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호림기획련재-10] 신라방, 절세의 명인을 낳은 옛 명당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3월4일 10시51분    조회:215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흑룡강신문=하얼빈) 솔직히 행선지에 가면서 제일 먼저 눈앞에 떠올린 건 원숭이였다. 자칫 '붉은 원숭이의 해' 즉 2016년 병신년(丙申年)에 시작한 첫 답사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행선지에는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손오공(孫悟空)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손오공은 신괴(神怪) 소설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화과산(花果山)의 돌에서 태어난 원숭이다. 손오공은 신통력을 얻어 천상계에 올라가 횡포를 부리다가 석가여래에게 진압된다. 손오공은 삼장법사에게 구원된 후 그의 시종으로 되며 천신만고를 겪으며 인도에 가서 경전을 가져온다.

 

옛 도시 회안(淮安)은 바로 이 유명한 손오공을 만든 명(明)나라 때의 소설가 오승은(吳承恩, 1501~1582)의 고향이다.

 


신라방 부근에 있는 오승은기념관

중국은 옛날 명산과 대천으로 행정구역을 나누었다. 회하(淮河)는 사독(四瀆) 즉 강하회제(江河淮齊)의 하나로 당연히 지역을 나누는 표식으로 되었다. 오제(五帝) 시대 천하를 구주(九州)로 획분, 회하의 북쪽은 서주(徐州)였고 회하의 남쪽은 양주(揚州)였다. 회안은 회하의 남안에 위치하였으니 양주의 관할 지역으로 되었다.

서주에서 완행 기차로 회안까지 이르는 데는 2시간 남짓이 걸렸다. 그래도 200여㎞의 이 길에 두발로 쌓았을 선민(先民)들의 노고에 비하면 큰 호사를 누린 셈이다.

1월 초의 회안은 뭔가 화를 내듯 찌뿌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흐릿한 하늘에서 찬 빗방울이 찔끔찔끔 땅에 떨어뜨리고 있었다.

시가지의 동남쪽 변두리에 위치한 '오승은 고향집'은 싸늘한 날씨 때문인지 다소 한산했다. 그러나 세계 첫 3D 방송드라마 '오승은과 서유기'의 촬영 세트장이고 부지면적만 1만 5천 제곱미터나 되는 등 40위안이라는 티켓 값이 별로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5백 년 전의 '고향집'에서 오승은과 더불어 신과 인간, 요귀가 함께 등장하는 '서유기'의 세상에 잠시 취할 수 있었다.

'고향집'을 나오다가 안내 도우미에게 '신라방' 유적지가 여기서 얼마를 더 가야 되는가 하고 물었다.

"신라방이 뭐예요? 우리 회안에 그런 게 있어요?"

"혹시?" 해서 거듭 물었지만 똑 같은 물음이 메아리처럼 돌아오고 있었다. 온라인 지도로 미리 찾았던 지상 표지물을 물었더니 그곳은 여기서 고작 3리 상거한다고 말한다.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유기》가 신괴 소설이라면 '신라방'은 누군가 지어낸 허구였던가.

기실 회안이라고 하면 거개 《서유기》나 '신라방'이 아닌 옛 지명 '회음(淮陰)'을 머리에 떠올린다. 회음은 회안의 원명인데, 한(漢)나라 때 한신(韓信)을 '회음후(淮陰侯)'로 봉하면서 더구나 유명세를 탔다. 한신은 이 회음의 태생으로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데 제일 큰 공헌을 한 대장군이다.

회안은 2001년에야 지은 이름이며, 기차도 2005년에야 비로소 통했다.

그럴지라도 회안시는 옛날부터 해내외의 교역으로 이름난 고장이었다. 그때 그 시절 회하는 회안의 동쪽에서 바다로 흘러들었으며, 이로 하여 회안은 대륙 연해의 중요한 항구도시로 되고 있었다.

당나라는 대외 정책에서 아주 개방적이었다. 많은 외국인들이 당나라에서 버젓하게 벼슬을 했다. 바닷길과 육로를 따라 대륙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또 무역으로 부를 쌓았고 대륙의 많은 지방에 그들의 거주구인 '번방(蕃坊)'을 만들었다. 신라방은 그때 대륙 연해에 진출한 신라인들이 한데 집중하여 거주한 '번방'이었다.

지금의 말을 빈다면 '신라방'은 신라 교민의 집거구 즉 '코리아타운'이었다.

