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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너머 저쪽에 사라진 이국의 전사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6월20일 08시40분    조회:3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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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삼촌의 행적을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문득 딩동 하고 벨이 짧게 울렸다. 짧은 메시지가 폰의 화면에 뜨고 있었다. 군인이었던 외삼촌 행적을 함께 알아봐 줄 수 없겠는가 하는 문의 내용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주인은 북경의 박씨 성의 지인이었다. 취재차로 대륙의 조선인 노병(老兵)을 만나고 있는 걸 보고 일부러 부탁을 해온 것이다.

  박씨의 외삼촌 이성조(李星祚)는 1946년 참군한 얼마 후 소식이 두절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낸 주소는 호남성(湖南省) 원릉(沅陵) 현성이었는데요, 당시 교도원으로 있었다고 합니다.”
  
어린 이성조가 그의 누님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이성조가 세상에 남긴 몇몇 안되는 사진 중 하나이다.

이씨의 가족은 대략 1920년대 무렵 만주에 이주해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이성조 자신도 이국땅인 만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고려 이래의 대표적인 사족(士族) 가문의 성씨였지만 일제 치하에서 가운이 기울어 결국 이국 행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946년 1월, 이성조는 20살 나이에 고향 길림성(吉林省) 유수현(楡樹縣)에서 지방부대인 길북(吉北) 군분구(軍分區) 유수보안단(楡樹保安團)에 입대하였다고 한다.

  길북 군분구는 그 전신이 ‘8.15’ 광복 후 설립된 장춘(長春) 공안총대(公安總隊)로, 훗날 동북민주연군에 개편되며 선후로 동북민주연군 독립 3사단, 동북야전군 10종대(縱隊) 제29사단, 중국인민해방군 제47군 제140사단 등 군부대 번호로 개칭되었다.

  제47군은 1948년 9월 동북야전군이 발동한 요심(遼沈)전역에 참가하며 11월 관내에 진입하여 평진(平津)전역에 참가한다. 요심전역과 평진전역은 국공내전 시기 공산당 군대가 진행한 3대 전략적 결전의 두 부분이다. 3대 전역 후 국민당은 그 통치를 유지하고 있던 군사력을 기본상 상실했다. 1949년 4월 제47군은 제4야전군에 편성되어 장강 남쪽으로 진군했다.

  아무래도 주석을 달아야 할 것 같다.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모태는 동북인민자치군이다. 동북인민자치군은 1945년 10월 동북 경내에 있거나 동북에 진입할 공산당의 부대로 통일, 편성되었다. 총사령관은 항일명장 임표(林彪)였다. 신사군(新四軍)이나 팔로군(八路軍)이 아닌 지방부대의 명칭을 단 것은 그때의 복잡한 국제환경 때문이었다. 이 자치군은 뒤미처 지방무장과 통합되어 동북민주연군으로 발전되며 그 후 동북인민해방군, 동북야전군으로 개칭되었다. 동북야전군의 12개 종대는 1948년 말 중국인민해방군 12개 군으로 개칭되며 이듬해 3월 정식으로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으로 개칭된다.

  참군한 3년 동안 피바다를 헤쳐서 나온 이성조는 더는 풋내기의 전사가 아니었다. 1949년 10월 11일, 그는 호남성 원릉에서 서한을 보낼 때 제47군 제140사단 418연대 1대대에서 부교도원을 담임하고 있었다. 그가 소속된 418연대는 중국공산당이 일찍 장춘지역에서 발전시킨 부대인데, 이때 역시 사단의 주력연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1949년 말, 제140사단은 호남성에서 토비숙청과 교통선 수호 과업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제47군 군사(軍史)가 밝히고 있다. 이성조가 토비숙청의 주전장인 원릉에서 유하현의 친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1951년 2월, 인민해방군은 ‘토비 92,081명을 섬멸’하며 상서(湘西) 즉 호남성 서쪽지역에서 장장 수백 년이나 지속된 토비우환을 기본상 없앴다고 선포한다. 뒤미처 제47군은 대오를 재정비하고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의 출국 작전에 참가한다.

