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그날 조선은 눈 뜨고 모든 걸 도둑맞았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6월20일 14시16분    조회:145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126] 1876년 강화도조약 도장 찍던 날
세계가 요동치던 19세기, 조선도 서세동점 상황
병인양요… 신미양요… 조선은 이 위기를 쇄국정책으로 대처
 

박종인의 땅의 歷史
양놈들의 난동

1871년 신미년 6월 1일 존 로저스 제독이 지휘하는 미국 아시아함대 군함 5척이 강화도에 도착했다. 군함에는 해군과 해병대 1230명이 승선해 있었다. 미군은 강화도와 김포 사이 염하(鹽河)를 북상하며 조선군 병영인 초지진을 함포로 박살내고 덕진진을 무혈점령하고 광성보에서 백병전 끝에 조선군을 전멸시키고 퇴각했다. 신미양요(辛未洋擾), '신미년에 양놈들이 벌인 소동'이라고 한다.

미군이 강화도를 습격한 이유가 있었다. 5년 전인 1866년 대동강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때 대동강 하구에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나 평양까지 올라가 통상을 요구했다. 평안감사 박규수는 조선 국법에 따라 통상은 금지돼 있으니 돌아가라고 명했다. 명을 거부하자 박규수는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버렸다. 그 복수극이 신미양요였다.

신미양요 5년 전인 병인년에는 불란서 양놈들이 강화도에 와서 난동을 부렸다. 신미양요가 터지고 4년 뒤, 이번에는 '왜놈'들이 와서 난동을 부렸다. 그리고 이듬해 1876년 겨울 조선은 이 왜놈들과 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했다. 이를 조일수호조규, 통상 강화도조약이라고 한다. 자, 명분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와 현실에 대한 무지가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제 알아본다.

고종 이명복과 메이지(明治) 무쓰히토

1867년 일본은 막부 정치를 청산하고 왕정을 복고했다. 열다섯 살 먹은 무쓰히토(睦仁)가 천황 자리에 올랐다. 왕명은 메이지(明治)라 했다. 조선에서는 4년 전 26대 왕이 등극했다. 아명은 이명복, 고종이다. 무쓰히토와 동갑이다. 동갑내기 최고 권력자 행로는 많이 달랐다. 고종 대신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권력을 잡았다. 무쓰히토는 왕정 세력과 함께 개혁을 단행했다. 메이지유신이다. 1854년 함포로 무장한 미국에 강제로 개항을 한 이래 막부 권력자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결론이었다. 그때 세상은 이러했다.

아편에 무너진 천하(天下)

영국은 인도에서 생산한 아편을 중국에 팔아먹고 있었다. 1839년 흠차대신 임측서가 광동성 호문강가에 모아놓은 아편 2만1000상자에 생석회를 뿌리고 바다에 던졌다. 중국에는 부도덕하고 비생산적인 물품이었고 영국에는 막대한 이득이었다. 이득이 도덕을 이겼다. 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천하의 중국이 영국에 졌다. 1842년 상해와 남경까지 함락당한 청나라는 홍콩을 내주고 배상금을 지불하고 패전을 선언했다. 남경조약이다. 천하의 중심인 중국이 최신 무기로 무장한 서양 오랑캐에게 굴욕을 당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인천광역시 강화도 초지대교 옆에는 조선시대 해군부대 초지진이 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포격을 맞은 흔적이 소나무와 성벽에 남아 있다. 1875년 일본은 이 초지진을 습격한 뒤 이듬해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박종인 기자
천하(天下)는 사라졌다. 대신 냉혹한 국제정치가 시작됐다. 그 풍경을 조선도 보았고 일본 막부 정권도 보았다.

사신으로 중국을 오갔던 조선 관료들은 왕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대단한 걱정거리는 아니나, 소요는 적지 않다.'(동지사 정사 박회수, '일성록' 헌종 7년 1841년 3월 19일) '이미 화친하였다 하며 토색질(侵漁之弊)은 없다.'(동지사 이최응, '일성록' 헌종 9년 1843년 3월 29일) 이들이 정보를 얻는 경로는 청나라 정부 관보(官報)인 경보(京報)가 대부분이었다. 내용과 배포 모두 통제가 얼마든지 가능했다.(하정식, '구미 열강의 중국 침략과 조선의 반응') 조선 정부는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일본은 달랐다.

