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전자피아노, 그 아름다운 예술을 꽃피워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2월27일 15시00분    조회:682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허춘화
― 연변춘화전자피아노양성훈련센터 허춘화 원장의 이야기

이야기의 첫머리

오늘의 세계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중 가장 큰 변화의 하나가 바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에로의 전환이였다. 이런 변화는 음악에서도 나타났는바 그중에서도 예전의 고전적인 음악령역에 침투한 새로운 형식인 전자음악이 대표적이다. 전자음악(Electronic music, 일렉트로닉 뮤직)이란 전자적신호를 통해 파생된 음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음악 즉 전자를 리용해 발진되는 음향을 사용하여 만들어지고 연주되는 음악으로 20세기초 여러 가지 전자악기와 록음장치의 발달과 함께 시작되였다. 전자음악연주에서의 대표적인 악기는 전자피아노(電子鋼琴, Electric piano)는 이다. 이 전자피아노는 1930년경 독일의 W. 네른스트가 고안한 피아노형태의 건반악기로 타현진동(打弦振動)을 자석과 코일로 된 전자픽업( pick up)을 리용하여 전기진동으로 얻은 신호를 음파로 바꾸어 소리를 내는 원리로 만든 악기이다.
지난 세기 70년대, 80년대 이 신비로운 전자피아노는 편벽한 변강인 연변에도 찾아왔는데 당시에 이 현대적이고 생소한 악기는 사람들에게 신묘한 음향을 들려주며 많은 호기심을 끌었지만 그 깊고 다채로운 음악세계를 터득하여 진정으로 예술의 경지에로 이른 연주자는 아직 없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음악령역을 과감히 개척하여 오늘에 이르러 전자피아노의 달인의 경지에 오른 이가 있는데 그가 바로 연변춘화전자피아노양성훈련중심의 허춘화원장이다. 최고의 달인이란 영예를 얻자면 각고의 노력과 부단한 좌절과 실패를 경험해야 한다. 허춘화원장의 인생스토리 역시 끈질김과 노력, 분투로 점철되여있다. 오늘날 춘화전자피아노양성훈련중심의 인지도가 우뚝 올라설수 있은것은 바로 그녀의 분투와 끈질김, 그리고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역경을 기회로 순응하여 전환한 결과물이다. 