  이때 이성조는 인민해방군의 서열인 제47군에 있지 않았다. 그는 친인들에게 편지를 보낸 불과 수개월 만에 불행하게도 이역의 불귀객이 되고 있었다. 이성조의 마지막 신분은 조선 인민군의 제1군단 4사단 18연대 2대대 정치 부대장이었다고 전우 권태순이 이성조의 가족에게 분명히 전하고 있었다. 권태순은 이성조와 함께 선후로 중국 인민해방군과 조선 인민군에서 모두 한 부대에 있었던 친근한 전우이다.
  
동북군정대학 학원생 김범식, 칼로 그어놓아서 인민군 상위 계급장의 별이 잘 알리지 않는다.

사실상 이처럼 이중으로 되는 두 나라 군인 신분을 가진 사람은 이성조나 권태순 뿐만 아니었다. 연변 화룡(和龍)에서 길동(吉東) 독립 6연대에 입대했던 전홍철(全弘哲)도 선후로 10종대 제30사단, 제47군 전포(戰砲)대대 등으로 개칭된 인민해방군의 부대에서 복역하며 미구에는 엉뚱하게도 인민군의 제7사단 산하 부대의 소대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특수한 신분의 이런 군인은 복수의 인민군 사단에서 엄청난 군체(群體)를 이루고 있었다.
 
2. 견장을 칼로 긁어 지운 인민군 형님

  “옆구리에 권총을 차고 왔던데요, 인민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요.” 김무웅(金武雄) 옹의 기억에 총알처럼 박혀있는 사촌형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김무웅 옹의 사촌형 김범식(金范植)은 북한으로 가기 전에 친지 방문차로 연길(延吉)의 삼촌을 찾았다. 집에 들어선 김범식은 안전을 기해 책상 위에 권총을 꺼내놓고 탄환을 뽑았다. 여섯 살의 어린 김무웅은 그만 겁에 질려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한다.

  “훗날 집에 기념으로 남긴 사진을 보니 견장을 칼로 쭉쭉 긁어놓았던데요.”

  견장에 새긴 별들은 가로세로 흩어졌으며 형체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정말이지 사촌형은 비밀리의 출국을 앞두고 그의 조선 인민군의 계급을 주변에 그토록 알리기 싫었을까…

  김범식은 동북군정대학 학원생이었다. 동북군정대학은 ‘8.15’ 광복 후 동북의 군대와 지방 간부를 훈련,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중국공산당의 군사정치학교이다. 이런 학교는 동북만 아니라 대륙의 여러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다.
  
인민군 신분으로 사망한 김범식, 중국정부로부터 혁명군인 열사증을 받았다.

1947년 8월, 동북국(東北局)은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東滿分校) 100명의 학원생과 간부를 차출하여 북한을 지원했다. 김범식은 그 지원명단에 오른 일원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동북국은 1945년 9월에 설립된 기구로 중국공산당 중앙을 전권 대표하여 동북의 모든 공산당 기구와 당원의 활동을 영도했다.

  중국에서 북한에 나간 조선인 무장력은 단지 이뿐만 아니다. 1945년 ‘8.15’ 광복을 전후하여 김일성을 대표로 하는 동북항일연군 대부분의 조선인은 북한으로 돌아갔으며 1948년 한반도 북부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설하였다. 대륙의 국공내전 기간, 북한은 동북에서 고전하고 있는 중국 공산당에게 물자와 교통, 인원의 국경경유 등에 편리를 제공하였다. 북한은 동북에서 중국 공산당의 보이지 않은 후방으로 되고 있었다. 훗날 공산당도 북한에 병력 등 측면에서 많은 지지를 준다. 김범식이 인민군의 복장을 입던 1947년 길동(吉東) 경비여단 2개 대대의 1,200명 조선인 군인이 북한에 ‘송환’되고 있었다. 이전 연변군분구 사령원 김광협(金光俠), 이전 연변행정전원공서(專員公署) 전원(專員) 임춘추(林春秋) 등 조선인 장령과 간부가 귀국할 때 또 일부 조선인 군인이 그들을 수행했다. 1948년 2월 8일 창설된 조선 인민군에는 강 이쪽의 중국에서 건너간 조선인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한반도의 정세가 갈수록 긴장해지면서 중국공산당 부대에서 현역군인 등 중국 조선인들이 상부의 명령과 배치에 의해 북한에 대량 진출하여 인민군을 지원했다.
  
