비슷한 알알한 감정이 가슴속을 치고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빈이의 가슴속에 쌓여진 원한과 상처는 한순간의 그 감정을 무찌르기에는 족한 것이였다. 빈이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추스리고 주먹을 부르쥐였다. … 빈이는 일부러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저녁무렵에 은지를 불렀다. 자기는 어떤 환경에서라도 은지 어머니를 첫눈에 알아볼 수 있지만 저녁무렵이고 근본 그런 장면을 그려본 적이 없는 은지로서는 주의하지 않으면 어머니의 뒤모습을 첫눈에 알아보기 힘들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빈이는 은지를 데리고 은지 어머니가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골목길에 들어섰다. 이제 은지 어머니가 그들의 앞을 스쳐지난 다음 은지에게 뒤를 따르다가 부딪치는 척 하면서 시비를 걸라고 할 생각이였다. 일은 생각대로 척척 진척이 되여갔다. 사람들 속에서 시름놓고 걸어오는 은지 어머니의 모습이 저 멀리로 보였다. 빈이는 일부러 은지를 당겨다 길을 등지고 서게 한 다음 열심히 작전계획에 대하여 늘어놓았다. 빈이의 일장연설을 들을수록 은지는 더 열광하는 것 같았다. “지켜봐라. 내가 어떻게 그 년을 망신주는가? 오늘 내 손에 잘 못 걸린게지.” 은지가 주먹을 휘둘러보이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너만 믿는다.” 빈이가 은지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은지 어머니가 자연스럽게 골목 앞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빈이는 은지를 끌고 골목어구에 다가섰다. 은지 어머니의 뒤모습만 보였다. 빈이가 슬쩍 은지를 밀며 말했다. “저 사람이다. 저 회색웃옷을 입은 녀자…” 은지는 빈이의 손길을 따라 희미하게 보여오는 회색웃옷을 입은 녀자의 뒤모습을 잠간 바라보더니 자신 있다는듯 다시 한번 주먹을 흔들어보이고는 종종걸음을 놓기 시작했다. 은지가 먼저 가서 그 녀자에게 시비를 건 후 빈이가 달려가서 시비를 가려주는 척 하면서 그 녀자를 더욱 난처한 궁지에 밀어넣는다는 게 그들의 작전 방안이였던 것이다. 빈이는 그 녀자의 뒤를 급히 쫓아가는 은지의 뒤모습을 바라보면서 긴장하게 하회를 기다렸다. 은지가 어깨로 그 녀자의 등을 툭 치는 것이 보였다. 시름없이 걸음을 옮기던 그 녀자가 잠간 멈추더니 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 은지가 흠칫 하는 것이 멀리서도 똑똑하게 보여왔다. 이어 “어머니!” 하는 괴성이 터졌다. 그 소리는 사냥군의 화살을 맞은 어린승냥이의 비명 같았다. 그 소리는 무너져내리는 하늘 밑에서 절망을 부르짖는 어느 소녀의 마지막 통탄 같았다. 빈이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놀랍게도 머리가 하얗게 바래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다. 기쁜지, 통쾌한지, 허전한지, 불안한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정상적인 정서대로라면 응당 더없이 통쾌하고 승리의 희열을 느껴야 할 것이였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런 기분만이 아니였다. 비오던 그 날 보았던 은지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던 것이다. “너 찔레꽃의 꽃말이 무엇인지 아니?” “찔레꽃의 꽃말은 고독이래.” 빈이는 그 말을 들으면서 은지도 사실은 고독한 애구나 하고 잠간 생각했었다.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나 애틋한 사랑 같은 것은 없지만 적어도 어머니의 덕분에 자기가 돈이나마 ‘펑펑 쓰면서 살았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는 애라고 생각되였던 것이다. 하지만 자기로부터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파렴치한 녀인으로 극대화된 그 ‘나쁜 녀자’가 바로 자기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타격이 얼마나 클가 하는 것은 생각해볼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빈이였다… 빈이는 생각지 못했던 찜찜한 기분으로 골목길을 나와 자기를 위해 방도를 내주고 각자 악역까지 담당했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복수계획을 완성한 후 빈이가 한 때 거나하게 쏘기로 친구들과 약속을 했던 것이다. “자자자, 우리의 진정한 우정과 달콤한 래일을 위하여 ’진달래’는 해야지?’ 민호가 잔을 높이 들고 제기했다. “진—달—래—” 친구들의 흥분에 들 뜬 소리를 들으면서 빈이는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피곤하다는 생각이 뇌를 쳤다. 빈이는 그대로 엎어져 한잠 늘어지게 자고 싶었다. 그렇게 한잠 자고 나면 괴로움도 고통도 모두 잊혀질 것 같았다. “진—달—래—” 친구들이 또 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5   빈이가 잠에서 깬 것은 아침 5시 30분 정도였다. 사실 잠에서 깼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빈이는 긴긴 밤을 깊은 잠에 들지 못하였던 것이다. 엉뎅이에 꼬리가 아홉개 달린 불여우를 쫓아다니는가 싶다가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그 심연에서 헤여나오려고 두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눈을 뜨니 가슴에 식은땀이 흥건히 내돋아있었다. 빈이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이 아파났다. 밤새 큰병을 앓고난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도 지난밤에 은지는 어떻게 보냈을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치는 것이 야속스러웠다. 그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했지만 점점 더 얄궂게 머리속을 파고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인젠 나하고 상관 없는 애야, 한평생 다시 만날 필요가 없는 애라구. 그런데 왜 자꾸만 …’ 빈이는 어제 질러올리던 은지의 그 “어머니!”라는 소리가 그대로 다시 귀전을 치는 것 같았다. 빈이는 정통편이라도 찾아 먹으려고 객실로 나갔다. 어머니가 아침 준비를 하는지 주방에서 똑딱똑딱 칼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 왜 벌써 일어났냐?” 할머니가 객실바닥을 닦다 말고 빈이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주름이 쪼글쪼글한 할머니의 얼굴을 반나마 가리고 있었다. 빈이는 피발이 선 할머니의 멀건 눈동자를 잠간 들여다보다가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억지로 띄우면서 말했다. “머리가 아파서요, 정통편을 먹으려구요.” 할머니의 멀건 눈동자가 커지고 있었다. “어메— 빈 속에 먹으려는 거냐? 그럼 속을 버릴 텐데.” “괜찮아요.” “그래두 속을 버릴 텐데, 에미야— 빈이가 정통편을 찾는다—” 할머니가 주방에 대고 길게 소리쳤다. 주방으로부터 슬피퍼를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머니의 얼굴이 나타났다. 언제보아도 부석부석한 얼굴이였다. “왜? 감기에 걸렸니?” “몰라요.” “좀 기다렸다 아침을 먹은 후에 정통편을 먹어라.” “한알만 먹겠는 데요 뭐.” “애두 그새를 못 참고.” 어머니는 빈이를 향해 눈을 흘기는 체 하더니 말했다. “어머니 침실의 경대 서랍에 있다.” 빈이는 그 소리가 떨어지자 주저없이 아버지, 어머니가 쓰는 침실문을 밀었다. 침대가 란잡했다. 어머니가 빠져나간 이불이 바닥에 끌려있었고 베개도 아버지의 발치에 놓여있었다. 아버지는 웃통을 들어낸 채 다리 사이에 이불을 끼우고 죽은듯이 누워있었다. 그 때까지 자고 있는게 분명했다. 빈이는 아버지를 깨우지 않으려고 발볌발볌 다가가 경대 서랍을 열고 정통편을 찾기 시작했다. 그 때 갑자기 아버지의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 그러자 아버지가 인차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아버지도 진작 깨나 눈만 감고 있은 모양이였다. “뭐라구? 딸애에게 큰 일이 생겼다구?”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두 눈이 거슴푸레 했지만 목소리는 급하게 들렸다. 전화 저쪽에서 뭐라고 급히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 알았소. 급해하지 말고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요. 시병원 급진처라구 했지. 1층이지? 기다리오, 내가 인차 갈 테니.” 아버지가 핸드폰을 이불 우에 던지고 용수철 튕기듯 일어나 문을 차고 세면실로 달려갔다. 빈이는 허둥대는 아버지의 뒤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이불 우에 던져진 아버지의 핸드폰을 주어들었다. 방금 통화를 한 전화번호 앞에 ‘곰돌이’라는 세글자가 박혀있었다. ‘곰돌이? 분명 애들과 하는 통화는 아닌 것 같았는데?’ 순간 빈이의 머리에는 통통한 모습의 그 녀인이 떠올랐다. 그 녀인이라면 아버지가 ‘곰돌이’라고도 애칭으로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빈이는 가슴에서 무엇인가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였다. 그 녀인에 대한 원한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자기가 근심하던 일이 터진 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여들었던 것이다. ‘그래, 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빈이는 정통편을 찾다 말고 자기의 침실로 달려들어갔다. “정통편은 찾았냐?” 할머니가 물었다. “네, 좀 있다 먹을 게요.” 빈이는 급히 옷을 주어입기 시작하였다. 잠간 지나 객실에서 또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른 아침에 어디로 가려구 그러냐?” “네, 친구 딸내미 병원에 입원했대요. 지금 혼자라서 도와달래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기까지 했다. “저런, 저런, 어쩌면 좋다냐? 몹시 상했다냐?” “그런 것 같아요. 다녀올게요.” 그 때 어머니가 주방에서 객실로 나오는 것 같았다. “친구라니요? 누군데요? 어떻게 아프대요?” “누구라면 아오? 한국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요. 삐치지 말구 저리 비키오.” 아버지가 퉁명스럽게 쏘아부치는 소리였다. “이른 아침부터 참…” 어머니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는지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빈이는 그 새 옷을 다 입고 조용히 침실문을 밀어열었다. 아버지가 출입문을 밀고 나가고 있었다. 빈이는 잠간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다가 누구에게라 없이 소리쳤다. “저, 동네를 한바퀴 돌고 들어올게요.” 어머니가 주방에서 소리쳤다. “일찍 들어오너라. 따가운 밥을 제때에 먹게.” “네.” 빈이는 외마디 대답을 하면서 문을 나섰다. 하늘에 짙은 구름이 낮게 깔려있었다. 빈이는 숨 쉬기조차 힘든 것 같았다. “당금 폭우라도 쏟아질 것 같네.” 빈이는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들어 길어구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한창 택시에 오르고 있었다. 빈이도 달려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빨리요. 저 앞에 가는 택시 뒤를 따라주세요.” 운전수는 웬 일이냐는듯 빈이를 힐끔 겻눈질 해보고는 소리 없이 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이라 길에는 차들이 별로 없었다. 택시는 순리롭게 시 병원 문 앞에 달려가 멈춰섰다. 아버지가 먼저 택시에서 내려 병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빈이도 택시에서 내려 아버지의 뒤를 따라 병원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빈이는 대청의 정문으로 들어가려다가 아버지가 대청에서 웬 녀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녀인이였다. 그 녀인이 진작 대청에 나와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은 것 같았다. 빈이는 잠간 주저하다가 서쪽에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가기로 마음 먹고 몸을 돌렸다. 문 옆으로 주사실 두개가 나란히 있었다. 빈이는 성인주사실이라고 쓴 문 앞에 다가서서 안을 살폈다. 침대 여덟개가 두쪽으로 갈라져 놓여있었다. 맞은 켠 침대에 두 눈을 꼭 감고 누워있는 은지가 보였다. 얼굴이 해쓱해진 것 같았다. 왼쪽 팔목에 붕대가 칭칭 감겨져있었다. ‘설마…’ 빈이는 온몸으로 속름이 쫙 끼치는 것 같았다. 악몽 같은 환영들이 빈이의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슴을 진정하자 차츰 어지럽게 흩어졌던 그림들이 자리를 잡아갔다. 대략 사태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빈이는 지난밤에 은지가 무엇으로 팔목을 그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가슴이 갑갑해왔다. 눈앞이 아찔해났다. 고통에 모대기다가 끝내는 헤여나오지 못하고 면도칼을 찾아 자기의 손목을 긋는 은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모두 내 탓이다.’ 크나큰 죄의식이 홍수처럼 빈이의 머리를 치고 들어왔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시각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빈이는 감히 주사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자기가 은지를 사경에 밀어넣었다는 생각에 가슴 한 구석이 싸늘해졌다. 하지만 그대로 그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 매정하게 그 자리를 뜨게 되면 영원히 그 죄책감에서 헤여나오자 못할 것 같았다. 벗어내칠 수 없는 굴레를 쓰고 힘겹게 살아가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이 머리를 쳐들었다. 빈이는 두 주먹을 으스러지게 잡았다가 풀면서 끝내 주사실 문을 살며시 밀어열었다. 빈이는 발볌발볌 은지가 누운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은지는 미동도 없었다.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돋아있었다. 빈이는 망설이지 않고 침대궤 우에 놓인 휴지통에서 종이를 뽑아 은지의 이마에 돋아난 땀을 닦아주었다. 은지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후—” 빈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은지를 보았으니 한시 급히 그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래야만 그 가슴 막히는 분위기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빈이의 발자국은 대청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여서 그런지 대청에는 사람그림자 하나 얼씬 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와 그 녀인이 대청남쪽에 놓인 걸상에 앉아있을 뿐이였다. 녀인은 몹시 지쳤던지 아버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두 눈을 살풋이 감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금실이 좋은 부부간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빈이는 곧추 아버지와 그 녀인을 향해 걸어갔다. 발걸음소리에 머리를 쳐든 아버지가 흠칫 놀라면서 몸을 떨었다. 그 바람에 녀인이 아버지의 어깨에서 머리를 떼고 아버지와 빈이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대청에는 잠간 숨막히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너…너… 여기는 웬 일이냐?” 빈이는 아버지를 쏘아보면서 한마디한마디 뱉어냈다. “미안하지 않습니까? 아버지, 나에게 미안하지 않습니까? 어머니에게 미안하지 않습니까? 저기…저 침대에 누워있는 은지에게 미안하지 않습니까?” “너… 네가…” 아버지는 너무도 놀라 후들후들 떨기만 할 뿐 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행복합니까? 어머니를 속이고 나를 속이고 할머니를 속이고 여기서 행복합니까? 저분의 딸이 저기에 누워있는 것을 보면서 행복합니까?” 빈이는 말하면서 눈길을 그 녀인에게로 돌렸다. 녀인의 두 눈이 화등잔이 되고 있있다. “아들인가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요? 부인은 세상 뜬지 10년이라면서요?” “네?!” 빈이가 억이 막혀 입을 떡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그래서 고독하다면서요, 고독해서 말동무나 찾는다면서요? 이게 무슨 일인가요?” 녀인의 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지…진정하오. 내가 설명할게. 사실은… 사실은…” 녀인이 물 먹은 담벽처럼 무너져내렸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힘들 때 기대자고 만났더랬어요. 여섯살부터 아버지를 불러보지 못한 은지에게 ‘아버지’라고 부를만한 사람이라도 찾아주려고 만났어요. 그런데… 그런데 이게 뭐예요. 명년에 아들애가 대학에 가면 두 가정을 합치자면서요, 훌륭한 남편으로 훌륭한 아빠로 되여주겠다면서요? 그리고 방금까지도…” “어머니!” 어느새 왔는지 은지가 뒤에서 녀인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녀인이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두 눈으로 콩알 같은 눈물이 둘둘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어머니, 미안해요,” “은지야…” 녀인이 으스러지게 은지를 품에 끌어안았다. 당금 누가 빼앗아가기라도 할가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영원히 품에서 놓지 않으련다고 맹세하는 것 같았다. 은지가 녀인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가 천천히 쳐들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의 그 마음이면 저는 만족이예요. 저는 행복해요. 그 줄도 모르고 저는 지난밤에는 정말 죽고 싶었어요. 불결한 어머니의 배에서 나왔다는 생각에 당장 죽어버리고 싶었어요. 새날이 밝는 것을 보기 두려웠어요. 세상이 나에게 손가락질을 할 것 같아 소름이 끼쳤어요.” 녀인이 갑자기 머리를 돌리더니 아버지를 쏘아보면서 소리쳤다. “당신, 당신… 벌을 받을 거예요. 천벌을 받을 거예요.” 녀인이 벌떡 일어나 아버지 쪽으로 다가섰다. 아버지가 비실비실 뒤로 물러서면서 더듬거렸다. “나는 진진…진정으로 그 쪽을 사랑하오. 사랑해서 그렇게 말한 거요. 그 쪽을 잃을 것 같아서 그런 거요.” “그만하세요, 듣고 싶지 않아요.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본댁을 두고 어찌 죽었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나요? 집에서 새끼 키우고 당신의 어머니를 봉양하는 본댁의 감수는 생각이나 해보았나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서 그랬다구요? 그 말을 저더러 믿으라구요?” 녀인의 입에서 뜨거운 침이 탁탁 튕겨나오고 있었다. 그 서슬에 아버지는 주눅이 들었는지 감히 머리도 제대로 쳐들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나는 그 쪽하구 만날 때…때마다 진정이였소. 쟤 엄마는 나의 마음을 도무지 익을 줄을 모르는 녀자요. 황소처럼 우직해서 따…땅을 뚜질 줄 밖에 모르는 시골녀편네란 말이요. 갑갑했단 말이요. 나를 리해하는 녀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싶었단 말이요…” “꺼져요, 썩 꺼져요.” 녀인이 악에 받쳐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아버지는 사태의 엄중성을 느꼈던지 더 이상 변명을 못하고 잠간 멍하니 서있다가 힘 없이 몸을 돌렸다. 밖에서 “우르릉 꽝—꽝—” 하고 우뢰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대살 같은 비줄기가 유리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은지는 빈이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빈이도 말 없이 창문가에 다가섰다. 은지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은 비 오는 계절이야…”      
14    잡초 댓글:  조회:1889  추천:0  2015-09-03
잡초     1.   잡초였다. 분명 잡촌줄을 알면서도 정우는 꺾고싶었다. 자기가 꺾지 않으면 누군가 꺾어서 되는대로 짓뭉개고 팽개칠것만 같았다. 정우는 급히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카톡!” 하는 소리가 울린것이다. “카톡!” 하는 그 소리가 자기의 입에서 나간것 같기도 하고 저 멀리 남쪽 하늘끝자락에서 울린것 같기도 했다. 정우는 습관적으로 왼손을 쑥 내밀었다. “꿈 꿨어요?” 정우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끌려 눈을 떴다. 안해가 정우의 곁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밀랍같았다. 솜씨 서툰 어느 예술가가 급히 빚어놓은 밀랍같았다. 안해는 그 순간 거친숨을 몰아쉬고있었다. 정우의 얼굴에 안해의 코구멍에서 뿜기는 단김이 아물아물 스쳐지났다. 정우는 잠기 어린 두 눈으로 안해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가슴이 섬찍해났다. 이마에 벌써 주름까지… 정우는 급히 두눈을 감았다. 보고싶지 않았다. 아니, 보는게 두려웠다. 두오리였던가? 아니, 그 사이에 가는 주름이 한오리 더 있었어. 그럼 세오리? 큰 주름우에 한오리 더 있은 것 같기도 하고… 정우는 그 순간 그러한 수자들이 머리속에 떠오르는 자신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하면서도 웬 일인지 안해의 이마에 패인 그 주름의 개수를 꼭 짚어 똑똑히 알고싶었다. 정우는 왼쪽눈을 가늘게 뜨고 살그머니 안해의 얼굴을 살폈다. 안해는 그때 두눈을 감고있었다. 웃쪽 눈까풀이 파들파들 떨리고있었다. 뭔가 깊은 상념에 잠긴듯 했고 또 뭔가를 애써 누르는것 같기도 했다. 정우는 목구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것 같았다. 입술도 말라들었다. 정우는 아래입술을 적시고는 혀끝을 쳐들어 웃입술에 가져다 댔다. 바로 그때 또 그 소리가 울린것이다. “카톡!” 정우는 흠칫 놀라며 벌떡 일어나 앉아 벅벅 거렸다. “한국에서라면 이이… 이때쯤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조조조…종로3가를 누누… 누비고 있을 텐데.” 안해가 아무말 없이 정우앞에 핸드폰을 내밀었다. 정우는 또 한번 힘칫 놀라며 안해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로챘다. “중국은 이래서 안된단 말이요. 길에만 나서면 정신 없다니까. 훙떵(红灯)이 켜져두 막 꿰질러 다니구, 사람들 수준이 한국사람들에 비하면 아직 발바닥이지 뭐.” “카톡, 참 좋죠?” 안해의 목소리가 낮았지만 정우는 웬 일인지 분명 그 목소리에 날이 서있다고 느껴졌다. “좋기는? 당신두 참 한심하오.” “잡초는 어디나 다 있어요. 저 화분을 좀 봐요.” 안해가 눈으로 창턱에 올려놓은 화분을 가리켰다. “뭐, 잡초?” 정우는 또 한번 흠칫 놀라며 안해에게 눈길을 돌렸다가 천천히 화분통이 놓여있는 창턱을 바라보면서 짐짓 성난체 목소리를 높였다. “기막히지. 한국에서 돈 잘 벌구있는 나그네를 이렇게 감쪽같이 속여 들어오게 하는 법이 어디있소?  “보구싶었어요. 너무 보구싶었어요.” 안해의 목소리가 떨리고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또 “카톡!” 하고 울었다. 정우는 더 이상 안해와 말씨름을 하지 않고 핸드폰을 손에 든채 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2.   잡초라고 생각되였다. 너무도 여려서 자칫하면 누군가의 발에 짓밟혀 이슬처럼 사라질것 같았다. 정우가 그녀를 만난 것은 종로3가의 어느 골목 커피숍에서였다. 커피숍 이름이 “잡초”였다. 그날 정우는 그 커피숍에 커피 마시러 들어간것이 아니라 짜장면을 배달하러 들어갔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부는 언덕에 이름모를 잡초야 한송이 꽃이라면 향기라도 있을텐데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나훈아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짜장 왔슴다.” 정우는 노래 같은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안에 들어서며 소리쳤다. 아담한 몸집의 얼굴색이 눈처럼 하얀 녀자가 카운터에 앉아있다가 일어섰다. “짜장 왔슴다.” “잡초예요.” 녀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네?” 정우는 짜장 그릇을 손에 든채 굳어져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쌍겹눈이 울고있었다. “짜장…” “나훈아는 모를게예요. 무엇을 잡초라 하는지. 모르면서 아는것처럼 그 큰 몸집을 떨며 저러는거예요.” “떨어요? 왜요?” 발이라도 있으면은 님 찾아갈텐데 손이라도 있으면은 님 부를텐데   그 시각 정우는 나훈아의 목소리가 정말 떨린다고 생각되였다. “잡초를 안다고 생각해서겠죠. 짜장 잘 먹을게요. 그리구 탕수육두요.” 녀자는 정우의 손에 만 2천원을 건네주며 속삭이듯 말했다.   3.   잡초였다. 바로 그날 밤, 그녀는 정우의 핸드폰에 “잡초”라는 아이디로 뛰여들었던것이다. 정우는 별로 깊이 생각지도 않고 낮에 들렸던 “잡초”라는 이름의 커피숍을 떠올렸고 그 커피숍 카운터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나훈아가 잡초를 모른다고 나무라던 그녀의 눈처럼 하얀 얼굴을 떠올렸다. 정우는 별로 깊이 생각지도 않고 잡초로부터 날아온 카카오톡을 접수하라는 메시지를 체크했다. 핸드폰에 “잡초님이 대화상대로 추가되였습니다. 채팅을 시작하십시오.”라는 문자가 떴다. 그 문자를 보면서 정우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이마가 빤질빤질했다고 생각되였다. 빤질빤질한 이마가 눈처럼 희다고 기억되였다. -뜻밖이죠? 잡초로부터 날아든 첫 물음이었다. “뭐가?” 그 순간 정우의 머리를 파고든 첫 생각이였다. -세상은 이렇게 살만한데 사람은 왜 점점 더 살기 힘들가요? 정우는 일시 뭐라고 답변을 할지 몰라 “…………” 찍어보냈다. -내가 잡초라면 어떻게 될가요? 누구도 마구 꺾으려 하겠죠? -조선족인가요? -남편이란 놈이 바람났어요. 다른 년과 붙었대요. -아. -살자고 바득거린 죄밖에 없어요, 전… -네. -그 사람 몸이 허약해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나왔어요. 3년철이예요. -그랬네요. -돈을 벌어 꼬박꼬박 보냈어요. 어제 언니가 전화했어요. 그 사람 바람났대요. -참… -미칠 것 같아요. 아무에게나 털어놓지 않으면 터질것 같아요. 가깝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멀게만 느껴지고… 정우는 핸드폰 액정에서 얼굴을 돌리며 지긋이 두눈을 감았다. 눈까풀에 가려진 눈앞에 그녀의 쌍까풀눈이 나타나 흐느끼고있었다… 불쌍한 녀자야. 그놈, 와이프가 보내주는 돈으로 다른 년을 끼고 놀아? 거지 같은 놈, 무골충 같은 놈,단매에 사등뼈를 쳐죽일놈… -어떻게 죽으면 제일 편할가요? -네? 무슨 말씀을? -행복해요. 이렇게 하고싶은 말을 다하고 떠나게 되여. -잠간, 잠간만요. 정우는 저도 모르게 무엇에라도 끌린듯 벌떡 일어나 급히 옷을 주어입었다.   4.   -재미 좋아요? 저 질투나 어쩌죠? -애들처럼. -어머, 우리 벌써 석달이네요. 아마 열번은 했겠죠? 아니, 그 정도는 안되겠다. 듣기 좋게 여덟번이라 하죠 뭐. -다시는 카톡 보내지 마오. 내가 여기 있을 동안. -아, 잡초도 독이 있대요. -롱담은… -위선자! 정우는 급히 그녀에게서 받은 메쎄지를 지워버렸다. 심장이 튀여나올것 같았다. 꿀단지를 들추다 잡힌듯한 심정이였다. “위선자”, 세글자였다. 그 세글자가 비수처럼 정우의 가슴을 찔렀다. 왜 그처럼 떨리고 아픈지 몰랐다. 누구를 위해 떨리고 누구를 위해 아픈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 시각 정우는 자기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깊숙히 숨기고싶었다. 왜서일가? 구경 무엇때문일가? 정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안해가 그같이 엉뚱한 거짓말로 문뜩 자기를 불러들인 원인을 알수 없었다. 며칠전 안해로부터 대학에 간 아들이 차사고를 당해 경각을 다툰다는 전화를 받았던것이다. 안해는 울기만 했고 아들의 핸드폰은 내내 꺼져있어 따로 련락할 방법이 없었다. 하여 정우는 부랴부랴 청가를 내고 귀국했던것이다. 집에 들어서서야 정우는 그 모든것이 안해가 꾸며낸 거짓말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정우는 성난 사자처럼 올리뛰며 무엇때문이냐고 소리질렀다. 안해가 입가에 가는 웃음을 띠우며 “너무 보구싶었어요.”하고 속삭였다. 속에서 열불이 일었지만 다른 한면으로는 “너무 보구싶었어요.” 하는 말에 코끝이 시큰해나기도 했다. 이게 전부일가? 과연 이게 전부일가? 정우는 핸드폰을 잠옷소매에 숨겨가지고 객실로 나왔다. 안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안해의 핸드폰만 당그라니 차탁우에 놓여있었다. “여보-” 정우는 객실 구석구석을 살피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서도 안해의 대답은 없었다. 핸드폰까지 두고 어디로 갔지? 정우는 잠간 생각을 굴리며 차탁앞으로 다가가 안해의 핸드폰을 주어들었다. 악! 순간 정우는 숨이 꺽 막히는것 같았다. 핸드폰액정에 실 한오리 걸치지 않은 정우의 라체가 떠있었다. 이게, 이게… 정우는 너무도 억이 막혀 입을 떡 벌린채 다물줄을 몰랐다…    
13    중편소설*꽃이 떨어지는 소리 댓글:  조회:1897  추천:0  2014-10-09
꽃이 떨어지는 소리 최동일 1 꽃이 스러지고있었다. 여기저기 되는대로 너부러지고있었다. 뭇꽃들이 아파서 파르르 떨고있는 그속에서 민우는 실성한듯 소리쳤다. “내 신, 내 신…” 제딴에는 급해서 소리 지르느라 안달을 떨었건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민우의 가슴은 터질것만 같았다. 민우는 반듯이 누운채 주먹으로 가슴을 북 치듯 쿵쿵 쥐여박다가 두눈을 번쩍 떴다. 꿈이였구나! 민우는 가볍게 “후—” 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비록 꿈이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기분이 씁쓸해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무슨 꽃이였더라? 왜 꽃모양이 이렇게 아리송하지? 과연 무슨 꽃이였더라? 집마당이라고 하는 그곳에서 갑자기 괴성이 터졌던것이다. 민우는 무엇인가 큰일이 일어날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끼면서 그 공간을 벗어나려고 허둥댔다. 헌데 그 순간 발에신이 신겨져 있지 않았던것이다. 민우는 급해서 허둥거리며 자기의 람색 “N”표 운동신을 찾아헤맸다. 아무리 찾아도 신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선가 또 괴성이 터져올랐다. 쓰러진 꽃들이 흐느끼고있었다. 민우는 두려움이 가득찬 목소리로 “내 신, 내 신…” 하고 소리를 지르다가 깨여난것이다. 부잇한 시선을 뚫고 하얀것이 눈에 비쳐들었다. 순간 “여기가 어딜가?”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지났다. 민우는 두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뜨면서 하얀것을 쳐다보았다. 분명 하얗게 회칠을 한 천정이였다. 민우는 두눈을 퀭하니 뜨고 한참이나 천정을 쳐다보다가 맥없이 두눈을 슴뻑거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옆에는 몸만 쏙 빠져나간듯한 이불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퀴퀴한 냄새가 기분 나쁘게 코를 자극했다. 땀냄새 같으면서도 또 몇해나 찌들어버린 먼지냄새 같기도 했다. 민우는 그 냄새를 의식하기 바쁘게 인차 손바닥을 오무려 입과 코를 막으며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자굽에 듬성듬성 피여있는 이름모를 꽃들이 한눈에 안겨왔다. 꽃들이 피여있는 바자옆에서 축구뽈을 굴리고있는 몇몇 남자애들이 보였다. 민우는 그제야 자기들이 2학년 후학기의 기말시험을 마친 기념으로 어제 왕우구에 여름캠프를 왔고 밤에 여준이랑 몇몇 “N사단” 성원들이 민박집을 빠져나가 맥주를 마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우의 눈앞에는 어제밤에 있었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지났다. 그들이 맥주를 사들고 찾은 곳은 개구리울음소리가 신나던 개울가였다. 그들은 개울가에 나란히 앉아서 한 사람이캔맥주 한통씩 뜯어들었다. 돌돌 노래하며 흐르는 시원한 개울물에 두발을 담그고 개구리울음소리를 반주삼아 맥주를 마시는 민우의 기분은 선경에서 노니듯 걷잡을수 없이 설레이였다. “자, 우리 ‘N사단’의 번영발전을 위하여!” 민우가 선창을 하자 여럿은 한결같이 건배를 불렀다. 첫 통은 그렇게 기분 좋게 배속으로 들어갔다. 컴컴한 밤이라 녀성인 담임선생님이 찾아올 념려도 없었다. 기분이 떠오르자 그들은 히히닥닥 권커니작커니 시름 놓고 맥주를 마셔댔다. 가지고 갔던 맥주를 다 마시고난 그들은 또 개울물에 들어서서 가슴이 뻥 뚫리게 물싸움을 하다가 늦어서야 숙소에 들어왔다. 민우는 두손 엄지로 태양혈을 지그시 누르고있다가 밑둥 잘린 나무처럼 훌렁 누워버리며 이불을 머리우까지 활 당겨 썼다. 2 사실 민우는 어제 처음 맥주를 마셔본것이 아니였다. 평소에도 주말이면 자기들 “N사단”성원들과 함께 강변이나 산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는 알몸으로 일광욕을 즐겼었다. 알콜이 몸에 배면서 사지가 나른해나고 몸뚱이가 파아란 하늘로 둥둥 떠오르는듯한 그 느낌은 한주일간 교정에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말끔히 하늘로 날려보내는것 같았다. 민우는 늘 그 느낌을 잊지 못하고있었다. 하지만 맥주가 늘 그렇게 고마운것은 아니였다. 혹시 정서를 통제하지 못하고 과음을 하고난 이튿날이면 속이 메슥메슥해나고 머리가 빠개지는듯 아팠었다. 그럴 때면 민우는 세상만사가 귀찮아지고 당금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지려는듯한 두려움 비슷한것이 엄습해와서 괜히 짜증이 나고 불안스러웠다. 그때면 민우는 이불속에서 머리만 빠끔히 내민채 “아줌마, 물!” 하고 신경질적으로 주방을 향해 소리지르군 했다. 그때쯤이면 집에 가정도우미로 일하는 아줌마만 남아서 설겆이를 하고있으리라는것을 알고있었던것이다. 잠간 지나면 아줌마는 꿀을 탄 시원한 물을 담은 고뿌를 쟁반에 받쳐들고 민우의 침실로 들어온다. 어머니보다도 나이가 한참이나 이상인분이였지만 민우는 그에게 심부름을 시키면서 조금도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져본적이 없었다. 시세무국 국장으로 있는 아버지도 시공상국에서 어느 부서의 주임으로 사업하는 어머니도 민우의 이런 행실을 나무란적이 없었던것이다. 민우네 집에서 가정도우미로 일하는 아줌마도 민우의 시중을 들면서 투정을 부리는 자기 집 막내에게 심부름을 해주는것만치나 당연한것으로 생각하고있는지 조금도 기색이 흐려진적이 없었다. 민우는 이렇게 가정의 우월한 생활환경을 당연한것으로 알며 “작은 황제”로 커가고있었던것이다. 가정의 우월한 생활조건은 학교에 와서도 민우를 무서운것이 없는 “왕자”로 나서게 했다. “N사단”은 민우가 제일 자부감을 느끼는 동아리였다. 민우네 학급은 학교에서 소문난 “부자반”이였다. 학부모들중에는 장사를 하는분들이 많았다. 비록 공부와 장사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였지만 웬 일인지 세무국 국장과 장사군이라는 학부모들 지간의 오묘한 관계가 민우네 학급에까지 영향을 미치는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학급에서 민우의 말은 신비하리만치 잘 통하고있었다. 특히 부모들이 시내중심에서 큰 식당을 경영하고있는 여준이는 민우의 충실한 팬이였다. 민우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애였다. 그래서인지 민우도 여준이를 노복 다루듯 하지만 그래도 제일 믿어주고 아껴주는 편이였다. 민우가 로따(老大)로 불리우는 “N사단”은 사실 여준이가 민우을 내세우기 위해 만들어낸 “부자집”자식들의 동아리였다. 언제부터인지 학교에서는 일률로 교복을 입게 되였다. 하기에 평소 입는 옷으로는 “부자집” 애들이나 “평민집” 애들을 구분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늘 어떻게 돈자랑을 할가 궁리하던 여준이는 신을 가지고 문장을 짓기로 했던것이다. 학교에 신에 대한 규정은 없으니 명표신을 신고다니며 돈자랑을 해보자는 심사였다. 여준이는 며칠이나 인터넷을 뒤져 “N”이라는 브랜드가 류행이며 값도 여러가지로 소비수준을 나타낼수 있다는것을 알고는 제일 처음으로 사신었다. 여준이는 N표 운동신을 신고 학교에 가서 민우를 보자마자 자랑을 늘어놓았다. “민우야, 그래도 신은 고급이 다르더라. 봐라, N표.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신이래. 특히 롱구를 할 때 편해서 제격이라나? 660원을 주고 샀어. 진짜 편하다니까.” 여준이는 N표 운동신을 신은 발을 들어보이며 시뚝해서 말했다. “N표? 그게 그렇게 좋은거냐?” “그럼, 나 인터넷을 다 뒤져보았는데 운동신 치구는 N표가 제일이래. 그래서 한컬레 샀는데 진짜야. 한번 신어볼래?” 여준이가 당금 신을 벗을 자세를 취하며 민우의 기색을 살폈다. 민우의 기색이 확 변했다. “짜식, 제까짓게 있으면 얼마나 있다구? 그잘난 신을 신어보라는거야? 암튼 좋다니까 한컬레 사기는 하겠다만.” 그날 민우는 하학후 곧추 백화상점으로 갔다. 아니나다를가 N표전용신매대가 따로 있었다. 가격도 백원좌우로부터 1200원에 달하는것까지 없는것이 없었다. 민우는 두말없이 제일 비싼 1200원짜리를 찍었다. 판매원이 신을 민우앞에 내밀었다. 민우는 판매원앞에 발을 들이밀었다. 판매원은 민우앞에 꿇어앉아 정성스럽게 신을 신겨주었다. “자, 인젠 걸어보세요.” 민우는 어깨에 힘을 주며 일어섰다. 감각때문인지 발이 날듯이 가볍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민우는 판매원을 향해 히쭉 웃고는 돈가방에서 카드를 꺼내여 판매원앞에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저기 가서 싸인해주세요.” 판매원이 민우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카운터를 가리켰다. 민우는 신을 신은채로 판매원을 따라 우줄우줄 카운터를 향해 걸어갔다. 이튿날아침, 민우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애들이 욱 몰려들었다. “진짜 괜찮은 신이야. 제법 편안하다니까.” “정말 좋아보이는구나. 얼마를 줬니?” 누군가 부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비싸지 않아. 제일 비싸다는게 겨우 1200원이였어. 좀더 비싸야 하는건데.” “1200원?” 누군가 덴겁하여 소리쳤다. “짜식 놀라긴.” 민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씩 하고 입가에 찬웃음을 피워올렸다. 이튿날부터 학급에는 한컬레 또 한컬레의 N표 운동신이 나타났다. 며칠사이에 십여컬레나 되였다. N표를 신은 애들은 대부분 평소 민우를 싸고돌던 “부자집” 애들이였다. 어느날 롱구를 끝내고 상점에서 음료수를 마시다가 여준이가 별안간 엉뚱한 제안을 했다. “봐라, 우리 모두 N표를 신었잖니? 똑같이 롱구를 즐기구. 민우야, 우리 ‘N사단’을 묶는것이 어떻니?” “뭐? ‘N사단’?” 민우가 웬 소리냐는듯 눈을 올롱하게 치뜨며 여준이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우리가 바로 우리 학급의 중심이란 말이다. 특히 민우, 네가 우리 학급의 로따(老大)가 아니니? 그러니 우리의 힘을 합하자는 의미에서 N표 운동신을 신은 애들 동아리를 묶자는거다. 함께 롱구도 하고 등산도 하고 그리고 다른 학급 애들이 까불어치면 힘을 합쳐 대적도 하고말이다. 애들아, 우리 민우를 로따로 모시는것이 어떻니?” 여준이의 말에 곁에 있던 애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동시에 좋다고 소리쳤다. 민우는 이렇게 얼결에 ‘N사단’의 로따로 군림했다. 당연히 여준이는 이인자가 되였고 민우의 눈치를 보아가며 애들을 손아귀에 거머쥐였다. 어떻게 무어진 동아리였든지간에 여럿이 힘을 합치니 정말 무서운것이 없었다. 그들은 점심시간만 되면 무리를 지어 롱구를 쳤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되면 가까운 산으로 등산도 갔다. 그들이 한마음이 되여 모여다니는것을 보고 그 동아리에 들지 못한 애들은 못내 부러워했다. 생각 같아서는 누구나 그 무리에 들고싶지만 “N사단”의 첫째 조건인 N표 운동신을 사는것부터가 부담으로 느껴지는 애들이 많았었다. 게다가 롱구를 치고는 모여서 음료를 사 마시고 등산을 간다며 돈을 모아 식료품을 사고 차비를 모으고 하는 소비를 웬만해서는 따라갈수 없었던것이다. 하여 “N사단”은 학급의 일부 애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요, 가깝고도 먼 “당신”으로만 여겨질뿐이였다. 3 민우는 속이 쓰리고 가슴이 침침해났다. 목에서 심한 갈증이 몰려오면서 겨불내가 확확 풍겼다. 민우는 습관적으로 누구에게라 없이 소리쳤다. “물, 물물!” 애들이 뽈을 차는데만 정신이 팔려 민우의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누구 하나 뛰여오는 애가 없었다. 민우는 뽈을 굴리는 애들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야, 못 들었냐? ” 뽈을 차던 애들이 못박힌듯 굳어져서 소리나는쪽을 바라보았다. 민우의 눈이 가늘게 찢어지고있었다. “로따!” 여준이가 창문쪽으로 달려오며 얼굴에 웃음을 담았다. 민우는 그러는 여준이를 거들떠보는체도 하지 않고 여전히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귀들 먹었냐? 물, 물!” “귀가 멀었냐? 로따가 물을 떠오라지 않냐?” 여준이가 민우의 말을 받아 누구에게라 없이 재방송을 했다. 애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차…찬물을 달래?” 석이가 나서서 민우와 여준이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민우와 여준이의 눈길이 일제히 석이의 얼굴에 가 꽂혔다. 순간 석이는 흠칫 몸을 떨면서 머리를 푹 숙였다. 일찍 아버지를 병으로 잃고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석이는 사실 평소 민우네를 따라다닐 엄두조차 못 내는 애였다. 동네시장에서 콩나물장사를 하는 어머니의 수입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석이는 N표 운동신은 고사하고 20원짜리 헝겊신이라도 발가락이 나가지 않는것을 다행으로 알고있었다. 하지만 석이에게도 “N사단”은 선망의 대상이였다. 하여 가끔 민우네들이 롱구를 칠 때면 곁에서 롱구뽈을 주어 바치군 했다. 그러던 석이가 오늘 민우앞에 나선것이다. 여준이가 씽하고 석이쪽으로 잰걸음을 놓더니 오른다리를 날려 석이의 엉뎅이를 걷어찼다. “야, 돌대가리.” “알았다, 알았어. 시…시원하게 찬…찬물이지.” 석이가 더듬거리며 말꼬리를 흐리우자 민우가 꽥 소리질렀다. “돌대가리, 왜 그리 어정거려?” “아…알았다니까. 미…민우야, 잠간만…” 석이는 민우가 서있는 집안으로 달려들어가 수도가에서 비닐바가지를 찾아들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쏴—” 소리를 내면서 물줄기가 쏟아져내렸다. 석이는 그렇게 한참이나 물을 뽑아버린후 바가지를 수도꼭지에 가져다 댔다. 민우는 수도옆에 서서 오른손으로 아래배를 슬슬 문지르며 거슴츠레 내리 뜬 두눈으로 석이를 찍어보고있었다. “마…마셔라, 시원할거다.” 석이는 애써 얼굴에 웃음을 바르면서 민우앞에 두손으로 물바가지를 내밀었다. 민우는 그러는 석이의 얼굴에 눈바늘을 꽂으며 물바가지를 받아들어 꿀꺽꿀꺽 서너모금 마셨다. 석이는 굳어진 입술을 실룩거리며 민우의 표정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시원하지? 파…파는 광챈수이(矿泉水)보다 더…더…” “그래, 더 시원하다.” 민우는 입가에 묻은 물방울을 손등으로 쓱 닦더니 물바가지를 든 손을 천천히 석이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석이가 민우앞에 한발 다가서며 물었다. “어째? 한 바가지 더…더 달라니?” “아니. 너나 마셔, 마시라구. 흐흐흐…” 민우는 바가지를 우로 들어올리더니 바가지에 남은 물을 천천히 석이의 머리에 쏟아부었다. 준비없이 찬물을 머리에 들쓴 석이는 어깨를 옹송그리며 오스스 몸을 떨었다. “어이, 돌대가리. 시원하지? 그치, 시원하지? 하하하…” 민우가 바가지를 수도꼭지아래에 있는 물독에 철렁 뿌려넣으며 너털웃음을 했다. “얌마, 돌대가리. 너 로따께 인사 안해? 손 안 쓰구 샤와했으면서.” 여준이도 민우를 따라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동을 달았다. 석이는 찬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연신 훔치면서 어깨가 축 처져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문어구에 서서 친구들과 함께 집안 광경을 구경하던 상필이가 석이의 뒤통수를 찰싹 갈기며 소리쳤다. “얌마. 너 이 대가리두 돌덩이지?” “맞아, 이 대가리두 공골(콩크리트)일게다.” 곁에 선 친구들이 “와—와—” 괴상한 소리를 치면서 석이의 어깨며 엉뎅이를 찰싹찰싹 갈겨주었다. “짜식, 둔해빠져가지구.” 민우는 그제야 베개옆에 널린 바지며 런닝그를 주섬주섬 주어입고는 신을 신으려고 바닥쪽으로 어정버정 내려왔다. “아—악!” 바닥을 내려다보던 민우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굉장하게 기분 나쁠 때나 터지는 고함소리였다. 애들은 숨을 죽이고 민우의 표정을 살폈다. 민우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리고있었다. “민우야, 왜? 왜 그러니?” 여준이가 목소리를 한껏 깔고 조심스럽게 민우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민우의 눈길이 여준이 쪽으로 홱 탈렸다. 여준이는 민우의 눈길을 피해 머리를 숙였다. 민우가 그러는 여준이를 일별하며 혀끝을 이발에 눌러 바닥에다 찍 하고 침을 쏘았다. 분위기가 당금 폭발할듯 긴장해졌다. 석이는 불똥이 또 자기에게 튈것 같아 비실비실 뒤걸음을 치면서 연신 여준이를 훔쳐보았다. 드디여 우뢰가 터졌다. “어느 놈이냐? 어느 놈이냐구!” “왜…왜? 민우야, 왜 그러니?” 여준이가 민우앞에 한발 다가서서 말까지 더듬으며 다급히 물었다. 민우가 그러는 여준이를 쏘아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눈깔이 멀었어? 내 신, 내 신이 없어졌잖아? 내 신!” 그제야 친구들은 신을 벗어두었던 바닥에 눈길을 박았다. 아니나다를가 바닥에는 끌신 두짝이 달랑 놓여있을뿐 1200원을 주고 샀다는 N표 운동신은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은 서로서로 눈길을 날렸다. 갑자기 누군가 소리질렀다. “야, 삐리삐리. 너 미쳤어?” 그 소리에 친구들의 눈길이 일제히 상필이에게로 쏠렸다. 그 바람에 상필이는 깜짝 놀라 굳어졌다. 여준이가 상필이쪽으로 다가가더니 엉뎅이에 발길을 날렸다. “너 간이 밖으로 밀밀 나왔구나. 너, 감히?” “왜…왜 그러니? 너희들…” “왜라니? 너 감히 로따의 신을 신었어? 이게 미쳤나?” “아닌데, 아…아니라니까.” “아니라구? 네깟것이. 그러면 그 N표는 뭐야?” 여준이가 날이 선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친구들이 웬 일이냐는듯 여준이와 상필이를 번갈아보았다. 아니나다를가 상필이의 발에는 파르스름한 색상의 N표 운동신이 신겨져있었다. “너…너…” 민우는 분해서 말까지  더듬더듬거렸다. 그 바람에 상필이는 너무도 놀라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몸을 떨었다. 민우는 그러는 상필이를 향해 버럭 소리질렀다. “야, 쌍삘이. 너 뭘 하고 섰어. 빨랑 그 신을 벗지 못하겠니?” “미…민우야, 이 신은 내 신이다.” “뭐라구? 네 신이라구? 네가 하루새에 금봉황이 됐다는거야 뭐야?” 여기서 잠간 말끝을 맺은 민우가 별안간 여준이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야, 짭새야.” 그 바람에 여준이가 깜짝 놀라며 민우를 쳐다보았다. 민우가 흥분해서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여준이를 다그쳤다. “이 짭새야, 너 뭐하는 놈이야? 빨랑 저…저 쌍삘이 발에서 나의 신을 벗겨오지 못하겠니?” “알았다. 아…아…알았다. 새끼들, 뭘하구 있니?” 여준이가 친구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그 광경을 구경하고있던 친구들이 여준이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상필이한테 욱 몰려들었다. 상필이는 뜻밖에 터진 사태에 너무도 놀라 선자리에 퐁당 물앉으며 한껏 몸을 옹송그렸다. 하지만 애들은 상필이의 정서는 웬 개떡이냐는듯 살피지도 않았다. 어떤 애들은 상필이의 팔을 잡았고 어떤 애들은 상필이의 다리를 붙들었으며 또 어떤 애들은 허리를 굽혀 상필이의 발에 신겨진 신을 벗겨내려 했다. 상필이는 그 와중에도 신만은 빼앗기지 않으려는듯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신을 부여잡고있었다. 누군가 그러는 상필이의 손을 꽉 밟아버렸다. 상필이는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뗐다. 그 순간 누군가 상필이의 발에서 신을 벗겨냈다. 여준이가 그 애의 손에서 신을 받아 급히 민우앞에 가져갔다. 민우는 신경질적으로 여준이의 손에서 신을 받아들고 유심히 살폈다. 갑자기 민우가 손에 들었던 신을 상필이앞에 뿌려던지며 두덜거렸다. “아니잖아. 내 신이 아니란 말이야,” “아니라구?” 여준이가 두눈을 올롱하게 뜨며 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래, 아니야. 내 신은 끈을 저렇게 매지 않았어. 저렇게 매지 않았다구.” 말을 마친 민우가 상필이쪽에 머리를 돌렸다. “야, 쌍삘이, 너 저 신, 어디서 났어?” 상필이는 한옆에 서서 입을 실룩거리고있다가 억울함을 당한 신하가 상전을 향해 진정을 호소하듯 말했다. “그렇지, 민우야. 난 정말 너의 신이 어디 갔는지 모른다.” “듣기 싫어. 내가 묻잖아? 너 저 신, 어디서 난거냐구?” “산거야.” “뭐 샀다구? 네가 N표를 샀다구? 하하하…” 상필이의 말이 천방야담이라도 되는듯 민우가 두눈을 크게 뜨며 너털웃음을 했다. 그 바람에 상필이가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진짜 사…산거다. 서…서시장에서 50원을 주고 산거다.” 별안간 애들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하하하… 쌍삘이, 너도 우리 ‘N사단’에 가입하고싶다 이거지?” “허허허허… 삐리삐리도 생활이 꽃펴나는 모양이구나.” 상필이가 애들의 웃음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너희들과 같이 롱구도 하고 등산도 하고… 그러고싶어서…” “삐리삐리, 생각은 야무지네. 너 그래 저따위 짝퉁 N표를 신으면 우리 ‘N사단’ 성원으로 될수 있을줄 알았니? 우리 ‘N사단’이 그래 저 같은 짝퉁인줄 아니? 하하하하… 내 잃어진 신은 1200원짜리다. 1200원.” 상필이는 숨을 죽이고 잘근잘근 아래입술을 씹으면서 머리를 들지 못했다. “야, 너희들 빨랑 내 신을 찾아놓지 못하겠니? 집주변이구 어디구 다 돌아보란 말이다? 어제밤에 분명 이 바닥에다 벗어놓았거든. 너희들도 내가 신을 벗는걸 보았댔지?” 애들은 민우의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끄덕였다. “새끼들, 빨리 나가 신을 찾지 못하겠니? 나가자.” 여준이는 누구에게라 없이 한마디 하고는 자기가 먼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애들은 집주변에 널려 민우의 N표 운동신을 찾기 시작했다. 4 신이 어디로 갔을가? 민우는 바닥에 있던 끌신을 끌고나와 마루에 놓여져있는 쪽걸상에 앉아서 신을 찾느라 사처로 뛰여다니는 애들을 멀거니 바라보며 속궁리를 했다. 하지만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제밤 친구들이랑 함께 돌아온후 분명 바닥에다 신을 벗어놓았던것이다. 십여명의 친구들이 한 구들에 누웠는지라 무더워 창문이며 출입문이며를 닫지 않았었다. 다른 애들의 신은 다 있는데 유독 민우의 신만 사라진것이다. 민우는 모르기는 해도 자기들이 단잠에 든후 마을의 좀도적이 와서 제일 눈에 뜨이는 자기의 신을 훔쳐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쳇, 누가 내 신이 제일 멋있으라고 했나? 참… 민우는 혼자 시무룩이 웃으며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애들이 하나 둘 풀이 죽어 돌아왔다. “없어, 신이 어디에도 없구나.” “민우야, 어쩌니 그 좋은 신을 잃어버려서.” 애들이 민우의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씩 했다. “괜찮아, 괜찮다구. 집에다 전화를 해서 운전수를 보고 신을 한컬레 사오라면 되지 뭐.” 민우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듯 제법 손사래까지 하며 대답했다. “집에 운전수까지 다 있구… 참 대단하다, 민우야.” 상필이가 민우옆에 한발 다가서며 부러운듯 말했다. “그렇지, 이 시내에 운전수까지 두고 사는 집이 얼마나 된다구. 민우니까 되는거지.” 여준이가 민우앞에 손가락을 내두르며 침을 날렸다. 민우는 시뚝한 눈길로 그러는 애들을 쓸어보며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고 말했다. “참 우리 시내가 정말 작단 말이다. 제일 큰 백화에 가봐도 1200원짜리 신밖에 없거든. 큰 도시에는 몇천원짜리 신도 다 있다는데…” “뭐? 신 한컬레를 몇천원씩 한다구?” “왜? 첨 듣는 소리냐? 촌뜨기 같은게.” 민우는 허허허 웃으면서 핸드폰번호를 눌렀다.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을 담고 핸드폰을 귀가에 가져가서 대방의 신호를 기다리던 민우의 얼굴이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애들의 얼굴도 민우와 함께 굳어져갔다. 민우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다시 핸드폰번호를 꾹꾹 눌렀다. 하지만 대방에서는 여전히 핸드폰을 받지 않는 모양이였다. “씨팔, 다 뒤져버린거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왜? 너네 집 운전수가 전화를 안 받니?” 여준이가 민우앞으로 다가섰다. 민우는 신경질적으로 여준이를 째려보다가 머리를 돌렸다. 어쩜 여준이가 뭐나 다 알고있으면서 일부러 자기를 간지르는것 같이 생각되였던것이다. 사실 민우가 자기네 집 일군처럼 부리는 운전수는 아버지네 단위의 운전수였던것이다. “좀 있다가 다시한번 해봐라. 혹시 핸드폰을 두고 나갔는지 아니?” “씨팔, 이래서 안된다니까. 운전수인 주제에 핸드폰을 두고다니다니.” 민우는 마치 핸드폰을 두고나간 운전수를 옆에 둔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애들은 그러는 민우를 바라보면서 동감이라는듯 머리를 끄덕였다. “집합이다. 등산하러 간다—” 앞집에 주숙을 잡았던 부반장 나리가 민우네를 향해 오다가 마루앞에 모여서 민우를 둘러싸고있는 애들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어쩌니? 민우야, 너 신이 없어서 등산을 못하겠구나.” 상필이가 걱정되는듯 민우를 향해 한마디 했다. “할수 없지 뭐. 그렇다구 이 끌신을 끌고 등산을 할수는 없는거구. 가자, 가서 선생님께 청가는 맡아야지.”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끌신을 고쳐 신으며 누구에게라 없이 말했다. “그래, 가서 잘 말하면 선생님이 청가를 줄거다.” “물론이지, 내가 뭐 가기 싫어서 안 가자는것도 아니구. 허허허… 암튼 너희들, 오늘 잘해야 한다.” “여부가 있니? 알았다. 시름을 놔라, 민우야.” 여준이가 안심하라는듯 민우를 향해 자신있게 주먹을 흔들어보였다. “그래야지, 오늘 등산에서 1등을 해야 우리 ‘N사단’의 얼굴이 서지?” “그래. 등산 하면야 물론 우리가 일등이지. 우리는 ‘N사단’이니까.” 애들은 서로 민우의 눈치를 살피며 너 한마디 나 한마디 들까불어댔다. “좋아, 제씨들 어서 가자구—” 민우가 어깨를 으쓱하고 두팔을 쩍 벌리며 말했다. “가자— 등산이다.” 애들은 소리치며 집합장소를 향해 뛰여갔다. 마당에는 벌써 많은 애들이 모여있었다. 먼저 달려간 누가 담임선생님에게 민우가 신을 잃어버린 이야기를 한것 같았다. 애들속에서 뭔가 열성스레 이야기를 하고있던 담임선생님이 민우를 향해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민우야, 어쩌니? 신을 잃어버렸다구?” 민우가 그러는 담임선생님을 바라보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요, 선생님. 인차 새 신을 사서 가져오라고 운전수에게 전화를 치겠어요. 금방 올거예요.” “그래도 그렇지. 너의 신이 참 좋아보이던데.” “수수해요. 까짓 1200원 밖에 안하는건데요뭐.” “그래도 그렇지, 1200원이 어리냐? 암튼 남아서 천천히 구석구석 잘 찾아봐라.” 말을 마친 담임선생님은 동학들에게 눈길을 돌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들 들었죠? 민우동무가 어제밤에 신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동무들도 시간나는대로 찾아보세요.” “네—” 애들이 길게 소리를 뽑았다. 5 민우는 서쪽으로 사라져가는 대오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민박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금방 굽인돌이를 돌아서자 큰 비술나무그늘밑에 앉아서 한담을 하는 몇몇 할머니들이 보였다. 할머니들은 손에 든 삶은 옥수수에서 알을 뽑아 입에 넣고 호물호물 씹으며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지 호호호 소리나게 웃음을 날리고있었다. 시내에서는 좀처럼 볼수없는 풍경이였다. 또 시내에서라면 그런 풍경에 눈길을 돌릴 민우도 아니였다. 하지만 한적한 시골에 와서 신까지 잃어져 딱히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 띄워 보는 장면인지라 저으기 호기심이 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민우는 끌신을 줄줄 끌면서 어슬렁어슬렁 할머니들쪽으로 다가갔다. “로친은 어제밤에 땐스(电视)를 봤수?” 앞이가 홀랑 나가버린 할머니가 입을 호물거리며 눈웃음을 했다. 그러자 코등에 꺼먼 기미가 큼직하게 박힌 할머니가 손사래를 하며 말했다. “봤지. 로친은 뭘 보구 그러우?” 앞이가 나가버린 할머니가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어제밤에두 땐스서 영 높은데 있는 놈을 붙잡았다우. 