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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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의 혼
2009년 07월 03일 00시 38분  조회:3815  추천:64  작성자: 장경률
고향을 떠난지 만 30년이 난다. 그리니 인젠 타향이나 다름이 없다. 아버님 등 선친들에게 제를 올리려고 1년에 봄, 가을로 찾는것이 고작이다.

젊은이들과 경제사정에 밝은 사람들이 세거를 포기하고 상경하면서 인젠 황페해진 고향마을에는 텅 빈 집터와 주름진 얼굴들과 실그러져가는초가집만이 남아있을뿐이다. 그제날 40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바자굽너머로 손바꿈도 하고 어려움이 있으면 온 동네가 발벗고 나서던 훈훈한 인정은 메마른지 석삼년이다. 이미 아득한 옛말로 된것이다. 매번 고향집 뒤산에 모신 선친들에게 제를 올린후 음복을 하면서  이미 남의 보금자리가 된 고향집과 몇그루 남지 않은 살구나무를 내려다보는 그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다. 도회지의 빌딩숲속에 살면서도 문뜩문뜩 느껴지는 향수가 삭막감으로 변해서 서글프기만 하다.

45년전이다. 아버님께서 그제날 땅막집을 허물고 그 터에 새집을 지을 때 몇살 안되는 나도 진흙을 한삽 또 한삽 떠올려드리면서 올챙이힘이나마 보탰던 유정한 집이다. 그리고 우리 5남매가 나서 자란 고향집이다. 모처럼  둘러보면서 그제날의 추억에 눈시울이 젖어들면서 처연하기만 하다.그저 파수군처럼 지키고  선 몇그루 남지 않은 살구나무, 하냥 우리를 반겨주는 이 말없는 살구나무들만이 우리가 그 어느날 되찾아올것이라는 드팀없는 믿음으로 기다려주어서 처연한 감정을 상쇄한다. 이 살구나무들은 이제 한세기를 넘긴 로목들이다.

우리 조상은 울진장씨, 시조는 경상북도 울진군이다. 조선조때 고려복벽세력에 동조한 죄가 인정되여 함경도 부령땅에 정배와서  뻗어난 가문이다. 부령은 말그대로 척박하기로 세상에 둘도 없는 그런 고장이다. 엎친데 덮친다고 지난 세기초 우리 겨레들이 초유의 가뭄과 기아에 쫓겨 월강죄로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면서 두만강을 건널 때 우리 할아버지네도 남부녀대하고 이 고장에 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여기 천평벌을 등에 업은 개산툰의 자동골은 연변지역에서 우리 겨레들이 가장 일찍 정착한 고장의 하나이다. 그리고 전하는데 의하면 소재덕은 이 땅에 진출한 우리 민족이 가장 일찍 벼농사를 한 유서깊은 땅이다. 그때 조상님들이 이웃들과 함께 조선팔도에서 백살구산지로 유명한 부령에서 백살구가지를 가져다 개살구나무그루에 접목을 한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온것이란다. 그 혜택이랄가 우리 마을은 살구산지로 저 멀리에까지 소문이 높았다.

새하얗게 익는 백살구나 새빨갛게 익는 박죽살구는 그 씨앗이 고소하고 기름져서 씹으면 씹을수록 맛난다. 하지만 이 씨앗을 다시 그대로 심으면 시금털털한 개살구가 된다. 그 씨앗도 쓰디쓴 개살구씨가 된다. 이런 개살구나무가 우리 고향의 산과 들에는 무진장하게 많다. 그래서 살구꽃철이면 온 산야가 새하얗게 물들어 실로 장관이다. 이런 개살구나무밑둥을 잘라내고 백살구가지를 접해야 맛좋고 향좋은 백살구가 달린다. 이런 사물의 리치를 모르는데서 다 큰 살구나무를 썩둑 잘라내고 잔가지를 붙인후 천으로 동이는 광경을 보면서 독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하건만 삼년후부터 하늘높이 자란 살구나무에서 가지가 휘여지게 백살구가 달리는것을 보고서야 그 원리를 알게 되였다.

맛좋은 백살구는 개살구의 뿌리를 빌린다. 그러나 열매를 맺어서는 다시 씨앗으로 되돌려준다. 그래서 개살구로 다시 환원하는것이다. 이것도 대자연속에서 식물들이 은혜를 은혜로 서로 갚는 도리가 아닐가?! 한 차원이 높은 백살구가 다시 개살구로 돌아가는 그 원리는 어지간해서는 터득하기 힘든것만은 사실이다.

지난 세기 60년대초 우리 집에는 살구나무가 50여그루 있었다. 그 살구나무숲이 하도 무성하여 십리밖에서도 유표하게 눈에 뜨이였다. 당시 이 살구나무는 우리 식구들의 생계를 이어주는 주요한 버팀목이기도 하였다. 세상을 놀래우며 수천수만의 인명이 굶어서 주검이 된 그때 이 살구나무가 우리 형제들을 살리였다.

백살구는 새하얀 꽃을 피우며 웃음 짓고 박죽살구는 새빨간 꽃망울을 터치우면서 웃어주는 5월이다. 얼마후 뭇꽃이 분분히 지고나서 보름정도면 살구가 콩알만큼 된다. 그때부터 우리는 새콤새콤한 살구로 허기진 창자를 채웠다. 씨껍데기가 딴딴해질무렵까지 통채로 줄기차게 먹었다. 그래서 때론 혀바닥에 창이 생기면서 갈라터지기도 하였다. 하건만 배고프기보다는 나았던것이다. 7월 중순에 접어들어 새노랗고 진붉게 물들면서 익어가는데 그때면 물론 당연히 가장 훌륭한 먹거리였다. 이처럼 8월 초순이 되면 살구가 없어진다. 그러면 또 나무밑을 샅샅이 뒤지면서 살구씨를 주어서는 깨여먹었다. 그처럼 딴딴한 살구씨를 이발로 오도독하면서 깨여먹는 그 맛이 천하일미였다. 간혹 이발이 좋지 않아서 깨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놀림당하기가 일쑤였다.

