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2011-06-23)
내가 중국작가협회에 전근되어 베이징에 온 지도 약 30년, 베이징에서의 30년 세월은 보람도 컸지만 눈물겨운 이야기도 많았다. 이제 그 일부를 독자들 앞에 펼쳐놓으려 한다.
시인이 기업가협회 회장으로
나는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 주필로 부임되어 온 지 얼마 안 되어 새로 발족된 베이징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으로 되었다. 시인이 어떻게 기업인협회의 회장이 되었느냐고?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당시 당의 개혁개방 정책의 혜택을 입어 각지에서 돈을 번 일부 기업인들이 베이징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이징은 텃세가 셌고 문턱이 높았다. 그들은 베이징에 발붙이가 힘들었다. 수십만위안 자금을 투자했다가 개업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이 일을 목격하면서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문인인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단체가 있어야 겠다. 소도 부빌 언덕이 있어야 부빌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나 나설 사람이 없었다. 단체를 설립하려면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고민하던 끝에 시인인 내가 나섰다. 그리고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단체는 결성되었는데 회장감이 없었다. 사흘을 연구하던 끝에 이 불덩어리가 나에게 떨어졌다.
"시인이 어떻게 기업인협회 회장이 된단 말이오, 소 웃다 꾸러미 터질 일이지" 나는 굳이 사절했다.
"하지만 회장이 없는 단체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럼 임시로 맡겠소."하고 할 수 없이 응낙하고 말았다.
이 소문이 사회에 퍼지자 여론이 분분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잘 됐다고 옹호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야심이 있다느니 돈벌이를 꿈꾸는 게 아니냐고 별별 말을 다했다. 그래도 나는 대수롭지 않았다.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하자면 이런저런 말을 듣는 것 쯤은 예상했던 일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뛰었다.
세월이 흐르니 사람들은 내 진심을 알아주었다. 나는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기업가협회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내 본업인 창작에 영향이 컸다. 사람들은 재간있는 시인이 돈 한푼도 안나오는 일에, 제돈을 써가면서 바보같은 노릇을 하고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바보가 좋았다. 그런 바보가 값지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창작 50주년에 펴낸 시집 제목을 '나, 진짜 바보이고 싶다'라고 달았던 것이다.
아름다운 거짓말
우리는 기업인들의 경영수준을 높이기 위해 베이징대학 경영학원과 합작하여 최고경영자 연수반을 꾸렸다. 이 연수반에는 수도권 조선족 기업인과 일부 한국인 기업가들이 참가했다. 연수반에서 중국 일류의 저명한 경제학 교수들을 청해 세계경제의 동태와 경영학에 대하여 수준 높은 강의를 조직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베이징대학 수료증을 발급했다.
얼마후에 일본 오사카에서 '국제고려학회 세미나'가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우리 기업인들이 이 회의에 참가하고 뒤이어 일본 기업계를 견학하고 싶다는 요구를 제기했다.
나는 회의측 책임자와 상의하여 그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다. 각자 이력서를 제출해 달라는 요구가 왔다. 기업인들의 이력서를 정리하고 보니 모두가 중등학교, 고등학교 졸업 정도였다. 그런데 오사카회의에는 모두 대졸이나 연구생 출신의 저명한 학자들 모임인데 어떻게 중등학교,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명함을 들이대겠는가, 나는 몹시 난감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거짓말을 좀 하기로 작심했다.각자의 이력서에다 '베이징대학 경제학원 수료'하고 얼버무려 놓았다. 실은 그 연수반이 며칠밖에 안되는 단기연수반인데 그것을 밝히지 않는 이상 누가 알랴. 그래서 등기표 접수자는 "야 참 대단하구만, 모두 베이징대학 졸업생이네"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이렇게 일본견학을 끝마치고 나서 우리는 한바탕 웃어댔다.
"중등학교, 고등학교 졸업생이 하루아침에 베이징대학 졸업생이 됐네"
"그런게 바로 아름다운 거짓말이라는 거요."
나는 기업인들을 거느리고 일본도 가고 미국도 갔다. 여러차례의 국제교류회의는 그들의 안목을 넓혀주었다.
국내에서는 경험교류회도 자주 열었다. 그들은 경험교류회에서 우리 기업이 한단계 도약하려면 지식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일치하게 말했다. 적지않은 기업들이 초기에 돈을 벌었다가 한걸음 도약하는 단계에 가서 실패한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통절히 실감했다.