숱한 돈을 받아먹구 탐오했다우. 쳐죽일 놈, 먹을만 하무 되지 돈 그리 많아 무에 쓴다우?” “그러게 말이우. 옛말에두 ‘혼자 먹다가 배 터져 죽으라’했재이우?” “그러게. 그놈 애비, 에미는 그런 말두 안 배워줬는게랑게.” “그럼그럼, 그놈 에미는 태몽에 두더지 땅굴 파는것만 봤는게라이.” “그러게. 호호호…” “옳소. 흐흐흐…” 할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비술나무밑에서 터져올랐다. 코등에 꺼먼 기미가 있는 할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태몽에 언제 두더지 굴을 파는거랑 나오는 법이 있다우? 나는 금시초문이우.” “그게사 그놈이 하두 쳐죽이구싶게 미워서 그러는게지. 그 돈이면 저 아래마을 장령감이나 구제 좀 해주겠소. 그 집 로친 늘그막에 한국 가서 아예 안 오는게 아잉가?’ “돈 많은 한국령감 해서 사는가보지비. 암튼 장령감을 어이 한다우?” “그러게, 옷이랑 입구 다니는 꼴을 보믄 영 말이 아닙데.” “밥두 먹구 다니는 모얘 아닙데. 맨날 알딸딸해서 노들강변 부르는걸 보므느…” “이 문뒤(문둥이)들아, 왜 더운 밥 먹구 동네집 령감 걱장서꺼늘 하멘서 주책들인가? 좋은 아침뱁(밥) 처먹구서리 그리 할 일도 없능가?” 두 할머니가 찧고빻고 하는것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몸집이 한국 력도선수 장미란만치나 실한 할머니가 금가락지를 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나무랐다. 민우는 한참이나 할머니들의 입씨름을 지켜보다가 피뜩 어제밤 꿈 생각이 나서 할머니들곁에 바싹 다가서며 허리를 굽석했다. “안녕하세요?” “뉘집 총객(총각)인지 음전하기두 해라.” 앞이가 홀랑 나간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민우는 그 할머니에게 한번 더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할머니, 꿈이 맞나요?” “호호호… 총객두 꿈을 꿨수?” “저 나이에 꿈이라믄사 호호호… 살마대(팬티) 젖는 꿈이겠지.” “호호호… 보오, 저 총객이 낯이 빨개지는걸. 말해보우. 무슨 꿈을 꿨나?” “저 어제밤 꿈에 신을 잃어버렸는데요.” “미시게라꼬(무엇이라고)? 코등에 꺼먼 기미가 박힌 할머니가 두눈을 화등잔처럼 키우며 물었다. 민우는 그러는 할머니에게 눈길을 돌리며 반복했다. “할머니, 저 어제밤 꿈에 신을 잃어버렸다구요. 발에 신는 신이 사라졌더라구요.” “저런, 꿈에 신이 없어지면 안 좋은디.” “네? 안 좋아요?” “저런, 문뒤야. 웬 새 빠진 소리를 하노? 거야 다 옛날에 미개해서 하던 소리지. 지금 젊은이들이야 무슨 좋고 안 좋고가 있누? 꿈이사 다 도투(돼지)자리에 개꿈이디.” 몸집이 실한 할머니가 코등에 검은 기미가 있는 할머니를 나무랐다. 그러자 코등에 검은 기미가 있는 할머니가 얼굴 표정을 늘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내사 괜히 말해보는게지. 옛날에는 꿈에 신이 사라지면 부모상을 당한댔수. 말이사 바른대루 해야디.” “할머니, 부모상이라는게 뭔데요?” “그게사 부모 돌아간다는 얘기지, 지금 젊은이들은 그런 말을 안 쓰는감?” 코등에 검은 기미가 있는 할머니가 그것도 모르냐는듯 민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순간 민우는 할머니의 눈길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흠칫하다가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떠듬거렸다. “그럼 꿈이 마…맞아요? 할머니.” “맞기는 뭐가 맞는겨? 로망 난 할망구들이 할일없어 씨벌이는게지. 총객, 근심 마우, 근심을. 지금이 어느땐데. 우리 아들은 미국이라는데를 다 갔소. 호호호… 비행기를 타구 갔다우. 흐흐흐…” 몸집이 실한 할머니가 아들 생각만 했도 좋은지 걸걸하게 웃어제꼈다. 민우는 그러는 할머니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할머니들의 꿈얘기가 괜히 귀전에 맴돌아 기분이 잡쳤다. 민우는 기울어지는 기분을 돌려세울 양으로 휙휙 휘파람을 불면서 어정버정 걸음을 옮겼다. 가로수들이 건들건들 춤을 추고있었지만 민우는 찜통속에 몸을 던진듯 괜히 숨쉬기마저 가빠났다. 민우는 연신 주먹을 들어 땀도 흐르지 않는 이마를 닦았다. 갓 오금을 뜬 알락강아지 두마리가 어미개를 따라나와 재롱질을 하고있었다. 민우는 걸음을 옮기다말고 어미개와 강아지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강아지들은 앙증맞은 다리를 옮겨 어미개의 뒤를 졸졸 따랐다. 어미를 따라나오니 그렇게 좋니? 민우는 문득 강아지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들처럼 아장아장 걸음마를 옮길 때부터 민우는 보모의 손에서 커야 했다. 민우의 인상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손님이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일년사시절 아침 일찍 나갔다가는 밤 늦게야 술냄새를 풍기며 들어오기가 일쑤였다. 그때면 민우는 한잠에 빠져있군 했다. 간혹 민우가 자지 않을 때 들어왔다 해도 아버지, 어머니는 피곤 어린 얼굴을 대충 씻고 자리에 들어버리군 했다. 유치원에 다닐 때 민우는 자식들을 마중온 부모들이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량쪽으로 부모들의 손을 잡고 걷다가도 “장백산이 돌아간다—” 하고 소리치며 몸을 빙 돌려 곤두박질을 하는 친구들을 볼 때면 부럽다 못해 한번 때려주고싶은 생각까지 들군 했었다. 그렇게 심기가 불편해진 날이면 민우는 자기를 데리러 유치원에 온 보모를 보고 이것도 사내라 저것도 사내라 떼질을 쓰군 했다. 보모는 불평 한마디 없이 민우가 사달라는 놀음감을 사고는 령수증을 뗐다. 보모가 건네주는 놀이감을 품에 안고 령수증을 호주머니에 넣는 보모를 바라보면서 저 네모난 종이는 무엇일가 하고 생각을 굴려보았다. 유치원에 다니는 민우로서는 도무지 그 네모난 종이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 알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날 보모에게 그 네모난 종이장을 어디에 쓰는것인가고 물었다. 그러자 보모는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부자집도련님이 다르긴 다르구나. 벌써부터 그게 궁금해지는게. 그 네모난 종아장은 령수증이라고 하는건데 이 물건을 얼마에 샀습니다 하고 증명을 하는거란다. 그런 령수증이 없으면 사람들이 민우네 돈을 마음대로 뜯어먹어도 모를테지. 안 그래?” 민우는 어찌 그럴수 있느냐는듯한 눈길로 보모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나쁜 놈이 되잖아? 왜 그 네모난 종이장을 안 가지면 사람들이 우리 돈을 뜯어먹어?” “호호호… 요 총명한걸… 물어보는것을 좀봐. 례를 들어 그렇다는 말이지.” “례를 들어 아줌마도 그 네모난 종이장이 없으면 우리 돈을 뜯어먹을거야?” “이런, 얘가 무슨 소리를 이렇게 하니? 생사람을 잡겠네.” 보모가 민우를 째려보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순간 민우는 보모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부터 민우는 보모에게도 아무 말이나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도 속에 두고 오래오래 혼자 생각할뿐이였다. 민우는 갑자기 무척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콩콩콩—”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강아지들이 괜히 미워지기 시작했다. 민우는 길섶에서 돌멩이를 주어 강아지를 향해 힘껏 뿌렸다. 그 바람에 여유작작 산책을 하던 강아지들이 놀라 허둥댔다. “씨팔.” 민우는 영문없이 욕지거리를 하며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운전수의 핸드폰은 신호가 통하는데 여전히받지는 않았다. 민우는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전에는 종래로 이런 일이 없었던것이다. 어디에 있다가도 민우가 전화를 해서 “아저씨 데리러 오세요.” 하고 한마디만 하면 운전수는 곧 달려와서 민우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던것이다. “이 사람이, 정말 핸드폰을 두고 어디 나갔나?” 민우는 애써 제 좋은 생각을 골라하며 모를 일이라는듯 머리를 뱅뱅 젓다가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원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넣을가고 생각을 했었는데 어머니가 신경질을 부리면서 다 큰 놈이 신까지 잃어버렸느냐고 핀잔을 할것 같아 인차 생각을 고쳐먹었던것이다. 민우는 집에 전화를 넣으면 보모가 전화를 받을것이고 그러면 보모에게 신을 사서 운전수에게 보내라고 통지를 할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와이—” 신호가 가서 한참만에야 대방의 석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모의 목소리인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귀에 선것 같기도 했다. “저 민운데요, 아줌마 맞아요?” “그래, 나다.” “아버지네 단위 운전수아저씨 있잖아요, 왜 전화 안 받아요?” “집에 일이 좀 생겨서…” 보모의 목소리가 많이 시큰둥하니 잦아들어있었다. 민우는 “아무리 큰일이 있어도 그렇지 내가 누군데 감히 이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 하는 생각이 들면서 괜히 심통이 불편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민우는 핸드폰에 대고 꽥 소리질렀다. “웬 일인데 그래요? 모두들 미쳤어요? 나 신을 잃어버렸단 말이예요, 신을. 신이 있어야 집에 가든지 말든지 할게 아니예요?” “뭐, 신을? 이걸 어쩌니? 신을 잃어버리다니…” 보모의 목소리가 떨리고있었다. “어쩌긴요? 운전수아저씰 보고 빨리 한컬레 사오라면 될걸 가지구. 날마다 와서 아버지를 모셔가는 운전수아저씨 말이예요.” “인젠 안될것 같구나. 거기서 방법을 대봐라.” “왜 안돼요?” “집에 돌아오면 알게 될거다. 이만 놓는다.” 말이 끝나기 바쁘게 보모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덜컥 들려왔다. 핸드폰에서는 인차 “삐—삐—” 하는 단절음이 날아왔다. 민우는 벙어리가 된 핸드폰을 퀭— 하니 내려다보다가 마루에 덜렁 던져놓고는 분해서 씩씩 모두숨을 몰아쉬였다. “웬 일이야, 이것들이 모두 웬 일이야?” 민우는 입술을 꽉 깨물면서 두눈을 꼭 감아버렸다. 눈까풀에 너무 힘을 주어서인지 눈동자가 아파나면서 노란 별똥 같은것이 톡톡 튀여올랐다. “저걸 어쩌니? 신을 잃어버리다니…” 하던 아줌마의 근심어린 목소리가 아프게 귀전을 자극해왔다. 신을 잃어버렸다는데 아줌마는 왜 그렇게 놀랄가? 아줌마도 “신을 잃어버리면 부모상을 당한다”는 옛말을 들어서일가? 말 못할 근심이 스멀스멀 민우의 신경을 건드렸다. 머리속에서 아물아물하던 어제밤의 꿈자리가 확연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분명 집앞이긴 했지만 지금 민우네가 사는 호화로운 집은 아니였다. 그 집앞으로 아버지랑 어머니랑 뭔가를 열심히 나르고있었는데 얼굴들이 꼭 어느 만화책에서 보았던 새앙쥐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우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뭔가를 나르느라 분망한 어머니의 팔을 잡고 물었다. “지금 나르는게 뭔가요?” “얘를 봐라, 지천에 먹을것 천지인데 생겼을 때 숨겨둬야지 이따가 없으면 숨기자 해도 안될걸.” “헹여라차, 헹여라차. 날라들이세. 힘을 합쳐 남모르게 날라들이세.” 아버지가 뭔가를 자루에 넣어 등에 지고 문앞을 지나며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민우는 그 뒤를 따랐다. 아버지는 화사하게 웃고있는 뭇꽃들 밑에 난 컴컴한 굴속으로 들어갔다. 굴안에는 번쩍번쩍 빛이 나는 금궤 같은것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민우는 너무도 신기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마음껏 그것들을 만지다가 아버지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대지가 작렬하는듯하던 괴성은 바로 그 순간에 터졌다. 괴성과 함께 아버지, 어머니는 한순간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내가 왜 해괴망측한 그런 꿈을 꾸었을가? 도대체 집에 무슨 일이 있다는것일가? 내 신은 누가 훔쳐갔을가? 민우는 이상해지는 기분을 달래며 민박집으로 돌아와 마루우의 쪽걸상에 쪼크리고 앉았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기를 둘러싼 애들때문에 여간만 흥성거리지 않던 마당에서졸지에 사람을 괴롭히는 괴괴함이 흐르는것만 같았다. 민우는 몰려오는 외로움을 뼈속까지 느끼며 불안해지는 눈길을 두리번두리번 사처에 날렸다. 푸름을 자랑하며 너울너울 춤을 추는 키다리 옥수수의 설레임소리도 그 순간에는 부정을 피우다 쫓기워 도망가는 바람난 아낙네의 숨 가쁜 헐떡임처럼 부산하게 들렸다. 처마자락을 스쳐지나며 지지배배 노래하는 청제비의 구성진 지저귐소리도 그 순간에는 건침을 탁탁 튕기며 네거리에서 악담을 퍼붓는 어느 아낙네의 거친 목소리처럼 구질구질 성가시게 들렸다. 바자굽에 피여난 이름모를 꽃들이 찌는듯한 무더위에 기를 상했는지 가녀린 목을 갸웃이 숙이고 우는듯 웃는듯 바람에 하느적이고있었다. 민우는 “무더위에 지친 저 꽃들이 죽지는 않을가?” 하는 근심이 머리속에 자리를 잡아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민우는 피곤한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대는 모든것을 피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민박집아줌마가 들어와서 거두었는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몸만 쏙 빠진대로 구들에 널려있던 이불들이 반듯하게 포개여져 벽밑에 놓여있었다. 민우는 이불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누워 멀거니 천정을 쳐다보다가 다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민우는 약간 떨리는 손가락으로 어머니의 핸드폰번호를 눌렀다. “지금 거신 핸드폰은 꺼진 상태입니다.” 아무 감정도 없는 안내음이 민우의 귀전을 아프게 때렸다. 민우는 입술을 감빨며 핸드폰을 퀭 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핸드폰에 손가락을 가져가 아버지의 번호를 눌렀다. “지금 거신 핸드폰은 꺼진 상태입니다.” 똑같이 덤덤한 안내음이 날아와 귀속을 파고들었다. 순간 민우는 온몸이 나른해나면서 전에 없던 피곤기가 몰려왔다. 민우는 이불에 등을 기댄채로 스르르 두눈을 감았다. 6 민우는 갑자기 밖에서 와짝 떠드는 소리가 들려 두눈을 번쩍 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등산하러 갔던 애들이 돌아오며 좋아라 떠들어대고있었다. 민우는 애써 정신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에 붙어섰다. “민우야, 봐라. 이게 뭐게?” 손에 뭔가를 들고 뛰여오던 여준이가 멀리서 민우를 발견하고 휘두르며 소리쳤다. “뭔데?” 민우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크게 물었다. 어느새 민우가 서있는 창문가로 뛰여온 여준이가 손에 든것을 민우의 눈앞에 흔들어보이며 시뚝해서 말했다. “봐라. 내가 잡은거다. 이놈이 글쎄 스르르 오솔길을 지나가지 않겠니? 척 보니 독사 같더라. 그래서 돌멩이를 찾아들고 쫓아가 대가리를 명중하고 내리쳤지. 하하하… 아무리 독사면 뭐래. 내 돌 한매에 쭉 뻐들어지는거야. 어디라구! 이 어른의 손에서, 하하하…” 여준이는 민우를 보라는듯 억지로 너털웃음을 하며 아래말을 이었다. “민우야, 이놈을 껍질 벗겨 저녁에 구워먹자. 뱀고기가 그렇게 맛있단다. 쫄깃쫄깃한게. 아, 근데 너희 집 운전수 신을 가져왔니?” 여준이가 뱀에 대한 말을 하다가 화제를 픽 돌려 신에 대해 물었다. 민우는 여준이의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오겠지 뭐.” 하고 한마디 얼버무려버렸다. 그 바람에 여준이는 아직도 오지 않았나 하는듯한 눈길로 민우를 바라보다가 인차 얼굴에 웃음을 바르며 화제를 돌렸다. “뱀고기중에서도 독사고기가 제일 맛있대. 뱀고기는 구워서 소금에 살짝 찍어먹어야 제맛이래. 하하하… 이놈아, 오늘 우리의 안주나 돼봐라. 야, 돌대가리.” 여준이가 너털웃음을 웃다가 갑자기 석이쪽으로 머리를 픽 돌렸다. “왜…왜? 여…여준아.” 석이가 여준이의 옆으로 다가서며 더듬거렸다. 여준이는 손에 들었던 뱀을 석이에게 던져주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돌대가리, 너 이 뱀껍질을 벗겨 잘 건사해둬라. 오늘밤에 로따랑 맛있게 구워먹을거니까.” “뭐? 내…내가 이 뱀 껍질을 버…벗기라구?” “왜? 못 알아들었니? 한번 더 말해줘?” “아…아니, 난 뱀껍질을 버…벗길줄 모르는데…” “그래서?” “아…아니다.” 석이는 여준이가 던져준 뱀을 주어들고 집뒤로 사라졌다. 그제야 여준이는 애들을 둘러보면서 소리쳤다. “가자, 우리 강변에 가서 물놀이나 하자. 등산을 하느라 온몸이 땀벌창이 되였구나.” “그래, 민우야. 여준이가 등산에서 개인1등을 했단다. 여준이가 어찌나 빨리 오르던지…” 상필이가 여준이앞에 한발 다가서며 목청을 한 옥타브 높였다. 여준이가 그러는 상필이의 어깨를 툭 치며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시뚝해서 한술 떴다. “까짓걸 가지구. 내 N두 괜찮은거라니까? 산을 오르는데 어찌나 발이 가볍던지…” 여준이는 기다렸다는듯 N표 운동신을 신은 발을 친구들에게 들어보였다. 민우는 그러는 여준이를 아니꼽게 쏘아보다가 성가신듯 날이 선 목소리로 “빨랑 꺼져!” 하고 소리쳤다. “아니지, 아니지. 우리 어찌 로따를 두고 갈수 있겠니? 상필아, 너의 신을 벗어 민우를 줘라.” 여준이가 제옆에 선 상필이에게 크게 소리쳤다. “나…난 신을 더 가져오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까짓 짝퉁두 아깝다는거니? 왜? 몸이 근질거려나니?” “아…알았어.” 상필이가 못마땅한듯 여준이를 흘끔 건너다보고는 호— 한숨을 내쉬면서 신을 벗었다. “얌마, 뭘해? 빨랑 민우에게 신을 신겨주지 않구?” 여준이가 다시 상필에게 눈총을 쏘았다. 상필이는 신을 주어들고 민우앞에 다가가 신을 내려놓았다. 이때 따르릉 여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빨랑 신겨주라니까.” 여준이는 다시한번 상필이를 닥달하면서 핸드폰을 들었다. “응, 엄마. 그래, 잘 놀구있지. 우리 금방 등산을 하구 내려왔어. 그래, 내가 일등을 했지? 엉? 뭐…뭐라구? 정말이야?!” 여준이가 입을 떡 벌리며 민우쪽에 눈길을 주었다. 모두들 여준이의 거동에 놀라 잠간 굳어졌다. “엄마, 그게 정말이야? 정말 잡혀들어갔어? 쇠고랑을 차구? 수쇄까지 찾단 말이야? 그럼 완전 망한거잖아?” 여준이가 다시한번 민우쪽에 눈길을 가져갔다. 번쩍이는 여준이의 두눈동자가 얼음같이 차겁게 느껴졌다. “뭐가 쇠고랑을 찼다는거야? 망하긴 뭐가 망해.” 민우가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흐흐흐흐…” 여준이가 웃고있었다. 친구들은 더구나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여준의 얼굴에 눈길을 박았다. “상필아, 롱담을 한거야. 그 새끼 뭐가 대단하다구 네가 신까지 신겨주겠니? 그만 둬.” “뭐? 뭐라구?” 상필이가 굳어졌다. 친구들도 굳어졌다. “이 새끼, 너 방금 뭐라 했니?” 민우가 씽하니 다가가 여준의 엉뎅이를 걷어찼다. “이 새끼 봐라, 오냐오냐 해줬더니…” 여준이가 민우의 배를 향해 오른다리를 날리고는 소리쳤다. “민우 저 새끼, 수뢰범의 아들이다. 저 새끼 애비, 오늘아침 검찰에 잡혀갔다.” “뭐뭐, 뭐라구?” “이 수뢰범의 새끼 같은게. 방금 우리 엄마 전화에서 똑똑히 말했다. 너네 애비 손목에다 쇠고랑을 차구 끌려가는걸 직접 봤다구.” “죽여라, 요 죄범새끼.” 평소 민우에게서 귀뺨깨나 얻어맞은적이 있는 애들이 우야 달려들어 민우를 치고 밟았다. 워낙 주먹이 세서 친구들의 “로따”로 군림한것이 아닌지라 친구들이 함께 달려드니 도무지 당해낼 힘이 없었다. 등이며 엉뎅이며 지어 머리에까지 발길이 날아들었다. 민우는 이대로 맞아죽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잘 튀겨진 새우처럼 잔뜩 몸을 옹그려붙이고 두팔로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만해라. 인젠 강변에 가서 물놀이나 하자.” 여준이가 친구들을 향해 크게 소리를 쳤다. “그래, 여준아. 가자.” 상필이가 여준이앞에 한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여준아, 인젠 네가 우리 로따를 해라.” “짜식, 내 원래 저새끼보다 힘이 더 세거든. 가자.” “가자.” 애들이 여준이를 따라 강변쪽으로 우르르 쓸어갔다. 민우는 그때까지도 죽은듯이 땅에 쓰러져있었다. 누구의 발길에 채웠던지 입술이 터져 퉁퉁 부어올라있었다. 애들이 멀리로 살아진후에야 민우는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이게 사실일가? 어쩌면 이런 일이 다 생긴단 말인가? 아버지가 수뢰범이라니? 무엇을 잘못하면 수뢰범이 되는걸가? 민우는 머리가 빠개지는듯 아파나서 뭐가 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미…민우야.” 이때 낮다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민우는 지긋지긋 아파나는 목을 간신히 돌렸다. 석이가 왼손에 껍질을 바른 뱀을 들고 오른손에 N표 운동신을 들고있었다. “김석아.” 민우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민우야, 일어나라. 안에 들어가자” 석이가 다가와 민우의 발밑에 N표 운동신을 내려놓았다. “이…이 신을 어디서?” 민우가 동공을 키우며 석이를 바라보았다. 석이가 민우의 기색을 힐끔 살피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나 새벽에 소변 보러 나왔다가 여준이가 이 신을 집뒤 장작더미에 숨기는것을 우연히 보았댔다.” “뭐라구? 그런데 너 왜 아까는…” “여…여준이가 무서워서…” 석이는 낮은 목소리로 버벅거리다가 뒤말을 잘랐다. 민우도 진작 석이의 뒤말을 듣고싶지 않았는지 머리를 픽 돌려버렸다. 아까 길에서 보았던 어미개와 알락강아지들이 배를 땅에 붙이고 엎드려 두눈을 살풋이 감고 볕쪼임을 하고있었다. 순간 그놈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민우의 머리를 치고들어왔다. 부러울 지경으로 시름없이 엎드려있는 어미개와 강아지들을 보는것이 심통이 터질것 같았다. 민우는 땅에서 흙덩이을 주어 그놈들에게 뿌렸다. “깨개갱—” 어미개와 강아지들이 와뜰 놀라 일어나 웬 일이냐는듯 왕왕 짖으며 꼬리를 착 내리뜨리고 집뒤로 도망갔다. “아까 등산하러 가면서 여준이가 애들에게 말했어.” 석이의 가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민우는 석이쪽에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석이는 여전히 왼손에 껍질을 바른 뱀을 들고 오른손에 N표운동신을 들고 서있었다. 민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랬는데?” 석이가 민우를 다시한번 힐끔 훔쳐보고는 아래말을 이었다. “여준이가 말이다. 아까 너네 아버지가 가능하게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구… 검찰원이라는데서 얼마전부터 너네 아버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구…” “돌대가리. 너너, 너는 왜 여준이 꼬랑대질 안하구…” 민우가 석이의 멱살을 와락 거머쥐였다. “미미, 민우야, 나…난 웬지 네가 불쌍해보여서…” 석이가 다시 뒤말을 동강냈다. “개소리 말구 아가리 닥쳐.” 민우가 별안간 석이의 귀뺨을 올리부치고는 집뒤를 향해 걸어갔다. 민우의 두다리가 휘청거리고있었다. “민우야, 신, 신을 신어야 집에 가지.” 석이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민우는 두손바닥을 쫙 펴 귀를 막고 허둥지둥 걸음만 옮겼다. 방금 민우에게 쫓겨 집뒤에 들어온 강아지들이 아르릉아르릉 건가래를 끓이면서 물어뜯기를 하고있었다. 방금까지 어미개와 함께 볕쪼임을 하던 강아지들 같지 않게 송곳이를 드러내고 결투를 벌리고있었다. 결투를 하는 강아지들이 갓 피기 시작하던 뭇꽃들을 어지럽게 쓸어눕혔다. 꽃잎이 찢어지고 꽃봉오리들이 떨어져내렸다. 민우가 갑자기 허리를 굽혀 떨어진 꽃송이를 주어들었다. 민우의 두눈에서 콩알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있었다. “미, 민우야.” 석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민우를 불렀다. “떨어지긴 왜 떨어져, 왜왜… 왜 떨어지냐구.” 민우는 왼손으로 꽃송이를 꽉 움켜쥐였다가 입에 막 쑤셔넣고 와작와작 씹어댔다. 민우의 두입귀로 뻘건 꽃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시각 석이는 분명 어디선가 들려오는 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있었다…
12    래일은 볕이 나려나? 댓글:  조회:2618  추천:1  2014-07-03
래일은 볕이 나려나? 1 “저리가, 저리. 임신한 애를 먹여야지. 네놈이사 한개 맛이나보면 안되냐?” 그날도 할머니는 삶은 닭간을 포장한 비닐봉지를 뜯으며 무릎앞에서 뱅뱅 돌아치는 노란 털의 강아지를 훈계했다. 3일전에 처음 보며 호기심을 느꼈던 그 할머니와 강아지들이였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람들이 붐비는 간이역에서 십여메터 뒤에 떨어져있는 아빠트의 콩크리트층계에 앉아 강아지들과 씨름하고 계셨다. 할머니의 옆에는 배가 뚱뚱한 얼룩털의 강아지가 엎드려있었는데 빨간 혀를 길게 늘어뜨리고 할머니를 쳐다보고있었다. 할머니의 손짓에 따라 오르내리는 눈길로 보아 얼룩이는 어딘가 여유있는 표정이였다. 할머니는 비닐봉지에서 닭간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은후 얼룩이앞에 내밀었다. 얼룩이는 날름 닭간을 물어 입에 넣었다. “이놈봐라, 잘두 먹는걸. 벌써 몇개째냐? 쟤는 한개 밖에 못 얻어먹었는데. 너는 남편 잘 맞난줄 알아라.” 무릎아래에서 꼬리질하는 개 두마리를 바라보며 할머니는 입가에 알릴듯 말듯 웃음을 피워물었다. “얘, 얼룩이 남편이예요?” 내가 호기심이 동한듯 노랑이를 가리키며 한술 뜨자 할머니는 두눈을 쪼프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깊은 주름살이 조글조글 패여진 가무잡잡한 얼굴에 아침해살이 살포시 내려 앉은것이 금세 고랑마다에서 따스한 김이 서려오를것만 같았다. “양, 3, 6, 9 장보러 가는 길이라우. 아침에 일찍 가야 괜찮은 자리를 차지 하지 그렇잖으믄… ” 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내가 손에 들고있던 핸드폰을 내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가 16일이라고 밝혀져있었다. “네, 오늘이 장날인가요?” “돈이사 무슨 돈이 되겠소. 늙은게 딱히 할 일이 없어 그러지.” 할머니는 얼룩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혼자말처럼 두런두런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의 이상한 거동에 잠간 어정쩡했던 나는 인차 머리를 끄덕이며 할머니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랑이와 얼룩이 외에도 큼직한 비닐봉지가 놓여있었다. 나는 유심히 보닐봉지를 살펴보았다. 안에는 깨끗하게 다듬은 미나리가 들어있었다. 나는 할머니곁에 쪼크리고 앉으며 물었다. “할머니 캐신거예요? 이 미나리.” “양, 얘가 우리 집 모캐서 며칠 돌아다니기에 임자 없는 놈 같아서 먹다 남은 밥이랑 주었더니 인차 내게 맘을 붙이더라니까.” 할머니는 흐뭇한 표정으로 노랑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호기심이 동한듯 노랑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럼 전에는 얘가 떠돌이였겠네요?” 할머니는 얼룩이를 가리키며 나의 물음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던게 어느날 나갔다가 이놈을 꽁무니에 달고 들어온거라우. 그래서 그냥 먹이를 주었더니 제법 두놈 다 이렇게 내게다가 맘을 붙인게 아니겠수. 이 늙어서 쪼그라든 할망구두 의지이 되는지 이렇게 졸졸졸 내 꽁무니만 따라다닌다우. 이렇게 내곁에서 팽팽 돌아치다가두 내가 차에 앉아떠나면 뻐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바램을 하다가 집에 돌아간다우. 어메— 말은 못해두 정이사 사람 초과하지비. 암 초과하구 말구그래.” 할머니는 두손으로 노랑이와 얼룩이의 목을 끌어안더니 천천히 당겨다가 얼굴을 부볐다. 노랑이가 해살이 묻어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핥아주었다. “이그, 얘 이런다오. 사람한테. 침이 묻는다, 끈쩍끈적하게. 저리 가 저리.” 입으로는 노랑이를 책망했지만 할머니의 손은 여전히 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고있었다. 그림 같았다. 아니 그림이 옳았다. 가슴속밑자락에 정연히 모셔져있는 파아란 물감이 똑똑 떨어지는 내 동년의 한폭의 수채화를 방불케 하는 그림이였다. “왜 그러니?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이 덤벙거리니?” 하고 책망하면서도 어머니는 언제나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어머니의 손길은 나의 자신심을 키워주는 보슬비였다. 술래잡기를 하다가 넘어져 바지무릎이라도 판내우면 다른 애들은 집에 가서 엄마에게 된 욕을 먹을 일이 근심스러워 눈물을 줄줄 흘렸지만 나는 한번도 그런 근심을 해본적이 없었다. 엄마의 욕이 두려워 운것이 아니라 또 엄마를 힘들게 만들었구나 하는 미안함에서 눈물이 흐를뿐이였다. “이그이그, 기어이 목젖이 방아를 찧냐? 요것은 남겼다가 저녁에 얼룩이를 주자 그랬는디. 엿다, 먹어라.” 할머니는 호주머니에서 닭간을 포장한 작은 비닐봉지 몇개를 깨내더니 쪽쪽 아구리를 찢어 손바닥에 쏟아놓고 노랑이앞에 내밀었다. 얼룩이가 슬금슬금 다가들었다. “그만 해라. 너는 그만하라이까. 얘두 천신 좀 하게스리. 흐메— 저기 뻐스가 오능기라. ” 할머니는 꼬부장한 허리를 간신히 일으켜 세운후 오른손으로 무릎을 짚고 서서 왼손으로 등을 톡톡 두드렸다. 2 “또 나오셨네요, 할머니. 오늘도 장마당에…” 내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전에 할머니가 손사래를 했다. “말을 안 듣는다우. 되우 말을 안 듣는게지. 얘가 문제라니까.” 할머니가 노랑이의 머리에 꿀밤을 한대 먹여주었다. 노랑이는 그게 좋은지 꼬리를 살랑살랑 저으며 할머니의 주먹을 핥으려고 다가들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인차 내밀었던 주먹을 펴서 노랑이의 머리를 살살 만져주었다. 그것이 시샘이 났던지 곁에 엎드려있던 얼룩이가 부시시 기여 일어나 할머니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할머니의 손에 입을 가져갔다. 노랑이는 할머니의 손을 얼룩이와 나누기 싫다는듯 엉뎅이로 얼룩이의 옆구리를 밀어쳤다. “아서라, 이 철없는것아. 임신한 애 허리를 그렇게 쳐놓으면 어쩌냐? 쯧쯧쯧… 네가 문제라니까.” 할머니는 앉은 자세로 허리를 굽히며 두손을 내밀어 노랑이를 안아다 바른쪽에 옮겨놓고는 손가락을 오무려가지고 노랑이의 등을 살살 긁어주었다. 말 안듣는 손군을 어루는 자애로운 할머니의 모습을 보는듯싶었다. 나는 쪼크리고 앉아 노랑이의 머리를 다독이며 한마디 했다. “할머니. 얘들을 돌보느라 심심할 새 없겠어요.” “얘가 문제라오. 애들보다두 장난이 더 심하다오. 어제는 글쎄… 그래 어떠냐? 이놈아, 오늘 닭간을 못 먹으니. 돈이 어디 있어 닭간을 사주겠냐? 그것두 하나에 50전씩이나 하는데.” 할머니는 노랑이의 어깨를 톡 쳐주고는 얼굴을 내쪽에 돌리며 시무룩히 웃음 한자락을 펼쳐나갔다. “어제는 글쎄 벤또(도시락)를 사가지고 얘하구 같이 저기 강변으루 미나리 캐러 갔다우. 얘는 임신이라 배가 무거워 따라 나서지 못하구…” 할머니는 잠간 말을 멈추고 얼룩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또 한번 입가에 가는 실웃음 한오리를 걸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 강역에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미나리두 캐지 쉽잖다우. 암 쉽지 않지. 나는 도시락을 나무그늘밑에 놓구 미나리를 캐기 시작했다우. 그런데 저눔 노랑이가 내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어찌나 애를 먹이던지… 그래서 혼뜨검 좀 내주느라구 신을 벗어쥐구 저눔 엉뎅이를 냅다 답새겼드랬지. 호호호… 저눔이 글쎄 삐쳐가지구 쥉쥉 어디룬가 도망가지 않겠수. 가겠으면 가라지 뭐. 제까짖게 강역에 나와 어디루 간다구, 한참 지나서 배가 고프길래 하늘을 쳐다보니께 해가 중천에 뜬기라. 점심때가 됐구나싶어서 밥이나 먹으려구 나무그늘밑에 와보니 글쎄 아이구 어무니… 저눔이 내 도시락을 넘어뜨리구 어떻게 뚜껑을 열었던지 내 밥을 다 먹어버린기라. 내 너무 기막히구 웃음보 터지구 해서… 먹을게 없을라니 배는 얼매나 고프던지… 약이 올라 저눔을 답새기려구 하니 저눔은 글쎄 꼬랑지를 하늘거리며 나를 향해 혀를 홀랑홀랑 하는기라, 호호호… 내랑 어제 배를 쫄쫄 곯으며 지레 집으로 돌아왔지, 봄에는 나물 캐 팔아야 용돈 생기는디, 이놈아, 너 그 벤또뚜껑 어떻게 열었냐? 호호호호…” 할머니는 갑자기 머리를 뒤로 제치며 통쾌하게 웃으셨다. 두고두고 생각해도 웃으운 일을 되새기는듯 한점 구김도 없는 맑은 웃음이였다. 잘 갈아번진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가득 패인 할머니의 얼굴에는 그 시각 노르스름한 아침해살이 내려앉아 어리광을 부리고있었다. 그림 같았다. 아니, 그림이 옳았다. 번잡한 사회생활에 부대끼다 문뜩 꺼내 펼쳐보아도 싱그러운 흙냄새가 물씬 풍기는 내 고향의 풋풋한 풍경화를 방불케 하는 그림이였다. “글쎄 우리 집 암퇘지 말입꾸마, 최교장네 ‘장군이’ 하구 흘레붙지 않겠슴둥? 그 집 돼지 얼마나 좋슴둥. 호호호호…” 어머니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통쾌하게 웃으셨다. 오랜만에 어머니가 그렇게 웃는것을 보았던지라 나는 어머니의 옷자락을 당기며 물었다. “엄마, 흘레붙는다는게 뭐야?” “우리 집 암퇘지 이제 새끼를 낳게 된다는 말이다. 단번에 한 열서너마리 낳았으면 우리 동이게 새옷이랑 팍팍 사주겠는데.” 나는 어머니의 말에 흥이나서 토끼뜀을 하며 소리쳤다. “우리 집 암퇘지 흘레붙었다. 최교장네 ‘장군이’하구 흘레 붙었다.” 나는 시무룩히 웃음을 빼여물며 혀리를 펴고 일어나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슈퍼마커트로 가서 쏘세지를 몇개 사들고 나왔다. 할머니는 그때까지도 강아지들을 향해 뭐라고 중얼거리고있었다. 나는 잰걸음으로 할머니곁에 다가가 쪼크리고 앉으며 말했다. “할머니, 오늘은 얘들에게 쏘세지를 먹여요.” 나는 말하면서 쏘세지껍질을 발라 먼저 얼룩이앞에 내밀었다. 할머니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여올랐다. “이렇게 고마울변이라구야, 이 놈아들아, 어서 인사해야지. 니들 오늘 귀인을 만났그랴, 흐메— 저기 뻐스가 오능기라. ” 할머니는 꼬부장한 허리를 간신히 일으켜 세운후 오른손으로 무릎을 짚고 서서 왼손을 눈두덩에 올려놓고 달려오는 뻐스를 바라보셨다. 3 “콩콩… 콩콩콩…” 노랑이가 할머니를 빤히 쳐다보면서 초조하게 짖어댔다. 얼룩이도 불안한 눈길로 할머니를 쳐다보면서 낑낑 앓음소리를 냈다. 할머니는 노랑이와 얼룩이를 향해 손사래를 하며 소리쳤다. “됐다그마, 그만하라이까. 너네 밖에 어시 없는줄 아냐?” 할머니의 말을 엿들으며 나는 금시 쿡 하고 터지는 웃음을 참을수 없었다. 너네 밖에 어시 없냐 하시는구나. 그래, 할머니는 진작 당신을 쟤들의 엄마루 아빠루 생각하시는가봐. 나는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며 다가가 할머니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또 장에 가요? 할머니.” 할머니는 흠칫 놀라 내쪽으로 머리를 돌리더니 나의 눈길을 피하며 인차 머리를 숙이셨다. 그 동작이 어색해보였다. 혹시 내가 너무 크게 소리쳤나?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치고싶어 노랑이의 어깨를 톡 치며 입을 열었다. “얌마, 할머니의 얼굴에 뭐가 묻었니?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며 짖는거야?” 노랑이는 나의 손을 피해 앉으며 여전히 불안한 목소리로 할머니를 향해 짖어댔다. “아서라그만, 온 아침 짖어대네.” 할머니는 노랑이를 나무라며 천천히 머리를 들어올렸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어디에 짓쫏으셨던지 이마 왼쪽이 퍼렇게 멍이 들었는데 우에 피자국이 말라있었다. “조심하시죠, 할머니.” 내가 허리를 굽히며 큰 소리로 말했다. “짖지 말라는데두 말을 안듣더니… 늙으면 다 그렇다우? 다리가 후들거려서… 인제는 미나리두 쇄 간다니까. 좀 있으면 산에 가서 고사리두 꺾구 드릅두 따구 기름고비두 좋지…” 할머니는 묻지도 않는 말을 두서없이 하면서 노랑이와 얼룩이를 향해 괜히 손사래를 했다. 나는 집에서 나올 때 가방에 넣었던 쏘세지를 꺼내 껍질을 벗기면서 할머니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오늘은 쉬시지 왜 또 나오셨어요? 장보기두 놀음삼아 하셔야지…” “듬직하니 잘생겼수그레. 그쪽부모들은 든든하겠수.” “네?” 할머니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또 한번 깜짝 놀라면서 할머니의 얼굴에 눈길을 박았다. 그 눈길이 부담스러웠던지 할머니는 얼굴을 한쪽으로 돌리고 잠간 잠자코 있다가 후— 한숨을 내쉬고는 아래말을 이었다. “어찌자구 세월이 이렇게 돼간다우? 내 이런 말은 말아야 하는데…” “……” 나는 웬지 가슴속밑자락으로부터 오는 이름 모를 아픔 같은것을 감지하면서 할머니의 입을 주시했다. 가뭄에 열병을 앓는 고향마을 감자밭처럼 푸석푸석한 할머니의 두볼이 푸들푸들 떨리고있었다. 할머니는 잠간 입술을 호물거리다가 드디여 소리를 뱉어냈다. “며느리 말이우, 몇년전에 한국인지 하는데루 간게 어찌믄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다우, 이 늙은게 손주 데리구 아들하구 사는데… 그눔이 등신이지. 엠네를 한국눔께 뺏겼다구 한숨만 쉬면서 맨날 술독에 빠져 산다우. 제 새끼두 돌볼 궁리 없이… 거기다가 마작인지 하는 내기를 밤낮으루 하는데 맨날 빚을 져서 쫓기워 다니구… 오늘 아침에두 그눔이 나보구 돈을 내놓으라구 나는 죽어두 못 준다구 싱갱이질 하다가 그눔이 나를 툭 밀어놓은게 내 무슨 맥이 있소. 훌러덩 넘어지다가 벽에 이마를 쫏은게… 에구— 주책이야, 내 무슨 소리를 하누… 내사 끔뻑 죽으믄 그만이지만 내 손주놈이 불쌍해서 어이 눈을 감을가…" 할머니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야기를 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였다. “콩콩콩… 콩콩…” 노랑이가 또 할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며 짖어댔다. “그래두 얘들이 의지가 된다우, 내가 아침에 훌러덩 넘어가는것을 보더니 그때부터 내 이마를 쳐다보며 자꾸 이렇게 짖는다우…” 나는 할머니의 말에 뭐라고 동이라도 달아드리고싶었지만 일시 할머니의 아픈 마음을 감싸드릴 폭신한 붕대 같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은 어째 날씨 이렇게 찌부둥하다오? 래일은 볕이 나려나?” 할머니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물으셨다. 나는 호—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쳐다보다가 한마디 했다. “날겁니다, 할머니. 래일은 꼭 쨍 하고 볕이 날겁니다.” “너희들, 오늘두 호강했다는게다. 순대두 먹구. 흐메— 저기 뻐스가 오능기라. ” 할머니는 꼬부장한 허리를 간신히 일으켜 세운후 파아란 미나리가 잠자고있는 큼직한 비닐봉지를 주어들고 승객들이 붐비는 길역을 향해 힘겹게 걸음을 옮기셨다…
11    수필*작은 거인 댓글:  조회:1451  추천:0  2014-04-26
야시장 김치매대에서 만난 소년이였다. 검은 테 안경을 건 얼굴색이 하얗고 얼굴에 비례해 입이 약간 클사한 소년이였다. “무슨김치 좋아하세요?” 입이 약간 커서 그랬던지 시름없이 하얗게 들어나는 이빨이 참 맑다는 생각이 처음이였다. 내가 어디 잘 못 들어섰나 착각이 들었다. 이빨이 맑아보이는 소년의 청순한 이미지는 생계때문에 뛰여다니는 사람들로 치렬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야시장의 김치매대가 아니라 해볕 좋은 어느 길옆 카페의 고요한 무드속에 펼쳐져야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침에 담근거예요. 배추김치. 조미료 일절 넣지 않고 맛을 냈어요. 몸에 좋을거예요.”     목소리가  티없이 맑게 들렸다. 소음 많은 장마당에서 유난히도 나의 귀를 편하게 하는 바스음이여서 더욱 친절하게 들렸는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소년에게 매료되여 매대앞에 걸음을 멈추었고 김치에 한번, 사구려소리로 떠들썩한 장마당의 진풍경에 한번 그리고 맑은 이빨을 가진 소년의 하얀 얼굴에 한번 눈도장을 찍어갔다. 소년은 그 시각 그 자리에서 그렇게 김치를 팔면서 그렇게 웃고있었다. 눈망울이 새물새물 웃고있었다. 그 웃음이 하얀 얼굴을 타고내려 입가에 작은 파문을 일궈내고있었다. 파문이 이는 그 웃음에 미역을 감고 매대우에 사뿐히 올라앉은 김치라면 상긋한 그 파문처럼 아삭아삭 새콤달콤 입맛을 달달 볶아줄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이놈으루.” 나의 오른손식지가 소년의 얼굴만치나 상큼하게 생긴 몸뚱이에 고추가루를 함빡 빠알갛게 바르고 누워 임자를 기다리고있는 배추김치를 가리키고있었다. “네, 아저씨. 잠간만요.” 소년은 달콤한 웃음을 선불로 나에게 보내주었고 이어서 익숙한 솜씨로 배추김치 한포기를 집어 곱게 포장한후 앉은뱅이저울에 달랑 올려앉혔다. “십원 팔십전이예요. 십원만 주세요.” 역시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말이였다. 밥상에서 배추김치잎을 쭉 찢어  밥숟가락에 얹어주는 아들놈을 보는것 같이 친근하게 느껴져 나도 기분 좋게 한술 떴다.  “어,  되겠어? 장사 이렇게 해서. ” 맑은 이빨이 먼저 나에게 웃음을 날려보냈다.     “괜찮아요. 제집에서 담그는건데요 뭐.” 순간 앞마당에 자라는 살구나무에서 잘 익은 살구를  한바가지 가득 따주며 “많이 먹어. 제 마당에서 나는건데 뭐." 하시던 고향마을 박할머니의 자애로운 목소리가 귀전을 스치는것 같아 코등이 시큰해났다. 움트는 초봄과 떠나가는 마가을?  빠끔히 머리 내민 콩 꽃과 잘 익은 할머니표 된장? 도무지 어울릴것 같지 않은 두폭의 그림을 두고 고패쳐 오르던 그 시각의 그 감동은 또 무엇이였을가? 나는 유심히 소년을 읽으며 “감사!” 하고 마음을 전했다. “제가 감사하죠. 맛있게 드시고 또 찾아주세요.”     순간 소년을 알고싶은 충동이 올리밀었다. 몇살이나 됐을가? 왜 김치매대에 섰을가? 저 순진한 웃음에 어울릴만큼 마음도 편하고 즐거울가? 어느때까지나 김치매대를 지킬가? 그게 과연 얘의 꿈일가? 모든것을 제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데 습관이 되여있는 나였지만 이빨이 맑아보이는, 소박한 바스음성으로 “제집에서 담그는건데요 뭐... 맛있게 드시고 또 찾아주세요.” 하고 말하는 그 소년에 대해서만은 함부로 생각하고 판단할 자신이 없었다. 소년에서 아득히 멀리 간 년장자라고 자처하고있던 나였지만 도무지 그 시각 그 곳의 그 풍경에 딱 어울릴만한 멘트를 칠수 없었다.  섣부른 나의 식상한 말 한마디가 소년에게는 어떻게 비쳐질가 주저심이 들었다. “조미료를 일절 넣지 않고 맛을 낸” 김치를 파는 소년앞에 내가 여태 먹어왔던 화학조미료냄새를 팍팍 풍길것 같아 두려웠던것도 그때였다. 소년이 넘겨주는 김치봉지를 받아들고 몸을 돌리면서 문뜩 한없이 작아지는 스스로를 느꼈다. 딴에는 무슨 “가”노라고 자처하는 이 몸뚱이를 소년의 옆에 나란히 세울 자신이 없었다. 소년의 옆에 나란히 서서 스쳐가는 여느 사람들에게 손바닥만한  내 얼굴을 보여줄 용기가 없었다. 얼굴에 맑은 웃음을 활짝 피우고 서서 하늘에 한점 부끄러움이 없이 “...조미료 일절 넣지 않고 맛을 냈어요.” 하고 말할만한 신심이 없었다.  그게 진실한 나의 그림이여서 슬펐다. 구겨버리고싶었다. 나를 작아지게 하고 슬퍼지게 하는 그 그림을 갈갈이 찢어버리고싶었다. 하지만 그런 패기마저 근본 남아있지 않다는것을 마흔 아홉살의 이 나그네는 그 시각 모름지고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언제부터였을가? 과연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변하기 시작했을가? 도무지 그 시점을 짚어낼수 없었지만 내 가슴에도 전에는 분명 소년과 같은 순진함과 당당함이 자리하고있었던것만은 사실이다. 룡문이라고 부르는 시골마을 합작사에 《고옥보》라는 이야기책이 매대를 찾이하고 앉은것은 내가 열두살나던 그해 봄이였다. 친구들이 하도 재미있다기에 나도 그 책을 한권 갖고싶었다. 그 책을 살만한 돈을 엄마가 쉽게 내놓을수 없을것이라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돈은 없구, 신바닥을 모아놓은게 조금 있으니 그걸 수구소에 가져다 팔아 살래.” 눈물이 쿡 하고 솟아오를것만 같았다. 열두살을 살던 그날의 그 소년은 자기에게  페물꾸러미를 안고 수구소에 들어가  돈 몇십전을 받아쥘수 있는 용기가 있을것이라고 생각못했던것이다. “사내가 돼가지구. 욕심만 있구 담은 없는게지.” 엄마가 머리를 돌리면서 혼자말 비슷이 한마디 했다. 순간 나는 발딱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날 나는 당차게 수구소문을 두드렸다. 일생에서 처음으로 나에게 속하는 이야기책을 나는 그렇게 손에 넣었다. 나는 열두살 소년의 맑은 가슴에 고옥보를 모셔들였다. 과연 언제부터였을가? 어린 시절 나의 롤모델이였던 고옥보님이 나의 심령에서 사라진것은. 놀랍게도 나는 내 소년을 함께해주었던 롤모델이 살아진것을 발견하게 된것이다. 롤모델이 사라진 황페해진 내 마음의 터밭에 남겨진 허위와 오만과 실망과 망연함을 발견하게 된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지금 영웅이 없는 시대에 살고있다.”는 글을 읽은적이 있다. 영웅이 없는 시대, 정신이 없는 시대, 신앙이 없는시대, 오직 자기 리익. 자기 체면만을 위한 시대에 살고있다는 말이 되겠다. 나도 당신도 지금 배 부르게 먹고 따스게 입고 살면서도 노상 힘들고 지쳐있는것은 바로 자기 리익, 자기 체면에 대한 지나친 추구때문은 아닐가?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어구에서 나는 잠간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돌렸다. 멀리서 소년의 모습이 보여왔다. 그 시각 세속의 어떤 눈길도 개의치 않고 떳떳하게 김치매대를 지켜서있는 그는 더 이상 이빨이 맑아보이는 바스음성의 애된 소년이 아니라 세상속에 우뚝 선 작은 거인이였다. 2014년 4월 24일 게재
10    수필*50살을 운다 댓글:  조회:1365  추천:0  2014-03-05
오늘도 날마다 맛이 달라지는 커피를 타서 덤덤하게 홀짝이며 대중없이 인터넷세계를 헤집다가 문뜩 “나는 지금 무엇을 살고있는가?”라는 생각이 긴 꼬리를 그을며 날아내리는 류성처럼 뇌리에 떨어짐을 느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살고있는가?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참으로 재미없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갈마든다. 그 시간들은 하나같이 아침 출근, 저녁 퇴근, 또 아침 출근 또 저녁 퇴근…의 반복이였다. 그러다 닷새마다 이틀씩 차례지는 주말휴식은 방콕! 굳어진 이 생활의 룰을 깨면 잘 정리된 공간이 흐트러질것만 같은 강박증 비슷한 두려움(?)을 느끼군 했다. 두려움을 느낄만치 나의 사상은 고루함에 길들여져있었고 두려움을 느낄만치 나의 뇌파는 경직되여있었다. 달마다 어김없이 카드에 날아드는 얼마 안되는 로임에 길들여져있었고 그 얼마 안되는 로임으로 가정 꾸리고 아들놈 뒤바라지 하고 그 와중에 몇푼 남겼다가 친구들과 맥주 한잔 즐기는 일상에 길들여지면서 내 마음의 맥박이 하루하루 경직되여갔던것이다. 그럴수록 사업효률은 낮아졌고 그럴수록 자신을 움츠리면서 상사의 눈치보기에 바빴던가싶다. 상사가 맡겨준 임무를 완성하고도 내가 왜 그렇게 했음을 강조하기보다는 상사가 어떻게 평가하는가에만 눈길을 돌리느라 힘들었었다. 그러느라 사업터에 첫발을 들여놓을 때의 끓어번지던 정열은 식어버렸고 세상을 향해 머리를 내밀었던 인성의 모서리들은 문드러져 두리뭉실해졌다. 이게 바로 나라고 세상에 자랑할 모서리 하나 없이 누군가와 비슷하게 두리뭉실해져있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래 이렇게 살아야 편한거야.” 하고 스스로를 위안했었다. 그런 위안을 안주하며 나는 영원히 나대로의 편한 모습으로 살아갈것이라고 믿고있었다. 하지만 그새 내 몸은 되려 변화를 꾀하고있었다. 지난해 5월도 막바지로 달리던 어느날밤, 나는 갑자기 덮쳐드는 허리통에 그만 널부러지고 말았다. 난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동통이였다. 몸을 돌려눕기도 힘들었다. 안해가 외국에 나가있고 아들놈이 대학에 가있는 형편이라 일시 누구를 부를수도 없었다. 참자, 좀 지나면 나아지겠지. 이를 옥물고 두눈을 꾹 감았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동통이 인차 멎을 기미가 아니였다. 처음에 쿡쿡 쏘는것 같던 동통이 시간이 지나면서 칼로 뼈를 도려내는듯 극심해졌다. 그제야 나는 병원을 떠올리게 되였다. 옷장으로 벌벌 기여가 겨우 옷을 꺼내 입고 신을 주어 신었다. 층계란간에 몸을 의지하여 간신히 아빠트를 나섰고 세 걸음에 한번 쉬면서 끝내 거리에 나섰다. 지나가던 택시가 멈춰섰고 운전수가 고맙게도 나를 부축하여 택시에 올렸다. 요추간판탈출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장시간 사무실에 앉아 근무하는 직장인들에게 흔히 생기는 병이라고 했다.  의사는 나의 허리며 엉뎅이며에 숱한 침을 꽂아주었다. 차가운 침들이 내 몸을 뚫고 들어가 있던 그 20분간 나는 처음으로 내가 무엇을 살고있는가를 물었다. 내가 나의 모서리를 둥글둥글 죽여가며 세상과 어울려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이 내 몸에서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모서리가 생겨나 내 몸을 뚫고 나오고있었던것이다. 그새 나는 행복했던가? 오늘 문뜩 커피잔에 빠진 내 얼굴을 살펴보니 나는 이미 꿈이 바랜 50살의 나그네로 변해있다. 대부분의 나날에 커피 한잔 앞에 놓고 긴긴 하루를 다 보내도 매달 19일이면 어김없이 얄팍한 로임봉투를 받아쥘수 있는 내 직장에 만족하면서도 울바자굽에 남아있는 초겨울의 호박대가리처럼 오글조글 말라가는 자신이 애달파 가끔 한숨도 짓는 그런 창백한 얼굴의 나그네로 변해있다. 나는 여기서 래일도 아침이면 커피 한잔 타들고 컴퓨터를 찾을것이고 모레도 군입거리를 찾는 그 무엇처럼 대중없이 인터넷세계를 헤집을것이며 글피도 커피잔에 빠져드는 뿌연 해빛오리들을 셀것이다. 그러다 가끔 커피잔을 손에 들고 우아한척 폼을 잡으면서 나는 과연 누구인가를 물을것이다. 돌을 삼켜도 소화해낼수 있을것만 같던 20대중반에 내 몸뚱이가 다른 어느 곳에 떨어졌더라면 나는 지금쯤 어떤 나를 살고있을가? 25살에 입사하여 2년쯤 지났을 때일것이다. 내가 사는 도시에도 민족 대이동의 막이 서서히 열리고있었다. 하루 새롭게 누구는 직장을 버리고 외국으로 갔소, 누구는 직장을 버리고 장사를 떠났소 하는 소문이 나돌았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때는 더구나 외국에 나가 벌거나 장사로 버는 돈이 직장인들의 로임과는 비할수도 없이 많았다. 200원이 되나마나한 로임에 매워 힘겹게 직장생활을 하던 우리 젊은 직장인들에게 그런 소식은 유혹이 아닐수 없었다.  어느날밤, 나는 잠 못 이루고 궁시렁거리다가 “나도 나가보는거야!” 하고 결심을 내렸다. 하지만 날이 밝자 나는 또다시 출근길에 오르고 말았다. 힘들게 얻은 직장을 떠나가기 아쉬워서였다. 아니 어쩌면 떠나기 두려워서였다고 함이 나을것이다. 그후에도 나는 몇번인가 호수같이 고요한 직장을 벗어나 큰 바다에 뛰여들려고 생각했었지만 번마다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묵묵히 사무실을 지키면서 20여년을 살아왔다. 그새 나는 만족했던가? 커피잔에 비낀 나의 50살을 마주하고 이 물음에 선뜻 대답을 줄수없어 슬퍼지려고 한다. 슬퍼지려는 자신을 달래며 당당하게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지!”를 꿈 꿀수 없어 울고싶다. 《론어》위정편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였으며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리치를 깨달아 리해하게 되였고 일흔이 되여서는 무엇이든 하고싶은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나도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였다.”는 지천명의 나이 50살이 된것이다. 과연 하늘이 나에게 내린 명은 무엇이였을가? 오늘도 나는 나의 50살을 운다. 2월 28일 게재
9    수필* 이 아침은 행복하다 댓글:  조회:1583  추천:0  2014-02-22
커피 한잔 타가지고 컴퓨터앞에 앉는다. 벽에 걸린 네모난 시계의 노란 초침이 시름없이 스쳐가듯, 그 시계밑에 놓여져있는 정수기의 뜨거운 물을 끓이는 부품이 때가 되면 어김없이 드르릉 작동을 하듯 나도 거의 기계적으로 마우스를 잡는다. 얼마전의 아침들까지만 하여도 나는 드넓은 황야를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마구 헤집으며 썰물이 밀려간듯 허전한 내 가슴이 탁 트이게 하는 빅뉴스는 없나, 백살을 살수 있게 용하다는 건강비결은 없나를 살폈었지만 이 아침은 마우스가 자연스럽게 모니터 오른쪽웃켠에 모셔져있는 문건창을 찾는다. 어쩌면 눈에 잘 뜨이지도 않는 작은 문건창이지만 마우스를 잡은 내 손은 괜히 떨리고 가슴은 흥분으로 하여 설렌다. 나는 그 문건창을 나의 세상이라고 부른다. 마우스를 잡은 오른손식지가 드디여 세상의 문을 노크한다.  한송이 또 한송이의 장미꽃들이 날아내린다. 얼어터진 내 손등에 내려앉던 엄마의 따스한 손길만치나 차분하게 내 시린 마음을 어루쓰는 장미들… 노란 장미꽃을 보면서 해볕 좋은 고향집뜨락에서 시름없이 뛰놀던 노오란 병아리가 떠오르는것은 흘러간 동년의 그리움때문만일가?  빨간 장미꽃을 보면서 더벅머리 시골소년이 밤잠을 설치고 찾아헤매던 빠알간 웃음을 머금은 우물집 숙이를 떠올리게 되는것은 잃어버린 소년의 애틋함때문만일가? 연분홍 장미꽃을 보면서 장미꽃을 닮은 안해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는것은 이국타향 낯선 도시의 어느 한 기계앞에서 부지런히 일손을 놀릴 내 사람에 대한 미안함때문만일가? “나는 지금 꽃비를 맞고있나봐!” 꽃비가 내리는 아침, 진한 커피향이 풍기는 드라마같은 순간, 고요한 내 가슴의 심벽을 타고 또 다시 뭉클 한쪼각의 감동이 몰려온다. 한 직장에 다니는 동료이자 친구같고 누님같은 선생이였다. 가끔 복도에서 만나면 시름없이 벙그레 웃어줄수 있어 편하고 혹시 기분이 꿀꿀할 때면 커피 한잔 함께 마시면서 수다(?)도 떨수 있어 믿음이 가던 선생이였다.  어느날, 그 선생이 메모리를 들고 우리 사무실을 찾아왔다. 하냥 그러하듯 먼저 얼굴에 담은 함박꽃같은 웃음을 선물하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은 장미꽃타임… 누구에게 먼저 선물할가?” 선생은 사무실동료들의 컴퓨터마다를 찾아 메모리에 담긴 문건을 옮겨주면서 일에 지칠 때마다 한번씩 감상하라고 했다. 평소 롱담도잘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재미있게 할줄 아는 선생이라 또 어떤 깜짝쇼를 하는가보다 생각하며 그 문건을 터치했다. 순간, 나는 보슬비처럼 날아내리는 장미꽃에 입을 떡 벌렸다.  어느 동료는 잃어버린 소녀를 찾은것 같다며 감동했고 어느 동료는 날아내리는 장미꽃을 보고 감동을 할수 있는 정열이 자기의 가슴에 남아있어 눈물이 날번했다고 토로했다. “나는 지금 꽃비를 맞고있나봐!” 어느 드라마에서 나오던 로맨틱한 이 대사가 처음 내 머리를 친것은 바로 그 순간이였다. 나는 저 하늘긑자락으로부터 차분히 날아내리는 꽃비를 맞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내 가슴밑자락으로부터 뭔가가 뾰족뾰족 고개를 쳐드는 맑은 소리를 듣는것만 같아 이름할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무엇일가? 이 맑은 소리는 과연 무엇일가?  콩크리트로 지어진 네모난 집에서 나와 콩크리트로 도배된 도로를 지나 다시 콩크리트로 도배된 네모난 사무실에 들어서서 하루 8시간을 콩크리트처럼 굳어진 시간을 살아야 하는 이 몸에서 이 아침에 울려오는  이 맑은 소리는 과연 무엇일가? 그 소리는 내 손가락밑에서 애처롭게 울리는 타닥타닥 단조로운 자판소리가 아니였다. 그 소리는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아픈듯 잔뜩 얼굴을 찡그려붙인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소리도 아니였다. 그것은 내 마음의 사막에서 한줄기 오아시스로 흘러가는 삶의 노래였고 모래먼지로 얼룩진 내 가슴의 음지에서 싹터오르는 감성의 파아란 숨소리였다.  그날 나는 네모난 모니터에서 차분히 날아내리는 꽃비를 맞으면서 장미꽃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고 우리 사는 세상에 여전히 그같은  아름다움이 숨어있는것으로 하여 흥분했었다. 그로부터 나는 일을 하다 피곤할 때면 마우스를 타고 모니터 오른쪽웃켠에 자리잡은 장미꽃세상으로 달려갔고 누군가 미워지려고 할 때에도 장미꽃세상을 산책하면서 든든히 잠기지 않은 내 마음의 빗장을 열고 들어오려는 미움의 화신을 몰아냈으며 스스로가 보잘것 없이 작아지려고 할 때에도 장미꽃세상을 찾아 그 세상 일원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용기를 얻군 했다. 그로부터 나는 전에는 거리에서 만나도 묵묵히 스쳐가던 “별로 친하지 않다”고 느끼던 누군가에게 한줄기 웃음을 보낼수 있었고 내 핸드폰 주소록에서 잠자고있는 몇년전에 만난적이 있던 지인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메쎄지를 보낼수 있었으며 어느때 나에게 뼈저린 상처를 주어 가슴에 응어리로 남겨두고있던 그 누구에 대한 미움도 애써 닦아내려고 노력했다.   웃음으로 나누는 세상은 더 밝아진것 같았고 오래동안 차곡차곡 묻어두고있던 미움이 가셔진 내 마음의 골방은 더 넓어진듯싶었다. 그제야 나는 세상에 부대껴 진작 삭막해졌다고 느끼던 내 가슴저변에 시종 채 죽지 않은 감동이 숨어있었다는것을 확신하게 되였다. 나뿐만아니라 우리 모두의 가슴속 어딘가에는 가뭄을 맞아 시들어버린 사랑의 싹이, 찬바람을 맞아 움츠러든 인정의 싹이 숨어있을것이다.  누군가의 작은 거동 하나가 내 가슴에서 사라져가던 감성의 싹을 살려낼수 있듯이 나의 작은 행동 하나도 누군가의 가슴에 움츠리고있던 새로운 세상을 불러올수 있지 않을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다고 말하리라 소풍 같은 삶을 살다간 천상병시인의 주옥같은 시구가 떠오른다.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구석구석에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문제는 나나 당신이나 그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그닥 밝지 않다는것이다. 먼 옛날 어느땐가 마음의 눈에 날아들었던 먼지를 여태 닦아내지 않고 그 무슨 보물이나 되는듯 움켜쥐고 아파하며 오래오래 앙금으로 남겨두었기에 아름다움을 볼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은것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이 세상 소풍 다 끝내고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갈수 있게 항상 아름다운것만 보는 마음의 눈을 키워야 겠다.  힘들고 찌들어가던 내 마음의 골방에 황홀한 장미꽃세상을 선물해준이가 있어 이 아침은 행복하다. 20014년 2월 21일 "해란강"부간.