김문필 옹의 '근위 성원' 신분을 밝히는 증명서

이때 조선인 장병은 주로 중국공산당의 동북 여러 부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조선인이 주축을 이룬 제4야전군의 제166사단과 제164사단, 제156사단 466연대는 훗날 각기 조선 인민군 제6사단과 제5사단, 제12사단의 30연대로 탈바꿈을 한다. 기타 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인 군인도 적지 않게 국경을 넘으며, 조선 인민군의 기타 보병사단과 603기계화연대, 제105탱크사단 등을 편성하거나 이에 배속되었다. 구술과 논문, 군사(軍史) 등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북한에 귀환한 조선인 군인은 약 5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성조 등은 1950년 4월 25일 대륙 중부의 하남성(河南省) 정주(鄭州)에서 조선 인민군에 직접 편입되었으며 5월 입북하여 인민군 제18연대를 편성했다. 전우 권태순이 그의 자필 증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제18연대는 편성 후 황해도 송림에서 훈련, 정비했으며 이 기간 권태순은 이성조와 함께 일요일이면 시내에 들어가 국수를 사먹고 영화를 보았다고 회억한다.

  이 무렵 제4야전군의 다른 부대도 휴양과 정비를 위해 남쪽에서 기차에 탑승하여 정주로 달리고 있었다. 제40군도 그 중의 하나였다. 제40군은 대륙의 남단까지 짓쳐나가 해남도(海南島)의 해방작전에 참가했다. 그런데 부대의 북행 노정이 갑자기 변동될 줄을 산하 통신반(通信班) 분대장 강신철(姜信哲) 옹은 기타 부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사전에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개성에서 조선 담판대표단에 참가한 서철 옹, 뒷줄 가운데 사람이 서철 옹이며 오른쪽 첫번째 사람이 조선 담판대표단 김일 상장의 비서이다

“우리를 실은 기차는 정주를 그냥 지나치고 직접 안동(安東)으로 간 거지요.” 강신철 옹의 말이다.
  안동은 압록강 기슭에 있는 지금의 단동(丹東)을 말한다. 이윽고 중국인민해방군은 안동에서 국경을 건너며 ‘중국인민지원군’이라고 하는 다른 이름으로 강 저쪽에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3. 신분이 바뀐 이방의 전사

  강신철 옹이 소속한 제40군은 1950년 10월 19일 밤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넜다. 강 저쪽의 조선 땅을 밟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제1진 부대였다. 25일, 지원군 제40군은 평안북도 운산에서 전투를 벌이며 ‘항미원조’의 첫 총성을 울린다. 나중에 이날은 ‘중국인민지원군 조선참전 기념의 날’로 된다.

  공교롭게도 강신철 옹도 이성조처럼 길림성 유하현에서 지방부대에 입대했다고 한다. 이 부대는 이성조가 입대한 유수보안단이 아니라 유수현대대였으며 뒤이어 동북야전군 3종대 제9사단, 중국인민해방군 제40군 제120사단 등으로 개칭된다.

