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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림기획련재-10] 신라방, 절세의 명인을 낳은 옛 명당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3월4일 10시51분    조회: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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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신문=하얼빈) 솔직히 행선지에 가면서 제일 먼저 눈앞에 떠올린 건 원숭이였다. 자칫 '붉은 원숭이의 해' 즉 2016년 병신년(丙申年)에 시작한 첫 답사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행선지에는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손오공(孫悟空)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손오공은 신괴(神怪) 소설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화과산(花果山)의 돌에서 태어난 원숭이다. 손오공은 신통력을 얻어 천상계에 올라가 횡포를 부리다가 석가여래에게 진압된다. 손오공은 삼장법사에게 구원된 후 그의 시종으로 되며 천신만고를 겪으며 인도에 가서 경전을 가져온다.

 

옛 도시 회안(淮安)은 바로 이 유명한 손오공을 만든 명(明)나라 때의 소설가 오승은(吳承恩, 1501~1582)의 고향이다.

 


신라방 부근에 있는 오승은기념관

중국은 옛날 명산과 대천으로 행정구역을 나누었다. 회하(淮河)는 사독(四瀆) 즉 강하회제(江河淮齊)의 하나로 당연히 지역을 나누는 표식으로 되었다. 오제(五帝) 시대 천하를 구주(九州)로 획분, 회하의 북쪽은 서주(徐州)였고 회하의 남쪽은 양주(揚州)였다. 회안은 회하의 남안에 위치하였으니 양주의 관할 지역으로 되었다.

서주에서 완행 기차로 회안까지 이르는 데는 2시간 남짓이 걸렸다. 그래도 200여㎞의 이 길에 두발로 쌓았을 선민(先民)들의 노고에 비하면 큰 호사를 누린 셈이다.

1월 초의 회안은 뭔가 화를 내듯 찌뿌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흐릿한 하늘에서 찬 빗방울이 찔끔찔끔 땅에 떨어뜨리고 있었다.

시가지의 동남쪽 변두리에 위치한 '오승은 고향집'은 싸늘한 날씨 때문인지 다소 한산했다. 그러나 세계 첫 3D 방송드라마 '오승은과 서유기'의 촬영 세트장이고 부지면적만 1만 5천 제곱미터나 되는 등 40위안이라는 티켓 값이 별로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5백 년 전의 '고향집'에서 오승은과 더불어 신과 인간, 요귀가 함께 등장하는 '서유기'의 세상에 잠시 취할 수 있었다.

'고향집'을 나오다가 안내 도우미에게 '신라방' 유적지가 여기서 얼마를 더 가야 되는가 하고 물었다.

"신라방이 뭐예요? 우리 회안에 그런 게 있어요?"

"혹시?" 해서 거듭 물었지만 똑 같은 물음이 메아리처럼 돌아오고 있었다. 온라인 지도로 미리 찾았던 지상 표지물을 물었더니 그곳은 여기서 고작 3리 상거한다고 말한다.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유기》가 신괴 소설이라면 '신라방'은 누군가 지어낸 허구였던가.

기실 회안이라고 하면 거개 《서유기》나 '신라방'이 아닌 옛 지명 '회음(淮陰)'을 머리에 떠올린다. 회음은 회안의 원명인데, 한(漢)나라 때 한신(韓信)을 '회음후(淮陰侯)'로 봉하면서 더구나 유명세를 탔다. 한신은 이 회음의 태생으로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데 제일 큰 공헌을 한 대장군이다.

회안은 2001년에야 지은 이름이며, 기차도 2005년에야 비로소 통했다.

그럴지라도 회안시는 옛날부터 해내외의 교역으로 이름난 고장이었다. 그때 그 시절 회하는 회안의 동쪽에서 바다로 흘러들었으며, 이로 하여 회안은 대륙 연해의 중요한 항구도시로 되고 있었다.

당나라는 대외 정책에서 아주 개방적이었다. 많은 외국인들이 당나라에서 버젓하게 벼슬을 했다. 바닷길과 육로를 따라 대륙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또 무역으로 부를 쌓았고 대륙의 많은 지방에 그들의 거주구인 '번방(蕃坊)'을 만들었다. 신라방은 그때 대륙 연해에 진출한 신라인들이 한데 집중하여 거주한 '번방'이었다.

지금의 말을 빈다면 '신라방'은 신라 교민의 집거구 즉 '코리아타운'이었다.