8    단편소설 * 유희인생 댓글:  조회:1964  추천:0  2013-08-29
단편소설 유희인생 최동일 1 안해의 눈길이 타고있었다. 섣불리 들어섰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하게 빠작빠작 타버릴것만 같이 활활 타오르고있었다. 천사의 날개같은 하얀 잠옷을 차려입은 안해의 쌍까풀눈이 그 같은 불을 토하고있다는것에 정우는 놀라울따름이였다. 아니 놀랍다기보다는 두려움에 가슴이 꺽꺽 막혀왔다고 하는것이 더 적절할것이다. 정우는 화장실문앞에 우두커니 서서 잠간 분위기를 살피다가 안해를 태우는 그 불길이 어디로부터 시작된것이라도 알고싶어 약간 떨리는 목소리 “여보.” 하고 낮게 불렀다. 안해가 용수철 튕기듯 튀여 일어나며 손에 들고있던 핸드폰을 침대우에 둘러메쳤다. 쏘파위라서 그렇지 맨 봉당에 그 힘으로 던져졌더라면 핸드폰이 산산 조각이 났을것이다. 정우는 자기의 몸뚱이가 그렇게 바닥에 팽개쳐지는 퉁 하는 소리를 듣는것만 같아 몸을 흠칫하면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화장실에서 막 나오는 걸음이였던지라 한걸음 물어서자 화장실문에 몸이 닿았다. 정우는 본능적으로 두손으로 움켜쥐였던 타올을 놓아버렸다. 배꼽아래로부터 치부까지만 살짝 가리우고있던 타올이 주르르 풀려 바닥에 떨어졌다. 사와를 한후 아직 기지개 한번 켜보지 못한 정우의 그 물건이 검실검실한 대가리를 여섯시방향으로 툭 떨군채 들어나버렸다. 정우는 급히 두손바닥을 쫙 펴서 그 물건을 가리우며 다시한번 “여여, 여…여보.” 하고 목소리를 쥐여 짲다. ―여보라니, 개떡같은… 어디다 여보라는거야? 이럴줄 알았지. 내 정녕 이럴줄 알았다구. 고래고래 괴성을 질러대는 쫙 벌린 안해의 입은 그대로 정우를 삼켜버리고도 남을상싶었다. 정우는 그 물건을 가리운 두손에 힘을 주며 한껏 몸을 옹크리고 더듬거렸다. ―왜 그러는거요? 갑자기. ―뭐, 갑자기?” 안해의 동공이 기가 막히다는듯 무서움 없이 커지고있었다. 정우는 입을 하 벌린채 무기력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넋이 나간듯한 정우의 몰골을 쏘아보던 안해는 “천사의 날개”를 훨훨 날리며 침실로 들어가버렸다. 정우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끌고 쏘파곁으로 다가가 안해가 던져버린 핸드폰을 주어들었다. 액정에 메시지가 펼쳐져있었다. “그날 너무 즐거웠어요. 영원히 잊지 못할거예요. 언제 또 당신에게 안길수 있을가요? 불러주세요. 유희가.” ―유…유희? 정우는 핸드폰을 손에 든채 얼굴을 천정으로 향하면서 입을 떡 벌리고말았다. 하지만 그렇다할 답안이 입으로 떨어져들어오는것도 아니였다. 정우는 한껏 쳐든 그 맵시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풀썩 쏘파에 주저앉으며 다시 핸드폰에 눈길을 가져갔다. 틀림없었다. 안해에게는 청천벽력이 되고도 남을만 하고 정우에게는 사형판결서가 되고도 남을만한 메시지였다. 유희? 즐거웠다니… 영원히 잊지 못할것이라니… 내가 언제 너를 안은적이 있게? 다시 불러달라구? 갈수록 심산이라고 생각할수록 오리무중에 빠져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정우는 천천히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주어 입기 시작했다. 그로서도 자기가 왜 그 시간에 옷을 주어 입어야 하는지를 알수 없었다. 아니, 알수 없는것이 아니라 아예 그 필요성에 대해 생각을 하지 못하고있었다. 그저 그 순간 그렇게 그 모양으로 그 옷들을 몸에 걸쳐야 한다고 기계적으로 생각하고있을 따름이였다. 정확하게 혁띠의 네번째 구멍을 찾아 걸침을 걸고난 정우는 량쪽 엄지손가락을 혁띠안쪽에 넣어 앞으로 툭툭 튕기며 후― 하고 긴 숨을 토해냈다. 스르르 두눈이 감겨졌다. 정우는 미동도 없이 선자리에 굳어졌다. 어디론가 정처없이 떠나고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여들었다. 정우는 꿈속에서 헤여나온듯 두눈을 번쩍 뜨고는 출입문쪽을 향하여 씨엉씨엉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안해의 앙칼진 목소리가 칼처럼 정우의 귀에 박혔다. 정우는 칼 맞은것처럼 흠칫 몸을 떨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기어이 간다는거지? ―왜 이래? 정우는 피를 토하듯 힘들게 한마디를 뽑아올리면서 픽 몸을 돌렸다. 안해가 문설주에 기대여 있었다. 아예 침실로 들어가지 않고 쭉 정우를 지켜보고있었던것인지 아니면 정우가 옷을 입느라고 부산을 떨 때 일어나서 문설주에 기댄것인지는 모를 일이였지만 그 자태는 퍽 온건해보였다. ―몰라서 물어? 말을 마친 안해가 오른손식지를 들어다 입어 넣었다.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오른손식지가 빨간 립스틱을 진하게 바른 입술 사이에 물렸다. ―당신, 그 버릇 아직도 못 버렸어? 정우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튀여나갔다. ―당신은 세살적 버릇 떼버릴수 있어? 안해가 빨간 혀끝을 날름거리며 빨간 입술 사이에 물려진 빨간 손톱을 핥고있었다. 정우는 한달음에 안해곁으로 뛰여가 한아름에 안해를 번쩍 들어 침대우에다 메쳤다. ―이러는게 아니야, 당신. 정우는 침대에 큰 대(大)로 널부러진 안해를 넌지시 내려다보면서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어쩌면 안해에게 아니라 혼자서 애타게 중얼거리는듯싶었다. ―그럼 어쩌는건데? 안해 역시 침대에 큰 대(大)로 널부러진채 눈도 뜨지 않고 잠꼬대 하듯 물었다. ―물었어야 했지. 정우가 침대가에 한발 다가서며 또박또박 말했다. ―뭘 물어? 안해가 반쯤 몸을 일으키며 목소리에 가시를 박았다. ―누군가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정우가 다시 침대가에 한발 다가섰다. ―그래? 누구야? 유희라는 그 녀자? 어떻게 된 일이야? 유희라는 그 녀자와는? 안해의 목소리가 여전히 파르르 떨리기는 했지만 처음보다는 좀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정우는 인차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감빨다가 갑자기 안해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안해가 몸을 빼려고 정우를 밀었다. 정우는 우악스럽게 안해의 목을 와락 당겨다가 헉헉 모두숨을 톺으면서 입술을 덮쳤다. 흐흑― 안해가 경련을 일으키는듯 부르르 몸을 떨면서 정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우의 심장이 팡팡 널뛰기를 해댔다. ―죽었어, 죽여버릴거야. 쾅쾅 밟아버릴거야! ―죽여, 죽여버리라구! 쾅쾅 밟아버리라구!! 안해가 발딱 일어났다가 다시 정우앞에 무릎을 꿇고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혁띠의 네번째 구멍에 건 걸침을 빼느라 헤덤비면서 피를 토하듯 한마디한미디 뱉어냈다. ―넌덜머리가 났어. 진종일 일에 지치고 들어왔으면 죽은 돼지처럼 팍 쓸어져야 도릴텐데 왜 자꾸…자꾸 발정난 고얘((고양이)처럼… 혁띠의 네번째 구멍에 걸렸던 걸침이 빠졌다. 정우는 아래도리에 감전이라도 된듯 흠칫 몸을 떨면서 허리를 꺾었다. 안해가 걸침이 해제된 정우의 바지를 단번에 와락 당겨내렸다. ―헉! 안해가 허무한듯 외마디 소리를 토했다. 정우는 본능적으로 두손바닥을 쫙 펴 아래도리를 감쌌다. 그 물건을 감싼 팬티가 흥건히 젖어있다는 느낌이 머리를 쳤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눈앞에서 무수한 오각별들이 탁탁 튀여오르는듯싶었다. 아닌데, 이게 아닌데. 정녕 이게 아닌데… 정우는 팬티위로 그 물건을 꽉 움켜쥔채 안해옆에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2 ―당신, 괜찮아. 진실을 말해줘. 내가 싫어진거지? 아예 내가 싫어져서 나하구는 안되는거지? 안해가 빨간 손톱으로 정우의 가슴을 박박 긁으면서 앙탈지게 파고들었다. 정우는 그러는 안해를 밀어버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쏘파에 다가가 앉았다. 자기의 몸뚱이가 천근 돌이 되여 자자드는것만 같았다. 정우는 잔뜩 몸을 옹크리고 머리를 무릎우에 박았다. 뜨거운 액체가 무릎을 적시고있었다. 내가 울어? 정우는 머리를 번쩍 쳐들고 주먹으로 눈확을 찔끔찔끔 눌렀다. ―당신, 울어? 멀리에서 들려오는듯 했다. 정우는 부르르 몸을 떨면서 소리나는쪽에 눈길을 돌렸다. 안해가 창가에 기대서서 넌지시 정우를 바라보고있었다. 달빛이 교교했다. 교교한 달빛이 정우에게는 사뭇 처량하게 느껴졌다. 정우는 발등에 걸린채 볼품없이 구겨져있는 바지를 집어 당기며 쏘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우는 자기의 두손이 약간 떨리고있음을 감지하고있었다. 푸― 애써 자신을 진정하면서 길게 들숨을 끌었다가 한껏 내쉬였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정우는 엉덩이까지 올라온 바지를 놓고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였다. 손바닥에까지 열기까 느껴졌다. 정우는 두손바닥에 힘을 주어 한껏 두볼을 비비다가 다시 바지춤을 잡았다. 혁디가 손에 잡혔다. 정우는 혁띠를 찬찬히 내려다보며 네번째 구멍을 찾았다. 그래, 조 구멍에 꽂아야지. 정우는 그 와중에 걸침이 네번째 구멍에 쑥 들어가는 그림이 그처럼 또렷하게 머리속에 펼쳐지는것이 이상하리만치 놀랍다고 생각되였다. 그래, 조 구멍에 쑥 꽂는거야! 정우는 오른손으로 혁띠의 걸침을 찾아들고 네번째 구멍을 묘준하여 쑥 밀어넣었다. 걸침은 별 소리도 없이 슴슴하게 네번째 구멍을 찾아들어갔다. 습관대로 량쪽 식지를 혁디안쪽에 넣어 앞으로 툭툭 튕겼다. 바지가 혁띠에 걸려 한결 편하게 허리를 감싸고있었다. 정우는 혁띠에서 손을 떼고두팔을 어깨와 나란히 올려들고 쑥쑥뒤로 뻗으며 가슴을 앞으로 튕겼다. ―자자. 아마츄어배우의 어설픈 연기를 감상하듯 얼굴에 아무 표정도 없이 멀거니 정우를 지켜보던 안해가 한마디 던지고는 “천사의 날개”를 하늘거리며 침실로 들어갔다. 그 말에 안해를 따라 침실로 들어가려고 발걸음을 옮기던 정우가 무슨 생각에서였던지 네번째 걸음을 떼다 말고 우뚝 멈춰섰다. 침실쪽을 바라보던 정우의 눈길이 천천히 창문쪽으로 옮겨졌다. 몸도 창문쪽으로 향해졌다. 발걸음이 다시 창문쪽으로 세 걸음 옮겨졌다. 정우는 두팔을 창턱에 올려놓고 창문넘어에 눈길을 던졌다. 뭉게구름밑으로 둥근달이 흘러가는 모습이 환영처럼 뿌옇게 보여왔다. 너무 뿌옇해서 달에 상아가 있는지 옥토끼가 있는지 보여지지 않았다. 그냥 달이라고만 생각되였다. 후― 정우는 다시한번 한숨을 내뿜으며 담배 한가치를 뽑아 입에 물었다. 떨리는 손으로 라이타를 켜들었다. 재수없게도 불꽃은 담배를 묘준하지 못하고 코밑으로 날아들었다. 다 된 죽에 코물을 떨궈버린 못 사는 집 아낙네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빵에 눈동자를 맞아버린 나그네처럼 정우는 절망적으로 악! 하고 짤막하게 비명을 질러올리며 라이타를 떨어뜨렸다.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일시 궁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정우는 파아란 불꽃이 사그러진채 댕그라니 바닥에 떨어져있는 라이타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허리를 꺽었다. 대뇌가 오른손에다가 라이타를 주으라는 신호를 보내고있는것 같았다. 라이타를 주어들었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있었다. 정우는 오른손엄지에 힘을 주었다. 그것마저 뜻대로 되여주지 않았다. 엄지가 아파날 지경으로 라이타를 켜려고 애썼지만 종시 불꽃은 일지 않았다. 정우는 맥을 놓고 오른손에 라이타를 움켜쥐고있다가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다시 눈확이 젖어들었다. 자신이 그처럼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라이타, 라이타도 제대로 켜지 못해? 등신, 병신, 무골충… 정우는 오른손에 움켜쥐였던 라이타를 사타구니밑에 쑥 밀어넣었다. 라이타가 들어가면서 그 물건을 스치는듯싶었다. 찡― 하고 전류가 흘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그때 그 물건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선다게 쳐 죽이고싶도록 괘씸해났다. 정우는 한줌에 와락 그 물건을 움켜쥐고 흔들어댔다. 하지만 바지에 살짝 대가리를 숨긴 그놈은 일부러 정우를 골려라도 주려는듯 용케도 정우의 손바닥에서 몸을 빼는가싶었다. 맹랑하게도 괜히 바지앞섶만 쥐고 아래우로 흔들어대던 정우는 모든것을 체념한듯 벌렁 뒤로 몸을 날려 큰 대자로 널부러졌다. 두눈을 감아버렸다.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떻게 된걸가? 내가 왜, 왜… 왜 이렇게 되여버린것일가? ―당신, 나 없이 살수 있어요? 6년전, 공항에서 정우의 손을 잡고 안해가 목소리를 파르르 떨면서 그렇게 물었다. 그렇게 묻는 안해의 바스음에는 근심과 불안함이 가득 묻어있었다. ―살아볼게. 믿어! 정우가 힘있게 머리를 끄덕였다. 안해가 정우의 가슴에 살풋이 머리를 댔다. 툭툭툭… 정우는 자기의 심장이 급촉하게 뛰기 시작한다는것을 느꼈다. 안해가 그 심장소리를 듣고있는것 같았다. ―이번에 꾼 돈을 갚아버리구 100평짜리 아빠트 한채를 사구 아들놈 대학 보내구 장가보낼 돈만 벌면 돌아올게요. 안해가 정우의 가슴에 얼굴을 댄채 속삭였다. 정우는 안해를 꼭 껴안으며 입을 열었다. ―그 돈이 언제쯤 벌어지는데? ―한 3년? 4년? ―3, 4년? ―너무 길어? ―나, 그때면 아바이로 될거야? ―당신은… 참. 40대중반의 아바이도 있어? 길게 쳐 4년이라도 당신은 45살밖에 안돼. ―반 구십이네. ―괜찮을거야. 당신은 쎄잖아. 반백이라도 당신은 씩씩할거야. 안해가 주먹으로 정우의 가슴을 툭 치면서 자기의 얼굴을 뗐다. 손님들이 거의 빠지고있었다. 안해도 가방을 끌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정우는 안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래오래 대기실을 향해 손을 저었다. 1년 3개월만에 안해가 한국으로 갈 때 꾸어들였던 빚 5만원을 다 갚아버렸다. 다시 2년 5개월이 지나 20만원을 주고 시내변두리에 100평되는 아빠트 한채를 샀다. 그날밤, 정우는 가옥소유증을 베개밑에 깔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행복할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안마방으로 가자고 잡아끌어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모양으로 떡 벝이고 서는 정우를 일러 “가짜내시”라고 불렀다. 그때마다 그 소리가 고깝게 들리고 그 소리에 부아통이 터지기도 했었다. ―쨔식들, 맘대루 짖어봐. 내가 눈 한번 끔뻑 하나? 안해를 돈 벌러 외지에 보내고도 집에서 흥야붕야 신선놀음을 해대는 친구들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정우였다. 네놈들처럼 미친듯 놀아대다가 언제 아빠트를 장만해? 언제 와이프를 다시 집에 불러들여? 안해가 없는 나날에 아들애를 건사하면서 출근을 하느라 힘들었지만, 밤이면 밤마다 옆구리가 시려 외로왔지만 그 힘든 세월이 모여 가옥소유증으로 된것 같아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 행복, 그 위로는 딱 그때까지였다. ―여기다 돈을 저금하는게 더 유리할것 할것 같아. 한국돈이니까 여기에 두고있어야 시세를 따를게 아냐? 금방 집장식을 마치고 숨도 채 돌리지 못하고있을 때 걸려온 안해의 전화였다. “그그, 그… 그래 그럼.” 정우는 등곬에 식은땀이 쫙 흐르는것을 느끼며 송수화기를 쥔 손을 떨었다. 순간 다리맥이 쫙 풀려나갔다. 정우는 송수화기를 어떻게 놓았던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정우의 손은 후줄근해 있는 그놈을 꾹 쥐고있었다. 정우는 벌떡 일어섰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옮겨놓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쳐진 얼굴이 파김치를 방불케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불깃불깃 혈기가 도는듯 하던 자기의 얼굴이 어느새 그렇게 풀이 죽었는지 알수 없었다. ―어! 흠!! 정우는 힘있게 건가래를 떼고는 급히 잠옷바지춤을 아래로 쑥 밀어내렸다. 안해가 떠나간 시간들에 굳어진 습관이였다. 이 정도쯤 되면 그놈이 벌써 마을돌이를 나선 이웃집강아지마냥 벌떡벌떡 모두뜀을 했어야 했다. 이상했다. 그놈이 병든 고양이처럼 대가리를 아래로 떨어뜨린채 미동도 없이 여섯시를 가리키고있었다. 화가 터지려고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된 화염인지도 알수 없었다. 정우는 그놈을 꽉 잡아 흔들었다. 역시나 죽여줍시사였다. 한참이나 싱갱이질 했지만 그놈은 종시 열두시를 가리키지 못하고말았다. 그때로부터 안해는 정말 돈 한번 부쳐오지 않았다. 로임은 변변치 않지만 그래도 문을 닫을일이 없는 든든한 일자리를 가지고있는게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되였다. 대학에 간 아들놈에게는 안해가 직접 생활비를 보내는것 같았다. 처음에는 자기를 믿지 못하는 안해가 좀 고깝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그것도 인차 리해가 되였다. 전에도 경제권은 시종 안해가 쥐고있었던것이다. 그래, 필요 없는 돈을 건사하느라 힘들기만 했지… 내 벌어 내 사는게 편하지. 일이란 마음 먹기에 달린것이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찜찜하던 가슴이 탁 트이는것 같았다. 탁 트인 가슴이 투닥투닥 뛸 때면 정우는 어김없이 화장실을 찾아들었다. 마실을 나선 이웃집강아지처럼 벌떡 벌떡 모두뜀을 하는 그놈의 대가리를 꾹 쥐고 이리저리 휘둘러대는 그 즐거움이 한량없었다. 6년이였다. 그새 안해는 한번도 귀국한적이 없었다. 필경은 불법체류라 섣불리 귀국했다가는 다시 나갈수 없는 처지였다. 6년이였다. 그새 한국문턱도 많이 낮아졌다. 불법체류자도 자진신고를 하고 일정한 벌금을 물면 다시 정상적인 도경을 통해 나갈수 있다는 새로운 정책을 내놓았던것이다. 그 동풍을 타고 안해가 6년만에 날아온것이다. 그 6년간 정우는 자기가 죽어있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놀라왔다. 억울했다. 통분했다. 정우는 벌떡 얼어섰다. 탕 소리 나게 화장실문을 닫아버렸다. 끌신도 신지 않고 급급히 거울앞에 마주섰다. 거울에 비쳐진 얼굴은 불깃불깃한 풍채 좋은 사나이의 얼굴도 아니요 그렇다고 3, 4월의 쉬여빠진 파김치 같은 얼굴도 아니였다. 정우는 헉헉 모두쉼을 톺으며 거울에 얼굴을 가져갔다. “가짜내시”라던 친구들의 비아냥소리가 귀전을 스쳤다. 미친놈들, 괘씸한 놈들, 단매에 쳐죽여야 속이 씨원할 놈들… 정우는 연신 궁시렁거리며 와락 그놈을 움켜쥐였다. 한식경이 지났지만 그놈은 사흘 굶은 이웃집 강아지처럼 종시 맥을 추지 못하고있었다. 그놈을 잡아 흔드는 오른손가락이 뻣뻣해졌고 두다리가 지진을 만난 담벽처럼 후들거렸다. 정우는 그 짓을 포기한채 허둥지둥 객실로 나왔다. ―앗! 정우의 입에서 신음같은것이 터져올랐다. 아까 샤와를 할 때 바닥에 흘린 물을 닦지 않았던지라 정우의 발바닥이 젖어있었던것이다. 젖은 발바닥이 마루판에 쫙 밀키면서 보기좋게 정우를 무너뜨렸다. 정우는 다시 일어설념도 못하고 큰 대자로 너부러진채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았다. “아이(爱)”라는 글이 찍혀져있는 등갓이였다. 집장식을 할 때 정우가 조명상점 십여집을 돌아보고난후에야 결정한 등갓이였다. 바로 그 “爱”자옆에 먼지알갱인지 아니면 파리똥인지 모를 까아만 점들이 찍혀져있었다. 점 하나, 점 둘, 점 셋… 푸하핫!!! 갑자기 웃음을 뿜어올렸다. 푸푸푸… 하하하… 푸하푸하… 정우가 벌떡 일어섰다. 목욕통창문넘어로 샤와를 하는 녀체를 훔쳐보려는 악동처럼 한껏 발뒤꿈치를 치켜들고 머리를 뒤로 하며 등갓의 까아만 점에 눈길을 박았다. 녀자야, 그래. 바로 녀자얼굴이라니까. 그 생각이 정우를 그처럼 웃게 했던것이다. 정우는 손등으로 두눈을 비비고 다시 그 점들에 눈길을 가져갔다. “爱”자옆에 자잘하게 들어붙은 까아만 점들은 신통하게도 녀자의 얼굴을 그리고있었다. 녀자다, 저 녀자가 왜 저 갓우에 올라가있을가? 뿌옇게 먼지가 오른 등갓으로부터 부옇한 얼굴이 나타났다 살아졌다를 반복했다. 누굴가? 정우는 지그시 주눈을 감았다. 유희! 그 이름 석자가 정우의 머리속을 치고들었다. 유희, 유희! 그녀는 과연 누구일가? 3 저녁노을이 타고있었다. 섣불리 다가섰다가는 그림자도 없이 깡그리 타버릴것만같았다. 정우는 활활 타오르는 저녁노을을 막연하게 바라보다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저녁노을이 언제까지 더 타오를수 있을가 하는 생각이 머리속을 스쳤다. 겉으로는 타오르는듯싶지만 속은 이미 정오의 이글거리는 태양과 멀어진 여운에 지나지 않는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가에 허구픈 웃음 한자락이 스쳐지났다. 정우는 저녁노을로부터 천천히 눈길을 돌리고 푹 머리를 숙였다. 후― 저도 모르게 입에서 킨 한숨이 처져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이 갑갑해났다. 정우는 두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어데라 없이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한식경을 그렇게 걸은듯싶었다. ―찌르라는데, 안되지? 맥이 없지? 물알 같은것이… 악청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 소리에 놀라 정우는 순간 머리를 쳐즐었다. 발걸음은 이미 강변광장에 와 있었다. 소학교 3, 4학년쯤 되여보이는 애들 넷이 뽈을 차고있었다. 십여메터를 사이 두고 가방으로 만든 꼴문이 있었다. 둘씩 한편이 되여 대방의 꼴문을 공격하고있었다. 키가 크고 몸집이 뚱뚱하게 생긴 애였다. 동작이 그닥 날렵하지 못했다. ―물알이라니까, 몸뚱이가 커서 뭐해. 빨리 쏴라니까. 키가 작말막하고 몸이 다부지게 생긴 애와 한편인듯싶었다. ―무슨 말이 그리 많니? 쏘쏘…쏜다는데… 뚱뚱하게 생긴 애가 뽈을 몰고 대방의 꼴물을 향해 가며 말을 벅벅 더듬었다. ―개소리 치지 말구 말리 쏴라, 찍! 다부지게 생긴 애의 말을 뒤로한채 뚱뚱하게 생긴 애가 뽈을 얼마간 더 몰고 가다가 꼴문을 힘껏 날려보냈다. 하지만 뽈은 꼴문을 명중하지 못하고 왼쪽으로 기울면서 생뚱같이 나가버렸다. ―에―잇, 물알같은것이… 너하구 한편이 된 내가 재수없는게지. 다부지게 생긴 애가 뚱뚱하게 생긴 애를 향해 주먹을 흔들어보이고있었다. 그래도 뚱뚱하게 생긴 애는 이미 그런 핸동에 습관이된듯 다부지게 생긴 애를 향해 헤헤 웃음을 지어보일뿐이였다. ―자식, 성격이 좋은거야? 머리에 물이 들어찬거야? 정우는 뚱뚱하게 생긴 애가 맹랑하게 생각되여 쩝쩝 입을 다시며 뚝에 올라가 강울을 바라보고 앉았다. 저녁노을이 마지막 그림자를 강물에 길게 드리우고있었다. 붉으스름한 강물이 반짝이고있었다. 저 붉은 색조가 다 하면 어둠이 찾아들겠지? 어둠이 기다려지는것인지 아니면 찾아드는 어둠이 두려운것인지 정우로서도 짐작할길 없었다. 다만 이제 곧 어둠이 대지를 감쌀것이고 자기도 어김없이 그 어둠속에 삼켜질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꽉 채우는것은 어쩔수 없었다. 그 어둠속에서 자기가 잠들것이고 그 잠길에서 어지러운 꿈밭을 헤매이게 될것이라는 막연함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꿈이였다고 생각하기엔/너무나도 아쉬움 남아/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너무나도 멀어진 그대/사랑했던 마음도/미워했던 마음도/허공속에 묻어야만될 슬픈 옛이야기/스쳐버린 그날들/잊어야할 그날들/허공속에 묻힐 그날들   노래소리가 슬프다고 생각되였다. 정우는 고개를 들어 노래소리가 울리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생머리를 어깨에까지 드리운 하얀판에 연분홍 꽃잎이 자잘하게 박힌 원피스를 차려입은 녀인이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고있었다. 어느때 어디에서 와 그 자리에 서있는지 알수 없었다. 자기가 왔을 때 그녀가 이미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아니면 자기가 와서 강뚝에 앉은후에 그녀가 왔는지도 기억에 없었다. 하지만 노래소리가 그녀의 손에 들려진 핸드폰에서 울리는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서산으로 사라지는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해서인지 더더욱 가슴을 긁어대는 그림이고 노래였다. 무슨 아픈 사연이 있는것일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치는 순간 정우는 저도 몰래 뻘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야, 어쩌려구?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정우가 입가에 서글픈 웃음 한오리를 피워올리다가 갑자기 “아!” 하고 신음비슷하게 내뱉었다. 유희, 유희! 그 이름을 떠올리자 정우는 또 다시 가슴이 꺽 막혀오는것 같았다. 유희, 그녀는 과연 누구일가? 정우는 부랴부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어제밤, 정우를 쇼크직전에 몰아갔던 그 폭탄같은 메시지가 고스란히 핸드폰에 담겨있었다. “그날 너무 즐거웠어요. 영원히 잊지 못할거예요. 언제 또 당신에게 안길수 있을가요? 불러주세요. 유희가.” 정우는 뿌옇해지는 눈시울을 비벼가며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여전히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그만치 안해가 한국에 있었던 그 6년간, 정우는 어느 녀자에게 눈길 한번 더 준적이 없었던것이다. 그날이라니? 영원히 잊지 못한다면 그날 꼭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건데… 아니야, 이건 아니야? 정우는 다시한번 힘껏 머리를 저으면서 핸드폰메시지창을 열었다. “메시지를 받고 놀랐습니다. 누구시죠?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아요…” 정우는 주저없이 메시지를 날려보냈다. 만약 정말 자기와 관계가 있는것이라면 유희라는 그녀가 꼭 다시 메시지를 보내올것이라고 생각했다. 잊는다고 생각하기엔/너무나도 미련이 남아/돌아선 마음 달래보기엔/너무나도 멀어진 그대/설레이던 마음도/기다리던 마음도/허공속에 묻어야만될 슬픈 옛이야기/스쳐버린 그 약속/잊어야할 그 약속/허공속에 묻힐 그 약속      바다에 던진 돌멩이가 솟구쳐 오르기를 기다리는 소년처럼 핸드폰만 멍하니 바라보고있는 정우의 뒤로 슬픈 노래가락이 흘러지나고있었다. 정우는 본능적으로 핸드폰에서 눈길을 돌려 노래소리가 울리는 곳으로 가져갔다. 하얀 원피스였다. 하얀 원피스에 자잘하게 박힌 연분홍 꽃잎이 눈에 부셨다. 장미꽃잎인가싶었는데 그게 아니였다. 어디서 본듯싶으면서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 장미꽃잎보다도 더 작은 꽃잎이였다.   어디서 보았던가? 저 꽃잎을…   “에루와 어쩔씨구 좋구나 좋네/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춤을 추네…”   갑자기 귀전을 치는 노래소리에 정우는 깜짝 놀라면서 손에 들고있던 핸드폰에 눈길을 가져갔다.   “에루와 어쩔씨구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자치주 세웠네.”   아, 전화다!   정우는 허둥지둥 핸드폰을 귀가에 가져다댔다.   유희, 그녀다.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순간에 스치는 생각이였다. 가슴이 벌렁벌렁 파도를 탔다.   ―여여, 여…보세요…   ―개뿔, 여보는… 밥시간이 다 됐는데 어디서 뭐하고있는거야?   헉!   정우는 전신으로 한가닥의 한기를 느꼈다.   ―다…당신.   ―왜? 퇴근시간이 지난지 언젠데? 기여와도 그새면 집에 다 왔겠다.   안해의 목소리에는 큰 가시가 떡하니 박혀있었다. 정우는 무엇에 목구멍을 꽉 막히운듯 도무지 소리를 뽑아낼수 없었다. 핸드폰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 들어와? 어디서 뭐하고있는거야? 재밌어?   정우는 바락바락 후벼대는 안해의 목소리를 가름하며 핸드폰을 쥔 손을 스르르 내리웠다. 머리속이 바퀴벌레 백마리에게 짓밟히듯 어지러워났다. 정우는 천천히 무릎우에 얼굴을 얹었다. 안해의 가시 박힌 목소리가 어디나를 가리지 않고 팍팍 찍어대는것 같았다.   안해의 목소리가 6년전에도 그렇게 앙칼졌던지 아니면 한국에 가있는 6년 사이에 그렇게 앙칼스러워 졌는지 기억에 없었다. 아니, 안해의 목소리가 어떨 때 그렇게 앙칼지게 변하는지 가늠할수 없다는게 나을것이였다. 지난밤, “죽여, 죽여버리라구. 쾅쾅 밟아버리라구!” 하던 그 목소리는 앙칼지다기보다 열광에 가까왔다고 생각되였다. 6년만에 만난 안해는 그대로가 어느때 터질지 모를 활화산이였다. 활화산을 옆에 두고 산다는것은 그 자체가 고문이였다. 그런 고문은 안해가 집에 도착했던 첫날밤에 벌쎄 예언된것이였다. ―당신, 어떻게 참았어? 샤와를 마친 안해가 “천사의 날개”를 나풀거리며 다가와 정우의 목을 끌어안고 던진 첫 마디였다. 어떻게 참았지? 코등이 시큰해났다. 지나간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정우는 입가에 가는 웃음을 피워 물며 안해의 손을 당겨다 무릎에 앉쳤다. 안해가 오른손식지를 정우의 왼쪽볼에 가져다댔다. ―주름이 생겼다, 당신. 안해의 오른손식지가 정우의 얼굴을 오리기 시작했다. 정우는 가볍게 쉼을 몰아쉬며 안해를 끌어안은 두팔에 힘을 넣었다. ―당신, 고생 많았어. 진심이였다. 언제나 안해를 떠올리기만 하면 자기가 부족해서 안해를 한국에 보내여 고생시키는것이라고 랭가슴을 앓던 정우였다. ―고생? 고생도 고생이지만… 후― 얼마나 그리웠는데. 돈이 뭐길래… “돈이 뭐길래”라는 그 말이 폭탄이였다. 3년전의 그날밤, 안해의 전화를 받았을 때처럼 아래도리에서 뭔가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였다. 정우는 안해를 끌어안았던 두팔을 풀면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괜히 목에서 겨불내가 나는것 같았다. 정우는 급히 주방으로 들어가 랭수를 받아 꿀꺽꿀꺽 들이켰다. ―당신, 뭐해? 안해가 소리쳤다. 하지만 정우는 안해의 곁으로 가기 두려웠다. 정우는 쏘파로 다가와 담배갑을 주어들며 힘끔 안해를 훔쳐보았다.기껏해서 5초가 될가 말가한 순간이였지만 안해는 벌써 정우의 기색에서 뭔가를 짚어낸것 같았다.안해의 정우의 오른팔을 당겨다 곁에 앉혔다. 정우는 말 잘 듣는 막둥이처럼 안해가 당기는대로 쏘파에 엉뎅이를 붙였다. 안해의 손이 갑자기 정우의 그곳을 치고 들어왔다. 정우는 다시한번 흠칫 몸을 떨었다. 안해의 동공이 커지고있었다. 놀라움과 야릇함이 반죽되여 있었다. ―당신, 너무 긴장한게 아니야? 안해가 근심이 어린 눈길로 정우를 쓸어보고있었다. 정우가 오른 손을 들어 과장된 동작으로 손부채질하며 한마디 했다. ―덥네. ―더워? ―응, 땀이 나! ―개뿔… 한밤중에도 이렇게 덥네. 그 말에 정우가 안해에게 눈길을 돌렸다. 안해의 입에서 그같이 험한 소리가 나온다는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6년전, 정우의 머리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안해의 목소리는“당신, 나 없이 살수 있어요?” 하던 바스음이였다. 그 목소리에는 근심과 불안함이 가득 묻어있었다. 그 불안한 목소리가 머리에 남아 무시로 정우를 괴롭혔었다. 그 마음 여린것이 어디 가서 사람들에게 업수임을 당하는것은 아닌지? 업수임을 당해 팡팡 울고있는것은 아닌지? 내내 그런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듯 아팠던것이다. 그때면 자기가 무능한것 같아 자신이 그렇게 미울수가 없었다. 6년간, 무시로 그렇게 자기의 가슴을 꼬집은것이 몇번이던지 정우로서도 가늠할수 없었다. 하지만 6년이 지난 그 시점에 정우가 느낀것은 아픔과 련민만이 아니였다. 그 6년간 안해는 변해이썼다. 정우는 몰라보게 변해버린 안해로 하여 일종의 두려움을 느끼고있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도 멀어져버린 그대”처럼 느껴졌다. 안해가 돌아온후의 그 한달간, 정우는 벌써 여러차례나 안해가 무섭다고 느껴졌었다. 그래서인지 그 한달간 정우는 한번도 밤일에 성공하지 못하고있었다. ―이 물알아, 그것도 못 넣어? 코앞에서… 잔뜩 거칠어진 목소리가 정우의 귀속에 날아와 박혔다. 정우는 흠칫 하면서 소리나는쪽에 머리를 돌렸다. 아까 올 때 보았던 그 애들이 그때까지도 광장에서 뽈을 차고있었다. 뚱뚱하게 생긴 애가 또 제앞에 굴러온 뽈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모양이였다. 그래서 많이 주눅이 든것 같았다. 상대가 분명 자기보다 약해보이는데도 뚱뚱하게 생긴 그애는 멀거니 그애를 바라만 볼뿐이였다.어쩐지 보고싶지 않은 그림이라고 생각되였다. 정우는 그애들로부터 천천히 머리를 돌리고 괜히 입술을 감빨다가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에루와 어쩔씨구 좋구나 좋네/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춤을 추네…” 흥겨웠다. 흥겨워서 특별히 벨소리로 다운받은것이였다. 하지만 그 순간 정우는 도무지 흥겨움을 느낄수 없었다. 괜히 그 노래를 벨소리로 다운받은것이 부아통이 터질것 같았다. 하지만 벨소리가 울리는 핸드폰을 그때문에 받지 않을수도 없었다. 정우는 약간 떨리는 손을 호주머니에 가져다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당금 안해의 앙칼진 목소리가 고막을 치는것 같았다. 잠간이라도 늦게 그 소리를 들을수 있었으면 좋을것 같았다. 정우는 액정에 눈길을 박으며 찬찬히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얼핏 떠오르지 않는 번호였다. 누구던가? 맞아! 정우는 오른손에 쥐고있던 핸드폰을 급히 왼손에 바꿔지고 다시 전화번호를 살펴보았다. 틀림 없었다. 전화는 바로 유희가 걸어온것이였다. 4 ―뭐뭐, 뭐라구요? 정우의 눈동자가 한정 없이 커지고 목소리가 필요이상으로 높아졌다. “뭐라구요?” 하면서 동그랗게 벌린 입이 다물어 지지 못한채 그대로 동그라미를 그리고있었다. 전화저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정우가 소리쳤다. ―뚱퉈우(东头)에 있다구요? 유…유희다방이? 네? 정우가 “네?”하며 물음표에 악센트를 가할 때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정우는 뚜―뚜― 전류소리만 간간히 들려오는 핸드폰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절레절레 머리를 저으며 입을 쩝쩝 다셨다.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다방이라구? 그럼 유희가 다방마담이라도 된다는 얘기인데… 뚱터우에 있다구? 정우는 동쪽교외를 떠올려보았다. 아직 건설이 잘 안되여 스산한 동네가 눈앞에 펼쳐졌다. 정우는 평소 동쪽교외로 가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언제쯤이였던가? 동쪽교외에 산다는 중학교때 동창을 만나러 간것이 3년전이였던지 4년전이 였던지 기억에도 아리숭했다. 그게 전부였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곳에 가 다방출입을 한 기억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게 말로만 듣던 “어장관리”? 눈먼 낚시로 고기를 낚아다 자기 어장에 던져넣으려는 다방마담의 꼬임수란 말인가? 정우는 괜히 부아통이 터지려고 했다. 유희라고 부르는 괘씸한 그 마담을 만나 건침이라도 탁 뱉어주고싶었다. 뚱터우라고 했지? 정우는 주저없이 길옆으로 달려가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로 모실가요? 택시기사가 깎듯이 물어왔다. ―뚱터우, 유희다방. 잠간 어리둥절해 있던 택시기사가 인차 얼굴에 웃음을 띠웠다. ―아, 유― 유희다방… ―알아요, 유희다방? ―그런 이름 들은적이 있는것 같아요. 뚱터우 고물시장곁에서요. 택시기사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정우는 그 말을 들으면서 두눈을 살풋이 감고 의자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생각할수록 한심한 세상이라고 느껴졌다. 옛날 어른들이 “눈감으면 코라도 베갈 세상”이라는 말을 자주해서 설마 하고 생각했더랬는데 그게 아닌것 같았다. 자기의 행동이 대방에게 어떤 폭탄이 될지를 생각지도 않고 그 같은 메시지를 함부로 날리는 유희와 같은 녀자들은 코가 아니라 심장이라도 눈 한번 깜빡 하지 않고 도려낼수 있을것 같았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택시기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우를 불렀다. ―아, 네. 정우는 급히 값을 치르고 택시에서 내렸다. 한국 녀배우 리영애의 사진오른쪽으로 “유희다방”이라는 글이 궁서체로 찍혀진 자그마한 간판이 눈에 뜨였다. 6층짜리 건물의 1층이였다. 정우는 인차 안에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두루 살펴보았다. 아빠트앞으로 포장도로가 나있었는데 언제 부설한것인지 콩크리트가 떨어져 곳곳에 웅뎅이가 패여있었다. 그 웅뎅이에 비물이 고여 섞으면서 악취를 풍기고있었다. 아빠트서쪽에는 큼직한 쓰레기상자가 놓여져있었는데 비닐봉지들이며 종이곽들이며 지어는 음식물찌꺼기들까지 주변에 널려있었다. 청승스러운 주변환경은 실로 다방과 어울리지 않았다. 정우는 알겠다는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테지. 이런 곳에 자리 잡은 다방에 손님이 많을수가 없지. 마담도 별수없어서 그런 얄팍한 수를 생각해낸거겠지. 정우는 얼굴에 씁쓸한 웃음을 피워 올리며 느릿느릿 다방으로 들어갔다. 붉으스름한 조명이 침침하게 비추는 방안의 오른쪽켠 카운터앞에 20대초반의 한 처녀가 서있었다. ―어서오세요. 정우는 그녀에게 눈길을 돌리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마담을 찾았다. ―아, 네. 로반(老板)님을 찾으세요? 오늘 나오시지 않으시는데요. 정우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얼마나 존경했으면 구구절절 존경어로 도배를 할가? 아무렴… ―마담이 무슨 분부가 없었소? 정우가 다시한번 무뚝뚝하게 물었다. ―없었는데요. “로반님이 나오시지 않으시는데요.” 할 때보다 조금 날이선 목소리였다. 정우는 빠알갛게 립스틱을 바른 그녀의 입술에 잠간 눈길을 주었다가 돌리면서 말했다. ―들어가 기다리겠소. 마담하구 약속이 있었으니까. ―그럴리가요. 카운터처녀의 목소리가 또 한옥타브 높아졌다. 그 목소리가 저으기 귀에 거슬렸다. ―왜? 안 믿어? 카운터처녀가 입가에 쌀쌀한 웃음을 피워올렸다. ―로반님은 오늘 할빈으로 가셨어요. 친척집동생이 결혼식을 한대서요. 그런 로반님께서 어떻게 약속을… ―뭐요? 그럼… 정우가 말끝을 흐렸다. 유희가 전화에서 정우를 “유희다방”으로 오라고 했을뿐 자기가 “유희다방”의 마담이라고 말하지 않은것은 사실이였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정우는 다시 부아통이 터지려고 해서 괜히 입술을 소리나게 감빨다가 머리를 저으며 두덜거렸다. ―마담이라도 되는것처럼… 왜 하필 유희야? 유희다방은 또 뭐구… 일시 어쩔바를 모르고 서성이던 정우가 결심을 내린듯 다방을 나서려고 하는 찰나, 출입문이 열리며 하얀 원피스가 들어섰다. 하얀 바탕에 연분홍 꽃잎이 자잘하게 박힌 원피스였다. ―아! 놀라움이 아니였다. 흥분도 아니였다. 다만 본능적으로 “아!”소리가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정우의 입에서 튀여나왔을뿐이였다. 정우는 왼쪽으로 한발 비켜섰다. 하지만 눈동자는 되려 하얀 원피스를 따라 움직였다. 원피스가 카운터로 다가가더니 오똑 멈춰섰다. ―조용하고 깨끗한 방 있어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남실거려 강변에서 보았던 그 슬픔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람의 표정이 때에 따라 이렇게 판이하게 변할수 있다는게 놀라울따름이였다. 카운터에 섰던 처녀가 하얀 원피스를 안내했다. 하얀 원피스가 카운터처녀를 따르며 말했다. ―이제 한 중년선생이 와서 유희를 찾을거예요. 들여보내주세요. 유희? 유희! 저 녀자가… “숙명”이라는 엄숙한 낱말이 정우의 머리를 치고들어왔다. 어떤 이야기가 이제 곧 펼져지게 될것이라는 예감을 밀어버릴수 없었다. 정우는 하얀 원피스를 따라 걸음을 재우치다가 그녀가 들어간 방문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멍하니 출입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얼굴을 들어 빠알간 조명이 수집게 내리비추는 천정을 쳐다보았다. 순간이였다. 머리속에서 찰칵 하고 볼륨이 켜지는 소리가 울리는듯 했다. 꿈이였다고 생각하기엔/너무나도 아쉬움 남아/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정우의 입에서 노래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래된 고장난 축음기에서 흘러나오기라도 하는듯 곡조가 파도를 타고있었다. 카운터처녀가 문을 열고 나오다가 웬 일이냐는듯 정우를 지켜보았다. 정우는 그녀가 보든 말든 관계치 않고 계속 노래를 불러댔다. 설레이던 마음도/기다리던 마음도/허공속에 묻어야만될 슬픈 옛이야기 카운터처녀가 살래살래 머리를 저으며 카운터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화답이라도 하는듯 방안에서 노래소리가 울렸다. 스쳐버린 그날들/잊어야할 그날들/허공속에 묻힐 그날들 정우는 드디여 접선을 이루어낸 특무처럼 주저없이 문을 밀고 들어섰다. ―오셨네요. 그녀가 사쁜 쏘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정우쪽에 얼굴을 돌렸다. 아까 “조용하고 깨끗한 방 있어요?” 하고 물을 때 얼굴에서 남실거리던 웃음은 오간데 없고 강변에서 보았던 그 우수와 슬픔과 처량함만이 얼굴 가득 어려있었다. 정우는 자기가 두눈을 펀히 뜨고 백만갈래의 미궁속으로 빠져드는듯해서 정신이 흐릿해났다. ―초면인것 같은데요. 정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초면이죠.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듯 미약했다. ―잘못 보낸거죠? 정우의 목소리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잘 간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에 확신이 어려있었다. ―네? 정우의 동공이 한껏 커졌다. 카운터처녀가 차주전자를 들고 들어섰다. ―고마와요. 그녀가 카운터처녀에게 머리를 끄떡해보였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카운터처녀가 허리를 다소곳이 숙여보이고는 문을 나섰다. 하얀 원피스의 그녀가 다시 일어나 차주전자를 잡더니 허리를 굽히고 정우의 앞에 놓인 잔에 차물을 부으며 물었다. ―선생님은 믿어요? ―뭘요? ―인연, 운명… 이러루한걸요. ―글쎄요. ―난 오늘 이런것들을 믿기로 했어요. 그녀는 자기의 잔에 차물을 채워놓고는 조용히 쏘파에 엉뎅이를 대였다. 그 시각 그녀의 얼굴은 세상의 모든 잡념을 벗어버린듯 그처럼 담담해보였다. 아니, 세상의 모든것을 체념한듯한 표정이였다. 정우는 어떻게 허두를 뗄가고 망설이며 입술을 감빨다가 더듬거렸다. ―그럼… 우리가 인연이 닿았다는… 그렇게 리해해도… 정우가 말을 끊고 그녀를 살폈다. 두눈을 꼭 감고있었다. 왼쪽눈까풀이 파들파들 떨리고있었다. 그녀가 오른손을 가슴쪽으로 올려가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빨간 혀를 날려 빨간 입술을 쓸었다. ―한국에 갔다가 5년만에 돌아왔어요. 빠알간 색으로 섬세하게 디자인된 빠알간 록음기에서 흘러나오는듯한 바스음이였다. ―그새 한국에서 번 돈을 한푼도 남김없이 몽땅 남편에게 부쳐보냈더랬죠. 그만치 남편을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몽땅, 깡그리 믿었던거죠. 얼마전에 귀국했어요. 집을 사고도 30만원쯤은 남았을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돈으로 자그마한 옷가게나 하나 차려놓고 남편과 아기자기 살아보려고 꿈을 꿨지요. 하지만 남편이 그새 내가 돈 벌어 산 집에서 내가 보낸 돈을 가지고 다른 녀자를 품고있을줄을 어찌 알았겠어요. 미칠것만 같았어요. 하늘이 무너지는듯싶었어요. 그 사실이 밝혀지던 그날밤, 나는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어요. 정처없이 거리를 헤맸죠. 맥이 지나자 무작정 찾아든게 이 다방이였어요. 맥주를 불렀어요. 한병 또 한병… 사는게 마치도 유희를 노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열심히 돈을 버는데 그 사람은 제놀음에만 빠져 그 돈을 탕진하고… 얼마나 허무하고 재미나는 세상인가요? 그래서 나도 유희를 놀아보고싶었어요. 그래서 그 같은 메시지를 작성해서 무작정 손이 가는대로 번호를 찍어 날려보냈죠. 유희다방! 이름이 얼마나 로맨틱해요? 그래서 이름을 유희라 달았구요. ㅋㅋㅋ…ㅋㅋㅋ… 그 돌멩이에 선생님이 맞은거예요, 선생님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우는 눈앞에서 탁탁 튀여오르는 무수한 오각별들을 보고있었다. “아, 예” 하고 볏 한번 달아볼 새 없이 그녀의 말에 끌려 어디론가 둥둥 떠가는듯싶었다. ―바보처럼 말이죠. 바보천치처럼 말이죠. ㅋㅋㅋ… 그녀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아, 예! 그제야 정우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더듬거렸다. ―유흰거죠. 모든게 유희예요. 유희! ―유희요? ―그럼요, 유희! 우리도 유희 한번 놀아볼가요? 그녀가 와락 정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 정우는 헉 들숨을 끌며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그녀를 밀쳤다. ―유희라니까요. ―이…이러시면 안됩니다. ―산다는 자체가 유희죠. 그녀가 다시 정우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덮쳤다. ―헉! 순간 정우는 짜릿한 전률을 느꼈다. 천만 볼트의 고압선에 툭하고 몸이 맞혀 쾅 하고 터져버리는것 같았다. 정우는 으스러지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부르르 몸을 떨며 가슴을 밀착해왔다. 정우는 벌떡 뛰여일어나 무작정 그녀를 쏘파에 쓰러뜨렸다. 급히 바지춤을 내렸다. 그녀가 흑흑 느끼며 팬티우로 그 물건을 잡아쥐였다. ―허억! 갑자기 정우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여나왔다. ―아악! 그녀가 괴성을 뽑았다. 뿌우연 액체가 그녀의 손바닥을 적시고있었다… 5 그녀의 눈빛이 타고있었다. 점도록 정우를 올려다보며 활활 눈빛을 태우고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일종의 막연함이 커다란 물름표로 되여 걸려있었다. 정우는 감히 그녀의 눈동자를 정시할수 없어 머리를 숙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흥건히 젖은 팬티의 그 부분이 유난히도 눈길을 끌었다. 정우는 급히 손바닥을 쫙 펴서 팬티의 그 부분을 가리웠다. 밑에 놓인 왼손바닥이 축축하게 느껴졌다. 정우는 급히 팬티에서 손을 떼고 허리를 굽히면서 허벅다리에 걸려있는 바지춤을 찾아쥐였다. -병원에 가보세요, 그녀가 쏘파에 일어나 앉아 함에서 종이 몇장을 뽑아들고 손바닥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네? 정우가 혁띠를 찾다 말고 굳어지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흠칫 놀라는 정우를 일별하던 그녀가 왼손에 쥔 종이를 오른손에 옮겨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비벼댔다. 종이가 동그랗게 모양을 잡아갔다. 그녀는 공들인 작품을 감상하듯 동그란 종이말이를 눈앞에 가져다 잠간 들여다보더니 쓰레기통에 훌 던져넣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병원에 가보시라구요. 어쩜 선생님이 무슨 병에 걸렸을수도 있어요. -네? 제가요? 정우가 그녀쪽으로 머리를 돌리며 “요?”에 악센트를 주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였다. 그녀는 인차 대답을 하지 않고 정우의 얼굴에 이윽토록 눈길을 박고있다가 입가에 가는 웃음 한오리를 피워올리며 말했다. -괜한 소리를 한것 같아요, 제가... -네, 아니요. 제가 일시 리해를 못해서요. 정우는 진정으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듯한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녀가 빠알간 혀를 내밀어 빠알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한번 살랑 핥더니 물었다. -오래됐어요? -뭐가요? 정우는 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듯 다잡아 물었다. 그녀는 다시한번 입술을 깜발고는 “후우-”하고 긴 한숨을 내뿜더니 살래살래 머리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욕망뿐이겠죠? 그 욕망이라는것이 있었기에 고통스러웠을거구요. 말을 마친 그녀는 쏘파에 등을 기대며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정우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감을 잡은듯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당황했습니다. 당황할수록 더 당황한 일만 생기더라구요. 그녀가 살며시 두눈을 뜨면서 정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우는 혁띠의 네번째 구멍을 찾고있었다. -6년이였습니다. -6년이였다구요? 그녀가 복창을 하듯 정우의 말을 받았다. 정우는 혁띠의 걸침을 찾아쥐고 말했다. -6년만에안해가 돌아온 그날밤, 처음으로 당황한 일을 겪었더랬죠. -그랬었군요. -네. 그랬습니다. 365일이 여섯번 흘러가는 동안이였죠. 이 말을 하면서 정우는 자기의 목소리에 일종의 익살같은것이 섞여져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익살스러움을 느꼈던지 그녀가 정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만족했나요? -만족이요? 정우가가 어설프게 웃음 한송이를 입가에 꽂으며 담담하게 되물었다. -녀자들은 그래요. 습관되면 덤덤해지거든요. 하지만 습관되기가 그토록 힘든거죠. -힘들어요? 그럼 습관 못될수도 있겠네요? 역시 “요?”에 악센트를 주는 정우를 바라보며 그녀는 또 한번 입가에 웃음 한오리를 피워물었다. 아까 “제가요?” 하고 되묻던 정우의의 물음에 보내던 웃음보다 약간 짙어보였는데 어쩌면 장한 일을 해놓고 “잘했죠? 제가요.” 하고 엄마에게 묻는 아들놈을 련상하는듯해보였다. 그녀는 혁띠의 네번째구멍을 찾아 걸침까지 든든히 걸어 잠근 정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못될수도 있겠죠, 습관이. 녀자도 그렇구 남자도 그렇구... 억지로 습관을 하느라면 병이 생기죠. 남편을 떠나 한국에 가 있는 녀자들중 수란관에 종기가 생기는 경우가 그렇게 많대요. 그때문에 그녀들은 갱년기를 빨리 맞구요. 그렇게 자기를 죽여가면서 돈을 버는거죠. 남자들은 어때요? 6년간 와이프랑 떨어져있으면 남자들은 어떻게 돼요? 그 물음을 그처럼 담담하게 물을수 있는 그녀로 하여 정우는 분노를 느꼈다. 어쩌면 그녀가 “6년간 꿀단지에 혀를 안대면 어떻게 될가요?”하고 엉뚱한 수수께끼라고 내는듯싶어서 한심하게 생각되였다. 이 녀자가... 뭐 하자는거야?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일시 어떻다고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있을 때 그녀가 또 입을 열었다. -남자들도 병이 나겠죠. 병이 안나자고 우리 집 그 물건은 고삐를 벗어난 들말처럼 그렇게 날쳤겠지만. 푸하하... 잠간 말을 끊은 그녀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쳐올렸다. 정우는 순간 온몸으로 한기를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웃음소리에 걸맞지 않게 질려있었다. 그녀는 툭툭 소리나게 주먹으로 자기의 가슴을 몇번 두드려대더니 어-흠- 건가래를 떼면서 아래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지금 병에 걸렸어요. 큰 병이 들었다구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 차탁에 올려놓았던 핸드백을 주어들고 정우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병원에 가보세요. 환자는 응당 병원에 가야 해요. 말을 마친 그녀는는 몸을 돌려 문쪽으로 다가가더니 다시한번 정우를 돌아보며 살짝 웃고는 문을 밀었다. 툭 하고 문이 닫기는 소리를 들으면서 정우는 쏘파에 털썩 주저 앉아 지그시 두눈을 감아버렸다. 숨소리만 간간히 들려올뿐이였다. 분명 숨소리를 들으면서도 정우는 숨쉬기가 가빠 가슴이 터질것 같았다. 정우는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치다가 푸 하고 크게 숨을 토하고는 벌떡 쏘파에서 일어났다. 붉으스름한 조명이 괴괴하게 내리비추는 방안이 당금 터지려는 또치카를 방불케 했다. 당장 그 숨막히는 공간을 벗어나고싶었다. 한시라도 더 그 공간에 몸을 담고있으면 그대로 폭발해버릴것 같았다. 정우는 카운터쪽으로 다가가면서 돈지갑에서 오십원짜리 돈 한장을 꺼내들었다. 카운터처녀가 문소리를 듣고 정우에게 얼굴을 돌렸다. 정우는 카운터처녀와 눈 한번 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면서 돈을 카운터에 던졌다. -하셨어요. 카운터처녀가 소리쳤다. 정우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카운터쪽에 눈길을 던지며 소리쳤다. -언제 했어? -방금 하셨어요. 카운터처녀의 목소리가 챙챙하게 울렸다. 하지만 정우는 못 믿겠다는듯 소리쳤다. -안했어, 안했다구. -하셨다는데요, 방금 먼저 나간 녀사님이. 카운터처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정우는 또 다시 부아통이 터지려는 자신을 발견했다. -제가 뭔데, 제가 왜 해. 하기는... 정우는 씨엉씨엉 카운터로 다가가 돈을 확 집어들고는 다시 문쪽을 향했다. 카운터처녀가 웬 일이냐는듯 잠간 정우를 째려보다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한마디 했다. -징선삥(精神病)! 뭐야? 징선삥? 내가 왜 정신병이야? 왜왜... 정우는 마치도 스스로가 다시 헤여나오지 못할 수렁속에 말려들어가는것 같았다. 지푸라기라도 잡지 않는다면 머리카락한오리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져버릴것만 같은 두려움이 머리속을 엄습해왔다. -왜냐구? 내가 왜 정신병이냐구? 정우가 다방안으로 다시 들어가며 소리쳤다. 왜 그렇게 다시 다방안으로 들어가야 하는지는 그로서도 알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들어가 고래고래 소리지르고싶다는게 전부였다. 사람이 없는 카운터만 조용히 정우를 맞아주었다. 카운터를 지키던 그 처녀가 어디로 갔을가를 생각할 새도 없이 눈굽이 젖어들었다. 코등이 시큰해났다. 괜히 입술을 빡빡 긁어댔다. 닭똥같은 눈물이 둘둘 굴러내렸다. 정우는 손바닥으로 이리저리 두볼을 훔치며 급히 밖으로 뛰여나왔다. 머리를 푹 숙인채 어디라없이 씨엉씨엉 발걸음을 옮겼다. -앗! 정우가 급한 소리를 지르며 우뚝 멈춰섰다. 길옆에 누군가 자전거와 함께 너부러져있는것이 보였다. 왼쪽어깨로부터 시큰시큰 통증이 느껴졌다.자건거와 함께 쓰러져있던 사람이 기여일어나며 소리쳤다. -쌰촹싸야? 메이짱 얜징아?(瞎闯啥呀?没长眼镜啊?) 나이 지긋해보이는 중년 녀인이였다. 정우는 다가가 부축하려다가 우뚝 멈춰섰다. -찡선삥(精神病). 중년 녀인이 자전거를 일으키며 앙칼지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 욕지거리를 들으면서 정우는 순간 쿡 하고 웃음을 뽑아올렸다. 뭐, 정신병이라구? 또 날보구 정신병이라구... “쑈신댈, 뿌왠이따리니(小心点,不愿意搭理你). 중년 녀인이 궁시렁거리며 자전거에 훌쩍 뛰여오르더니 힘있게 페달을 밟았다. 어둠속으로 살아지는 그녀의 뒤모습을 바라보면서 정우는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보고있었다. 왜 모두들 나를 보고 병에 걸렸다는거야? 정말 병에 걸린거나 아닐가 하는 생각이 그렇게 처음으로 정우의 머리속을 치고들어왔다. 설마... 정우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으면서 얼굴을 쳐들었다. 촉수 낮은 가로등빛이 괴괴하게 거리를 비추고있었다. 정우는 연신 두눈을 슴뻑거리면서 멍하니 가로등을 쳐다보았다가로등도 아무 표정 없는 눈길로 정우를 내려다보는것만 같았다. 분하고 억울하게 느껴졌다. 내가 왜 병에 걸린거야? 6년간 착실하게 출근을 하고 때가되면 아귀아귀 밥을 먹고 감기 한번 하지 않았는데... 풀떡풀떡 뛰는 그 놈을 어르느라 허구한 날 팔힘은 얼마나 뺐다구...이렇게 건장한 나를 왜 모두 병에 걸렸다고 하는거야? -에루와 어쩔씨구 좋구나 좋네 핸드폰이 갑지기 노래를 시작했다. 정우는 흠칫 놀라면서 잡생각에서 헤여나와 급히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액정에 “마누라”라고 떠있었다. 장백산날씨처럼 한순간에도 검으락 푸르락 해지는 안해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서 선뜻 핸드폰을 받을수 없었다. -장백산도 노래하고 해란강도 춤을 추네 핸드폰은 정우의 기분 같은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흥겨워했다. 정우의 머리가 손을 향해 어서 핸드폰을 받으라고 지령을 보내고있었다. 정우는 핸드폰의 수신버튼을 누른후 천천히 귀가에 가져다댔다. -당신, 어디야? 천둥번개가 아니여서 다소 시름은 놓였지만 인차 어떻게 대답할수 없었다. 정우는 잠간 말을 끊고 멍하니 가로등을 쳐다보다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여여... 여기 있잖아, 병원이야. -뭐? 병원? -그래, 벼...병원. -병원엔 왜 갔어? -여보, 나...나나... 병에 걸렸대. 그래서 지금 여기서 링겔을 맞고있어. -...... 당금 터져버릴것 같은 침묵이 핸드폰에서 흘러나왔왔다. 안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안해가 자기의 말을 믿어줄가가 궁금했다. 흐흥- 코웃음이 터졌다. 링겔을 맞는다구? 내가 지금 링겔을 맞는다구? 정우는 그렇게밖에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이 그렇게 못나고한심해보일수 없었다. 정우는 오른쪽 귀에 댔던 핸드폰을 왼손에 바꿔쥐였다. 숨소리마저 죽이고 핸드폰을 왼쪽귀에 꼭 가져다댔다. 적막감은 여전히 핸드폰을 타고 정우의 가슴에 흘러들고있었다. 순간 말 못할 두려움이 스멀스멀 정우의 머리속으로 기여들었다. -여...여보. 정우는 기여들어가는듯한 목소리로 안해를 불렀다. -알았어, 큰 병이 아닐거야. 안해의 목소리가 떨린다고 생각되였다. -그래, 큰 병은 아닐테지. 정우는 그 말이 안해를 위로하는것인지 자기를 위로하는것인지 스스로도 알수 없었다. 안해의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그렇구 말구. 큰 병일수 없지.당신, 원래 강한 사람이였잖아. 그 말을 들으면서 정우는 문뜩 “당신, 나 없이 살수 있어?” 하고 묻던 6년전의 안해의 그 목소리를 떠올렸다. 부지중 안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내가 못난거잖아? 내가 못나서 와이프를 외국에 돈 벌러 보낸거잖아? 한달전, 비행기에서 금방 내린 안해의 손을 잡고 이 생각을 한번 해본후로는 처음인것 같았다. 그 여리던 사람이... 제대로 습관이 되였을가? “억지로 습관을 하느라면 병이 생기죠. 남편을 떠나 한국에가 있는 녀자들중 수란관에 종기가 생기는 경우가 그렇게 많대요. 그때문에 그녀들은 갱년기를 빨리 맞구요. 그렇게 자기를 죽여가면서 돈을 버는거죠.” 그 순간 새삼스럽게도 아까 다방에서 그녀가 하던 말이 머리속에 떠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당신, 괜찮아? 정우가 저도 몰래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안해의 대답이 인차 날아왔다. -괜찮지, 나는. 알았어, 근심 말구 링겔을 다 맞구 집에 와. 기다리고있을게. 안해는 말을 마치고 일방적으로 핸드폰을 꺼버렸다. 그래, 여기는 병원이야. 그런 생각이 머리를 쳤고 이어 기분좋게도 말 못할 해탈감이 느껴졌다. 그래, 아직도 한시간쯤은 여기 있어도 되는거야. 아직도 한시간쯤 지나야 링겔 한통을 다 맞을수 있는거야. 정우는 만부하로 당겨졌던 탕개가 스르르 풀리는듯하면서 다리맥이 빠지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정우는 그곳이 가로등밑이라는것도 잊고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나는 지금 링겔을 맞고있는거야. 그래. 링겔 한통만 뚝딱 맞고 나면 나는 예전처럼 강하게 변할수 있을거야. 정우는 한없이 넓은 정글속에서 껑충껑충 뛰여다니는 자기를 보고있었다. 아니, 분명 자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갈기를 잔뜩 세운 수사자였다. 자기라고 생각되는 그 수사자가 수많은 암사자들을 끌고 위무당당하게 정글을 누비고있었다. 6    -가자, 우리. “우리”라는 말이 참 다정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면서 정우는 두눈을 번쩍 떴다. -힘들었지? 우리 집에 가자. 말을 마친 안해가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오른손식지를 빨간 립스틱을 진하게 바른 입술사이에 물렸다. -다다, 당신이... 정우는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안해가 입에 문 오른손식지를 배배 돌리다가 정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끝났어. 끝났다구. 유희는 이제 끝난거야. -뭐? 뭐뭐... 유희? -유희가 끝났으니 이제 우리 행복하게 잘 살 일만 남은거야. 안해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들렸다. -당신, 어떻게 알고 여기 왔어? 여기… 정우는 그제야 뭔가 심상치 않다는것을 의식하면서 한껏 동공을 키워 안해를 바라보았다. 안해가 말없이 정우의 손을 꼭 잡아쥐고 흔들더니 목소리에 힘을 담아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나, 다시 한국에 나가지 않을거야. 여기서 당신하구 제대로 한번 살아볼거야.
7    중편소설 * 탈 댓글:  조회:2253  추천:0  2013-04-03
중편소설     탈   최동일     1   탈을 쓰고있었다. 하얀 바탕에 관골에다 빨간 칠을 진하게 한 탈밑으로 가늘고 긴 목이 흘러 내렸고 그 목이 다하는 곳으로부터 하얀 피부의 녀체가 무연하게 펼쳐졌다. 젖무덤이 풍만하다는 생각이 마지막이였다. 그 생각을 이어 하늘이 노랗게 번져가면서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고 속에서는 꾸역꾸역 열물이 치솟았다. 정우는 오른손바닥을 쫙 펴서 명치끝을 꼭 누르고 허둥지둥 화장실로 달려들어가 변기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달려올 때는 내장이 그대로 쏟아질것 같았지만 던져지는 걸레처럼 변기에 머리를 틀어박고보니 그렇다할 내용물이 나오는것도 아니였다. 꽥꽥 연신 헛구역질만 터질뿐이였다. 정우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상체를 지탱한채 두손으로 변기의 변두리를 잡고는 힘껏 머리를 숙이면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무엇이라도 토해보려고 바득바득 애를 썼다. 하지만 여전히 요란한 소리만 날뿐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선뜻 일어설수도 없었다. 일어나려고 머리를 쳐들면 다시 속이 들볶였다. 정우는 변기에 머리를 박은채로 두눈을 꼭 감았다. 토닥토닥… 심장 뛰는 소리가 귀전에 들리는듯싶었다. 이대로 눈을 뜨지 못하는거나 아닐가? 심장 뛰는 소리와 함께 이런 엉뚱한 생각이 뇌리를 쳤다. 내장이 파도를 칠 때 같아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것만 같았었다. 진정하자, 잠간 진정하고 일어나자. 후―후― 정우는 변기에 머리를 박은채로 길게 숨을 내뿜었다. 그 바람에 역한 냄새가 직접 코속으로 날아들었다. 신듯하면서도 매운 맛이 섞인듯한 그 냄새는 사정없이 페부를 파고들더니 문뜩 정우로 하여금 비릿한 냄새를 떠올리게 했다. 꺽! 정우는 불시로 딸꾹질을 시작했다. 꺽꺽 딸꾹질이 올라올 때마다 비릿한 냄새가 가슴을 뻑뻑 긁었다. 정우는 가까스로 쳐든 머리를 좌우로 흔들다가 떨리는 왼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간신히 화장실을 나가 세면대에 다가섰다. 꺽꺽! 딸꾹질은 아까 파도를 치던 내장들보다 더 힘들게 잘근잘근 정우를 씹어주려는듯 무시로 가슴을 톺으며 올라왔다. 정우는 길게 들숨을 쉬였다가 그대로 뚝 호흡을 멈춰버렸다. 평소에는 그렇게 몇초가 지나면 딸꾹질이 멈출 때도 있었지만 그 시각엔 막힌 호흡때문에 가슴이 금시 뻥 하고 터질것 같은데도 멈추어주지 않았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갔다. 정우는 두손으로 세면대를 짚고서서 다시 두눈을 꼭 감았다. 꺽꺽꺽… 끝없이 올라오는 딱꾹질을 두고 정우는 스스로가 그처럼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참 하얬어. 백설같이 하얬단 말이야. 누구의 발길 한번 닿지 않은 백설 같았지. 련속 터지는 딱꾹질로 하여 몽롱한 머리속에서 문뜩 하얀 물체가 뭉게뭉게 솟아오르고있었다. 그 힘든 상황에서 “백설같은 그 모습”이 떠오른다는게 이상했다. 그래, 너무 하얘서 선뜻 다치기조차 두려웠었지. 하얬다구, 너무 하얬다구… ―너무하얘요. 백지장 같아요. 하얀게 탈이였어. 하얀데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줄로 알았었지. ―아저씨, 불편하세요? 병원 가보세요. 떨고있어요, 아저씨. ―뭐? 백설로 뒤덮인 하얀 계곡에서 들려오는듯한 그 조용한 목소리에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정우는 간신이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굴이 참 희다고 생각되였다. 그가 다가오고있었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를 내놓고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누구던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얼굴이였다. 정우는 세면대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려 그 얼굴을 다시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가 떨려 뜻대로 몸이 돌아서주지 않았다. 정우는 몸을 흠칫하면서 왼손을 뒤로 하여 다시 세면대를 짚었다. 그가 급히 손을 내밀어 비틀하는 정우의 어깨를 잡았다. ―조심하세요. 몹시 편찮은것 같은데 병원 가야죠. ―괜괜, 괜찮아요. 속이… ―속이 불편해서 딸꾹질이 나는거예요? 딸꾹질, 그게 진짜 힘든건데. 그가 정우를 향해 살짝 웃어보였다. 하얀 얼굴에서 빛나는 이가 눈부셨다. ―아니, 그런건 아니구, 종종 도지는 버릇이라서… ―그렇구나. “너무 하얘요. 백지장 같아요.” 하던 무거운 목소리가 아니라 한결 산뜻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그런 목소리로 그는 “아저씨, 딸꾹질하는 버릇이 있구나.” 하면서 또 한번 빙긋이 웃음을 피워 올렸다. 정우는 그 소리에 애써 얼굴을 펴면서 “아니…” 하고 한마디 던지고는 조심조심 목소리를 고르며 아래 말을 이었다. ―딸꾹질 하는 버릇이 아니구… ―그럼? 왜 이렇게 힘들어 하시죠? ―그게…그게… 정우는 뭐라고 해석을 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정우의 얼굴을 잠간 바라보던 그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놀랬잖아요? 방금은. 아, 아저씨 얼굴색이 그새 약간 피였어요. ―그래요? ―이상하네요. 얼굴색이 이렇게 빨리 변한다는게. 아저씨, 우리 저쪽 걸상에 가서 잠간 앉아요. 그가 정우의 팔을 부축하면서 말했다. ―좋겠네, 그게. 정우는 그에게 팔을 내준채 로비에 걸어 나와 걸상을 찾아 앉았다. 정적이 흐르는 공간에서 그의 숨소리가 고르롭게 정우의 귀전을 파고 들었다. 그 숨소리를 누르며 아까 보다 훨씬 뜸을 들여 딸꾹질소리가 들렸다. 그때마다 그는 머리를 돌려 정우를 훔쳐보았다. 정우도 그에게 눈길을 돌리다가 공중에서 그의 눈길과 부딪쳤다. 정우가 그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려는데 그가 먼저 “그림…”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림 구경 왔댔어요? 정우가 그 뜻을 넘겨 짚으며 앞질러 물었다. ―네, 김교수의 그림이 전시됐다기에. ―김교수의 그림을 좋아해요? 정우가 그의 말꼬리를 물고 다잡아 물었다. ―아니요. 그가 살래살래 머리를 젓다가 아래말을 이었다. ―김교수의 그림이 좋아서가 아니라 김교수라는분이 그리워서요. ―네? 김교수와 잘 아는 사인가요? ―그런것은 아니구요. ―그렇다면? 정우는 뒤말을 줄이며 그의 얼굴에 눈길을 박았다. 그가 얼굴을 붉히며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엮어나갔다. ―김교수를 떠올리면 저도 행복해져요. 김교수는 행복하던 저의 한 순간을 직접 보신분이거든요. 인젠 모두 추억으로 되였지만… ―네? 정우는 웬 일이냐는듯 힘 없는 두눈을 올롱하게 치뜨며 그의 얼굴에 눈길을 박았다. 그가 그 눈길을 피하며 물었다. ―이상하죠? ―뭐가? ―아저씨의 눈에 이 사람 참 이상하구나 하고 씌여져있는데요. ―아닐텐데. 내 눈에는 지금 힘들어, 너무 힘들어 하구 쓰여져있을텐데. 정우가 애써 목소리를 띄우면서 한마디 했다. ―그런것 같아요. 힘들어하는 모습이 얼굴에 력력하거든요. 하지만 궁금증도 똑똑히 보이구요. ―참, 재밌는 친구네.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했어요. 그때 저의 꿈이 화가로 되는것이였어요. 그의 목소리에 흥분이 실리고있었다. 정우는 삽시에 변하는 그의 얼굴을 지켜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었구나. 그럼 지금은 미대 학생? 몇살이지? ―스물 두살. 하지만 학생은 아닌데요. ―어, 뜻밖인데. 정우가 놀랍다는듯 두눈을 크게 뜨면서 입을 열었다. ―미술을 무척 좋아 하는것 같은데… ―좋아했죠, 학교때. 미술써클에 다녔었거든요. ―그랬었구나. ―김교수가 그때 우리 학교에 와서 미술써클조의 학생들에게 강의를 한적이 있었어요. 그때 김교수는 저의 우상이였어요. 며칠전에 인터넷에서 김교수가 미술전을 열었다는 기사를 본거예요. 그래서 오늘… 헌데 일부 그림은 맘에 안들어요. 그가 분명하게 자기의 의사를 밝혔다. 그 당당함에 또 한번깜짝 놀라면서 정우가 다잡아 물었다. ―어느 작품이 맘에 안들었죠? ―얼굴에 탈을 쓴 라체화요. ―왜죠? ―자기의 라체마저 보여줄수 있는 녀자에게 탈을 씌워준 화가의 저의는 무엇이였을가요? ―네? 화가의 저의요? 정우가 “저의”라는 두글자에 악센트를 주었다. ―그래요, 화가는 입으로 라체를 신성하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라체에 대하여 말 못할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있는거예요. ―어떤 뜻이죠? ―탈은 남에게 보여줄수 없는 치부를 감추고싶을 때 쓰는거 아닌가요? ―아! 정우는 그의 말에 뭐라고 확실하게 대답을 줄수 없어 입만 쩝쩝 다시다가 화제를 돌렸다. ―근데 왜? 그냥 미술공부를 하지. ―아, 그게… 그게… 됐어요. 아저씨. 설마 진짜 대답을 듣고싶은건 아니죠? ―아, 그래. 그렇지 뭐. 정우는 순간 그의 상처를 건드리지나 않았나 하고 후회하면서 그의 눈길을 피했다. 잠간 침묵이 흘렀다. 또 다시 그의 숨소리가 고르롭게 귀전을 스쳤다. 그새 정우의 딸꾹질은 어디로 갔는지 가뭇없이 사라졌다. 토닥토닥… 숨소리 외의 그 소리는 심장 뛰는 소리라고 생각되였다. 참 조용하구나 정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도 따라 일어섰다. ―가시려구요? ―가야지. 점심시간도 훨씬 지난것 같은데. ―아저씨도 화가세요? 그의 눈이 화가라고 대답하세요 하고 말하는듯싶었다. 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화가를 취재하는 기자?! 오늘 김교수의 미술전을 취재하러 왔다가 그만…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아까 그 버릇이라는게 뭔지 말씀 안했잖아요, 아저씨. ―그게… 그게… 너 설마 진짜 대답을 듣고싶은건 아니지? ―와, 진짜 제대로 먹었네요, 꼴을. 그가 소리치며 두손을 탁 마주치고는 아래말을 이었다. ―종종 만나 수다 좀 떨어요, 우리. 오늘 참 즐거웠어요. 저, 환이예요. ―그래, 나두 즐거웠다. 환!   2   “저 환이예요.”라는 메시지가 들어온것은 이틀후의 아침이였다. 마침 일요일이라 정우는 그때 뭘 하면서 하루를 때울가 하고 생각을 굴리며 두눈을 슴뻑거리고있었다. 환? 아, 그날 그 애구나. 누운채로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하던 정우의 눈앞에 하얀 얼굴을 가진 환의 모습이 스쳐지났다. 정말 하얬어, 그 얼굴이. 사내라는게 계집애들보다 얼굴색이 더 하얬다니까. 이야기도 참 재밌게 했었지. 목소리도 달았구. 근데 그 애가 왜 미술공부를 하지 않았을가? 미술에 참 애착이 있는것 같았는데. 해볕이 눈을 뜨는 삼복철 아침의 아지랑이마냥 환에 대한 궁금증이 정우의 머리속에서 스물거렸다. 알고싶었다. 환이라는 얼굴색이 하얗고 이발이 눈부신 그 애에 대하여 알고싶었다. 그날 “저 환이예요.” 하고 자기를 소개하고 난 그는 정우에게 핸드폰번호를 알려주었고 그 보답으로 정우가 자기의 핸드폰으로 그 번호를 눌렀던것이다. “환, 반갑다.” 정우는 핸드폰 메시지창을 열고 문자를 찍어 환에게 날려보내면서 어떤 답장이 올가 하는 생각을 굴렸다. 십초쯤 지나서 핸드폰이 울렸다. 진동으로 설치된 핸드폰이 찌릉찌릉 정우의 손바닥을 자극했다. 어! 환이 메시지를 보낼것이라고 생각하고있던 정우는 뜻밖의 통화신호에 깜짝 놀라면서 막을 들여다보았다. 막에는 환의 핸드폰번호가 떠있었다. 정우는 인차 버튼을 누르며 핸드폰을 귀가에 가져대 댔다. ―아저씨, 놀랐죠? 이른 아침에 전화해서. 핸드폰에서 흐르는 목소리치고는 무척 맑았다. ―아니, 놀라긴. 잠을 깬지 오랜데. 정우도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아저씨, 그거 있죠? 한번 우연히 만난것뿐인데 자꾸 눈앞에서 삼삼 거리는 사람. ―어. ―아저씨가 저에게 그런 사람 같아요. ―뭐? 환, 너 참 재밌는 꼬마네. ―아저씨, 방금 절 꼬마라고 했어요? ―그래 꼬마지. 그래 꼬마구 말구. ―저의 이야기를 들으시면 더 이상 절 꼬마로 못 볼걸요. 환의 목소리가 좀전보다 무게를 담아가고있었다. 그 무게를 느끼며 정우는 그날 “설마 진짜 대답을 듣고싶은건 아니죠?” 하던 환의 말이 떠올랐다. “진짜 대답”은 어떤것일가? 괜히 궁금증이 타래쳐오르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무슨 이야기이기에 그렇게 심각해? 22살이면 아직 꼬만거지 뭐. ―듣고싶어요? 그 이야길, 아저씨. ―들려준다면 나쁠거야 없지. 정우는 그가 22살에 나는 상대라것도 잊고 그렇게 자기의 진심을 비쳤다. 핸드폰을 타고 방금전에 비해 무게가 약간 덜어진 해피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좋았어요, 아지씨의 궁금증을 풀어드리는 견지에서 오늘 제가 무상으로 아저씨께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정말이야? ―아홉시까지 공원으로 오세요. 거기서 만나요, 우리. ―공공, 공원? ―네, 사람들이 춤을 추구 노래하는 그 정자 있는데서 만나요. ―어, 어… 공…공원… ―아저씨, 아홉시예요. 잊지 마세요. 사람들이 춤을 추고 노래하는 정자예요. 그럼 이만. 정우가 일시 확답을 주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데 환이가 얼음에 박 밀듯 자기의 뜻을 밀어보내고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눈길을 벽시계에 돌려보니 시침이 일곱시를 가리키고있었다. 아홉시? 공원? 춤을 추고 노래하는 정자? 정우는 머리속으로 환이가 던져준 낱말들을 되풀이 하면서 두시간후에 펼쳐질 화면들을 그려보았다.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것일가? 티없이 맑아보이는 애 한테 무슨 이야기가 있다는걸가? 왜 그 이야기가 무겁다고 생각되는걸가? 정우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세면실로 들어가며 나름대로 생각을 굴렸다. 공원의 아홉시는 일찍한 시간이 아니였다. 공원은 벌써 사람들로 복새통을 이루고있었다. 오던 걸음으로 무작정 정문을 질러 들어간 정우는 잠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보니 공원에 들러본지도 몇달은 되는것 같았다. 지난번 국경절휴가때 친구들에게 끌려 와서 맥주를 마신게 마지막이니 정확히 일곱달만이였다. 그새 크게 변한데는 없었지만 사진가게에서 아기자기하게 만들어 세운 배경들이 눈길을 끌었고 길옆 놀이감가게의 문가에 동동 매달려있는 알록달록한 고무풍선들이 화사해보였다. 어느쪽이던가, 그 정자가? 공원 어딘가에 늙은이들이 모여 춤을 추고 노래 부르는 정자가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게 딱 어느쪽인지 일시 떠오르지 않았다. 정우는 옛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주변을 두리벙거렸다. 련못을 지나 서쪽으로 50메터쯤 북쪽으로 올라가서 그 정자가 있은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아 바로 거기야. 정우는 확신하면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아홉시가 다 되여오고있었다. 정우는 머리속으로 지도를 그리면서 정자를 향해 잰걸음을 놓았다. 련못을 지나 굽이를 돌자 정자가 보였다. 맞아, 바로 저곳이야. 정우가 자기의 판단에 머리를 끄덕이고있을 때 찌르릉 핸드폰이 진동했다. 정우는 바지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집어냈다. 환이였다. ―아저씨, 어디예요? 저 이미 도착했어요. 곁이 복잡해서 그랬던지 환의 목소리가 약간 높았다. ―그래? 나도 지금 정자를 올려다보고있거든. 5분후에 아니 3분후에 만나. 정우는 핸드폰을 다시 호주머니에 넣고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나무가지에 앉은 새는 쌍을 이루고 록수청산은 웃음을 머금었네 오늘부터 고역에서 벗어나 부부 쌍쌍 집으로 돌아가네   큰 목단꽃을 앞뒤로 수놓은 치포를 차려입은 얼굴이 가무잡잡한 늙은 녀자가 목소리를 한껏 올리 틀면서 악청을 뽑고 그 곁으로 꽹과리며 아쟁을 손에 든 늙은 남자들이 흥에 겨워 어깨를 들썽이고있었다. 노는 사람들은 흥에 겨워 어쩔줄을 모르고있었지만 정우는 그들이 무엇을 그렇게 흥겨워 하는지 도무지 리해가 가지 않았다. 하필이면 여기야, 자식. 설마 이런 놀음을 좋아하는건 아니겠지? 정우는 야릇한 생각을 굴리면서 둘러선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어쩌면 누런 이를 들어내고 히쭉히쭉 웃어주는 그 늙은이들속에서 환의 하얀 이가 반짝일것 같아서였다. 한참이나 둘러보아도 환은 보이지 않았다. 조급증이 스멀스멀 기여들기 시작했다. 분명 여기 있다고 했는데? 불과 3, 4분전의 일인데… 정우는 저도 몰래 손목을 들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아저씨. 분명 환이의 목소리였다. ―어. 정우는 깜짝 놀라며 소리나는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없었다. 거무칙칙한 옷들에 어울리지 않게 노오란 T셔츠를 입은 사람이 얼굴에 경극을 할 때 쓰는 뻘건 탈을 쓰고 정우를 빤히 쳐다보고있었다. 분명 이쪽에서 난 소리였는데 하면서도 정우는 딱히 누가 불렀는지를 짚어낼수 없었다. 정우는 다시 머리를 돌려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지씨, 여기요. 또 그 목소리가 울렸다. 방금과 반대쪽에서였다. 정우는 인차 소리나는쪽에 머리를 돌렸다. 역시 없었다. 정우는 혹시 자기가 환청을 듣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며 머리를 저었다. 환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똑똑한 목소리였다. 정우는 사람들로부터 약간 떨어져 살피려고 뒤로 몇걸음 물러섰다. 그때 누군가 정우의 어깨를 덮쳤다. 앗! 정우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본능적으로 머리를 돌렸다. 뻘건 탈이 눈에 안겨들었다. 그리고 노란색 T셔츠가 눈을 자극했다. ―놀랐죠? 그 소리와 함께 뻘건 탈이 파란 탈로 확 바뀌였다. ―환이니? ―재밌죠? 탈이 내리워지고 하얀 얼굴이 들어났다. 정우는 순간 두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분명 그 어떤 환영에 빠져 너울거리다가 돌아온듯한 기분이였다. ―이게 재밌다구? ―그럼요. 한순간에 확 바뀌는 이 탈이 얼마나 재밌어요. ―확 바뀌는게 재밌다구? ―그럼요. ㅋㅋㅋㅋ… 가요, 아저씨. 우리 저기로 가요. 환은 손에 든 탈로 정자에서 50메터쯤 떨어져있는 곳을 가리키고는 흥겹게 앞에서 걸음을 옮겼다. 좋을 때지, 근심걱정 없이 무엇이나 생각할수 있고 재미있어 할수 있어서… ―아저씨, 전 늘 이런 생각을 해요. 환이가 걸음을 옮기다 말고 머리를 돌렸다. ―무슨 생각? ―사람의 일생도 이 탈처럼 척척 생각대로 바뀔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가구요? ―왜 그런 생각을 하니? 너 지금 생활이 마음 안드니? ―생각하기 나름이죠. 환이가 자기곁에 도착한 정우의 얼굴에 갑자기 탈을 쒸워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인데? 정우가 얼굴을 가리운 탈을 벗어 환에게 넘겨주며 물었다. ―전 부모들 얼굴이 생각 안나요. ―엉? 정우가 깜짝 놀라며 먹이를 본 금붕어처럼 입을 벌름거렸다. ―아버지는 내가 여섯살 때 로씨야로, 엄마는 내가 일곱살 때 한국으로 갔대요. 그래서 난 삼촌네 집에서 컸어요. 내가 열살 때 아버지는 로씨야에서 세상 떴어요. 장사를 갔다 오다가 깽단을 만나 돈을 털리구 맞아죽었대요. 내가 초중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생활비를 보내주었어요. 그래서 초중을 졸업하고 고중에도 붙었죠. 대학에도 가고싶었어요. 헌데 고중 1학년 후학기부터 엄마에게서 소식이 끊긴거예요. 누군가 그러는데 내 엄마가 남의 녀자가 됐대요. 엄마 얼굴을 못 본지 몇년 돼요. 더 이상 공부를 할 형편이 못 됐죠. 삼촌은 그래도 계속 공부하라고 했지만 그럴수 없었어요. 제 자식 싫다는 엄마도 있는데… 그래도 저를 키워준 삼촌이 얼마나 고마와요. 더 이상 신세를 질수 없었죠. 그래서 사회에 나왔어요. 안마를 배웠어요. 저 중의안마 솜씨 죽여요. ㅋㅋㅋ… 힘들 때 저를 찾아 안마를 받아요, 아저씨. ―너…너… 정우는 말을 잇지 못하고 절레절레 머리만 저었다. 어쩌면 거짓말을 하는것 같았다. 그 아픈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하듯 그렇게 차분하게 엮어내려가는 환이가 22살의 애숭이라고 믿겨지지 않았다. ―괜찮아요, 아저씨. 인젠 아프지 않아요. 아, 이런 얘기는 안하려고 했는데… 환이는 왼손에 든 탈을 오른손으로 툭 쳤다. 그 바람에 뻘건색이 파란색으로 휙 바뀌였다. 