'오승은 고향집'을 나서자마자 삼륜차를 불렀다. 삼륜차는 서민들이 단거리의 교통수단으로 즐겨 이용하는 무허가 '택시'이다. 삼륜차 기사라면 회안의 골목골목을 속속들이 꿰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기사 역시 '신라방' 유적지를 어느 별나라에 있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유적지 부근에 있다고 하는 유명 호텔의 이름을 댔더니 그제야 신나게 차를 달린다. 호텔에 이르러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신라방 유적지를 물었다. 나중에 신라방 유적지의 선색을 알려준 사람은 외지의 '농민공'이었다. 그는 호텔 서남쪽에 있는 네거리에서 몇몇이 함께 공사현장의 경비를 서고 있었다.


훼손된 신라방유적지, 쓰러진 거석에 신라방유적지라는 글씨를
가까스로 볼 수 있다.

"저기에 엎어진 돌이 기념비 같던데요. '신라방'인가 뭔가 하는 글씨가 있지요."

과연 공사현장의 흙무지에 네모나게 일부러 깎은 거석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궤도전차의 역에 지하연결통로를 만들면서 살풍경이 되고 있었다. 와중에 '신라방 유적지'라고 음각한 거석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글씨가 있는 쪽의 그 바위 면이 땅에 머리를 박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무엇이든지 신라방은 결국 세상에 남긴 이 유일한 흔적마저 잃고 있었다.

당(唐)나라 때 신라방은 초주(楚州)의 두 번째로 가라고 하면 서러울 명물이었다. 초주는 회안의 또 다른 하나의 옛 지명으로, 일찍 수(隋)나라 때 설치한 주의 이름이다. 초주 관리기구는 지금의 회안시에 위치한다. 초주의 신라방은 자체적인 관리기구인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가 설치되어 있는 등 상당한 자치권을 갖고 있었다. 신라소에는 관리자인 압어(押御) 혹은 총관이 있었고 또 전문직의 통역사가 있었다. 이런 관리나 직원은 모두 신라인 자체로 충당되고 있었다.

초주의 신라인들은 주로 조선업과 항해업에 종사했다. 신라인들이 있던 초주 항구는 해주(海州, 지금의 연운항), 명주(明州, 지금의 녕파), 천주(泉州), 광주(廣州)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명한 항구로 되고 있었다. 천주, 광주의 행상(客商)들은 지어 초주에 와서 선박을 주문하거나 임대했다.

운하와 해운 경제가 발달한 초주에는 천개의 돛이 서로 이어졌고 사시장철 드나드는 배들이 그칠 새 없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초주를 "회하 동남쪽의 으뜸가는 주"라고 칭했다.

뒷이야기이지만, 일본의 구법승 엔닌(圓仁, 794~864)은 귀국할 때 초주 신라방에서 한꺼번에 60명의 뱃사람을 차출하기도 했다. 신라방에서 살고 있는 신라인이 최소 수천 명의 규모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주의 신라방은 대륙 연해의 크고 작은 여러 신라방과 신라촌에 살고 있는 신라인들의 사회중심으로 되고 있었다. 신라인들도 초주를 중심으로 연해 남북의 교주(膠州, 산동 동부 위치), 해주 등 지역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기실 신라방이 위치하고 있는 북진언(北辰堰)이 초주 교통로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북진은 곧바로 북극성이니 북진언은 한구(邗溝)의 북쪽 끝머리의 언제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구는 2,500년 전의 춘추(春秋) 시대에 만든 옛 운하이다. 노(魯)나라 애공(哀公) 9년(B.C.486), 오吳나라는 월(越)나라를 싸워서 이긴 후 북진하여 중원을 제패하려고 했다. 이때 군수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남쪽의 양주부터 시작되는 운하를 만들고 회하와 연결했다. 한구의 강바닥이 회하보다 높았기 때문에 한구의 물이 죄다 회하로 빠질 것을 염두에 두어 한구의 북쪽 끝머리에 봇둑처럼 언제를 쌓았으니 그게 바로 북진언으로 된다. 북진언은 또 운하의 제일 북쪽 어구라는 의미의 말구(末口)로 불린다. 종국적으로 세상에 남은 지명은 이 말구이다. 한구는 그 후 약 1,500년 동안 여러 번이나 물길을 바꿨지만 회하에 흘러드는 말구의 위치에는 변함이 없었다.


옛 말구에 세워진 기념물

말구는 회하에 흘러드는 운하의 입구로 그 전략적인 위치가 두드러진다. 회하는 예로부터 대륙에서 바다로 통하는 중요한 통로이었다. 동쪽으로 이웃한 신라와 고구려, 백제는 물론 일본 등 나라는 많은 경우 회하를 대륙 내왕의 교통로로 삼고 있었다.