그때 일본은 '접근하는 모든 외국선에 대해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무조건 격파령(異國船無異念打拂令)'을 시행 중이었다. 그런데 유일한 개방항인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상인들로부터 객관적인 전황을 입수했다. 영국군이 청군을 압도했다는 소식, 중국이 영토를 빼앗겼다는 소식이 속속 들어왔다. 중국 천하 붕괴 소식에 일본은 1842년 7월 무조건 격파령을 해제했다. 대신 물과 장작을 주고 돌려보내는 신수급여령(薪水給與令)을 내렸다. 막강한 서구 세력과 충돌하지 않으려는 조치였다.(강진아, '동아시아의 개항: 난징조약에서 강화도조약까지') 12년 뒤 일본은 미국과 수교했다.

징조를 무시한 조선

1867년 2월 청나라 예부에서 조선 정부에 비밀 전문을 보내왔다. 내용은 이러했다. '중국에서 발행된 신문에 야도 마사요시(八戶順叔)라는 일본인이 기고한 글에 따르면, 지난해 병인양요 때 당한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프랑스가 다시 공격할 것이다. 프랑스만 아니라 일본 또한 화륜선 80여 척을 건조해 조만간 조선을 칠 것이다.'(동문휘고, '양선정형' 1867년 2월 19일) 조선 정부는 일본 막부 정권에 "유언비어가 아닌가" 하고 문의했다. 청나라에 "근래에 서양 여러 나라에서 번갈아 침입해 오는 바람에 걱정을 끼쳐드리고 있다"는 사례도 잊지 않았다.

일본의 개항 요구

1868년 왕정으로 돌아간 일본 정부는 조선에 개국을 요구했다. 대마도와 동래를 통해 이뤄지던 교역을 국가 간 교역으로 정상화하자는 제안이었다. 일본 사신 다이라노 요시아키라가 들고 온 수교 문서에 '皇室(황실)' '奉勅(봉칙)' 따위 단어가 들어 있었다. 문서를 받은 동래부 왜관훈도 안동준은 '놀랍고 괴이하다(大覺駭異)'며 문서 접수를 거부했다. 황제는 오직 하나고 일본은 오랑캐였다. 이후 지루한 수교 협상이 8년 동안 진행됐다.
 
이미지 크게보기
강화도조약을 맺은 연무당 터.
대원군 정권은 철저하게 쇄국을 고수했다. 자기 아버지 묘를 독일인 오페르트가 도굴한 사건(1868년 오페르트 도굴 사건)까지 터지자 쇄국은 강화됐다.

1871년 일본이 청나라와 수호조약을 맺었다. 그해 미 해군이 강화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라졌다. 이듬해 대원군은 동지사 민치상으로부터 "일본은 이미 청 황제에 대해 칭신(稱臣)하지 않는 듯하다"는 보고를 받았다.('승정원일기' 1872년 4월 4일) 대원군은 일본은 곧 서양 오랑캐(倭洋一體)라고 규정했다. 1873년 일본 외상 소에지마(副島種臣)가 청나라 실력자 이홍장을 면담했다. 소에지마는 '조선과 일본 관계에 청은 간여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받았다. 일본은 주도면밀했다. 1874년 일본은 타이완을 침략했다.

'양복을 입었으니 왜놈도 양놈'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직접 권력을 잡았다. 쇄국의 지도자가 없으니, 일본은 다시 개항을 요구했다. 수시로 어전회의가 열렸다.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던 박규수가 이리 말했다. '대마도주가 황제요, 칙서요 한 것은 그들 자신이 높여서 부른 것이지 결코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불러달라는 요구는 아니다.'('고종실록' 1874년 6월 29일) 대원군에게도 박규수는 이렇게 말했다. '저네들 나라 정령(政令)이 일신되어 과시한 것뿐이다. 우리에게 무슨 상관인가?'(1874년 대원군에게 보낸 편지 答上大院君, 박규수전집) 박규수는 북학파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다.

하지만 대세는 명분이었다. 개항 내용은 뒷전이었다. 천하에 태양이 둘일 수 없고 일본에 황제가 있으면 질서가 깨진다. 그사이에 청나라에서 또 비밀 정보 보고가 들어왔다. '프랑스 제독 지켈의 의견에 따르면 일본이 타이완 정벌을 수행한 군사 5000명으로 장차 조선을 정벌하려 한다. 프랑스와 미국도 조선과의 관계가 미해결 상태라 일본을 도울 것이다. 서둘러 프랑스·미국과 통상관계를 체결하라."('고종실록' 1874년 6월 24일)

1875년 2월 조·일 국교 교섭이 재개됐다. 여전히 문서에는 '大日本(대일본)' '皇上(황상)'이라 적혀 있었다. 게다가 일본 교섭관인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는 양놈과 똑같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교섭은 또 결렬됐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운요호사건과 강화도조약