그것을 다시 툭 쳐서 빨건색으로 만들어 놓으며 환이가 말했다. ―안하려고 했는데… 아저씨가 궁금해 하는것 같아서… 봐요 아저씨. 저기서 지금 그림전람을 하고있어요. 화제를 돌려서야 정우는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들어 환이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소나무들 사이에 늘인 가는 쇠줄에 그림들이 가득 걸려있었다. ―아마츄어들 작품 같았어요. 하지만 괜찮은것도 있어요. 우리 가봐요, 네? 아저씨. 환이가 정우를 끌고 그림앞으로 다가갔다. 수채화도 있었고 수묵화도 있었다. 풍경화도 있었고 초상화도 있었다. 한폭의 그림앞을 지나다가 정우가 뚝 굳어졌다. 다리를 오무리고 비스듬히 누운 녀자의 라체를 그린 그림이였다. 짙은 회색배경때문인지 녀자의 몸체가 하얗게 안겨왔다. 참, 하얗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치는 순간 정우는 “악!” 하고 단말마적으로 비명을 터쳐올렸다. 정우는 저도 모르게 명치끝에 손을 가져가며 입을 앙다물었다. ―아지씨, 웬 일이예요? 불편해요? 환이가 정우를 부축하며 허리를 굽혔다. 억억! 정우는 녀자의 라체화앞에 물 먹은 담처럼 무너져 내리며 연신 구역질을 해댔다.   3   환의 눈에서 측은한 빛이 흘렀다. 그 빛은 고통때문에 오열하는 정우의 온몸을 실실이 감싸고있었다. 그 빛에 감긴 정우의 몸뚱이가 와들와들 떨리고있었고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둘둘 굴러내렸다. ―아저씨. ―환아. 나, 어디 가서 앉아야겠다. ―네, 아지씨. 저저, 저기 걸상이 있어요. 거거거, 거기 가서 앉아요. 환은 너무도 급해 꺽꺽 말을 더듬으며 허리를 굽혀 정우를 부축하려고 했다. 정우는 왼손을 들어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훔치고는 그대로 환에게 손을 내밀었다. 환은 땀이 질퍽하게 묻어난 정우의 왼손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정우의 허리를 부여잡았다. 정우는 환에게 기대면서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괜찮겠어요? 아지씨. 걸을수 있겠어요? ―괜찮아, 천천히 가자. ―네, 아지씨. 조심하세요. 정우는 걸상등받이에 머리를 붙이고 조용히 두눈을 감았다. 눈까풀이 무시로 파들파들 떨리고있었다. 무시로 떨어대는 그 눈까풀을 바라보다가 환이 입을 열었다. ―힘들죠? 아지씨. ―나아졌다. 숨이 좀 나오네. 정우의 목소리가 낮았지만 숨소리가 고르로와지고있었다. 환은 호―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목소리에 궁긍즘을 담아 한마디 건넸다. ―수수께기예요. ―뭐가? ―아저씨가요. ―내가? ―그런데 알것 같아요. ―뭘? 정우가 환이쪽에 머리를 돌렸다. ―아저씰요. ―나를? 힘 없이 열려있는 정우의 두눈에서 동공이 커지고있었다. 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네, 아저씨. 콤플렉스가 있죠? ―콤플렉스라니? ―맞아요. 그래요. 녀자의 라체에 대한 콤플렉스! ―너너, 너 그게 무슨 뜻이니? 정우가 와뜰 놀라 몸을 흠칫 했다. 환이가 잠간 아래입술을 씹다가 긍정적으로 짚어냈다. ―그날 미술관에서두 김교수가 그린 라체화를 보고 증상이 발작한것이였어요. 처음을 내가 지켜보지는 못했지만요. 오늘도 그랬어요. 기분 좋게 올라왔었는데 그 녀자라체화를 보고난후 갑자기 배를 움켜쥐였어요. 우연한 일치일가요? 어떻게 설명할래요? 아저씨는 정답을 알고있죠? 말해보세요. 환은 또박또박 자기의 견해를 피력했다. ―어…어… 정우는 갓 기름을 먹은 사이문처럼 막힘없이 착착 여닫기는 환의 빨간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뭐라고 뒤말을 잇지 못했다. ―녀자의 라체에 어떤 콤플렉스가 있는게 분명해요. 이건 일종의 반사반응과 같은거지요. 바람이 불면 머리칼이 날리는것과 같은 도리죠. 제 말이 틀렸어요? ―어… 그래. 정우는 고통스럽게 두눈을 꽉 감으면서 어금이를 깨물었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가고있었다. ―털어놓으세요. 무슨 일인데요. 친구는 못 되더라도 믿음직한 조카는 될수 있잖아요? 도움은 못 되더라도 저 들어줄수는 있잖아요? ―그날 내가 먼저 돌아온것을 후회해야 했어. 후회해야 했다니까. 장춘으로 갔던 그번 취재가 예산보다 하루 먼저 끝났었거든.   노랗게 구워진 통닭이였다. 금방 가마에서 꺼내서였던지 등에 기름기가 찰찰 흐르고있었다. 한근에 13원이라고 했다. 눈짐작으로 두근이 좀더 될것 같았다. 그놈을 사고싶었다. 안해가 통닭구이를 그렇게 맛나했던것이다. 하지만 넉넉치 못한 살림때문에 먹고싶은것이라고 선뜻 사먹을수 있는 형편도 아니였다. 며칠전, 피곤때문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퇴근한 안해가 옷을 벗으며 중얼거렸다. ―시장을 지나오는데 튀해서 걸어놓은 통닭이 눈에 뜨이지 않겠어요? 하나같이 하얗게 튀해진게 얼마나 먹음직스럽던지. 그옆에는 노랗게 튀겨진 닭들이 주렁주렁 걸려있었구요. 정우는 그 말을 하는 안해를 바라보면서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 없었다. 얼마나 먹고싶었으면 저럴가? 에잇, 녀편네가 먹고싶어 하는 통닭 한마리도 마음대로 먹게 못하는 이 신세… 정우는 내내 그게 마음에 걸렸던것이다. 호주머니에는 마침 출장비를 남긴 돈이 30원 푼히 있었다. 그래, 한마리 사다가 깜짝 기쁘게 해주는거야. 차에서 내린후 동료들끼리 식당에서 술까지 마셨는지라 정우는 기분이 붕 떠서 한결 흥분된 상태였다. 정우는 구운 통닭을 한마리 사 들고 집으로 잰걸음을 놓았다. 뜻밖에 집에는 불이 꺼져있었다. 벌써 자나? 아직 아홉시도 안됐겠는데. 피곤했나봐. 이 더운 날씨에 온 하루 시장에서 익었겠으니. 해볕에 피부가 상하기도 하겠건만 그의 피부는 왜 그렇게 하얄가? 정우는 나름대로 좋은 생각을 굴리며 조용히 열쇠를 꺼내 자물쇠에 꽂았다. 곤히 잠들어 있을 안해를 깨우고싶지 않았던것이다. 그대로 들어가 잠든 안해의 하얀 옥체를 바라보는것도 행복할것 같아서였다. 집에 들어서보니 방문이 꼭 닫쳐있었다. 잠든게 아니구 어디로 갔나? 한풀 꺾이는듯한 기분이였다. 정우는 통닭을 담은 비닐봉지를 부엌에 내려놓고는 몸을 돌려 웃방으로 다가가 주저없이 사이문을 당겼다. 순간 침대에서 검은 물체가 벌떡 솟구치는것이 보였다. 악! 정우가 비명을 터쳐올리며 스위치를 당겼다. 너무도 하얬다. 하얘서 눈부시는 몸뚱이가 눈에 안겨들었다. 와들와들 떨어대는 그 몸뚱이옆에서 검실검실한 피부에 어깨가 떡 벌어진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몸이 떨릴 때마다 그 남자의 후줄근해진 남성이 흔들흔들 춤을 췄다. 정우는 단말마적으로 소리지르며 그 남자에게 덮쳤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는지 남자는 달려드는 정우를 잡아 침대아래에 팽개치고는 부랴부랴 옷을 찾아들고 정지칸으로 뛰여나갔다. 방바닥에 동그라졌던 정우는 악을 쓰고 기여 일어나 정지칸으로 향했다. 그때 안해가 정지칸으로 내려와 정우의 다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정우는 안해의 팔에서 다리를 빼려고 바락바락 악을 썼다. 정우의 다리가 빠지려는 찰나 안해가 정우의 종아리를 꽉 깨물었다. 정우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다리를 뽑은후 그 힘으로 힘껏 안해를 걷어찼다. 안해는 악 소리와 함께 벌러덩 넘어지더니 몸부림을 치며 한바퀴 휙 돌아 물독이 놓여져있는 콩크리트바닥쪽에 가서 쭉 뻐드러지고말았다. 하얬다. 죽은듯이 두팔을 쫙 벌리고있는 안해의 몸뚱이는 불륜의 현장에서 남편에게 채여 실한오리 걸치지 못하고 쓰러져있는 그 순간에도 먼지 한점 묻지 않은듯 그처럼 하얬다. 미칠것만 같았다. 그 하얀 몸뚱이를 꽉꽉 밟아 꺼어먼 발자욱을 팡팡 찍어주고싶었다. 정우는 한달음에 뛰여가 안해를 향해 발길을 날렸다. 하지만 발등은 안해의 몸이 아니라 안해의 옆에 있는 물독에 가 퉁 하고 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와잘랑 소리와 함께 물독이 깨여지면서 물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와 함께 정우의 속에서 뭔가 욱 올리 밀었다. 저녁에 마신 술이며 채 소화되지 않은 안주가 그대로 쏟아져 발등을 적셨다. 안해는 그날밤으로 집을 나갔고 두달후 협의리혼으로 4년간의 결혼생활을 마무리했다. 18년전의 일이였다.   ―텔레비죤을 보고있었어, 그날밤. 그림에 대해 소개하는거야. 라체화였어. 풍만한 몸매를 가진 녀자의 라체화였지. 몸뚱이가 하얬다구. 그 라체화를 보는 순간 어쩔 새도 없이 구역질이 올라왔고 나는 또 어쩔 새도 없이 저녁에 먹은것들을 그대로 토해버린거다. 처음이였지. 그때로부터 나는 녀자의 라체를 상상만 하면 토하고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거야. 그리고 가끔 녀자의 라체화를 보기만 하면 진짜 구토가 시작되였구. 정우는 환을 건너다보며 “참, 너하구 별말을 다했구나. 어린애 하구.” 하고는 어쭙게 입을 다셨다. 그러는 정우를 바라보면서 환은 미동도 없었다. 연푸른 화판에 티없이 맑은 하얀 색으로 오롯이 그려놓은듯한 환의 모습은 충격에 굳어진듯싶었다. 정우가 환에게 얼굴을 돌리며 목소리에 힘을 넣어 말을 이었다. ―인젠 그나마 괜찮아졌다. 이렇게 한번씩 열병을 하고나도 인차 회복할수 있으니까. 전에는 아니였지. 한번씩 겪고나면 적어도 하루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더랬지. ―어쩌면 좋아요. 아저씨를 어쩌면 좋아요. 환이 정우의 손을 꼭 쥐고 안타까와 목소리를 떨었다. ―보고싶지 않아, 진심이거든. ―그게, 그게 말이 돼요? 환이 속삭이며 정우쪽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정우의 눈길이 담담했다. 그 시각 그 눈길에는 더 이상 아픔도 고통도 슬픔도 없었다. ―아저씨. 환의 목소리가 떨리고있었다. ―환아. 정우는 목소리마저 담담했다. 환이 정우의 앞으로 한뽐 다가앉았다. 환의 얼굴이 정우쪽으로 밀착되여갔다. 환은 천천히 정우의 두볼을 감싸들었다. 환의 빠알간 입술이 정우의 이마에 닿았다…   4   토탁토닥… 정우는 그 시각 분명 높뛰는 환의 심장소리를 듣고있었다. 토탁토닥… 정우는 그 시각 분명 자기의 가슴에서도 무엇인가 높뛰고있다고 느껴졌다. 이마가 달아오르기 사작했다. 이마로부터 온 얼굴이 화끈화끈 뜨거워졌다. 정우는 꼭 감았던 두눈을 천천히 뜨고 자기의 얼굴에 뜨거운 입김을 쏘는 환의 얼굴에 눈길을 박았다. 긴장때문인지 환의 왼쪽볼이 파들파들 떨리고있었다. ―환아.  정우의 갈린 목소리가 이사이로 터져나왔다. 환이 감싸안았던 정우의 두볼에서 손을 떼고 이윽토록 정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정우도 몸을 흠칫하면서 자세를 바로 앉아 중얼거렸다. ―어, 덥네. ―아저씨, 쉬다 오세요. 저 먼저 갈게요. 말을 마친 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잰걸음을 놓았다. 환의 노오란 T셔츠가 정우의 눈에서 멀어지고있었다. 자기의 손을 떠나 저 멀리 하늘가로 날아가는 고무풍선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애들처럼 정우는 하나의 노란 점으로 되여가는 환의 뒤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리고있었다. 화끈거리다 못해 이마가 지지는듯 아파나기까지 했다. 정우는 두손을 쫙 펴들고 고통스럽게 이마를 감싸쥐였다. 머리속에서 천마리의 송충이가 스멀스멀 기여다니는듯 어지럽기 이를데 없었다. 스멀거리는 천마리의 송충이들을 헤집고 하아얀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얀 왼쪽볼이 파들파들 떨리고있었다. 안해 숙이의 얼굴인듯싶었고 다시보면 환의 얼굴은듯싶기도 했다.   그날밤, 안마를 끝내고 숙이가 정우의 이마에 도톰한 입술을 살며시 가져다 댔을 때 정우는 그닥 밝지 않은 불그스름한 보조조명을 빌어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끝났어요. 편히 쉬세요. 숙이는 밝은 조명을 켠 후 가지고 들어온 물수건과 발을 담궜던 물통을 들고 일어서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제야 정우는 화뜰 몸을 떨면서 벌떡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왜왜, 왜 여기에 몸을 담게 되였소? 그렇게 당돌한 물음을 던져버린 정우는 맞선자리에서 본의 아니게 방귀를 터쳐버린 로총각처럼 몸둘바를 몰라했다. 숙이도 정우의 물음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문쪽을 향해 세걸음째 옮기다가 굳어져서 정우쪽으로 몸을 돌렸다. 숙이의 눈길이 집요하게 정우의 얼굴을 훑고있었다. 정우는 웬지 그 눈길을 정시할 자신이 없었다. 하여 다시 자리에 등을 붙이면서 애써 목소리를 골라 덤덤하게 한마디 했다. ―수고했소. ―대학교 다니는 동생이 있어요. 잘 생기고 공부 잘하고 셈이 든 애예요. 그애의 학비를 벌어야 해요. 이 일이 돈이 빨리 벌어져요. 숙이는 그렇게 많은 말을 뱉어냈지만 목소리는 정우의 목소리만치나 담담했다. 그때 정우는 담담하게 그런 말을 더듬어내는 숙이의 왼볼이 파들파들 떨리고있다것을 느낄수 있었다. 미세한 그 떨림마저 느낄수 있다는게 신비하리만치 이상하게 느껴졌다. 정우는 자기가 빗본것이나 아닐가 하는 생각으로 다시 숙이에게 눈길을 박았다. 그때 숙이는 다시 나가려고 이미 몸을 돌린 상태였다. 하지만 정우는 여전히 숙이의 왼쪽볼이 파들파들 떨리고있다는 환각이 머리속을 치고들어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제야 정우는 그 느낌이 눈으로 가슴으로가 아니라 토닥토닥 높뛰는 심장소리와 함께 푸들푸들 떨어대는 이마로부터 느껴지는것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왜 꼭 그녀의 왼쪽볼이라고 믿고싶은지 알수 없었다. 정우는 벌떡 일어나 앉아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만지며 물었다. ―그럼 부모님들은? 정우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전에 숙이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정우는 숙이가 사라진 문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에 벌렁 들어누웠다. 그녀가 왜 내 이마에 키스를 했을가? 아니, 내가 키스라고 생각하지 그녀에게도 그게 키스였을가? 대학교에 간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유흥업소에 몸을 던졌다는 그녀, 어디까지 그녀의 말을 믿어야 할가? 혹 떼러 갔다가 혹 하나 더 달고 온 혹부리령감처럼 정우는 그날부터 시종 머리속에서 야금야금 자리를 틀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지을수 없었다. ―경운기에 옥수수를 싣고 벼랑가를 지나게 되였어요. 아버지가 경운기를 몰았고 엄마는 아버지곁에 앉았었지요.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에 고장이 생긴거예요. 경운기는 내리막길에서 쏜살같이 달렸고 아버지는 경운기에 제동을 걸려고 허둥거리다가 그만 벼랑에 굴러떨어진거예요. 세상 뜬 아버지어머니를 가슴 아파하기보다 사람들은 나와 동생을 두고 더 가슴 아파했어요. 저는 그해 고중 2학년이였고 동생은 초중 2학년이였어요. 하루새에 고아로 된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았어요. 생활이 유족하지는 못해도 부모들 품에서 별 고생 못해보고 자랐거든요. 그 힘든 와중에도 동생을 꼭 공부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쳤어요. 저는 단연히 학교를 중퇴하고 사회에 나왔어요. 그해 나는 20살, 동생은 16살이였어요. 벌써 6년이 지났네요. 숙이를 찾아 다시 그 안마원으로 갔을 때 그녀는 무좀이 번져가는 정우의 발가락을 이리저리 주무르며 남의 이야기를 하듯 차분하게 엮어내려갔다. 드라마에서의 방백처럼 들려오는 숙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우의 머리속에서는 진짜 한부의 드라마가 펼쳐지고있었다. 친구들이며 동료들이 정우를 두고 “소설을 쓴다”면서 도리머리를 했다. 시골에 사는 누나가 소문을 듣고 찾아와 꺼이꺼이 곡까지 하면서 죽을둥 살둥 막아나섰다. ―안된다. 이것만은 절대 안된다. 네가 우리 가문에서 어떤 사람인데. 우리 가문의 유일한 대학생이라구. 가문을 떠멜 사람이라구. 그런데 농촌녀자를 데려와? 안된다. 안돼. 절대로 안된다. 그러는 누나의 마음을 모르는것은 아니였지만 정우의 귀에는 더 이상 그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치 정우는 자기가 숙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자신하고있었다. 정우가 기어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자 친구들은 내 놓고 “이 미친것아, 사랑은 무슨 얼어죽을 사랑이냐? 너 그 녀자의 이쁜 탈에 홀린거지?” 하면서 정곡을 찔러 댔다. 그 말에는 정우도 구구히 변명할수 없었다. 키가 1.65 메터도 되나마나한 정우는 피부마저도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사람 같지 않게 검실검실하고 몸매는 바람이 불면 훅 날아버릴것처럼 갸날팠다. 반면에 숙이는 정우의 키를 초과할만치 늘씬했는데 얼굴색마저 티 한점 묻지 않은듯 밝고 하얬다. 숙이와 나란히 거리를 거닐 때면 정우는 자기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는게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다. 부러운 그 눈길들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능력이 있다고 손가락을 흔들어주는것 같아 그렇게 만족스러울수가 없었다. 지인들의 곱지 않은 눈길속에서 반년 가까이 련애를 한후 그들은 끝내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 숙이는 농촌호구를 시내호구로 넘겨 정우의 호적에 올렸다. 그새 서시장에 옷매대도 하나 장만했다. 정우는 숙이와 함께 하는 그 나날들이 그렇게 행복할수가 없었다. 숙이도 진심으로 정우를 커하고 아끼는것 같았다. 단지 아이만은 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생활이 여유가 있을 때 가지자고 해서 좀 섭섭할뿐이였다. 그렇게 아기자기 4년철을 숙이와 살아온 정우였다. 감쪽같이 숙이에게 속혀 살아온 4년을 돌이켜보면 정우는 악몽을 꾼것 같으면서도 또 그것을 악몽이라고 믿고싶지 않았다. 숙이가 자기의 옷가지들을 꿍져가지고 집을 나가자 부럽게 정우네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고 이어 이러저러한 소문들이 떠돌기 시작했다. 숙이와 불륜을 태운 그 남자가 결혼전에 만나던 남자라는 말도 있었고 지난해부터 가게에 드나들다가 눈이 맞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날밤, 불륜의 현장에서 후줄근한 남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부들부들 떨고있던 그 남자를 곰곰히 떠올려보노라니 정우도 그 남자가 자기와는 비교도 안될만치 잘 생기고 건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부터 어떻게 어긋났는지 알수 없었다. 자기의 진정이 어떻게 되여 그처럼 비참하게 찟기고 짓밟혀야 했는지를 가늠할수 없었다. 지어는 숙이가 자기를 사랑한적이나 있었는지마저 의심스러웠다. 그 의심이 시종 정우의 가슴에 앙금으로 남아있었고 그 앙금이 물을 만나 고요하던 정우의 가슴을 휘저어놓기도 했다. 그래서 정우는 숙이와 갈라진후 애써 자기를 숨기고 살아왔다. 세상앞에 나서서 춤을 추다가 혹시 누구에게 상처를 다치울가, 다치워 상처에서 진물이 흐릴가 내내 발걸음마저 제겨디디며 살아왔던것이다.   하얬어, 정우는 생각을 굴리면서도 환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가 여전히 화끈거리고있음을 느꼈다. 왼볼이였다니까. 파들파들 떨고있던 숙이의 얼굴이 눈가에 클로즈업되고 또 클로즈업된 그 얼굴이 환의 얼굴로 바뀌여지는 환각이 무시로 덮쳐드는것을 정우로서도 어쩔수 없었다. 왜왜, 왜 숙이의 얼굴에서 환의 얼굴이 떠오르는것일가? 쳐죽이고싶었던 그 징글징글한 얼굴이 왜 환의 얼굴로 바뀌는것이냐구? 정우는 두눈을 꼭 감고 부르르 몸을 떨다가 벌떡 일어섰다.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정우는 허리를 굽혀 두손으로 걸상등받이를 짚고서서 잠간 머리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뻘건색이였다. 환이가 들고왔던 탈은 뻘건색 얼굴로 정우를 빤히 쳐다보고있었다. 정우는 뻘건 탈을 주어들었다. 주어드는 순간 탈에 힘이 갔던지 탈은 퍼런색으로 변했다. 정우가 왼손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퍼런 탈을 툭 치자 탈은 다시 뻘건색으로 돌아왔다. 정우는 다시 탈을 툭 쳐서 퍼런색으로 만든 후 몸을 돌려 정자가 있는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정자가 가까와 왔다. 앞뒤에 큼직한 목단꽃을 수놓은 치포를 차려 입은 그 녀인이 그때까지도 노래를 부르고있는것이 보였다. 올라올 때 시작한것이 그때까지인지 아니면 그새 한쉼 쉬고 다시 부른는것인지 알수 없었다. 정우는 정자곁을 지나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이 밭을 다루면 나는 천을 짤게요 당신이 물을 길어오면 나는 정원을 가꿀게요 집은 낡았어도 비바람을 막을수 있고 우리 살림 힘들어도 달콤하기만 해요   녀인은 노래를 부르면서 요리조리 몸까지 탈았다. 곁에 앉은 남자들이 꽹과리를 두드리고 아쟁을 치느라 열을 올리고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정우는 새삼스럽게 외롭다는 생각이 머리속을 치고들었다. 환, 얘는 어디로 갔을가? 왜 그렇게 총망히 떠났을가? 환의 빨간 입술이 닿았던 이마가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정우는 오른손바닥을 쫙 펴서 이마를 문지르다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5   ―보고싶었어요, 아저씨. 이렇게 시작된 환이의 전화를 받은것은 이틀이 지난 그날이였다. 그때 정우는 점심식사를 금방 끝내고 사무실에 올라와 커피를 타서 상우에 올려놓고있었다. 환의 목소리는 사뭇 맑았다. 하지만 그날 공원에서 서운하던 생각이 떠올라 그닥 반갑지 않은 투로 응부했다. ―보고싶었다니? 설마… ―기다릴게요. 나와 주세요. 환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들렸다. 웬 일일가? 얘가. 환의 얼굴이 삼삼 눈앞에 클로즈업되였다. 순간 환의 빨간 입술이 대였던 이마가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정우는 저도 몰래 오른손을 이마에 가져다댔다. 이상했다. 그 새 잊고있던 그 느낌이 그처럼 진하게 그 시각 다시 나타나는것이 놀라왔다. 그날 환이, 그애는 왜 그렇게 돌아져 내려갔을가? 그 의문을 풀고싶었다. 환이라는 수수께끼같은 그 애를 헤쳐보고싶었다. 하얀 피부에 숨겨진 그 속에 뭔가가 살아 숨 쉬고있을것이라는 예감이 머리속을 파고들었다. 그래, 한번 만나는거야. 정우는 고뿌를 들어 커피 한모금을 마시고는 급히 문을 나와 서시장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얬다. 너무 하얘서 티 한점 묻지 않을것 같은 셔츠를 들고 정우를 바라보면서 환이 물었다. ―어때요? 이 셔츠가? 너무 어이없다고 생각되였다. 전화로 자기를 불러내서 하려는 일이 고작 자기의 셔츠가 어떠냐고 묻기 위한것이였단 말인가? 정우는 쩝쩝 입을 다시다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좋네, 깨끗해 보이는게. ―그렇죠? 아저씨. 환의 얼굴에 기쁨이 찰랑이고있었다. ―그래, 네가 입으면 딱이겠다. 네 얼굴색과 잘 어울려. 그러는 정우를 향해 환이 머리를 저었다. ―아니죠, 아저씨. ―아니라니? 두서를 잡지 못해 망연하게 자기를 바라보는 정우를 향해 씩 웃어보인 환은 두손으로 셔츠를 들어 정우의 몸에 대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저에게 딱이면 안되죠. ―그럼? ―아저씨 몸에 맞아야죠. ―뭐? 내 몸에? 정우는 깜짝 놀라면서 환을 쳐다보았다. 환이 웃고있었다. 웃는 얼굴에 이가 눈부셨다. ―이틀간 내내 고민했어요. 아저씨를 다시 만나지 말가 하고 생각도 해보았어요. ―그런데? ―그러다가 마음을 고쳐 먹었어요. 제가 아니면 아저씨가 계속 고독하구 외롭게 살것 같았어요. 그리구 사실 아저씨가 보고싶었어요. 그래서 큰 마음을 먹구 오늘 시장에 와서 이 셔츠를 샀어요. 공원에 가서 아저씨를 부를가 하고 생각하다가 그래두 여기가 좋을것 같았어요. 시장 가까이니 편하잖아요. 혹시 아저씨에게 어울리지 않으면 뛰여가 바꿀수도 있으니까요. 좋은 일을 해놓고 칭찬을 기다리는 애들같이 순진한 얼굴로 정우를 바라보며 환은 술술 이야기를 엮어 나갔다. 그러는 환을 쳐다보면서 정우는 점점 오리무중에 빠져드는듯싶었다. 나에게 셔츠라니? 웬 일루 얘가… 내 옷이 람루해보였나? 정우는 생각을 굴리면서 머리를 숙여 자기가 입고있는 웃옷을 내려다보았다. 새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환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낡아서 초라한것은 아니였다. 그럼 얘가 도대체 왜 이 셔츠를 샀을가? 눈덩이를 굴리듯 의문이 점점 더 커졌다. 그줄도 모르고 환은 여전히 맑은 목소리로 씨뚝해서 말했다. ―제가 얼마나 애썼는데요. ―왜? ―아저씨 몸에 어울릴만한것을 고르느라구그랬죠. ―왜? ―왜 자꾸 왜 하구 물어요? 아저씨는. ―왜 샀느냐구 왜 하구 묻는거지 왜 왜 하구 묻겠니? ―대답했잖아요. 아저씨께 드리자구 샀다구요. ―참! 정우가 입을 다시며 다시 환을 쳐다보았다. 정우의 눈길이 집요했다. 영문을 알아 내고야 말겠다는듯싶었다. 환의 입가에 아지랑이 같은 실웃음이 피여 올랐다. ―불쌍했어요. ―누가? ―아저씨 말이죠. 웃옷 벗어요. 환이 정우의 몸에 걸쳐진 웃옷을 벗겨내며 말했다. ―내가 왜 불쌍한데? 정우는 환에게 웃몸을 맡겨버린채 바투 들이댔다. 환은 벗겨낸 웃옷을 들어 툭툭 털면서 정우쪽에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밉기까지 했어요. ―누가? ―아저씨 말이죠. 입어보세요. 환은 셔츠를 정우의 어깨에 씌우며 말했다. ―아저씨가 바보, 멍청이, 천치 같았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지? ―저 아직 어려서 어른들 세계가 뭐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사람 사는게 다 똑 같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행복해지려는 그 욕망 말이죠. 아저씨가 행복해지려면 그때 아저씨와 근사한 직업을 가진 아주머니를 찾아야 했어요. ―그때두 지금두 나는 그 녀자와 결혼한것을 후회는 안한다. ―지금두요? 환의 눈길이 커지고있었다. ―그렇지, 지금두. 내 선택이였거든. 글구 그때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었구. ―세상에, 이처럼 비참하게 상처를 받고서두 후회를 안한다구요? 환이 되려 년장자라도 되는듯 두팔을 쭉 펴며 어깨를 뜰썩해보였다. ―후회라면 내가 못나구 돈이 없은것을 후회해야지… 정우가 뒤말을 흐리며 환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어쩌면. 아저씨를… 쯧쯧쯧… 환이 혀끝을 차면서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아래쪽으로부터 단추가 하나하나 채워져 올라올수록 정우는 가슴이 쿵쿵 높뛰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머리속이 하얗게 바래지고있었다. 그 하얀 운무속에서 정우는 자신이 너무도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그 무기력한 자기의 몸에 하아얀 껍질을 씌워놓고 이리저리 료리해나가는 환이가 자기에게 무엇으로 비쳐지는지는 그로서도 아리송했다. 그때 숙이가 “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생활의 여유가 있을 때 아이를 갖자”고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쯤은 환이또래의 자식이 있을것이였다. 그게 아들이였다면 지금 이 순간 환이처럼 살뜰하게 나를 바라봐줄수 있을가? 환의 손이 정우의 가슴을 건드리고있었다. 네번째 단추를 채우려는것이였다. ―여기까지만 해요. 셔츠는 그래도 제일 웃쪽 단추 하나는 남겨둬야 제멋이 나거든요. 환은 네번째 단추까지 다 채운후 두손으로 정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한결 겨벼운 목소리를 뽑아올렸다. ―바로 이 화면이잖아요? 셔츠 한장 바꿔 입었을뿐인데 와늘 다른 사람이 됐잖아요. 남자는 나이 들수록 몸을 가꿀줄알아야 해요. 그래야 남에게 꿀리지 않고 당당해질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아저씨. ―어, 왜? 정우가 괜히 놀라면서 환을 쳐다보았다. 환이 식지 두개를 펴서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아저씨가 웃는것을 보지 못했어요. 웃을줄 모르는거예요? 아님 일부러 웃지 않는거예요? 환의 물음에 정우는 잠간 두서없이 두눈을 슴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웃지 않는가? 어, 그렇네. 웃을 일이 없는게지뭐. ―어쩌면… 어쩌면… 웃어보세요. 아저씨, 스마일, 이렇게요. 환이 정우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정우가 힘들게 입귀를 실룩거렸다. 정우의 홀쭉한 두볼이 푸들푸들 떨리고있었다. 그 모습을 잠간 지켜보다가 환이 말했다. ―그래요, 아직 어색해보이긴 해도 딱딱한 얼굴보다는 훨씬 보기 좋아요. 됐어요, 아지씨. 저 오늘 소원을 풀었어요. 제 손으로 다듬어 내놓은 련인을 바라보듯 그윽한 눈길로 한참이나 정우를 바라보던 환이가 기쁘게 말했다. ―뭐, 소원을 풀었다구? 정우가 흠칫 놀라면서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래요. 저 꼭 아저씨 같은 남자를 상대루 이걸 해보고싶었어요. 환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차분하게 들렸다. 정우는 헉 하고 숨을 멈췄다가 푸 하고 내쉬며 뚫어질듯 환을 바라보았다. 날아오는 환의 눈길과 공중에서 부딪쳤다. 환의 눈길이 반짝이고있었다. ―환아! 너…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있는거니? ―아버지가 불쌍했어요. 돈을 벌어 식구들 호강시키겠다구 이국 타향에 갔다가 깽단에 맞아 죽으면서 울 아버지 뭘 생각했을가싶었어요. 아버지만 생각하면 지금 한국에서 남의 마누라로 되여 아양을 떨어댈 내 엄마가 찢어죽이고싶게 미웠어요. 엄마를 생각하면 녀성이라는 그 존재가 싫었어요. 녀자들 모두가 제 잘 살겠다고 자식 버리는 비정의 인간들로 생각되였어요. 물론 영화며 텔레비죤에서는 모성에 대하여 하늘높이 가송하고있지만요. ―너너, 너 그게… ―저도 힘들구 외로왔어요. 스스로 제가 허허 벌판에 던져진 고양이 같이 생각될 때가 많았어요. 그때마다 어떤 아저씨가 저를 주어다 키워주었으면 하는 꽃 같은 꿈을 꾸었더랬죠. ―물론 삼촌이 자주 전화를 걸어와서 저의 걱정을 해주었지만 그게 되려 저에게는 부담이였어요. 자기 자식 셋을 뒤바라지 하느라 큰 숨 한번 제대로 못 쉬고 소처럼 엉기엉기 기여가는 삼촌에게 저는 완전 천덕꾸러기였으니까요. ―시루속같이 비좁은 뻐스에 오르기를 좋아했어요. 올라가 아저씨들 뒤에 서기를 좋아했어요. 차가 들추는 기회를 타서 앞에선 아저씨의 어깨에 얼굴을 대보고싶었어요. 그리구 내 손으로 고른 셔츠를 그 아저씨에게 입히고싶었어요. ―너 그게 얼마나 허황한 생각인지 아니? ―그날 아지씨를 보는 순간, 웬지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는 아저씨를 안아드리고싶었어요. 과연 저의 느낌이 적중했던거죠. 그날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련민이라 할가요? 아니, 그보다도 진한 동지애를 느끼게 된거죠. ―나는 막부득이한 환경에서 막부득이 하게 그런 습관이 생겼지만 넌… 정우는 열변을 토하려다가 그만 뒤말을 얼버무려버렸다. 환의 말대로라면 환 역시 충분하게 엄마를 싫어할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치고들어왔던것이다. 뭐라고 말해야 할가? 정녕 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 얼어든 얘 가슴을 녹여줄수 있을가? 정우는 스르르 두눈을 감고 얼굴을 하늘로 들어올렸다. 해볕이 정우의 얼굴을 아프게 찌르고있었다. 찌르는듯한 그 아픔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싶었다. 그 아픔을 받아서 삼검불같이 엉켜지는 머리속이며 터질듯이 갑갑해 지는 가슴이며에 골고루 보내주고싶었다. 그러느라면 되려 아픔이 사라지고 마음이 따스하고 푸근해질것만 같았다. 해살처럼 퍼져나가는 아픔을 뚫고 쌕쌕 고르롭게 내쉬는 환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르로운 숨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콩콩 하는 강아지 짖음소리가 바람에 날려왔다. 정우는 그 소리에 두눈을 천천히 뜨고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시장광장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은 많은데 그들처럼 걸상에 자리를 하고 앉은 사람은 몇이 안되였다. 그들로부터 약간 떨어진 분수대옆의 걸상에 앉아 하얀 털의 강아지 두마리를 지켜보고있는 두 녀인도 그 몇 안되는 사람들중의 일부였다. 앞발에 약간 까만 털이 있는 강아지가 쏘세지를 먹고있는 코등이 까만 강아지를 향해 짖어대고있었다. 하지만 코등이 까만 강아지는 앞발에 까만 털이 있는 강아지가 짖건 말건 여전히 열심히 쏘세지만 먹어댔다. ―꼬미야, 짖지만 말구 너두 와서 먹어라. 얘가 다 먹어버리겠다. 선글라스를 건 녀인이 코등이 까만 강아지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놈은 쏘세지에 관심이 없는듯 여전히 앞발에 까만 털이 있는 놈을 향해 콩콩 짖어댔다. 그러자 코등에 까만 털이 있는 놈이 아쉬운듯 쏘세지를 곁눈질 하면서 앞발에 까만 털이 있는 놈곁으로 다가갔다. 두놈은 한순간 얼굴을 맞대고 킁킁거리더니 무슨 약속이라도 한듯 나란히 앞을 바라고 뛰여갔다. 선글라스를 건 녀인이 강아지들을 가리키며 옆에 앉은 친구인듯한 녀인에게 말했다. ―쟤들이 눈이 맞았나봐요. 련애하러 가는것 같아요. 녀인의 목소리가 별로 높지 않게 들렸지만 정우는 웬지 그 소리가 귀에 거슬리는듯싶어 그쪽에 아니꼬운 눈길을 날렸다가 천천히 환에게로 돌렸다. 환의 눈길이 달려가는 강아지들에게 쏠려있었다. ―그놈들, 털이 참 하얗지? 정우가 환의 기색을 살피며 담담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조조, 조 앞발이 까만년이 나빠요. 코등이 까만놈을 홀렸다니까요. 조조, 조 꼬리질을 하는 꼴을 좀 봐요. 환이 강아지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목소리에 날이 서있었다. 코등이 까만 강아지가 앞발이 까만 강아지의 궁둥이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꼬리를 하늘거리고있었다. 환이가 성난듯 그 모양을 지켜보다가 격하게 내뱉었다. ―저놈도 바보, 천치, 부실이예요. 그년이 뭐가 좋다고 궁둥이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지… ―환아. 정우가 환의 말을 중둥무이했다. 환이 정우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저 구름이 참 하얗지? 생각과는 달리 정우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말에 환은 머리를 들어 하늘가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하얀구름에 눈길을 가져갔다. 환이 잠간 하얀 구름송이들을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하얀 구름속에 얼마나 많은 비가 섞여있을가요? ―거야 비로 변해봐야 알겠지. 저 하얀 구름속에 얼마나 많은 비가 숨어있을지는… ―탈을 좋아해요? 아저씨는. 환이 문뜩 화제를 돌렸다. ―뭐, 탈? 정우가 깜짝 놀라며 뒤말을 얼버무렸다. 노란 셔츠에 뻘건 탈을 쓴 환의 모습이 머리속에 또렷이 떠올랐다. 정우는 환에게 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너, 혹시 경극을 좋아하니? ―아니요, 경극보다 경극에서 쓰는 탈을 좋아해요. 특히 뻘건 탈을 좋아 하죠. ―왜? ―뜨거워 보이잖아요. 뻘건색이. 스스로 초라해 보일 때 그리구 가슴이 시릴 때 전 뻘건 탈을 쓰군해요. 뻘건 탈을 쓰면 자신이 생기거든요. 안마방, 참 재수 없을 때가 많아요. 별별 손님들이 다 있거든요. 가끔은 제가 버러지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뻘건 탈을 쓰고 버러지처럼 벌벌 방안에서 기여다녀요. 그럼 함께 있는 애들이 제가 청승을 떤다면서 제 궁둥이를 걷어 차요. 그 발길질에 저는 다시 일어서게 되죠.  환의 목소리에는 제법 유머감까지 녹아 흐르고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환은 이 이야기를 이처럼 쉽게 가볍게 할수 있을가? 정우는 그런 생각을 굴리다가 환의 눈길을 정시하며 말했다. ―다시 일어날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환아. ―생각하기 나름이죠. 아저씨… 환이 그렇게 정우를 부르고는 아래말을 끊어버렸다. 정우는 환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며 아래말을 기다렸지만 환은 점도록 아무 말 없이 씩 웃기만 했다. 궁금했다. 환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가? 정우는 환의 곁으로 한뽐 다가 앉으며 물었다. ―왜 불러놓고 말이 없니? ―좋아서요. ―뭐? 좋아서? ―네. ―뭐가 그렇게 말까지 잊을 정도로 좋은데? 환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꿈을 꾸고있어요. ―무슨 꿈을? ―아저씨하구 시장에 가서 남새를 사구 그 남새를 다듬어서 료리를 하구 그 료리를 마주 앉아 맛나게 먹는 꿈을요. 아저씨, 저의 꿈이 너무 큰거죠? 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환아! 순간 정우는 코등이 시큰해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얼마나 외로왔으면… 얼마나 외로왔으면 얘가 이런 꿈을 다 꿀가? ―아니야, 환아. 우리 함께 시장에 가서 남새를 사자, 함께 다듬구 함께 료리를 만들자. ―정말이예요? 아저씨. 음… 일요일날 어때요? 이번주 일요일날 말이죠. 제가 그날 온하루 쉬거든요. 일요일날 말이예요. ―그래, 일요일날 우리 함께 시장 가서 남새 사구 다듬구 료리해 먹는거다. ―아저씨. 이게 꿈은 아니죠? ―환아! 정우는 으스러지게 환의 손을 잡아주었다.   6   환의 료리솜씨는 과연 일품이라고 할수 있었다. 주방에서 잠간 지지고 볶고 하더니 향기롭고 색갈이 고운 료리를 네가지나 만들어 상에 올렸다. 정우가 곁에서 도와주려고 했지만 환이 기어코 정우를 걸상에 눌러앉혔다. ―아저씨, 오늘은 꼼짝 말구 앉아 향수만 하세요. 제 솜씨를 구경하다가 나중에 맛이나 제대로 평가하면 된다니까요. ―그럼 오늘은 진짜 환의 덕에 향수나 한번 해볼가? ―그럼요. 천만 지당한 일이죠. 아저씨, 이렇게 있으니 우리 진짜 가족 같지 않아요? 환이 얼굴에 홍조를 피워 올리며 말했다. 파르르 떨리는 그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려왔다. ―가족? 정우는 속으로 그 말을 되네이다가 머리를 돌렸다. 예고도 없이 눈시울이 젖어올랐던것이다. 가족, 가족! 정우에게는 익숙하면서도 너무나 생소하게 느껴지는 낱말이였다. 가족, 정녕 나에게 가족이 있었던가? 숙이가 짐을 꾸려 가지고 나간후로 정우는 가족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비록 우로 형님이며 누나들이 계시지만 그들도 진작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얼마전에 모두 한국에 진출했던것이다. 하기에 정우는 내내 혼자였고 그것이 습관이 되여 크게 외로운것도 모르고 살아왔었다. ―그래, 정말 우리 가족 같구나. ―그래요, 아저씨. 우리가 쭉 이렇게 함께 살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말을 마친 환이가 혀를 홀랑 내밀며 정우를 훔쳐 보았다. 정우는 일순 환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할수 없어 어어 하고 입만 쩝쩝 다셨다. ―놀랐죠? 괜히 해보는 소리예요. 깊이 듣지 마세요. 아저씨, 맥주컵이 어디 있죠? 환이 인차 화제를 돌렸다. 그제야 정우는 걸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내가 내리울게. 인젠 너 상에 와 앉아라. 정우는 뿌옇게 먼지가 오른 맥주컵을 찬장에서 내리워 물에 씻기 시작했다. 그새 환은 맥주병 두개를 들어 아구리를 맞붙여 마개를 따면서 말했다. ―시원할것 같아요. 어서요, 아저씨. 정우는 한손에 컵 하나씩 들고 상으로 다가왔다. ―그래, 시원하게 한잔씩 마시자. ―자요, 아저씨. 환이 두손으로 정우의 컵에 맥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래, 환아. 너도 한잔 받어. ―네. 환이 두손으로 정우앞에 컵을 내밀었다. 하얀 손이 떨리고있었다. ―이렇게 집에서 맥주를 마시기는 오랜만이네. ―행복해요. 아저씨. 환의 눈에 이슬이 맺혀 가랑거리고있었다. ―참… 환이 맥주컵을 상에 올려놓고 주먹으로 질끔질끔 눈확을 눌렀다. 그러는 환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정우가 입을 열었다. ―마음껏 행복해 해두 돼. 환아. ―그래두 돼요? 제가 진짜 그래두 돼요? 아저씨. ―그럼, 그렇구 말구. 정우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환의 입가에 아지랑이 같은 실웃음이 하늘하늘 피여나고있었다. 더 이상 이 애가 외롭게 하지 않을거다, 얘게 모자라는것들을 내가 보상해줄거다. ―환아, 너 스물 두살이라구 했지? ―네. ―아직은 늦지 않아. ―뭐가요? 아저씨. 환이 정우를 바라보며 동공을 키웠다. 정우가 잠간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너 아직 어리거든. 이렇게 사회에 나와 안마방을 전전하며 허송세월하기는 아까운 나이라구. ―그럼 어떻게 해요. 저에게 중요한건 제 한 목숨을 먹여살리는 일이거든요. ―아저씨를 믿어. 환아. 아저씨가 너를 다시 학교에 보내줄거야. 그래, 미술공부를 그냥 하고싶은 생각은 없니? ―아저씨! 환이 정우를 바라보며 머리를 저었다. ―저 환이예요. 오다가다 만난 남남이라구요. 저 큰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저 이렇게 가끔 아저씨와 함께 앉아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것만으로도 족하다구요. 가족처럼 이렇게 한순간을 행복하게 보낼수 있게 하는것만으로도 아저씨는 저에게 너무나 많은것을 주는거예요. 환은 흥분으로 하여 쌕쌕 거친 숨을 몰라쉬며 가슴을 들먹였다. 정우가 그러는 환의 얼굴에 눈길을 박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두 꼭 이것을 해보고싶었단다. ―…… ―나두 늘 아들과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고 아들의 손에 학비를 쥐여주는 꿈을 꾸었더랬지. 하지만 그게 그냥 꿈으로만 끝날것이라고 생각했거든. 고맙다. 환아. 잠자던 나의 꿈을 깨워줘서. ―아저씨, 저저, 저 정말 이렇게 행복해두 돼요? 환이 솟구치는 격정을 참을수 없다는듯 잘근잘근 아래입술을 씹어댔다. 바로 그때 찌르릉 환의 핸드폰이 울러댔다. 환은 흠칫 놀라면서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환이 얼굴색을 흐리우며 걸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정우도 놀라며 걸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 누구의 전화니? ―삼삼, 삼촌의 전화예요. 환이 꺽꺽 말을 더듬었다. ―왜 그래? 빨리 전화를 받아야지. ―네. 환이 핸드폰을 귀가에 가져다댔다. ―네, 숙모님, 저 환이예요. 네? 뭐라구요? 환의 목소리가 높아지고있었다. ―네네, 그래 어떻게 됐어요? 입원 했다구요? 수술을 해야 한다구요? 환이 입술을 감빨며 왼손에 들었던 핸드폰을 오른손에 빠꿔지고는 다시 귀가에 가져다 댔다. ―그래서요? 네? 보증금 만원을 내야 수술할수 있다구요? 어쩜 좋아, 어쩜 좋아. 저에게 그런 큰 돈이 어데 있어요? 알았어요. 숙모님. 환이 핸드폰을 힘없이 상우에 내려 놓고는 머리를 숙였다. 환의 어깨가 물결을 타고있었다. ―웬 일이야? 천천히 말해봐. 아저씨께. ―어쩌면 좋아요. 아저씨. 삼촌이 차사고를 당했대요. 경운기를 몰고 밭에 비료치러 갔다 오다가 그만 벼랑에서 경운기를 굴렸대요. 경운기는 파철이 되였구 아저씨는 의식을 잃은 상태래요. 병원에서 검사를 거쳤는데 뇌에 피가 고였대요. 당금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대요.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입술을 감빨며 그렇게 말하고난 환이가 벌떡 걸상에서 몸을 일으켜 문쪽으로 뛰여갔다. ―환아, 너 어디로 가려는거니? ―이러고만 있을수는 없잖아요. 환의 두볼에서 콩알같은 눈물이 둘둘 굴러내렸다. ―안마원에 가야겠어요. 가서 로반(老板)하구 사정얘기를 해야겠어요. ―뭐? 로반하구? ―그 방법밖에 없잖아요. 제가 손을 내밀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어요. 그가 도와줄지는 모르지만. 노력은 해봐야할게 아니예요? 환은 허리를 굽혀 급히 신을 찾아신었다. ―잠간만. 정우가 소리치고는 방으로 들어가 웃옷을 들고 나왔다. ―가자. ―어디루요? ―급하다며. ―어디루 가냐구요? ―내가 났겠지. 너의 로반보다 내가 났겠지. 먼저 급한 불부터 끄고보자. ―아저씨! ―환의 목소리가 피터지게 울렸다. ―가자는데두. 어느새 신을 찾아신은 정우가 소리쳤다. 환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럴수 없어요. 절대 아저씨 돈을 쓸수 없어요. 아저씨를 도와드리지는 못할망정 이런 부담을 줄수 없어요. ―가족끼리는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니다. 가자. 정우는 환의 손을 끌고 문을 나섰다. ―무사해야 할텐데. 너의 삼촌이 이 고비를 무사히 넘겨야 할텐데. ―무서워요, 아저씨. 우리 삼촌을 어쩌면 좋아요. 환이 다시 울음을 터쳐올렸다. 정우가 머리를 돌려 환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괜찮아, 괜찮다구. 힘을 놓지 말어. 아저씨가 있잖니? 꼭 좋아질거야. ―아저씨, 고마와요. 잊지 않을게요. 오늘 식사를 끝내구 아저씨랑 “탈놀음”도 놀려구 했는데… 잘 할게요. 아저씨께. 그리구 우리 “탈놀음”을 놀아요. 담날. ―환아! 정우는 꺽 메여 오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짜내며 가슴으로 웨쳤다. 그 와중에도 자기를 위해 뭔가를 준비하고있는 환이 목이 메이도록 고맙고 믿음직스러웠다.   7   “담날”은 언제쯤일가? 기다려졌다. 정우는 소풍가는 날을 기다리는 악동처럼 환이 “탈놀음”을 하자고 하던 그 “담날”이 기다려졌다. 그러다가도 자기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쳐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현금 인출기에서 만원을 뽑아 아무 담보도 없이 환에게 들려보내놓고도 돈 근심보다 “담날”에 하게 될 “탈놀음”이 어떤것일가를 상상하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가끔 머리를 쳐들었던것이다. 그러다가도 스스로 머리를 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거야? 그 돈을 남에게 줬는가? 환에게 준거라구, 환에게!  그러자 그날 공원 정자에서 황매희)를 구경하는 사람들속에 숨어있던 노란 셔츠에 뻘건 탈을 쓴 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탈놀음”이란 얼굴에 탈을 쓰고 색갈 바꾸기를 하는것일가? 환의와 똑 같은 탈을 쓰고 앉아 “뻘건색, 파란색” 하는 구령에 따라 누구 얼굴에 씌여진 탈이 더 빨리 색을 변화시키는가를 내기하는것도 제법 재미있을것 같았다. 정우는 시무룩이 웃음을 지으며 인터넷에 올라 검색창에 “탈놀음”이라고 처넣었다. 눈 깜박할 새에 수많은 글들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정우는 순간 “헉!” 하고 숨을 멈췄다. 평소 생각조차 하지 않던 “탈놀음”을 두고 이렇게 많은 글이 인터넷에 올라있다는 사실앞에서 정우는 세상구석의 먼지알갱이보다도 더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는것 같아 얼굴이 뜨거워졌다. “탈놀음”, 도대체 어떻게 하는것일가? 정우는 마우스를 굴려 이것저것 클릭하기 시작했다. “탈놀음”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놀음방식은 각양각색이였다. 미녀의 얼굴에 눈이며 코며 입이며를 나름대로 바꿔 달거나 해괴망칙한 옷이며 액세서리 같은것들을 갈아주는 놀음이 대부분이였다. 누구의 착상인지는 몰라도 미국대통령 오바마에게 탈을 씌우는 놀음도 있었다. 오바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정우는 허허허… 웃음을 터쳐 올렸다.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럴수가, 이럴수도 있는것일가? 정우는 모니터앞에 한뽐 다가 앉아 놀음방법을 소개한 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간단했다. 바탕에 찍혀있는 오바마의 거무스레한 얼굴에다 옆에 준비되여 있는 부위들을 옮겨 붙이면 되였다. 정우가 손가락을 한번 까딱하면 흑인인 오바마가 백인으로 변했고 또 한번 손가락을 까딱하면 황인종으로도 변했다. 완전히 정우의 뜻에 따라 미남으로도 될수 있고 추남으로도 될수 있었다. 마우스 하나로 하늘같이 높은 대통령어르신을 마음대로 료리하는 그 기분이 참으로 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웬지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우는 걸상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스르르 두눈을 감았다. 정우의 눈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고 갑삭갑삭 허리꺽기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으며 살룩살룩 개다리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춤을 추는 자세는 저마다 달랐지만 한결같이 얼굴에 탈을 쓰고있었다. 정우는 자기도 그 인파속에 밀려들어가는 환영을 보고있었다. ―이놈아, 네놈이 여태 사람의 탈을 쓰고 짐승처럼 사는줄을 몰랐구나. 아이구, 원통해라. 저 인피를 뒤집어 쓴 짐승을 남편이라 믿고 살아오다니… 갑자기 웬 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우는 깜짝 놀라며 두눈을 번쩍 떴다. 소리는 문밖에서 들려오고있었다. ―잘못했소. 잘못했다니까. 다시는…다시는… ―개소리라구 해라. 누가 그 소리를 믿어. 왕과부나 믿을가. 녀인의 목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정우는 웬 일인가싶어 벌떡 일어나 문쪽으로 다가가 출입문을 열었다. 목소리 임자는 웃층에 사는 한족녀자였다. 녀자는 허공에 주먹질을 해대며 입에 거품을 물고있었다. 녀자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풀 꺾인 그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정우의 귀를 파고들었다. ―아니라는데 왕왕, 왕과부는 무슨… ―이 짐승보다도 못한것아. 그래두 체면은 있는감? 아까 활동실에서 네놈이 왕과부에게 웃음을 슬슬 던지며 발정난 수캐처럼 헐떡거리는걸 내 이 두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두 발뺌을 해? 그러느라구 반나절에 200원이나 잃었지. 아니, 잃은게 아니라 네놈이 그 과부년에게 그 돈을 그저 찔러준거야. ―아아, 아니라는데… 아니라는데. 녀자는 입만 열면 청산류수로 거침없이 욕을 쏟아냈지만 남자는 입이 물꼬처럼 막혔는지 그저 아니라는 말만 똑똑 떨구고있을뿐이였다. 복도를 딱 때기기라도 하려는듯한 녀자의 욕지거리를 들으며 정우는 웬지 기분이 잡쳐 출입문을 닫았다. 거리에서 과일장사를 하는 웃층의 남녀는 평소에도 가끔 부부싸움을 할 때가 있었지만 이번처럼 복도에 나서서 동네사람들을 놀래우기는 처음이였다. 정우는 녀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싶지 않았다. 얼굴이 검실검실하고 몸집이 둥글소처럼 튼실하게 생긴 남자는 절대 녀자가 말하는것처럼 무슨 탈을 쓰고있는 짐승 같지 않았다. 되려 거짓말을 모르고 수걱수걱 일만 하는 우직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는것이 나을상싶었다. 헌데 그 남자가 “왕과부에게 웃음을 슬슬 던지며 발정난 수캐처럼” 헐떡거렸다는것이다.  정우는 저도 몰래 쿡 하고 허구프게 웃음을 터쳤다. “발정난 수캐”는 어떤 모양일가? 정우는 어쩜 자신이 세상과 점점 멀어져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구경 어떤 탈을 쓰고 사는것일가?   그것은 정우가 리혼한 이듬해 겨울이였다. 당시 정우가 사는 도시에도 하루 새롭게 안마방이 들어서고있었다. 그때 정우는 경제부에서 기자로 뛰였다. 민영기업에대한 취재가 많았다. 기업의 홍보효과를 높이기 위해 기업주들은 기자들의 필끝에 눈길을 모으고있었다. 하기에 취재가 끝난후이면 주최측 사람들에게 끌려 안마방으로 가는 기회가 많았다. 정우는 브래지어까지 다 들여다보이는 적삼만 달랑 걸치고 앉아 웃음을 살살 흘리며 자기의 몸뚱이를 주물럭거리는 그녀들이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녀들의 몸뚱이를 볼 때마다 자기를 무참히 꺼꾸러 뜨린 숙이의 하얀 몸뚱이가 떠올랐던것이다. 그때마다 정우는 그곳에서 나오고싶었지만 주최측 사람들의 성의를 봐서 그렇게 할수도 없었다. 그날도 주최측에서는 정우를 끌고 2차로 안마방에 갔다. 말이 정우를 초대하는것이지 주최측 사람들이 다섯이나 따라붙었다. 그날도 브래지어가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야하게 차려 입은 녀자안마사들이 주르륵 들어섰는데 다섯뿐이였다. 마담이 죄를 진 노비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나불거렸다. ―어쩔가요? 귀한 손님들이 모처럼 오셨는데… 애들이 청가를 맡아서… ―뭔가? 안마사가 모자란다는 말인가? 들어오자 바람으로 침대에 벌렁 들어 누웠던 김경리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무뚝뚝하게 쏘아붙였다. 마담은 흠칫 몸을 떠는체 하다가 김경리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아이, 죄송스러워라. 그렇다니까요? 두시간쯤 지나면 서넛이 오기는 오겠는데, 급하시면 먼저 남자안마사를 부를가요? 그 애 안마솜씨가 좋아요. 생기기두 잘 생기구요. 마담의 말을 듣는 순간 정우의 머리에는 내가 왜 여태 남자안마사를 부를 궁리를 못했을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랬다. 남자안마사라면 녀자애들의 야한 브래지어를 보는 불편함이 없을것 같았다. 정우가 마담을 건너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남자안마사, 괜찮아요. 나는 힘 있는 안마사가 좋거든요. 정우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김경리가 입을 열었다. ―그럴수야 없지. 어찌 손님을 푸대접할수 있소? 먼저 이분께 제일 이쁜 아가씨를 붙여요. 그래, 저 애가 좋겠네. 김경리가 제일 이쁘게 생긴 녀자애를 가리키며 입가에 묘한 웃음을 피워 올렸다. ―아니, 괜찮대두. 괜찮다는데… 정우는 그저 “괜찮다”는 말만 더듬을뿐 끝내 “녀자의 손길이 싫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후에도 정우는 안마방에 갈적마다 남자안마사를 부르고싶었지만 남들의 눈이 무서워 소원 성취를 못하고 녀자안마사들의 손에 몸뚱이를 맡기군 했었다. 그렇게 남들이 예쁜 녀자가 좋다면 자기도 따라서 예쁜 녀자가 좋다고 더 크게 웃으며 “호색”의 탈을 써보이려고 스스로를 힘들게 했던것이다.  ―아저씨같은 남자를 상대루 이걸 해보고싶었어요. 순간 정우의 귀전에 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숨김없이 진실한 자기를 남에게 보여줄수 있는 환이 참 당당하다고 생각되였다. 지어는 그 당당함이 부럽기까지 했다. 환이 보고싶었다. 정우는 컴퓨터상우에 놓여져있는 핸드폰을 집어다가 환의 핸드폰번호를 눌렀다. 환의 목소리가 기다려졌다. 하지만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환의 해맑은 목소리가 아니라 “대방의 전화기가 꺼져있습니다.”라는 쇠붙이 부딪치는듯한 차가운 목소리였다. 이 시간에 왜 핸드폰이 꺼져있을가? 정우는 야릇하게 생각하며 다시 번호를 눌렀다. 전화기에서는 여전히 “대방의 전화기가 꺼져있습니다.”라는 소리만 반복되였다. 웬 일일가? 정우는 괜히 불안해나기 시작했다. 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것이 아닐가? 정우는 불길한 생각을 누르며 환이 삼촌의 수발을 드느라고 핸드폰을 꺼놓았을것이라 나름대로 좋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간이지 스멀스멀 몰려드는 근심은 도무지 쫓을수가 없었다. 정우는 다시 환의 핸드폰번호를 눌렀다. 그후에도 십여번이나 반복했지만 환의 핸드폰은 번마다 꺼진 상태였다. 이튿날아침, 정우는 다시 환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핸드폰에서는 여전히 쇠붙이 부딪치는것 같은 녀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올뿐이였다. 정우는 또 다시 몰려드는 불안감을 애써 누르며 어제 환이가 사준 셔츠를 꺼내 입고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대의 거울앞에 마주섰다. 하얬다. 하얀 셔츠에 감긴 자기의 몸뚱이도 하얗게 변하는것 같았다. 하지만 가무잡잡한 얼굴은 되려 하얀 몸뚱이와 대조를 이루어 더 검어보였다. 정우는 세면대에서 흰수건을 내리워 얼굴을 가리웠다. 그러자 까만 눈만 남아 판들거리는것이 스스로도 아주 우스꽝스러웠다. 정우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크게 꾸짖었다. ―왜 얼굴이 하얗게 질렸냐? 정우는 인차 목소리에 비굴함을 가득 발라서 대답했다. ―대왕마마, 질리다니요? 소인은 하얀 탈을 썻는데요. ―네놈이 무슨 나쁜 심보를 품고 탈을 뒤집어쓴게냐? ―나쁜 심보라니요, 대왕마마. 소인은 앞으로 하얗게 살려구 결심했는데요. 정우는 연극무대에서 대사를 치듯 그렇게 혼자 말하고는 스스로도 어이없다는듯 크게 웃어버렸다. 하지만 그 웃음의 꼬리를 물고 코등이 시큰해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가끔은 제가 버러지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뻘건 탈을 쓰고 버러지처럼 벌벌 방안에서 기여다녀요. 그럼 함께 있는 애들이 제가 청승을 떤다면서 제 궁둥이를 걷어 차요. 그 발길질에 저는 다시 일어서게 되죠. 환의 차분한 목소리가 귀전에 쟁쟁 울리는듯싶었다. 환아, 너 지금 뭘하고있는거니? 왜 핸드폰은 꺼져있지?   *월 *일, 화요일. 환의 핸드폰은 온 하루 꺼진 상태이다. 혹시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생긴거나 아닐가?   *월 *일, 수요일. 꿈을 꾸는것 같다. 내가 실지 환이라는 애를 만난적은 있었던가?     *월 *일, 목요일. 두렵다. 내가 그 어떤 환각속에 사는것은 아닐가?   8   ―환이라구요? 그런 애가 없는데요. 경리가 정우를 바라보며 머리를 저었다. ―그럴수가 없겠는데요. 그 애 분명 여기서 일한다고 말했다니까요. 정우가 경리앞으로 한발 다가서며 긍정적으로 말했다. 경리는 그러는 정우를 바라보며 막무가내라는듯 쩝쩝 입을 다시다가 어조에 가시를 박아 한마디 던졌다. ―진짜라니까요. 정 믿기지 않으면 저쪽에 가보세요. 거기 남자안마사들의 사진이 다 붙어있으니까요. 정우는 경리가 가리키는쪽으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가 벽에는 남자안마사들의 사진이 여라문장 붙어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환의 얼굴이 없었다. 정우는 속에서 뭔가 쿵 하고 떨어져내리는듯한 진동을 감지하고있었다. 정우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옮겨 다시 경리실로 들어갔다. ―없네요. 그 애 사진이. 그럼 요새 일을 그만둔 애는 없나요? ―없다니까요. 저 사진에 있는 애들이 반년째 쭉 여기서 일하고있어요. ―미미, 미안합니다. 시끄러움을 끼쳐들여서요. 정우는 경리의 야릇한 눈총을 받으며 문을 밀고 나왔다. 정우는 힘겹게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머리를 돌렸다. 커다란 안마원간판이 눈을 치고 들어왔다. ―동시장앞에 있는 왕부안마원 있잖아요. 거기서 48호를 찾으면 바로 저예요. 환의 목소리가 귀전에 쟁쟁 울리는듯싶었다. 환아, 너 지금 어디에 있는거니? 정우는 끝내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 세상 어딘가에 홀로 던져진듯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머리속으로 기여들었다. 정우는 두손을 머리에 가져갔다. 오른주먹을 들어 쿡쿡 머리통을 쥐여박다가 두손으로 와락와락 머리칼을 잡아뜯었다. 머리속이 하얗게 바래지는듯싶었다. 정우는 몸부림을 멈추고 머리를 쳐들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정우는 자기도 그 소용돌이에 실려 저 멀리 하늘가로 휠훨 날아오르는듯싶었다. 이게 아니지, 이건 아니야! 정우는 그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려고 한껏 옹송그리며 와들와들 몸을 떨었다. 검은 구름에 쌓인 하늘이 커다란 탈을 쓰고 정우를 내려다보며 찬 웃음을 짓고있었다.                                                   
6    단편소설 * 흑장미 댓글:  조회:1887  추천:1  2013-03-27
1 흑장미였다. 하얀 봉투에 검은색 펜으로 한 잎 한 잎 정성들여 그려진 흑장미는 시리게도 정우의 눈을 파고들었다. 정우는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면서 주먹을 들어 질끔질끔 눈확을 찍었다. 차가운 웃음을 짓는 듯한 흑장미가 다시 부옇해진 정우의 눈으로 날아들었다. 언제 넣었지? 이 봉투를. 분명 그 애가 넣은 것일 텐데. 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지? 해볕 좋은 여름날, 개울가에서 아물아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한줄기의 강한 호기심이 머리에 솟아올랐지만 정우는 선듯 그 봉투를 찢을 수 없었다. 두려웠다. 봉투안의 비밀이 백일하에 들어나는 순간, 그 충격을 받아 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정우는 봉투를 손에 든 채 두 눈을 감으면서 쏘파에 엉뎅이를 가져다댔다. "잘했어요." 속삭이는 듯한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가 정우의 귀전에서 울리는 듯싶었다. 정우는 봉투를 가져다 가슴에 꼭 붙였다. 후둑후둑 가슴이 널뛰기를 시작했다. 정우는 봉투를 쥔 왼손 우에 오른손을 포갰다. 마구 높뛰던 가슴이 차츰 안정을 찾으면서 온몸으로 말 못 할 흥분이 찌릉찌릉 퍼져나갔다. 아래다리가 뻣뻣해왔다. 죽은 듯 숨을 죽이고 있던 정우의 남성이 버럭 성깔을 부리며 다시 머리를 쳐들었다. "오래 동안 얘를 방치해두었던가 봐요. 이렇게 성나하는 것을 보니… 풀어주세요. 걔가 하고 싶다는 대로 활 풀어버리세요. 걔도 가끔씩은 들말처럼 날칠 권리가 있다구요." 그녀는 검붉게 달아오르며 벌떡벌떡 솟구쳐대는 그놈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도란도란 목소리를 이어갔다. 정우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살살 녹아내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감로수였다. 감로수로 되여 사흘 굶은 고양이처럼 머리를 다리사이에 꿍쳐 박고 누워있던 정우의 남성을 깨우고 있었다. 깨여난 남성은 더 이상 사흘 굶은 고양이가 아니라 포획물을 앞에 둔 늑대였다. 정우는 와락 그녀의 몸에 덮쳤다. "흐윽!" 그녀는 길게 들숨을 당기며 침대에 무너지더니 두 팔을 들어 정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우는 거칠게 숨을 톺으며 그녀의 팔에서 몸을 빼고 상체를 세우며 오므리고 있는 그녀의 두 다리를 와락 열어 제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으윽 숨을 톺으며 바들바들 두 다리를 떨었다. 그 바람에 그녀 다리 사이에 숨어있던 꽃잎이 하늘거렸다. 정우는 상체를 숙이며 그녀의 꽃잎에 들떠있는 남성을 쏘았다. "천천히, 천천히요…" 정우는 천길나락에서 들려오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를 의식하면서 불끈대는 남성을 오른손으로 잡아 그녀의 꽃잎에 박아 넣었다. 시간이 멈춘 듯싶었다. 세상에 오직 자기만 남아있는 듯싶었다. "으윽- 아악- 어허억!" 그녀가 뾰족하게 손톱을 기른 손가락으로 정우의 가슴을 박박 긁어댔다. 그녀의 손가락이 지나간 가슴에 붉은 고랑이 패졌다. 붉은 고랑위로 뜨거운 땀이 흥건히 배여 올랐다. 그녀가 흑흑 느끼며 속삭였다. "다 먹어요. 아귀아귀 다 먹어버려요. 와와, 와늘 늑대 같아요." "아-우-" 정우는 진짜 한 마리의 굶주린 늑대처럼 단말마적으로 괴성을 뽑아 올리며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그녀의 가슴에 상체를 던졌다. "까닥까닥…" 정적이 흐르는 방안에서 늑대가 뼈다귀를 씹는 듯한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청승스럽게 귀속을 파고들었다. 정우는 자기가 그 초침소리에 끌려 어디 론가를 향해 허이허이 기여 가고 있다고 생각 되였다. "힘드시죠?" 약간 맥이 빠진 듯한 바스음이었다. 정우는 흠칫 놀라면서 어! 하고 중심 없이 소리를 뽑았다. "잘했어요." 약간 맥이 들어간 목소리에는 야유 비슷한 냄새가 배여 있었다. 그 냄새를 맡으며 정우는 어디로부터 치고 들어오는지도 모를 은은한 아픔을 느꼈다. 정우는 입술을 감빨면서 이마살을 찡그렸다. 그녀가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 정우의 이마를 오른손식지로 만지면서 입을 열었다. "한국에 갔죠?" "응." "꽤 댔죠" "몇 살이야?" "스물하나." "스스, 스물하나?" "왜? 너무 늙었나요? 설마… 열여덟 살 짜리를 찾는 건 아니죠?" "재밌네." "몇 년 됐냐구요?" "뭐가?" "아저씨 부인 말이죠." "아저씨 부인이 뭐가 몇 년 됐냐구?" "한국에 가신지." "누가 아저씨 부인이 한국 갔댔어?" "방금 응 하셨잖아요?" "내가 그랬어?" "어마나, 이 아저씨 보셔…" 그녀가 말꼬리를 치켜 올렸다. 그러자 눈꼬리마저 살짝 우로 쳐들렸다. 정우는 두 눈을 질끔 감았다 뜨며 그녀 앞으로 한 뽐 다가앉아 뚫어져라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며 "왜요?" 하고 말끝을 흐렸다.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우는 아닌 것이 아니라는 막연한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어디서 보았던가? 분명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야… 정우는 차탁 우에 던져져있는 팬티를 주어다 다리에 걸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잘했어요." 하던 그 목소리가 다시 귀전에 스쳤다. 아! 정우는 신음 비슷이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왜 그러세요? 불편하세요?" 그녀가 겁에 질린 듯 다가앉았다. "아니." "놀랐잖아요. 무슨 생각을 했어요?" "너무 닮았어." "누구하구요?" "그런 사람 있어." "첫사랑하구요? 남자들은 참, 호호호…"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정우는 "잘했어요." 하고 말하던 한 여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22년이야. 22년이란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은가봐. 아니라면 어떻게 그 얼굴이 이처럼 또렷이 보여 질 수 있어? 바로 이 안마원이였다. 22년이란 세월을 거치며 주인이 몇 번 바뀌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22년 전에도 바로 송림각이라고 부르는 이 안마원이였다. 텔레비전방송국 기자로 뛰던 시절이었다. 정우가 살던 도시에도 안마원이라는 이름의 유흥업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금방 지역 텔레비전프로그램이 흥기하기 시작하던 때라 텔레비전방송국 기자는 어디가나 대우를 받았다. 하기에 취재가 끝난 후, 식사접대는 두말할 것도 없고 노래방에 이어 안마원 접대는 필수적인 코스였다. 그날, 잘 나가는 한 민영기업에 대한 취재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끝낸 후 노래방에 이어 보스가 끌고 온 곳이 바로 송림각이었다. 그때 정우는 금방 결혼한 몸이었다. 집에서 기다릴 아내를 생각해서 일찍 귀가하려고 했지만 보스는 기어코 정우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날 안마하러 들어온 여자가 바로 "잘했어요." 하고 말하던 장미였다. 그녀는 손에 들고 들어온 안마도구들을 조용히 침대 밑에 내려놓은 후 공손히 일어서서 아미를 살짝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미라 불러주세요. 흑장미라 해도 되구요." "뭐, 흑장미? 그 이름을 들으니 접선하러 들어온 지하당원이 생각나네." "호호호… 손님, 참 농담도 잘하시네요. 원체 여기 오는 분들은 다 지하당원이 아닌가요?" 방긋 웃는 얼굴이 그렇게 예쁜 축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성격이 활달하고 "일"에 열중하는 스타일이었다. 금방 결혼해서 아내의 손에만 길들어져가던 정우로서는 장미의 "기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어머니의 슬하에서 곧은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정우로서는 남여 간의 일을 두고 그렇게 많은 생각을 굴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러한 정우에게 장미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번 장미가 리드하는 대로 체위를 바꿔가면서 그 일을 치르노라면 정우는 마치도 천당을 유람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일이 끝나면 장미는 소학교선생님이 받아쓰기를 잘한 학생을 칭찬하듯 "잘했어요." 하고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우는 "잘했어요." 하는 그 칭찬에 인이 박혀갔고 장미의 손길에 길들여져 갔다. 아내 몰래 그녀한테로 가는 스릴 또한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 걸 알고 있어?" 장미가 이 말을 던진 것은 "잘했어요." 하고 칭찬을 한 후 2분쯤 지나서였다. "뭘?" 정우는 여느 때처럼 팬티를 주어 입으며 건성으로 되물었다. "당신, 참 잘 생겼다는 거. 미남이잖아? 체격두 쭉 빠지구." 장미도 앉은 채로 주섬주섬 옷을 주어 입으면서 말했다. "허허허…" 정우는 장미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웃고는 입을 열었다. "실없는 소리는." "사실이래두. 당신, 쉬원챵( 许文强)같아." "쉬원챵, 좋아해?" "당신, 쉬원챵 보다 더 멋져." 정우는 그 무렵 인기리에 방송되던 텔레비전드라마 "상해탄"을 떠올리면서 다시 한 번 웃음을 터쳐 올렸다. "그럼 내가 주윤발보다 더 멋지다는 거야?" "그럼, 쉬원챵배우… 그래, 그 사람. 주윤발보다 당신 더 멋져." "웃기지마." "당신…" 장미는 네발로 엉금엉금 정우를 향해 기여 가더니 정우의 목을 감싸 안았다. "있잖아…" "말해." "나, 당신 아기 가지고 싶다." "뭐야?" 기절할 듯 놀란 정우가 장미를 밀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저쪽으로 나가 벌렁 넘어졌던 장미가 기어 일어나며 깔깔깔 웃어 제꼈다. "이런, 이런 샌님이라구야. 하하하…" "농담이라두 그러는 건 아니지." "당신, 참 귀여워. 돈, 안 받겠어. 오늘은 내가 당신을 놀았다고 생각할거야. 그랬어. 오늘은 내가 당신을 논거야. 즐거웠어. 하지만 다신 날 찾지 마." 말을 마친 장미가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너무도 뜻밖에 일어나는 장면에 정우는 아연해 있다가 호주머니에서 100원짜리 두 장을 뽑아 그녀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왜 이래? 오늘은. 답지 않게." "순화라 불러, 박순화." 말을 마친 그녀는 쫓기듯 문밖으로 사라졌다… 22년이 흘렀다. 순화, 내가 장미라고 불렀던 박순화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도 내가 송림각으로 다닌다는 것을 알면 그녀는 뭐라고 말 할까? 8년 후, 정우는 아내와 감정이 맞지 않아 이혼을 했고 가끔 그 일이 생각날 때면 송림각을 찾았다. 환경이 더 우아한 안마원이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정우는 송림각만을 고집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우는 8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자기가 순화를 아니, 순화와의 그 아릿한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 닮아있었다. 감쪽같이 자기의 가방에 흑장미가 그려져 있는 흰 봉투를 넣어준 스물한 살에 나는 그 애가 너무도 순화를 닮아있었다. 그녀를 만난 것이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정우는 그만 허구픈 웃음을 터쳤다. 여자의 치마 밑을 들추러 다니면서도 마치나 그 어떤 거사를 치르듯 운명마저 거론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흰 봉투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져주지 않았다. 무엇이 들어 있을까? 왜 소리 없이 이것을 가방에 넣었을까?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우는 봉투를 들어 한동안 눈가늠을 하다가 결심을 내린 듯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잠간이었다. 봉투는 쩍 하니 입을 벌리고 정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우는 봉투 안에 오른손식지와 중지를 밀어 넣었다. "악!" 정우는 순간 괴성을 지어 올렸다. 손가락에 집혀 나온 것은 걸찍한 액체가 흐물대는 콘돔이었다. 2 "불쌍하잖아요? 걔들이 너무 불쌍해서 가슴 터지게 슬펐어요. 걔들이 너무 슬퍼서 머리가 뻥 뚫리게 미쳐버릴 것 같았다구요." 그녀의 목소리는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듯싶었다. 담담한 그 목소리가 정녕 그녀의 입에서 흐르는 것인지 의심스러워 정우는 그녀 쪽에 한 뽐 다가앉아 나불대는 빨간 입술에 눈길을 박았다. 그녀가 정우를 할깃 훔쳐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거든요. 살다보면 그렇게 미쳐버릴 것 같을 때가 많아요. 아니, 미쳐버릴 때가 있다구요." "야!" 정우의 입에서 가시 돋친 함성이 튕겨나갔다. 두 볼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너너, 너 어쩌면…" 결이 나서 부들부들 떠는 정우와 달리 그녀가 사뭇 여유롭게 말했다. "왜 이러세요? 아저씨. 야라니요? 지금, 숙녀한테." 그녀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그러건 말건 정우는 정우대로 가쁜 숨을 톺아 올리며 소리쳤다. "숙녀 좋아 하구 있네. 네깟 것이." "프로답지 않아요, 지금 아저씨가. 장미예요. 장미라 불러주세요. 흑장미라 불러두 되구요…" "뭐? 장장, 장미? 흑흑, 흑장미?" "네, 도고하고 거무스름한 빛을 띤 흑장미요." 장미는 말을 마치고 입가에 아지랑이 같이 새물새물 웃음을 피워 올렸다. 정우는 일순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뚫어져라 장미를 바라보았다. 장미라구? 왜 얘가 장미야? 얘얘, 얘는 구경 어느 장미라는 거야? 정우는 사색을 굴리면서 고통스럽게 두 눈을 꼭 감았다. 장미였다. 정우가 너무 놀라 손에서 떨어뜨린 콘돔을 장미가 답삭 입에 물고 꼬리를 하늘거리며 주방 쪽으로 뛰어갔다. 거의 본능적이었다. 정우는 장미를 따라 주방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내내, 냉큼 뱉지 못해? 뱉으라구." 장미는 냉큼 뱉을 대신 되려 엉뎅이까지 흔들며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분노가 치솟았다. 어디로부터 어떻게 되여 터지는 활화산인지 정우로서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노하고 분할 따름이었다. 정우는 히스테리 적으로 고래고래 목청을 뽑았다. "밟아죽일 년, 단매에 쳐 죽일 년, 집어먹다 체해서 뒤져버릴 년. 이 개새끼야." 장미라고 부르는 그 "개새끼"는 벌써 콘돔을 구멍내버렸고 콘돔 안에 들어있던 걸찍한 액체는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뿌옇한 그 액체를 보면서 정우는 가슴이 터지는 듯 아팠고 심장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뱉으라구. 이 개새끼야!" 정우는 소리 지르며 장미를 향해 발길을 날렸다. "아악!" 정우가 단말마적으로 괴성을 뽑아 올리며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발은 식탁에 맞았고 몸은 평형을 잃었던 것이다. 머리가 바닥에 부딪치면서 텅 하고 둔중한 소리를 냈다. 순간 눈앞에서 무수한 오각별들이 노오란 빛을 뿌리면서 반짝반짝 춤추었다. 정우는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헤치면서 지끈지끈 덮쳐오는 아픔을 느꼈다. "콩콩콩…" 뜻밖의 사태에 당황했던지 장미가 짖어댔다. 온몸으로 덮쳐오는 아픔을 감지하면서도 정우는 장미의 짖음 소리가 참 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픔에 잘 배합된 배경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장미야, 장-미-야-" 웬 일인지 정우의 입을 벗어나온 그 목소리에 야릇한 곡조가 묻어있었다. "자앙미야- 자아앙-미-야-" 정우는 누워서 염불하는 게으른 스님처럼 자꾸 장미만 불러댔다. 콘돔을 씹던 장미가 다가와 푸들대는 정우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정우의 눈귀를 타고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굴러 내렸다. 왜 장미였을까? 왜 딱 장미여야 했을까? 아내와 이혼해서 8년이 되던 그해 정우는 친구들의 소개로 딸애 하나가 달린 한 여인을 사귄 적이 있었다. 소학교교원으로 사업한다는 여인은 총명했고 마음씨도 여렸다. 먼저 아내와의 결혼생활에서 수없이 스트레스를 받았던 정우였지만 그 여인이라면 무난하게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생겼다. 정우는 그해 늦은 가을에 여인과 그녀의 딸을 집에 받아들였다. 하지만 남녀 간의 재결합이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른들 사이는 그런대로 무난하게 둥글어갔지만 그녀가 데리고 들어온 딸애와는 도무지 둥글어질 수가 없었다. 살림을 합해서 아홉 달이 되던 어느 날, 그녀는 끝내 딸애의 손을 잡고 집을 나가고 말았다. 가슴 터지게 아프고 하늘이 무너질 듯 기막힌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상처는 깊었다. 정우는 이생에서 다시는 여자를 집에 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그 후의 어느 날 오후, 정우는 갑갑한 마음을 달래려고 시장에 갔다가 장미를 만나게 되었다. 금방 젖을 뗐다고 했다. 거무스름한 털을 가진 보동보동 살찐 강아지였다. "암컷이꾸마. 귀엽습지?" 강아지를 파는 뚱뚱한 몸매의 한족아줌마가 담배진이 더덕더덕 들어붙은 이발을 버젓이 들어내며 정우를 보고 벙긋 웃었다. "네네, 귀엽네요." "150원씩 하는 건데 아저씨가 딱 사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100원만 받겠습꾸마. 하나두 안 비싸꾸마." 한족아줌마가 큰 선심이나 쓰듯이 말했다. 정우는 아줌마의 거무스레한 이발에 눈길을 주었다가 돌리면서 말했다. "필요 없어요. 150원 들일게요. 데려가면 내 식구가 되는데요." "어마나. 세상에, 세상에… 오늘 귀인을 만났네. 감사합꾸마. 감사하다이. 너 가서 아빠께 잘해야 한다." 아줌마는 강아지대가리를 톡톡 치며 너스레를 떨다가 정우에게 물었다. "이름은 뭐라 하겠슴둥? 얘를." "이름이요? 장미라 하죠. 흑장미요." 왜 장미였을까? 왜 딱 장미였을까? 그때 왜 흑장미가 생각났을까? "왜 장미냐구? 왜왜?" "네?" 장미가 웬 일이냐는 듯 두 눈을 올롱하게 치뜨고 정우를 쳐다보았다. "어?" "참, 장미고 싶어서 장미라 했죠. 왜요? 제가 장미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 "아… 아니." "놀랐잖아요." 장미가 정우의 어깨를 톡 치며 까르르 웃더니 입을 열었다. "기다렸어요. 찾아올 줄 알았다구요." "왜? 왜 날 기다려?" 정우가 장미 쪽에 얼굴을 돌리며 바투 들이댔다. 장미가 픽 코웃음을 쳤다. "당연하잖아요." "뭐가?" "그런 선물을 받고 궁금해 하지 않으면 그게 되려 이상한 게 아닌가요? "그러니 그걸 왜 내 가방에 넣었는가구?" "말했잖아요." "언제?" "불쌍해서라구요." "누가 불쌍한데? 내가?" "아니요. 걔들이요." "걔들이라니?" "어제 밤, 아저씨가 세상에 내보낸 1억도 넘을 그 애들이 불쌍하지 않아요? "뭐뭐? 어쩌면… 어쩌면 그런 생각을…" 정우는 대가리 아홉 개를 기웃거리며 엉금엉금 다가오는 괴물을 바라보듯 막연한 눈길로 장미라고 부르는 스물한 살의 애숭이 여자애를 지켜보며 벅벅 말을 더듬었다. "그 일을 하고 싶어서 여기 왔어요." "그그, 그 일이라면?" "그래요. 아저씨들이 세상에 내보낸 그 애들께 아빠를 찾아주는 일, 흐흐흐…" 정우는 온몸에 으스스 소름이 돋아 올랐다. 송골송골 식은땀이 이마에서 빠직빠직 돋아났다. 정우는 헉헉 모두숨을 쉬면서 주먹을 들어 툭툭 이마를 두르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세세,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너." "저도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거든요." "뭐라구?" "얼마였을까요?" "뭐가?" 대중없이 물어오는 정우를 향해 방긋 웃고 난 장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때, 그 아저씨… 아니 누군지 모르는 저의 아빠가 20대후반이였으니 제일 정력이 왕성할 때라고 봐야겠죠? 