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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문화의 재조명
2005년 05월 27일 00시 00분  조회:5579  추천:73  작성자: 연우포럼
‘…연’ 문화의 재조명

정인갑


우리 민족에게는 ‘…연(緣)’ 문화라는 정신자산(精神資産)이 있다. 이 ‘…연’은 ‘혈연(血緣)’ ‘학연(學緣)’ ‘지연(地緣)’…등의 ‘연’을 말한다. 물론 세계 어느 민족이나 연문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민족처럼 연문화에 애착심이 강한 민족은 세상에 둘도 없으리라고 본다.

우리 민족이 혈연을 얼마나 중시하는가? 필자가 목격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연변 모 조선족 J의 외숙부 리하천(가명)은 6•25전쟁 때 남하하여 가족과 갈라진지 수십 년이 된다. J는 외숙부를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였지만―이를테면 한국의 방송에 사람 찾기 광고를 내고 경찰청에 의뢰하는 등―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한번은 우연한 기회에 족보를 소장(所藏)하고 있는 한국 모 사회단체를 통해 안악리씨(安岳李氏―외숙부는 안악리씨임) 종친회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어 거기에 전화를 걸었다.

J 문: “안악리씨 종친회인가? 리하천의 이름이 기입돼 있는가?”
종친회 답: “기입돼 있다. 단 부산 사람이므로 부산지회에 알아 보라.”
J 문: “안악리씨 종친회 부산지회인가? 리하천의 집 전화를 알려 달라.”
부산지회 답: “리하천 집의 전화번호는 ***−****다.”
J 문: “리하천인가? 나는 리황금(가명)의 딸이다…. 외삼촌!”
이렇게 리산된지 40년이 넘는 외숙부를 반시간 안에 찾았다.

이만하면 우리 민족이 혈연 관례를 얼마나 중시하는가를 알만하다. 사람마다 다른 민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종친조직의 한 성원으로 존재한다. 중국인도 혈연관계를 꽤나 중시하지만 많은 대만 사람들이 대륙에 와 친척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는 현상과 선명한 대비가 된다. 몇 년 전 유네스코에서 한국의 종묘를 인류문화재로 결정지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혈연 외에도 학연, 지연…등 많은 연이 있지만 지면상의 제한으로 할애한다. 본 사이트에 진지하고도 생동하게 묘사된 우상렬의 문장 <혈연, 지연, 학연>과 <선배와 후배>를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연문화에 대해 우리는 재조명을 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짙은 정을 바탕으로 하는 연문화에 도취되고 락관만 할 것이 아니라 연문화의 부정적인 면에 대하여서도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

인류력사상 연문화는 본래 생존투쟁 중 자신의 나약한 힘에 대한 보충으로 등장하였다.
최초의 연문화는 혈연문화인데 인류의 최 저능시대―야만시대에 발생하였다. 씨족, 씨족련맹, 혈연군혼가정 등 사회구도의 체현이다. 그때 인류는 생존 능력이 너무나 나약하므로 자연계와 싸우건, 외부적대세력과 싸우건 혈연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다. 정치, 경제, 생활, 사회…모든 것의 기초가 혈연이었다.

인류가 한 단계 더 발전한 후 등장한 연문화는 천연(天緣) 문화이다. 인간이 자기를 초자연의 힘―하느님, 신령, 인과응보, 천국, 래세에 위탁하는 이데올로기, 즉 종교를 말한다. 천연문화는 인류문명시대의 초창기에 나타났으며 세계 3대종교―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를 대표로 한다.

인류는 철기(鐵器)의 사용으로부터 문명사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황하류역의 유연한 토지와 절호 기후의 혜택으로 철기보다 생산력이 퍽 락후한 청동기 시대에 문명사로 진입하였다. 말하자면 중국의 문명은 조생아이다. 그러므로 중국 유학문화의 핵심은 혈연문화이다. 하상주 3대의 구조는 종친구조(통치계급과 피통치 계급은 성씨별에 의해 구분됨)이고, 그후 2천여 년간의 최고 정권은 혈연에 의해 세습되였으며 지금도 부지기수의 고위층간부의 자녀가 고위층의 요직에 앉아 있다. 유학 문화권에 속하는 우리민족도 혈연문화가 주축일 것은 당연하다.