  이야기의 순서가 여기서 또 바뀌는 것 같다. 강신철 옹의 참군을 앞두고 집에서는 실랑이가 한참 벌어졌다고 한다. 부모는 외아들인 강신철 옹의 참군을 극구 막아 나섰던 것이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어찌 땅에 엎디어 흙만 파겠습니까?” 강신철 옹은 그때 그 생각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시 강신철 옹이 살고 있던 길림성 유하현 일대에는 조선인들이 대량 집거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많은 독립운동 인물과 단체가 활약하고 있었으며 또 반일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되고 있었다. 혁명성과 반항성이 남달리 강했던 것. 현지의 조선인들은 그들이 이국땅에서 해방 후 토지개혁의 혜택으로 새로 얻은 터전을 지키기 위해 중국공산당의 무장력에 대거 가입하고 있었으며 전선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었다.

  “또래의 의용군 전사들이 총칼을 메고 씩씩하게 행진하는데요, 그걸 보면서 도저히 앉아있을 수 없었지요.”

  강신철 옹은 그가 시초에 운수대원의 신분으로 몸을 담은 3종대 제9사단에는 의용군처럼 조선인은 많지 않았으며 산하의 여러 부대에 산재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이성조나 정홍철처럼 해방군 군복을 벗고 조선 인민군 군복을 바꿔 입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또 설명을 하고 건너가야 할 것 같다. 강신철 옹이 마냥 입에 담고 있는 의용군은 전칭이 조선의용군이며 그 전신은 1938년 대륙 중부의 호북성(湖北省) 한구(漢口)에서 창설된 반일독립단체인 조선의용대이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화북(華北)조선독립동맹이 지도하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 조선의용군은 화북 지역의 곳곳에서 팔로군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을 선포하자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주덕(朱德)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동북에 진출했다. 11월, 요녕성(遼寧省) 심양(沈陽) 근교의 조선인학교인 오가황(吳家荒)소학교에서 회의를 열고 일부 간부를 제외하고 모두 중국에 남아 중국인민해방투쟁에 참가한다고 선포했다.

  조선의용군은 동북 땅에 거주하는 100여만 명의 조선인을 기반으로 군대를 확대하기로 하고 1지대가 2지대, 3지대가 4지대, 5지대가 6지대를 담당, 확충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조선의용군 부대의 번호가 특이하게도 1지대, 3지대, 5지대라는 홀수로만 세상에 나타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중국인민해방군의 편제규정에 따르면서 원 계획의 번호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구에 남만의 1지대와 북만의 3지대, 동만(연변)의 5지대는 개칭을 거듭하면서 각기 제4야전군의 조선인 부대인 166사단과 164사단 그리고 156사단의 제466연대 등으로 발전, 개칭했다. 와중에 의용군 5지대가 동만으로 향발하던 도중 길림에서 30여명이 선발되어 새로 성립된 7지대는 164사단의 제491연대로 발전, 개칭한다.

  어찌되었거나 조선인 부대의 모태였던 옛 이름 ‘조선의용군’은 조선인의 집단기억에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강신철 옹의 머리에 각인된 기억은 이 옛 이름만 아니었다. 잇따라 북한에서 맞닥뜨린 참혹한 장면은 피가 얼룩진 그림으로 되어 시도 때도 없이 눈앞에 늘 떠오르고 있었다. “네이팜탄에 면바로 맞은 소가 몸통에 불이 달렸는데요, 가죽이 벗겨진 채로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겁니다.”

  어느 한번은 전장에서 전황(戰況)을 살피는데 골짜기 너머에서 총알이 불쑥 날아왔다고 한다. 바로 그의 옆에 서있던 참모가 눈으로 총알이 관통되어 즉사했다. 강신철 옹의 말을 빈다면 그 자신은 정말로 손바닥의 명줄이 아주 길었던 것 같다.
 
 
무순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받고있는 강신철(좌) 옹.
 인민군에 편입된 김문필(金文弼) 옹도 전쟁의 행운아였다. 인민군의 최남단의 전선인 낙동강 유역까지 내려갔고 이때 다리에 상처를 입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대전의 전선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미군의 인천등륙으로 퇴로가 막혀 하마터면 38선 저쪽에 무리에서 외롭게 동떨어질 뻔 했다. 금강산의 산발을 타고 겨우 북쪽으로 도주에서 성공했다고 한다.