그러니 한 2억 마리 정도가 됐으려나? 단번에 최고로 3억 마리까지는 가능하다고 책에서 봤으니까요. 흐흐흐… 2억 마리라고 해두죠. 전 그 2억 마리에서 살아남은 여자라구요." 청산유수같이 쏟아 붓는 장미의 목소리에 승자의 희열 같은 것이 묻어있다고 정우는 생각했다. 다시 꺽 하고 가슴이 막혀왔다. 2억 마리, 2억 마리라니? 내가 왜 그 2억 마리를 생각해야해? 그럼 내 몸에서 지금껏 얼마나 되는 놈들이 빠져나갔을까? "여기서 장미로 통했대요, 제 엄마가." 장미의 목소리가 가라앉아있었다. 낮은 그 목소리가 되려 천둥번개로 되여 정우의 뇌리를 쳤다. "뭐? 장미로?" 정우가 다잡아 물었다. "그래요. 한 달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모르고 있었어요. 어릴 때는 참 행복했어요. 엄마가 곁에 계셨으니까요. 그때, 마을의 많은 엄마들이 돈 벌러 집을 떠났었거든요. 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상점에 가서 먹거리들을 가득 사들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애들이 얼마나 부러워 했다구요.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어요. 제가 일곱 살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예요. 외할머니는 늘 앓음 자랑만 했어요. 엄마가 마을식당에서 일해 버는 돈으로는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웠나 봐요. 어느 날, 엄마는 한국으로 가는 밀항선을 탄다고 떠났어요. 저를 외할머니한테 팽개쳐둔 채. 석달 쯤 지나서부터 엄마한테서 돈이 왔어요. 외삼촌이 외할머니에게 그 돈을 가져다드렸어요. 전 그 돈으로 학비를 물고 옷을 사고 군것질을 했죠.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니 전 풀어놓은 들말로 돼버렸어요. 공부보다 노는 것이 훨씬 더 재미났거든요. 공부하기 싫어하는 애들과 어울려 놀다가 그 애들이 아빠들 손에 잡혀 엉뎅이를 맞으며 집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가끔 나에겐 왜 아버지가 없을까 하고 생각을 했더랬어요. 누구도 나에게 아버지에 대해 말해준적이 없었거든요. 초중을 중퇴하구 사회에서 한 1년 구을다가 열여덟 살 되던 해에 무작정 북경으로 들어갔어요. 열여덟 살 되는 여자애가 북경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먼저 북경에 간 마을언니의 소개로 ‘천상궁전’이라는 룸싸롱에 들어갔어요. 저의 직업생애가 그렇게 시작된 거죠. 한달 전에 외할머니가 돌아갔어요. 촌장이 외할머니의 핸드폰에 수록된 저의 핸드폰번호를 찾아서 알렸어요. 그래서 돌아온 거죠. 그새 미국에 간 외삼촌은 올수 없는 처지였죠. 엄마도 밀항선을 타고 한국에 나가 불법체류자로 있기에 돌아올 수 없었죠. 외할머니가 살던 집을 정리하다가 목책 한권을 뒤져냈어요. 그 책에서 내가 어떻게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였어요. 나의 엄마가 송림각이라고 부르는 이 곳에서 장미로 한때를 살았다는 것도 알게 되였구요. 너무도 놀라왔어요. 엄마도 장미로 살았다는 사실이… 그 목책을 가방에 넣어들고 저는 이 도시를 누볐어요. 아직까지 송림각이 존재하려나 하면서도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미친 듯이 골목들을 참빗질한 거죠. 송림각, 나, 나의 종자가 뿌려지고 자라던 송림각이 이렇게 오늘까지 존재해 있다는 게 꿈만 같아요. 그래서 결심했죠. 여기서 건사를 못하고 사는 아저씨 같은 사람들을 위해 제가 건사해주자구요. 재밌죠? 아저씨." "그래!" "영화 같죠?" "그렇지." "아저씨!" "그, 그 목책 지지, 지금 어디 있니?" "네?" 장미가 정우를 찍어보며 동공을 키우다가 소리쳤다. "아저씨가 왜 그 목책을 찾아요?" 3 "너무 일찍 오셨네요." "네?" 정우는 깜짝 놀라며 머리를 돌렸다. 50대의 한 여인이 넌지시 정우를 살피며 얼굴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길에는 어딘가 모르게 경계의 빛이 어려 있었다. "아, 네…" 정우는 여인의 눈길을 피하며 말을 더듬었다. "애 데리러 왔나 봐요? 전 이 유치원 부원장이예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여름철엔 5시가 돼야 애들을 내보내요." "네…" "두 시간도 더 남았는데 어디 가서 일을 보시다 오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먼저 데려갈라치면 애들이 습관이 돼서 유치원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거든요." "그… 그렇겠죠." "수고하세요." 여인은 정우를 향해 머리를 끄덕여보이고는 철문오른쪽에 붙은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우는 두 눈을 퀭하니 뜬 채 멀어져 가는 여인의 뒤 모습을 막연하게 바라보았다. 체조를 하는 애들 쪽으로 다가가던 여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정우의 눈길도 체조를 하는 애들에게 고정 되였다. 여인이 동작이 서툴러 보이는 한 여자애의 팔을 잡더니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정우도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정우가 갑자기 픽 하고 코방귀를 터쳤다. "프프프… 하하하…" 정우는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손으로 입을 싸쥐고 몸을 돌렸다.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정우는 머리를 푹 숙인 채 종종걸음을 놓았다.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꼬물꼬물 헤엄치다 뒤 다리가 쑥- 앞다리가 쑥- 팔딱팔딱 개구리 됐네 노래 소리가 귀 따갑게 들려왔다. 뒤 다리가 쑥- 앞다리가 쑥- 내가 왜 여기로 왔을까? 팔딱팔딱 개구리 됐네 개구리로 된 올챙이는 어떤 모습일까? 엉뚱한 생각이 머리속을 파고들었다. 정우는 걸음을 멈추고 본능적으로 노래 소리가 울리는 마당을 바라보았다. 아까 철문으로 들여다볼 때 체조를 하던 꼬마들이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하고 있었다. 저마다 두 팔을 펴들고 왼다리, 오른다리를 쭉쭉 펴면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노란색 통일복장을 입은 애들은 오구구 모여서 볕쪼임을 하는 병아리들 같아 보였다. 귀엽다고 생각 되였다. 달려가서 한 놈을 확 나꿔채 가지고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앙큼하게도 머리속에 자리를 쳤다. 정우는 으스스 몸을 떨었다. 두 눈을 꼭 감았다. "불쌍하잖아요? 걔들이 너무 불쌍해서 가슴 터지게 슬펐어요. 걔들이 너무 슬퍼서 머리가 뻥 뚫리게 미쳐버릴 것 같았다구요." 장미의 목소리가 가슴을 찢고 들어와 심장에 박히는 것 같았다. 정우는 주먹을 들어 쿵쿵 소리 나게 가슴을 쥐여 박았다. 얼얼해났지만 가슴을 꽉 막은 체증은 종시 내려가지 않았다. 정우는 잠간 숨을 모았다가 후-후-후- 거칠게 내쉬었다. 눈앞이 가물가물해나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어지러운 사색의 검불 속에서 한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 당신 아기 가지고 싶다." "으으으…" "나, 당신 아기 가지고 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구!" "순화라 불러, 박순화." 필름은 거기서 끝나버렸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때 순화는 자기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 사실을 알고 나의 의중을 떠보느라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정녕 그랬다면 순화는 왜 다시 나를 찾지 않고 소문 없이 그곳을 떠났을까? 아니야, 아닐 거야, 정우는 더 이상 그대로 몸을 지탱할 수 없어 철 담장 밑판에 엉뎅이를 붙였다. 꼬물꼬물 꼬물꼬물 꼬물꼬물 올챙이가 뒤 다리가 쑥-앞다리가 쑥- 애들은 여전히 신나게 왼다리, 오른다리를 퍼덕거리고 있었다. 개구리가 되기 위해 신나게 버둥거리는 것 같았다. 현기증이 일듯 아물거리는 눈앞으로 거대한 무리가 덮쳐들고 있었다. 올챙이 같았다. 올챙인가 보다고 생각하며 다시 눈길을 주니 올챙이가 아니었다. 올챙이보다도 휠씬 더 작은 미물들이 꼬리를 하느작이며 어디론가를 향해 덮쳐가고 있었다. "전 그 2억 마리에서 살아남은 여자라구요." 장미야, 장미야! 정우는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장미가 눈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 걔가 온 하루 굶고 있겠구나. 아침에 기분 잡치게 하던 그 사건을 치르느라 장미에게 사료를 주는 일까지 깜빡 잊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장미가 아침이며 점심이며를 모두 굶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안 되지, 걔가 그렇게 배를 곯게 해서는 안 되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걔가 지금 얼마나 애타고 서러울까? 이럴 때가 아니야, 이렇게 여기서 청승을 떨 때가 아니라구… 정우는 급히 길가에 나가 달려오는 택시를 잡았다. 두 때나 굶었지만 장미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여느 때처럼 콩콩 짖으며 꼬리를 하늘거리고 있었다. "장미야, 장미야!" 정우는 되는대로 신을 벗어내치고는 덥석 장미를 품에 안았다. "어디 갔다가 오세요? 보고 싶었어요." 장미의 눈망울이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우는 장미를 가슴에 꼭 가져다 댔다. "정신 나갔었나봐, 내가. 아니, 내가 돌았었어. 너에게 밥 주는 것까지 까먹다니…" 정우는 급히 사료를 꺼내 사발에 쏟았다. "까닥까닥…" 걸탐스레 사료를 먹을 때 나는 소리였다. 아프게 귀를 찌르고 들어온 그 소리는 차츰 정우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정우는 갑갑하던 가슴이 서서히 뚫리는 것 같았다.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던 엄마의 말씀이 귀전을 스쳤다. "장미야." 장미가 머리를 돌렸다. "장미야, 장미야…" 정우는 술에 취한 나그네처럼 두 눈을 퀭하니 뜨고 대중없이 장미만 불러댔다. "…그 책에서 내가 어떻게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였어요. 나의 엄마가 송림각이라고 부르는 이 곳에서 장미로 한때를 살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구요." 장미야, 정녕 너는 누구냐? 누구란 말이냐? 22년이라는 세월을 장미야, 아니, 순화야, 너는 어떻게 살아온 거냐? 장미였다. 장미는 배부르게 먹었는지 정우의 무릎에 기어올랐다. 정우는 장미를 안아 가슴에 대며 부질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장미야, 다 먹었니?" 장미는 정우의 가슴을 파고들며 꼬리를 흔들어댔다. 잠이 올 때 터지는 버릇이었다. 정우는 장미의 배를 살살 만져주며 입을 열었다. "배부르게 먹었으니 곤하다 이거지? 허허허…" 웃음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목구멍이 먹먹해지며 코등이 시큰해났다. 정우는 장미를 으스러지게 가슴에 끌어안았다가 활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섰다. "콩콩콩…" 웬 일이냐는 듯 장미가 짖어댔다. 정우는 장미의 짖음 소리를 등에 달고 문을 나섰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알았지. 알았다니까. 내 오늘 신시(申时)에 신수 멀끔한 놈 하나가 찾아올 줄 알았다니까." 여인은 손에 들었던 부채를 상우에 탕 내려놓으며 신경질적으로 뇌까렸다. 정우는 그 서슬에 놀라 흠칫하다가 허리를 꺾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할 수 있는 겨? 잡놈들이 자꾸 찾아드는데. 이런, 이런 잡것을 봤능 겨?" 여인이 소리치며 얼굴을 홱 돌렸다. 그 바람에 정우가 흠칫 뒤로 비껴 앉으며 물었다. "저… 저 말입니까?" "그럼, 네놈이지 그래. 여기 누가 또 있능 겨?" 여인이 정우 쪽으로 머리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게 어디라구 덜렁 들어앉는 겨? 들어앉긴." "네? 방금…" 정우는 뭐라고 더 변명하려다가 여인의 쏘는 듯한 눈빛에 질려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숙였다. 가시 박힌 여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정우의 귀속을 파고들었다. "이런, 이런 잡것하구. 이게 어느 안전이라구 그까짓 개방귀 한번 뀌구 들어앉으려는 겨?" "아, 네." 정우는 문득 짚이는 데가 있어 급히 호주머니를 뒤져 100원짜리 한 장을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놈아!" 여인이 좀 전보다도 더 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정우가 한 뽐 또 뒤로 비껴 앉으며 입을 떡 벌렸다. 여인이 손가락으로 정우의 코등을 삿대질하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게 어느 안전이라구 망칙하게 노는 겨? 이 잡것이…" "제… 제가 어어, 어떻게 해야…" "네놈은 그래 내 말이 돈 내놓으라는 소리로 들리는 겨? 냉큼 저것을 걷어 들이구 파란 색으루 한 장 곱게 펴서 올려." "네네." 정우는 몸을 돌리고 급히 돈지갑을 열어보았지만 안에는 50원짜리 돈이 없었다. "어어, 없는데요." "이런, 이런…" "그냥 100원을…" "동동할배, 동동할배- 나 어쩌라는 겨? 이 잡것들을 너그러이 용서하이소…" 여인은 100원짜리 돈을 활 집어가더니 상 밑에서 빨간색 돈지갑을 주어 들었다. 여인은 100원짜리 돈을 지갑에 넣고는 대신 50원짜리 돈 두 장을 꺼내어 정우 앞에 훌 던지며 소리쳤다. "천한 것이, 네놈 눈에는 그게 돈으로 보여? 이건 돈이 아니라 우리 지엄하신 동동할배 뵈러 가는 차표란 말인 겨, 차표라능 겨." "네, 차표요?" "그라이. 차표지, 차표. 차표를 샀으니께 어서 말해 봐봐." "네, 알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라이. 알고 싶겠지, 당연히 알고 싶을 테지. 기어이 알고 싶을 겨." 여인이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상을 내리쳤다. 탕 하고 상이 울리며 위에 있던 딸랑이북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정우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선생님 앞에 선 소학생처럼 머리를 푹 숙이고 숨을 죽였다. "말하라니께." "네?" "사주팔자를 올려야 할 것 아니여?" "네, 네?" "사주팔자두 모르는 겨? 생신날을 이르라는 겨. 생일 말이여." "네? 네. 1965년 7월 7일입니다." "한 여름에 나온 독하디 독한 독종이네그려. 쯧쯧쯧…" "네?" "한 여름에도 사람 간담 서늘케 하는 놈들이지." 여인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뭐라 한참 중얼거리더니 소리쳤다. "뭘 알고 싶은 겨?" "그그, 그해… 그녀가 진짜 내 애를 뱄을까요?" "이런 멍청한 놈 봤나? 그래 제 새끼가 자라는지 마는지도 모르구 살았던 겨?" "……" "낳았어. 낳았다구." "네? 제 애를 낳았다구요?" "그래, 팡팡 잘 자라구 있잖어?" "남자앤가요? 여자앤가요?" 정우는 금시 숨이 넘어갈세라 다잡아 물었다. "사내놈인가?!" "네? 남자애라구요?" "……" 여인은 대답을 하지 않고 또 한참이나 손가락을 폈다 굽혔다를 반복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미를 꼭 닮았네 무슨." "그렇죠. 여자애죠?" "그렇지. 어미를 닮았으니 당연히 계집애지." "그 애를 찾을 수 있을까요?" "거사 하늘의 뜻이지. 옆에 두고도 못 알아볼 수 있으니께. 암, 하늘의 뜻이구 말구." "네? 하늘의 뜻이라구요?" 여인이 두 눈을 스르르 감더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왔느냐 왔을 손가 가느냐 떠날 손가 왔다가도 가는 이 떠나는 길 머이 급해 후여- 후여- 후르륵 후여- 여인이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너울거렸다. 두려웠다. 후여- 하는 그 소리에 모든 것이 구중천으로 훨훨 날아오르는 듯싶었다. 정우는 올방자를 틀고 앉았던 그 맵시로 급급히 땅을 짚으며 두 뽐쯤 뒤로 물러났다가 머리를 숙이고 엉뎅이를 쳐들며 간신히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전 이만…" "이런, 이런… 여직 이러구 있어? 신수 멀쑥한 놈이." 여인이 주먹으로 상을 내리쳤다. "네? 네." 여인이 상 위에 놓여져 있는 사기그릇에서 뭔가를 집어 정우에게 뿌리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빨랑 가보라니께, 큰 일이 터지려구 하는구만…" 4 "어머, 어머- 대단하시다." 문에 들어서는 정우를 보고 마담이 쫑드르르 달려 나와 머리를 조아리며 간드러지게 목청을 뽑았다. 장미, 장미 얘가… 그 생각만 하면서 문에 들어서던 정우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은 듯 흠칫 몸을 떨면서 머리를 들었다. 벌써 몇 년 째 송림각에 드나들 때마다 얼굴을 보는 마담이었지만 언제나 그 열정은 식을 줄도 모르고 팔팔 끓어 번졌다. 아까 점심에 장미를 찾아왔을 때 마담의 대사는 "어머, 어머… 이 아저씨, 뿅 갔구나. 장미 그 애 죽이죠?"였었다. 마담은 신을 벗고 올라서는 정우의 손을 잡아끌고 쏘파에 다가가며 연신 입을 놀렸다. "어쩌나, 근데 이걸 어쩌나?" "왜요?" 정우가 짧게 물었다. 마담이 잠간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아저씨, 와늘 섭섭하시겠다." "이 아줌마가… 뭐라구 궁시렁거리는 거요? 웬 일인가구 묻지 않소?" "그 애, 그 애 일 들어갔는데." "일?" "네. 아님, 다른 애를? 어리고 이쁘장한 애들이 많은데…" "필요 없어요." "인츰 나오기는 할 건데. 들어 간지 두 시간이 거의 되어 오니까…" 마담이 카운터 뒤 벽에 걸어놓은 벽시계를 힐끔 훔쳐보면서 말끝을 흐렸다. 정우도 그 소리에 눈길을 벽시계에 돌렸다. 시침이 5분전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장미가 세시에 일을 들어갔다는 말이 된다. "미친놈들." "네?" 마담의 동공이 커지고 있었다. 마담의 반응에 괜히 무엇해난 정우는 서서히 차탁으로 눈길을 돌리며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차라도 없어요? 아님 커피나…" "아니, 아니. 너, 쑈표(小朴), 뭐하고 섰냐?" 마담의 눈길이 카운터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곱살하게 생긴 사내애 몸에 박혔다. "네, 인차 올릴게요." 사내애가 주방 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참 멋지다니까요." 마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뭐가요?" "이 아저씨 봐라. 알면서…" "허참, 이 아줌마가…" "아저씨가 참말로 멋지다구요.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시구요." "내가요?" "그럼요. 장미, 그 애 참 눈치 빠르구 총명하구 귀엽게만 노는 애라구요. 그런 애를 첫눈에 척 봐내시니 참, 아저씨의 눈썰미를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하기야 아저씨처럼 이 나이에 이렇게 샤프한 분도 많지는 않죠. 순정만화에 나오는 멋스러운 오빠들처럼 오직 한 마음으로 한 여자만을…" 마담의 눈에는 진짜 숭경의 빛까지 어리려고 했다. "아줌마!" 정우가 소리치고는 입이 쓰거웠던지 쩝쩝 다셔댔다. "설탕 몇 개를 넣을까요?" 사내애가 주방 쪽에서 나오며 정우네 쪽을 향해 물었다. 정우는 신경질적으로 사내애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블랙으로 내와. 커피를 팍 넣어서…" "네, 쓰게 탈게요." 사내애가 대답하고 돌아서서 금방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갑자기 ㄱ자로 꺾어 들어가는 그쪽 방에서 웬 남자의 욕지거리가 들렸다. "미친년, 죽자고 작정했어?" 그 목소리는 천둥번개로 되여 크지 않은 송림각을 들깨우고 있었다. 정우의 눈길이 일시에 소리 나는 쪽에 쏠렸다. 마담이 몸을 홱 돌려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카운터에 앉아 손톱눈을 물어뜯고 있던 여자애도 카운터 문을 제치고 나와 소리 나는 쪽으로 종종걸음을 했다. 커피 타러 들어갔던 사내애도 웬 구경거리냐는 듯 그쪽으로 달렸다. "년들, 교육 어떻게 시키는 거야, 젠장…" "손님, 손님. 용서해주세요. 무슨 불찰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하세요. 장미야, 너 손님에게 어떻게 모셨길래…" 뭐, 장미? 마담의 말에 정우가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 장미라니? 장미, 그 애가 왜? 정우도 한달음에 소리 나는 곳으로 뛰어갔다. 103이라는 패쪽이 붙어있는 안마실 문이 열려져있었고 손톱눈을 물어뜯던 여자애와 커피 타러 갔던 사내애와 몇몇 아가씨들이 문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우는 주저 없이 103호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얼굴색이 검실검실한 40대의 남자가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거친 숨을 헉헉 토하고 있었는데 마담이 그 옆에서 남자의 얼굴을 핼끔핼끔 살피며 손바닥을 뿌벼댔다. 장미가 침대머리에 걸터앉아 남자와 마담을 번갈아보며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왜 이렇게 흥분하세요? 그냥 장난 한번 쳤을 뿐인데." "이년아, 네년은 이렇게 하구 노니? 미친년." 남자는 손에 쥐고 있던 흰 봉투를 장미의 얼굴에 홱 뿌렸다. 흑장미였다. 흰 봉투에 검은색 펜으로 알심 들여 그린 한 송이의 장미가 정우의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또, 또 그 놀음이었구나. 정우는 가슴이 섬찍해났다. 누가 말치 않아도 사태의 엄중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정우는 숨을 죽이고 장미와 남자를 살폈다. "왜 이래요? 답지 않게…" 장미 쪽에서 되려 눈을 곱게 흘기며 남자를 힐난했다. "뭐야? 이년이 진짜루 살기 싫었군." 남자기 갑자기 여린 토끼에게 덮치는 늑대마냥 장미의 머리채를 검어 쥐고 좌우로 흔들었다. "놔요. 이 손을 놔요." 장미가 숨이 넘어가게 소리쳤다. "이년아, 죽고 싶다며? 장난치구 싶다며." 남자가 주먹으로 장미의 얼굴을 들이쳤다. "악!" 장미가 숨이 넘어가듯 비명을 질러 올렸다. "그만!" 정우가 갑자기 괴성같이 소리 지르며 덮쳐들어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남자가 장미의 머리채를 잡았던 손을 풀고 정우의 팔을 틀어잡으며 머리를 돌렸다. "웬 일이요?" "그만하라구." "이 나그네, 왜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거요?" 남자는 말하면서 정우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탈았고 정우는 그럴수록 젖 먹던 힘까지 다했다. 남자가 갑자기 뒤로 머리를 날렸다.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정우의 코등이 남자의 뒤통수에 맞았다. "으윽-" 정우가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허리에서 손을 풀고 코등을 부여잡았다. 정우의 손가락사이로 검붉은 피가 새여 나왔다. "피…피…" 마담이 피 흐르는 정우의 코등을 가리키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삽시에 장미의 얼굴에 손바닥을 날렸다. "미쳤어? 네년이." "쳤어? 날!" 장미도 날렵하게 달려들어 마담의 머리채를 틀어잡았다. "에잇, 더러워서. 개똥을 밟았잖아." 남자가 툭툭 손을 털며 몸을 돌려 출입문 쪽으로 씨엉씨엉 걸어갔다. 마담이 장미의 손에서 머리를 빼면서 급히 소리쳤다. "손님, 돈을 내고 가야죠. 쑈표, 그 손님, 결산 안하셨다." 마담이 남자를 따라 문 쪽으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아저씨, 너무 터프해요." 달콤한 바스음이었다. 정우는 흐르는 코피를 주먹으로 닦으며 소리 나는 쪽에 머리를 돌렸다. 장미가 침대머리에 서서 웃고 있었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라고 내가 말했지?" "저도 그렇게 만만치는 않다고 했잖아요?" 장미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뒤로 쓸어 올렸다. "언제까지 하려니?" "뭘요?" "그 놀음을." "글쎄요." "제발 인젠 그만해라." "제발? 아저씨, 방금 제발이라구 했어요?" 장미의 두 눈이 동그랗게 굳어졌다. 정우가 손으로 피 흐르는 코구멍을 꼭 막고 서서 약간 숨이 찬 듯 씩씩거리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제발이라구 했다. 왜?" "그 말에 내가 방금 감동 먹을 번 했잖아요? 제발이란 말은 가슴 아프게 속에다 담고 사는 사람에게만 쓰는 말이 아닌가요? 흐흐흐… 아저씨, 와늘 내게 꽂혔구나? 글쵸? 아저씨." 정우를 빤히 쳐다보는 장미의 눈확에 장난기가 가득 담겨있었다. 정우가 장미의 커다란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목소리를 깔았다. "널 보면 참 측은해져." "네? 절 보면 측은해진다구요? 설마…" "설마라니?" "측은하다면서 그렇게 아귀아귀 늑대처럼 걸탐스레 나를 잡아 잡수셨어요? 어제 밤에." "너…너…" "학교는 강 너머에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학교를 강남학교라고 불렀죠. 비가 오면 강이 불면서 물살이 여간만 세지 않았어요. 그때 강에는 출렁다리가 놓여있었는데 쇠사슬 위에 놓여 진 널판자가 몇 군데 떨어졌더랬어요. 비 오는 날 쏴쏴 소리치며 흐르는 강물위로 출렁다리를 건너기란 그처럼 무서운 일이였어요. 비 오는 날이면 거의 집집마다 아버지들이 자식들 마중을 오군 했더랬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없는데다 엄마까지 마을식당에서 일을 보다나니 누구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어요. 나는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다리목에 서서 발만 동동 굴렀어요. 아는 사람들이 함께 다리를 건너자고 했지만 왜 그게 그렇게 싫던지… 아버지 있는 애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그 부러움이 나중에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으로 변했어요. 아버지가 뼈 속까지 미워지던 그런 날이면 나는 일부러 엄마나 할머니를 보고 아버지를 내라 떼질을 썼어요. 그때마다 엄마나 할머니는 그저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계신다고만 말했어요. 하늘나라에 계신다는 것은 세상 뜨셨다는 뜻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알고 있었어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다시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바뀌었어요. 왜 세상을 뜨셨을까?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아버지가 옆에 계시는 것 같은 환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참으로 측은하다고 생각했어요. 측은하다구요." "……" "아저씨, 아빠가 참으로 측은하다고 생각했었다구요." "어, 응?" "참, 저의 말을 듣고 있었어요?" "그래, 들었지." "전 아저씨가 되려 측은해보여요. 오세요." 장미가 침대머리에 걸터앉으며 정우를 불렀다. 정우는 코구멍을 막았던 왼쪽손가락을 떼고 오른손으로 코구멍을 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어, 머… 멎었네." "오세요." 장미는 물수건을 한 장 뽑아들고 정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닦아드릴게요. 멋졌어요." "멋졌어요?" "흑기사 같았다구요. 아까 와늘 아저씨께 꽂힐 번 했어요." "장미야." "네?" "너너, 너…" 정우는 일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장미는 물수건으로 정우의 얼굴을 씻다말고 왜 그러세요 하는듯한 눈길로 빤히 쳐다보았다. "장미, 너 이년아.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하냐구?" 급한 걸음소리와 함께 욕지거리가 먼저 들려왔다. 장미는 천천히 정우의 코등에 묻은 피를 문지르며 입가에 넌지시 실웃음을 피워 올렸다. "장미야, 우리 가자." 정우가 장미의 손을 밀치며 나직이 말했다. "어디루요?" 장미가 바투 들이댔다. "그 뒈질 놈이 기어코 돈을 안 내고 갔다. 장미야, 너 어떻게 할래? 로임에서 뗄 테다. 그런 줄 알어. 로임에서. 너 그 사람하구 무슨 장난을 친 거니? 설마 그게 사실이야? 그그, 그걸 봉투에 넣어 줬다는 게…" 마담이 입으로 침을 튕기며 연발탄을 쏘았다. 장미가 손에 쥐고 있던 물수건을 돌돌 말아 쥐고 흔들다가 휴지통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떼세요. 떼라구요." "너, 섭하다구 말아라." "아니요. 섭하긴요. 아저씨, 아저씬 제가 그렇게 좋아요? 저도 아저씨가 좋은데." "……" "어머- 아저씨 수집어 하는 거 좀 봐. 가요 아저씨." 장미가 정우의 손을 잡았다. 뜻밖의 거동에 정우도 마담도 놀라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가자면서요. 아저씨 요구에 손을 들어준다니까요. 가요, 우리." "그래, 우리 가자."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아라. 아저씨, 잠간. 저, 가방 가지러 가요." 말을 마친 장미가 어느새 문밖으로 사라졌다. 정우는 넋을 잃은 듯 잠간 멍해 서 있다가 몸을 돌려 장미를 따라 나갔다. "세상에, 세상에… 요즘 세상이 아무리 험하다 험하다 해도 어쩌면 새파란 것이 그새 애비 같은 사람과 눈이 맞아서…" 마담의 푸념이 뒤에서 들려왔다. 5 "후회 안할 자신이 있어요?" "후회라니?" 정우가 걸음을 멈추고 장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장미도 멈춰 서서 이윽토록 정우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가 지금 섶을 지고 불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아세요?"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니?" 정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장미의 얼굴에 가는 웃음이 스쳐 지났다. "집에 가자면서요, 절 보구 아저씨네 집에 가자면서요." "그런데?" "제가 아저씨네 집에 가면 뭐가 될까요? 안마방에서 남자들의 몸을 주물거리던 제가 아저씨네 집에 들어서면 뭐가 될지 참 궁금해지네요. 아니에요? 아저씨." "장미야. 잠간, 저기 오네." 정우가 말끝을 흐리면서 달려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니요, 아저씨." "왜?" "저… 안 갈 거예요." 장미가 정우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안 가다니? 그새 마음이 변한거야?" 정우가 장미의 얼굴에 눈길을 박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장미의 눈빛이 타는 듯 집요했다. "아니요. 원체 아저씨를 따라갈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그곳을 나오기 위한 방패였어요." 말을 마친 장미가 달려오는 택시와 반대방향으로 종종 걸음을 옮겼다. 정우는 택시를 잡다 말고 몸을 돌려 장미를 따라 잰걸음을 놓으며 소리쳤다. "잠간, 장미야. 거기 서." "아니요. 관계 말아요." "서라는데, 거기." 정우가 뛰어 가 장미의 손에 들려있는 가방을 나꿔챘다. 장미가 급히 머리를 돌려 정우를 쏘아보았다. 정우가 장미의 눈길을 피하면서 말했다. "너, 무작정 어디로 간다는 거니?" "아저씨야 말로 무작정 웬 관심이 이렇게 많아요? 아저씨가 절 얼마나 알아요? 무슨 목적으로 이래요?" "너너, 너 무슨 말을…" "그렇게 좋았어요? 하긴… 아귀아귀 잘도 드신다했더니." 장미가 입가에 찬웃음을 피워 올리며 흥 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정우가 장미 옆으로 다가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암튼… 우리 먼저 집에 가자. 집에 가서 한숨 쉬면서 다음 일을 생각하자." "다음 일이요?" "그래… 다다, 다음 일을 생각하자구…" 정우가 장미의 손을 잡아끌었다. "싫다구요, 절 내버려둬요." 장미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 모양으로 선자라에 버티고 서서 몸을 탈았다. "얘야, 말을 들어라. 아부지가 참 안타까와 하는 것 같은데…" 일여덟 살 쯤 되는 남자애의 손목을 잡고 골목을 나오던 웬 할머니가 정우와 장미를 지켜보며 한마디 거들었다. "네?" 정우와 장미가 동시에 소리 나는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할머니가 남자애의 어깨를 다독이며 끌끌 혀를 차더니 입을 열었다. "애들이 어찌자구 이러는지 쯧쯧쯧… 우리 이 도깨비도 제 맘이 내키지 않으면 입에서 범이 나오는지 구렝이가 나오는지 가리지 않는다오. 성깔머리는 또 얼마나 사나운지…" "네, 할머니…" "애비어미가 곁에 없다구 어랑어랑하구만 키워서 그런지 쯧쯧쯧… 처네, 아부지 말을 듣소. 다 잘 되라구 하는 것 같은데…" "네? 할머니, 방금 아버지라 그랬나요?" 장미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서서 할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장미의 거동에 할머니가 흠칫 놀라는가싶더니 한풀 꺾인 목소리로 장미에게 물었다. "양, 그럼 아부지가 아닌감?" "흐흐흐…" 장미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자애의 입에서 나오는 웃음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섬뜩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장미는 주먹으로 눈확을 찔끔찔끔 누르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 옳아요. 아버지가. 아버지, 가요. 우리 집에 가요. 흐흐흐…" 장미가 길옆으로 다가가 달려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저었다. "콩콩콩…" 구멍에 열쇠를 넣어 돌리는 소리가 나자 집안으로부터 강아지 짖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장미가 얼굴에 가는 웃음을 피워 올리며 물었다. "강아지를 키워요? 아저씨." "그래… 몇 년 째 식구처럼 키우는 강아지야." 정우가 머리를 끄덕이며 열쇠를 뽑아 호주머니에 넣고는 문을 당겨 열었다. 장미가 퐁퐁 뛰며 정우의 발치에서 달려들었다. "그래,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지. 내 새끼." 정우는 장미를 품에 안고 신을 벗으며 말했다. "올라가자. 집에 왔으니." 정우는 장미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가방을 받아들고 침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가방은 먼저 침실에 들여다 놓자. 그리고 넌 거실에서 텔레비전이나 보거라. 나 인차 커피를 끓일게." "……" "어려워 말아라. 제 집이라 생각하구." "그리구 또 아버지라 생각할까요?" "강아지를 키워요? 아저씨." 하던 순진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가 불만이 가득 차서 잔뜩 비틀어진 듯한 어조였다. 역시 애들이야, 기분이 장백산날씨보다도 더 빨리 변하니… 정우는 이렇게 생각을 굴리며 입가에 느슨한 웃음을 빼어 물었다. "리모콘 다룰 줄 알지? 윗 쪽의 파란 단추를 눌러 텔레비전을 켜라." 정우는 주방으로 들어가 찬장 문을 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장미가 따라 들어오며 정우의 발치에서 설쳐댔다. "넌 저기 가서 언니하구 놀아라. 아빠는 커피를 끓여야 하니까." 정우는 커피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장미는 여전히 정우의 바지자락을 물어 당기면서 끙끙 앓음 소리를 했다. "저리 가라는데, 장미야. 가라니까." 정우는 장미에게 발길을 날리며 소리쳤다. "깨갱- 깽" 장미가 저쪽에 채여 나갔다가 다시 정우의 발치에 다가들었다. "가리니까, 장미야.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정우는 커피잔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서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때 거실에서 장미의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웬 일이예요?" "뭘?" 정우가 커피잔을 들고 거실에 나오며 물었다. "섭하네요. 아직 엉뎅이를 붙이지도 못했는데 가라니요?" "뭐, 가라니? 누가?" 정우가 깜짝 놀라며 모르겠다는 듯 장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미의 얼굴이 흐려지고 있었다. "흥, 이런… 능청스럽긴. 방금 가라니까, 장미야 했잖아요?" "방금? 아, 어!" "네?" "허허허…" 정우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장미는 그러는 정우의 입술을 날이 선 눈길로 찍어보았다. "오해마라. 네가 아니라 쟤를 가라고 했어. 자꾸 발치에 와서 애먹이잖아?" "쟤라니요?" "쟤, 쟤를 그런다니까." 정우가 강아지를 가리켰다. 장미의 눈동자가 커지고 있었다. "쟤… 쟤를 그랬다구요?" "그럼, 쟤 이름이 장미거든." "쟤가 왜 장미예요?" "참, 쟤가 왜 장밀 수 없니?" "아니에요. 흐흐흐… 쟤가 장미라구요? 쟤가? 흐흐흐…" 웃음소리가 음침하게 들렸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정우는 못내 가슴이 침침해났다. 장미가 웃음을 거두고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주먹으로 닦으며 말했다. "쟤가 장미라면 전 더 이상 장미로 안 살래요." 장미가 몸을 일으켜 강아지를 품에 안고 등을 쓸어주다가 저쪽으로 활 팽개치며 뾰로통해서 말했다. 그러는 장미를 바라보며 정우가 익살스럽게 한마디 했다. "개에게 이름을 양보하는 거니? 그럼 너는 뭐라구 할 건데?" 장미가 잠간 입술을 감빨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저야 제 진짜 이름을 써야죠." 그 말에 정우의 동공이 커졌다. "너, 제 이름이 뭔데?" "화요." "화라구?" "박화. 왜요? 제가 꽃 같지 않아요?" "아니… 그런 뜻은 아니구…" "엄마는 제가 꽃이기를 바랐었나 봐요. 그래서 꽃 화자를 이름으로 주었겠죠. 하지만 비틀어질 내 팔자라구야… 개떡같이… 들꽃이라면 또 모를까… 그래서 북경에 있을 때 장미로 살았어요. 흑장미로." "흑장미로?" "네, 흑장미요. 흑장미의 꽃말이 무엇인지 알아요?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입니다.’래요. 손님들 앞에 흑장미예요 하고 소개하면서 나는 영원히 당신의 것이에요 하고 생각했더랬죠. 그런 마음가짐으로 정성껏 손님들을 위해 봉사했어요. 북경에서, 아니 천상궁전에서 저, 꽤 잘나가는 에이스였어요." "그랬었구나." 정우는 도도하게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장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속으로 한마디 중얼거렸다. "반응이 왜 그래요?" 장미, 아니 화의 목소리에 가시가 박혀있었다. "응? 아니…" 정우가 머리를 흔들었다. 금세 화의 입가에 웃음이 찰랑거렸다. "웃기죠? 아저씨." "뭐가?" "저, 영어를 자습하고 있어요." "영어를?" "네. 외국인이 많았어요. 코대가 높은 인간들을 상대하려면 일상용어는 영어로 구사할 수 있어야 했어요. 하니까 되더라구요. 인젠 제법 안에서의 대화는 영어로 답새길수 있어요." 화는 차탁 우에서 커피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얘야." 정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화는 커피를 홀짝거리다가 정우 쪽에 눈길을 돌렸다. 정우는 일시 뭐라고 말끝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엉뚱하게 한마디 했다. "너, 흑장미를 본 적 있니?" 화가 커피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정우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왜 그러세요?" 정우는 화의 빨간 입술을 이윽토록 응시하다가 속삭이듯 물었다. "흑장미에도 가시가 있지?" "물론… 있죠. 있어야죠. 것도 장미니까요." 말을 마친 장미가 하회를 기다리듯 정우의 입술에 눈길을 주었다. 정우가 두 눈을 멍하니 뜨고 천정을 하염없이 응시하다가 천천히 머리를 돌려 화에게 눈길을 주었다. "20여년 전이였지. 그때도 나는 흑장미라고 부르는 한 여인을 알게 되였단다." "저와 닮았다는…" 화가 다잡아 물었다. "그래, 역시 송림각이었어." "그랬군요." 화가 커피잔을 차탁 우에 탕 하고 올려놓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나, 당신 아기 가지고 싶다 하고 말하는 거야." "그그, 그래서요?" "박순화라 부른다 했어. 그녀 절로…" "바바, 박순화라구요?" "그녀의 말이 마음에 걸리는 거야. 사람들에게 끌려 다시 송림각에 갔을 때 박순화라는 본명을 가진 흑장미는 그곳을 떠나고 없었어. 따져보니 그새 내가 근 반년이나 송림각에 가지 않았던 거야." "가시에 찍힐까 두려웠던 거죠?" 화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있었다. "후-" 정우가 길게 한숨을 토하고 아래 말을 이었다. "그랬던가봐… 나는 장미와의 인연이 그렇게 끝나는 것으로 알았단다." "그래, 끝났어요?" "쟤를 장미라 부르고 싶었어. 흑장미라구." "쟤를요? 모르겠어요. 건 왜서죠?" 화는 천천히 눈길을 돌려 장미를 찾았다. 자기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정우에게 실망했던지 장미는 쏘파 밑에 옹송그리고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후-" 정우가 또 한번 한숨을 톺았다. "장미야." 화가 일어나 장미 쪽으로 다가가더니 허리를 굽혀 장미를 끌어안았다. 장미는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화를 쳐다보고 있었다. 화는 말없이 장미의 등을 쓸어주다가 천천히 침실 쪽으로 다가갔다. "화, 박화야." 정우의 목소리가 젖어있었다. 화가 침실 문을 열다 말고 머리를 돌렸다. "아저씨, 수수께끼 하나 내드릴까요?" "뭐? 수수께끼?" 정우의 눈길이 화의 입술에가 박혔다. 화가 입가에 실웃음을 피워 올리며 천천히 쏘파에 다가와 앉았다. "20여 년 전, 안마방에서 손님을 접대하며 살던 한 여자가 있었대요. 어느 날, 그녀는 문득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대요. 안마방에서 날마다 남자들을 접대했던 그녀는 그 애가 누구의 애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대요. J의 앤가 싶으면 K가 의심되고 또 Z도 빼놓을 수 없었거든요. 하루 밤에 세 명의 남자도 접대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아저씬 알 수 있어요? 그 애가 과연 누구의 애인지?" 화가 잠간 말을 멈추고 정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우가 고통스럽게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감겨진 정우의 윗 쪽 눈까풀이 무시로 팔딱팔딱 뛰었다. 화가 일그러져가는 정우의 얼굴을 이윽토록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저, 잘래요. 푹 자야 내일 또 새 힘이 솟거든요…" 화가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우는 움직이는 화의 뒤 모습에 눈길을 박았다. 화가 입은 하얀 T 셔츠 등에 찍혀진 흑장미 한 송이가 아프게도 정우의 눈을 파고들었다.
5    단편소설 * 별은 그 자리에 있었다 댓글:  조회:1789  추천:1  2013-03-15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꽉 막힌듯싶었다. 은희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평소 병원하고는 담을 쌓고 살던 은흰지라 선뜻 병원에 발걸음을 옮기기가 싫었다. 온 시내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는지 초저녁이 훌쩍 지났는데도 병원은 환자들로 가득했다. “콜록콜록…” “쿨룩쿨룩…” 여기저기에서 기침소리가 터졌다. 앉을 자리가 없어 맨 바닥에 앉아 “오호호― 머리야―” 하고 앓음소리를 내는 할머니도 눈에 띄였다. “남녀로소 모두 다 모여들었네.”라는 노래의 한 구절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은희는 가슴이 갑갑해나고 얼굴에 열기가 확확 돋쳤다. 은희는 목깃까지 올렸던 쪼르래기를 아래로 내린후 오른손바닥을 펴서 얼굴에다 부채질을 해댔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괜히 짜증이 일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돌아나오고싶었지만 당금 뻥 터질것처럼 아파나는 머리때문에 그렇게 할수도 없었다. 은희는 굼벵이 길 건너듯 한없이 늘차게 줄어드는 순서를 울며 겨자 먹기로 기다릴수밖에 없었다. 바람이라도 쏘이고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밖으로 나가자니 바람이 너무 찰것 같았다. 은희는 현관에 서있는 사람들을 지나 유리창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은희는 본능적으로 유리창을 마주하고 섰다.  유리창에는 성에가 두텁게 끼였는데 뿌연 먼지까지 우에 올라 시선을 막고있었다. 꽉 막힌 자기의 가슴처럼 침침해났다. 무엇인가를 가지고 가슴도 뻥 뚫고싶었고 시야를 가로 막는 유리창문도 쿡 깨버리고싶었다. 은희는 머리를 유리창에 바투 가져다 댔다. 그후 입술을 동그랗게 오무리며 “호―” 하고 크게 입김을 뿜었다. 유리창에 꼈던 성에가 입김을 못이기고 차츰 색이 죽어갔다. 은희는 그 맵시로 연신 유리창에 입김을 불었다. 유리창의 성에가 녹기 시작하더니 이어 거짓을 모르는 아기의 눈망울처럼 동그랗게 맑은 유리가 드러났다. 은희는 익살궂은 악동처럼 동그란 유리에 오른 눈을 가져다댔다. 누르끼레한 가로등빛이 괴괴하게 내리 비추는 거리는 쌩쌩 몰아치는 서북풍에 한결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택시 한대가 은희의 눈길을 스쳐갔다. 검은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려오더니 은희의 눈에서 사라졌다. 등산복에 달린 테두리에 흰 털이 보시시한 모자를 이마까지 폭 내리쓴 남자애가 은희의 시야에 들어왔다. 얼굴이 갸름한 닭알형이였다. 등산복을 입었지만 몸집이 쭉 빠져보였다. 남자애는 점점 은희의 시야에 다가들고있었다. (쟤도 병원에 오는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남자애는 은희의 시야에서 휙 사라졌다. 하지만 은희의 머리속에서는 그 남자애가 사라지지 않았다. 남자애의 닭알형얼굴이며 잘 빠진 몸매는 은희로 하여금 걸이를 떠올리게 했다. “걸이!” 부르기만 해도  울고싶은 이름이였다. 가슴으로 키워 온 이름이였다. 갑갑하던 은희의 가슴을 밝혀주는 별 같은 이름이였다.   남편이 자기의 짐들을 꿍져가지고 집을 나간것은 2월말이였다. 떠나가는 겨울이 슬퍼서인지 그날따라 지붕으로 눈석이물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아빠, 가지마. 가지 말란 말이야.” 걸이는 아빠의 옷자락을 움켜 쥐고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남편은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자기의 짐들을 날라다 차에 실었다. 걸이는 그러는 아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가지 말라.”고 호소했다. 은희는 그러는 걸이를 바라보면서 억장이 무너지는듯싶었다. (어떻게 일궈낸 가정인데, 어떻게 지키려고 아득바득 애를 써 온 가정인데…) 걸이가 여덟살을 잡는 그해까지 걸이에게 아빠 없는 설음을 주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 은희였다. 하지만 남편은 그러한 은희의 진정도 몰라주고 다른 녀인을 품에 안았다. 남편의 짐이 빠져나가고 어수선한 집안에 남겨진 은희는 눈앞이 캄캄해났다. 당금이라도 그 자리에 잦아들고싶었다. 하지만 아빠를 내놓으라고 발버둥질을 치는 걸이를 보면서 은희는 자기에게 맥을 놓고 앉아서 숨을 고를만한 여유마저  없다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일어서야 한다. 내가 일어서서 걸이를 받쳐주어야 한다.  내 숲이 커야 걸이에게 비를 가리워줄수 있고 볕을 막아줄수 있다.” 은희는 한구들 가득 널려진 물건들을 치운후 소래에 물을 가득 담아 가루비누를 풀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걸레로구들을 빡빡 문질러 닦기 시작했다. 은희는 청소가 끝날 때까지도 어깨를 들먹이는 걸이를 달래여 품에 껴안으며 말했다. “괜찮아, 걸이야. 엄마가 있잖아? 엄마가 걸이를 지켜줄거야!” 걸이는 여전히 은희의 품에 머리를 틀어박은채 바들바들 떨고있었다. 은희는 그러는 걸이를 더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말했다. “걸이야, 이제부터는 더 용감해야 한다. 아빠가 가버렸거든. 그래서 이 세상에 걸이와 엄마 두 사람만 남게 된거야. 하기에 옛날보다 더 용감해야 하는거지. 그래야 아빠가 지켜주지 못하는 그런 두려움도 이겨낼수 있는거야. 그리고 자기 일은 자기 절로 하는 습관도 키워야 하구. 우리 걸이, 그렇게 할수 있지? ” 은희는 너무도 때 일찌기 상처입은 어린양 같은 걸이를 내려다 보며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걸이가 살풋이 얼굴을 들고 은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걸이야, 시름 놓으렴. 엄마가 있잖아. 엄마는 우리 걸이의 눈빛이 하냥 별처럼 반짝이게 할거다. 엄마는 우리 걸이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나는 음식을 먹일거구 세상에서 제일 멋진 옷을 입힐거구 세상에 제일 좋은 대학에 보낼거다.” 은희는 오래도록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시각 은희는 하고싶은 말이 그렇게도 많았다. 하지만 그로서도 그 말을 여덟살에 나는 걸이에게 하고싶은건지 아니면 남편을 떠나 보낸 자기에게 하고싶은건지 알수 없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품에 안긴 걸이가 동정이 없어 내려다보니 걸이는 입가에 느침을 줄줄 흘리면서 잠들어있었다. 이튿날, 은희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학교로 가는 걸이에게 아침밥을 끓여 먹이려는 생각에서였다. “얘는 지금도 자고있겠지?” 은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이의 침실문을 열어보았다. 순간 은희는 목구멍이 꺽 막혀왔다. 걸이는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매고 책상앞에 앉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있었다. “걸이야, 너 뭘하고있는거니?” “학교갈 시간을 기다리고있슴다.” “너 어떻게 이리 일찍 일어났니?” “엄마가 나에게 자기 일은 자기절로 하는 습관을 키우라고 했잼까?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가봐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았슴다.” 걸이의 목소리에는 피곤이 가득 묻어있었다. 하지만 은희를 바라보는 두눈만은 반짝였다. 별을 떠올렸다. 은희는 그 별이 바로 자기가 살아가는 전부의 리유라고 생각했다. 생각 같아서는 와락 걸이를 끌어안고 볼이라도 뿌벼주고싶었지만 은희는 애써 자기의 감정을 억제했다. “걸이야, 우리 걸이 참 장하네!” “내 일은 내 절로 하겠슴다.” 걸이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힘이 들어있었다. 그 말을 들으며 은희는 여덟살에 나는 아이가 하루밤 새에 그렇게 클수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은희는 하루 새롭게 변해가는 걸이를 믿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나이또래의 어린애 같지 않게 음식타발도 하지 않았고 놀이감에 대한 집착도 하지 않았다 속에 작은 령감이라도 들어 앉은듯 너무도 일찌기 셈이 들어가는 걸이를 보면서 은희는 자기가 못나 걸이의 동년을 다 갉아 먹는다는 죄의식이 가슴 한구석을 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걸이의 동년을 보상해줄수 있을가?) 정신적으로는 어쩔수 없는 형편이였지만 물질적으로만은 자신의 조건이 허용되는 범위에서 최고로 만족을 주고싶었다. 손바닥에 쥐면 보이지 않을만치 작고 깜찍한 핸드폰을 산것도 그런 생각에서였다. 그날 출근길에 그런 핸드폰을 목에 건 걸이또래의 한 남자애를 보면서 은희는 그 핸드폰을 꼭 걸이의 목에 걸어주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핸드폰이 있으면 어디에 가서든지 수시로 걸이와 련락할수 있어서 생활에 매우 편리할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저녁, 은희는 핸드폰을 받아 들고 좋아서 퐁퐁 토끼뜀을 할 걸이를 그려보면서 집에 들어섰다. 걸이는 책상앞에 앉아 숙제를 하고있었다. 은희는 걸이의 침실에 들어서면서 기쁘게 소리쳤다. “걸이야, 봐. 핸드폰이다.” “핸…핸드폰?” 걸이는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올롱한 눈으로 은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핸드폰이야. 핸드폰이 있어야 우리 걸이가 어디에 가도 쉽게 련계할수 있지.” “내가 어디로 감가? 날 어디 보내려구 그럼까? 엄마.” 걸이의 목소리는 무서움에 파르르 떨렸고 얼굴색은 파랗게 질려가고있었다. “아!” 은희는 가슴에서 철렁하고 돌멩이가 떨어져내리는것만 같았다. 은희는 걸이를 와락 당겨다 한품에 끌어안았다. “걸이야, 너…너 왜 그렇게 생각하니?” “모르겠슴다. 문뜩 그런 생각이 듬다.” 속삭이는 걸이의 두눈에 이슬이 맺혀 반짝이고있었다. 은희는 걸이의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부비며 목메인 소리로 떠듬거렸다. “거…걸이야, 절대, 절대 그런 생각을 하면 안돼. 주…죽어도 살아도 엄마는 걸이와 함께 할거야!” “네.” 걸이는 은희를 향해 어른스럽게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그러는 걸이를 보면서 은희는 걸이의 가슴속에 자리 잡아가는 그늘을 지워주고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회사의 중견으로 뛰고있는 은희는 회사의 일로도 힘들었던것이다. 은희에게 있어서 사업파트너들과 술자리를 하는 일도 밀어버릴수 없는 일과였다. 저녁 늦게까지 자기를 기다릴 걸이가 불쌍해서 될수록 일찌기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는것이 아니였다. 그날,  2차로 노래방을 끝내고 3차로 죽집에 가자는 동료들을 뿌리치고 은희가 집에 돌아온것은  10시를 금방 넘겨서였다. 그때까지 걸이는 자지 않고있었다. “걸이야, 양뤄촬(羊肉串).” 은희는 포장마차에서 사가지고 온 양고기뀀을 걸이앞에 내밀었다. “감사함다, 엄마.” 걸이는 양고기뀀을 받아들고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걸이야, 엄마하구는 그렇게 인사하지 않아도 되는거야. 우린 가족이니까.” “네.” 걸이는 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손에 물컵을 들고 나왔다. “엄마, 마시쇼. 꿀물임다.” 걸이는 두손으로 물컵을 들어 은희앞에 내밀었다. 전에도 은희가 늦게 올 때면 자지 않고 기다리기는 했지만 그렇게 미리 꿀물까지 풀어 랭장고에 넣고 기다리기는 처음이였다. 은희는 떨리는 손으로 컵을 받으면서 입을 열었다. “감사하다, 걸이야.” “아니요, 엄마. 우린 가족이잼까.” 은희는 와락 걸이를 끄러안고 약간 떨리는 손으로 걸이를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아프다고 그대로 멈추어 있는 시간이 아니였다. 아픔을 안고도 걸이는 무럭무럭 잘도 커갔다. 늘 새물새물 웃으며 “엄마, 엄마.” 하고 불러주던 걸이의 세계에 새로운 무대가 펼쳐지고있었던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걸이의 입에서는 “엄마”라는 호칭이 뜸해졌고 새물새물 웃던 웃음도 사라졌다. 은희가 벼르고 별러대화를 하려고 입을 열면 걸이는 “아니요.”, “네”, “별거 아님다.”로 대화를 대체했다. 사춘기를 앓고있는 걸이를 두고 은희는 별로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은희에게도 힘들게 사춘기를 넘어온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이나 동료들의 입에서 자식들이 힘들게 사춘기를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은적도 있었다. 은희는 조용히 걸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어릴 때처럼 그렇게 밝은 모습은 아니지만 걸이는 그래도 용하게 사춘기를 넘기고있었다. 코밑이며 두볼에까지 수염이 자라나 하루라도 면도를 하지 않으면 이웃집나그네를 방불케 했다. 은희는 가끔 꿀물을 타서 랭장고에 얹어주던 어린 시절의 걸이가 그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또 하늘이 무너져도 떠받칠수 있을듯 튼실하게 자라난 걸이로 하여 가슴속 한구석이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걸이는 그렇게 무난히 초중을 졸업하고 고중에 들어갔으며 대학에 입학했다. 걸이를 싣고 떠나가는 기차를 향해 손을 저으며 은희는 두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할수 없었다. 좋은 날에 눈물을 흘리지 말자고 마음 먹었지만 눈물은 멈출줄을 몰랐다. 은희에게 있어서 리혼후의 십여년 세월은 그야말로 걸이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세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쥐면 부서질가 불면 날아날가 애지중지 보듬어 오던 그 자식이 어엿한 대학생이 되여 그의 품을 떠나는것이였다. 자랑스러웠다. 세상에 두려울것이 없을것 같았다.  하늘이 무너지면 그 놈이 한모퉁이를 든든히 받쳐줄것 같았다. 걸이가 첫 겨울방학을 맞아 집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던 그날밤, 은희는 긴긴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지나간 하루하루가 영화필림마냥 은희의 눈앞을 스쳐지났던것이다. 이튿날부터 은희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걸이가 돌아올 날을 기다렸다. 구석구석 먼지도 털어내고 어지럽지도 않은 이불도 뜯어 빨았다. 걸이가 차에 앉았다는 전화를 받던 그 순간부터 은희는 가슴이 활랑거려 도무지 진정할수 없었다. 그날, 은희는 렬차 도착시간을 한 시간이나 앞당겨 역전으로 나갔다. 떠나는 사람, 바래는 사람 그리고 마중나온 사람들로 대합실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혼탁한 공기로 하여 머리까지 뗑해났다. 역에 나가 시원한 바람이라도 쏘이며 기다리는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함께 개찰구를 나왔던 사람들을 렬차에 실어보낸 역에는  찬바람만 쌩쌩 몰아칠뿐 사람그림자도 얼마 보이지 않았다. 은희는 으스스 몸을 떨면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5시 10분이였다. 렬차가 역에 들어설 시간까지는 30분이 남아있었다. (어디까지 왔을가?) 은희는 걸이를 그려보면서 머리를 들었다. 까아만 밤하늘에서 별무리들이 숨박꼭질이나 하듯 깜박이고있었다. 분명 그 자리에 있는 별을 본듯한데 잠간 딴눈을 팔고나면 그 별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잘 못 보았나?) 하고 생각하면서 다른 별을 살피다가 다시 그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또다시 그 자리에 별이 나타나 반짝이고있었다.  (저 별은  원래 저 자리에 있었던건가?) 은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무룩히 입가에 웃음을 피워 올렸다.  차츰 발끝이 시려왔다. 찬바람이 뼈속까지 스며드는것 같았다. 은희는 선자리에서 동동 발을 굴렀다. 30분이 지났건만 렬차는 역에 들어서지 않았다. (웬 일일가?) 은희는 초조한 마음을 안고 사업일군에게 사연을 물었다. 렬차가 30분 연착되였다고 알려주었다. “호― 하필이면 오늘 렬차가 연착될건 뭐람!” 은희는 얼어서 남의 살갗처럼 되여버린 입술을 감빨았다.아래턱이 덜덜 떨려나 좀처럼 진정할수 없었다. 그날밤, 걸이와 함께 택시에 앉아 집으로 돌아온 은희는 온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역전에서 바람을 맞아 그렇겠지. 저녁후에 감기약이나 먹어야겠다.) 은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정성다해 저녁밥상을 차렸다. 걸이가 좋아하던 갈비찜이며 동태탕도 상에 올렸다. 은희는 저녁을 먹으면서 걸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싶었다. 하지만 걸이는 오랜 시간 차에 치워 오느라 피곤했던지 겨우 은희의 말에 응부하면서 수걱수걱 밥술만 입으로 날라갔다. “걸이야, 이 갈비찜을 먹어봐라. 아침부터 삶은것을 엄마가 방금 조미료를 넣어 가공했단다. 고기가 많이 붙었거든. 살짝 당기기만 해도 뼈가 술술 빠질거다.” 은희는 큼직한 갈비 하나를 집어 걸이의 밥사발에 놓아주었다. “됐어요. 저 절로 먹을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걸이는 은희가 집어준 갈비를 집어들었다. 뼈에 붙은 두툼한 고기를 쑥 빼서 우물우물 씹는 걸이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묻어 있지 않았다. 하다못해 “맛있슴다.”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해도 좋을것 같았다. 하지만 걸이는 고기를 다 씹어 꿀꺽 소리나게 삼킬 때까지도 말 한마디 없었다. 은희는 자기의 노력이 보상을 받지 못하는듯한 생각이 갈마들면서 어딘가 좀 서운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보고싶었는데. 하고싶은 말은 또 얼마나 많았구.) 하지만 너무도 덤덤한 얼굴로 밥만 먹어대는 걸이에게 뭐라고 말을 건다는것이 부담스럽게 생각되였다. 은희는 기계적으로 입에 음식을 날라가는 걸이를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딱히 어떻다고 음식에 대한 평가는 없었지만 걸이는 이것저것 잘 먹어주었다. 은희는 갈비 하나를 또 집어 걸이의 밥사발에 놓아주며 넌짓이 물었다. “맛있지? 갈비.” “네.” “학교식당에서도 갈비랑 하니?” “네, 가끔.” “자주 사먹어야지.” “비싸죠.” “애두, 비싸다구 먹고싶은것을 참겠니?” 은희는 걸이와의 화제를 찾은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걸이는 몇술 더 뜨는것처럼 하다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왜, 벌써 다 먹었니?” “배 불러요.” 걸이는 짤막하게 한마디 하고는 걸상에서 일어섰다. “왜, 더 먹지.” 말끝이 떨어지기도전에 걸이는 은희의 시야에서 휙 사라졌다. 은희도 그러는 걸이를 따라 객실로 나갔다. 걸이는 그러는 은희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의 침실로 들어가 쿵 하고 방문을 닫아 버렸다. 순간 문소리와 함께 은희의 가슴도 꺽 막혀버리는듯싶었다. 그날밤, 은희는 온몸에 열이 오르고 목이 아파 도무지 잠을 이룰수 없었다. 은희는 가까스로 일어나 감기약을 주어 먹고 다시 자리에 들었다. 은희는 긴긴 밤을 악몽으로 모대기다가 새벽녘에야 쪽잠이 들었다. 얼마 잔것 같지 않은데 자명종이 울렸다. 걸이만 없다면 그대로 누워있다가 그 맵시로 출근하고싶었지만 걸이의 아침밥때문에 일어나지 않을수 없었다. 은희가 밥상을 차려놓고 불러서야 걸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침은 안 먹어도 괜찮은데요.” 걸이는 잠기 어린 두눈을 뿌비면서 밥상앞에 마주 앉았다. “얘를 봐라. 아침을 안 먹다니. 속을 버린다. 너 학교에서 자주 아침을 굶는것이 아니니?” “네, 보통 안 먹어요.” “쯧쯧쯧… 객지 밥을 먹는 사람들은 그래서 위를 버린다니까. 피곤해도 아침은 꼭 챙겨먹어야 한다.” “네.” “집을 나가면 고생이지. 엄마곁에 있었으면 아침마다 따끈따끈한 밥을 먹겠는데.” “모두들 그렇게 살아요.” “하긴, 모두가 너 같은 도개비들이겠으니까.” 은희는 말하면서 걸이의 얼굴을 일별했다. 걸이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수걱수걱 밥술만 뜨고있었다. 그러는 걸이를 보기만 해도 은희는 배 부른것 같았다. 은희는 수저를 들 생각마저 잊고 뚫어져라 걸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 잡수세요?” “먹어야지. 먹는다구… 아이참, 그런데 왜 내 얼굴에 이렇게 열이 오르지…” 은희는 얼굴에 대고 큰 동작으로 손부채질을 하면서 말했다. “감기에 걸린거 아니예요? 약을 잡수세요.” “그래, 약 먹어야겠다. 너 밥 더 줄가?” “아니요. 배 불러요.” 말을 마친 걸이는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벌써 다 먹었니? 좀더 먹지.” “됐어요.” 말을 마친 걸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맵시로 침실에 들어가 덜컹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남자애들은 참 도틀이 없다니까. 녀자애들 같았으면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랑 하면서 시시콜콜 수다나 좀 떨어줄건데…” 은희는 아쉬운 생각에 끌끌 혀를 차다가 밥맛이 돌지 않아 그대로 일어섰다. 은희는 천근같은 다리를 끌며 출근길에 올랐다. 간신히 사무실에 도착했지만 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은희는 그렇게 진종일 우왕좌왕 하다가 퇴근시간을 맞춰 일어섰다. 집에 들어서자 걸이의 침실문이 열렸다. “왔어요?” 걸이가 내복바람으로 나오며 인사했다. “오, 너 어데 놀러 안 나갔댔니?” 은희는 애써 얼굴에 웃음을 담으며 걸이를 바라보았다. “네. 집에 있었댔어요.” 말을 마친 걸이는 다시 자기의 침실로 들어가버렸다. 뭔가 더 말하려고 입을 벌리던 은희는 탕 하는 문소리에  실망하고입만 쩝쩝 다셨다. 순간 웬지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걸이의 침실과 객실을 막아놓은 그 침실문이 은희에게는 산처럼 느껴졌다. 그 산이 너무 높아 도무지 넘을수 없을것 같았다. 은희는 자신이 걸이에게서 완전히 잊혀진 사람으로 되는것 같아 서럽기까지 했다. 은희는 옷을 벗어 옷장에 대충 걸어놓고는 무너질듯 침대에 쓰러졌다. 저녁이고 뭐고 관계 없이 그대로 잠들어 버리고싶었다. 은희는 이불을 당겨다가 머리까지 푹 덮어썼다. 눕자마자 잠이 쏟아질것 같았지만 정작 눕고보니 머리만 지긋지긋 아파나면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말뚱말뚱해지는 눈앞으로 수걱수걱 밥술을 나르던 걸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자 자기가 일어나지 않으면 걸이도 저녁을 먹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이들었다. (안되지, 나는 아파서 그렇다손 쳐도 몸이 펀펀한 걸이야 저녁을 굶길수 없지.) 가까스로 일어나 앉아 숨을 고르고 난 은희는 객실에 나가 걸이의 침실쪽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걸이야, 저녁에 뭘 먹고싶니?” “아무거나.” 걸이는 나오지도 않고 자기의 침실에서 한마디 했다. “삼겹살을 구워줄가?” “맘대루.” 이번에도 걸이는 그렇게 외마디 대답만 할뿐이였다. “알았다.” 은희는 잦아드는 목소리로 한마디 하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저녁밥상을 마주하고 앉았지만 은희는 온몸에 열이 팔팔 끓어 도무지 밥알을 넘길수 없었다. 은희는 들었던 수저를 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밥맛이 없네. 걸이야, 너 혼자 먹어라.” “감기 심하게  걸렸네요.  병원에 가서 링겔이라도 맞으시오.” “아니다. 잠간 누웠다 일어나면 낫겠지.” 은희는 천천히 몸을 이르켜 두어걸음 걷다가 머리를 돌렸다. 걸이는 머리를 수굿한채 부지런히 입에 밥을 퍼넣고있었다. (참, 내가 밥맛이 없다한다구 한번 더 권하지도 않네.) 은희는 서운한 생각에 “호—”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자기의 침실로 들어갔다. 너무 힘들었던 탓인지 은희는 용하게도 잠이 들었다가 목에서 겨불내가 나는것 같아 깨여났다. 은희는 물을 찾아 주방으로 갔다. 걸이가 쓰던    밥사발과 수저가 가시대에 들어가 있는외에 나머지 반찬그릇들은 그대로 밥상우에 놓여있었다. 은희는 정수기에서 물을 뽑아 꿀꺽꿀꺽 마셨다. 타는것 같던 가슴이 잠시나마 시원해지는듯싶었다. 은희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면서 침실로 들어가려다가 문뜩 머리를 돌려 걸이의 침실쪽을 바라 보았다. 침실문은 여전히 굳게 닫친대로였다. (걸이는 진종일 침실에 들어박혀 뭘 하고있을가?) 은희는 침실문을 확 밀어열고 들어가 걸이가 무엇을 하는가를 보고싶었다. 하지만 걸이의 침실쪽으로 두어걸음 옮기던 은희는 문뜩 걸음을 멈추었다. (그래, 봐서는 뭘 하지? 그만두자, 설마 걸이가 침실에서 나쁜짓이야 할라구? 제 하고싶은 대로 하라지.) 은희는 주방으로 돌아가 밥상앞에 마주앉았다. 밥을 몇술이라도 떠넣어야 감기약을 먹을수 있을것 같았던것이다. 걸이가 먹다 남긴 반찬그릇을 그대로 마주하고 앉아 모래알처럼 느껴지는 밥알을 세여 입에 넣노라니 저도 몰래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쩌면 자기가 사람그림자 하나 없는 불모지에 던져진듯한 외로움이 갈마들었던것이다. 은희는 저도 모르게 걸이에게 의지하고싶어지는 자신이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지할수록 그만치 걸이가 낯설고 멀게 느껴지는것도 사실이였다. (그래, 그게 아니야. 곧 내 품을 완전히 떠날 자식인데… 그 애에게 기대려고 생각하는 내가 틀린거지. 내 몸은 내 스스로 챙기는거야.) 은희는 애써 밥을 입에 퍼넣으며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시침이  7시를 가리키고있었다. 은희는 침실로 들어가 옷을 찾아 입었다. 병원에 가 링겔이라도 맞으려는 생각에서였다. 은희는 옷을 다 입은후 그냥 나가려다가 걸이가 자기가 없는것을 발견하고 근심할것 같아 알리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걸이의 침실쪽으로 다가갔다. 걸이가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된다는데. 정말이지 그럼. 우리 엄마가 와늘 열이 펄펄 끓는다. 그래, 자식이라구는 나 하나밖에 없는데 내가 지켜드리지 않으면 누가 지켜드리겠니. 그래, 다음날 보자. 우리 집 ‘로친’이 감기를 다 앓고난 후에 만나자.” 그 말을 들으며 은희는 가슴이 후더워 났다. (내가 병원에 간다고 하면 혹시 나와 함께 병원에 가주겠다고 하지 않을가? 그래도 그건 아니지. 이 추운 날씨에 괜히 따라나섰다가 그 애가 감기에라도 걸리면 어쩔라구. 아니지, 내가 혼자 갔다오면 될걸 가지구.) 은희는 그렇게 흐뭇한 생각을 굴리면서 걸이의 침실에 대고 소리쳤다. “걸이야, 엄마 병원에 간다.” “네?” 소리에 이어 침실문이 열렸다. (아니, 얘가 정말 함께 따라나서려는게 아닌가?) 은희는 가슴마저 후둑후둑 뛰였다. “엄마가 병원에 가서 링겔을 맞고 올테니 너 먼저 자거라.” “네, 갔다 오세요.” 말을 마친 걸이는 아무 일도 없는듯 몸을 돌려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은희는 우두커니 서서 쿵 하고 닫기는 침실문을  바라보다가 한풀 꺾여 힘겹게 다리를 끌며 출입문쪽으로 다가갔다. (어쩌면 인사말로라도 “함께 가줄가요.”라고 한마디 못하는가? 그렇다면 아까 제 친구들과 한 말은 저녁에 나가기 싫어서 나를 방패로 내세운것이란 말인가? 그줄도 모르고 나는 괜히 감동까지 먹지 않았는가?) 떡줄놈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고 속에 엄마라는 개념마저 없는 자식에게 짝사랑을 하는것 같아 은희는 괜히 부아통이 터지려고 했다.   생각같아서는 하루쯤 쉬고싶었지만 하루만 견지하면 토요일, 일요일인지라 은희는 힘들게 기여 일어났다. 겨우 아침밥을 지어놓았지만 기름냄새까지 맡고보니 좀처럼 식욕이 돌지 않았다. 은희는 상우에다 가지가지 반찬들을 곱게 차려놓은후 조용히 출근길에 올랐다. 저녁편이 되자 또 온몸이 펄펄 끓어 올랐다. 은희는 퇴근하는 길로 병원에 가 링겔을 맞을가고 생각하다가 그래도 집에 돌아가 걸이에게 저녁을 지어 먹인후 병원으로 가는것이 순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희는 간신히 공공뻐스에 올랐다. 퇴근시간이라 뻐스안은 시루속처럼 사람들로 빼곡했다. 그런데도 정거장마다에서 손님들이 올랐다. 내리는 사람이 적고 오르는 사람이 많아 뻐스안은 점점 더 비좁아졌다. 은희는 지탱하기 힘든 몸을 완전히 인파에 맡겨버렸다. 차가 덜컹 하고 들추자 사람들이 하나같이 뒤로 쏠렸다. 은희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깐센마(干什么)?” 뒤에서 찢어질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희가 깜짝 놀라 머리를 돌려보니 뚱뚱한 몸매의 아줌마가 은희에게 눈을 부라리고있었다. 은희가 자기의 발을 밟았다는것이였다. 은희는 애써 얼굴에 웃음을 띠우면서 사과했다. 하지만 아줌마는 되려 기고만장해서 소리쳤다. “메이짱 얜징아(没长眼睛啊?” “네년은 뒤에도 눈이 달렸냐?” 하고 소리라도 치고싶었지만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지라 은희는 “나 죽었소.” 하는 식으로 두눈을 지그시 감아버렸다. 아줌마는 계속 뭐라고 궁시렁거리다가 제풀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은희는 뻐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면서 사는게 정말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덜컹 하고 출입문소리가 나면 침실문을 열고 내다보기라도 하던 걸이가 웬지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어데 나갔는가?) 신을 벗어놓는 바닥을 내려다보니 걸이의 신은 그대로 있었다. 아마도 귀에다 이어폰을 끼고 노래라도 듣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은희는 침실로 들어가 되는대로 가방을 침대에 훌렁 던져버리고는  웃옷을 벗었다. 불시에 집안의 더운 공기가 몸을 감싸서인지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은희는 잠간 침대머리에 주저 앉아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터지는것처럼 아픈 머리속으로 뻐스에서 만났던 뚱뚱한 몸매의 아줌마가 떠올랐다. “메이짱 얜징아(没长眼睛啊)” 아줌마는 얄밉게도 연신 소리치고있었다. 은희는 생각할수록 괜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은희는 몸에서 열이 더 끓는것 같아 우에 입었던 실내복을 벗으려고 목깃에 채운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손이 떨려 단추가 잘 벗겨지지 않았다. 은희는 신경질적으로 목깃을 확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단추가 떨어져나갔다. (왜 이래, 참 재수에 옴 붙었네.) 은희는 궁시렁거리며 실내복을 벗어 옷장에 넣은후 잠옷을 입고 주방으로 나갔다. 청국장에 고추가루를 팍 넣어 끓여 먹으면 속이 개운해질것 같았다. 은희는 배추김치잎이며 감자며를 썰어 냄비에 넣은후 청국장을 푹푹 떠넣고 물을 부었다. 그후 가스레인지를 틀어놓고는 랭장고에서 콩나물을 꺼냈다. 콩나물을 데쳐 랭채를 무치려는 생각에서였다. 은희는 왼손을 얼굴 가까이에 가져다 손부채질을  하면서 오른손으로 콩나물을 다듬었다. (괘심한 년, 공공뻐스가 그렇지. 그래 네년은 뒤에 눈깔이라도 달렸는감? 왜 나보고 “메이짱 얜징아?” 하고 욕하는거야?) 몸매가 뚱뚱한 그 아줌마가 지궂게도 은희의 머리속을 헤집고있었다. 은희는 고추가루 팔러 갔다가 서북풍을 만난 아낙네처럼 보이지도 않는 그 아줌마에게 궁시렁궁시렁 줄욕을 퍼부었다.   그때 갑자기 청국장냄새가 코를 찔렀다. 은희는 감짝 놀라며 가스레인지에 눈길을 돌렸다. 팔팔 끓던 청국장이 넘쳐나 가스레인지에 쏟아져내리고있었다. 은희는 급히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는 청국장냄비를 들어내렸다. 은희는 행주로 가스레인지에 흘러내린 청국장을 닦아냈다. 밥맛을 당길것 같던 청국장냄새가 페부에 스며들자 구역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은희는 두손에 행주를 움켜쥔채 그 자리에 폴싹 주저 앉았다. 한번 시작된 구역질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은희는 왝왝 구역질을 하면서 급히 화장실로 뛰여갔다. “왜 그램까?” 그 소리에 은희는 머리를 돌렸다. 걸이가 잠옷바람으로 뒤에 서서 초조한 눈길로 은희를 바라보고있었다. 순간 은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였는지도 모를 분노가 터져올랐다. “너, 너 진종일 집에서 무슨짓을 하고있는거니?” 너무나도 돌연적인 공격에 걸이는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두눈을 퀭 하니 뜬채 은희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건 말건 은희는 젖먹던 힘까지 다내서 바락바락 소리질렀다. “너무하다, 너. 에미가 다 죽어간다는데도 아픈가 한마디 물어두 안 보니? 아예 에미가 죽어 없어져야 시름이 놓이겠구나.” 말을 마친 은희는 그 맵시로 바닥에 풍덩 주저앉아 어깨를 들먹이며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냈다. “왜, 왜 이램까?” “됐다. 나…나, 너 없는셈 치겠다.” 말을 마친 은희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급히 부축하려는 걸이의 손을 쳐버리며 은희는 자기의 침실로 들어가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걸이가 인차 따라 들어왔다. “나라고 왜…왜 어머니가 감기로 힘들어하는걸 모…모르겠슴까? 그런데 알면 또 어떻게 하람까? 같이 앓을수도 없구.” 걸이가 불안한 목소리로 꺽꺽 말을 더듬었다. “누가 너보구 같이 앓아달라구 했니? 아픈가고 물어도 못보는가 말이다.” “참, 그래서 나두 ‘약을 잡수쇼.’, ‘링겔을 맞으쇼.’ 하고 문안하지 않았슴까?” “야, 그렇게 의무적으로 한때 한번씩 물어보는것두 관심이냐?” 은희는 오른손을 들어 식지를 쭉 펴보이며 크게 소리쳤다. “그럼 어떻게 하람까? 한때에 두번씩 물어보람까? 도움도 안될것을. 혹시나 엄마가 심부름이라도 시킬것 같아 친구들이 밤낮으로 놀러 가자고 전화 오는것도 내가  나가지 않고있잖슴까? 다른 애들은 집에 온날부터 뭉쳐다니며 놀고있슴다. 혹시 낮에 엄마 전화 올가봐 집을 지키구있었는데… 엄마는 그래 내가 녀자애들처럼 시도 때도 없이 ‘아픔까?’, ‘열이 남까?’, ‘목이 아픔까?’ 하구 물어봤음 좋겠슴까? 내 도움이 필요하면 시원히 말하쇼. 엄마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내 어떻게 암까? 왜 말 못하구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함까? 내 엄마 아들임다.” 말이 없던 걸이였지만 정작 입을 여니 말이 술술 잘도 나왔다. 련주포를 쏘아대는 걸이를 멍하니 바라보며 은희는 잠시 뭐라고 할 말을 찾을수 없었다. 걸이의 마디마디가 그른게 없다고 생각되였다. 하지만 무너지는 체면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은희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바락 소리 질렀다.  “듣기 싫다, 듣기 싫어. 그 잘나게 에미를 생각하면서.” 은희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둘둘 굴러떨어졌다. 그러는 은희를 바라보던 걸이가 입가에 시무룩히 웃음을 담으며 말했다. “알았슴다, 엄마. 저녁 먹구 나랑 병원에 가기쇼. 앞으로는 진짜 ‘잘나게’ 엄마를 생각하겠슴다.” 걸이는 휴지를 쑥 뽑아 은희의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있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어 큼직한 손바닥을 은희의 어깨우에 올려놓더니 힘있게  툭툭  다독여주기까지 했다. “쉬쇼!” 말을 마친 걸이는 몸을 돌려 침실을 나갔다. 훤칠한 키꼴이며 떡 벌어진 어깨가 은희의 눈확을 파고들었다.    걸이가 다독여준 어깨가 뜨끔뜨끔해났다. 이어 그곳으로부터 달콤한 난류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것 같았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당금 터져버릴것 같던 머리가 어깨로부터 퍼져오는 그 난류때문에 한결 가벼워졌다. 은희는 창문가로 다가가 한겨울이라는것도 잊고 창문을 열어젖혔다. 찬바람이 휙 불어들어와 화끈화끈 달아오르던 은희의 얼굴을 쓸어주었다. “후욱―” 은희는 길게 들숨을 끌었다. 가슴이 탁 트이는것 같았다. 캄캄한 밤하늘에서 뭇별이 반짝이고있었다. 자기가 몸 담그고있는 도시에 그렇게 많은 별이 있었다는것이 놀라울따름이였다. 그랬다. 별은 분명 그 자리를 지키고있었다. 은희는 자기가 그 별들을 보아내지 못했을뿐이라고 생각했다.                     