음악에 매료된 동년시절

1955년 12월, 연길에서 당시 연변예술학교 문학과 교원으로 사업하던 허룡섭의 딸로 태여난 허춘화는 장중보옥으로 자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악기를 다루는 오빠, 언니가 그렇게 멋져보이고 부러웠는데 소학교에 입학한후 허춘화는 학교문예선전대에 들어가 춤과 노래를 배웠다. 꼬마 허춘화에게 음악수업시간이 제일 기대되는 시간이였는데 당시 음악교원인 류분선선생님이 발풍금을 치면서 학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허춘화는 음악시간이 끝나면 선생님의 발풍금을 어설프게나마 다루면서 “동방홍” 을 불러보았다.
허춘화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의 추천을 받아 한족학교인 연길시제5중학교에 편입되여 발레무용을 배웠다. 그후 아버지의 권고로 무용을 그만두고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러나 초보자가 연습하는 바이올린소리는 사람들을 귀찮게 했다. 하여 현관에 나가 련습하였는데 현관이란 집으로 통하는 도로여서 겨울이면 한기로 조금만 서있어도 몸이 오싹해 난다. 그러나 그녀는 두꺼운 옷을 껴입고 바이올린을 연습했고 이렇게 몇시간씩 연습하고나면 온몸이 얼음덩이가 되기도했다.
초중졸업을 앞두고 허춘화는 연변예술학교 음악학부에서 손풍금전업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손풍금연습에 달라붙었다. 여린 몸매에 무거운 손풍금을 메고 몇시간씩 연습을 하다보면 몸은 물자루가 되고 손은 퉁퉁 부어오르며 새로 사입은 바지도 손풍금에 쓸려 볼품이 없어졌다.
구슬진 땀방울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 법이라고 1972년 8월, 허춘화는 마침내 뛰여난 성적으로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3년후 그 학교를 졸업할때 높은 경쟁률을 뚫고 연변연극단 손풍금수로 배치되였다.
허춘화의 본직은 손풍금연주이자만 그녀는 가끔 연극배우가 모자라면 보조역을 맡기도 했다. 당시 무대에서 연기를 맡을수 있었던것은 소학교, 중학교 때 학교선전대에서 갈고 닦은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조역으로 출현한 연극들로는 “백산의 봄우뢰”, “만수천산”, “당인거리에서” 등 십여부나 된다. 그녀는 그때를 회억하면 지금도 감미로운 미소가 떠오른다고 한다. 
1975년가을, 연변연극단에서 연길시 인평촌에 내려가 공연하고 돌아오는 도중 교통사고가 발생했는데 트럭이 넘어지면서 당장에서 6명 단원이 사망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다. 허춘화는 다행히 큰 상처를 입지 않아 병원에서 두주일간 신세를 지고 퇴원하였다. 비록 엄중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가끔 밤이면 악몽에 시달렸지만 예술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애착은 그녀로 하여금 다시금 순회공연의 무대에 합류하도록 하였다. 일년중 그녀는 근 열달동안 순회공연을 하였다.
1979년 1월, 허춘화는 연변가무단의 손풍금수와 백년가약을 맺고 결혼에 골인했다. 그러나 밀월도 채 보내기전 이들 부부는 서로 다른 공연을 위해 갈라져야 했다. 때로는 같은 날에 다른 장소로 공연을 떠나다보니 기차역에서 작별인사를 할 때도 종종 있었다. 
그가운데는 애틋하고 눈물겨운 이야기도 적지 않다. 어느해 겨울, 만삭이 된 그녀는 집에서 산전준비를 해야 했지만 공연임무 때문에 흑룡강성 목단강으로 떠났다. 당시 먹을것도 흔치 않은 세월이라 홀몸도 아닌데 객지의 어려움이란 한입으로 말할수 없었다. 공연을 앞둔 그녀는 문득 잉어탕이 먹고 싶어 견딜수가 없었다. 하여 몇몇 동료들이 돈을 모아 시장에 가서 잉어를 사들고 오다가 곁을 지나가던 개가 그 잉어를 통채로 물고 도망가는 바람에 그렇게 먹고싶던 잉어탕을 먹지 못하고 허탕친 일도 있다. 마냥 그 시절을 회억할 때면 그녀는 풍부한 생활체험이 예술재능을 승화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하면서 “풍부한 생활이 없다면 어찌 여러가지 감정을 아름다운 선률에 담을수 있겠는가?”고 했다.

본직에서 재능을 발휘
   
1982년 6월, 허춘화는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예술단 전자피아노연주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것은 허춘화로 말하면 한차례의 기회이자 도전이였다. 1980년대초, 전자피아노는 대다수 중국사람들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는 악기로서 연주자도 별로 없었다. 당시 방송예술단에서 4만원이란 거금을 들여 광주에서 3단계 키보드의 립체식전자피아노를 들여오자 그녀는 곧바로 악기를 배우려 상해로 떠났다. 그녀는 상해방송예술단 진유문악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연주법을 배웠다. 피아노, 손풍금과 전자피아노는 키보드가 있다는 공통점이외에는 전혀 생소한 판이한 악기였다. 전자피아노를 연주하자면 왼발로 저음을 연주하고 오른발로 음량을 통제하며 왼손으로 반주하고 오른손으로 선률을 연주하며 눈으로 악보를 보아야 한다. 손놀림도 중요하지만 발놀림도 사뭇 중요한데 이것을 우스개소리로 소위 “개발헤염”식 연주법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손과 발이 조화를 이루지 못해 무진 애를 먹었습니다. 어떤 때는 조급해서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당시 숙소를 상해홍교초대소로 잡았는데 여름에는 모기성화에 밤잠을 설쳐야 했습니다. 게다가 해양성기후라 공기가 습해 벌레들이 살판을 치면서 몸은 벌레에 물려 성할날이 없었습니다. 겨울이면 령하에 가까운 날씨지만 스팀이 없어 잠을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주숙하는 손님도 별반 없는 초대소에서 그녀는 세상과 담을 쌓고 전자피아노연습에 몰두하였다. 당시 연습만이 무서움과 괴로움, 추위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였다. 
이런 피타는 노력으로 반년이되자 스승도 그녀의 연주솜씨에 엄지손가락을 내흔들었다. 연길에 돌아온후 그녀는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했다. 해마다 그녀는 몇백수의 곡을 연주하고 록음을 하다보니 3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그녀가 연주한 악보를 쌓아놓으면 키를 넘어선다고 한다. 
연변방송국의 “라지오대중가요무대”의 연주를 도맡은 그 몇해간 그녀는 수많은 아마추어가수들을 위해 반주했는데 반주를 못 맞추는 일들이 비일비재였고 이러저런 곤난도 많았지만 그녀는 시종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내심하게 가르치면서 그들의 신심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하여 수많은 과외가수들은 그녀를 하늘의 선녀처럼 인물도 곱고 마음씨도 고운 반주자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후대양성에 정성을 몰부어