  기실 김문필 옹도 강신철 옹처럼 군 입대한 처음에는 비슷한 경력을 겪는다.

 
4. 중국의 혁명군인 열사증명서를 받은 조선 인민군 전사

  김문필 옹은 연변에서 구간대(區干隊)에 참가, 뒤이어 7종대 제20사단, 제44군 제131사단 포병중대에서 복역했다. 역시 지방부대에 입대한 후 정규군에 편입되며 요심, 평진 전역을 거친 후 대륙 남부로 진군, 휴양과 정비를 위해 정주로 갔던 것이다.

  김문필 옹이 복역한 부대가 정주에 도착한 것은 1950년 초반이었다. 이때부터 김문필 옹은 강신철 옹과 전혀 다른 경력을 쌓는다. 정주의 주둔지에 문득 조선 인민군 군관이 나타나서 조선인만 따로 차출하더라고 한다.

  “우린 정주에서 화물차에 앉았을 때는 북쪽의 흑룡강성(黑龍江省)에 농사 지원을 가는 줄로 알았지요.”

  미구에 기차에서 내려 보니 벌써 압록강 저쪽에 있었다. 그 날짜가 1950년 3월 17일이라고 김문필 옹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편입된 부대는 조선 인민군 제105탱크사단이었다.

  1950년 6월 28일, 제105탱크사단은 38선을 돌파한 불과 3일 만에 서울 시내 복판에 돌입했다. 이때 탱크사단의 탱크와 함께 제4보병사단의 제18연대 보병이 서울에 맨 처음 진입했다. 박씨의 외삼촌 이성조가 소속한 부대는 바로 이 유명한 보병연대였다. 제18연대는 나중에 기타 몇몇 부대와 더불어 조선 최고인민회의로부터 ‘근위’의 영예칭호를 받는다.

  당시 서울 북쪽의 유일한 외곽도로였던 미아리 고개는 서울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조선 인민군과 한국군의 전쟁 초기의 제일 치열한 공방전은 이곳에서 벌어졌다.

  이성조는 ‘미아리 고개’에서 벌어진 전투를 지칭하는 서울의 ‘북산전투’에서 희생되었다고 전우 권태순이 증언했다. 이성조의 사망통지서는 웬 일인지 중국의 가족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1963년, 이성조의 가족은 이성조의 행방을 문의하기 위해 조선 인민군과 중국인민해방군의 총정치부에 각기 서한을 보낸다. 이 서한은 나중에 중국정부의 ‘혁명군인 기념증(열사증)’으로 가족에게 돌아왔다.

  뒷이야기이지만, 중국에서 참전한 조선인 장병 가운데서 약 30%가 희생되고 20%가 포로로 되었다는 불완전한 집계가 있다.

  사실상 인민군에 편입된 김범식도 마치 허공으로 날려간 연처럼 종적이 묘연했다. 이 때문에 김무웅 옹의 부친은 1962년에 직접 평양을 다녀왔다고 한다. 인민군 희생자의 명단에서 조카 김범식의 이름을 찾았고, 그가 전쟁에서 희생되었다는 증명서를 받고 돌아왔다.

  “사촌형도 서울을 수복하는 전투에서 희생되었다고 하지요.” 김무웅 옹이 그때 전해들은 그의 부친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김문필의 군공메달
 
서울을 수복한 후 제105탱크사단은 부산을 향해 파죽지세로 내달렸다. 그래서 미구에 ‘근위서울-유경수(柳京洙) 105탱크사단’이라는 영예칭호를 받는다. 김문필 옹도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상부로부터 ‘근위 성원’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받는다. (이 증명서류에서 사단장은 전문섭으로 되어 있다. 전문섭은 6.25전쟁이 발발할 무렵 연대장으로 있었으며 김문필 옹의 직속상관이었다.)

