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료녕신문 2011-06-14 김창영 기자]
자서전 《고난의 발자국》에 그려진 리수철선생의 삶의 궤적
이 세상을 떠난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회자된다면 그 사람은 값진 삶을 살았다고 할수 있다. 취재차 봉성시조선족중학교에 들렸을 때 많은 교원들이 리수철선생을 못잊어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큰 감동을 받았다.
병마와 싸우며
리수철선생은 원래 자서전을 상, 중, 하 3부로 계획, 병마와 싸우며 상권과 중권의 집필만 끝내고 세상을 하직했다.
《고난의 발자국》이란 총 제목아래 상권은 “빈농의 아들”로, 중권은 “수난의 20년”(하권은 반혁명모자를 벗은후 현재까지 쓰려고 계획했었음)으로 돼있었다. 글자수가 무려 32만자를 넘어 암투병중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연변의 한 출판사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자서전 집필이 끝나면 출판해주겠다며 찾아왔어요. 그때 남편은 자기같은 평범한 사람의 자서전은 출판할 가치가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림종을 앞두고 그의 국립해성사도학교(장학량이 사재를 털어 세운 동택중학교의 전신) 선배인 박경옥선생이 찾아와 출판을 권하였으나 역시 사절하였습니다.” 리수철선생의 부인 김순복선생의 말이다.
서문을 보는 순간 리수철선생의 순박한 인간됨을 피부로 절감할수 있었다. 2001년 7월에 쓴 서문 곳곳에 그가 출판을 거부하는 마음가짐이 고스란히 스며있었다.
“이 글이 회상기가 될지 수필이 될지 혹은 락서가 될지 알수가 없다. 내가 정치박해에서 풀려나자 친구들, 특히는 젊은이들이 나에게 회상기를 쓸것을 건의하여왔다. 나는 번번이 ‘그것을 써서 뭘하는가’면서 일축해버렸다. 요즘에 와서 풍전등화로 예기할수 없는 앞날을 두고 파란많던 아버지의 생애를 자식들에게나마 알려주어 그들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시적부터 회고록이며 전기따위를 즐겨 읽었다. 거기에는 거의가 자랑을 썼고 분투와 성공을 썼고 간혹 참회를 쓴것도 있었다. 나의 평생은 자랑거리도 없고 참회할것도 없다. 분투는 있었으나 성공은 없었다. 나의 일생은 수많은 인간의 군체에서 흔히 볼수 있는 평범한 인간의 삶의 궤적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자손들이 이 글에서 다소나마 영양소로 흡수할것이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일가!”
사랑받는 “꼬마선생”
1928년생인 리수철선생은 여덟살때 1학년에 입학하였다. 3남1녀중 막내인 그는 형제중 가장 총기가 있어 학기말마다 우등생으로 상장과 상품을 타군 하였다. 소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레 미제라블》, 《몽떼 크리스또백작》, 《돈 끼호떼》 등 세계명작들을 탐독하며 자신의 문화소양을 깊이했다.
1940년 최우등생으로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12살때 아버지가 돌아간후 이어진 극심한 생활난으로 자신이 바라는 중학교에 입학할수가 없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먼저 철든다고 어린 수철이는 마음속으로 바라는 중학교에 가겠노라고 보채지 않고 본 학교의 고등과(高等科)에 들어갔다. 고등과란 중학교에 입학못한 아이들을 위해 2년간 보습을 시키는 학급이다. 선생님들은 최우등생으로 졸업한 수철이가 고등과에 올라갈수밖에 없는 처지를 못내 아쉬워했으나 어린 수철이는 여기서도 열심히 배우면 된다는 어른스런 생각뿐이였다.
시간이 어언간 2년이 흘러 고등과 졸업을 두달 앞둔 어느날이였다. 담임선생이 불러 사무실로 갔더니 장래 교원이 되면 어떤가고 물었다. 어린 수철이가 의아해하자 담임선생님은 학습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단정한 한 학생을 국립해성사도학교國立海城師I道學校)로 추천하라는 현교육과의 지령이 내려왔는데 학교에서는 수철씨를 추천하기로 했다고 설명하였다. 어린 수철이는 뛸듯이 기뻤다. 교원이 된다기보다 공부를 더 할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컸다.
1943년 1월 그는 위만주국 국립해성사도학교 특수과에 입학하며 평생 교원과의 인연을 맺게 된다. 공부에서만은 두번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총기가 있는 리수철씨는 1944년 12월 국립해성사도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하고 고향인 봉성현백기촌욱일국민우급학교(白旗村旭日國民優級學校)에 배치받아 교원생활의 첫발을 내디디였다. 알고보니 1학년부터 4학년까지는 국민학교, 5학년과 6학년을 우급학교라 불렀다. “욱일”이란 현내 모든 조선족학교들에 통일적으로 단 이름으로 아침해라는 뜻이였다. 학교에서는 1학년과 4학년, 2학년과 5학년, 3학년과 6학년의 복식교수를 하고있었는데 그는 3학년과 6학년의 담임을 맡았다.