4    중편소설 * 짙어가는 어둠 댓글:  조회:2251  추천:2  2012-11-10
    1     ―아빠, 할아버지 있잖아, 진짜 웃겨. 진이는 원래 작은 두눈을 찔끔 감았다 뜨면서 배시시 웃음을 빼여물었다. 또 무슨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구나. 정우는 귀여워서 못 참겠다는듯 진이를 바라보면서 짐짓 설레설레 머리를 저어보였다. ―진이야, 너 거짓말이지? ―아니야, 아빠. 진짜라니까. 할아버지 있잖아. ―그래, 할아버지 계시지. ―할아버지 진짜 웃긴다니까. ―어떻게? 호기심이 동한다는듯 일부러 한 옥타브 높이는 정우의 목소리에 진이는 쫑드르르 달려와 정우의 무릎에 포동포동한 엉뎅이를 올려놓으며 신비하게 종알거렸다. ―할아버지 그러시는데 옛날에 할아버지 “똥푸개”였대. ―뭐라구? 너무나도 뜻밖의 말에 정우는 진이의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동공을 키웠다. 진이가 그러는 정우의 표정이 재밌다는듯 머리를 살래살래 저으며 말했다. ―몰라, 옛날에 할아버지 “똥푸개”였다는데 뭐. 말을 마친 진이는 입술을 귀밑으로 올리붙이며 캐드득캐드득 웃기 시작했다. 그러는 진이의 두눈이 한일자로 맞붙으며 새물거렸다. 은방울 굴리는듯 해맑은 웃음소리가 까르르까르르 터져나왔다. 하지만 정우는 그 웃음소리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자식, 웬 소리를 하는거야? 정우는 얼굴에 피여났던 웃음을 걷우며 목소리에 가시를 박았다. ―너 못하는 말이 없구나. 어데서 그런 말을 배웠니? ―진― 짜라니까. 할아버지가 그랬는데 뭐. 정우의 얼굴에 박혀있는 잔가시를 발견했던지 진이는 정우를 향해 두눈을 올롱하게 치떠보이며 억울하다는듯 아래입술을 쏙 내밀었다. 표정으로 보아 진이가 너무 허황한 거짓말을 하는것 같지는 않았다. 정우는 오른손을 내밀어 진이를 당겨다 다시 무릎우에 올려앉히고는 애써 목소리를 고르며 한결 부드럽게 물었다. ―말해봐, 진이야. 할아버지가 어떻게 말씀했는데? ―ㅋㅋㅋㅋ… 할아버지가 있잖아.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연집강변에서 말이야. “진이야, 똥 푸러 가자.” 이러면서 모자로 강물을 퍼다가 가로수에 막 주었어. 진이는 정우의 무릎에서 폴짝 뛰여내려 제법 모자로 물을 푸는 흉내까지 내면서 웃음을 흘렸다. 정우는 촐싹거리는 진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냥 철 없는 애의 싱거운 소리로 받아 넘기기에는 너무 버거운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똥푸개”라니… 정우는 가슴에서 뭔가 툭- 하고 떨어져내리는듯한 진동을 느꼈다. 가슴밑자락으로부터 진한 아픔이 스멀스멀 기여올랐다. 정우는 지그시 두눈을 감았다가 번쩍 떴다. 눈앞에 현기증 같은것이 일었다. 진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심상찮은 일이다. ―그리구 또, 할아버지 있잖아… 진이는 뭔가 더 말하고싶은듯 정우앞에 한발 다가섰다. 정우는 종알거리는 진이를 뒤로 한채 자리를 차고 일어나 급히 옷을 주어입기 시작했다. ―아빠, 어디 가? 정우의 반상적인 거동에 놀란 진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바람에 주방에서 저녁준비를 하던 은이가 객실로 나오며 웬 일이냐는듯 정우에게 눈길을 박았다. ―나, 아버지네 댁에 갔다와야겠소. ―갑자기 거긴 왜요? 은이가 놀랍다는듯 눈동자를 키우며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았다. ―얘가 방금 이상한 소리를 하길래. ―나두 들었어요. 당신두 참, 괜히 애 말에 신경을 쓰면서… 은이는 아무 일도 아닌것을 가지고 유난을 떤다는듯한 표정이였다. 하지만 정우의 얼굴에는 점점 그늘이 비끼고있었다. 정우는 급히 웃옷을 걸치면서 입을 열었다. ―아니요. 괜한 말이 아닌것 같아서. ―괜한 말이 아니면 아버님이 진짜 똥 푸러 어디에 가실가봐요? 호호호호… 은희는 웃음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정우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것보다두…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정우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뒤말을 얼버무렸다. 은이는 정우의 그런 변화에 신경을 쓰지 않고 기분 좋은듯 제 말에만 급했다. ―어머니 말이예요. 지난번에 사보낸 약을 자시고 혈압이 많이 내려갔대요. 약효가 좋다고 오늘 전화가 왔는데 목소리가맑았어요. ―다행이네. 정우는 웃옷 마지막 단추를 끼우며 한마디 했다. ―그래요. 한시름 놓았어요. 어머니 어쩌는줄 아세요? 당신이 사위질을 잘한대요. ―저녁이 다되면 당신 먼저 먹소. 난 아버지네 댁에서 몇술 뜨고 오겠소. 말을 마친 정우는 몸을 돌려 출입문쪽을 바라고 종종걸음을 놓았다. ―기어이 가려구요? ―가봐야지. 정우가 구두에 발을 넣으며 말했다. ―당신 참, 신경이 예민해가지구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을가봐 근심이 돼서… 정우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있었다. 그것은 정우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을 당할 때마다 나타내는 일종 징크스 같은 반응이였다. 과분하다 할만큼 반상적인 정우의 행동에 은이도 약간 불안한 기색을 띠며 못마땅한듯 정우를 바라보았다. ―참 못 말린다니까요. 당신 같은 효자두 없을거예요. ―당신 같은 효자두 없을거예요. 진이도 은이를 본 따 한마디 던졌다. 그러고는 제딴에도 우스운지 또 한번 까르르 웃어제꼈다. 정우는 멀리까지 따라나오는 진이의 웃음소리를 뒤로 한채 급급히 계단을 내렸다. 대지에 뉘엿뉘엿 어둠이 깃들고있었다.     2     아버지가 왜 그런 행동을 하셨을가? 그게 정녕 사실일가? 사실이라면 그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는것일가? 생각할수록 두려워났다. 그게 사실이라면 더 말치 않아도 답은 나오는것이다. 치매?! 65세인 아버지와 “치매”를 이어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하지만 싫다고 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니라는 느낌이 정우의 뇌리를 치고 들어왔다. 어느 자료에서 본적이 있는데 근년에는 40대에도 치매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추세라고 했다. 그러니 한뉘 뼈돈을 벌어 아글타글 자식들을 키워오신 아버지가 65세에 치매를 앓지 말라는 법은 없을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치매? 다른 병도 아니고 치매라니… 정우는 가슴이 침침해나며 목에 뭔가가 가득 걸려있는듯싶어 캑캑하고 힘주어 건가래를 뗐다. 하지만 목에서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너무 힘을 주었던때문인지 목이 먹먹해오더니 이어 코등이 시큼해났다. 발걸음은 어느새 연집강변에 이르고있었다. 저기서 아버지가 그런 행동을 하셨다고 했지? 정우는 일부러 발걸음을 강뚝으로 옮겨갔다. 늦봄이라 강기슭은 진작 푸른 단장을 하고있었다. 푸르른 단장속에서 노오란 꽃들이 가담가담 웃음을 짓고있었다. 만개한 민들레였다. 찰랑찰랑… 흘러가는 물소리가 정답게 귀를 간질렀다. 아버지의 가슴에도 아직 그 세월의 아픔이 앙금처럼 남아있는것일가? 시름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고있노라니 정우는 저도 몰래 눈굽이 촉촉히 젖어왔다. 생각하고싶지 않은 그 세월의 흐릿한 화폭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잊으려고 해도 점점더 깊이 파고드는 아픈 추억은 내내 정우의 가슴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있었다.   그것은 정우가 진이만한 나이때의 어느날이였다. 유치원에서는 그날 봄나들이로 공원을 찾게 되였다. 유치원에서 공원이 멀지 않기에 정우네는 손을 잡고 걸어서 공원으로 가는 길이였다. 긴긴 겨울 교실에만 박혀있던 애들이라 봄을 맞아 밖으로 나오니 마치도 해바라기를 하는 병아리들 같았다. 종알종알… 까르르까르르… 여기저기서 애들의 말소리며 해맑은 웃음소리가 터져올랐다. 대오가 막 연집강을 지나고있을 때 누군가 갑자기 소리쳤다. ―똥푸개 온다― 똥푸개 온다― 소리치는 애가 가리키는쪽을 바라보니 아니나다를가 뒤쪽으로부터 큰 양철통을 실은 마차 한대가 굴러오고있었다. 그 양철통에 무엇이 들어있다는것은 말하지 않아도 그 시절엔 누구나 아는 사실이였다. 애들은 더럽다고 코를 싸쥐며 부산을 떨었다. ―똥푸개, 똥푸개… 똥 푸다가 똥물에 빠져죽어라… 애들은 손벽을 짝짝 치며 소리쳤고 길에서 작은 돌멩이를 주어 마차에 뿌리기까지 했다.  ―조용하세요, 조용히 걸으세요. 더럽다고 코를 싸쥐고 소리치는 애들에게 교양원이 소리쳤다. 그때 정우는 마차와 마차옆에서 걸음을 옮기는 그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은 분명 아버지였던것이다. 아버지가 위생대에 다닌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남들보다 돈을 좀더 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아버지가 왜 “똥푸개”로 되였는가? 삼검불 같은 사색의 실마리가 정우의 작은 머리에서 엉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떠오르지 않고 두볼만 확확 달아오르며 빨갛게 상기되여갔다. ―저게… 저게… 그 소리에 정우는 목소리 임자를 찾아 머리를 홱 돌렸다. 철이였다. 정우네와 한동네에 사는 철이였다. 철이는 분명 정우의 아버지를 알아볼수 있을것이였다. 정우는 너무도 급해서 가슴에 토끼 한마리를 품은듯한 기분이였다. 정우는 당금 튀여나오려는듯 팔딱팔딱 높뛰는 작은 심장을 꼭 누르고 철이에게 애원의 눈길을 보냈다. 제발 철이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으면, 알아보았다 해도 정우 아버지라고 소리치지 말았으면 하고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철이는 정우의 마음을 너무도 몰라주었다. 철이는 단번에 정우의 아버지를 알아보았고 또 정우를 위해 입을 다물려고 하지 않았다. ―저게 정우 아버지다. 정우야, 저게 너네 아버지 옳지? 저 똥푸개 너네 아버지 옳구나. ―아니다. 정우는 철이를 쏘아보며 칼로 두부모 베듯 딱 잘라버렸다. ―이― 거짓말, 저게 너네 아버지 아니구 누구야? 철이는 마차옆에서 걸음을 옮기는 정우 아버지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뽑아댔다. ―아니라는데, 너 왜 그러니? 정우는 들까부는 철이를 향해 있는 힘껏 쏘아붙였다. ―옳은데 뭐. 내가 잘못 볼리 있니? 저 똥푸개 딱 너네 아버진데. ―이 새끼, 아니라는데. 정우는 그만 솟구치는 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주먹을 날려 철이의 나불거리는 입을 들이박았다. ―똥푸개 같은게 누굴 때리니? 철이도 만만치 않게 달려들었다. 정우와 철이는 삽시간에 안고 돌아갔다. 돌연적인 사태에 잠간 멍해있던 교양원이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던지 소리쳤다. ―그만하세요. 싸우지 마세요. 교양원이 달려들어 정우와 철이를 뜯어 갈라세워놓고는 엄하게 꾸짖었다. ―조용하세요. 똥푸개가 어떻다는거예요? 시민들을 위해 변소청소를 해주는분들인데 응당 존경받아야 해요. 교양원은 손으로 멀어져가는 마차를 가리키면서 말을 마쳤다. 아버지는 정우네가 치고 박고 할퀴고 물어뜯는것을 아예 보지 못했던지 마차를 몰고 저 멀리 앞서가고있었다. 그날 다른 애들은 즐겁게 공원놀이를 했지만 정우만은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몰랐다. 정우에게 있어서 그 하루는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정우는 퇴근하여 들어온 아버지를 보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미워. 밉다구! 언제나 입을 꼭 다물고 어른들의 눈치만 살피던 정우의 돌연적인 행동에 아버지는 너무도 놀라 목석처럼 굳어지고있었다. 저녁준비를 하고있던 어머니가 정우의 웨침소리를 듣고 뛰여나왔다. ―정우야, 왜 그러니? 아버지하구. ―아버지, 똥푸개질해요. 더러워요. ―얘가! 어머니는 다짜고짜 정우의 뺨을 후려갈겼다. ―엄마― 어머니에게 뺨을 맞고서도 정우는 “엄마”를 부르며 서럽게 울어제꼈다. 아버지는 말없이 옷을 벗어 몇번 털고는 천천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어머니는 팔을 베고 누운 정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우야, 오늘 몹시 서러웠니? 하지만 네가 아버지를 더럽다고 생각하면 안된단다. 아버지는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자구 자원해서 그 일을 하는것이란다. 어머니가 직업이 없어서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하지, 너의 누나가 학교에 다니지 그리구 너의 동생은 자꾸 앓음자랑을 해서 병원으로 다녀야지… 아버지가 그 일을 하면 원래보다 한달에 20원을 더 벌수 있단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 일을 자원해서 하는거란다. ―아빠는 왜 철이 아빠처럼 돈을 많이 못 벌어요? 철이 아빠는 와늘 높은 간부라는데 아빠는 왜 간부 못해요? ―사람마다 다 간부질을 하는게 아니란다. 우리 정우는 열심히 공부해서 간부질을 해야 한다. 그날 밤 “열심히 공부해서 간부질을 해야 한다.”던 어머니의 말씀은 어린 정우의 가슴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힘들 때마다 정우는 애어린 가슴에 란도질을 하던 잊지 못할 그날을 떠올렸고 그날 밤에 들려주던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악착같이 공부했다. 누나는 돈을 번다며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와 허드레일들을 찾아했다. 동생도 차츰 공부에 흥취를 잃어갔다. 하지만 정우만은 끝까지 공부를 해서 대학에 붙었고 졸업후 어느 작은 잡지사의 편집으로 취직을 했다. 인물체격도 남한테 꿀리지 않고 사업능력도 훌륭했지만 부모에 시집 가지 않은 누나 그리고 장가 들지 않은 동생까지 있다는 말만 꺼내면 다가들던 녀자들이 꽁무니를 뺐다. 그렇게 혼기를 늦추다가 사업에 참가하여 5년이 되던 해에 한 지인의 소개로 어느 작은 진에서 시내에 들어와 세집에 살면서 옷매대를 경영하던 지금의 안해 은이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한국문이 열리면서 누나는 한국으로 시집을 갔고 동생도 한국으로 돈벌이를 떠나게 되였다. 그러자 자연히 정우가 부모를 돌보아야 했다.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가 건강한게 다행이였다. 어쩌면 정우가 부모를 돌보는것이 아니라 부모가 되려 정우네 살림을 도와주는편이였다. 하지만 그같이 좋은 날도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으로 돈 벌러 나간 동생이 달동네에 세집을 잡고 살다가 그만 가스중독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 충격에 어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졌다. 동생의 죽음도, 어머니의 병환도 아버지에게는 큰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아버지는 정신줄을 놓지 않으시고 묵묵히 어머니를 돌보았다. 그리고 저녁편이면 시간을 맞춰 진이를 유치원에서 데려오군 했다. 그만큼 정우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기둥이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녁식사를 하고계셨다. 급히 들어서는 정우를 보고 아버지가 놀라셨다. ―련락도 없이 어떻게 왔니? 정우는 신을 벗으며 아버지쪽에 눈길을 돌렸다. ―별일없으시죠? ―벼… 별일은 무무, 무슨, 그냥 이 모모모, 모양이지. 어머니가 푸들푸들 팔을 떨며 힘겹게 숟가락을 입에 가져가다말고 한마디 했다. ―저녁전이지? 얼른 와라. 아버지가 일어나 수저를 가져다 상에 놓으며 권했다. ―네, 몇술 뜨고 갈게요. 정우는 밥상에 다가가 아버지의 곁에 앉으며 유심히 살폈다. 별다른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할아버지와 참 재미나게 놀았다고 진이가 좋아하던데요. 정우가 아무 일도 없는듯 한술 떴다. ―삥궐(冰果)을 먹겠다고 해서 사줬더니 단번에 두대나 재끼더라. 오늘 유치원에서 속이 컬컬했나보더라. 아버지는 장국을 떠서 후루룩 마시며 한마디 할뿐이였다. 진이의 말대로라면 이상한 조짐이 보여야 할게 아닌가? 정말 내가 신경이 예민해진것인가? 너무도 태연한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우는 오리무중에 빠져드는듯한 느낌이였다. 그러면서도 꽉 막혔던 가슴이 다소 뚫리는듯 안도감이 드는것도 어쩔수 없었다.     3     ―당신, 신경이 예민해졌다니까요. 은이가 어떠냐는듯 정우를 곱게 흘겨보며 한마디 했다. ―그런것 같소. 내가 신경이 예민했던거지. 그런데 웬지 자꾸 못된 생각부터 든다니까. 정우는 웃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은이가 정우의 얼굴에 다시한번 눈을 박았다. 정우는 급히 아버지네 댁에 다녀오느라 몹시 피곤했던지 얼굴이 약간 상해있었다. 정우가 침대에 다가와 은이옆에 엉뎅이를 붙이자 은이는 정우의 어깨를 톡 치며 일부러 목소리를 띄워 한마디 건넸다. ―40이 래일이라, 당신 생활에 신심을 잃어가는거예요. ―허허허… 무슨 신심까지나? 그건 너무 엄중한게 아니요? 정우는 짐짓 웃음소리를 크게 내느라고 했지만 그 웃음소리는 어딘가 허탈하게 느껴졌다. 은이는 오른손을 펴들고 정우의 옆얼굴을 어루쓸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근심 마세요. 설마 무슨 일이야 있을라구요. ―그러게 말이요. 제발 별일이 없어야겠는데. 근년에 자꾸 큰일들을 당하게 되니… ―남들도 모두 이렇게 살거예요. 당금 40대가 아닌가요? 우로는 부모님들이 년로해가고 아래로는 자식들이 커가고… 당신 나이가 일생에 제일 부담이 많은 나이죠. 은이는 정우의 얼굴을 쓸던 손을 내려다 정우의 왼손을 꼭 잡아주었다. 정우도 그우에 오른손을 올려놓으며 그윽한 눈길로 은이를 바라보았다. 안해에 대한 믿음이 눈길을 타고 흘러나왔다. ―당신이 있어서 내가 참 든든하네. 휴― 큰일을 당할 때마다… ―참 당신은… 제가 아니면 누가 나서겠어요. 지금은 집집마다 독신자녀들이라잖아요. ―하기사, 형제가 있은들 뭘 하겠소. 요즘에야 직업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외국으로 나가는 판인데. ―그러니 우리 조선족은 저마다 “독신자녀” 같다 하는거죠. ―같은게 아니라 진짜 독신자녀들도 많지. 당신도 무남독녀가 아닌가. ―그래요. 내 나이때야 독신자녀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됐어요? 그래서 우리또래를 “력사의 산물”이라 하는거예요. ―력사의 산물? 정우가 은이를 돌아다보며 허허허 웃음을 날렸다. 그 웃음을 물고 은이가 또 입을 열었다. ―우리 진이에게는 꼭 동생을 만들어줄거예요. 사실 아버지가 세상 뜬후 나는 하루도 발편잠을 자본적이 없어요. ―마찬가지야, 나도 은근히 어머님이 신경 쓰이거든. 정우가 은이의 말을 받아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호호… 그래서 낮에 엄마가 전화 와서 당신을 “모범사위”라 했다잖아요. 정말 근심이얘요. 어머님은 불편하셔도 아버님이 옆에서 수발을 해주니 그런대로 생활할수 있지만 우리 엄마가 어머님 형편이 되면 어떻게 해요? 요즘 어머니도 기력이 많이 못해졌어요. 쩍하면 혈압이 올라서 힘들어하죠. 참, 이 로친이 어떻게 하고있는지. 저녁밥이나 잡쉈나? 말을 마친 은희는 핸드폰을 찾아들었다. ―엄마, 로로(姥姥)께 전화해요? 침대에 올라앉아 퍼즐 맞추기에 여념이 없던 진이가 머리를 들어 은이를 쳐다보았다. ―그래. 로로 저녁 잡쉈나 물으려구. ―나 바꿔줘요. 나두 로로께 할 말이 있어요. 진이가 기여와 은이의 무릎에 손을 올려놓으며 재촉했다. ―여보, 우리 진이 로로께 할 말이 있다잖소. 어서 바꿔주오. 정우가 은이에게 권했다. ―그래, 진이야. 로로두 너의 목소리를 듣고싶다 하신다. 은이가 핸드폰을 진이에게 넘겨주었다. 진이는 좋아라 핸드폰을 받아들더니 신나서 종알거렸다. ―로로, 있잖아요. 오늘 우리 할아버지 진짜 웃겼어요. 왜냐구요? ㅋㅋㅋㅋ… 모자로 강물을 푸면서 “똥 푸러 가자― 똥 푸러 가자―” 이랬다니까요. ―얘, 로로하구 그런 말하면 못쓴다. 은이가 진이를 나무라며 급히 핸드폰을 당겨왔다. 핸드폰 저쪽에서 급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은이야, 걔가 웬 말이냐? 할아버지가 어쨌다니? ―별일 아니예요. 오늘 유치원에서 오면서 할아버지와 웬 놀음을 논것 같아요. 그게 재미있었는지 아까부터 저렇게 엉뚱한 소리를 한다니까요. 은이는 괜한 소리를 해서 어머니를 심란하게 만들었다는듯 진이를 흘겨보며 해석하느라고 애썼다. ―늙은이들 일은 모른다. 그렇게 점잖은 량반이 갑자기 애와 무슨 그런 놀음을 하겠니? 애 말이라구 등한하게 듣지 말구얼른 시부모들 댁에 다녀오거라. ―어머니두 참, 애아버지가 어디 그렇게 등한한 사람인가요. 벌써 갔다왔어요. 두 늙은이가 밥상을 앞에 놓구 냠냠 맛있게 저녁을 드시더래요. 은이는 직접 보기라도 한듯 뼈에 살을 붙여가며 냠냠 밥을 씹는 흉내까지 냈다. ―허허허… 진이야. 너 엄마 배우해두 되겠다. 정우는 진이의 손을 끌고 객실로 나가며 허허허 웃어버렸다. 은이가 어머니와의 통화를 끝내고 나오다가 그 소리를 듣고 변명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그 로인네 또 온밤 제 좋은 생각에 잠을 설칠거라니까요. 하기사 로인네 혼자서 독수공방하느라 밤이 오죽이나 길겠어요? 쯧쯧쯧… 은이의 혀 차는 소리를 이어 텔레비죤곁에 놓아둔 전화기가 울어번졌다. 그 바람에 진이가 급히 뛰여가 수화기를 들었다. ―와이. 할머님까? 예. 아빠 있슴다. 진이가 정우에게 수화기를 쑥 내밀었다. 방금 다녀왔는데 웬 전활가? 이상한 예감이 머리를 치고 들어왔다. 정우는 급히 수화기를 받아 귀가에 가져갔다. ―크크크, 큰일… ―큰일이라니요? 어머니, 급해 마시구 천천히 얘기하세요. ―저… 저, 려려, 령감이… 저 령감이. 아이구머니, 나 어어어, 어떻게 말하라오… 휴― 휴―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꺽꺽 한숨만 톺고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안되겠네. 제가 갈게요. 정우가 수화기를 놓고 급히 침실로 들어갔다. 은이가 따라 들어오며 다그쳐물었다. ―웬 일이래요? ―모르겠소. 어머니가 한숨만 톺으면서 말을 잇지 못하네. 아버지가 뭘 어쨌다는데… ―함께 가요. 은이도 옷장문을 열어젖혔다. ―진이는 어쩌구. 가보구 내가 전화를 할게. 대충 바지를 걸치고 웃옷을 벗겨든 정우는 몸을 픽 돌려 출입문쪽으로 잰걸음을 놓았다.   어머니가 주방까지 기여나와 와들와들 떨고있었다. ―어머니, 아버지는요? 웬 일이세요? ―저저저, 저― 기. 이이, 이 일을… 어머니는 성해있는 오른손으로 땅을 치며 꺼이꺼이 울음을 터쳐올렸다. 정우는 불안한 눈길로 주방을 둘러보았다. 원래 작은 주방이라 구태여 찾을것도 없었다 북쪽 구석쪽에 누런 색의 작은 무지가 보였다. 그때까지도 역한 냄새가 간간이 풍겼다. 어머니는 손바닥으로 땅을 치며 벅벅 말을 더듬었다. ―무무무, 문소리가 나구 하하, 한참 지나도 사… 사람이 안 보이길래 내내내, 내가 웨웨, 웬 일인가싶어… 이이이, 이상한 냄새까지 나나, 나서 이렇게 버버버, 벌벌 기여 여기 와보니 그그그, 글쎄… 이이이, 이 령감이… 어머니는 무기력한 손으로 연신 땅을 쳐댔다. ―아버지는 안 들어왔어요? 정우는 목에서 겨불내가 확확 풍기는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너무도 급해 대답은 못하고 힘겹게 머리만 끄덕이였다. 정우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옮겨놓으며 침실로 가서 옷장문을 열었다. 아버지의 옷은 입고 나간것외에는 그대로 옷장에 걸려있었다. 작정을 하고 나가신것은 아닌것 같았다. 어딘가를 목적하고 나가셨다면 적어도 집에서 입는 헌옷차림은 아닐것이였다. 아니, 구태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 머리를 쳤다. 주방구석에 점잖게 내려앉아 야릇한 냄새를 풍기는 그 누런 색의 작은 무지가 모든것을 너무도 리얼하게 설명하고있는것이였다. 아버지를 찾는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어디로부터 어떻게 시작한단 말인가? 정우는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 순간 떠오르는 사람은 은이밖에 없었다. 신호가 넘어가자마자 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됐어요? ―아… 아버지가 나가셨소. 당신, 빨리 여길 와주오. 난 밖에 나가 아버지를 찾아야겠소. 말을 마친 정우는 핸드폰을 꺼서 호주머니에 넣고는 허리를 굽혀 어머니를 안았다. ―애에미가 인차 올겁니다. 어머니는 시름 놓고 기다리세요. 내가 아버지를 찾아볼게요. ―이이이, 이 령감을 어어어어, 어쩌면 조조조… 정우는 어머니의 넉두리를 뒤로 한채 다시 주방으로 건너갔다. 작은 무지였지만 정우에게는 큰 산처럼 느껴졌다. 정우는인차 손을 쓰지 못하고 서성거리다가 찬장서랍에서 비닐봉지를 찾아들었다. 정우는 작은 무지에 비닐봉지를 씌운후 머리를 돌리고 손으로 그것을 끌어담았다. 역한 냄새가 코구멍을 자극했다. 순간 정우의 두볼에서 구슬같은 눈물이 둘둘 굴러내렸다.     4     어디로 가셨을가? 급히 문을 나서기는 했지만 미로에 선 애들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아도 평소 아버지가 즐겨 다니던 곳을 생각해낼수 없었다. 아니, 아버지는 원래 즐겨 다니는 곳이 없다고 함이 나을것이였다. 시환경관리처에서 허드레일을 하다가 정년퇴직한후로 자질구레한 집일들을 하면서 만년을 보내고있는 아버지에게 남다른 흥취나 애호가 있을리도 만무했다. 가정, 안해, 자식 그리고 손자 진이가 전부인 아버지였다. 그러한 아버지가 밤중에 집을 나가 갈수 있는 곳이 과연 어디일가? 정우는 무작정 가로등불빛을 따라 걸으며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리서 꽹과리며 북 소리가 들려왔다. 정우는 잠간 걸음을 멈추고 소리나는쪽에 눈길을 주었다. 앞에 있는 작은 광장에서였다. 둥둥챵 둥둥챵… 양걸을 추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것이 어렴풋이 보여왔다. 순간 아버지가 그 꼬리에 묻어 빙글빙글 돌아가지 않을가 하는 묘연한 생각이 머리속을 스쳐지났다. 아니, 그 무리에 아버지가 있을것 같다는 확신 비슷한것이 뿌리를 내렸다. 그 확신이 어디로부터 오는것인지도 가늠할 새 없었다. 정우는 양걸대가 돌아가는 그곳을 향해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겼다. 둥둥챵― 둥둥챵… 꽹과리소리며 북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로 들려왔다. 그제야 정우는 저 멀리 추억의 밑바닥에 깔려있던 색 바랜 음영을 더듬어낼수 있었다. 그것은 정우가 진이만할 때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저녁이였다. 아버지는 잔업을 한다면서 퇴근을 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가두로 회의를 나갔다. 누나는 동생을 데리고 바람을 쏘인다면서 친구들을 찾아가려고 했다. 정우도 누나를 따라가겠다고 떼질을 썼지만 누나는 동생들을 둘씩이나 데리고 다니면 친구들이 흉을 본다면서 기어코 정우는 집에 떼놓고 문을 나섰다. 너무도 심심했다. 반도체라지오를 틀어보았지만 도무지 알아들을수 없는 말들이 두런두런 흘러나올뿐이였다. 정우는 그 소리를 들으며 꾸벅꾸벅 졸다가 문뜩 은은하게 들려오는 꽹과리소리며 북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되였다. 꽹과리소리며 북소리는 분명 정우네 집쪽을 향해 가까와지고있었다. 정우는 정신을 번쩍 차리며 자리를 차고 일어나 신뒤축을 꺾어 신고 밖으로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빨갛고 파아란 옷을 괴상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꽹과리를 치고 북을 두드리며 너울너울 다가오고있었다. 정우는 너울거리는 그 무리가 바로 양걸대라는것을 알고있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정우에게 양걸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양걸은 원래 한족농민들이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기원해서 밭머리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던데로부터 전해져내려온것이라고 하였던것 같았다. 동작을 과장해서 최대한 크고 괴상하게 하면 할수록 가슴속에 있던 소망이 있는 그대로 이루어진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사람마다 능력을 다해 우습고 괴상한 동작을 크게 연출해낸다는것이였다. 들을 때는 그냥 그런것이였구나 하는 정도로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지만 외로운 밤에 갑자기 꽹과리소리며 북소리를 들으니 저도 몰래 흥분되여 가슴이 설레였다. 자기도 양걸대에 끼이면 외롭고 심심하지 않을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정우는 흥겨움이 농익는 양걸대를 향해 잰걸음을 놓았다. 둥둥챵― 둥둥챵… 흥겨운 절주에 따라 정우는 저도 몰래 팔이 흔들어졌고 다리가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둥둥챵― 둥둥챵… 제법 어깨까지 덩실덩실 파도를 타주었다. 양걸대가 정우의 앞으로 다가왔고 인차 정우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정우는 어느새 양걸대의 꼬리에 붙어서서 혼신을 놓아버렸다. 자기가 양걸을 추고있다는것도, 자기가 양걸대를 따라 어디로 흘러가고있다는것도 감감 잊은채 정우는 승무를 추는 동자승처럼 흐르는 인파에 싣겨가고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지 양걸대는 어느 광장 같은 곳에 도착해있었다. 그곳에서 대장인듯한 남자가 뭐라고 한어로 몇마디 말을 했고 이어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정우는 자기가 낯선 곳에 와있다는것을 의식하게 되였다. 말 못할 두려움이 스멀스멀 머리속을 찾아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익은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좀더 흐르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간혹 지나가는 길손들만 한둘씩 보일뿐이였다. 어떻게 가야 집에 닿을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떠오르지 않았다. 집을 못 찾으면 어쩌지? 나쁜 놈들에게 잡혀가면 어쩌지? 아버지며 어머니며 누나며 동생을 못 보면 어쩌지… 지나친 근심은 눈물로 되여 두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엄마― 아부제― 정우는 애처롭게 소리지르며 어둠이 깃든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때 두리모자를 쓰고 팔에 붉은 완장을 낀 두 사람이 다가오더니 정우를 불러세웠다. ―길을 잃었니? ―네. ―어떻게 되여 여기에 왔니? 뚱뚱한 몸집의 사나이가 정우의 손을 잡아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야… 양걸구경을 하면서 여여, 여기까지 왔어요. 정우는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파르르 떨면서 기여들듯 더듬거렸다. ―어디서부터 따라왔니? ―집이 어디에 있지? ―신흥가에 있어요 ―이런, 이곳은 광명가란다. 두 사나이는 뭐라고 두런거리더니 정우를 신흥가파출소에 데려다주었다. 담당경찰이 정우의 말에 따라 호구대장을 뒤져서 용하게 정우네 집이 있는 주소를 찾아냈고 정우를 집까지 데려갔다. 그때 금방 집에 들어선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우가 잃어진것을 발견하고 찾아나서려 덤벼치던 참이였다. 경찰의 손에 이끌려 집에 들어서는 정우를 보고 아버지는 연신 경찰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이어 정우의 엉뎅이를 치면서 크게 꾸짖었다. ―왜 이렇게 어시들 속을 뒤집는거냐? 이 밤에 잃어라도 지면 어쩔번했니? ―경찰아저씨들이 집을 찾아주는데요, 뭘. 정우는 급해서 입술마저 초들초들해진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면서 또박또박 대답했다.   정우는 멀리서 들려오는 꽹과리소리며 북소리를 뒤로 한채 파출소를 바래고 잰걸음을 놓았다. 아버지는 과연 접대실 걸상에 앉아서 두눈을 슴뻑거리고있었다. 가담가담 쒝― 쒝― 하는 거친 숨소리가 터질 때마다 목젖이 푸들푸들 떨리고있었다. 모든것을 포기하신듯 무기력하게 한껏 몸을 웅크리고 앉아 바들바들 떠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정우는 아래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몸을 주체할수 없었다. 정우는 잠간 두눈을 감았다 뜨면서 애써 목소리를 짜냈다. ―아버지. 그 소리에 담당경찰인듯한 사람이 정우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이분이 부친입니까? ―네, 수고 많았습니다. ―환자인듯한데 관리를 잘해야지요. 경찰의 목소리에는 정우에 대한 핀잔이 다분했다. 하지만 그런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정우는 다가가 아버지앞에 무릎을 꺾으면서 두손을 부여잡았다. ―아버지, 놀라셨죠? 정우의 말에 아버지가 되려 와뜰 놀라더니 두눈을 퀭하니 뜨고 정우를 눈여겨보았다. ―댁은 뉘슈?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색채도 없었다. 무시로 슴뻑이는 두눈처럼 기계적으로 가담가담 목소리가 흘러나올뿐이였다. ―큰일칠번했습니다. 순라팀에서 연집강가를 거닐다가 발견했답니다. ―연집강가요? ―모자로 물을 떠서 가로수에 쏟으며  “똥 푸러 가자― 똥 푸러 가자―” 하고 소리치기에 이상해서 살펴보았고 그 거동이 이상해서 이것저것 물었는데 한심한 말씀만 하시더랍니다. ―그랬었군요. ―집에 환자가 있으면 각별히 신경을 쓰셔야죠. 경찰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가시가 배여있었다. ―미안합니다. 신경 쓰겠습니다. 정우는 담당경찰이 내미는 사건기록부에 싸인을 하고 아버지의 팔을 부축했다. ―댁은 왜 우리 집에 왔수? 아버지가 여전히 정우의 얼굴을 퀭하니 지켜보며 랭랭하게 물었다. 전혀 모르는 얼굴을 대하는듯싶었다. 그러는 아버지를 지켜보는 정우의 마음은 당금 찢어질듯 아파났다. 정우는 잘근잘근 아래입술을 씹다가 올리미는 설음을 눅잦히며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아아, 아버지, 저… 저요, 정운데요. 아버지를 모셔가자고 왔습니다. ―정우라면 내 큰아들인데… 아버지가 못 믿겠다는듯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어느새 아들도 못 알아보게 되셨을가? 그새 나는 무엇을 하고있었는가? 정우는 그 맵시로 벽에 머리라도 콱 박고싶었다. 스스로는 아버지에게 정성을 쏟느라 했지만 아버지는 어느새 자기만의 길을 저 멀리 가버리고계셨던것이다. ―아버지, 제가 바로 아버지 아들 정웁니다. 저랑 함께 집으로 갑시다. ―좋소― 갑시다. 그제야 아버지는 걸상에서 일어나 몸을 후들후들 떨며 정우를 따라나섰다. 정우는 아버지의 팔을 꼭 부여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왜 거기 가셨댔어요? 넋을 놓고 정우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버지가 머리를 푹 숙이며 기여들어가는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정우야, 그날 나는 네가 애들이랑 싸우는것을 보았댔다. 그때 아버지의 목소리는 꽉 막혀 힘겹게 흘러나오고있었다. ―애들이랑 싸우다니요? 정우는 아버지의 얼굴에 눈길을 박으며 영문을 알수 없어 되물었다. ―그날 네… 네가 위생국집 아들이랑 싸우잖았니? 그 애랑 싸우는걸 아버지는 다 보았단다. 똥 푸러 가는 길이라 네 얼굴에 똥칠을 할것 같아서 아버지는 못 본듯이 지나쳐버린거다. 미안하구나. 말을 마친 아버지는 떡 버티고 서서 애들처럼 왕왕 소리내여 울음을 터뜨리다가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똥 푸러 가야지― 늦겠다. 빨리 가자. ―아버지! 정우는 피 터지게 소리치며 아버지를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     5     ―아버님은 어떠세요? 은이는 여느때보다 약간 일찍 퇴근하여 직접 아버지네 댁으로 오다가 마당에서 서성이는 정우를 발견하고 급히 물었다. ―낮에는 별 기미가 없었소. 정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은이의 얼굴을 일별했다. 몹시 지친듯 은이의 얼굴이 상해있었다. ―어디 아픈게 아니요? ―그 병이 워낙 그렇대요. ―당신 얼굴색이 영 안 좋네. ―처음엔 간간이 발작하다가 깊어지면 아예 정신줄을 놓아버린대요. 아버님 일을 낮에 아줌마들께 여쭈었더니 모두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의사도 그렇게 말하더군. 정우는 근심스러운 눈길로 은이를 바라보면서 한마디 했다. 그에 은이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완치도 어렵대요. 약을 바싹 써서 악화되게 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래요. ―그러게, 여기서 더 악화되지만 않아도 다행이지. ―빨리 들어가 저녁을 지어야겠어요. 혹시 아버님이 또 발작을 하면 야단이예요. 초기환자는 발작시간도 비슷하대요. 그러다가 증세가 악화되면 시도 때도 없이 반복한대요. 은이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 정우도 은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는 어머니옆에 다리를 토시고 앉아 뚫어져라 어머니의 얼굴을 지켜보고있었고 어머니는 그 얼굴을 쳐다보며 넉두리를 해댔다. ―이이이, 이 일을 어… 어떻게 하면 좋슴둥. 다다다, 당신이 치… 치매에 걸렸다꾸마. ―괜한 소리를… 내가 왜 치매에 걸려? 이렇게 멀쩡한데. ―머머머, 멀쩡한 사사사, 사람이 주… 주방에 으― 이― 나나나, 낯 뜨거워… ―왜 진종일 없는 소리를 해대는기여? 내가 뭘 주방에 어쨌다구 씨부렁거리는기여? 은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오가는 설전을 귀동냥하면서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고는 진이가 있는 객실로 나갔다. 그러자 정우가 어머니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아버지 하구 자꾸 뭐라 그러지 마세요. 아버지가 한번 실수를 한것 가지고 왜 그렇게 끝이 없이 나무라세요. ―그그그, 그랬으면 얼마나 조조조, 좋겠냐? 아이구, 내내내, 인젠 주주주, 죽을 때가 됐나보구나. 어머니의 눈귀를 타고 멀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우는 어머니의 머리맡에 놓여져있는 종이를 뽑아 어머니의 귀속으로 흘러드는 눈물을 훔쳐드렸다. ―진종일 저렇게 누워있노라니 너 에미가 환각이 생기는것 같구나. 아버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정우에게 말했다. 정우는 아버지가 정말 자신의 상태를 모르시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굴리며 대답했다. ―그런것 같아요, 아버지. 그때 객실에 앉아 퍼즐을 맞추던 진이가 할아버지를 보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할아버지, 신경질나요. 이게 왜 제대로 맞춰 안 지죠? ―세상에 쉽게 맞춰지는게 어디 있겠니? 아버지는 진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덤덤히 한마디 하면서 주방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은이는 한창 저녁준비에 바삐 돌고있었다. ―내가 도울게 없냐? 아버지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은이는 얼굴에 약간 웃음을 띠면서 대답했다. ―시름 놓고 쉬세요. 아버님, 오늘 피곤하셨죠? 어머님을 친구해드리느라. ―불쌍하기도 하지, 진종을 구들을 지고 누워서. 내가 없으면 저 로친이 어찌 살겠니.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면서 다시 객실로 들어와 진이의 옆에 앉았다. ―할아버지, 보쇼. 이 빨간색을 이렇게 돌려놓으면 노란색이 이쪽으로 오죠? 그래서 노란색을 이쪽으로 돌리면 빨간색이 또 제자리로 온단 말이예요. 신경질나요. 진이가 할아버지의 눈앞에서 퍼즐을 돌려보이며 종알거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진이의 말을 들었는둥말았는둥 두눈을 지그시 감은채 미동도 하지 않고있었다. ―할아버지. 생각 좀 해보세요. 어떻게 맞추면 돼요? 진이가 할아버지의 팔을 잡아 흔들면서 소리쳤다.     잘 자거라 아가야 내 사랑 아가야 밤은 첩첩 깊어도 잠 잘 자거라     ―할아버지! 진이가 퍼즐을 내려놓으며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웨쳤다. 그 바람에 정우도 은이도 객실로 달려나왔다. 아버지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허벅다리를 살랑살랑 치면서 그 두구절만 반복하고있었다.     잘 자거라 아가야 내 사랑 아가야 밤은 첩첩 깊어도 잠 잘 자거라     ―엄마, 할아버지 왜 저러셔? 진이가 은이의 품에 감겨들며 파르르 떠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은이가 진이를 꼭 품어주며 입을 열었다. ―진이야, 할아버지 많이 아프시단다. 어쩌면 좋아요? 여보. 은이의 눈길이 애절했다. 정우는 애꿎게 아래입술을 감빨며 은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혀 앉으며 아버지의 어깨를 꼭 감싸안았다. ―시간이며 환경 같은것을 두고 도착증세를 보인다고 했소. 그리고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아있던 아픈 사연을 자주 들춰내기도 하구… 아버지가 하시는 행동들이 오늘 의사가 말한대로 나타나고있소. ―불쌍해서 어떻게 지켜봐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고 했소. 우리가 주의해 살피지 못해서 그렇지 벌써 오래전부터 경한 증상을 보였을거라더구만. 이를테면 기억력이 못해진다거나 자주 화를 낸다거나 꼭 필요한 물건을 두고 다닌다거나… ―우리가 등한했어요. ―그러게 말이요. ―그런데 아버님은 왜 자장가를 부르실가요? ―젊었을 때 마음껏 부르지 못한게 한이 미쳐서겠지. ―하기사 그 세월에… ―사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역한 냄새가 난다고 늘 아버지를 피했었거든. 정우가 말을 마치고 후― 한숨을 내쉬였다. 그때 아버지가 문득 노래를 끊으시고 은이를 퀭하니 바라보며 물었다. ―댁은 뉘슈? ―아버님, 저 아버님의 며느리예요. 은이가 잦아드는듯한 목소리에 두려움을 가득 담으며 대답했다. ―그럴수가 없는데, 저렇게 어린 놈이 벌써 장가 들수 없는데. 아버지가 진이를 가리키면서 머리를 저으셨다. 두려움에 떨던 진이가 그 광경을 보고 소리쳤다. ―할아버지 왜 저래요? 할아버지 무슨 말을 하는거예요? ―내내내, 내가 너무 사사사, 살았구나. 지지지, 진이야 쥐약을 사사사, 사다달라. 쥐약을… 아이구 내내내, 내 팔자야― 어머니가 아버지가 하는 허망한 말을 들었던지 침실에서 꺼이꺼이 울음을 터치셨다. 정우가 아버지의 어깨를 감았던 팔을 조용히 풀고 침실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여 땅을 치고있었다. 정우는 마알간 물이 고여드는 두눈으로 어머니를 잠간 응시하다가 꺽꺽 막혀오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어머니까지 왜 이러세요? ―사사사, 살아서 뭔 락을 보겠냐? 쥐쥐쥐, 쥐약을 머머, 먹구 끄… 끔뻑 주주주, 죽어버리고싶다. 정우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아드리며 애원하듯 말했다. ―어머니가 정신을 차리셔야 아버지 병을 고칠수 있습니다. 두분 다 정신을 놓으시면 이 집을 어떻게 합니까? ―내내내, 내가 너무 오오, 오래 살았구나. 오래 사사사, 살았어. 그렇게 땅을 치던 어머니가 지치셨던지 스르르 두눈을 감았다. 조금 지나자 잠이 든것 같았다. 정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로 나갔다. 아버지도 그새 잠이 들어계셨다. 은이는 방금 지나간 풍파때문에 저녁준비를 할 기력마저 잃었던지 그 맵시로 쏘파에 몸을 싣고 두눈을 지그시 감고있었다. 눈까풀이 파들파들 떨리고있었다.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파아랗게 질려있었다. 정우는 은이의 옆에 다가앉아 오른팔을 길게 뻗어 은이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여보, 인젠 우리 어떻게 해야 해요? 은이의 목소리가 떨리고있었다. 정우는 부드럽게 은이의 어깨를 쓸어주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집 혼자만의 일이 아닌것 같소. 오늘 의사가 그러는데 65세 이상 로인들중 열에 한 사람은 치매증상을 보인다오. 아버지는 그중에서 증상이 좀 엄중할뿐이요. ―인젠 우리 어떻게 해야 해요? 은이는 목석처럼 앉아서 그 말만 되풀이했다. ―낮에 병원에서 치매를 앓는 부모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을 더러 만났더랬소. 모두들 간병인을 쓴다고 하더구만. ―간병인이요? ―집에 와서 주숙을 하면서 돌봐줄수 있는 사람 말이요. ―돈이 많이 들겠죠? 은이가 정기 없는 눈으로 정우를 건너다보며 무기력하게 물었다. ―로인 한 사람을 돌보는데 1500원이 들어야 한다니 우리 같은 경우는 좀더 줘야겠지. ―좀더 주면 얼마나 줘야 할가요? 2000원? 설마 3000원을 달라는 말은 안하겠죠? ―…… 정우는 뭐라고 딱히 할 말이 없어 쩝쩝 입만 다셨다. 그때 진이가 돈소리에 뭔가 생각났던지 한마디 끼여들었다. ―엄마, 피아노학비를 낼 때가 됐다 했어요. 전번날 피아노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어요. ―오, 그렇지. 벌써 피아노학원에 다음달 학비를 낼 때가 됐구나. 은이는 흠칫 놀라면서 정우의 얼굴에 시선을 박았다. ―벌써 날자가 이렇게 흘렀네. ―이번달도 장사가 말이 아니예요. 죽벌이도 안돼요. ―옷 파는 사람이 옷 사는 사람보다 더 많으니… ―어마나. 엄마 생활비도 보내야겠어요. 은이가 부랴부랴 가방에서 돈지갑을 꺼내더니 안에서 돈을 꺼내 세기 시작했다. ―어머님 생활비는 아직 며칠 남지 않았소? 날자가. ―전번에 고혈압약을 사면서 돈을 많이 썼을거예요. 로인네가 돈이 없이 어떻게 혼자 지내겠어요. 래일 꼭 보내야겠어요. ―그래야지. 정우는 덤덤하게 한마디 하고는 두눈을 퀭하니 뜨고 막연하게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먼지가 뽀얗게 오른 일광등주변 천정에 까아만 점들이 가득 박혀 웃고있었다…     6     ―간병인이요? 남자가 정우를 힐끔 건너다보며 되물었다. ―네, 조선족아줌마면 더 좋겠는데요. 정우는 남자의 물음에 대답하며 인차 자기의 요구를 덧붙였다. 그러자 남자는 얼굴에 히물히물 웃음을 게바르며 정우를 세상물정을 모르는다는듯 시까슬렀다. ―간병인에 조선족아줌마라― 아무래두 서울에나 가서 찾아봐야 할것 같슈― 남자의 말에 정우는 오리무중에 빠지면서 두눈을 크게 떴다. 서울은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냐 하는 식이였다. 그러자 남자는 다시한번 허허허 웃음을 날리더니 정색해서 말했다. ―이보슈, 량반. 지금 조선족간병인을 어디서 찾는다구 그러우? 70살 아래의 사지가 성한 조선족녀자가 연변에서 놀고 먹는것을 본적이 있소? 보고 죽자 해도 없다우. 그래, 없지. 없구말구… ―네? 그런가요… ―하하하, 모르기는 한참 모르시네. “책상족”인가? 다시한번 정우를 째려보는 그 눈길이 아니꼬왔다. ―아니, 조선족이요. 정우가 급히 손을 저었다. 그러자 남자가 뒤통수를 툭 치며 입을 쩝쩝 다셨다. ―하하하, 이런… 그쪽이 하두 순진해보여서 사무실에만 앉아있는 사람인가 물었소. ―아, 네… ―이보슈. 제몸을 움직일만하면야 왜 이곳에 남아있겠소? 모두들 한국에 나가 큰돈을 벌려구 하지. ―네, 그런 일이군요. ―그런데 왜 딱 조선족아줌마요? 한족아줌마들도 깨끗하구 부지런하구 책임성이 강한데. 남자는 사무실 한쪽 구석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장단을 쳐대는 서넛 되는 아줌마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우도 남자의 손길을 따라 그쪽을 힐끔 바라보다가 머리를 남자에게 돌렸다. ―저의 모친이 한어에 아주 서툴답니다. 게다가 뇌출혈후유증으로 말도 어눌하구요. ―쯧쯧쯧… 그런 일이구만 참, 안됐네. 그렇다면 조선말을 할줄 아는… 그래, 장메이, 꿔라이(张妹,过来). 남자가 얼굴이 퉁퉁하고 살색이 거밋거밋한 아줌마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 아줌마가 기다리기나 했다는듯 남자를 향해 벙싯 웃어보이더니 시리시리한 몸을 날래게 움직여 남자쪽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아줌마의 펑퍼짐한 엉뎅이를 툭 치면서 흐흐흐 웃고는 정우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짱메이, 이분이 조선말을 할줄 아는 간병인을 구한다오. ―그램까? 아줌마가 정우를 힐끗 훔쳐보고는 남자에게 머리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시세를 말해줬지 예? ―아니, 거야 당사자들끼리 협상해야지. 남자가 머리를 저었다. 그러자 아줌마는 알겠다는듯 머리를 끄덕하더니 정우를 보고 말했다. ―주숙을 댁에서 책임지구 한달에 1500원입꾸마. ―좋습니다. 정우는 아줌마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줌마가 입가에 묘한 웃음을 피워올리며 동을 달았다. ―아까 내 저쪽에서 피끗 들을라니 댁에 환자 두 사람이 있다쟀소? ―네, 모친은 뇌출혈로 몸이 불편하구 부친은 치매기를 좀 보이구요. ―저런저런… 안됐네. 그러믄사 자식들이 죽어나지무. 그런 형편이라믄, 원래는 3000원 받아야 하는건데 그 집 사정이 딱해보여서 내 2800원만 받을게. 아줌마가 큰 인심이라도 쓰는듯 두손을 들고 손가락 여덟개를 쫙 펴보였다. 그 바람에 정우가 흠칫 놀라며 동공을 키웠다. ―방금 1500원이라구… ―이 아즈바이 봐라. 그게사 한 사람이 1500원이라는게지. ―한 사람이요? ―그렇지, 한 사람이. 그런데 그 집엔 머저리령감하구 풍맞은 로친이 있재? 아줌마가 조선족도 찜져먹을만큼 류창한 조선어로 제법 “머저리”요, “풍맞은 로친”이요 하고 생동하게 표현하기까지 했다. 정우는 2800원이라는 말에 지레 놀라서 두눈을 퀭하니 뜬채 아줌마를 바라보며 “아, 네.” 하고 멍청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줌마가 정우에게 손을 내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2800원, 하나도 안 비싸오. 나처럼 조선말을 왕왕 하는 사람이… 원래사 더 받아야지무. 아줌마는 제쪽에서 되려 크게 밑지기나 한다는듯 고아댔다. ―어쩔테요? 저레 계약을 하겠소? 남자가 손끝으로 책상머리를 톡톡 치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아, 네… ―그럼 먼저 이 로무계약서를 읽어보오. 남자가 서랍에서 우에 “로무계약서”라는 글이 박혀있는 종이 한장을 꺼내여 정우앞에 내밀었다. 하지만 정우는 그 시각 그 종이를 쉽게 받아들수 없어 내밀었던 손을 당겨왔다. 주춤하는 정우의 거동에 남자가 흘끔 정우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왜 그러슈? ― 아, 네. 오늘은 먼저 알아보구요. 집에 가서 안해와 토론하구 다시 결정할게요. 말을 마친 정우는 누가 쫓기라도 하듯 인차 직업소개소문을 나섰다. 하늘에는 검은구름이 낮게 드리워져있었다. 당금 비라도 내릴것만 같았다. 휴― 저도 몰래 긴 한숨이 터져나왔다. 정우는 호주머니에 두손을 찌른채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어디라고 방향이 서는것도 아니였다. 속이 갑갑해서 어디론가 무작정 걷고싶을뿐이였다. 어느새 직업소개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연집강가에 도착해있었다. 정우는 강뚝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맵시로 강뚝에 쪼크리고 앉았다. 출렁출렁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귀속을 파고들었다. 반갑지가 않았다. 방금 직업소개소에서 고아대던 아줌마들의 시끄러운 말소리처럼 불편하게 들렸다. 참, 2800원이 뉘 집 강아지 이름인가? 그렇게 쉽게 달라 하다니. 몸집이 시리시리한 그 아줌마의 말을 상기하노라니 또 괜히 기분이 잡쳤다. 그것도 크게 인심이나 쓰는것처럼… 2800원이면 내 한달 로임보다도 더 많은 돈인데. 정우는 달마다 어머니와 장모에게 생활비로 각각 5백원씩 보내야 했고 진이의 피아노학원 학비로 4백원을 내야 했다. 그나마 아버지는 달마다 퇴직비로 800원씩 나오기에 아버지의 생활비는 보내지 않고있었다. 그런데 예상밖으로 2800원의 지출을 더해야 한다니 그달 벌어 그달 사는 정우로서는 막막하지 않을수 없었다. 안해 은이의 옷장사가 어떻게 되는지 전에 종래로 묻지 않던 정우였다. 누가 돈을 달라는것도 아닌데 은이는 늘 “죽벌이도 안된다.”고 바가지를 긁었다. 정우는 “3000원이야 달라지 않겠지요?” 하고 물으며 불안에 떨던 은이의 얼굴을 방불히 보는것만 같았다. 진이도 당금 학교에 붙어야 하겠는데 남들의 경험을 보면 학교에 들어가는 날부터 영어써클이요, 작문써클이요, 수학써클이요 하면서 돈을 쏟아붓고있었다. 거기에만도 달마다 5백원 돈은 들어간다고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들어서 알고있었다. 로인들이 그나마 건강할 때는 몰랐었는데 정작 로인들이 모두 병으로 기울어져가는 형편이고보니 큰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그렇다고 독신자녀인 은이를 보고 고혈압으로 앓는 장모를 돌보지 말라고 할수도 없는 일이요, 그렇다고 해서 자립을 못하는 어머니나 치매로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아버지를 집에 끼고 살수도 없는노릇이였다. 정우는 무거운 생활의 압력앞에서 점점 무력해지는 자신으로 하여 화가 났고 괜히 두려움이 앞섰다. 순간 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국에 시집 간 누나의 얼굴이 혜성처럼 눈앞을 스쳐지났다. 누나에게 큰 방조를 바라는것보다 갑갑한 마음을 누나에게 털어놓고 조언이라도 듣고싶었다. 정우는 호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뭐라고 첫마디를 뗄가? 괜히 누나가 놀라서 뒤로 넘어가는것은 아닐가? 정우는 차마 통화버튼을 인차 누르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했다. 그래, 뭘 어째 달라는것도 아니구… 누나도 이곳 형편을 알아야 할게 아닌가. 정우는 애써 자신을 달래면서 마음 먹고 통화버튼을 꾹 눌렀다. 뚜― 뚜― 뚜― 신호가 넘어가는 소리가 정우의 가슴을 벌렁벌렁 뛰게 했다. ―여보세요― 신호 넘어가는 소리가 끝나고 생경한 한국말로 전화를 받는 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가 분명했다. ―누나, 나 정우. ―그래, 정우구나. 그새 잘 지냈니? 오래동안 전화가 안 오길래… 어머니는 어떻구? 아버지는 무사하냐? 누나는 무슨 알고싶은것이 그렇게나 많았던지 입을 열자마자 단숨에 많은것들을 물어왔다. 정우는 잠자코 누나의 목소리를 듣고있다가 잠간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누나, 어… 어떻게 말할가? 그 말에 누나가 숨가쁘게 다그쳐물었다. ―너 무슨 일이 있구나. 말해라, 그래 무슨 일이니? 정우는 잠간 아래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치… 치매가 온것 같소. ―뭐? 치매라구 했니? 왜왜왜? 언제부터? ―사나흘 되는데… 갑자기 증상이 엄중해졌소. ―어… 어떻게? 어떻게 엄중한데? ―자꾸 옛날 일을 끄집어내구 화장실이구 주방이구 분간 못하구… 생뚱같이 옛날 행동을 반복하구… ―그게 정말이냐? 어쩌면 좋으냐, 정우야. ―나두 어쩔 대책이 안 서서… ―…… 한참이나 누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누나. ―정우야, 네가 그렇게 아무 대책도 없으면 안되지. 방법을 대서 어떻게 해야지. 누나가 울고있었다. 후― 정우는 다시한번 긴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간병인을 찾고있소. 우리가 집에서 시중을 들수도 없구 해서. ―그러면 많은 돈이 들어야 하는게 아니니? 우리 여기서도 간병인을 구하려면 뭉치돈이 들어간다구 그러더라. 누나의 목소리가 무거워지고있었다. 정우는 흐려지는 누나의 얼굴을 그려보면서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러게 말이요. ―어쩌면 좋니? 내가 도와줄 형편도 못되고… ―…… 정우는 누나에게 괜히 전화를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후회하기 시작했다. ―중국사람들은 한국, 한국 하면서 한국사람들은 돈을 장져놓고 사는줄 알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살기 참 힘들단다. 너의 매형은 지난달부터 회사가 부도를 맞아 집에서 쉬고있다. ―그렇구만. 누나, 내 그저 여기 사정을 알리느라구… 담에 다시 전화할게. 말을 마친 정우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당초 누나에게 전화를 할 때 무슨 도움 같은것을 받으려는 희망을 걸었던것은 아니지만 누나의 말을 들으면서 어딘가 서운한 마음이 갈마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빈말로라도 “어쩌겠니? 나도 좀 도와줄게. 좋은 사람으로 간병인을 구해보거라.”라고 했더라면 얼어드는 가슴이 얼마라도 녹을듯싶었지만 아직 달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몸부터 숨기는 누나를 대하고나니 어딘가 믿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한듯한 억한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우는 누구에게 분풀이라도 하려는듯 주먹만한 돌멩이를 주어 무작정 강물에 던져넣었다. 풍덩! 돌멩이가 물에 떨어지며 미약한 소리를 내더니 인차 종적없이 사라졌다. 강물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싶게 동쪽을 바라고 흘러만 갔다. 하늘에서 후둑후둑 비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7     ―비가 오네, 비가 오네― 아버지는 애들처럼 창가에 붙어서서 비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얼굴에 말 못할 긴장감이 어려있었다. ―너 왔구나. 그래, 왔으니 됐어. ―아버지, 자리에 누워 쉬시지 그랬어요. 정우가 신을 벗으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정우쪽으로 마주오며 입을 열었다. ―밖에서 비가 오지 않느냐? 비가 오지 그래. ―네, 비가 옵니다. 정우는 비에 흠뻑 젖은 웃옷을 벗으면서 말했다.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린다. 조심해야지. ―괜찮아요, 아버지. 그렇게 비살이 세지는 않아요. ―네가 없으면 너의 에미를 어쩌겠니? 너의 에미가 불쌍하지. 크게 락이란것도 모르구. 아버지의 눈가에 멀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정우는 그러는 아버지를 잠간 지켜보다가 목멘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있지 않아요. 아버지가 이렇게 친구해드리는데 어머니도 행복해하실겁니다. 정우의 말에 아버지가 절레절레 머리를 저으셨다. ―아니다. 내가 날로 못해가는게 알린다. 이러다가 어느날 저승사자가 데리러 오면 훌쩍 떠나게 되는기라. 정우야, 여기 오너라. 아버지가 오랜만에 “정우야.” 하고 부르면서 신비스럽게 손짓했다. 아버지는 어느새 어머니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집구석에 가계셨다. 정우는 젖은 옷을 옷걸이에 걸어 옷장손잡이에 걸어놓은후 아버지를 향해 다가갔다. 아버지는 웃옷 안쪽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고계셨다. 얼굴이 자못 엄숙해있었다. 웬 일이실가? 정우는 아버지의 근엄한 얼굴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으면서 한껏 정신을 도사렸다. 아버지는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쥐고 가슴에 꼭 댔다가 그것을 정우에게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인젠 이것을 네가 보관해라. 아버지의 퇴직금이 들어오는 은행의 신용카드였다. 정우는 인차 받지 못하고 떠듬거렸다. ―아… 아버지, 이것을 왜? ―내가 이렇게 정신이 말짱할 때 너에게 맡기려고 그런다. 내가 자꾸 깜빡깜빡 한다는것을 인제야 알겠다. 네가 맡아서 잘 보관해라. 비밀번호는 네 생일이네라. ―네? 제 생일이라구요? 왜 제 생일로 하셨어요? ―네 생일이 제일 잊어 안 지니까. 안에 한 2천원 푼히 남아있을게다. 그게 내 전 재산이다. ―아버지. 정우는 그렇게 한마디 불러놓고는 아래입술을 옥물었다. 목이 꺽 메여 도무지 아래말을 이을수 없었다. 아버지는 손에 꼭 쥐고있던 신용카드를 정우앞에 내밀었다. 아버지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어금이를 꽉 깨물었지만 눈물은 정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둘둘 굴러만 내렸다. 아버지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을 들어 정우의 얼굴에서 굴러내리는 눈물을 훔쳐주었다. 아버지의 손끝이 떨리고있었다. 아버지의 왼쪽볼에 경련이 일어 푸들거렸다. 아버지는 몸을 돌려 어머니가 누워계시는 침실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우는 구부정한 아버지의 등뒤에 대고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시름 놓으세요, 아버지. 다 잘될거예요. 정우는 아버지가 넘겨준 신용카드를 손에 꼭 쥔채 몸을 돌려 창문가로 다가갔다. 눈물에 시선이 가려 창밖이 뿌옇게 보였다. 정우는 주먹으로 찔끔찔끔 눈굽을 찍었다. ―전화 받으세요― 전화 왔어요. 핸드폰이 정우를 부르고있었다. 정우는 그 소리에 흠칫 놀라다가 인차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쩡로빤마?(郑老板吗?) 걸걸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귀에 익은듯하면서도 인차 임자가 떠오르지 않는 녀자의 목소리였다. 정우가 인차 응답을 하지 않자 대방에서 높이 소리쳤다. ―아이 듣김둥? 쩡로빤. 내 2800원. 그제야 정우는 목소리의 임자를 떠올릴수 있었다. 아까 직업소개소에서 만났던 “2800원, 하나도 안 비싸오.” 하고 소리치던 그 한족아줌마였다. ―아, 네. ―정로빤이 가구 내 가만히 생각해보았는데… 아줌마가 뒤말을 잇지 않고 잠간 뜸을 들이더니 정우쪽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래말을 이었다.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령감, 로친이 애 먹여서 얼마나 속상하겠슴둥. 그래서 내 도와주는 셈치구 2000원만 받겠습꾸마. ―네? ―그 대신 로임을 미루거나 하는 일은 없어야겠습꾸마. ―아, 네. ―그럼 빨리 와서 계약서를 씁소. ―아, 네. ―그럼 빨리 옵소. 아줌마는 정우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통화를 끊어버렸다. 정우는 핸드폰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정신을 차린듯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여전히 흐리터분했지만 비는 끊겨있었다. 하늘이 맑아지려나? 정우는 창문을 밀어 열었다. 비온 뒤라 서늘한 기운이 집안으로 날아들었다. 환자 두 사람을 돌보고 가무일까지 하는데 2000원? 그 가격이 높은건지 낮은건지 정우로서도 가늠할 길이 없었다. 정우는 핸드폰을 꺼내여 은이를 찾았다. 신호가 가자마자 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이 또 나가셨어요? 은이의 목소리가 두려움에 떨리고있었다. 정우는 잠간 숨을 고르고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직업소개소에서 한달에 2000원씩 받고 일하겠다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서… ―2000원이요? ―너무 비싼가? ―아마 그 정도는 줘야 할것 같아요. 2500원은 줘야 할거라는 아줌마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또 어떤 아줌마들은 1500원에도 가능할거라네요. ―그럼 어쩔가? ―먼저 그 아줌마를 잡아놓고 계약은 며칠후에 하는게 좋겠어요. 그간 아줌마의 일솜씨도 살펴보구 가격도 더 확실하게 알아보구요. ―그게 좋겠소. 그럼 내 가서 그렇게 말하구 아줌마를 래일부터 오라 할가? ―네, 다녀오세요. 정우는 급히 문을 나섰다. 가격이 합리한지 합리하지 않은지는 확실하게 알수 없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자기에게 전화까지 해준 그 아줌마가 고맙게 느껴졌다. 성격도 서글서글한게 붙임성도 좋아 아버지나 어머니와 쉽게 어울릴것 같았다. 만약 값이 맞춤하고 일솜씨까지 야무져 계속 그 아줌마의 손을 빌게 된다면 자기도 그 아줌마를 단지 일군으로가 아니라 한집 식구처럼 따듯이 대해주리라고 정우는 생각했다. 직업소개소에 들어서는 정우를 보고 아줌마는 자기가 주인인듯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 정우는 그러는 아줌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계약은 며칠후에 하자고 제의했다.그 말에 아줌마가 손사래를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세상에, 세상에… 도시사람들은 이렇게 약아빠졌다니까. 힘으로 벌어먹는 우리가 지고 들어야지 뭐. 오전에 정우를 보고 “책상족”인가고 묻던 그 남자가 정우에게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이 정도라도 협상이 이루어졌으니 먼저 수속비를 내시오. ―아, 네. 얼마를 내면 될가요? ―50원만 내면 되오. 그러면 손님이 만족해할 때까지 일군을 소개해줄수 있으니까. ―네, 그래야지요. 정우는 호주머니에서 50원짜리를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정우는 아줌마와 래일아침에 다시 련계하기로 하고는 직업소개소문을 나섰다. 어쩌면 땡 잡은것 같기도 하고 또 어쩌면 가격이 높은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와 알아보면 정확하게 알수 있을가? 생각을 굴리던 정우는 별안간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내가 왜 인터넷을 생각 못했을가? 인터넷 벼룩시장을 뒤지면 즉시 답이 나올것을 가지고. 