'오승은 고향집'을 나서자마자 삼륜차를 불렀다. 삼륜차는 서민들이 단거리의 교통수단으로 즐겨 이용하는 무허가 '택시'이다. 삼륜차 기사라면 회안의 골목골목을 속속들이 꿰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기사 역시 '신라방' 유적지를 어느 별나라에 있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유적지 부근에 있다고 하는 유명 호텔의 이름을 댔더니 그제야 신나게 차를 달린다. 호텔에 이르러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신라방 유적지를 물었다. 나중에 신라방 유적지의 선색을 알려준 사람은 외지의 '농민공'이었다. 그는 호텔 서남쪽에 있는 네거리에서 몇몇이 함께 공사현장의 경비를 서고 있었다.


훼손된 신라방유적지, 쓰러진 거석에 신라방유적지라는 글씨를
가까스로 볼 수 있다.

"저기에 엎어진 돌이 기념비 같던데요. '신라방'인가 뭔가 하는 글씨가 있지요."

과연 공사현장의 흙무지에 네모나게 일부러 깎은 거석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궤도전차의 역에 지하연결통로를 만들면서 살풍경이 되고 있었다. 와중에 '신라방 유적지'라고 음각한 거석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글씨가 있는 쪽의 그 바위 면이 땅에 머리를 박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무엇이든지 신라방은 결국 세상에 남긴 이 유일한 흔적마저 잃고 있었다.

당(唐)나라 때 신라방은 초주(楚州)의 두 번째로 가라고 하면 서러울 명물이었다. 초주는 회안의 또 다른 하나의 옛 지명으로, 일찍 수(隋)나라 때 설치한 주의 이름이다. 초주 관리기구는 지금의 회안시에 위치한다. 초주의 신라방은 자체적인 관리기구인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가 설치되어 있는 등 상당한 자치권을 갖고 있었다. 신라소에는 관리자인 압어(押御) 혹은 총관이 있었고 또 전문직의 통역사가 있었다. 이런 관리나 직원은 모두 신라인 자체로 충당되고 있었다.

초주의 신라인들은 주로 조선업과 항해업에 종사했다. 신라인들이 있던 초주 항구는 해주(海州, 지금의 연운항), 명주(明州, 지금의 녕파), 천주(泉州), 광주(廣州)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명한 항구로 되고 있었다. 천주, 광주의 행상(客商)들은 지어 초주에 와서 선박을 주문하거나 임대했다.

운하와 해운 경제가 발달한 초주에는 천개의 돛이 서로 이어졌고 사시장철 드나드는 배들이 그칠 새 없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초주를 "회하 동남쪽의 으뜸가는 주"라고 칭했다.

뒷이야기이지만, 일본의 구법승 엔닌(圓仁, 794~864)은 귀국할 때 초주 신라방에서 한꺼번에 60명의 뱃사람을 차출하기도 했다. 신라방에서 살고 있는 신라인이 최소 수천 명의 규모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주의 신라방은 대륙 연해의 크고 작은 여러 신라방과 신라촌에 살고 있는 신라인들의 사회중심으로 되고 있었다. 신라인들도 초주를 중심으로 연해 남북의 교주(膠州, 산동 동부 위치), 해주 등 지역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기실 신라방이 위치하고 있는 북진언(北辰堰)이 초주 교통로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북진은 곧바로 북극성이니 북진언은 한구(邗溝)의 북쪽 끝머리의 언제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구는 2,500년 전의 춘추(春秋) 시대에 만든 옛 운하이다. 노(魯)나라 애공(哀公) 9년(B.C.486), 오吳나라는 월(越)나라를 싸워서 이긴 후 북진하여 중원을 제패하려고 했다. 이때 군수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남쪽의 양주부터 시작되는 운하를 만들고 회하와 연결했다. 한구의 강바닥이 회하보다 높았기 때문에 한구의 물이 죄다 회하로 빠질 것을 염두에 두어 한구의 북쪽 끝머리에 봇둑처럼 언제를 쌓았으니 그게 바로 북진언으로 된다. 북진언은 또 운하의 제일 북쪽 어구라는 의미의 말구(末口)로 불린다. 종국적으로 세상에 남은 지명은 이 말구이다. 한구는 그 후 약 1,500년 동안 여러 번이나 물길을 바꿨지만 회하에 흘러드는 말구의 위치에는 변함이 없었다.


옛 말구에 세워진 기념물

말구는 회하에 흘러드는 운하의 입구로 그 전략적인 위치가 두드러진다. 회하는 예로부터 대륙에서 바다로 통하는 중요한 통로이었다. 동쪽으로 이웃한 신라와 고구려, 백제는 물론 일본 등 나라는 많은 경우 회하를 대륙 내왕의 교통로로 삼고 있었다.