베이징고려문화경제연구회의 탄생
베이징고려문화경제연구회가 탄생하기 전에 베이징에는 조선족총회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상급의 지시에 의해 이 단체가 해산되었다. 조선족총회가 해산되어 얼마후에 나는 뜻하지 않게 베이징시 공안국에 초청되어 갔다. 공안국 14처의 성이 당가와 호처장이라는 두사람이 나타났다.
"조선족총회는 상급의 지시에 의해 할 수 없이 해산되었지만 국내외의 특수한 환경을 보아 조선족은 단체가 하나 있어야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리고는 나더러 회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세가지, 첫째는 내가 사회 위망이 높다는 것, 둘째는 적이 없고 단결할 수 있다는 것, 셋째는 조직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굳이 거절하였다. 이렇게 사흘을 끌었다. 두 처장은 마지막으로 강한 어조로 말하였다.
"당신이 공산당원이오?"
"예, 맞습니다."
"공산당원이 당의 말을 들어야 하오? 안 들어야 하오?"
이 말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또 회장직을 맡고 말았다. 단체 이름은 고려문화경제연구회로 동포사회를 모두 포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후에 또 사단법인체 규정이 나왔다. 무릇 모든 민간단체는 업무관계 단위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베이징시 민족사무위원회를 찾아갔다. 지도자들은 쾌히 응낙했다. 베이징시민족사무위원회에 이름을 올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우리 회장단회의에 이 소식을 전했다. 헌데 누가 알았으랴 회장단 내부에 농간을 부리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당시 부회장 중 한사람은 남몰래 민족사무위원회 지도자를 찾아가서 조선족 단체가 많은데 고려문화경제연구회만 받아들이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 바람에 사정을 모르는 지도자들은 조선족 내부가 복잡하다면서 우리의 신청도 거부해 버리고 말았다.
세상은 실로 복잡하다. 더구나 내부가 더 무섭다. 이 때문에 우리가 관계단위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꿋꿋이 나갔다. 역풍을 맞받아 굴함없이 앞으로 나아가며 수많은 일을 해냈다. 그리하여 어느덧 15년이 지나고 사람들은 탄복했다. 반대하던 사람도 따라오기 시작했다.
문학인재 양성에도 열정을 기울여
나는 민족문학 주필로서 전국 각지를 돌면서 문학신인을 양성하는 한편 2년제 대학을 꾸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들었다. 교사가 없어 남의 학교를 빌리고 교원이 없어 수도권 대학에서 교수들을 초빙했다. 이렇게 250명의 각 민족 청년들을 모집하여 2년동안 공부를 시켰다. 생활습관이 각기 다른 여러 민족을 한데 모아놓고 공부를 시키자니 복잡한 문제도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각별한 보살핌으로 250명 학생을 무난히 졸업시켰다. 그들은 지금 각 변강지역에서 현위서기 , 법원원장, 중견작가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는 우리를 표창했다.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처럼
고려문화경제연구회는 마치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처럼 당의 중대한 사건을 둘러싸고 많은 활동을 벌렸다. 홍콩회귀 때 500명이 모인 대규모 경축행사를 진행했는데 수도권의 어느 민족도 이런 규모의 행사를 치른 적이 없다.
당대표대회가 열렸을 때 우리는 당문건 학습을 위한 보고대회와 좌담회를 성대히 마련했고 코소보사건과 WTO가입 등 국제적인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전문가의 초청강연과 특강 등을 열어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날로 활성화되는 수도권의 문화생활
우리는 수도권 조선족들의 문화생활을 활성화시키는 데도 각별한 관심을 돌렸다. 민족가무단 청년가수 이성국 씨와 김용의 독창음악회, 연길 '꽃노을 예술단' 베이징 초청공연, 한국 국제경로단과 우리 합창단의 베이징연합공연, 한국 '보리수예술단'과의 연합공연, 그리고 매년 춘절과 '3.8'절의 친목행사 등 다양한 문화활동을 조직했다. 그중 연길의 '꽃노을 예술단'의 베이징공연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 바 '연변일보'는 '꽃노을 예술단 베이징을 들썽'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수도권 생활 30년 나는 몸과 마음을 다바쳐 우리 민족을 위해 분투했다. '세월은 흘러도 바빠서 늙을 새가 없다' 이것이 나의 체험이다.
