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2011-06-02)1936년 5월 25일 새벽, 할빈기차역에 도착한 렬차에서 지식분자 기질이 다분한 젊은 부부가 내렸다. 이들은 중국공산당조직이 할빈에 파견한 김문철(조선족), 도개손 부부이다.
이때부터 김문철은 중공할빈시위서기를, 도개손은 시위선전부장을 맡았다.
1934년 4월 당조직이 파괴된후 반동파들은 공산당 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특무, 경찰, 헌병들을 각 곳에 분포시켜 지하당원에 대한 대규모 체포를 시도하고 있었다.
김문철부부는 중공할빈특별위원회의 지도밑에서 공장, 학교에 들어가 당의 사업을 전개했다. 이와 함께 이들은 반일회원을 동원하여 항일투쟁도 전개했다.
1936년 6월 13일 반역자의 밀고로 일본괴뢰당국은 동북에서 대규모 수색체포 작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할빈시위조직부 책임자 장경문 등 52명이 체포됐으며 삼과수 기관차작업구간 당지부가 완전히 파괴되는 등 할빈 당조직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김문철, 도개손부부의 처지가 매우 위태롭게되자 만주성위대표의 동의를 거쳐 6월 17일 이들 부부는 할빈을 떠나 북평에 갔다.
본명이 김찬인 김문철은 이름을 김만성, 장문철, 김철로 바꾼적이 있다.
그는 1911년 조선 진남포에서 태여나 1922년 부친을 따라 중국에 이주하여 북경 통현에 정착한후 중국 국적에 가입했다. 그후 통현 로하중학교에 입학했다.
1929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이듬해 서울, 평양 등에 파견되여 그곳에서 당의 사업을 전개했다. 1932년 반역자의 배신으로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서 체포됐다. 옥중에서 김문철은 당의 기밀을 입밖에 내지 않았으며 공산당 혐의를 받고 7년형을 언도 받았다가 1934년 석방되여 북평에 돌아왔다.
도개손과 김문철은 혁명투쟁중 만나 1935년 결혼했으며 얼마 안돼 딸을 낳았다. 1937년 9월 부부는 9개월되는 딸을 안고 연안에 왔다. 이때 도개손은 전극민이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고 중앙당교 제13반에 들어가 공부했다. 김문철은 장문철이라는 가명으로 섬북공학 제1기 제2대대에 들어가 공부했다.
1937년말 강생이 중앙당교 사무를 주관하게 됐으며 얼마 안돼 김문철과 도개손에게 '일본간첩'이라는 죄명을 씌워 투옥시켰으며 1939년 3월 비밀리에 사형을 집행했다. 이때 김문철은 28세, 도개손은 27세였다.
1982년 2월 13일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 '도개손, 김문철동지에 관한 재조사 결론'은 "두 명의 동지는 당의 비밀사업 종사기간 당과 혁명을 위해 유익한 일을 했다. 장기적으로 억울하게 살아온 이들의 루명을 벗겨주고 명예를 회복해준다"고 밝혔다. /할빈시위 당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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