어머님은 살구가 익는족족 한 광주리씩 따서는 개산툰장마당에 이고가서 팔았다. 돌아올 때면 흔히 우리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놀이감이 있기마련이다. 동구밖에 가 해가 넘어가고 어듬이 깃들 때까지 어머님을 기다리는 재미가 좋았다. 아버님도 우리 못지 않게 기다리셨다. 그것은 어머님의 장바구니에는 언제나 배갈 한병이 들어있기마련이였으니깐.

살구나무는 력사의 견증자이기도 하다. 100년전에 처음 두만강을 건너와서 옮겨지고 접해지면서 몇 세대를 지났다. 이런 살구나무이기에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개척정착사, 간고한 창업사가 담겨져있고 혼이 담겨져있는것이다. 아버님께서는 생전에 술만 드시면 항일투사들에 대한 얘기를 곧잘 하셨다. 우리 자동촌에는 1908년 연변지역에서 우리 민족이 가장 일찍 일떠세운 4대 학교의 하나인 정동학교가 꾸려졌었다. 연변지역에서 저 유명한 3.13항쟁에서 정동학교의 학생들은 4대 주력의 하나로 사책에 남는다. 40여년간에 거친 일제와의 판가리항쟁에서도 수많은 열혈지사들이 만고에 그 영용비장한 한페지를 남기였다. 주요한 항일유격구의 하나였던것이다.

아버님은 생전에 당시 자기가 열살 좌우였는데 항일투사들이 붙잡혀서 우리 집 살구나무에 매달리여 물매를 맞던 장면이 지금도 보는것 같다고 곧잘 말씀하셨다. 이처럼 비장한 력사가 깃든 우리 집 살구나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동네의 살구나무들이 훼멸적인 란벌을 당한것은 바로 10년문화혁명이 거의 끝나가는무렵인 1976년 봄이였다. “자산계급법권”을 척결하고 “자본주의꼬리”를 자른다고 한창 날뛸 때라 지금도 기억이 새롭다. 대대당지부는 “결의”를 채택하여 돈벌이만 추구하고 사상을 부식하는 “자본주의산물”인 살구나무를 세대당 5대만 남기고 양건담배 일명 토담배(우리 고장이 토담배고향으로도 명성이 높았음)는 200포기만 남기라는것이다.

당시 대대당지부 위원에 제4생산대 대장을 겸한 나로서는 공작대의 불호령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그처럼 정든 살구나무, 그 살구나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처럼 혹독한 란벌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리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질질 끌었더니 조직처분이란 “최후통첩”, 결국 더 맞서지 못하고 굴복했다.

“몇그루만 더 남기면 안되겠니?” 이미 스므그루 넘게 베여넘기고 열대 정도 남으니 아버지가 간청하였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은 애처롭다 못하여 락담한 상태다. 지금도 아버지의 그 애처롭던 눈길을 잊지 못한다. 새하얀 살구꽃이 흐드러진 나무를 썩둑썩둑 밑둥을 자르는 풍경에 아버지의 가슴에서는 정녕 피를 쏟고있었다. 심장을 도려내는 기분이였을것이다.

“안됩니다. 다섯대만 남기세요. 인차 검사를 다닙니다.” 나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리였다. 차마 아버지의  일그러진 얼굴을 정시할수 없었던것이다.

아버지에게는 맏아들의 장래가 가장 최우선인것이였다. 10년간 농촌에서 그처럼 애태우며 고생하고도 아직 추천을 받지 못하여 대학에 가지 못하는 그 아들을 보는 아버님의 심정인들 오죽하였으랴!!

이처럼 처절한 세례를 받으면서도 요행 살아남은 살구나무 몇그루가 고향집을 지키고 오늘도 오연히 서있다. 몇세대 남지 않은 고향마을 이웃집들에도 몇그루가 고작이다. 하지만 이 살구나무들의 령혼만이 살아서 오늘도 활짝 피고있다. 봄이면 먼저 꽃을 피우고 잇달아 새파란 잎으로 무성하다. 늦은 여름이면 풍만한 열매로 그 뒤끝에는 씨를 땅에 묻는다. 이후에도 세세년년 이렇게 대를 이어갈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당지의 개살구와 접목하고 정성들여 키우신 고향의 백살구나무, 이제 선친들은 고인이 되고 후손들이 도회지로, 연해 발달지역으로, 외국으로 떠나갔어도 외롭게 그 넋을 간직하고 고향집 뜨락을 굳건히 지켜서 내가 오늘도 감동하고있다.

(연변일보 2008-5-22 19: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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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김재일
날자:2009-07-04 14:59:29
장경률선생님의 글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74년도 애민1대'향리평'에서 개산툰 중학교를 다닐때 선생님을 청하여 습작지도를 받은 적 있어요.문화대혁명때 울 아버지는 '귀순분자'로 몰려 투쟁 받다가 사망하셨는데 어릴때 아버지와 함께 살구나무 심던 생각이 나서 끝내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습니다. 존경합니다 선생님, 좋은 글 너무 감사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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