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범 디자인’ 주택가 적용 큰 효과… 빈집털이 45%↓ 공원 범죄 38%↓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자 길 위로 파란 빛이 올라왔다. 지표면에 설치된 직경 10cm짜리 조명에서 나오는 빛이다. 서울 용산구 효창원로 86길에는 이런 조명이 2m 간격으로 300m에 걸쳐 이어져 있다. 밤에는 마치 비행기 착륙을 앞두고 일제히 표지등을 켠 공항 활주로를 연상케 한다.
이곳은 숙명여대 기숙사로 이어지는 길이라 늦은 시간까지 여학생들의 통행이 잦다. 그러나 후미진 뒷골목이라 취객들이 다니는 한밤중에 무서움을 호소하는 학생이 많았다. 올해 4월 용산경찰서는 용산구청과 함께 이곳에 ‘발광형 표지등’ 150개를 설치했다. 태양열을 통해 에너지를 모은 뒤 어두워지면 자동으로 작동되는 표지등이다.
개당 가격은 4만 원. 들인 돈은 전체 600만 원에 불과하지만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숙명여대 무용학과 이승은 씨(20·여)는 “파란 조명이 있으니 확실히 덜 무섭다”며 “골목길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지면서 나쁜 사람들이 와도 어떻게 행동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숙명여대 학생들의 귀갓길 분위기를 바꾼 것은 바로 ‘범죄예방디자인(CPTED·셉테드)’ 효과다. 셉테드는 범죄 예방에 디자인 개념을 반영한 것. 도시나 주거환경을 바꿔 사람들의 통행을 늘리는 등 폐쇄적 공간을 개방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범죄 감시 효과가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범죄율 감소로 이어진다. 미국 등 해외에서 시작됐는데 국내에서도 그 효과가 확인되고 있다.
원룸과 다세대주택이 밀집한 서울 동작구 성대로 14길의 별칭은 ‘거울길’. 9월 초 450m 거리에 있는 건물 30곳의 현관에 거울 같은 효과가 나는 ‘미러시트(반사필름)’가 부착됐다. 성인 여성의 평균 키를 감안해 160cm 정도 높이에 30cm 너비의 미러시트가 빠짐없이 붙었다. 귀가하는 여성을 뒤따라가 현관문을 열 때 덮치는 범죄를 막기 위해서다. 뒤에 있는 범죄자를 미리 발견해 신고나 대피의 시간을 벌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민 진성숙 씨(54·여)는 “이 골목에선 오토바이 날치기가 빈번했다”며 “효과는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미러시트를) 설치한 뒤 경찰이 주의 깊게 보는 지역이라는 이미지가 생겼다”고 했다.
빈집털이가 잦았던 서울 도봉구 주택가는 올해 3월부터 ‘도둑고양이’가 지키고 있다. 도둑고양이는 형광페인트의 일종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오직 자외선 검출기로만 확인할 수 있다. 도봉구 총 201개 지역 1938가구에 도둑고양이가 칠해져 있다. 절도범이 담벼락이나 가스배관을 타고 침입하다 옷이나 신체에 묻으면 3, 4개월간 지워지지 않는다. 가격도 국산 제품은 10가구 정도에 칠할 수 있는 분량(100mL)이 1만5000원으로 저렴한 편이다.
지금까지 도둑고양이가 칠해진 주택에서는 단 한 건의 빈집털이도 발생하지 않았다. 특히 ‘도둑고양이가 있다’는 현수막과 표지판을 붙이면서 주변 지역에서도 덩달아 빈집털이가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 3∼9월 도봉구에서 발생한 빈집털이는 233건이었으나 올해는 같은 기간 128건으로 45%나 줄었다.
1998년 만들어진 서울 강동구 올림픽로 천호공원은 높은 석축과 무성한 나뭇가지 때문에 밖에서는 안쪽 상황을 잘 보기 어려웠다. 밤마다 청소년들이 술판을 벌였고 가끔 도박판이 벌어져 경찰 출동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올해 4월 시야를 가로막았던 석축을 제거하고 나뭇가지도 말끔히 정리하면서 밖에서도 내부 상황을 볼 수 있게 됐다. 깔끔한 디자인의 벤치와 다양한 형태의 화분도 배치돼 가족들이 모여 사진을 찍을 정도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 결과 공원 내에서 폭행과 도박으로 적발된 건수가 지난해 1∼10월 대비 38.4% 감소했다.
경찰은 범죄예방대책에 셉테드 개념을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는 “효과가 입증된 방안을 확대 시행하기 위해 셉테드 표준설계안 마련을 검토 중”이라며 “지방자치단체, 관련 전문가와 함께 조만간 논의기구를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 셉테드(CPTED·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 ::
범 죄예방환경디자인의 줄인 말. 도시환경 설계를 통해 범죄를 사전에 방지하는 선진국형 범죄 예방 기법. 유리창이 깨진 집이 범죄의 표적이 된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을 기반으로 1990년대 미국 뉴욕 경찰이 범죄 단속에 적용해 성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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