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옛 마을 새 마을,우리네 전설은 이어진다
김룡식 옹은 첫 마디 이야기를 이렇게 한숨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연길 시내에서 살고 있는 동갑 문하근 옹을 일부러 동행했다. 김씨와 문씨는 두만강 기슭의 그 고향마을에 남은 마지막 80대의 토박이라고 했다.
실제 온 마을에 '영감'은 둘 뿐이라고 하던 김씨의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었다. 노인과 만난 얼마 후 점심차로 마을 식당에 들렸는데, 누군가의 생일잔치를 벌이고 있는 밥상에는 아줌마들만 줄레줄레 모여 있었다.
그날 오후에 일행을 만난 강씨 성의 촌장은 2016년 한해만 해도 그가 살고 있는 하천평(下泉坪)의 마을에서 노인이 아홉이나 세상을 떴다고 말했다. 두 노인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는 귀로 듣는 마을의 마지막 이야기로 되고 있는 것이다.
김씨는 두만강 기슭의 마을을 떠나 용정 시내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함경북도 길주에서 살던 부친의 형제가 1920년대 두만강을 건넜다고 했다. 두만강을 건너자 곧 넓은 벌이 나타났고 또 샘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간민(墾民)들은 벌써 샘물 주변에 집을 짓고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부친의 여러 형제는 얼씨구 하고 곧바로 이삿짐을 내려놓았다. "양지 바른 그곳에는 벌이 아주 컸거든요."
샘물이 흐르는 벌이라고 해서 마을은 '샘물구팡'이라고 불렸다. '구팡'은 우리말 방언으로 처마 밑에 마루를 놓을 수 있게 쌓아 만든 것을 말하는데, 이때는 (샘물) 근처의 높은 지대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샘물구팡'은 한자로 '천평(泉坪)'이라고 불렸으며 천평벌은 상, 중, 하 세 곳으로 나눠 각기 상천평, 중천평, 하천평으로 불렸다.
천평벌에서는 김씨 부친이 정착하기에 앞서 일찍 1868년부터 벼농사를 시작했다고 《만주경제연구년보(满洲经济研究年谱)》가 기록하고 있다.
김씨는 하천평의 마을에서 태어났다. 천평 벌의 '노루골', '살구밭골', '두텁골(厚洞)', '빼뜰(빼앗다는 말의 방언)골', '쏙새(샅바라는 말의 방언)골' 등 옛 지명은 훗날 김씨가 살던 광종촌(光宗村) 3촌민소조처럼 한자명으로 개명되었다. 순 우리말의 이런 옛 지명은 방언 몽기의 이름을 빌린 몽기동처럼 현지의 토착민들이 유실되면서 순 우리말의 이런 옛 지명도 역사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지고 있었다. 참고로 몽기는 "꿈틀거리며 움직인다"는 표현을 이르는 우리말 방언이다.
김씨의 부친은 월강한 후 뒤미처 글방에 다녔다. 우리 백의겨레는 허리띠를 졸라매도 자식을 학교에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천평 벌에는 일찍 1908년 정동서숙(正東書塾)이 일떠서고 있었다. 1913년 3월 사립정동학교로 발전하였고 이윽고 여성부와 중학부를 증설하면서 연변에서 이름난 학교로 떠오르고 있었다. 김씨의 부친이 소학교에 입학하던 1923년 정동중학교는 그 교명이 바뀌고 있었다. 정동중학교는 1920년 10월 일제에 의해 완전 소각되었고 재건한 후 광개(光開)중학교 등으로 바뀌다가 1984년에야 비로소 정동중학교라는 옛 이름을 찾기 때문이다. 뒷이야기이지만, 정동중학교는 학생이 줄어들면서 두만강 북안의 80년의 이 자랑찬 교사(校史)를 결국 역사의 갈피에 묻어버린다.
잠깐, 한 사람을 그만 화제에서 잊은 것 같다. 문씨 역시 김씨의 경력담을 외우듯 그의 가문의 역사가 길주에서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길주는 동쪽으로는 함경북도의 명천, 서쪽으로는 함경남도의 단천과 더불어 함경도 지역에서 두만강 이쪽의 이주민이 많이 생긴 고장이다. 이처럼 함경도 등 반도의 북부지역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발을 붙인 곳이 바로 두만강 기슭으로 시작되고 있는 연변 지역이었고 황해도와 평안도 사람들이 뒤를 이어 정착한 곳은 연변을 망라한 길림성(吉林省)의 기타 지역과 심양(沈陽)을 비롯한 요녕성(遼寧省)의 지역이었으며 이어 경상도 등 남쪽 지역의 사람들은 뒤늦게 이주하면서 이보다 훨씬 안쪽의 흑룡강성(黑龍江省)에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어찌됐거나 문씨가 뒤미처 구술하는 이야기는 이주사의 끝머리로 올라가고 있었다. "지금부터 약 150년 전 조부 때 월청(月晴)으로 왔다고 합니다."