동진(東晋) 융화(隆和) 2년(363), 이 고장에 산양성(山陽城)을 구축하는데 이 산양성이 바로 최초의 회안 옛성이다. 산양성은 운하의 물길이 입해구 부근에서 U자 모양을 이루는 산양만(山陽灣)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산양성은 북진언 즉 말구의 남쪽으로 5리 정도 상거한다. 그 무렵 말구가 움푹한 지대였기 때문에 남쪽의 지세 높은 곳에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 때 말구의 저지대는 더는 성 밖의 버려진 땅이 아니었다. 초주가 대륙 연해 일대의 교통과 정치, 상업무역 중심의 항구도시로 되면서 '노란 자위'로 거듭났다. 말구의 양쪽에는 인가가 오밀조밀하게 들어앉았다. 그 마을 이름이 바로 천년의 역사가 묻어나는 '신라방'이었다.

대륙 연해 일대의 신라방, 신라촌은 마치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이어지고 있었다. 여러 신라 마을의 수집된 정보는 초주의 신라방으로 집결, 다시 여러 신라마을로 전파되고 있었다. 승려 엔닌이 초주에 이르자 미구에 남쪽의 천태(天台)와 양주의 서한이 당도했고 또 방문자들이 뒤따랐다고 한다. 반도의 삼국 구법승들도 초주를 경유한 경우가 적지 않았겠지만, 엔닌처럼 이름자를 남긴 승려는 별로 없다. 엔닌은 여타의 승려와는 달리 그의 여행 과정을 문자기록으로 명백하게 남겼기 때문이다. 엔닌은 여행기 《대당구법순례행기(大唐求法巡禮行記)》에서 또 그가 시초에 초주의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렀다가 용흥사(龍興寺)로 자리를 옮기며 그 후 모두 신라방에 행장을 풀었다고 기록한다. 신라방의 신라인들이 나서서 그를 위해 잡다한 일을 교섭, 해결했다.

초주 신라방을 세 번이나 경유한 엔닌의 뒤에는 그렇게 역사(力士)처럼 신라인들이 서있었던 것이다.

개원사와 용흥사는 말구 옛터에서 남쪽으로 5, 6리 더 내려가야 한다. 두 사찰은 모두 전란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다. 용흥사의 경우 한때는 '동방 제일의 사찰'이라고 불렸지만, 현재로선 탑 하나만 외롭게 남아있다.

에피소드가 있다. 이 용흥사는 《서유기》에도 등장한다. 명나라 때의 잡기(雜記) 《호해수기(湖海搜奇)》는 정덕(正德) 6년(1511) 용흥사에 불이 일어나 사찰이 다 타버렸으며 선당(禪堂)이 홀로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서유기》의 제16회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관음원의 장로가 당승의 보배 가사에 욕심을 들여 당승이 머물고 있는 선당에 불을 질렀는데, 손오공이 '불을 피하는 덮개'로 당승을 덮었다는 것이다. 사찰은 거의 모두 불에 타버렸으나 선당만이 불바다에 그대로 남는다. 정덕 6년은 오승은의 어린 시절이니 용흥사와 이웃한 동네에서 살던 그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은래기념관 앞에서 만난 삼륜차, 한가한 모습이다.

용흥사의 탑 아래에는 정오의 짧은 그림자가 누워있었다. 그러나 신라방과 신라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중국의 국보급 옛 인물인 한신, 오승은처럼 또 하나의 명인이 부근에 그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탑 북쪽의 길가에 있는 전 공화국 총리 주은래(周恩來)의 옛 고향집이었다. 이 건물은 부근의 '주은래기념관'과 더불어 '주은래고향 관광풍경구'를 이루고 있었다.

"신라방이 명당인가 보네요. 절세의 명인을 셋이나 배출했으니…"

그런데 이 말을 하고나니 오히려 이름 못할 서운함이 금세 파도처럼 밀려왔다. 정작 회안 역사의 일부를 화려하게 장식한 신라인은 쓰러진 비석에 옛 지명만 어설프게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옛 사찰 용흥사에 잔존한 탑.