1875년 5월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부산에 입항했다. 9월 20일 운요호는 강화도 초지진을 공격했다. 4년 전 미군이 파괴했던 그 부대였다. 넉 달 전 열린 전현직 대신회의에서 박규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 나라에서 황제라고 칭한 것은 주나라부터 수천여 년이 되었다.'('승정원일기' 1875년 5월 10일) 고종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듬해 일본에서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일행이 강화도에 왔다. 군함을 타고 왔다. 명칭은 변리대신. 자기네 '피해'를 조사하고 판정하겠다는 것이다. 조선 정부는 무관 출신 관료 신헌을 보냈다. 명칭은 '접견대관'이었다. 의전이 당초 목적이었다. 고종은 접견대관으로 나간 신헌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강화도 병영 연무당에서 신헌과 모리야마는 8년을 끈 교섭 협상을 사흘 만에 끝냈다. 모리야마는 신헌에게 13조로 된 조약 초안을 내밀었다. 황제라는 명칭은 쓰되, 이름은 쓰지 않는다는 조건을 일본이 받아들였다. 신헌이 이렇게 기록했다. '大' 자와 '황제 폐하'와 '국왕 전하'를 지웠다. 일이 타당하게 되었다.(신헌, '심행일기') 신헌이 조정에 보낸 조약 초안 나머지 조항은 모조리 통과됐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을 황제라 부르지 않게 되었다. 조선 내 일본인 범죄자는 일본 관리가 관할하는 치외법권을 누리게 되었고(10조) 해안을 마음대로 항해하며 지도를 작성하게 되었다(7조). 13개 조항에 분명하게 적혀 있는 이들 불평등 내용에 대해 조선 정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황제라 부르지 않게 됐으니까. 그 날이 1876년 2월 27일이었다. 명분에 눈이 가려, 모든 것을 잃은 날이었다.

*

떠나던 날, 일본 측 수행원 미야모토 오카즈(宮本小一)가 신헌에게 말했다. '귀국은 마치 깊은 산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국외(局外)의 일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각성한 이후 후회할 만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심행일기') 이후로 오래도록 조선은 무엇을 상실했는지 알지 못했다.