그러나 바쁜 나날에도 나는 자기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나의 시 농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는 한시도 쉼없이 부지런히 시 농사를 지었다. 시집 '나, 진짜 바보이고 싶다', '황혼의 로맨스', '휴전선은 말이 없다', '끝나지 않은 인생 드라마' 이것은 내가 수도권에서 쌓은 시 농사 낟가리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그렇게 바삐 보내면서 언제 이 많은 시들을 썼느냐고. 나에게는 쉬는 날이 없다. 명절이나 쉬는 날, 남들이 가족을 데리고 노는 날이면 나에게는 가장 좋은 창작날이다. 그래서 나는 카드나 마작, 골프같은 건 아무것도 모른다. 옛날 젊어서 출퇴근하는 때는 길 걷는 시간이 나의 작품 구상 시간이어서 사람들과 인사하기가 싫어서 늘 외진 골목길을 택했다.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작년에 외국에서 나에게 상과 훈장을 들고 왔다.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한 박사가 어떻게 나를 알고 미국 링컨재단의 국제문화예술 훈장과 일본 황실의 문화진흥회에서 수여하는 세계문화 훈장을 가지고 와서 성대한 시상식을 거행했다.
그 동안 우리 가문에는 희소식도 많았다. 베이징에서 우리 가정은 '5호가정'이 되었고 나는 베이징시 영예시민으로 추대되었다. 처녀시절에 문학을 사랑했으나 결혼 후 35년간 가정에 충실하느라 글을 못 썼던 나의 아내는 작년에 '파란만장한 나의 일생'이라는 에세이를 써서 한국에 보냈더니 상상밖으로 호평이어서 '열린문학'에서 연재를 하고 문학상을 수여했다. 일본에 유학간 큰손자는 공부를 끝마치고 일본에서 취직을 했고 작은 손자는 대학에서 입당을 하고 학생회 회장이 되었다. 호주에서 유학하는 둘째 손자, 대학졸업을 앞두고 실습기간에 회사직원으로 선정된 손녀, 우리 가문에는 모두가 희소식이다. 맏아들 김훈은 여러 차례 창작상을 받았고 나의 시도 한국 국제펜클럽의 최고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연변문학에 발표된 조시 '휴전선은 말이 없다'가 윤동주 문학상 특별상을 받게 되었다고 상금 타러 오라는 걸 베이징의 일이 너무 바빠 가지 못했다.
작년에 중앙민족대학에서는 '김철시문학 학술세미나'가 성대히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온 회의 참석자들은 나의 창작에 대해 과분한 평가를 해주었다. 나는 회의끝에 감상발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난날을 뒤돌아볼 새가 없다. 지난날의 성과는 하나의 역사에 불과하다. 시인은 영원히 청춘이다. 나이 비록 팔순에 가까워 오지만 그것도 숫자에 불과하다. 시 농사, 갈수록 심산이고 쓸수록 어렵지만 나는 이 난관을 반드시 헤쳐나갈 것이다. 탱글탱글 영근 알맹이 시들을 많이 써서 독자들의 기대와 관심과 사랑에 보답하겠다."
수도권 생활30년, 돌이켜보면 감회가 깊다. 흘러가는 물을 역행하는 듯한 어려움 속에서 나는 분투했다. 우리 민족을 위하여 줄곧 앞만 향하여 돌진했다. 비록 날조와 헐뜯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다수 사람들이 이해해주고 지지해 주고 찬양해 주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더없는 위안이고 행복이었다. '그래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주는구나'하고 생각할 때 나는 지난날의 고생이 다 잊혀지고 힘이 나고 신심이 생겼다.
내가 거느리는 베이징고려문화경제연구회는 비록 초창기에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가 인정해주고 국제적으로도 그 위망이 높아 많은 국제회의에서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 우리가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어떤 사람은 복지상을 들고 왔고 어떤 국제단체에서는 훈장을 들고 왔다. 모진 풍랑을 헤쳐온 우리 단체, 베이징 55개 소수민족 중 유일한 사단법인체인 고려문화경제연구회, 어느 모임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의 한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거센 풍랑을 헤쳐온 고려문화경제연구회, 그는 앞으로 더 꿋꿋이 용감하게 나아갈 것이다!"
금년 7월, 당창건 90돐을 성대히 경축하기 위하여 고려문화경제연구회에서는 1200명이 관람할 수 있는 대극장에서 예술공연, 보고회와 세미나 등 다양한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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