홀연히 대로를 지나는 궤도전차가 마치 바닷길을 떠나는 한척의 돛배처럼 눈앞에 환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돛배는 그렇게 천 년 전 기억의 편린을 싣고 역사의 뒤안길로 총망하게 멀어지고 있는 듯 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72
  • 6월 28일 오전, 환인만족자치현 고수산문화관광산업단지프로젝트 계약체결식이 현정부 상무회의실에서 진행됐다. 계약에 따라 단지내에 대형 고구려문화체험전시관을 건설하게 된다.   체결식에서 료녕오녀산관광개발그룹 리사장 호문과 안휘성황산포가원개발유한회사 리사장 리견이 고수산문화관광산업단지프로젝트 ...
  • 2018-07-05
  • 지난 6월 23일, 중국공산당 창건 97주년을 맞으며 류하현조선족학교 당지부에서는 ‘초심을 잃지 말고 당의 령혼을 주조하자(不忘初心 铸造党魂)’는 취지하에 ‘항일혁명의 길을 다시 걷기’활동을 진행했다. 류하를 포함한 주변의 지역들은 항일전쟁시기에 양정우, 리홍광, 량세봉 등 항일 명장...
  • 2018-06-28
  • 화룡시 서성진 와룡촌 어랑툰에 위치한 13용사기념비앞에서 [항일뻐스 19]  중국조선족항일가요합창단의 항일유적지 답사는 계속 되였다. 화룡시로혁명근거지답사길에 오른 합창단 단원들은 달리는 뻐스에서 화룡시로혁명근거지건설촉진회 부회장 후진청(70세, 侯振清)선생이 들려주는 로혁명근거지건설에 관한 이야기...
  • 2018-06-05
  •       6월 1일 필자는 동북륙군강무당 옛터전렬관을 탐방했다.   단층집으로 된 전렬관 건물에 들어서면 강무당 평면도와 연혁이 전시되여 있다.   동북륙군강무당은 1907년 당시 동북 총독을 임하고 있던 서세창이 청정부의 명을 받고 창립한 것이다. 1919년 장작림은 청 말기에 정지됐던 '...
  • 2018-06-02
  • [항일뻐스18 5월 27일, 중국조선족항일가요합창단에서는 동북의 첫 쏘베트정부 설립 88돐을 맞으며 화룡시 투도진 약수동 상촌의 막바지에 있는 100년 버드나무가로 찾아갔다. 이곳이 바로 항일혁명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동북에서 제일 처음으로 세워진 쏘베트정부이다. 이날 따라 봄비가 장줄기를 이루며 ...
  • 2018-05-31
  •   1 1934년 10월, 밀산항일유격대와 항일구국유격군은 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개편되였다. 그때 제4군 소속 안순복 등 4군의 조선족동지들과 가족들은 밀산현 서대림자(西大林子)에 있다가 그곳에서 80리 떨어진 양강구(杨岗沟)에 자리잡고있었다. 그해 겨울에 안순복, 허현숙(许贤淑), 리동숙, 리범숙 등 녀전사들...
  • 2018-05-14
  • 장백산기슭에 자리잡은 길림성 무송현(抚松县) 선교진(仙桥镇)내에 “동천”(氡泉, 철도역 명이기도 함.)이라는 유명한 온천구가 있어 국내외 유람객들의 발길이 닿은지도 수십년을 넘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또 “전우샘”(战友泉) 이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항일전쟁시기 중국의 장울화렬사와...
  • 2018-04-30
  • 26일, 주로혁명근거지건설촉진회는 안도에서 2기 6차 리사회를 소집했다. 주정부 부주장 풍도는 연설에서 지난해 주로혁명근거지건설촉진회의 사업성과를 충분히 긍정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로혁명근거지건설촉진회는 우세를 발휘하고 연변로혁명근거지에 대한 선전을 틀어쥐여 연변의 경제발전에 동력을 부여하...
  • 2018-04-27
  •   본사소식 4월 20일, 동북항일전쟁사 연구일군들이 항일민족영웅 리진룡 장군 순국 100주년을 맞으며 관전만족자치현 청산구 은광자촌에 위치한 리진룡장군기념원을 참배했다.       추모식에는 장홍군 료녕성사회과학원 항일전쟁문화연구쎈터 주임, 전정혁 료동항일영렬연구실 주임,  최용학 한...
  • 2018-04-23
  •   19일 력사 전문가들은 심양 ‘9.18’력사박물관에서 '항일민족영웅 리진룡장군과 우씨 부인 순국 100주년 기념 학술좌담회"를 갖고 항일민족영웅 리진룡 장군과 우씨부인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행사에는 장홍군 료녕성사회과학원 항일전쟁문화연구쎈터 주임, 범려홍 9.18력사박물관 ...
  • 2018-04-19