첫 수업시간이였다. 교단에 올라서서 학생들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난처한 상황에 봉착하였다. 6학년에 수철이의 소학시절 개구쟁이 친구 넷이나 있었던것이다. 방학때면 함께 산에 올라 돌배를 따고 강가에 나가 벌거벗고 물장구치며 고기잡이를 하던 친구들이 어떻게 아직도 6학년생이란 말인가? 리수철씨는 허구픈 웃음을 지어야 했다.
첫 교학을 어떻게 마무리지었는지 모르고 사무실에 돌아와 교장선생님께 개구쟁이 친구들 이야기를 했더니 교장선생님은 “꼬마선생이야! 분명 꼬마선생이야!” 하며 껄껄 웃으시는것이였다. 하여 리수철선생은 교단에 선 첫날부터 “꼬마선생”이란 애칭을 가지게 되였다.
존경받는 “만능선생”
1945년 일제의 패배에 이어 학교가 문을 닫았다. 리수철씨는 부모들의 고향인 한국행을 택했다. 한국에 사촌형제들이 많아 생활에는 별문제가 없었으나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았는데 그는 눈치밥을 먹기 싫어 1년후인 1946년 다시 봉성으로 돌아왔다. 허나 한국에 나갈 때 없던 3.8선이 불쑥 생겨나 돌아올 때는 많은 고생도 겪었다.
봉성에는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봉성조선인회가 있었다. 지식이 많고 명망높은 장세용(일명 장동필)씨가 회장을 맡고 백방으로 조선인들의 리익을 도모하고있었다. 조선인회에서는 등사기로 찍어낸 《봉성조선인보》를 주간으로 발간, 리수철씨는 원고도 쓰고 등사일도 하면서 신문내는 일을 협조했다.
1946년 5월, 봉성조선인회의 장동필회장이 리수철씨를 불러 조선인회에서 운영하고있는 학교의 교원으로 일하면 어떤가고 청을 들었다. 리수철씨는 다시금 교단에 오를수 있다는것에 흔쾌히 승낙하고 이튿날부터 출근하였다. 평생 교원의 인연을 끊을수 없나보다. 이 기간 리수철씨는 당시 봉성에 주둔하여 봉성의 모든 행정업무를 주관하던 민주련맹에 가입하고 공개하지 않은 비밀맹원이 되였다. 당시 민주련맹의 책임자는 리상현씨였다. 그때부터 그는 교원과 맹원의 신분으로 학교와 군중속에서 조직이 맡겨준 일들을 열심히 하였다.
1946년 11월, 국민당군이 봉성을 점령하자 민주련맹은 전략상 조선으로 철수, 리수철씨도 민주련맹을 따라 조선으로 건너가 민주련맹 북조선판사처에서 련락 통역 일을 하였다. 1947년 6월초 단동해방소식을 접한 그는 봉성에 돌아와 동북조선인민민주련맹 봉성현사업위원회 선전위원에 임명되여 토지개혁 선전사업에 뛰여들었다.
1948년 8월, 관전홍광중학교로 가라는 현정부의 전근령이 내려왔다. 봉성에서 관전현성까지는 기차가 있었지만 관전현성에서 하로하까지 200여리는 걸어서 갔다. 학교에는 이미 다른 두분 교원이 와있었다. 첫학기였지만 7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교원이 부족하여 리수철씨는 조선어와 수학은 물론 음악, 체육 등 교장이 시키는대로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 동시에 학생들과 배구치고 축구차며 잘 어울리다보니 얼마 안지나 학생들속에서 “만능선생”이란 별명이 나돌게 되였다. 후에 길림성 통화시조선족중학교와 길림성 산성진에 자리잡고있는 해룡조선중학교서 교편을 잡았는데 “만능선생”이란 별호는 줄곧 그의 이름뒤에 따라다녔다.
옥중의 문화교원
1958년, 해룡조선중학교에서 당시 동3성 교육계에 명성이 높은 김소묵교장과 두터운 친분을 쌓으며 일하고있을 때 뜻하지 않은 액운이 들이닥쳤다. 김소묵교장이 체포된 뒤를 이어 5월 2일 리수철씨에게도 체포령이 떨어졌다. 김소묵교장이 체포된 리유는 잘 모르나 리수철씨는 봉성현에서 민주련맹 비밀맹원경력이 화를 초래했던것이다.
해룡간수소에서 터무니없는 력사반혁명죄로 10년 형기를 판결받고 길림감옥에 수감되였다가 황기툰(黃旗屯)감옥을 거쳐 진래(??;?로동개조농장에서 형기를 마쳤다. 황기툰감옥에 있을 때였다. 삽 만드는 차간 재료조에 소속된 리수철씨는 삽 하나에 드는 철판 1킬로그람씩 잘라낼수 있도록 선을 긋는 작업을 맡았다. 헌데 강철재료가 두께나 모양이 제각각인데다 난생 처음 하는 일이라 요구대로 해낼수 없게 되자 생산계획에 영향준다며 저녁이면 비판의 대상이 되군 하였다. 이에 반발심이 생긴 그는 밤잠을 설치면서 방법을 모색하였다. 끝내 특수한 자를 만들어 모양에 구애되지 않고 두께만 재면 즉시 1킬로그람짜리 철판을 잘라낼수 있는 계산방법을 생각해내여 비판대상에서 “개조적극분자”로 간판을 바꾸었다.