조선일보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79
  • 7월 5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릴 최운산 장군 추도식 포스터.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제공] (서울=연합뉴스) 1920년 당시 일본군은 아시아 최강이자 세계 정상급 전력을 자랑했다.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세계열강 대열에 진입한 데 이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에서 당당한 승전국 지위를 얻어 사기도 하늘을...
  • 2019-07-04
  •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국가보훈처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을 거론하면서 정치권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문 대통령의 추념사는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는 사회통합에 방점이...
  • 2019-06-07
  • 미주 한인 성금으로 광복군 출범… 임정 "일제를 타도하자" [4월 11일, 임시정부 100년 / 이승만·김구의 나라 만들기] [8] 1940년,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출범 中 국민당·외신 기자 등 참석… 호텔서 성대하게 '성립 전례식' 열어 "日은 韓·中 공동의 적… 연합군 일원으로 ...
  • 2019-05-08
  • 서울 한양대 구 본관도 등록문화재로 매천 황현이 경술국치를 직후 자결하며 남긴 '절명시'. [사진 문화재청]   “어지러운 세상에 떠밀려 백발의 나이에 이르도록/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네/ 이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바람 앞의 가물거리는 촛불 푸른...
  • 2019-05-07
  • 최재형·이강의 대동공보가 '거사'지원…뤼순의 법정공방은 '대한독립 의지' 세계에 천명한 빅인터뷰였다 [2019년 4월9일 하얼빈역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만난 안중근동상. 사진=이상국논설실장 ]   [안중근의 손바닥 도장]   '언론인 안중근'은 우리에게 살짝 낯설다. 그가...
  • 2019-04-23
  • 함경남도 영흥 출신인 계 지사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후 북간도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20년 5월 임시정부 간도 파견원으로, 10월부터는 치타극동공화국 극동부 한인부에서 활동했다. 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후 조선문법, 조선역사 등을 집필하며 민족교육에 헌신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인...
  • 2019-04-22
  • 박지원 의원, CBS라디오 인터뷰서 밝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전 의원(오른쪽 두번째)이 20일 오후 향년 71세로 별세했다. 김 전 의원은 군사정권 시절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얻어 내내 시달렸다. 사진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용인 묘지에서 성묘를 하는 모습. 김대중도서관 제공 “니가 김대중의...
  • 2019-04-22
  • 약산 김원봉 [중앙포토]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헌은 그에 관한 자료를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미국인 저널리스...
  • 2019-04-14
  • "고려인 박물관을 세우자" 왜 광주인가, 그 배경은? 전남대 법대를 졸업한 김병학씨가 광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떠난 것이 지난 1991년. 당시 광주사람들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에 고려인(까레이스키)을 위한 한글학교를 개설하고 있었다. 한민족네트워크에 관심을 기울여온 임채완 전남대 교수로부터 고려인동...
  • 2019-04-13
  • 국민참여형 축제로 개최…'1919년' 의미로 19시 19분에 시작 뮤지컬 '신흥무관학교'·독수리작전 퍼포먼스·임정요인 환국 장면 재현 등 여의도 공원 C-47 비행기 전시관(서울=연합뉴스) 이상학 기자 = 서울 여의도 공원에 개관한 C-47 비행기 전시관. 1945년 8월 18일 한국광복군 정진...
  • 2019-04-09
  • 4·3 당시 남편 잃은 99세 홍순 할머니와 4대의 가족사 "말 못한 세월만 수십년…이젠 4·3史 후대 전승해야"제주4·3 희생자 유족인 (오른쪽부터) 홍순 할머니(99), 증손자 박현성군(10), 손자 박민수씨(42), 아들 박부삼씨(73).2019.4.2/뉴스1© 뉴스1 (제주=뉴스1) 오미란 기자 = "대대로 기...
  • 2019-04-03
  • 4·3 생존 수형인 무대 올라 감동 퍼포먼스·'잠들지 않는 남도' 공연도 생존 희생자 및 유족, 정치인 등 1만여명 참석 예정…이낙연 총리 추념사 헌화 분향하는 참배객[연합뉴스 자료 사진] (제주=연합뉴스) 고성식 기자 = 제71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이 3일 오전 '다시 기리는 4...
  • 2019-04-03
  • [앵커] 일본 정부와 우익 세력은 전쟁 범죄의 역사마저 부정하거나 미화하고 있지만, 일본 언론 중에는 일제에 저항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 자료를 발굴해 세상에 알리는 곳도 있습니다. 3·1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2·8 독립선언 참가 유학생들의 진술서가 발견됐다고 도쿄신문이 보도했습니다. 도쿄 나신...
  • 2019-03-30
  • 국립현대미술관서 15일부터 전시… 1905년 황룡포 입고 경운궁서 촬영   한국 근대 서화가이자 사진가인 해강(海岡) 김규진(1868∼1933)이 1905년 경운궁(덕수궁)에서 촬영한 고종황제의 초상 사진이 국내에서 처음 공개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대한제국 시대의 궁중미술을 조명하는 ‘대한제국의...
  • 2018-11-15
  • 73번째 광복절이다. 여느 해와 다르게 각 방송사 별로 풍성한 광복절 특집이 마련되었다. 그 중에서도 KBS는 공영방송답게 다양한 특집을 마련했다.  그 중 15일 방영된 은 그때나 지금이나 '입신양명'의 상징이었던 '의사(醫師)'가 되었지만 일본 제국주의라는 시대적 숙명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 2018-08-16
  • [머니투데이 배영윤 기자, 황희정 기자] [10대 소녀들부터 60대 노구까지…독립운동의 주인공 또는 조력자로서 해방을 이끈 '철의 여인'들]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인기리에 방영 중인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고애신(김태리 분)의 대사다. 낮에는 한복을 곱...
  • 2018-08-15
  • 독립운동가 후손인 재미동포 기증···문화재청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인도백범 김구의 친필휘호 ‘광명정대’/사진제공=문화재청 [서울경제] 백범 김구(1876~1949)의 친필휘호인 ‘광명정대(光明正大)’가 고국 품으로 돌아왔다.  문화재청은 백범 김구가 1949년에 안중근 의사...
  • 2018-08-13
  •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1862~1927) 여사와 안중근(1879~1910) 의사.한국일보 자료사진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아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다.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모두의 분노를 짊어진 것이다.” 유난히 길었던 1910년 겨울, 어머니는...
  • 2018-07-15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사진은 1980년 공화당 총재 당시 모습. [중앙포토]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92세 일기로 별세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5.16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뒤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 전 총리는  국무총리 2회, 9선 국회의원 등을 지낸 한국 정치사의 풍운아였...
  • 2018-06-28
  • [126] 1876년 강화도조약 도장 찍던 날 세계가 요동치던 19세기, 조선도 서세동점 상황 병인양요… 신미양요… 조선은 이 위기를 쇄국정책으로 대처   양놈들의 난동 1871년 신미년 6월 1일 존 로저스 제독이 지휘하는 미국 아시아함대 군함 5척이 강화도에 도착했다. 군함에는 해군과 해병대 1230명이 승...
  • 2018-06-20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