그 후 인류는 자체의 능력이 제고됨에 따라 점점 법제와 계약을 기초로 하는 사회로 발전하였다. 르네상스 때부터는 일대 도약을 이룩하였으며 400여 년이 지난 오늘 서방 선진국에서 법제와 계약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가 완전히 정착되였다. 혈연, 천연 등은 점점 정치 지위를 잃고 순수 문화나 순수 신앙으로 저하되였다.

총체적으로 혈연, 천연 등 연의 정치지위는 사회 발전 정도와 반비례된다. 대체로 선진국일수록 연이 맥을 못쓴다. 후진국일수록 연은 정치와 엉키여 있으며 심지어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특권을 보호하는 어용공구로 충당된다.

만약 우리 민족의 연문화가 친목을 나타내는 짙은 정의 로출 뿐이라면 그 이상 좋을 것 없으며 다른 민족의 흠모를 받을만 하다. 그러나 많이는 친목의 범위를 벗어나며 적지 않은 폐단, 부정과 부패를 초래하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는 혈연으로 인해 생기는 부정이 도처에 표출된다. 최고 권력의 세습, 한국 전임 두 대통령의 아들이 정치 비자금을 빙자하여 억수의 금품 횡령, 사람들은 득을 보려 국가 고위층 관리의 사돈에 팔촌에까지 접근, 웬만한 회사도 되도록이면 혈연이 가까운 사람을 요직에 앉힘…등이 혈연문화의 폐단이 아니란 말인가! 이런 현상은 선진국에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중등발전 국가에서도 보기 드물다.

한국의 지역갈등도 사실은 지연문화 팽창의 폐단이다. 영남, 호남의 대결만도 골치 아픈데 이젠 충청까지 끼어 들었다. 수도 이전이 부결된 후 그의 변태 안으로 많은 행정기관을 충청권으로 이전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한나라당 국회의원들도 찬성하였는데 어떻게 당략당론을 무시하며 찬성표를 던질 수 있느냐 하는 문책에 대한 변명은 간단했다: 반대했다가 앞으로 충청권의 표밭을 잃을까봐.

그토록 진득진득하고 두터운, 우리가 대단히 부러워하는 학연문화 (동창문화)도 예외가 아니다. 어느 기관이나 회사, 단체에 일단 모 학교의 동문이 집결되면 이내 세력화하여 동문이 아닌 자를 고립시키며 심지어 배척하고 타격한다.

중국에 와서 사업하는 어느 한국인으로부터 자기와 일가인 조선족 종친에게 돈을 맡겼다가 1만 달러를 떼웠다는 하소연을 들은바 있다. 또 필자는 북경에서 한국인과 조선족이 같이 사업하다가 나중에 서로 싸우며 갈라지는 사건에 자주 부딪친다. 알고 보면 공식 계약서 없이 ‘앞으로 섭섭치 않게 해 줄게’로 일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다.

‘물보다 피가 짙은 동포끼리니까’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고도로 산업화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법제의 계약문화에 비해 인정의 연문화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된다.

가열된 연문화는 친목 외로 팽창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로 인한 폐단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민족은 연문화에 대해 경계심을 높여야 한다. 심지어 연문화 자체를 좀 퇴색시킬 필요도 있을 듯 하다. 이 면에서 ‘선소인, 후군자(先小人, 後君子)’의 원칙을 지키는 한족이 정에 냉담한 약점은 있지만 산업화 사회 발전도상에서는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섰다는 감이 든다.

한국은 GDP가 1만 달러 넘으며 바야흐로 선진국으로 등급하고 있다. 그러나 혈연, 천연, 지연, 학연…등으로 생기는 연문화의 부정이 웬만한 개도국 이상으로 살벌하다. 연문화에 대해 확실히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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