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료녕신문 2011-10-14김룡호기자
]ㅡ“심양시조선족민속절” 발기자의 한사람 이윤기소장을 만나일전에 있은 제12회 심양시조선족민속문화절 개막식에서 주석대 한가운데 팔십로옹 한분이 앉아계시였다. 관중들은 물론 일부 령도들도 그가 료녕지역 조선족민속절의 발기자의 한사람이고 련속 15년간 이 행사를 후원해온 장본인임을 모르고있었다. 일찍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미국 와이오밍 주립대 대학원 정치학박사를 나온 이윤기는 한양대, 충북대, 숙명녀대 교수로 임직하다가 제 11대 국회의원(외무위원)을 지냈고 I.P.U. 한국대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 소장, 연변대학 명예교수 등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더욱 매력적인것은 명예퇴직후 그의 행적이다. 국회의원시절 외무위원으로 있으면서 국외관련 자료를 많이 접촉했던 그는 해외동포들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졌다. 하여 23년전 “해외한민족연구소”를 설립하고 해외동포들의 력사와 현황 및 진로설정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89년 중국동포들의 상황을 료해하고저 연길을 찾은 이옹은 한복의 물결로 넘실거리는 연길거리에서 “여기가 혹시 평양?” 하는 착각에 잠시 빠졌다가 우리 민족의 얼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곳 동포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게 되였다.
맨먼저 시작한 일이 윤동주재조명사업이였다. 처음 윤동주생가를 찾았을 때 집은 이미 오래전에 허물어져 주추돌만 남아있었다. 이옹은 즉시 해당부문의 동의를 거치고 복원사업을 시작했다. 잇따라 윤동주생가 복원, 윤동주 모교인 명동학교 복원, 윤동주시비와 윤동주기념관 설립, 윤동주문학상 설립 등 사업들을 일사천리로 진척시켰다. 뿐만아니라 평강벌 비암산마루에 일송정기념비를 세우는 일도 잊지 않았다. 중소학생들을 대상한 한중백일장도 이때 시작되였다.
그후 중국을 자주 다니면서 당시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 변시홍관장을 알게 되였다. 변관장의 안내로 심양상황을 료해한 그는 동3성 중심지 심양이 향후 조선족의 생활 및 활동 중심지로 부상할것이라 예견, 변관장에게 “조선족민속절”행사 개최를 제의, “료녕성 등 산재지역 동포들이 하나로 어울리자면 민속절같은 대형행사를 통해 서로 만나고 교류하고 어울려나가는것이 우선”이라고 주문했다. 이렇게 시작된 민속절행사는 심양에서만 이미 12회 개최, 료녕성적인 민속절도 심양, 환인, 단동 등 지역들에서 련이어 개최되고있다. 한편 료녕성내 중소학생을 대상한 백일장은 이미 15년을 이어오면서 우리 성내 조선족중소학생들의 최대 작문콩클로 자리잡았다.
일전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옹은 “솔직히 처음에는 민속절과 백일장이 2~3회 진행되다가 그만둘줄 알았는데 줄기차게 이어지는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느꼈고 현지 동포들과 현지 정부에 너무 감사했습니다.”며 “민속절과 백일장을 우리 민족이 모여사는 모든 지역에 보급할 생각”이라고 토로했다.
요즘은 로씨야 연해주에서 동포들을 위한 사업을 하고있는 그지만 조선족사회에 대한 관심은 시종일관하였다. “세계의 판도가 중국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중국이 서양인들앞에서 어깨를 세운다는것이 같은 동양인으로서 자랑스럽다. 조선족은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중국의 발전에 기여해야 할뿐만 아니라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신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세계는 다문화사회로 진입하고있다. 다문화사회는 여러 민족과 인종이 자기의 문화와 전통을 살려나가면서 서로 어울릴 때 비로소 백화가 만발한 세상을 열어갈수 있다. 조선족도 자기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는것이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또 세계대가정의 성원으로 되는 길”이라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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