시간이 흐르면서 허춘화의 명성이 퍼지면서 그녀에게서 전자피아노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녀는 일상 사업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과외시간을 짜내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살림집 단칸방에서 수업을 시작했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공간부족문제로 1996년 해당 부문의 비준을 받고 연길시춘화전자피아노양성센터를 꾸렸다.  현재 이 센터는 400평방메터되는 교실에 11명 교원, 80여대 휴대식, 립체식의 각종 전자피아노를 갖춘 현대화한 양성센터로 부상했다. 
허춘화원장은 교학과정에 소조식수업방식을 채용하고 청각훈련을 리용하여 박자를 익히고 키보드를 익숙히 다루게 하고 그 다음 연주를 통해 음악지식과 연주기교를 높여가도록 했다. 꼬마학원들도 그에게서 몇년간 학습을 거치면 홀수키보드 10급과 쌍수키보드 10급을 무난히 통과하였다. 다년간 허춘화가 이끄는 양성센터의 학생들이 각종 예술콩클에서 여러 상을 거머쥐면서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는데 2008년 7월, 상해에서 진행된 아시아야마하립체식전자피아노콩클 중국지역선발대회에서 이 센터의 3명 학생이 참가하여 상을 타면서 처음으로 립체식전자피아노국제시합무대에 진출하는 교두보를 쌓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우리네 동산”, “청춘스타트” 등 방송프로에 정기적으로 출연하고 있는데 2011년 1월에는 중앙교육텔레비죤방송국 프로에 이 센터 학생들이 연주한 “라질가” 등이 방송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87년, 5살난 김문빈이 전자피아노를 배우러 허춘화를 찾아왔다. 허춘화는 한눈에 꼬마의 천부적기질을 알아보고 종합적으로 양성하였는데 김문빈의 실력은 일취월장하였다. 김문빈은 2002년 하문에서 있은 “금종컵” 피아노콩클에서 전업조 2등, 2003년 북경에서 있은 “토야마컵”피아노콩클에서 청년조 1등, 2004년 4월, 미국에서 있은 국제피아노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김문빈은 미국예일대학 음악학원의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30여년간 허춘화가 양성한 제자만도 3천명을 웃돌고 상해음악학원, 중앙음악학원 등 여러 음악대학에 진학한 학생이 100여명이나 된다.

풍성한 성과

허춘화는 연변의 전자피아노연주와 악기교육보급사업의 선두주자로서 수많은 영예를 한몸에 지녔다. 그중 굵직굵직한 상만 들어보아도 다음과 같다. 2006년 중국교육국제교류협회에서 주최한 “세계화인예술절총결승전”에서 우수지도상, 2006년 송경령기금회에서 주최한 제9회 전국소년아동전자피아노콩클에서 우수지도상, 2008년 문화부 민족민간문화발전중심에서 주최한 “예술신인국제전시활동”에서 전자피아노우수지도상 등이다. 
허춘화는 현재 국가1급연주원으로 연변에서 유일한 전국전자피아노급별시험평심위원회 고급시험관이고 또한 연변전자피아노학회 회장, 연길시사영교육협회 부회장 등 막중한 직무를 지니고 전자피아노예술의 꽃을 피워 가는데 혼신을 다하고 있다.
허춘화는 2010년 8월,  북경에서 개최된 제29기 세계음악교육대회에 참가혔다. 대회는 세계 60여개 나라에서 온 1,000여명 음악교육전문가, 학술대표, 음악가들이 모여왔는데 그 대회에서 허춘화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현재 세계적으로 언어, 동작, 음악, 시각예술을 결합한 풍부하고 독특한 개방식교수방법으로 교육받는자가 보다 쉽게 보다 주동적으로 음악예술에 접근할수 있도록 인도하는 오르프음악교육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음악교육 역시 지난날 아동을 위주로 전수하던 음악교육으로부터 태교, 유아, 학령전아동, 로년에 이르기까지 평생교육으로 확대, 실시되고있습니다. 우리 양성센터도 국내외 선진적인 교육 리념을 받아들여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류의 배움기회를 제공할것입니다.”
오늘도 끈기와 열정, 애착으로 전자피아노의 현묘하고 아름다운 예술의 꽃을 피워가고 있는 허춘화의 앞길엔 황홀한 칠색무지개가 걸려있다.