  정말로 소설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김문필 옹의 부친 김철운(金鐵雲)은 동북항일연군의 비밀정보원이었다. 김철운의 정보를 받은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부대는 1940년 3월 중국과 조선 국경 부근의 홍기하(紅旗河) 기슭에 매복하고 일본토벌군을 성공적으로 습격한다. 미구에 김철운의 신분을 해명하고자 이 내막을 쪽지에 적은 후 봇나무 껍질에 말아서 김철운의 무덤에 숨긴 주인공은 그때 항일연군 조선인부대에서 전사로 있었던 유경수 등이었다.

  김문필 옹은 훗날 105탱크사단의 ‘모범군인’으로 되고 있었다. 사단장 유경수는 하급 군관인 김문필 옹을 집에 데려다 밥을 먹이는 등 극진한 사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유경수가 김철운의 무덤에 묻은 쪽지는 반세기가 지난 2000년에 비로소 우연히 발견되며 유경수와 김철운의 옛 인연은 끝내 소설 같은 그런 극적인 결말로 이어지지 못했다.
  김문필 옹은 1956년 인민군에서 제대한 후 두만강 기슭에 있는 연변 개산툰(開山屯)에 돌아왔다. 조모와 모친이 모두 개산툰에 살고 있다는 이유가 유일했다. 그해 김문필 옹은 중국인민해방군 제대군인증명서를 받는다. 김문필 옹처럼 전쟁이 끝난 후 1957년까지 육속 중국에 돌아와서 정착한 조선인 장병은 입북했던 조선인 장병의 약 2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30%의 조선인 장병은 최종적으로 조선 현지에 남았다고 한다.

  잠깐, 이름을 잘못 적었다. 이때는 중국에 있는 조선인 장병을 응당 조선족 장병이라고 불러야 한다. 1952년,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창립되며 뒤미처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변경되면서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겨레는 ‘조선민족’의 ‘민’자가 생략된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조선족’ 아닌 ‘조선인’은 ‘8.15’ 광복 후 대륙에서 갈수록 어울리지 않는 칭호로 되고 있었다. 이름을 밝히기 꺼려하는 한 사학자는 단 한마디로 문제점을 콕 짚고 있었다.
  “조선인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민족 이름이라기보다 외국인을 지칭하게 되겠죠?”

  결국 이 껄끄러운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시한폭탄’처럼 터지고 있었다.
 
5. 국경 너머 저쪽의 옛 이야기

  1946년 2월 3일, 길림성 통화(通化)에서 일본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국민당과 이미 투항한 일본 군인들과 결탁하여 도발한 피비린 폭동이었다. 이때 통화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의용군 제1지대가 폭동을 평정하는 전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형제 부대와 함께 폭동군 3천여 명을 사살, 포로하며 종국적으로 일본 군인들의 폭동을 진압한다.

  광복 후 조선인 부대와 일본군의 피의 대결은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었다. 실제로 조선의용군은 더는 독립을 위한 무장대오가 아니었으며 또 외국인 신분의 국제의용군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무장대오로 되어 국공내전의 신생역량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전홍철의 군인등록 문서에는 인민군 경력을 일부러 지운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2월 23일,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동북국의 결정에 의해 동북민주연군 요녕군구 이홍광(李紅光)지대로 개칭된다. 여기서 한마디 덧붙인다면 이홍광은 동만과 남만 항일투쟁사에 혁혁한 기여를 한 선열이다. 이에 앞서 1945년 11월 흑룡강성 하얼빈(哈爾濱) 근처에서 설립된 제3지대는 1945년 11월 동북민주연군 송강(松江)군구 제8연대로 편성되며 나중에 제4야전군의 164사단으로 개칭된다. 1945년 말 연길에 도착한 제5지대는 이미 조직된 지방부대와 함께 길동군구 제15연대와 제16연대로 편성된다. 이중 제15연대가 나중에 제4야전군 156사단 제466연대로 개칭되며 제16연대는 나중에 제4야전군 47군 제141사단에 배속된다.

