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제목으로 당명 정하고, 드라마 주연처럼 대통령 됐다
대통령을 연기한 배우가 진짜 대통령이 됐습니다.
극 중 대통령, 진짜 대통령 됐다
출구 조사 결과 당선 유력…압도적 표차
드라마에서 교사 역 맡아 정부 부패 비판
부패 척결 약속했지만 “공약 불확실” 우려
러시아와 유럽 사이에 있는 인구 6000만의 국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일인데요.
이 영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코미디언 출신의 정치 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입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21일(현지시간) 키예프에서 출구 조사 결과에 환호하는 모습. [EPA=연합뉴스]
AFP통신 등은 21일(현지시간)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선 결선투표 출구 조사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1) 후보가 73.2%를 얻어 페트로 포로셴코(53) 현 대통령(25.3%)을 크게 앞섰다고 전했습니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신인이 현직 대통령을 3배 가까운 득표율 차이로 꺾으며 TV 드라마를 현실로 만든 겁니다.
승리가 확실시되자 젤렌스키 후보는 지지자들에게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포로셴코 현 대통령은 패배를 인정했고요. 옌스 스톨텐베르크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사무총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젤렌스키에게 잇따라 축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코미디언 출신의 41살 정치 신인은 어떻게 일국의 대통령이 됐을까요.
젤렌스키는 소비에트연방 시절인 1978년 우크라이나 중부에 위치한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에서 유대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인 올렉산드르 젤렌스키는 경제연구소에서 근무하는 교수였고, 어머니인 림마 젤렌스카는 공학자였죠.
엘리트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은 젤렌스키는 키예프 국립 경제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으로 선택했지만 법학자로 활동하진 않았습니다. 대신 어린 나이부터 연예계에서 두각을 나타냈죠.
우크라이나 유명 TV 드라마 '국민의 종' 포스터. 젤렌스키는 이 드라마에서 정치에 도전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고등학교 교사 역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 유튜브]
젤렌스키는 17살에 러시아 코미디 TV쇼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도 ‘러브 인 더 빅 시티’, ‘스바티’ 등 TV 코미디 시리즈 영화에서 주요 배역을 맡거나 프로듀서로 활약하며 명성을 얻었는데요. 그를 ‘국민 배우’로 만든 작품은 2015년부터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드라마 ‘국민의 종(從)’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젤렌스키는 부패한 정권을 비판하는 영상으로 SNS 스타가 된 고등학교 교사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극 중 대통령이 되죠.
젤렌스키가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점은 2013년입니다. 당시 우크라이나에서는 ‘유로마이단(Euromaidan) 운동’이 시작됐는데요. 유로마이단이란 당시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유럽연합(EU)과의 무역 협정을 무기한 연기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시민운동을 뜻합니다. 젤렌스키는 이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친서방파 안에서 입지를 구축했습니다.
2017년 젤렌스키는 자신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제목에서 이름을 딴 ‘국민의 종 당’을 창당했습니다. 당이 여론조사에서 기성 정당 못지않은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자 젤렌스키는 지난해 12월 이 정당 소속으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우크라이나 현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 포로셴코는 지난 21일 결선투표에서 정치 신인인 젤렌스키에게 큰 투표 차로 패했다. [AP=연합뉴스]
전문가들은 기성 정치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아웃사이더 정치 신인에게 절호의 기회가 됐다고 분석합니다. 뉴욕타임스(NYT)는 젤렌스키의 당선 요인에 대해 “(현 대통령은) 러시아와 5년간 전쟁을 벌였지만 유권자들은 그보다 부패·빈곤 등 국내 문제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젤렌스키는 드라마에서처럼 부패와 빈곤 척결을 공약을 내세웠고, 현 대통령에 비해서는 비교적 온건한 대(對)러시아 정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2014년 우크라이나에 친서방·친EU 정권이 들어서며 변화에 대한 갈망이 크게 일었으나, 포로셴코가 이에 부응하지 못하고 실정을 거듭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정권 교체 후 5년이 지났지만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유럽 대륙의 최빈국 중 하나입니다. 1만3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의 정부군과 친러 반군 간 교전은 진행형이고,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은 아직도 안갯속이죠.
일각에서는 '젤렌스키 돌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기성 정치에 신물 난 국민으로부터 반짝인기를 얻었을 뿐 탄탄한 지지 기반이 없다는 것이죠. 영국 BBC는 젤렌스키에게는 강력한 정치적 견해나 공약이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로이터 역시 “새 대통령의 경제 공약은 완전히 불확실하며 금융계의 우려는 여전하다”고 보도했습니다. 사실상 뚜렷한 공약이 없이 반사이익에 기대 승리했다는 '무공약 당선' 아니냐는 얘기죠.
이스라엘에 망명 중인 우크라이나 금융 재벌 이고르 콜로모이스키와 유착 관계라는 의혹도 그의 발목을 잡는 약점이죠.
그가 당선된다면 EU 가입과 부정부패 척결, 돈바스 전쟁 등 산적한 현안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당선이 확실시된 이후 "우릴 보라.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외친 그가 5년 후에도 박수를 받을 수 있을지,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출처: 중앙일보] 드라마 제목으로 당명 정하고, 드라마 주연처럼 대통령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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