동진(東晋) 융화(隆和) 2년(363), 이 고장에 산양성(山陽城)을 구축하는데 이 산양성이 바로 최초의 회안 옛성이다. 산양성은 운하의 물길이 입해구 부근에서 U자 모양을 이루는 산양만(山陽灣)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산양성은 북진언 즉 말구의 남쪽으로 5리 정도 상거한다. 그 무렵 말구가 움푹한 지대였기 때문에 남쪽의 지세 높은 곳에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 때 말구의 저지대는 더는 성 밖의 버려진 땅이 아니었다. 초주가 대륙 연해 일대의 교통과 정치, 상업무역 중심의 항구도시로 되면서 '노란 자위'로 거듭났다. 말구의 양쪽에는 인가가 오밀조밀하게 들어앉았다. 그 마을 이름이 바로 천년의 역사가 묻어나는 '신라방'이었다.

대륙 연해 일대의 신라방, 신라촌은 마치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이어지고 있었다. 여러 신라 마을의 수집된 정보는 초주의 신라방으로 집결, 다시 여러 신라마을로 전파되고 있었다. 승려 엔닌이 초주에 이르자 미구에 남쪽의 천태(天台)와 양주의 서한이 당도했고 또 방문자들이 뒤따랐다고 한다. 반도의 삼국 구법승들도 초주를 경유한 경우가 적지 않았겠지만, 엔닌처럼 이름자를 남긴 승려는 별로 없다. 엔닌은 여타의 승려와는 달리 그의 여행 과정을 문자기록으로 명백하게 남겼기 때문이다. 엔닌은 여행기 《대당구법순례행기(大唐求法巡禮行記)》에서 또 그가 시초에 초주의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렀다가 용흥사(龍興寺)로 자리를 옮기며 그 후 모두 신라방에 행장을 풀었다고 기록한다. 신라방의 신라인들이 나서서 그를 위해 잡다한 일을 교섭, 해결했다.

초주 신라방을 세 번이나 경유한 엔닌의 뒤에는 그렇게 역사(力士)처럼 신라인들이 서있었던 것이다.

개원사와 용흥사는 말구 옛터에서 남쪽으로 5, 6리 더 내려가야 한다. 두 사찰은 모두 전란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다. 용흥사의 경우 한때는 '동방 제일의 사찰'이라고 불렸지만, 현재로선 탑 하나만 외롭게 남아있다.

에피소드가 있다. 이 용흥사는 《서유기》에도 등장한다. 명나라 때의 잡기(雜記) 《호해수기(湖海搜奇)》는 정덕(正德) 6년(1511) 용흥사에 불이 일어나 사찰이 다 타버렸으며 선당(禪堂)이 홀로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서유기》의 제16회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관음원의 장로가 당승의 보배 가사에 욕심을 들여 당승이 머물고 있는 선당에 불을 질렀는데, 손오공이 '불을 피하는 덮개'로 당승을 덮었다는 것이다. 사찰은 거의 모두 불에 타버렸으나 선당만이 불바다에 그대로 남는다. 정덕 6년은 오승은의 어린 시절이니 용흥사와 이웃한 동네에서 살던 그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은래기념관 앞에서 만난 삼륜차, 한가한 모습이다.

용흥사의 탑 아래에는 정오의 짧은 그림자가 누워있었다. 그러나 신라방과 신라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중국의 국보급 옛 인물인 한신, 오승은처럼 또 하나의 명인이 부근에 그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탑 북쪽의 길가에 있는 전 공화국 총리 주은래(周恩來)의 옛 고향집이었다. 이 건물은 부근의 '주은래기념관'과 더불어 '주은래고향 관광풍경구'를 이루고 있었다.

"신라방이 명당인가 보네요. 절세의 명인을 셋이나 배출했으니…"

그런데 이 말을 하고나니 오히려 이름 못할 서운함이 금세 파도처럼 밀려왔다. 정작 회안 역사의 일부를 화려하게 장식한 신라인은 쓰러진 비석에 옛 지명만 어설프게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옛 사찰 용흥사에 잔존한 탑.

홀연히 대로를 지나는 궤도전차가 마치 바닷길을 떠나는 한척의 돛배처럼 눈앞에 환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돛배는 그렇게 천 년 전 기억의 편린을 싣고 역사의 뒤안길로 총망하게 멀어지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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