그의 깊은 문화지식은 갈수록 감옥당국의 중시를 받기 시작했다. 어느날 저녁 리수철씨소속 중대 교양원은 정치학습이 끝나자 죄범들도 문화지식이 있는 로동자가 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중대내에서 죄범문화학습열을 호소, 즉석에서 “리수철을 문화교원으로 임명한다”고 선포하였다. 사실 이 교양원은 오래전부터 리수철씨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왔던것이다. 리수철씨는 요구에 따라 반문맹은 개별지도를 위주로, 대학생은 진도는 같이 나가되 자습을 위주로, 초, 고중 졸업생에 대해서는 교학에 중점을 두는 “대상별 복식교수”를 도입했다. 죄범들은 점차 리수철씨를 “리선생”이라 친절하게 불렀다.
보석은 진흙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했던가! 리수철씨의 교원과의 인연은 이렇게 감옥속에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봉성조중의 자랑
1968년 10년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였지만 력사반혁명이란 모자는 계속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생산대의 정상 로동외에도 모든 의무로동에 참가해야 했다. 하지만 원래부터 아는것이 많고 입담이 좋은지라 휴식시간만 되면 그의 이야기를 들으러 사람들이 그를 둘러쌌다. 특히 감옥에서 무선전기술을 자학하여 라지오를 잘 고쳤는데 동네사람들이 고장난 라지오를 들고 찾아오면 무료로 고쳐주군 했다.
1978년, 리수철씨에게 드디여 해빛이 찾아들었다. 정책을 락실받아 력사반혁명이란 억울한 루명을 철저히 벗게 된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이튿날 봉성시의 여러 무선전기술부에서 기술자로 오라고 찾아왔다. 리수철씨는 높은 로임을 주겠다는것도 마다하고 봉성시조선족중학교에 취직하였다. 평생 마음껏 교단에 서는것이 그의 소원이였다. 그가 봉성조중에 출근한지 얼마 안되여 해룡현교육국에서도 찾아왔다. 해룡조선중학교에서 사업할 때 “만능선생”으로 명성이 자자했던지라 리수철선생을 높은 대우로 모셔가려 했던것이다. 하지만 봉성시교육국에서도 높은 대우를 약속하고 놓아주지 않았다.
처음에 리수철선생은 봉성조중에서 조선어문을 가르쳤다. 후에 학교에서는 수요에 의해 일어과를 개설하여 일어에 조예가 깊은 리수철선생을 일어교원으로 배치했다. 리수철선생은 20년동안 교단에 서지 못한 아쉬움을 봉창할 일념으로 밤낮을 패며 사업했다. 김순복선생은 당시 한주일동안 남편의 얼굴을 못볼 때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부교장직도 마다하고 1989년 퇴직할 때까지 일선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일어과교수도 단동지구에서 소문이 나 단동, 관전, 동항 등 지역의 학교에서 전학해오는 학생들이 늘어났고 지어 봉성1중의 두 한족학생까지 리수철선생한테서 지도를 받아 대련외국어학원에 진학하였단다. 일전에 만난 봉성조중의 신순철교장은 선배선생님들의 회고에 의하면 리수철선생이 학교에 있는기간 봉성조중은 가장 활력이 넘쳤던 시기라고 했다.
교원의 사명감
교원의 본분과 사명감은 교원생활뿐만아니라 리수철선생의 전반 삶의 궤적에서 낱낱이 보여지고있다.
료녕조선문보 애독자의 한사람으로 신문에 나오는 외래어를 그는 1년남짓 시간을 들여 1500여개의 외래어를 수집 정리했고 《한일영중 대역사전》 프린트본을 편찬, 출간하여 봉성조중 교원들과 봉성시 각 기관 조선족간부들에게 무료 배포했다.
1992년 청도의 모 사립중학교에서 한국어과와 일어과를 개설, 리수철선생을 초빙하였는데 그는 옹근 2년동안 김순복선생과 함께 고, 초급 한국어를 가르치며 한족사회에서 우리 말을 전수하고 민족문화를 전파하는데 기여하였다. 1994년에는 강소 남통의 한 중등전문학교에 초빙되여 일어교수를 담당하다가 1997년 건강상태가 악화되자 봉성으로 돌아왔다. 당시 리수철선생의 지도를 받은 학생중 선생이 병환에 계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4,000원에 달하는 약품을 사서 보내온 제자도 있다. 리수철선생은 2009년 간암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봉성조중 신순철교장은 리수철선생은 봉성지역 조선족교육계의 거목이라며 그는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교육사업에 대한 불타는 정열은 우리에게 영원히 꺼지지 않는 희망의 홰불로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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