  따져보면 서철 옹도 실은 조선의용군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1947년, 그가 군정학교에 입학할 때 이 군정학교는 이홍광지대의 이름을 이어 개칭된 독립 4사단의 소속이었다. 독립 4사단의 원류는 바로 조선의용군 제1지대인 것이다.

  독립 4사단은 훗날 또 제4야전군의 제166사단으로 개칭, 종국적으로는 조선 인민군에 편입되어 인민군 제6사단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서철 옹은 일찌감치 동북군구 본부에 전근되면서 조선 인민군을 지척에서 비켜갔다.

  그렇다고 인민군과 닿을 듯 말 듯 했던 인연은 이로써 끝나지 않았다. 1953년, 지원군 제66군 정치부 간사로 있던 서철 옹 등 지원군 장병 13명은 인민군 정전담판대표단에 파견되었다. 인민군 담판대표단은 조선말과 글을 숙지한 지원군 군인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인민군 군관이 일부러 서철 옹을 대표단의 요원인 김일 상장의 집무실로 직접 안내했다.

  “이봐, 우리한테 오게. 그럼 먼저 소좌 계급을 주고 또 공부하러 보내겠어.” 김일 상장은 만나자마자 이렇게 서철 옹에게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김일 상장은 서철 옹의 조선인 신분을 들어서 미리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서철 옹을 앞으로 북한의 외교부나 대외무역부 같은 ‘노란 자위’의 부문에 배치를 하겠다고 승낙을 했다. 서철 옹은 인사치레로 머리를 끄덕였을 뿐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이 일을 회보하자 제66군 정치부 주임은 화를 버럭 내더라고 한다.
  “뭐야? 그치들은 (우리의) 좋은 사람은 다 데려가겠다는 건가?”

  군 정치부는 서철 옹에게 이튿날로 당장 귀국할 것을 명령했다. 그래서 서철 옹은 군복을 벗고 예전에 근무했던 요녕성 안동의 정부 부문으로 돌아갔다. 그가 중국 공안부의 고위간부로 된 것은 훗날의 이야기이다.

  강신철 옹은 정전 후 소속 부대를 따라 정상적으로 귀환했으며 심양군구 산하의 군사체육훈련대에 편입되었다. 그의 군 경력은 군공메달과 더불어 이에 걸 맞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강신철 옹은 지난 세기 70년대 초 연변조선족자치주 공안국 부국장으로 있기도 했다.

  비록 이국 전장의 불바다를 어깨 겯고 함께 헤쳐 나왔지만 전우들의 핏빛의 기억은 모두 유종의 미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국경의 다른 쪽에서 피를 흘린 ‘의용군’과 ‘인민군’ 출신의 경력은 중국에서 한동안 군 경력으로 공식 승인을 받지 못했다. 대륙에서 정치운동이 일어날 때면 오히려 흠집으로 되었다.

  이에 따라 그제 날의 경력을 기억의 저쪽에 파묻고자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전홍철은 1954년에 작성한 ‘귀향 군인등록문서’에 그가 인민군에서 복역한 경력을 적었다가 일부러 줄을 그어 지우기까지 한다. 그래서 전홍철의 등록문서에는 포연이 자욱한 1950년 한해가 탄흔처럼 흉물스럽게 남고 있다.

  중국에서 해방군 경력과 상응한 ‘인민군’의 대우는 개혁, 개방 이후 비로소 정책적인 응분한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럴지라도 수십 년이나 쌓인 유감이 깡그리 말소된 게 아니다. 와중에 박씨에게는 얼마 전부터 한 올의 희망이 불씨처럼 살아나고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유해가 이데올로기의 깊은 골짜기를 넘어 드디어 국경 너머 저쪽의 한국에서 송환되고 있는 것. 이역에서 떠돌던 외로운 넋이 거의 70년 만에 마침내 슬픈 귀향을 하고 있었다.

  “무주(無主)의 어느 유해의 임자는 혹시 우리의 그분이 아닐까?…”

사진 글 북경 김호림 제공
조글로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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