월청은 한자 뜻 그대로 풀이하면 달이 갠다는 말이니 결국 달이 밝다는 의미가 되겠다. 정말로 이 지명처럼 달이 밝은 어느 날 문씨 가족이 도강을 한 게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월청은 천평 벌의 아래 쪽 산굽이를 지나면 나타나는 두만강 마을인데, 그때 그 당시 문씨 조부는 기어이 골에서 20여리를 더 들어가서 거친 황무지에 개간(開墾)의 보습을 박았다고 한다.
"산이라서 논농사를 하지 못하고 감자와 보리를 심었다고 하지요. 그러나 이 개간지가 오지에 숨어있어서 (청나라의) 파수꾼이 '버덕'처럼 찾아 들어오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문씨의 말하는 '버덕'은 '들'을 이르는 함경도의 방언을 이른다. 그때 문씨의 조부가 행장을 내려놓은 마을은 나중에 50여 가구나 되었는데 두만강을 건넌 문씨가 줄레줄레 모여 있었다. 박씨 등 다른 성씨도 일부 문씨의 대열에 가담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들이 월청을 선정한데는 영문이 있었다.
"우리 문씨의 선발대를 따라 친척들이 소식을 듣고 한데 모인거지요."
1950년, 공화국이 창건된 이듬해 문하근 옹의 가족은 윗동네 중천평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천평은 80여 가구의 마을이 있었는데, 무려 백여 정보의 논을 다루고 있었다.
문씨는 그가 조부 때부터 살던 고장을 떠난 원인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천평은 벼농사가 잘되는 곳입니다. 한때 일본 북해도에서도 이곳에 견학을 왔었지요."
천평 벌은 남북으로 길이 7㎞, 동서로 너비 4㎞의 두만강 충적분지이다. 이 분지는 토지가 기름지고 기후가 따뜻하며 관개에 편리하여 벼농사가 잘 되는 것으로 원근에 소문난 곳이다. 옛날 발해 때 임금의 밥상인 수라상(水刺床)에 올랐다는 '노송미(魯松米)'가 바로 이 분지에서 났다고 전한다. '노송'은 말갈어로 하늘의 복판이라는 뜻으로, 노송미는 천상에서 나는 어곡미(御谷米)라는 뜻이 되겠다.
실제로 '어곡미'는 조선의 간민들이 살던 19세기 40년대 또 한 번 천평벌에 나타나고 있었다. '어곡미'를 만든 '어곡전'으로 천평벌을 세상에 알린 것은 1941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천평 벌의 땅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김씨가 어곡미의 비밀을 이렇게 밝혔다. "벼가 올종(조숙종이라는 뜻)이었는데요, 산종을 하지 않고 먼저 모판에 볍씨를 뿌렸지요."
모판의 이 첫 주인은 1935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하천평에 이주한 농부 최학출이었다. 그는 모를 일찍 내는 방법을 연구했는데, 비닐제품이 없던 그때 종이에 기름을 바르고 그 종이를 모판에 덮어 모판의 온도를 높여 볍씨가 빨리 자라도록 했다. 이에 따라 최학출의 논은 소출이 높았고 또 밥맛이 좋았다고 한다. 미구에 괴뢰 만주국 정부에서 사람을 파견, 조사했으며 최학출의 농사법을 높이 평가했다. 1941년 12월, 최학출은 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에 올라가 장려금을 받았으며 벽시계를 선물로 받았다. 1942년 최학출은 또 농업대표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만주국 정부는 그의 5무의 논을 특별히 '어곡전'으로 정하고 만주국 황제 부의(溥儀)의 '어곡미'를 생산하게 했다. 부의는 청나라의 제일 마지막 황제로 1931년 9.18사변 이후 괴뢰 만주국의 황제로 되었으며 연호를 강덕(康德, 1934~1945)으로 삼았다.
문씨는 그때 그 당시 눈에 보았던 희한한 정경을 이렇게 말했다. "봄에 모내기를 할 때는 마을의 처녀들만 골라서 시켰는데요, 가을에는 또 처녀들이 흰옷 차림으로 쌀을 유리판에 놓고 알알이 골랐습니다."