정우는 부랴부랴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새 아버지네 댁에서 사느라 며칠 집에 들리지 않았더니 컴퓨터상에 먼지가 내려앉아 뿌옇게 보였다. 정우는 버튼을 눌러 컴퓨터를 작동시킨후 걸레를 적셔들고 컴퓨터상을 닦았다. 컴퓨터가 작동하는데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모니터에 QQ등록창이 떠있었다. 그제야 정우는 며칠이나 QQ에 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평소 QQ를 통해 원고를 주고받던 정우였다. 정우는 QQ등록창에 비밀번호를 쳐넣었다. 모니터아래쪽에서 펭긴 한마리가 두팔을 나풀거리며 한참 분주하게 설치더니 갑자기 “축하합니다”라는 글자가 박혀있는 작은 화면이 떠올랐다. 축하라니? 정우는 웬 일인가싶어 유심히 작은 화면을 살펴보았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QQ번호가 “행운추첨활동”에서 2등상을 받게 되였습니다. 상금 58000원과 삼성표노트북을 부상으로 선물받게 됩니다. 당신의 행운인증번호는 ****번입니다. WWW.*******.com에 들어가서 해당 절차를 밟으시기 바랍니다.     안내문을 읽는 정우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58000원에 삼성표노트북이라니? 자기의 눈마저 의심되였다. 사기술이 아닐가? 제 엄마를 내놓고는 뭐나 의심해야 한다는 이 세월에… 정우는 그렇게 의심하면서도 안내문에 밝혀진 사이트에 접속했다. 공증서까지 박혀있는 정규적인 활동임에 분명했다. 그래, 대형회사이니 이런 홍보활동도 벌리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어쩌면… 어쩌면 나에게 이런 행운이… 눈앞에서 뻘건 돈뭉치가 후득후득 떨어져내리는것 같았다. 하지만 정우는 인차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나에게 어찌 이 같은 행운이 떨어진단 말인가? 나같이 지지리도 복이 없는 놈에게. 아니야, 하도 열심히 사니까 하느님이 나를 가엾게 생각하신거야. 한족아줌마도 2800원의 로임을 달라던것이 스스로 2000원에 일해주겠다고 나서는것이 아닌가? 58000원, 그 돈만 있으면 간병인을 청하는데 쓸 돈은 근심을 하지 않아도 될것이 아닌가? 정우에게는 삼성표노트북보다도 현금 58000원이 훨씬 더 유혹적이였다. 될수만 있다면 노트북도 돈으로 바꾸고싶었다. 정우는 당금 튀여나올듯 툭툭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누르며 사이트 곳곳을 훑어보았다. 절차마다 인증번호를 적어넣고 신분증번호도 밝혀야 했다. 정우는 사이트에서 요구하는대로 등록표에 자기의 신상정보를 까근하게 적어넣었다. 등록표 맨끝에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회사의 재무규정에 따라 세금 1800원을 보내야 상금수령수속을 밟을수 있습니다. 송금후 송금령수증(汇款单)번호를 보내주시면 상금수령인증번호를 알려드립니다.     1800원의 세금? 정우는 흠칫했다. 혹시 이 돈을 보냈다가 사기당하는거나 아닌가? 아니야, 쥐꼬리만한 내 로임마저 세금을 물어야 하는데 58000원이나 되는 상금을 세금없이 공것으로 받을수야 없지. 이 세금을 내는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절차야. 헌데 당금 1800원을 어디서 구하지? 순간 정우는 아버지가 건네주던 신용카드를 떠올렸다. 안에 2천원 푼히 남아있다던 아버지의 말씀이 귀가를 스쳤다. 정우는 다시한번 안내문에서 알려준 사이트에 들어가 처음부터 한보한보 절차를 확인해보았다. 지어 공증서를 발급한 공증처의 사이트까지 확인했다. 공증처의 사이트에는 두 공증원의 사진과 직무까지 어김없이 밝혀져있었다. 그래, 틀림없어. 이것은 지금껏 열심히 살아온 나에 대한 보상이야! 정우는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너무도 흥분되여 가슴이 마구 방방이질을 해댔다. 정우는 택시를 잡아타고 곧추 은행으로 달려갔다. 인출기에서 현금 1800원을 찾아낸 정우는 사이트에서 알려준 전화번호에 확인전화를 걸었다. 인차 전화가 련결되였다. ―QQ회사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가요? 한 녀자의 달콤한 목소리가 귀속을 파고들었다. ―추첨활동에 대하여 문의하려 하는데요. 그때 전화 저쪽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전화를 타고 날려왔다. ―북경에 계시는 호금덕선생님이죠. QQ번호는 *********이구요, 신분증은 **************번이구요.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들리기는 했지만 통화내용은 똑똑하게 알아들을수 있었다. ―손님, QQ번호를 알려주시겠습니까? 정우는 긴장으로 하여 입술마저 초들초들 말라드는것 같아 힘껏 아래입술을 감빨고는 자기의 QQ번호를 불러주었다. 그러자 달콤한 목소리가 감탄을 터쳐냈다. ―세상에, 세상에! 축하드립니다. 선생님께서 “행운추첨활동”에서 2등상을 받으셨습니다. 녀자는 정우의 신분증번호며 사업단위까지 일일이 물어왔다. 이어 녀자는 날아갈듯 상쾌한 목청으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작성하신 자료와 일치합니다. 상금수령에 필요한 세금을 무시고 송금번호를 알려주시면 상금수령인증번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때 전화 저쪽에서 또 아까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상금과 노트북을 이미 부쳐보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상금과 노트북을 받으신후 인차 저희 회사에 소식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정우는 당금 심장이 튀여나올것만 같은 긴장을 느꼈다. 사실이구나. 의심할바 없는 사실이구나. 내가 곧 58000원의 현금에 삼성표노트북을 소유하게 되는구나. 정우는 그 사실이 꿈으로 되여 깨여져버릴것 같아 두려웠다. ―인차 세금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다시 련락하겠습니다. 정우는 송금령수증을 찾아 대방의 구좌번호와 구좌명을 적은후 돈 1800원을 은행일군에게 넘겨주었다. 눈 깜짝할 새에 인민페 1800원이 대방의 구좌로 넘어갔다. ―송금이 끝났습니다. 또 무엇을 도와드릴가요? 은행일군이 정우를 향해 사무적으로 말을 걸어왔다. ―감사합니다. 정우는 급히 밖으로 나와 QQ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뚜― 인차 신호가 이어졌다. ―QQ회사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가요? 전화를 받는이는 여전히 달콤한 목소리의 그 녀자였다. ―방금 세금을 보냈습니다. 확인해주십시오. ―송금번호를 알려주시겠습니까? 네 잠간만 기다려주십시오. 잠간 통화가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1800원이 입금되였습니다. 잘 쓰겠습니다. 그 소리와 함께 찰칵 통화가 끊겼다. 잘 쓰겠다니? 정우는 일순 무슨 뜻인지를 몰라 흠칫했다. 잘 쓰겠다니? 상금수령인증번호는? 정우는 다시 대방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핸드폰에서는 기계적인 목소리가 딱딱하게 흘러나왔다. ―대방의 전화기가 꺼져있습니다. 이럴수가, 이럴수가… 세상에 어쩜 이럴수가! 정우는 눈앞이 캄캄해났다. 두다리가 와들와들 떨려나 도무지 몸을 주체할수 없었다. 정우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끌고 가까스로 벽쪽으로 다가가 무너져내리려는 몸체를 고통스럽게 벽에 기대고 섰다.     8     ―전화 왔습니다― 전화 받으세요. 핸드폰이 울고있었다. 정우는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꺼내여 발송자의 번호를 확인했다. 벌써 세번째로 걸려오는 은이의 전화였다. 정우는 손가락을 받음버튼에 가져갔다가 또 주저하고말았다. 자신이 없었다. 전화에 대고 은이에게 “나 아버지의 퇴직금을 날려버렸소.” 하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것이 아버지에게 어떤 돈인데, 그것이 자기들 가정에 어떤 돈인데… 그 돈을 허무하게 눈 깜박할 새에 날려버리다니. 정우는 생각할수록 자기가 그렇게 한심하게 느껴질수가 없었다. 어디 가서 단돈 10원도 공것으로 가져본적이 없는 자기에게 어찌 하늘에서 뭉치돈이 떨어질수 있다고… 그것을 믿은 자신이 너무나도 미웠다.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요, 미련둥이로 생각되였다. 바보라 해도 좋고 미련둥이라 해도 좋지만 신용카드에 비여있는 그 돈을 당금 어떻게 맞춰넣는단 말인가? ―띠리링― 띠리링― 핸드폰에 메시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정우는 다시 핸드폰을 들고 발신자의 번호를 확인했다. 역시 은이였다. “어디에 있어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게 아닌가요? 아무리 큰일이라도 저하고 토론해야지요. 메시지를 확인하면 꼭 회답을 주세요.” 근심에 떠는 은이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은이가 측은한 눈길로 자기를 바라보는듯싶었다. 이어 그 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더니 독기를 뿜으면서 자기를 태워버리려는듯 화염을 날름거리는것 같았다. 정우는 두눈을 꼭 감았다. “어쩔거예요? 어쩔거예요?” 은이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있었다. 그래 과연 내가 어쩌려는것인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저질러놓은 일을 나절로 수습해야 한다. 종이로 불을 쌀수 없다고 언제까지 이 일을 감춰둘수 없다. 은이에게 말하자. 속시원하게 말하고 처분을 기다리자. 정우는 용기를 내여 은이의 번호가 저장되여있는 단축버튼 1번을 눌렀다. 신호가 가자마자 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 당신인가요? ―별일이 없지? ―당신을 기다리다가 금방 저녁을 먹었어요. 당신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었다면서 어머니가 아주 노여워하셨어요. 어디 있어요? 뭘 하고있어요? 누구랑 같이 있어요? 은이는 생각하고있던 모든것을 한시바삐 알고싶은듯 련주포를 쏘아댔다. 정우는 잠자코 은이의 목소리를 듣고있다가 힘없이 대답했다. ―일은 무슨. 그냥 속이 갑갑해서 바람 좀 쐬느라구… ―그래두 저녁이야 잡숴야죠. 혼자서 이게 웬 일인가요? 지금 어디예요? ―이게… 아, 이게… 정우는 그제야 자기가 지금 연집강가에 와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갑한 마음에 그냥 발 가는대로 와서 무작정 쪼크리고 앉아 오만가지 생각에 잠겨있느라 어딘지조차 생각해보지 않았던것이다. 정우는 시름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더듬거렸다. ―여기가… 여여, 연집강변이요. ―알겠어요. 내가 인츰 갈게요. ―오기는 뭘. 내가 곧 들어가겠는데. ―꼼짝 말고 거기서 기다리세요. 제가 가서 말동무를 해드릴게요. 약속하세요. 은이는 마치도 그렇게 다짐을 받지 않으면 정우가 어디로 사라져버리기라도 할것 같은 모양이였다. ―…… 정우는 그러는 은이에게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핸드폰을 든채 입만 쩝쩝 다셨다. ―저 떠날게요. 말소리와 함께 통화가 끊겼다. 하지만 정우는 그대로 멍하니 핸드폰만 내려다보았다. ―전화 왔습니다. 전화 받으세요. 그 소리에 정우는 흠칫 놀라면서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전화 왔습니다. 전화 받으세요. 핸드폰에서는 여전히 그 말만 반복되여나왔다. 그제야 정우는 새 전화가 들어오고있음을 느끼고 받음버튼을 눌렀다. ―선배, 저예요. 전화 저쪽에서 부드러운 녀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예나구나. 어쩌다가 너. ―어쩌다라니요? 서운하게요. 선배가 걱정스러워 전화했죠. 예나의 맑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정우는 보조개가 옴폭 패여들어가는 예나의 하아얀 얼굴을 그려보았다. 예나는 한 잡지사에서 근무하는 대학 후배였다. 한대학을 졸업하고 한직장에 배치받았다는 인연때문인지 예나는 진심으로 정우를 따르고 믿어주었다. ―감사하다. 예나야. ―선배 부친이 편찮다고 했죠? ―그래, 누워서 일어 못 나는건 아니구. 간병인이 올 때까지 곁을 비울수가 없어서. 사무실엔 별일이 없지? ―일이야 뭐. 우리 일이야 늘 물에 물 탄듯 미지근하지 않아요? 그래두 박주필 말이예요. 선배가 언제까지 자리를 비우겠냐면서 툴툴거렸어요. ―그랬을테지, 박주필이니까. 쯧쯧쯧… 정우는 뭐라 할 말이 없어 뒤말을 얼버무리며 쩝쩝 입만 다셨다. 정우보다 두살 이상인 박주필은 몇 안되는 편집부 동료들중에서 나이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정우의 라이벌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때문인지 평소에도 정우는 박주필과 사사건건 껄끄러운데가 있어서 고민하고있었다. 예나가 동을 달았다. ―박주필 말이예요. 항상 무슨 콤플렉스가 있는지 선배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하던 사람 아니예요? 뭐라는지 아세요? 오래 자리를 비울거면 다른 사람을 대신하겠다는거예요. 자기는 뭐 한뉘 집에 일이 없을것처럼. ―며칠 자리를 비웠으니 박주필도 힘들어 그러겠지. 래일 일이 처리될것 같으니 모레쯤이면 나갈수 있을거다. ―알았어요. 래일 제가 박주필께 잘 말씀드릴게요. 선배, 수고하세요. 예나는 통화를 시작할 때처럼 그렇게 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정우는 예나의 맑은 목소리가 계속 울려나올것 같은 핸드폰을 잠간 바라보다가 맥없이 머리를 숙이며 그것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래, 박주필이 툴툴거릴만도 하지. 그날 아버지가 편찮아서 못 나가겠다고 전화로 박주필께 알린후로는 다시 전화를 할만한 경황이 없어서 여직 다른 소식을 알리지 못하고있었다. 래일, 아줌마가 약속을 지켜 와줘야 할텐데. 간병인이 있어야 시름 놓고 출근할수 있겠는데… 은이가 택시에서 내리고있었다. 정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은이는 멀리에서 첫눈에 정우를 알아보고 손을 저었다. 정우도 은이를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은이는 정우를 향해 반달음으로 뛰여왔다. 은이가 가까와질수록 정우는 입술마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정우는 괜히 두손바닥만 썩썩 비비면서 불안하게 두발을 엇바꿔 디뎌댔다. ―당신, 정말… 어쩌면 당신까지 이렇게 내 속을 태우는거예요? ―…… 정우는 은이의 눈을 피해 소리없이 머리를 돌렸다. 은이가 정우곁으로 다가와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 ―여태 여기 이러구있었어요? 배고프지도 않아요? ―배고프긴 뭐… ―별소리없이 나갔다는 사람이 여태 집에 안 들어갔으니 어머님이 노엽지 않게 생겼어요? ―내가 뭐 철부지라도 되는가… 정우는 그렇게 자신없이 우물거리다가 말끝을 삼켰다. 그래, 철부지라도 됐으면 좋을것 같았다. 잘못을 저지른 철부지라도 되여 엄마에게 한바탕 얻어터지고 지나쳐버릴수 있었으면 차라리 속이 편할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였다. 어떻게 말끝을 떼면 좋단 말인가? 휴― 정우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올랐다. 은이는 잡고있는 정우의 손등을 만지작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어쨌는지 아세요? 정우는 “아버지”라는 말에 흠칫 놀라면서 “어?” 하고 신음 비슷이 소리를 냈다. ―아버님, 말이예요. 저녁을 잡수시다가 눈물을 흘렸어요. ―왜? ―자기가 자꾸 깜빡깜빡 하시는걸 알겠다면서 저보고 앞으로 고생이 많을거라고 했어요. 스스로 마음이 허한가봐요. ―그러실테지. ―정신을 놓으실 땐 아무것도 모르셔두 평소엔 항상 근심에 사시는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 말도 했어요. ―그 말? 그그그, 그… 그 말? 정우는 흠칫 놀라면서 목소리를 벅벅 더듬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그 돈 말이야. ―네? ―그그그, 그 돈… 내가 깜빡 돌았댔나봐. 나는 정말 큰돈을 받을수 있을줄 알구 보냈다니까. 말을 마친 정우는 푸― 긴숨을 토해내며 지그시 두눈을 감았다. 은이는 잡았던 정우의 손을 놓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 무슨 말을 하는거예요? ―QQ, QQ 있잖아. 정우는 꺽꺽거리면서 힘들게 낮에 있었던 일을 토해내고말았다. ―어쩌면… 어쩌면… 말끝을 있지 못하고있던 은이가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우며 무너져내렸다. ―여보, 미안해… ―세상에… 잡지사에서 편집씩이나 한다는 사람이… ―내가 제제제, 제정신이 아니였나봐. ―어쩌면… 어쩌면… 은이는 이 한마디만 반복하면서 어깨를 들먹였다. 정우는 파도처럼 오르내리는 은이의 어깨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엉뚱하게 한마디 했다. ―여보, 아버지께는 알리지 말아주오. 그 말에 은이가 무릎우에 떨어뜨렸던 머리를 쳐들고 정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물이 은이의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고있었다. ―여보… ―알았어요. 우리 집에 들어가요. 은이는 눈에 뜨이게 아래입술을 몇번 힘들여 빨더니 놀라울만치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되려 정우에게는 무형의 압력으로 다가왔다. ―왜 이러오? 욕이라도 하오. 내 속이 시원하게. ―당신, 혼자서 얼마나 속을 태웠어요. ―욕하라니까. ―욕할 힘도 없어요. 우리 집에 가요. 은이가 정우의 손을 끌고 앞에서 걸음을 옮겼다. 그 바람에 은이에게 끌려가는 정우의 발걸음이 다리에 천근돌을 달아맨듯 무겁기만 했다.     9     ―할아버지, 더럽다, 로망났다. 진이가 코를 싸쥐고 소리쳤다. 그때 아버지는 벽가에 쭈크리고 앉아서 벽에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바르고있었다. 아버지의 손길이 스치는 곳에 누런것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아버지는 역한 냄새를 풍기는 그 누런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웃음을 흘리고있었다. ―멋있다. 무지개 같다. 정우야― 무지개 구경 가자. 흐흐흐흐… 아버지가 손벽을 치면서 웃음을 날리고있었다. 먼저 집안에 들어선 은이가 신을 벗다말고 아버지의 말에 깜짝 놀라면서 굳어졌다. 은이와 정우가 들어서는것을 본 진이가 별일이라는듯 퐁퐁 모두뜀을 하면서 손벽을 쳐댔다. ―엄마, 아빠. 큰일났어요. 할아버지 벽에다가 똥칠을 해요. 똥칠을 한다니까요. ―진이야! 정우가 버럭 소리질렀다. 은이도 큰소리로 진이를 꾸짖었다. ―너, 너 방금 뭐라 했니? ―보세요. 할아버지를… 온 벽에다가 똥칠을 했다니까요. 똥칠을… 은이가 급히 주방으로 들어갔다. 정우도 인차 따라섰다. 둘은 눈앞의 정경에 흠칫하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주방 한쪽 벽은 이미 누런 색으로 도배되여있었다. 역한 냄새가 주방을 채웠다. ―정우야, 무지개 구경 가자. 노란 무지개 걸렸다. ―할아버지 진짜 로망났구나. 그게 어디 무지개야? 똥이지. 진이가 할아버지를 가리키며 킬킬거렸다. ―너 정말 막돼먹었구나. 은이가 버럭 언성을 높이며 씽하니 진이한테로 다가가더니 별안간 진이의 멱살을 와락 잡아끌고 객실로 나갔다. 너무나도 눈 깜박할 새에 일어난 일이라 진이는 놀라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와들와들 떨기만 하며 일그러져가는 은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드디여 와― 하고 울음을 토해냈다. 정우가 객실로 나가며 은이를 나무랐다. ―왜 이러는거요? ―보구서두 그래요? ―애가 놀라지 않소? ―듣구서두 그래요? ―그래두 말로 해야지. ―그렇게 잘하는 당신이 해보세요. 집안 꼴이 돌아가는것 하구는. ―당신, 거 무슨 뜻이요? ―안 보여요? 너까지 왜 이렇게 애 먹이는거니? 말과 함께 은이의 주먹이 진이의 머리에 올라갔다. 그 바람에 진이는 더구나 죽는듯이 소리질러댔다. ―왜… 왜들 이러냐? 애애애, 애는 왜왜, 왜 패는거냐? 침실에서 어머니의 노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은이의 시선이 어머니가 누워계시는 침실쪽으로 날아갔다. ―내내내, 내가 너무 오… 오래 사는구나. 쥐쥐쥐, 쥐약을 다구. 쥐… 쥐약을 다… 다… 어금이를 꽉 깨문 은이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두볼을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사람을 때리면 나쁜 놈이 된다. 아버지가 언제 객실에 나왔는지 우둑하니 서서 은이를 바라보다가 누런 색이 가득 묻은 손으로 은이를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은이의 눈길이 아버지쪽으로 휙 날아갔다. ―네… 네가 나쁜 년이다. 아버지의 손끝이 은이의 코끝을 가리키고있었다. 무엇이나 당금 태워버리려는듯 황황 타오르는 은이의 눈길이 아버지를 훑고있었다. 그 눈길에 기가 죽었던지 아버지가 머리를 돌리며 갑자기 울음을 터쳤다. ―무섭다. 저게 나를 가로본다. ―아― 악! 은이가 별안간 괴성을 지어올렸다. 은이에게 머리를 쥐여박히고 징징거리던 진이가 너무도 놀라 울음을 딱 그치고 은이의 몸에 눈길을 고정했다. 정우도 흠칫하다가 은이를 바라보았다. 은이가 몸을 픽 돌렸다. 한달음에 출입문쪽으로 달려간 은이는 신을 찾아신고 쫓기듯 문을 밀고 나갔다. ―여보―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정우가 소리치며 은이를 따라나갔다. 탕탕탕… 층계를 내리는 은이의 발걸음소리가 급촉했다. 텅텅텅… 그뒤를 따르는 정우의 발걸음소리가 무거웠다. 복도를 벗어나 마당으로 나서던 은이가 그만 왼쪽발을 흠칫하더니 그 맵시로 나가 너부러졌다. 정우가 달려가 은이의 오른쪽팔을 잡아 부축하며 더듬거렸다. ―괘괘, 괜찮소? 여보. 은이는 입술을 옥물고 간신히 일어나더니 정우의 팔을 뿌리치고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정우가 은이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여보, 왜 이렇게 흥분하는거요. 은이는 정우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앞만 바라고 잰걸음을 놓았다. ―여보, 어데 가려는거요? 나하구 잠간 얘기 좀 하기요. 은이는 아빠트경비실앞을 지나 거리에 나서고있었다. 정우는 급히 뛰여가 은이의 팔을 잡았다. ―당신답지 않게 왜 이러는거요? 그 말에 은이가 정우쪽으로 머리를 픽 돌렸다. ―뭐요? 낮으나 날이 선 목소리였다. ―아니, 당신이 너무 흥분하길래? ―내가 흥분해요? 나답지 않아요? 내가 왜 흥분하는데요? 나다운게 어떤건데요. 은이가 정우쪽으로 한발 다가섰다. 그 서슬에 정우는 한발 뒤로 물러서며 더듬거렸다. ―다다, 당신까지 이렇게 나오면 나나나, 난 어쩌라는거요? ―죽어요. 다같이 죽어버려요. ―당신, 진짜 막 나가네. ―막 나가고싶어요. 막 나가서 이대로 죽어버리고싶어요. 당신 같은 사람을 믿고… ―…… 정우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망연자실한 눈길로 은이를 퀭하니 바라보았다. ―요즘 내 마음이 어떤지 알아요? 두렵구 급하구 기막히구… 하늘이 와르르 무너져내릴것만 같다구요. 하늘이! 은이가 발을 탕 구르며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당신 하나 믿고 살아왔어요. 남들이 돈자랑, 남편자랑, 시집자랑할 때마다 내 남자는 누구보다 정직하고 열심히 산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살았다구요. 그런데, 그런데 이게 뭐예요. 뭔가 말이예요? ―여보, 참기요. 우리 힘을 합쳐 이번 고비만 잘 넘기면… ―힘을 합쳐요? 누구와 합쳐요? 은이가 흥- 하고 코방귀를 뀌며 입가에 차거운 웃음 한점을 피워올렸다. ―당신 누나라는 사람이 뭐라는지 알아요? ―누나라니? 정우가 놀라며 되물었다. ―당신이 혼자 애태우는게 너무 딱해서 누나라면 무슨 방도가 있을것 같아서 낮에 전화했댔어요. ―누나에게 전화했었다구? ―흥, 당신 누구덕에 대학 다녔는지 아냐 하데요. 당신 아니면 누나 대학 졸업하구 의사됐을거라 하데요. 당신 동생 정호… ―뭐요? 정호얘긴 여기서 왜 나오는거요? ―안 나오게 됐어요? 정호 장례때 돈을 얼마나 썼는지 아느냐고 하데요. 동생 한국에 데려다놓구 세집에서 가스중독으로 죽게 하구는 그 장례에 돈을 얼마나 썼는지 아느냐구 하데요. ―그 입 닥치지 못하겠소? 정우가 은이쪽으로 한발 다가서며 천둥같이 소리쳤다. 그러자 은이도 정우쪽으로 한발 나서며 바락바락 숨을 톺았다. ―왜, 왜요? 내가 없는 말을 했어요? 남들은 한국에 시집 가서 부모들 생활비를 전담한다고 하더구만 누나는 뭐 손가락 하나 싸맬 천쪼박이나 보낸적이 있어요? 누가 달라는 말도 안하는데 제쪽에서 전화마다 만날 없다는 소리만 했잖아요. ―이런… 속물 같은것이. ―흥, 내가 속물이라구요? 그러는 당신은? 당신 누나는? ―왜 이 마당에 누나까지 끌어들이는거요? ―이 마당이 어떤 마당인데요? 이 마당이 그래 당신네 로망난 늙은이들이 청승을 떠는… ―이런! 별안간 정우의 손이 은이의 뺨으로 날아올랐다. ―쳤어요? 당신이? 은이가 정우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가 내리더니 몸을 픽 돌렸다. 그리고는 무작정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다는것을 알아챈 정우가 은이를 부르며 쫓아갔다. 은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처 달리기만 했다. ―여보, 잠간만. 말 좀 하기요. 정우가 드디여 은이의 팔을 잡았다. ―여보. 내 잠간 돌아섰나봐. 미안하오. ―됐어요. 이사이로 내뱉는 짧은 말이였지만 섬뜩할 정도로 서리치고있었다. ―잘못했소. 제발 한번만 봐주오. 정우가 진심으로 빌었다. ―아니요. 잘했어요. 내 맘이 되려 시원해지네요. 은이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변해가고있었다. ―날 내버려둬요. 조용히 생각하고싶어요. 아무 생각도 없이 당신 하나 믿고 내가 너무 먼곳까지 온것 같아요. 말을 마친 은이가 손을 들어 달려오는 택시를 불러세웠다. ―여보, 어디로 가려는거요? 가지 마오. 정우가 택시에 오르는 은이의 팔을 부여잡았다. ―전화할게요. 그새 찾지 말아요. 은이가 정우의 팔을 뿌리치며 택시에 올랐다. ―다… 다시한번 생각하면 안되겠소? 택시는 정우의 애절한 목소리를 뒤로 한채 은이를 싣고 뿌연 가로등불빛속으로 사라졌다. 정우는 후들후들 떨리는 두다리를 간신히 지탱하고 서서 사라지는 택시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잠간사이에 택시는 정우의 눈에 작은 점으로 보이다가 사라졌다. 머리속이 하얗게 바래지며 눈앞에서 현기증이 일었다. 정우는 자기의 몸을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물 먹은 솜처럼 그 자리에 무너져내렸다.   둥둥챵― 둥둥챵― 갑자기 어디선가 꽹과리소리며 북소리가 들려왔다. 정우는 간신히 머리를 쳐들고 소리나는쪽을 바라보았다. 정우가 있는 곳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강변광장에서 양걸대가 빙글빙글 돌아가고있었다. 요사스럽게 몸을 타는 남녀들이 정우의 시야에 안겨들었다. 신들린 무당처럼 정우의 어깨가 들썽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어깨가 리듬을 타는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하지만 정우는 자기가 지금 그 무리에 몸을 던지고싶어한다는것을 묘연하게나마 느낄수 있었다. 그 욕망이 어디로부터 어떻게 생겨난것인지 정우로서도 알수 없었다. 다만 그 욕망을 향해 짙어가는 어둠속으로 무작정 뛰여들고싶을뿐이였다…    
3    단편소설*기적소리 댓글:  조회:1539  추천:0  2012-04-24
     뿡— 기적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정우는 약속이라도 한듯이 기적소리와 함께 잰걸음으로 걸상을 찾아 앉았다. 출입구가 잘 보이는 대합실마당앞에 놓인 길다란 걸상이였다. 그 걸상에 앉으면 출입구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똑똑히 볼수 있었다. 혹시 오늘은 오지 않았을가? 정우는 걸상끝에 쪼크리고 앉아서 출입구를 나오는 려행용신을 빼놓지 않고 세였다. 정우의 머리속에서 빈이는 분명 하얀 려행용신을 신고있었던것이다. 어느 순간 머리속의 그 하얀 려행용신이 뚜벅뚜벅 자기앞으로 걸어와 턱 하니 멈추어 서는 환영을 정우는 늘 보고있었던것이다. 빈이, 그 놈이 온다해도 과연 나를 알아볼수 있을가? 정우는 그렇게 삼검불같이 엉켜 붙는 사색의 실날을 정리하면서 눈앞으로 지나가는 려행용신을 세고 또 세였다. 정우가 백 스무두컬레째의 려행용신을 세였을 때 “아—아악!” 하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정우는 그 소리에 와뜰 놀라면서 걸상에서 벌떡 뛰여일어나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죽여라, 죽여. 이 버러지 같은 놈을!” 걸상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약국앞에서 거쿨지게 생긴 웬 사나이가 한 소년을 마구 걷어차면서 고래고래 소리지르고있었다. 사나이의 발밑에서 소년은 튀겨지는 새우처럼 잔뜩 몸을 옹송그리고있었다. 구경군들이 하나둘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소년은 소리도 지르지 않고 죽은듯이 자기의 몸을 사나이의 발길에 맡겨두고있었다. 저러다가 큰 일을 치는게 아닌가? 정우는 벌떡 뛰여일어나 쏜살같이 사람들속을 헤집고 들어가 몸으로 소년을 막았다. “웬 일이요? 왜 이렇게 사람을 때리는거요?” “좀도적이요. 버러지 같은 놈. 오늘 죽여버리지 않는것을 다행으로 알어. 퉤!” 사나이는 연신 침을 뱉으면서 두손을 툭툭 털고는 가쁜숨을 몰아쉬였다. “그래도 이렇게 사람을 때리는 법이 어디 있소?” 그때 누군가 소년을 파출소에 넘기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사나이가 픽 웃으며 너희들이 뭐 알기나 하느냐는듯 입을 열었다. “이까짓 좀도적을 끌고 파출소에 가라구? 흥! 파출소에 가서 자료를 작성하고 손도장을 찍고 처리결과를 기다리는게 쉬운줄 아시우? 차라리 늘씬하게 때려주는게 통쾌하지.” 사나이는 다시한번 소년에게 퉤 하고 침을 뱉고는 사람들을 비집고 나가 약국으로 들어갔다. “쯧쯧쯧… 못 된 송아지 뿔부터 난다더니, 아직은 애숭이군만 그래.” “저런 놈들은 애초에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니까.” “어시들은 어쩌구 살길래 애들을 저렇게 마구 나돌게 하는지 원…” 구경군들이 너 한마디 나 한 마디 궁시렁거리다가 흩어져버렸다. 약국앞에는 두손을 사타구니에 찌르고 몸을 잔뜩 옹송그린채 바들바들 떠는 소년과 눈앞의 장면에 어찌할바를 몰라 서성이는 정우만 남게 되였다. “후—” 정우는 긴 한숨을 내쉬며 소년의 주위를 부산하게 돌아치다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굽혀 두손으로 연신 소년을 흔들었다. “얘야, 일어나, 일어나보라구.” 소년은 누운채로 살풋이 두눈을 뜨고 머리를 약간 들어 주위를 살피더니 옆에 사람들이 없는것을 확인하고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바람이 불면 훌 날려버릴것 같은 강마른 몸매의 소년이였다. 육안으로도 확연히 보아낼수 있을만치 와들와들 떨고있는 소년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끊임 없는 떨림과 함께 소년의 코끝으로 마알간 코물이 길게 흘러내려 한들한들 춤을 추고있었다. “몹시 다치지 않았니? 몸을 움직여봐라.” 정우의 말에 소년은 기계적으로 두팔과 다리를 움직여보였다. 아픔으로 얼굴은 잔뜩 찌프러져있었지만 그래도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데는 큰 지장이 없는것 같았다. 정우는 그제야 약간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낮은 목소리로 소년에게 말했다. “무서워 말어. 끝났다. 가자, 저기 가 앉아서 한숨 돌려라.” 소년도 그제야 자기의 팔다리가 그대로 성해 있는것에 한시름을 놓았던지 코끝에서 춤을 추는 마알간 코물을 주먹으로 쓱 훔치고는 후들후들 걸상쪽으로 걸음을 옮기는것이였다. 정우에게 팔이 이끌려 걸상머리에 도착한 소년은 감히 걸상에 안지를 못하고 흘끔흘끔 정우를 훔쳐보았다. 무시로 허공을 도는 그 눈길은 정우에게 앉아도 되느냐고 묻는것 같았다. 정우는 하얗게 질린 소년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겁을 먹었는지 소년은 여전히 걸상머리에 붙어선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있었다. 정우가 앉으라고 말하지 않으면 소년은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서고만 있을것 같았다. 보이지 않던 마알간 코물이 다시 코끝에 나와 한들한들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 소년의 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움푹 꺼져 들어간 눈확밑에서 무시로 슴뻑거리는 두눈동자는 종잡을수 없는 불안으로 짙게 타고있었다. “앉아.” 정우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소년은 물 먹은 담처럼 걸상에 무너져 내렸다. “자식.” 정우는 말하면서 오른손으로 소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바람에 소년은 용수철마냥 튕겨 일어났다. “앉으라니까.” 정우는 오른손에 약간 힘을 주면서 소년의 어깨를 내리 눌렀다. 소년은 주먹으로 코물을 쓱 문지르며 정우를 바라보다가 맥없이 걸상에 주저 앉았다. “훔쳤다구?” 정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물었다. 소년은 정우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가싶더니 드디여 낮은 목소리로 외마디 대답을 했다. “네.” “뭘 훔쳤는데.” 정우의 목소리가 높지 않았지만 소년은 와뜰 놀라면서 다시 튕겨 일어났다. 지나친 공포로부터 오는 본능적인 반사반응인것 같았다. “그저 물어보는거다. 놀랄것 없다.” “네.” 소년은 신음소리처럼 외마디 대답을 하고는 머리를 푹 떨어뜨렸다. 정우는 그러는 소년을 더 놀래우고싶지 않았던지 소년의 옆으로 한발 다가가 걸상에 엉뎅이를 붙이고 앉았다. 역전마당의 혼잡한 사람들의 흐름속에서도 쌔액—쌕 하는 소년의 숨소리가 정우의 고막을 간지르고있었다. 평소 같으면 신경이 쓰일것 없는 소리였지만 그 순간만은 그 소리가 예리한 칼날이 되여 정우의 가슴을 허비고있었다. 흐흑흑! 갑자기 소년이 어깨를 들먹이면서 울음을 삼켰다. 빈이야, 너도 지금 이렇게 울고있는게 아니냐? 정우는 가슴속밑자락으로부터 진한 아픔이 머리를 쳐드는것을 느꼈다. 울고싶었다. 코끝이 먹먹해 나고 목구멍이 꽉 막혀왔다. 정우는 괜히 혀끝으로 입안 곳곳을 누비며 쏟아져내리는 눈물을 달래려고 했지만 마음과는 달리 눈물은 두볼을 타고 뚤렁뚤렁 굴러떨어졌다. 그러자 괜히 코방울이 벌렁벌렁 해나더니 끙— 끄끙 하고 신음소리마저 새여나왔다. 그 소리에 놀란 소년이 정우에게 눈길을 돌렸다. 소년의 눈동자가 크게 번져가고있었다. 소년은 떨리는 어깨를 움찔하더니 오른손으로 왼쪽 손등을 몇번 뿌비다가 여전히 겁 먹은 목소리로 떠듬거렸다. “아저씨, 우…우…울어요?” 그 바람에 정우는 와뜰 놀라면서 주먹으로 눈확을 꾹 눌렀다. 못된 짓을 하다가 어른들에게 들킨 악동처럼 당황한 기색으로 소년을 흘끔 훔쳐보던 정우는 짐짓 으흠— 하고 건가래를 떼고는 애써 목소리를 진정하면서 입을 열었다. “자식, 울기는. 너 아까 왜 맞았다고 했지?” 소년은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들어 정우를 한번 훔쳐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방에서 야…약을 훔쳤어요.” “저런, 하필이면 왜 약이냐? 돈도 아니구.” 정우는 모르것다는듯 소년에게 한마디 쏘아붙였다. 좀도적이 돈도 아니고 약을 훔쳤다는 그 사실이 어딘가 석연치가 않게 느껴졌던것이다. 소년은 두려움이 가득 찬 눈길로 정우를 흘끔흘끔 훔쳐보더니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할머니가 쓰러졌어요.” 정우는 자기가 혹시 소년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는가싶어 되물었다. “방금 뭐라구 했니? 할머니가…” “네. 며칠이나 혈압이 내려가지 않아요.” 소년이 정우에게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사실일가? 정우는 스스로가 오리무중에 빠져들어가는듯싶었다. 소년의 말이 사실이라면 소년은 고혈압으로 앓고있는 할머니를 위해 약을 훔쳤다는것으로 되는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수 있단 말인가? 정우는 마치도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듯한 느낌이였다. 그럴수야, 그럴수 없을거야. 정우가 소리쳤다. “자식, 거짓말까지. 너 선수구나.” “네? 저 아…아무 서…선수도 아닌…데요.” 소년이 얼떠름한 기색으로 더듬거렸다. 정우가 피식 웃으면서 쏘아붙였다. “자식 뻔뻔하기까지. 너 좀도적… 선수라구.” “정말이예요, 아저씨 저 처음이예요.. 할머니가 너무 힘들어하길래…” 소년이 말끝을 맺지 못하고 또 흐느꼈다. “그만해라, 이 자식아.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어른들과 말해서 돈을 가지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야지.” 정우는 당연한것이 아니냐는듯 소년을 바라보면서 핀잔조로 말했다. “그러게요. 휴—” 소년이 길게 한숨을 그었다. 그 모습은 나이에 맞지 않게 곰삭아있었다. 곰삭은 그 모습만치나 정우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길도 이름할수 없이 막연하게 안겨들었다. 정우는 갈피를 잡을수 없어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 오른주먹을 왼손바닥에 탁 치면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게요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그러게요. 난 그저 이래요.” “하!” “아저씨, 고맙습니다. 내가 만약 오늘 맞아죽었더라면 울 할머니를 어떻게 했을가요?” 소년이 다시 쿨쩍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정우는 가슴속으로부터 소년에 대한 련민이 피여오르며 가슴이 터지는것 같았다. 뭐라고 해야 할가? 정우는 최소한 소년이 거짓말은 하는것 같지 않다고 판단했다. 소년의 모습으로부터 진정 소년의 아픔이 물씬 풍겨나오고있었던것이다. 어떻게 해야 아파하는 소년의 마음을 보듬어줄수 있을가? 정우는 오른팔을 들어 소년의 어깨를 감아 꼭 안아주면서 말했다. “다 좋아질거다. 좋아지구 말구. 넌 이렇게 여기에 있잖니?” “꿈만 같아요. 다시 할머니를 볼수 있게 돼서요.” “왜 자꾸 그런 생각을 하니?” “아까는 그저 이대로 맞아 죽는구나 생각했어요. 아저씨가 아니였으면 난…” “세상이 그렇게 험악한게 아니다. 그런데 너 집에 어른들은 없니?” “없어요.” 소년이 초점 없는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며 머리를 저었다. “아버지는? 엄마는?” 정우는 자기의 물음이 너무도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렇게 어이없는 물음을 던져버렸다. 소년은 다시한번 후—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몰라요.”라고 한마디 하고는 또다시 무겁게 머리를 흔들었다. 놀랍게도 소년의 얼굴은 차츰 담담해지고있었다. 방금전에 “울 할머니를 어떻게 해요?” 하고 근심 할 때 비끼던 그 우수에 담긴 모습도 찾아볼수 없었다. 정수는 만화경 같은 소년의 얼굴을 뚫어져라 지켜보다가 끝내 묻고말았다. “부모들은 어떻게 된거냐?” “정말 몰라요. 제가 3살 때, 어머니가 아버지와 가짜 리혼을 하고 한국으로 먼저 갔대요. 한 1년간 전화가 오더니 그후로는 전화조차 없었대요.” “진짜 리혼이 된거로군, 그런 일이 많거든.”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돈이 없어 안깐까지 잃었다며 할머니와 주정을 부렸대요. 내가 7살쯤에 아버지는 로씨야로 간다고 떠났대요. 보름쯤 지나 로씨야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한번 오고는 소식이 끊어졌대요.” “저런, 그 후에는?” “벌써 10년이 지났어요. 내 기억에는 빚군들이 달려들어 우리 집 기물을 마스던 장면밖에 없어요. 할머니는 땅을 치며 울고… 나는 무서워서 웃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한번은 어떤 아저씨의 발길에 채여 쓰러졌는데 너무도 아파서 이틀이나 걷지를 못했어요.” “후에는 어떻게 살았니?” “후에는 빚군들도 우리 집에 더 이상 가져갈것도 마슬것도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더는 그렇게 행패를 부리지 않았어요. 한참 있다가 한번씩 와서 ‘아들이 소식이 없슴둥?’ 하고 물을뿐이였어요. 나와 할머니는 경제래원이 끊기게 되였어요. 할머니는 시장으로 다니면서 남들이 버린 남새랑 주어다가 겨우 입에 풀칠이나 했어요. 우리 사정이 너무 딱해서 그랬던지 가두에서 나와 할머니에게 ‘최저생활비’라는것을 신청해서 지금은 그것으로 겨우 살아가요. 학교에서도 나에게서는 일절 돈을 거두지 않아요.” 정우는 다시한번 가슴이 꺽 막히는 감을 느끼면서 심장이 터지는듯 아파났다. “혼미해서 쓰러져있는 할머니를 차마 그저 두고볼수 없었어요. 하지만 집에는 돈이 일전도 없어요. 달초에 생활비로 나온 돈으로 쌀 같은 딱 먹고 살것들을 사고나면 얼마 남지 않거든요. 이번 달 들어 할머니가 혈압이 자꾸 올라서 혈압약을 한번 사고 전기세랑 물고나니 정말 동전 한잎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약을 훔치기로 마음 먹은거에요. 전에 내가 할머니의 혈압약을 사러 다녀서 어떤 약인지 알아요. 한 병에 42원씩 하는 약이에요. 차마 동네에 있는 약국에서는 손을 쓰지 못하고 집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이곳 역전으로 온거예요. 여기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래서 기회를 보다가 주인이 점심을 먹는 새에 손을 썼는데 그만 재수 없게 후—” 소년은 또다시 꺽꺽 울음을 삼키더니 와— 하고 소리를 터치고말았다. 정우는 일시 소년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주었으면 좋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세상앞에 떠밀려온 소년을 마주 보면서 정우는 과연 어떻게 해야 소년에게 위로가 될지를 알수 없었다. 소년의 말이 사실이라면 소년을 도와줄수 있는 구세주는 과연 어디에 있는것일가? 구세주가 손 내밀어 구해주어야 할 미아는 과연 소년 한 사람뿐일가? “얘야, 괜찮아. 너 훔치려고 했을뿐이지 진짜 훔친것은 아니지 않니. 그 혈압약 내가 사주마. 그것을 가지고 가서 할머니에게 대접하구 이후부터는 훔칠 생각을 말고 착하게 살아라. 그러느라면 생활이 좋아질거다.” “그렇게 될수 있을가요? 아저씨.” “될수 있구 말구.” “아저씨는 참 좋은분이세요. 아저씨 같은 아버지를 둔 애들은 얼마나 행복할가요?" “뭐?” 정우는 소년의 말에 깜짝 놀라며 “어!” 하고 입을 떡 벌리고말았다. 아저씨 같은 아버지를 둔 애들은 얼마나 행복할가요? 소년의 목소리가 또랑또랑 귀가에 울리는듯싶었다. 정녕 너는 내 아들이여서 행복했었니? 빈아! 정우는 속으로 그 피 같은 이름을 애절하게 불러보았다.     그랬다. 정우도 정녕 아들 빈이가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게 하고싶었다. 행복을 느끼게 하기 위하여 어김없이 달마다 생활비를 푼푼하게 보내주었고 빈이가 요구하는것이면 무엇이나 만족을 주려고 노력했었다. 그만치 빈이의 욕심은 굽 빠진 항아리마냥 넓어만 같고 성격 또한 뿔 난 송아지마냥 거칠어만 졌다. “안되겠네, 얘가 점점 거칠어진다니까. 이 늙은 힘으로는 아무래도 얘를 잡쥐지 못하겠으니 애비가 들어와 애를 사람으로 만드세.” 빈이가 열두살을 넘기면서부터 어머니는 전화에서 늘 그렇게 빈이를 두고 신심이 없어하셨다. 하지만 리자돈으로 7만원이라는 거액을 내고 한국에 나와 불법체류자로 숨어 사는 몸이기에 훌쩍 귀국을 하여 빈이를 “사람으로 만들수도 없는 일”이였다. 정우는 일본에 가 있는 안해에게 빈이의 사정을 말하면서 그래도 엄마가 귀국하여 애를 돌보는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물은적이 있었다. 그러자 빈이의 엄마라는 정우의 안해라는 그 녀인은 세상에 되지도 않을 소리를 한다면서 전화 저쪽에서 펄쩍 뛰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미쳤어요? 그것도 말이라고 해요? 모두들 일본에 나오지를 못해 헤매고있는데 나온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벌써 들어가요? 십년은 벌다 들어가야 빈이를 류학 보내고 장가 보내고 집 사주고 할게 아니예요? 그래도 일본에서 버는게 훨씬 더 쉬우니까 당신이 한국인지 하내빈지 집어치우고 귀국하세요.” 정우는 련주포를 쏘는듯한 안해의 말을 들으면서 안해가 일본에서 날로 더 거칠어져간다고 생각했다. 하긴 일이 힘들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그럴수도 있겠지. 정우는 그렇게 안해를 리해하려고 애썼다. 하다면 빈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우가 빈이를 두고 한국에 나올 때 빈이는 아홉살, 소학교 1학년 후학기를 보내고있었다. 그 이듬해, 안해도 어떻게 일본사증을 손에 쥐고 비행기에 올랐던것이다. 그새 정우는 빈이가 전화에서 돈을 달라는 말만 꺼내면 두말없이 돈을 보내주었다. 안해도 빈이에게 돈만은 그립지 않게 쓰게 하련다면서 빈이의 전화를 받기 무섭게 뛰여가 빈이의 카드로 돈을 입금해주었다고 했다. “돈 무서운줄 모른다니그랴. 주먹만한 애가 돈 100원을 들고나가 한시간이면 다 쓰고 들어온다니까. 애를 뭐로 만들려구 그라이? 세상 무서운줄 알아야제.” 어머니가 전화 저쪽에서 안타깝게 넉두리를 할 때마다 정우는 가슴 한끝이 은근히 켕겨나면서도 짐짓 아무것도 아니라는듯이 어머니를 위안해드렸다. “시름 놓으십소, 어머이. 지금은 옛날하구 다릅니다. 집집마다 어시들이 외국 나와 돈을 버는게 누구네 집 앤들 그렇게 돈을 쓰지 않겠습니까. 모두들 흔자만자 쓰는 판에 우리 빈이만 축에 빠져보십소. 애가 얼마나 기 죽겠습니까?” “몰라이, 이 늙은이는 모른다니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죽은 늙은이가 알게 무언고. 아무튼 나를 믿지 말구 돌아와 제 새끼를 돌보라니께.” 어머니는 번마다 한참씩이나 넉두리를 하다가는 그렇게 기분 나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머니와 그런 전화를 하고 난 후이면 정우는 장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실 리자돈을 내 가지고 한국으로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정우의 꿈이라면 나올 때 꾼 리자돈을 다 갚고 돈을 좀더 벌어그럴듯한 아빠트나 한채 장만하는것이였다. 하지만 살아보니 그게 아니였다. 이듬해에 안해가 일본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정우는 아빠트 한채가 아니라 안해의 마음을 돌려 귀국시킬수 있을 만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였던것이다. 정우가 한달에 3천원씩 보내주는 생활비에 매워 조용히 집에서 빈이를 키우고 시어머니를 모실 안해가 아니라는것을 정우는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정우도 차츰 한국을 알게 되였고 한국에서의 생활에 습관되였던것이다. 어머니가 계시고 아들 빈이가 있는 고향,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밤하늘에 둥실 뜬 둥근달을 보면서 저 달도 고향을 비추고있겠지 하고 스스로도 유치하다고 느껴지는 생각을 하면서 눈굽을 촉촉히 적셨지만 일에 거칠어진 주먹으로 눈굽을 꾹꾹 누르고나면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갈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되였던것이다. 하기야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나지는것도 아니였다. 한국에서 그새 벌어 모은 얼마 안되는 돈을 달랑 들고 고향에 돌아간들 무슨 뽀족한 수가 있단 말인가? 안정된 직업이라도 있으면 풍족하지는 못해도 근근히 생활을 영위해가면서 직장인으로서의 긍지감이라도 느껴보겠지만 고향땅에 발을 들여놓는 그 순간부터 정수는 다시 백수로 돌아가야 하는 신세이기에 참으로 선뜻 밟을수도 없는 고향땅이였던것이다. 그래도 여기서 버는게 훨씬 능률적이지. 빈이야, 아빠를 욕해다구. 이제 너를 류학 보낼수 있고 너를 남 못지 않게 장가를 들게 할수 있고 너에게 엘레베터가 달린 아빠트를 사줄수 있을 만치 돈을 번 후에 고향 가서 그새 주지 못한 사랑까지 듬뿍 보상해줄게. 정우는 그렇게 자신을 달래면서 장장 12년을 한국에서 보냈던것이다. 떠나올 때 1학년 후학기를 다니던 아들 빈이가 대학교에 들어가야 할 나이가 되였다. 비록 점수가 너무 낮아서 정규적인 대학에는 입학할수 없었지만 딱히 시험점수를 따지지 않고 받아들이는 여러가지 명목의 민영대학들도 많은 지라 정우는 1년 학비로 2만 4천원을 내고 해변도시의 어느 대학 디자인전업에 빈이를 입학시켰던것이다. 대학에 입한한후, 빈이의 소비는 점점 더 심해갔다. 전업학습에 필요한 재료값이요. 생활비요 하는 명목으로 한달에 5, 6천원은 보통이였고 많을 때면 만원을 치달아오를 때도 있었다. 정우는 빈이의 생활소비를 두고 안해에게 물은적이 있었다. 빈이는 여러가지 명목으로 안해에게서도 그렇게 돈을 얻어쓰고있었던것이다. 더는 근심만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였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들놈이 비정상적인 생활에 물젖어 간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머리속을 치고들어왔던것이다. “빈이야, 소비가 너무 심한것이 아니냐? 통제 할줄 알아야지. 너희들은 아직 돈을 벌지 못하는 소비자들이라는것을 알아야 한다.” 처음으로 이 말을 꺼내던 날 빈이는 전화 저쪽에서 억울하다고 소리소리 질러댔다. “그래요. 내가 소비자라는것을 알아요. 하지만 이게 누구때문인데요. 인젠 이렇게 살아 습관해놔서 돈이 없으면 저 못 살게예요.” “쓰지 말라는게 아니구, 적당히 통제를 하라는게 아니냐?” “통제를 해요? 왜 내가 쓰는게 아까우세요? 나를 위해 돈을 번다면서요? 지금 쓰나 후에 쓰나 다 내가 쓸 돈을 버는게 아니예요?” “너 한다는 소리가… 아버지가 여기서 돈 버는게 쉬운줄 아니?” 정우는 전화라는것도 잊고 격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온몸에 전률을 느끼게 하는 랭소가 들렸다. “ㅎㅎㅎ… 그래요. 알겠어요. 인젠 돈을 대주기도 아깝다 이거죠. 그런데 어쩌죠? 돈이 없으면 전 죽을거예요. 알아요? 여기서 돈을 쓰지 않으면 친구들속에 끼이지도 못해요. 아버지가 붙여주는 그 눈꼽만한 돈도 여기서 돈인줄 아세요? 50만원짜리 자가용을 굴리는 애들이 많아요. 그런애들에 비하면 나는 거지나 다름없어요.” “너…너, 점점 한다는 소리가.” 정우는 빈이의 당돌한 말에 너무도 분해 송수화기를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빈이는 정우의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날이선 말만 골라 뱉었다. “왜요? 내가 틀린 말을 했어요? 아버지하구 엄마하구 나하구 선택한 삶이 이런게 아니예요? 아버지, 엄마는 외국에서 자유롭게 마음대로 돈을 벌구 나는 그 돈을 펑펑 쓰면서 외롭게 크구… 그럼 됐잖아요. 비오구 번개치구 우뢰 우는 밤에 내가 침실에서 무서워 부들부들 떨 때 아버지랑 엄마랑 어디서 무슨 재미를 보았는지 알게 뭐예요. 내 울음소리가 안 들렸어요? 인젠 저 안 울어요. 그까짓걸… 난 인제 돈 밖에 몰라요. 돈 부쳐주지 않으면 저 죽어버릴게예요.” 그번 전화가 있은후 빈이는 정우에게 전화를 하는 태도마저 변해버렸었다. 전에는 그래도 돈소리 먼저 아프지는 않는가고 인사라도 한마디 했지만 후에는 정우가 전화를 받기 무섭게 “자료비 5천원, 래일까지 입금하쇼.” 하면 그만이였다. 그런 전화를 받은후에도 정우는 어김없이 은행으로 달려가 빈이의 카드로 돈을 입금시켜주었다. 하지만 한면으로는 날로 망가져가는 아들을 방불히 보는것만 같았던것이다. 이 애가 도대체 제대로 학교생활을 하기나 하는것일가? 돈을 그렇게 쓰더라도 학교생활만은 차실없이 해주었으면 하는것이 정우의 마지막 바램이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학을 졸업하기만 한다면 한국에 불러다가 마땅한 학교에 류학을 시키든지 아니면 적당한 일자리라도 마련해주든지 하고싶었던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아름다운 꿈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달초, 어머니가 정우에게 전화를 걸어왔던것이다. “이보게 큰 사람아,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그랴?” 어머니는 목이 꽉 잠겨 겨우 소리를 뽑아내고있었다. 정우는 분명 가슴에서 널장 같은것이 쿵 하고 떨어져내리는 소리를 듣고있었다. 끝내 올것이 왔구나. 정우는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면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어머이,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이 사람아, 빈이가 글쎄 큰 일을 저질렀다아이가.” “큰 일이라니요?” “글쎄 이…이 애가 도…도박을 놀다가 잡히게 되자 도…도망을 치다가 경찰을 카…칼로 찍었다고 하네 그랴.” “네?” 정우는 심장이 폭발하는 진동을 느끼며 미친듯이 소리질렀다. “이 사람아.” “어떻게 그 소식을 들었어요?” “학교에서 이 늙은이에게 전화가 왔지 그랴. 이 늙은것이 너무 오래 살았나 보이.” 어머니는 전화에서 꺼이꺼이 울고 계셨다. 정우는 어떻게 무슨 정신으로 전화를 끊었는지 알수 없었다. 그가 다시 정신을 추스렸을 때 핸드폰은 닫기지도 않은채 그채로 발밑에 떨어져있었고 눈물은 두볼을 타고 둘둘 굴러내리고있었다. 하아얀 얼굴에 옴폭 보조개를 파면서 달게 웃음을 짓군 하던 빈이의 얼굴이 미치도록 그리워났다. 12년 동안 정우는 어느 한순간도 가슴에서 빈이를 내려 놓은적이 없었지만 그 순간처럼 미친듯이 보고싶기는 처음이였다. 아니다. 정말 이것은 아니다. 돈이 무엇이기에 식구들이 이렇게 산지사방으로 돈을 찾아 헤매야 한단 말인가? 돈은 얼마간 벌었다지만 구경 우리 가정에 남은것이 무엇인가? 정우는 고통스럽게 머리를 저었다. 핸드폰을 꺼내 일본에 있는 안해의 번호를 눌렀다. 손가락이 떨려 몇번만에야 번호를 정확히 누룰수 있었다. 뚜— 신호가 넘어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하지만 전화 저쪽에서는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날아왔다. 그럴수가 없는데… 분명히 이 번호로 안해랑 전화를 했었는데. 정우는 다시 한번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대방에서는 여전히 똑 같은 말만 반복했다.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사용되지 않는 번호입니다.” 정우는 다리에서 맥이 풀려 도무지 그대로 몸을 지탱할수가 없었다. 정우는 겨우 벽을 짚고 침대가로 다가가 물 먹은 솜처럼 주저 앉아버렸다. 가슴은 여전히 북치듯 쿵쿵 거렸고 심장은 또다시 쑤시는듯 아파났다. 정우는 오른손바닥을 펴서 지그시 심장을 눌렀다. 아픔은 온몸으로 퍼지고있었다. “후—” 정우는 고통스럽게 한숨을 몰아쉬였다. 기억의 저편으로 부터 안해와 마지막 통화를 하던 그 순간이 영화처럼 펼쳐지고있었다. 그것은 벌써 다섯달전이였다. 그날도 빈이는 전화에서 돈을 부치라는 통첩을 해왔던것이다. 정우는 빈이가 구경 한달에 얼마나 되는 돈을 쓰는가를 알고싶어 안해에게 전화를 했던것이다. 전화가 통해서 한참이나 지나서야 안해의 목소리가 들렸다. “웬 일이세요?” “웬 일이라니? 무슨 전화를 그렇게 받는거요?” 기다림에 급했던지 정우의 목소리가 괜히 높아졌다. “아니예요. 뜻밖이라서.” “못 할 전화라도 했다는거요? 남편의 전화가 뜻밖이라니?” 그러자 안해의 가시 돋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날아왔다. “무슨 남자가 이래요? 전화에서까지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면서. 화장실에서 뒤를 보고있었어요. 그 일에 정신을 팔다보니 벨소리에 놀란거죠. 됐어요?” “하!” 정우는 안해의 신경질적인 소리에 너무도 억이 막혀 입만 쩝쩝 다셨다. 어느때부터인가 안해가 망가지고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상스럽게 막나갈줄은 생각지도 못했던것이다. 12년, 과연 12년을 보지 못하면 애까지 낳은 부부도 이렇게 낯설고 생소해질수 있는것인가? 정우는 빈이가 또 돈을 부치라고 전화가 왔더라면서 그쪽에서는 한달에 얼마씩 소비돈을 주는가고 차분하게 물었다. 하지만 안해는 몹시 흥분해 했다. “왜요? 내가 뭐 애 생활비를 떼먹는줄 아세요? 애비라는 사람이 그까짓 생활비를 좀 대주기로서니 이렇게까지 생색을 내는거예요? 시끄러우니 다시는 이런 전화를 말아요. 내가 알아서 내쪽에서 그애 소비돈을 잘 보내고있으니 그쪽에서도 떼 먹지 말구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내줘요. 얼마나 힘들게 크는 애인데. 그깟 돈도 못 보내줘요? 이런 말을 할거면 다시는 전화를 하지 말아요.” 안해쪽에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던것이다. 그로부터 정우는 정말 안해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벌써 다섯달이 흐른것이다. 먹통이 된 안해의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정우는 자기가 끝없이 천길나락으로 떨어져들어가는듯한 환영을 느겼다. 정우는 그로부터 사흘후 출입국사무소에 불법체류를 자진신고 하고 부랴부랴 귀국하게 되였다. 학교에서는 이미 빈이의 학적이 취소된 상태였다. 빈이가 잡혔다는 파출소를 찾아가보았지만 아직 사건이 끝나지 않아서 빈이가 간수소에 송치되여있기에 면회도 할수 없다고 했다. 너무도 상심해 하는 정우를 보고 담당경찰이 말했다. “고향에 돌아가 소식을 기다리시오. 판결이 나면 우리가 소식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연길로 돌아온지도 벌써 20일이 지나고있었다. 그새 정우는 하루도 빠짐없이 역전에 나와 광장을 돌아다니다가 기적소리만 울리면 출구가 잘 보이는 대합실마당앞 걸상에 앉아서 돌아오지도 않는 빈이를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아저씨 같은 아버지를 둔 애들은 얼마나 행복할가요?" 정우는 소년의 말을 다시한번 떠올리면서 흐흐흐 어설픈 웃음을 빼여물었다.     뿡—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정우는 본능적으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으로 보아 장춘에서 들어서는 기차 같았다. 아무 곳에서 오는 기차도 정우에게는 별 다은 의미가 있을수 없는것이만 정우는 그래도 기적소리가 그렇게 가다려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정우는 손님들이 출입구를 빠져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가 반사적으로 하얀 려행용신을 세기 시작했다. 백 하나, 백 둘, 백 셋, 백 넷… 손님들이 다 빠져나올 때까지 하염없이 출구를 바라보다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나오고 종업원이 출입구의 철문을 닫아서야 정우는 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였다. 소리없이 정우의 거동을 살펴보던 소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 손님을 기다리는거죠?” 그 물음에 정우는 와뜰 놀라면서 “어!” 하고 외마디 대답을 했다. “기약 없는 사람을 기다리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저 너무 잘 알아요.” “너도 누구를 애타게 기다려 봤니?” 정우가 소년을 건너다보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소년이 입을 실룩거리며 대답했다. 소년은 워낙 정우를 향해 웃음을 지어보이려고 하는것 같았다. 하지만 아까 그 사나이의 발에 채여 입술이 터지는 바람에 퉁퉁 부어서 그저 실룩거리는 흉내만 내는것이였다. 정우는 안쓰럽게 소년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너 누구를 그리 애타게 기다렸었니?” “몰라요, 가능하게 엄마일거예요. 아니, 아빠일수도 있어요. 그때는 이렇게 역전에 나오면 엄마나 아빠가 문뜩 그 출구에서 걸어나오며 나에게 손을 저을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그랬구나.” “하지만 후에는 역전을 싫어하게 되였어요.” 말을 마친 소년이 호— 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정우는 소년의 옆으로 한뽐 다가 앉으며 다잡아 물었다. “그건 또 왜서이지?” “그날도 저는 발 가는대로 역전에 나왔댔어요. 딱히 할 일도 없는지라 광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저도 몰래 대합실에 발을 들여놓은거예요. 북경으로 가는 기차가 한창 검표를 하고있었어요.” “거야 날마다 있는 일이지 뭐.” “하지만 그날 나는 잊지 못하게 아픈 장면을 보게 되였어요. 다섯살쯤 되는 아니 그보다는 좀더 클거예요. 그런 녀자애가 죽기내기로 발버둥을 치는거예요. 큰 려행가방을 든 녀자가 눈물을 훔치며 검표구를 넘어서서 손을 젓는거예요.” “딸을 떼놓고 어디로 멀리 떠나는 모양이였네.” 정우는 담담한 어조로 소년의 말에 동을 달아주었다. “그런 같았어요. 녀자애가 발버둥질을 치며 소리쳤어요. ‘엄마, 가지마. 나 고운 옷도 사달란 말을 안 하구 맛있는것두 사달라고 떼질을 안 쓸게, 엄마 가지마. 엄마 한국 가면 영영 안 온댔어. 철이가 그랬어, 엄마 가지마.’ 하고말이죠. 녀자애의 그 울부짖음을 들으면서 나는 나의 엄마를 떠올렸고 나의 아버지를 떠올린거예요. 그때로부터 전 역전이란 떠난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곳만이 아니라 함께 있는 사람을 갈라지게도 하는 곳이라는것을 알게 된거지요.” 말을 마친 소년이 잠간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샘물 같은 눈동자를 감싼 눈까풀이 수시로 팔딱팔딱 뛰고있었다. 정우는 힘들게 뛰고있는 소년의 심장을 보는것 같았다. 뭐라고 위로해주면 좋을가? 뭐라고 위로를 하면 소년의 마음이 잠시라도 편할수가 있을가? 정우는 다시 소년곁으로 한뽐 다가 앉아 소년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너 참, 힘들었겠구나. 너 지금 무엇을 제일 하고싶니?” “할머니에게 약을 구해드리고싶어요.” 소년이 기다렸다는듯 대답했다. “알았다. 근심하지 말어. 아저씨가 할머니의 약을 사드린다고 했잖니? 여기서 잠간만, 잠간만 앉아서 네가 마음을 진정한후 우리 약방으로 가서 할머니의 약을 사자꾸나.” “정말 미안하지만 아저씨, 그렇게 해주실래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그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 “괜찮아, 내가 그러고싶어서 그러는거니까. 자, 그리구 또 생각해봐. 무엇을 하고싶은가고.” “정말 또 생각해도 돼요?” “자식, 속고만 살았나?” 정우가 소년을 향해 곱게 눈을 흘겼다. 퉁퉁 부은 소년의 입술이 또 벙글서 치켜졌다. “아저씨, 저 공원에 가서 놀이감비행기랑 마음껏 타보고싶어요. 어릴 때 친구들이 부모랑 공원 가서 그런것들을 타는것이 그렇게 부러웠었는데. 전 아직 한번도 타본적이 없어요. 아저씨, 저 웃기죠? 이렇게 큰 놈이 유치하죠?” 소년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맑아있었지만 정우는 또다시 목이 꽉 메여 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정우는 소년의 어깨를 당겨다가 품에 꼭 껴안았다. 소년이 아니라 빈이를 안고있는듯한 환각이 머리속을 맴돌고있었던것이다. 빈이, 내 아들은 과연 놀이감비행기랑 타보았을가? 정우도 사실 아들을 데리고 공원에 가서 그런 놀음을 놀아본 기억이 없었다. 함께 있을 때엔 호주머니 사정이 딱하다보니 문표를 사기가 버거워 감히 그런 생각을 내지 못했고 그렇게 갈라져서 어언 12년 세월이 흘러버린것이다. 물론 그 동안 빈이에게 소비돈을 달라는대로 보내주었으니 그 애가 마음만 먹었다면 타보지 못했을수 없을테지만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그런 놀음을 해보지 못했다는것을 생각하니 역시 가슴이 켕겨 들었던것이다. “우리 할머니에게 약을 사다드리고 그 길로 공원에 갈가? 가서 아저씨하구 그런 놈들을 몽땅 타볼가?” “아저씨가 저하고요?” 소년이 믿지 못하겠다는듯 정우를 빤히 건너다보며 눈동자를 키웠다. “그럼, 싫어?” “아저씨, 아들을 기다리고있죠?” 소년이 갑자기 당돌하게 물어왔다. “어!” 정우는 외마디 대답을 하고는 뭐라고 말을 이을수 없어 입을 헤 벌린채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애써 밝게 웃으려고 퉁퉁 부은 입술을 움씰거렸다. 정우가 머리를 끄덕였다. 소년이 벙긋 웃으며 손벽을 쳐댔다. “그렇구나, 아저씨 아들을 기다리고있구나. 내가 맞췄죠? 나 와늘 귀신이죠?” “그래, 너 와늘 귀신이다. 자식.” 정우가 소년의 어깨를 툭 치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몇시 차에 온대요? 아들은 뭐 하세요?” “글쎄다.” “네?” “몇시 차에 온다는 소식이 없네. 그 자식…그…그 자식, 대학에 다닌다…” 정우의 얼굴이 붉어지고있었다. “아들은 뭐하세요?” 하고 기대에 차서 묻는 소년에게 그놈 지금 간수소에 있다고 차마 말할수 없었던것이다. 정우는 소년이 복잡한 자기의 심사를 보아낼것 같아서 인차 머리를 푹 숙였다. 소년은 과연 정우의 마음을 읽지 못한것 같았다. “야— 아저씨, 참 좋으시겠어요. 아들을 대학까지 다 보내구.” “그래, 그렇지. 그래야지. 가자. 할머니 약 사러 가자.” 정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저씨!” 소년도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울 할머니도 아저씨를 고맙게 생각하실거예요. 고맙습니다, 아저씨. 잊지 않을게요. 우리 3선을 타고 가요. 3선 종점에 우리 집이 있어요. 우리 집옆에 약방이 있어요.” 말을 마친 소년이 정우의 앞에서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래, 가자.” 정우도 소년의 뒤를 부지런히 따랐다.   뿡— 기적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고있었다. 들어오는 차일가? 아니면 떠나가는 차일가? 정우는 본능적으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찰칵찰칵… 초침은 시름없이 시간을 조여가고있었다.        