김명록 흑룡강신문 연변지사장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44
  • 안무가 손룡규 교수와 제자들 한겨울의 12월이 막가는 날이었습니다. 밖에서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이징무용학원의 작은 극장은 무용수들이 흘리는 땀으로 여름 같은 열기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얼핏 보아도 20명은 되어 보이는 남학생들이 묘족 복장을 하고 손에는 특이한 무늬가 알록달록하게 장...
  • 2014-12-28
  • 【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젊은 양금 명인 윤은화(31)가 중국에서 교수가 됐다. 현지 중점대학 100곳 가운데 하나인 옌볜대학이 양금 연주자 윤은화를 예술학원 객좌교수로 임명했다. tekim@newsis.com 2014-09-11 【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젊은 양금 명인 윤은화(31)가 중국에서 교수가 됐다. 현...
  • 2014-09-12
  • - 연변대학예술학원 무용학부 최미선교수를 만나 고등학교무용정품교수전시공연을 마치고 최근 전국 72개 종합대학들이 참가한 2014년 고등학교무용정품교수연구토론회(장춘)에서 연변대학예술학원 최미선교수일행이 무대에 올린 조선족무용《표현조합》(表演组合)《고래야(古来惹)》는 그 제목부터 범상치 않음을 시사하며...
  • 2014-08-29
  •   8월23일, 제5회 중국두만강문화관광축제의 여러가지 경축문화행사들이 다양하게 펼쳐지고있는 가운데 도문시 두만강광장에서 조선족민속이미지들을 정교한 조각예술공예에 담아 표현한 관광기념품이 인기를 끌었다.   특히 두만강에서 나는 오석을 밑받침으로 하고 당지에서 나는 질좋은 진흙으로 빚은 소싸움...
  • 2014-08-25
  • 5∼6년전부터 기자, 문인 신분으로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과 《도라지》잡지사가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참가할 때마다 수수한 옷차림으로 카메라를 메고 동분서주하면서 부지런히 샤타를 누르는, 칠순에 가까운 한 촬영가를 볼수 있었다.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 전경업관장에게 성함을 물었더니 사진작가 신승우선생(...
  • 2014-08-08
  • 순 백색의 백두산이 머리우에 높이 걸려있다. 녀인들은 백두산을 경배하고 숙연히 서있다. 외가닥으로 땋아서 등에 늘인 머리는 그들이 순정의 마음을 간직한 정결한 처녀들이라는걸 알리고 있다… 그림 “성산”에 등장하는 녀인들의 뒤모습은 그림 “무리(群)”에서도 나타난다. 이때의 녀인들...
  • 2014-08-06
  • 수상자음악회에서 열창하고있는 김광빈가수 연변가무단 합창단 김광빈가수(31세)가 6월 12일부터 4일간 심수에서 열린 제3차 아시아청년성악가콩클에 참가해 은상을 수상했다. 이번 아시아청년성악가콩클은 국제예술가협회에서 주최하고 카나다 토론토음악학원에서 협찬해 진행한 음악콩클로서 한차례 국제차원의 음악예술...
  • 2014-06-25
  • 대구에서 안중근展 열고 있는 조선족 유명 미술가 취안우쑹 .par:after{display:block; clear:both; content:"";}   "저는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죠. 잠시지만 그런 한국에서 머물면서 정말로 죽을힘을 다해 만든 작품들입니다." 중국 하얼빈의 조선족 작가인 취안우쑹(權伍松&mi...
  • 2014-06-24
  • ▲ 지난 16일 영화 '경주'로 돌아온 장률 감독(51)을 서울 마포구 상수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뉴스컬처)   © 정아영 기자   ‘경주’로 돌아온 장률 감독, “편견을 깨고 싶었다”(인터뷰) (뉴스컬처=정연화 기자) 재중동포인 장률 감독(51)은 ‘경계’에 민감했...
  • 2014-06-21
  • ‘사회파’서 ‘감성파’로 전향? 영화 ‘경주’ 만든 재중동포 장률 감독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는 잘 우려낸 차처럼 잔향이 오래간다. 장 감독은 “박해일, 신민아에게 많은 지시를 하지 않았다. 그저 차를 여러 번 같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차는 사람을 교감하게...
  • 2014-06-12
‹처음  이전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