  • 사진출처 인터넷 고고계 ‘오스카’로 불리는 ‘2017년 전국 10대 고고 새 발견’ 최종 평의회가 10일 북경에서 펼쳐졌다. 초심을 통과한 26개 고고 종목 가운데서 안도 보마성 금나라 시기 장백산 신묘 유적 등 10개 종목이 최종 확정됐다. 입선된 10개 종목으로는 신강 지무나이 통천동 유적, 산동 ...
  • 2018-04-16
  • 석경의 기원, 장백산의 력사문화연구에 중요한 실물증거 제공 4월 8일, 전문가들의 감정을 거쳐 길림성 장백산 서남비탈 만강에서 발견한 5점의 천공석기는 신석기시기의 ‘장백산석경(石磬)’임이 확인되였고 돈화시 강자유적지(岗子遗址)에서 발견한 석경도 전문가들로부터 확인되였다. 이는 동북 장백산...
  • 2018-04-11
  • [인민망 한국어판 4월 8일] 두 달 전, 미국 필라델피아 프랭클린 과학박물관에 전시된 병마용(兵馬俑)의 손가락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손가락을 훔친 남성과 박물관 측의 실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불만을 야기했다. 현재 병마용 손가락을 훔친 남성은 체포 후 법정 심판...
  • 2018-04-08
  •   주변 록화대에 연변애청자협회 회원들이 하얀 꽃송이를 매달고 있다. 청명절을 맞으며 연길시 의란진 발전촌에 자리한 에는 선렬들을 기리는 하얀 꽃송이들이 피였다. 4일에는 연변애청자협회 40명 회원대표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이곳을 찾아 발전촌 로인협회 대표들과 함께 당년의 연길구 당위서기였던 ...
  • 2018-04-05
  •   남경대학살 생존자 가족 영상 집중적으로 전시   4월 3일, 참관자가 중국침략 일본군 남경대학살 조난동포기념관에서 영상전람을 관람하고 있다. 이날 이 중국침략 일본군 남경대학살 조난동포기념관에서 열렸는데 30여가구의 생존자 가족 기념사진, 일부 생존자의 개인초상사진 등을 전시했다(신화사).
  • 2018-04-04
  •   3월 31일, 2018 무술년 칭밍(淸明, 청명) 사마천(司馬遷) 민간 제사 행사가 사마천의 고향, 산시(陕西, 섬서) 한청(韓城)시에서 열려 국내외 학자와 사마천 후손을 비롯한 현지 민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사마천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본 행사는 ‘쉬춘(徐村, 서촌) 사마천 제사’에서 기원한다. &lsqu...
  • 2018-04-03
  • -청명절을 맞아 장춘시 조선족 160여명 화피창렬사릉원서 추모 행사 진행 4월 2일 오후, 청명을 맞아 장춘조선족부녀협회, 장춘시록원구조선족소학교, 장춘시조선족로인협회, 장춘시조선족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등 장춘시 각계 조선족 30여명과 장춘시조선족중학교의 부분적 학생과 교사 130여명이 길림시 화피창...
  • 2018-04-03
  • 中당국 삼국지 조조 진짜 무덤 최종확인…진위논란은 여전 [앵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무덤이 확인됐습니다.  죽기 전 자기 무덤이 도굴되는 것을 막기 위해 72개의 가묘를 만들라는 유언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무덤 위치와 관련해 다양한 학설이 난무했는데 이번에 논란이 끝날지 주목됩니...
  • 2018-03-26
  •   “3.13”반일운동 99주년이 되는 3월 13일, 룡정시3.13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한락연연구회, 룡정•윤동주연구회, 룡정시통신협회가 공동 주관하는 추모활동이 룡정시 지신진 합성리 동쪽 언덕에 자리잡은 “3.13반일의사릉”에서 개최된다. 룡정시“3•13”기념사업회 리광...
  • 2018-03-12
  • 26개 대상중 21위 2017년 전국 10대 고고 새 발견 초심 결과가 지난달 26일에 발표됐다. 지난해 고고학 분야의 성과가 뚜렷하고 경쟁이 심한 가운데 안도 보마성에서 발굴된 금대 황가 장백산 신묘 유적이 21위를 차지했다. 보마성 유적은 안도현 이도백하진 서북쪽 4킬로메터 되는 구릉지대의 남쪽비탈에 위치해 있다. 지...
  • 2018-03-09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9 10 1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