2    단편소설*비오는 날의 그 아픔 댓글:  조회:1905  추천:0  2010-03-25
  단편소설 비오는 날의 그 아픔 녀인은 미칠것만 같았다. 미칠것처럼 두볼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녀인은 어금이를 꽉 깨물며 머리를 들었다. 후두둑 굵은 비방울이 머리를 치고있었다. 녀인은 머리를 숙이며 손바닥을 쫙 펴서 두 볼을 꼭 눌러주었다. 화끈화끈 볼에서 뿜겨지는 열기가 손바닥으로 옮겨지고있었다. “힘들어, 정말 힘들어. 힘들어 미칠것만 같아 !” 녀인은 이렇게 속으로 웨치며 두볼을 꼭 눌렀던 손을 스르르 아래로 당겨 툭툭 열나게 높뛰고있는 심장께로 가져왔다. 손바닥에까지 툭툭 하는 심장의 울림이 느껴져왔다. 녀인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어디론가 정처없이 빠져들어가는 환각이 머리속을 엄습해왔다. 생각하고싶지도 않은 비오던 그날의 아픈 장면들이 새록새록 머리속을 치고들어왔다. 그날도 오늘처럼 우뢰가 울고 번개가 번쩍였었다. “기어코 떠나야겠어? 정녕 이렇게 떠나야겠어?” 남편은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고 떨리고 울음섞인 목소리로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리 지르는 남편의 눈에서 콩알같은 눈물방울이 두르륵 굴려내려 까아만 코수염우에 자리를 잡았다. 눈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린 코수염을 어루 쓸며 녀인을 바라보는 남편의 눈길이 그처럼 처량해보일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통스럽게 몸을 돌리며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나니 오히려 가슴이 편해지는듯싶었다. 녀인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얼굴을 돌려 남편을 쳐다보았다. . “쌍년이!” 별안간 남편이 오른손바닥을 쫙 펴서 그녀의 왼쪽 볼을 후려갈겼다. 녀인은 “악~” 소리지르며 왼쪽 볼을 부여잡고 저만치에 가서 너부러졌다. “쌍년이! 속물같은 년!” 남편이 소리치고있었다. 지옥의 저켠에서 들려오는듯 남편의 목소리가 너무도 갈리고 찢겨져있었다. 녀인은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엉금엉금 남편앞으로 기여갔다. “여보, 여보. 절 믿어주세요. 믿어 달라구요. 우리 남이를 위해서구 우리 가정을 위해서구 역시 당신을 위해서라구요.” “뭐야? 쌍년이, 누굴 위해서라구?” “제발 절 믿어주세요. 제 가슴엔 남이밖에 없구 당신밖에 없구 가정밖에 없다구요. 세상이 다 변해도 저만은 변하지 않을거예요.” “그렇게 중해? 돈이 그렇게 중해? 기어코 이 가정을 버리고 간다는거야? 가, 가서 돌아오지 말어!“ “여보~ 집 한칸 살만한 돈만 벌어가지고 금방 돌아올게요. 우리도 우리 이름으로 된 집이 있어야잖아요? 여보 믿어줘요.” “가라니까! 쌍년이!” 남편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몸을 돌렸다. 쏟아지는 비속으로 씨엉씨엉 걸어가는 남편의 뒤 모습을 바라보면서 녀인은 순간 왼쪽 볼이 터질듯 아파옴을 느겼다. 녀인은 손으로 왼쪽볼을 감싸쥐였다. 푸들푸들 떨려오는 왼쪽 볼의 그 느낌은 으스스~ 심장마저 떨리게 했다. 녀인은 두 손을 심장께로 가져다가 꼭 눌러주었다. 헉헉 숨쉬기 좇아 힘들어졌다. “구경 무엇을 위해선가? 구경 이 걸음이 옳은 걸가?” 녀인이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남편이 다니던 공장이 부도를 맞은 다음부터였다. 그렇다 할 재간도 없는 남편은 입살이라도 하려고 로무시장에서 일당을 뛰고있었다. 어느 날엔가 녀인은 자기의 생각을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안돼? 녀자가 어디로 간다고!” 남편은 첫마디로 반대하고 나섰다. 질그릇과 녀자는 내돌리면 깨여진다는 그 관념을 넘어서지 못하고있는 남편이였다. 하지만 녀인은 남편의 곧은 성미에 매워 그냥 보리고개를 톺을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녀인은 남편 몰래 수소문을 해서 끝내는 한국으로 가는 비자를 손에 쥐게 되였다. “뭐야? 기어코 간다는거야? 새끼고 남정네고 다 버리고 기어코 간다는거야? 미친 년, 환장을 한 년!” 남편은 하늘이 낮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긴 밤을 팼다. 그 정서는 공항에 와서도 누그러들줄을 몰랐다. “인천으로 떠나는 아시아나항공이 검표를 시작했습니다. 인천으로 가시는 손님여러분 탑승수속을 다그쳐 주시길 바랍니다.” 녀인은 그때까지도 후둑후둑 뛰는 가슴을 손으로 꼭 누르며 힘들게 개찰구를 향해 걸음을 옮겨놓았다. 녀인은 또 왼쪽 볼이 찔끔찔끔 앞아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녀인은 설걷이를 하다말고 밖으로 나와 비떨어지는 추녀밑에 쪼크리고 앉았다. 주루룩주루룩~ 거세지는 비방울소리와 정비례를 이루며 왼쪽 볼의 아픔은 점점 심해졌다. (웬 일일가 왜 비만 오면 이놈의 왼쪽 볼이 이렇게 아파나는걸가? 녀인은 애궂게 왼쪽 볼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옮겨 오른쪽 볼을 만져보았다. 왼쪽 볼에서 오는 통증때문인지 그 순간은 오른쪽 볼도 멍~ 해나는것이 어딘가 좀먹어가고있는듯한 느낌이였다. (오른쪽 볼까지 이렇게 아프면 어떻게 할가? 내가 과연 당해낼수 있을가?) 생각만 해도 으스스 소름이 끼쳐왔다. “이쁜 연변아줌마, 어디 아파요?” 뒤에서 낮지만 자냥스러운 목소리가 귀전을 쳤다. 녀인은 흠칫 몸을 떨며 머리를 돌렸다. 멋스레 코수염을 기른 깔끔하게 생긴 나그네가 빤히 녀인을 내려다보고있었다. “헉!” 녀인은 저도몰래 숨이 막혀오는듯싶었다. (어쩜, 어쩜 이렇게도 꼭 같게 생긴 사람도 있을가?) 녀인은 코수염을 기른 사나이의 모습에서 분명 남편의 얼굴을 그려보고있었다. 코수염은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몸을 굽히고 녀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있었다. (아닌데, 이게 아닌데.) 녀인은 이렇게 자신을 채찍질하면서도 감히 코수염의 손에서 어깨를 뺄수 없었다. 코수염이 녀인의 얼굴쪽으로 입술을 밀착해왔다. “이쁜 연변아줌마. 서러운 일이 있으며 나하구 말해요. 힘들 땐 어딘가에 기대는것이 훨씬 편하거든요.” 코수염의 입술이 녀인의 왼쪽 볼에 와 박히고있었다. 녀인은 젖먹던 힘까지 다 내여 코수염을 밀쳤다. “왜 이래? 알면서. 아직 덜 열렸어? 알았어. 알았다구. 천천히 열어봐. 암튼 내 앞에서 넌 열려지게 돼있으니까.” 코수염은 신사스럽게 몸을 일으키고는 비속을 걸어가며 나름대로 가사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마주치는 눈길이 무엇을 말하는지/ 난 정말 몰라 난 정말 알아…” 이날은 녀인이 “김삿갓정식점”에 온지 한달 열흘이 되는 날이였다. (또 비가 오는 모양이구나.) 녀인은 아파나는 왼쪽 볼을 꼭 부여잡고 층계를 올라 밖으로 나갔다. 지하에 있어 몰랐지 밖에서는 진작 우뢰가 울고 번개가 번쩍이고있었다. “흐읍~” 녀인은 으스스 몸을 떨며 들숨을 마셨다. “왜 이래? 아줌마, 그 정도 술에 힘들어 할 아줌마가 아니잖아?” 잇달아 밖으로 나온 코수염이 녀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술냄새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녀인은 왼쪽 볼을 꼭 누른채로 머리를 돌려 콧수염을 쏘아보았다. “연변아줌마는 이게 매력이라니까. 좋아도 좋은 내색 내지 않고 이렇게 째려보는 모습. 으~” 코수염의 입술이 녀인의 오른쪽 볼을 향해 다가 오고있었다. 녀인은 외로 고개를 탈면서 옆으로 한발작 비켜섰다. 코수염은 그러는 녀인의 목을 와락 끌어안더니 뻑 하고 녀인의 오른쪽 볼을 덮쳤다. “악~ ” 녀인은 단말마적으로 소리지르며 코수염을 밀쳤다. “왜 이래? 선수끼리…” 코수염의 손이 더욱 우악스럽게 녀인을 가슴쪽으로 끌어당겼다. 녀인은 젖먹던 힘까지 다해 코수염을 밀면서 오른발을 날렸다. 코수염은 억 소리지르며 저쪽에 나가 벌렁 너부러져 두 팔을 허우적 거렸다. “하하하하…” 녀인은 삽시에 큰 웃음을 터쳐올렸다. 녀인으로서도 자기가 왜 그렇게 웃는지 알수 없었다. 그저 막을수 없는 보물처럼 웃음을 걷잡을수 없다는 생각뿐이였다. “뭐야? 너 뭐냐구! 마담께 선불금까지 주구 널 데리고 나왔는데 돈값은 해야제?” 코수염이 으르렁거리며 녀인앞으로 한발자욱한발자욱 죄여오고있었다. 녀인은 가까와 오는 사나이의 체취를 느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쌍년이, 웃어? 정녕 웃는거야?” 코수염이 표독스럽게 소리치고있었다. 이어 코수염의 왼손바닥이 녀인의 오른쪽 볼에 떨어졌다. 녀인은 오른쪽 볼을 움켜잡았다. 오른쪽 볼이 터질듯 아파나기 시작했다. “아악~” 녀인은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 소리지르며 오른손을 쫙 펴서 사나이의 왼쪽 볼을 할켰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반격에 사나이는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왼쪽 볼을 움켜잡았다. “하하하하하…” 우거지상을 하고 왼쪽 볼을 부여잡는 사나이를 보면서 녀인은 밑도 끝도 없이 어디론가 굴러떨어지는듯한 쾌감을 느꼈다. “너, 너… 지독한 년! 늑대에게 통째로 잡혀먹힐 년…” 코수염이 이사이로 한마디한마디 독설을 퍼붓고있었다. 후둑후둑… 굵은 비줄기가 녀인의 가냘픈 몸을 어디라 없이 내리치고있었다. 녀인은 건듯 얼굴을 쳐들었다. “하하하하하…” 후둑후둑 하는 비소리에 가슴 어딘가에 구멍이 뻥 뚫리는듯싶으면서도 자꾸 너털웃음이 터지는 것을 어쩔수 없었다. 녀인은 미칠것만 같았다. 미칠것만 같아서 비오는 날이면 이렇게 밖으로 뛰쳐나오군했다. 그때마다 두볼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며 모진 통증이 몰켜오군 했다. 녀인은 왼쪽 볼에서 오는 통증인가싶어 왼쪽 볼을 움켜잡군했다. 하지만 단지 왼쪽볼에서 오는 통증만이 아닌듯싶었다. 녀인은 또 오른쪽 볼을 움켜잡았다. 역시 오른쪽 볼에서만 느껴지는 통증이 아닌듯싶었다. 으윽~ 녀인은 어느 쪽 볼에서 오는 아픔이라 딱히 말할수 없는 그 느낌이 무지 고통스럽다고 생각되였다. 그리고 그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할 래일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문학잡지   2010년 3-4호에 실림
1    단편소설*블랙홀 댓글:  조회:2437  추천:0  2010-03-10
“까…만…것…” 진이는 금방 식자를 하는 악동처럼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글자를 오려나갔다. 하지만 밑판이 딴딴한 섬유판이여서그런지 도무지 글자가 뜻대로 오려지지 않았다. 진이는 제대로 오려지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글자를 찾아 다시 한획한획 힘을 주어 오렸다. 너무 도정신을 하여 글자를 살펴서인지 차츰 눈동자가 뻣뻣해났다. 진이는 글자에서 눈길을 떼고 머리를 들어 천정을 쳐다보았다. 얼기설기 잔금이 간 천정 중간에 달려있는 일광등이 자극적인 빛을 뿜어대고있었다. 그 빛속에서 일광등옆에 어지러이 박혀있는 파리똥 같은 까만것들이 기분 나쁘게 눈을 괴롭히고있었다. 진이는 괜히 신경질적으로 퉤하고 바닥에 헛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눈굽을 꾹꾹 찍었다. 그러다가 걸상에서 벌떡 뛰여일어나 손에 들었던 열쇠뭉치를 호주머니에 넣은후 오른손 손가락을 폈다 꼬부렸다 반복하면서 섬유판으로 된 긴 걸상웃면을 살폈다. “김태룡 이 곳을 다녀가다.” “리룡 기다려 복수할테다” “최호 개 같은 새끼” 진이는 자기가 오려놓은 글자들옆에 란잡하게 씌여져있는 다른이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저도 몰래 “픽!” 하고 실소가 터져나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이어 또다시 딴딴한 섬유판우에 뭔가를 오리고싶다는 욕망비슷한것이 머리속을 치고들어오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진이는 다시 딴딴한 섬유판으로 된 걸상우에 엉뎅이를 붙이고 앉아 호주머니에서 열쇠뭉치를 꺼내들었다. 일여덟개의 열쇠가 한데 꿰여진 열쇠뭉치는 꽤나 묵직했다. 진이는 그 속에서 이것저것 고르다가 집 출입문열쇠를 찾아들었다. 끝이 뾰족해서 글자가 잘 오려질것 같아서였다. 진이는 열쇠를 쥔 오른손에 젖 먹던 힘을 다하여 또박또박 글자를 오리기 시작했다. “…속…도… 보…이…지… 않…는… 세…상…” 진이는 잠간 멈추고 자기가 이미 오려놓은 글자들을 작품이나 감상하듯 조용히 읽어보았다. “까만것, 속도 보이지 않는 세상. 까만것, 속도 보이지 않는 세상. 까만것, 속도 보이지 않는 세상” 진이는 이 몇 글자 안되는것을 단숨에 세번이나 읽어버렸다. 자기로서도 어째서 이런 글을 여기다 락서했는지 알수 없었다. (왜서일가? 다른이들이 락서한것을 보고? 아니면… 그런데 까만것은 뭐지?) 진이는 오른손 식지에 열쇠고리를 걸어들고 빙빙 돌리면서 잠간 두눈을 감았다. (까만것은 뭐지? 일광등빛이 눈을 자극하여 죽겠구만 자꾸 까만것이 떠오름은 무엇때문일가?) 진이는 삼검불처럼 어지러워지는 사색을 정리하려다가 웬지 가슴속이 갑갑해나서 “후—” 하고 긴 한숨을 톺아올렸다. 그 자리에 그채로 잦아들고싶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진이는 걸상에 눌러앉아 짚단 쓰러지듯 몸을 뒤로 날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뒤통수가 얼얼해났다. 하지만 진이는 그대로 벽에 등을 맡겨버렸다. 머리속이 하얗게 비워지는듯 했다. 하얀 공간에서 까만것이 머리 떨어진 파리처럼 앵앵 애처롭게 돌아치고있었다. 진이는 그 까만것이 지지리도 역겹게 생각되였다. 까만것은 머리속을 어디라 없이 헤덤벼쳤다. 까만것을 따라 우왕좌왕 하던 진이는 갑자기 오싹 몰려오는 한기를 느꼈다. 온몸이 오스스 떨려오더니 저절로 어깨가 안으로 오그라들었다. 진이는 움씰 어깨를 떨었다. 이어 까만것은 스물스믈 엉뎅이쪽으로 날아내렸다. 따라서 엉뎅이에서 도 찬기운이 서려올랐다. 진이는 차거워지는 엉뎅이를 두어번 움씰움씰 하다가 걸상에서 벌떡 뛰쳐일어났다. 모를 일이였다. 집안은 확확 겨불내가 나도록 무더운데 몸에서는 왜 영문없이 한기가 느껴지는것일가? 까만것이 엉뎅이로부터 쓩— 날아오르더니 곧추 대뇌쪽으로 달리는듯 했다. 순간 진이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진이는 자리에 굳어진듯 서있다가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옮긴다해야 여섯평도 되나마나한 공간이여서 어디라없이 마음놓고 걸을수도 없는 곳이였다. 진이는 머리속을 헤덤벼치던 까만것처럼 벽구석을 따라 목적없이 맴돌다가 출입문가에 떡 하고 멈춰섰다. 쇠창살웃부분이 딱 진이의 눈높이와 일치를 이루고있었다. 진이는 두손으로 쇠창살을 부여잡았다. 손바닥으로부터 찌르는듯 한기가 느껴졌다. 진이는 그 한기와 내기라도 해보려는듯 더욱 으스러지게 쇠창살을 끌어잡았다. 차츰 한기가 아니라 아픔 같은것이 느껴졌다. 진이는 손에서 힘을 빼면서 쓰러지듯 쇠창살에 이마를 박았다. 퉁 하고 소리를 내며 이마에서 짜릿한 아픔이 느껴져왔다. 진이는 잠간 이마를 쇠창살에 던지고있다가 천천히 머리를 쳐들었다. 쇠창살너머로 쇠창살만한 하늘이 보여왔다. 쇠창살밖의 까만 하늘에는 별 하나 보이지를 않았고 그 하늘아래의 도시도 까만 세상 그대로였다. 진이는 또 한번 으스스 몸을 떨었다. 연길의 하늘아래에도 이렇게 까만 곳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못하고있던 진이였다. 진이는 쇠창살밖의 까만 하늘과 집안의 자극적인 일광등빛이 지지리도 불협화음을 이룬다고 생각하면서 일광등 전원을 찾아 눈길을 돌렸다. 네 벽면을 다 살펴도 전원 같은것은 없었다. 밖에서 전원을 공제하게끔 설치된것 같았다. (나절로 일광등을 끌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자 진이는 웬지 울고싶어졌다. 진이는 손바닥을 쫙 펴서 얼굴을 감싸쥐고있다가 몸을 돌려 터벅터벅 걸상에가 앉았다. 지독하게 신경을 건드리던 까만것이 또다시 진이의 머리속에 날아들었다. 진이는 그 까만것을 피해 머리를 저으며 두눈을 꼭 감고 벽구석쪽으로 앉은걸음을 해갔다. 동쪽벽면과 남쪽벽면이 이어지는 구석에 몸을 끼우고 앉은 진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잦아들기라도 하려는듯 한껏 몸을 옹송그리며 두눈을 꽉 감아버렸다. 갑자기 “삐이익—” 하는 쇠붙이 긁히는 소리가 울리더니 “들어가!” 하는 날이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이는 본능적으로 번쩍 눈을 뜨며 걸상에서 튕겨 일어났다. 철문이 반쯤 열려져있었는데 문밖에는 접대 진이를 접수해서 안에 던져넣던 몸집이 갱핏한 젊은 경찰이 서있었다. 이어 뚱뚱한 체구에 상고머리를 한 진이또래의 남자애가 머리를 푹 숙이고 이리저리 몸을 탈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젊은 경찰은 철문을 “쾅!” 하고 소리나게 닫으면서 신경질적으로 안에 대고 소리쳤다. “말썽 부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 이어 “드르륵—” 하고 쇠가름대를 당겨넣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간새였다. 집안에서는 다시 숨박히는 정적이 흘렀다. 방금 들어온 남자애는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서서 황황한 눈길로 구석구석을 살피고있었다. 눈에서는 살기 같은것이 번뜩이고 퉁퉁한 두볼이 푸들거리고있었다. “씨팔!” 남자애는 갑자기 오른팔을 힘껏 뿌리치며 이사이로 한마디 내뱉었다. 허망 뿌리워져버린 오른팔은 공제를 잃은 자전거페달마냥 어깨를 의지해서 흔들흔들 춤을 췄다. (과연 오늘밤을 무사히 넘길수 있을가?) 진이는 자기를 향해 엉금엉금 기여오는 공포같은것을 의식하고있었다. “야, 담배 있어?”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터졌다. 진이는 걸상에서 용수철마냥 튕겨일어나며 남자애를 향해 떠듬거렸다. “어…없어.” “씨팔, 죽어두 생각못했잖아. 담배 주어넣을 새도 없이 당했다니까.” 생각밖으로 남자애의 목소리는 방금 “야, 담배 있어?” 하고 소리치던 때보다 많이 누구러들고있었다. 진이는 두려움이 찰랑이는 눈으로 남자애를 바라보면서 애매하게 머리만 끄덕거렸다. 남자애는 두손을 호주머니에 찌른채 진이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더니 머리를 픽 돌려 찍 하고 이사이로 침을 날리며 진이의 옆에 털썩 들어앉았다. 진이는 그러는 남자애를 피해 한뽐 옆으로 피해 앉으며 부러 머리를 들어 천정을 쳐다보았다. 얼기설기 잔금이 간 천정에 여기저기 박혀있는 파리똥 같은 까만것들이 기분 나쁘게 진이를 내려다보고있었다. “까만 점 하나, 까만 점 둘, 까만 점 셋…” 진이는 영문없이 머리를 쳐들고 파리똥 같은 까만것을 세는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게 생각되였다. 하지만 진이로서는 그 시각 그 놀음을 내놓고 더 이상 할것이 없다고 생각되였다. 그 놀음만이 뚱뚱한 남자애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무마시켜줄것 같아서였다. “까만 점 넷, 까만 점 다섯, 까만 점 여섯…” “야, 너 뭔 일루 들어왔니?” “저…” 진이는 남자애가 갑자기 던져오는 물음에 깜짝 놀라 셈세기를 멈추고 벌떡 일어서서 남자애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남자애의 굳어진 입가에 가는 웃음이 지나가고있었다. “너 여기 첨이지?” 남자애가 물어왔다. “그래.” 진이는 남자애를 향해 머리를 끄덕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럴줄 알았다. 하지만 괜찮아. 첫 한번이 두려운거야. 자주 드나드느라면 괜찮아질걸. 씨팔, 일찍 잠이나 자두자. 래일 구류소에 가면 너두 팔자가 달라질걸.” “구류소?” 진이가 다잡아 물었다. “그렇지, 구류소!, 너 사람을 찾았니?” “무슨 사람을?” “하하, 완전 초딩이네. 사람을 찾아 돈을 쓰구 나가지 않으면야 구류소는 떼놓은 당상이지. 너, 랠 면보(面包) 사다줄 사람이나 있니?” “뭐? 면보?” “이런, 너 랠 하루 그대로 굶어야겠구나. 여긴 이런곳이야. 일찍 잠이나 자두자.” 남자애는 “짝—” 하고 하품을 하더니 걸상에 쪼크리고 누웠다. “구류소?” 평소 너무나도 어렵사리 들어버리던 세글자가 세개의 큰 갈구리로 되여 진이의 가슴을 허볐다. “구류소!” 영화나 텔레비죤드라마에서 자주 보아 익숙한듯 하면서도 자기의 몸뚱아리가 그 안에 들어갈수 있다고는 생각조차 못해오던 진이였다. (정말 내가 그 안에 들어가는것일가?) 진이는 몰려오는 긴장때문에 손가락이 짜릿짜릿 설맥을 하는것 같았다. 진이는 왼손으로 오른손 손가락을 자근자근 주무르면서 연신 입술을 깜빨았다. “씨팔.” 남자애의 석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이는 잡생각을 멈추고 머리를 돌려 남자애를 바라보았다. 남자애는 꿈을 꾸는지 뭐라고 입을 씨물거리며 돌아눕더니 드르릉드릉 코를 골기 시작했다. 곤한듯 하— 벌린 입귀로 멀건 느침이 주르륵 흘러내리고있었다. (어쩜 이 애는 여기 와서까지 이렇게 코를 골고 느침까지 흘리며 편히 잘수가 있을가?) 진이는 자기의 옆에 쪼크리고 누워있는 이 남자애가 외계인이나 되는듯 신비하게 느껴졌다.진이는 앉은걸음으로 남자애를 향해 다가갔다.남자애는 그줄도 모르고 여전히 드르릉드르릉 요란하게 코를 골아대고있었다. 진이는 허리를 약간 굽히고 찬찬히 남자애를 내려다 보았다.입술에 엷은 보풀이 일어나서 여간만 안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모로 누운 왼쪽 눈귀에 맑은 물이 고여있었다.  (설마 눈물일가?) 진이는 그 맑은 물이 가슴에 맞혀서 그저 스쳐지날수 없었다. 진이는 허리를 좀더 굽혀 남자애의 왼쪽 눈귀에 눈길을 가져갔다. 눈귀에 맺힌 맑은 물은 남자애가 코를 고는 소리에 울려 무시로 떨어지려는듯 흔들리고있었다.진이는 무의식간에 손을 내밀어 남자애의 눈귀에 맺힌 맑은 물을 씻어주었다. 순간 남자애가 진이의 손길을 느꼈는지 몸을 흠칫하면서 오른손을 왼쪽 눈귀로 가져가더니 그 맵시로 몸을 번져눕다가 좁은 걸상에서 대책없이 퉁하고 떨어져내렸다.진이는 깜짝 놀라면서 걸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씨팔, 꿈이였잖아.” 남자애가 부시시 기여 일어나며 궁시렁 거렸다. 진이는 숨을 죽이고 그러는 남자애를 살펴보았다. 남자애는 손등으로 두눈을 쓱쓱 부비면서 걸상에 가 앉더니 “짜악—” 하고 달콤하게 하품을 하고는 쩝쩝 마른입을 다셨다. “씨팔, 에잇— 담배.” 남자애는 신경질적으로 걸상에서 일어서더니 황황해서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서북쪽 구석 변기가 놓여있는 쪽으로 다가가던 남자애는 변기 뒤켠에서 필터에 좀 남은 담배꽁초를 발견하고 보물이라도 발견한듯 소리쳤다. “아, 담배!” 남자애는 담배꽁초를 주어 코밑에 가져다대고 킁킁 소리내며 길게 담배냄새를 맡더니 호주머니를 들추기 시작했다. 웃옷호주머니로부터 바지호주머니 그리고 안에 입은 내의호주머니까지 들추던 남자애가 또 신경질적으로 소리질렀다. “씨팔, 라이타.” “어…없어.” 진이가 반사적으로 걸상에서 벌떡 일어서며 떠듬거렸다.남자애는 허둥대던 손길을 멈추고 진이쪽에 눈길을 박았다. “야, 너 아직 안 잦니?” “안 잦어” “왜? ” “잠이 안와서…” “하하, 완전 도련님이네. 이런데서는 못자겠다 이거니?” 남자애가 진이를 향해 벌씬 웃었다. 그러는 남자애를 향해 진이도 억지로 웃어보였다. 남자애는 담배꽁초를 코밑에 가져다 킁킁 거리더니 입으로 후후 하고 몇번 불고는 정성스럽게 호주머니에 넣으며 두덜거렸다. “씨팔, 라이타 챙길 새도 없이 당했잖아. 씨팔, 오늘은 재수에 옴이 붙었다니까. 근데 너 어째 잡혀왔다구?” 남자애가 두손을 탁탁 마주쳐 털면서 진이쪽으로 눈길을 박았다. “저…저…” 진이가 어떻게 말했으면 좋을지 몰라 꺽꺽 거리자 남자애가 또 남의 애기를 하듯 말꼬리를 풀어나갔다. “씨팔, 땐스(电视)라는게 뭐 볼게 있어야 보지. 재미없어서 잠이나 자자구 준비를 하고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거야. 난 그저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는구나 생각하면서 아무 근심도 없이 문을 따줬지. 씨팔, 들어온 놈들이 누군지 알어? 짭새들이야.” “뭐? 짭새?” “허허허, 경찰말이야, 아무나 잡으러 다니는 짭새, 경찰 알지?.” “그들이 왜?” “씨팔, 며칠전에 꺼멀(哥们)들하구 집에서 얼음을 했거든. 근데 어느 놈이 불어버린거야, 나 어느 놈이 불었다는걸 대충 알것 같거든. 천천히 결산하는거지 뭐.” “얼음이라면 마약이 아니니?” “그치, 근데 마약까지라고는 할게 없구. 그냥 흥분제로 노는거니까. 하지만 랠 아침 여기서 못나가면 내 인생도 쫑 치는거야. 강제제두숴(戒毒所)에 가서 애좀 태워야 할거니까. 석달이야. 말이 제두숴(戒毒所)지 로죠숴(老教所)와 같은거야. 씨팔.” “어떻게 하면 여기서 나갈수 있는데?” 진이가 기여들어가는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애가 별일 아니라는듯 대답했다. “아까 들어올 때 아버지에게 똰씬(短信)을 보냈거든. 하, 그 나그네가 그때까지 어느 안마방에 가 있는지 전화는 안받는다 이거야. 아침이나 되면 똰신을 들춰보겠지. 좋기는 한번 전화를 더 해보는건데. 저 짭새들이 핸드폰을 압수 한거야. 아, 너 핸드폰 있지?” 남자애가 진이쪽으로 다가섰다. “없어, 내것두 들어올 때 압수당했거든.” “저런, 너두 큰걸 범했구나. 참, 너 어째서 여길 들어왔다고 했지?” 남자애가 다시 진이에게 물어왔다. “저… 사실은 어떤 나쁜 년을 때려주었거든.” 남자애의 눈이 반짝 빛났다. “뭐? 어떤 나쁜 년을 때려주었다구? 허허허… 너 실련당했구나. 그치?” “아니, 실련은 무슨.” “그럼 어떤 나쁜 년인데? 말해봐. 어떤 년인데. 어떻게 조처해야할가를 내가 알려줄게. 말해봐.” 남자애가 진이의 앞에 다가서며 신나는듯 졸라댔다. (과연 어떻게 나쁘다고 표현하면 좋을가?) 진이는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생각하고싶지 않은 지난 토요일오전의 기분 나쁜 그림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참, 그날은 지독하게 재수없는 날이였어.” 진이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날 진이가 다니는 학원의 강사님이 특수사정이 있다면서 오전 강의를 일찍 끝낸다고 했다. 학원친구들은 어쩌다가 차려진 시간을 그저 보낼수 없다면서 모아산으로 산책을 가자고 합의를 했다. 날씨마저 화창한지라 진이도 모아산으로 가는데 동의를 했다. 그들은 기분나서 정상에 오르는 시합을 하기로 했다. 맨 꼴지로 오른 사람이 친구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내기로 합의를 보았다. “아싸—” 친구들은 모두 꼴지는 자기와 상관이 없는듯 기뻐서 야단이였다. 진이도 시원한 산바람을 한껏 페부로 삼키면서 모아산으로 오기를 참 잘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친구끼리 가족끼리 련인끼리 히히… 호호… 와하하하… 웃으며 소리치며 산으로 오르는 광경은 공부에 찌들렸던 마음을 한껏 달래주기에 충분한것 같았다. 진이는 기분 좋게 모아산 정상에 도착하여 료망대에 올랐다. 진이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천천히 눈길을 돌려 푸른 물결이 출러이는 평강벌이며 고층건물이 우후죽순처럼 올라서는 연길시며를 둘러보았다. 눈길이 료망대남쪽끝을 지나 비암산이 있는쪽으로 가는 순간 진이는 눈익은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버지?!”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모아산으로 올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진이였다. 진이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눈을 부비면서 다시 그 낯 익은 얼굴을 찍어 보았다. 손에 샘물병을 들고 어떤 녀인을 향해 빙그레 웃는 남자는 분명 아버지였다. 녀인은 팔이 짜른 까만적삼을 입고있었다. 지나치다싶게 긴 목을 감싸고 흘러내린 까만적삼은 녀인이 입은 흰 바지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진이의 눈을 심하게 자극하고있었다. (까만것? 흰것?) 순간 진이의 머리속에는 정체 모를 흑백의 그림들이 언뜰언뜰 스쳐지나갔다. 진이는 애써 정신을 집중하여 아버지옆에 서있는 그 녀인을 쏘아보았다. 황황 타는 진이의 눈길이 녀인의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 녀인은 힘겨운듯 두눈을 내리깔며 머리를 숙이는것이였다. 진이는 녀인을 향해 퉤 하고 건가래를 뱉어버리고는 격분으로 하여 두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진이는 아버지가 이 시간에 웬 녀인과 함께 모아산에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진이는 아버지를 향해 씨엉씨엉 걸어갔다. 아버지는 그 녀인이 벌써 진이의 눈길에 주눅이 들어있는줄도 모르고 여전히 벙글벙글 웃으면서 그 녀인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있었다. 진이는 그러는 아버지에게 날이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버지, 여기서 뭘 하고있는거예요?” 갑작스러운 진이의 출연에 아버지는 깜짝 놀라 멍해 있더니 얼굴을 붉히며 떠듬거렸다. “너… 어… 어떻게 이곳을” “아버지야 말로 어떻게 이곳에 왔어요? 지금 뭘 하고있는거예요?” “그래, 바람이나 쏘이려구…” “네, 아버지도 정녕 바람이 필요했어요?” “지…진이야.” “됐어요.” 진이는 하산길을 따라 허둥지둥 달려내려갔다. 등뒤에서 “진이야—진이야—” 하고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바람에 날려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진이를 쫓아오지 않고있었다. 진이는 눈물이 앞을 가리우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아침에 있었던 장면이 주마등처럼 진이의 눈앞을 스쳐지났다. 아버지는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셨다. 전기밥가마에 쌀을 씻어 안친 아버지는 화장실에 들어가 샤와를 하고 나오셨다. 그때에야 잠자리에서 일어난 진이는 방금 수건으로 닦아내서 함치르르한 머리칼을 거울앞에서 손으로 쓰다듬는 아버지를 이상한듯 바라보면서 물었다. “아침에 웬 샤와예요?” “허허허, 아침에 샤와를 하는것도 이상한 일인가? 그새 아버지가 너무 구질구질하게 살았나보다. 인젠 아버지도 몸을 가꿔야지.” “네.” 진이는 전에없이 들떠있는 아버지를 심드렁하게 바라보면서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우에 앉았다. 웃음이 번지르르 번진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니 저도몰래 호기심이 발동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사실 진이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평범할래야 더 평범할수 없는분이셨다. 시내 큰 공장에 출근하는 아버지는 그래도 한때는 잘나가던 월급쟁이였다. 공장 경기가 좋아서 달마다 어머니에게 로임봉투를 가져다 바치는 날이면 아버지는 허리를 쭉 펴고 어깨를 살구면서 가장으로서의 체면을 살려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진이가 열살나던 해부터 공장은 내리막을 쳐오더니 나중에는 일군을 절반이나 줄였다. 차간에서 기술자로 일하시던 아버지도 그번에 밀려서 후근일군으로 옮겨 앉게 되였다. 그 바람에 로임이 줄반이나 줄어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되자 집은 광풍을 만났듯 조용할 새가 없었다. “어떻게 살아요? 어떻게.” 어머니가 이렇게 불을 달면 도화선은 확확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서는 폭발하군 했다. “나더러 어쩌라는거요? 어쩌라냐구? 낸들 이렇게 살구싶어서 이렇게 사는줄 아오?” “남자라는 사람이, 세대주라는 사람이 무슨 방법이라도 돼야지, 공장에서 한달에 7백원을 준다고 그대로 앉아 7백원을 받으며 식구들을 굶겨죽여요?” “굶겨죽이다니? 남편이 벌어들이는 7백원이 적으면 7천원씩 벌어주는 나그네를 찾아 살게지. 누가 다리라도 잡는가?” “그게 새끼까지 싸놓은 나그네가 할 소린가요? 안깐의 기를 톡톡 채워주는 재간이면 어디 가서 은행이라도 털겠어요. 아이구, 내 팔자야.” “에잇, 새까만 세상, 다 망해버려라.” 아버지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면서 손에 잡히는대로 마구 뿌려던졌다. 이때면 진이는 당금 터질것 같은 집구석에 쪼크리고 앉아서 무시로 날아다니는 베개며 비자루를 피해 몸을 숨겨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쟁은 하루 또 하루를 이어갔다. 어머니는 고리대를 얻어서 외국로무수속을 한다고 헤덤비더니 진이가 열세살 나던 해에 끝내 성공을 하여 외국으로 나가셨다. 말이 거칠고 성격이 팩하여 아버지를 힘들게 하던 어머니였지만 남편을 커하고 자식을 끔찍해 하고 가족을 중히 여기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강한분이셨다. 어머니는 외국으로 가서 석달이 지나면서부터 집에 생활비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비록 한달에7백원을 받는 후군일군에 지나지 않았지만 누구처럼 나쁜 생활습관에 물젖은분이 아니셔서 어머니가 보내오는 생활비는 될수록 저축을 하면서 달마다 받는 월급으로 알뜰하게 생활을 조직해나갔다. 아버지의 참다운 행실은 한 시내에 사는 외가집식구들의 감동을 자아내기도 했다. 어머니는 가끔 전화가 와서는 외할머니가 전화에서 이야기를 하더라면서 아버지대한 고마운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어머니가 외국으로 가서 3년이 되던 해에 아버지는 어머니가 보내온 돈으로 진이네 학교옆에 아빠트 한채를 사서 장식까지하고 이사를 했다. 집들이를 할 무렵 어머니는 외국에서 날아와 진이와 아버지와 함께 그 기쁨을 만끽하셨다. 아빠트에서 한결 나아진 살림을 하면서 진이는 어렵게 찾아온 가정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한번 느낄수 있었다. “생활이 좋아지니 아버지도 몸을 가꿀 생각을 하셨나봐.” 그날 아침 진이는 이런 생각을 굴리면서 멋진 옷을 쪽 빼입고 집을 나서는 아버지를 눈바램해주었다. 그렇게 나간 아버지가 웬 낯모를 녀인과 함께 모아산으로 데이트를 온것이였다. 분명 찌는듯한 태양아래 나무그늘이 늘어진 오솔길을 걷고있었건만 진이는 불빛 한점 없는 까만 어둠속을 헤집는 기분이였다. 까만 나락속으로 들어가다가 어딘가에 쿵 떨어져내릴것만 같은 공포도 무시로 머리속을 엄습해오고있었다. 진이는 더는 걸음을 지탱하지 못하고 길섶을 찾아 앉았다. 그날저녁 진이는 밖에서 방황을 하다가 늦게야 집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벌써 진이가 좋아하는 갈비찜이며 갈치구이를 해놓고 진이를 기다리고있었다. 진이는 주방에서 달려나오는 아버지를 아는체도 하지않고 자기의 침실로 들어가 안으로 문을 잠가버렸다. “진이야, 나와서 밥을 먹어라. 밥 먹으면서 아버지의 말을 좀 들어보렴.” 아버지가 진이의 침실문을 살랑살랑 두드리며 애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진이는 아버지의 그 목소리마저 가면으로 똘돌 뭉쳐진것 같아서 이불을 머리우까지 올리쓰고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참이나 더 문을 두드리다가 지치셨는지 잠잠해졌다. 진이는 머리끝까지 올리썼던 이불을 내리우고 꼭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부잇한 달빛이 창문으로 비쳐들었다. 진이는 두눈을 슴뻑이며 흘러가는 둥근달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도 저 달을 보고있겠지? 어머니가 오늘 아버지의 행실을 보셨다면 얼마나 괴로와 하셨을가?) 생각이 자리를 틀수록 진이의 가슴은 칼로 에이는듯 아파났다. 진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손바닥으로 연신 넙쩍다리를 어루쓸며 입술을 감빨았다. (이렇게 맥을 놓고 앉아만 있을수 없어. 아버지하고 뭔가 결판을 내야 해. 아버지가 큰 일을 치려하고있는거야. 아버지를 이대로 놔둘수 없어.) 진이는 벌떡 일어나 아버지를 찾아서 객실로 나갔다. “아버지!” 진이는 객실에서 벌어지고있는 정경에 깜빡 놀라 선자리에 굳어졌다. 그때 아버지는 올방자를 틀고앉아 강술을 입에 쏟아넣고있었다. 술은 벌써 얼마나 마셨는지 밑굽에 좀 남아있을뿐이였다. 아버지는 진이의 불음소리에 흠칫 놀라면서 머리를 돌렸다. 술독이 오른 아버지의 얼굴은 벌겋게 충혈되여 있었고 푹 꺼져들어간 두눈은 무시로 슴뻑거리고있었다. 아버지를 보는 순간 진이는 가슴이 뭉클해나며 코끝이 시큰거렸다. “왜 이래요? 아버지!” “진이야, 내 아들아.” 아버지가 갑자기 꺼이꺼이 울음을 터치셨다. 아버지는 바싹 야윈 주먹으로 구들을 탁탁 내리치면서 넉두리를 했다. “진이야, 아버지를 리해해다구, 아버지가 누구땜에 버티는데. 진이야, 아버지는 절대 네 엄마에게 미안한 짓은 한적이 없단다. 이게 어떻게 지탱해가는 집인데. 진이야. 아버지를 리해해다오.” 진이는 괴로움에 떠는 아버지를 멍하니 지켜보다가 와락 아버지를 안아서 아버지의 침실에 들여다 눕혔다. 아버지는 기어이 진이와 속심의 말을 한다면서 다시 기여일어나셨다. “됐어요. 오늘은 그만해요.” 진이는 아버지를 향해 무겁게 한마디 하고는 문을 닫고 객실로 나와 앉았다. (아버지를 리해하라구? 과연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리해할수 있는데.) 사색은 삼거불처럼 엉켜지기만 했다. 진이는 쏘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머리를 쳐들었다. 디룽디룽 구슬을 단 갓으로 멋을 낸 무리등옆에 언제 묻었는지 파리똥 같은 까만 점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저것들이 언제부터 묻어있었을가?) 하얗게 바래져가는 머리속에서 파리똥 같은 까만것들이 유표하게 자리를 잡아가고있었다. “그래서 너의 아버지와 데이트를 하던 그년을 때려주었다는거니?” 남자애가 시물시물 웃으며 물었다. “그랬지. 아버지가 괴로와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녀와의 거래가 절대 아버지의 본심이 아니였음을 알았거든. 꼭 그 여우 같은 년이 아버지를 꼬시고있다고 단정을 한거야.” “그래서?” “그래서 기회를 타 아버지의 핸드폰을 몰래 훔쳐보았지. 난 어제야 끝내 그년이 사는 집을 알아냈거든. 오늘 기회를 살피다가 그년이 어디론가 다녀오는 길을 뒤쫓았어. 그러다가 으슥한 골목에서 손을 썼는데 그만 재수 없을라니 옆을 지나던 순라경찰들에게 잡힌거야.” “세상에!” 남자애가 자기 일이라도 되는듯 손바닥으로 무릎을 내리치며 아쉬워했다. “그래 인젠 어쩔려니?” 남자애가 진이의 옆에 다가 앉으며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진이는 맥 없이 “휴—” 하고 거친 숨을 톺아올리고는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근데 너 왜 그 녀자를 그렇게 미워하니?” 갑자기 남자애가 진이를 향해 엉뚱한 물음을 던졌다. 그 바람에 진이는 또다시 외계인을 바라보듯 남자애를 건너다보며 어이가 없다는듯 실소를 지었다. “너라면 그래 그년이 곱겠니?” “곱지는 않겠지만 그다지 미울것도 없을것 같은데” “너의 아버지를 꼬셔서 나쁘게 만드는데도 밉지 않을것 같다구?” “참!” 남자애는 제쪽에서 되려 어이없다는듯 진이를 바라보면서 절레절레 머리를 젓다가 입을 열었다. “너의 아버지, 뭐 어린애라도 되니? 그 나이에 뭐 꼬시고 꼬시우고가 있니? 녀자가 곁에 없는 나그네가 녀자를 밝히고 남자가 곁에 없는 녀자가 남자를 밝히는것은 인지상정이 아닌가?” “뭐? 인지상정?” 진이는 남자애의 말을 되네이며 눈길을 돌려 남자애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인지상정’과 같은 고급스러운 말을 쓰는 남자애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던것이다. 남자애는 그러는 진이의 심중을 읽었다는듯 픽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내말이 우스워? 허허허… 여기 와서 이러구 있지만 나도 한때는 학교에서 손꼽히는 “꼬마작가”였다구. 난 너의 아버지도 리해 할만하구 그 녀자도 리해할만 하거든. 서로 좋아서 못 살겠다는데 네가 뭐 사이에 끼여들것 까지 있니?” “그럼 외국에서 뼈빠지게 버는 우리 어머니는 어쩌라구?” “너의 어머니가 외국에서 어떻게 보내는지 너 알고있니? 물론 뼈빠지게 돈을 벌고있겠지. 허허허… 나의 경험을 얘기 해줄가?” “뭐? 경험?” “그래, 경험. 이면에서 난 너의 선배라구 할수 있지.” “선배라구?” “그래, 선배. 우리 어머니도 외국에 간지 5년철이야. 그새 우리 아버지는 바람이 아니라 폭풍이 난거구.” 남자애는 진이를 바라보며 시물시물 웃어주었다. 진이는 남자애의 그 웃음이 괜히 역겹게 느껴지면서도 또 “선배”요 “경험”이요 하는데는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진이는 남자애를 향하여 넌지시 물었다. “그렇다면 너도 나와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는 말이니?” “참 이거 말이 통하네. 그렇지. 나도 첨엔 너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거든. 하지만 아버지가 나의 말을 듣고 허파에 들어찬 바람을 뽑아버릴수 있었겠니? 몇번 아버지를 혼내워준다고 가출까지 했던적이 있었지. 하지만 내 따위가 어디가서 혼자 살수 있었겠니? 가지고 나간 돈을 며칠간에 다 불어먹은후이면 다시 그 집구석에 들어오는수 밖에 없었지? 아버지는 할수없이 집에 들어온 나를 하찮은 버러지 대하듯하면서 아버지처럼 안 살려려거든 공부를 잘해서 출세를 하라는거야.” “너의 아버진 어떤 사람인데?” “평범한 로동자였지. 급이 있는 간부들처럼 돈이라도 잘 벌면 왜 안깐을 외국에 돈벌러 내보내겠는가 하는거야, 아버지 말도 틀린것은 없지. 자기 안깐을 외국에 내돌리고싶은 나그네가 어데 있겠니?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니까 너나없이 안깐들을 외국으로 내돌리는거겠지?” 남자애는 험한 세상을 다 살아본 나그네처럼 “후—” 하고 긴 한숨을 내쉬고는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진이는 그러는 남자애에게 새록새록 호기심이 동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넌 가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가족?” 남자애가 진이를 향해 짤막하게 한마디 되묻고는 스르르 두눈을 감았다. 진지해지는 남자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진이는 괜한 물음을 물었나 하고 후회를 했다. 갑자기 남자애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두 볼을 푸들푸들 떨었다. “그날 오후 학교에서 소측험을 마치고 평소보다 훨씬 일찍 집에 돌아와보니 녀자의 신이 바닥에 보이는거야. 난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았을가 하고 제 좋은 생각을 했지. 나는 ‘누가 왔어요?’ 하고 소리치며 뛰여가 다짜고짜 아버지의 침실문을 밀어열었어. 맙시사. 아버지가 급히 침대를 내려서고 홀랑 벗은 한 녀인이 이불을 당겨다 가슴을 막는거야.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막 미칠것만 같았어. 나는 주방에 달려들어가 식칼을 뽑아다가 미친듯이 그년한테 달려들었지. 아버지가 나에게 덮쳐왔어. 하지만 눈에 달이 오르니 아무것도 두려운것이 없었어. 나는 아버지를 옆으로 동댕이치고는 끝내 식칼로 그년의 엉뎅이를 찔러버렸어. 이웃에서 발견하고 110에 신고를 한거야. 나는 그 길로 파출소에 끌려갔지.” 남자애는 말을 마치고 쩝쩝 입을 다셨다. 진이는 어쩜 남의 이야기를 하는듯 덤덤해있는 남자애에게 조르듯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찌됐니?” “흥, 나는 결국 행정구류 보름만에 풀려나왔거든. 내가 나오는던 날 아버지가 구류소문앞까지 마중을 왔었어. 풀이 죽어 나오는 나를 보고 아버지가 뭐라했는지 알아?” “뭐랬게?” “허허허… ‘얌마 너 이번에 엄마가 보낸 돈을 5천원이나 말아먹었다’ 이러는거야. 그래서 내가 ‘그 돈 아니면 내가 어떻게 되는건데요?’ 하고 물었지. 아버지가 사람을 통해 돈을 쓰지 않았더라면 내가 로동교양을 할뻔했다는거야. 하하… 돈, 참 좋은 물건이지. 그래 , 엄마가 외국에서 돈을 잘버는거 아니야? 그때로부터 난 무서운게 없어졌어. 그랬지. 돈만 있으면 무서운게 없는거야. 돈만 있으면 참 살기 좋은 세상인거지.” 남자애가 어깨를 으쓱하며 두팔을 쩍 벌려보였다. 진이는 도도하게 이야기를 엮어가는 남자애의 얼굴을 이윽토록 지켜보았다. 남자애는 자기의 이야기에 괜히 흥분되는듯 연신 손사래를 해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돈이 있으니 친구들도 구름처럼 모여드는거야. 처음 구류소에 갔을 때 아버지가 돈을 많이 넣어주었기에 나는 안에서 하나도 힘들게 살지 않았거든. 형님들이 구석구석 나를 돌보아준거야. 들어가서 사흘만에 나는 변기옆의 쌰푸(下铺)에서 형님들옆에 눕게 됐지. 돈이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 구류소에서 나와 며칠 안되자 안에서 친한 형님들이 나를 찾아온거야. 쳇, 나의 전성시대가 열린거지. 아래개방지에서 난 일거에 솟아올랐거든. 아래개방지에서 따팡(大胖)이라면 알만한 애들은 다 알아. 얼음두 형님들 덕분에 그 맛을 알게된거야. 챠— 얼음을 하고난후의 그 붕— 뜨는 기분, 뭐라구 표현해야 하나? 하하하… 나 인젠 여기 단골손님이 됐어. 이 파출소에 모르는 경찰이 없거든.” 남자애는 또다시 그 황홀경에 빠진듯 손벽을 짝짝 쳐댔다. 진이는 그러는 남자애를 지켜보다가 혼자말 비슷이 중얼거렸다. “엄마들이 그 돈을 벌자면 엄청 힘들텐데.” “흥, 힘이 들겠지” 남자애는 픽 랭소를 하며 진이를 힐끔 쳐다보더니 아래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 어머니 보구 빨리 돌아오라고 해봐. 돌아오는가. 힘들어도 외국생활이 더 좋은가보지 뭐. 가족? 난 안 믿어. 지금은 가족이 없는 세월이야. 우렁이속 같은 새까만 세상이거든.” “왜 그렇게만 생각하니? 아버지어머니들은 그래도 가슴에 자식들을 품고 살텐데.” “자식? 말 한마디 잘하고있네. 자식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 5년이 되도록 외국에서 떠돌게? 말이야 좋지. 자식 대학공부시키자고 외국에서 손이 발이되게 번다구? 그러는 사람이 내가 이 지경으로 돼도 왜 안돌아오는거지? 생각할게 뭐 있어? 돈, 돈이면 되는거야. 그래서 난 인젠 아버지의 녀자들을 미워 안해. 좋잖아. 외국에서 어머니가 소비돈을 보내주구 국내서는 그년들을 찾아가 아지미아지미 하고 살갑게 둬번 불러주면 또 돈이 생기는데. 아버지도 두눈을 찔끔 감구 못보는체 하는거야. 누이 좋고 매부 좋은거지 뭐. 이게 세상인거야. 새까매서 속은 들여다 볼수 없지만.” 남자애는 말을 마치고 입을 쩝쩝 다시며 두 손바닥을 탁탁 털어대더니 또 한번 하하하 웃었다. “어떤 놈이 쓴거야, ‘까만것, 속도 보이지 않는 세상’ 하하하… 그놈도 나만치나 답답한 놈이네. 하긴 제딴에 그놈의 속을 보아낼수 없을 테지.” 남자애는 진이가 걸상우에 오려놓은 글자를 가리키며 껄껄 웃어댔다. 진이는 그러는 남자애를 보면서 웬지 몹시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이는 벽에 등을 기대고 두눈을 스르르 감았다. 첫눈이 내린 전야처럼 하얀색으로 뒤덮인 벌판은 끝이 보이지 않을만치 허허 넓었다. 진이는 하아얀 벌판을 걸으면서도 자기가 까만 턴넬속을 허이허이 헤쳐간다고 생각하고있었다. 등에다 산더미 같은 짐을 지고있는듯해서 몹시 숨 가쁘고 힘들었다. 진이는 걷고 걷다가 잦아드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선자리에 주저 앉았다. 갑자기 발이 닿인 땅이 쿵 하고 꺼지면서 자기가 정처없이 아래로 내리 꼰지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이가 머리를 숙여보니 아래는 깊이가 보이지 않는 까만 동굴이였다. 진이는 뭔가를 잡으려는 욕망으로 손을 허우적 거렸다. 진이의 옆으로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도 어머니와 비슷한 사람도 스쳐가고 스쳐오고 했지만 누구 하나 진이를 잡아주지 못하고있었다. 진이는 그것이 너무도 안타까와 가슴이 터지는듯싶었다. 이때 어디선가 “진이야—진이야—” 하고 애처롭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이는 그 부름소리를 찾아 몸부림을 쳤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임자를 잡으려고 두손을 허우적 거리다가 어딘가에 머리를 부딛치며 두눈을 번쩍 떴다. “자식, 팔자가 좋네. 잠꼬대까지 다 하구.” 누군가 자기의 머리를 툭 내리치고있었다. 진이는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철문이 반쯤 열려져있었고 몸집이 갱핏한 젊은 경찰이 어느새 들어와 진이의 곁에 서있었다. 눈에 잠기가 가득찬 젊은 경찰이 석쉼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서진, 나가.” “…” 진이는 속에서 널장같은것이 쿵 하고 떨어져내렸다. (진짜 구류소로 가는것이 아닐가?) 진이는 지푸라기라도 잡고싶다는 말의 참뜻을 그 시각에야 진정 깨치는듯싶었다. 진이는 머리를 돌려 황급히 남자애를 찾았다. 남자애도 경찰의 소리에 놀라 잠을 깼는지 걸상에 웅크리고 앉아서 손등으로 눈을 부벼대고있었다. 진이는 구원이라도 청하는듯 남자애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남자애의 퀭하니 뜬 눈길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진이는 입술을 감빨며 남자애가 앉아있는 걸상우에 눈길을 던졌다. “까만것, 속도 보이지 않는 세상” 접대 이를 옥물고 오려놓은 글자가 아렴풋이 진이의 눈에 안겨들었다. 진이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 쇠창살밖으로 새까만 하늘을 바라보았다. “뭐해? 빨리 안나가구?” 그때 젊은 경찰이 꽥 하고 소리쳤다. 진이는 절망한듯 머리를 푹 숙이고 뚜벅뚜벅 철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컴컴한 복도를 따라 서너메더쯤 걸어가자 젊은 경찰이 직발실과 갈라 놓은 철문을 열었다. “삐이익—” 쇠붙이가 엇갈리는 소리가 청승스럽게 고요를 깨고있었다. 그 소리에 진이는 또 한번 으스스 몸을 떨면서 젊은 경찰을 따라 철문을 넘어 직발실에 들어섰다. “진이야.” 갑자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진이를 불렀다. 진이는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추고 목소리의 임자를 찾았다. 아버지가 컴퓨터를 올려놓은 책상옆에서 진이를 부르고있었다. 아버지의 옆에는 그 밉살스러운 녀인이 서서 오들오들 떨고있었다. 진이는 아버지를 부르려다 말고 눈길을 돌렸다. 아버지가 진이쪽으로 허둥지둥 다가왔다. “진야, 너 어쩜… 이게 무슨 꼴이냐?” 아버지가 진이의 손을 잡았다. 진이는 괜히 신경질적으로 아버지의 손을 힘껏 뿌리쳐버렸다. 아버지는 다시 진이의 팔을 부여잡으며 울음섞인 목소리로 떠듬거렸다. “미안하다. 지…진이야.” “왜 왔어요?” 진이는 차거운 목소리로 한마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아버지는 부들부들 몸을 떨고있었다. 진이는 아버지의 그 모습을 보고싶지 않아 아예 창문쪽으로 머리를 돌려버렸다. 아버지는 진이의 팔을 흔들면서 울음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진이야, 다 아버지를 탓해라. 다 아버지의 불찰이니까. 하지만 너 저 아지미에게 그러는건 아니였는데. 어서 저 아지미께 사과를 해라. 아지미두 널 용서해 줄거다. 아지미의 용서를 받구 우리 빨리 집으로 가자.” 아지미에게 용서를 빌라는 말에 진이는 머리를 돌려 그때까지도 책상옆에 요지부동으로 서있는 녀인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듯 하던 녀인의 눈길이 진이의 차디찬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 녀인이 흠칫 하더니 인차 진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 “너 진이가 맞구나. 어제밤 너에게 당한후 나는 집에 가서 많은 생각을 굴려보았단다. 남편을 병으로 먼저 보내구 오늘까지 나는 딸 하나를 키우면서 맹세코 남에게 미안한것 없이 살아왔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보고 ‘이 나쁜 년 죽여버리겠다.’고 이갈리게 나를 증오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던거지. 그러다가 접대 모아산에서 나에게 쏘던 너의 눈길이 떠오르더구나. 그래서 혹시나 하여 너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던거다. 너의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네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기에 함께 여기를 찾아온거구…” 진이는 눈 한번 깜빡 하지 않고 녀인의 말을 들어주었다. 어쩜 변명 같기도 한 말이였지만 진이로서는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를 똑똑히 들어보고싶었고 그 변명속에서 아버지의 청백을 가려내고싶었다. 녀인은 또박또박 아래 말을 이어나갔다. “나와 너의 아버지는 네가 생각하는것처럼 그런 사이가 아니란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한 마을에서 함께 자란 송아지친구거든. 서로 외롭게 사는 처지라 오래전부터 속탄 말도 해오구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기도 했단다.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것처럼 그런 남 부끄러운 사이는 아니란다. 내 딸의 인격을 걸고 맹세하지만 정말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란다.” 여기까지 말한 녀인은 갑자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쥐더니 지친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듯 선자리에 쪼크리고 앉으며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서진, 여기에 서명을 하구 아버지를 따라 집에 가서 잘 반성을 해봐. 세상 어떤 일이 있어도 길을 막고 사람을 때리는건 위법이야. 알겠어?” 젊은 경찰이 손가락으로 서류를 툭툭 치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이는 그러는 경찰 쪽으로 다가가 경찰이 가리키는 곳에 “서진”이라고 서명을 했다. 아버지가 쪼크리고 앉아 어깨를 들먹이는 녀인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녀인은 겨우 몸을 움직이며 손등으로 눈굽을 찍었다. “진…진이야, 집에 가자.” 아버지가 진이를 바라보며 떠듬거렸다. 진이는 터벅터벅 아버지의 뒤를 따라나갔다. 영원히 밝지 않을듯 까맣던 하늘귀가 서서히 들리며 불깃불깃한 잔광을 내뿜고있었다. 멀리서 새 아침이 열리는것 같았다. 까만것, 진이는 속으로 까만것은 모름지기 살아지게 되여있는 모양이라고 나름대로 생각을 굴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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