김씨의 외삼촌은 최학출과 사돈이어서 모판 등 일에 참여했고 또 누나가 마을의 처녀들과 함께 어곡전에서 직접 농사를 했다고 한다. 마을의 이런 처녀들은 최학출이 아니라 만주국 정부에서 조직했다고 한다. 김씨는 또 만주국 정부에서 조사, 관리 등으로 어곡전에 자주 내려왔고 그때마다 최학출이 집에서 닭을 잡는 등 색다른 음식상을 차리면서 생활이 더 궁색해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경력 때문에 최학출은 오히려 8.15 광복 후 일제의 주구로 전락, 인민투쟁을 받았다.
김씨는 그때의 비사를 회억하면서 서글피 말했다. "투쟁을 받을 때 최학출은 너무 얻어맞아 귀까지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어곡미'는 사람들마다 기피하는 이름으로 되어 항간에 소리 없이 흔적을 감췄다. '어곡미'는 수십 년 후 비로소 빛을 다시 보게 되었다. 2006년 9월, '어곡미'를 만들던 예전의 논 기슭에 '어곡전' 기념비가 세워졌다. '어곡미'는 이때부터 유명한 브랜드로 되었으며 수라상에서 내려 민간인의 밥상에 올랐다. '어곡전'의 마을은 민속마을, 생태관광의 마을로 발돋움하였고 해마다 '농부절'의 지역마을 행사장으로 되고 있다.
어곡전의 이야기는 이로써 끝나는 게 아니다. 아무래도 한마디 꼭 보태야 하기 때문이다. 어곡전, 어곡미라고 하면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민간에서 어곡전을 발굴, 어곡미를 세상에 재현한 인물이 있다. 그의 진실한 신분은 용정의 한의사이다. 이 특이한 신분 때문에 오정묵씨는 지역의 각양각색의 인물과 접촉, 남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민간 사학자로 거듭나 용정 지역의 역사유적을 발굴할 수 있었다. 김씨와 문씨 두 노인도 오정묵씨가 수첩에 기록, 우리 일행에게 소개한 것이다. 오정묵씨는 얼마 전부터 또 어곡전의 어곡미를 '수라상'에 올릴 어곡주(御谷酒)로 빚고 있었다.
이야기가 그만 마을을 떠나 웬 인물에게 잘못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사실상 이처럼 동 떨어진 듯 여길 이야기는 또 하나 있다. 강은 옛날에는 이리저리 제멋대로 흘렀다고 해서 '도망강'이라고 불렸다고 문씨가 두만강의 속칭을 말하고 있었다. 그 '도망강' 때문에 천평 부근에 '고섬(孤島)'이 생겼다는 것이다. 상천평 서쪽에서 시작된 이 섬은 하천평 동쪽의 '꼬리섬(尾島)'으로 이어진다. 꼬리섬은 서넛 정보의 크기이며 몇 해 전까지 조선측에서 강을 건너와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실제 지난 세기 80년대까지 두만강의 남북에서 사람들이 서로 오갔다고 김씨가 말하고 있었다. 50년대 초까지 아예 식구를 빌리는 일까지 비일비재였다고 한다. "우리 마을에서 운동대회를 하면 선수를 저쪽에서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때 두만강에는 물고기가 참으로 많았다고 문씨가 덧붙였다. 고기꾼들이 두만강에 나가서 통발을 놓거나 낚시를 했다고 한다. "물고기를 낚아서 머리에 들면 꼬리가 땅에 질질 끌렸지요."
그러나 두만강 상류에서 철광을 채굴하면서 탁류 때문에 많은 물고기가 종적을 감추고 있다. 더구나 국경지역에 경비가 삼엄하면서 물고기 낚시는 그예 옛날 옛 이야기로 되었다.
그날 오후 소설 같은 이야기가 하나 생겼다. 미리 약속을 잡은 노인을 만나 옛 마을을 찾으러 상천평 기슭의 개산툰 소재지에 들렸다가 엉뚱한 사건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현지 파출소 요원의 검문을 받으면서 일행은 한동안 발이 잡혀 아무데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필경 노인은 황제처럼 유명한 인물이 아닌데, 그를 취재하러 왔다고 말하는 저자의 신분이 아무래도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하긴 그럴 법 했다. 시골의 그 노인에게 무슨 이야깃거리가 있다고 북경에서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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