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후 입국 20년…김대중~박근혜 정부의 중국동포 관리 정책 변화
“어디서 오셨어요? 북한, 중국?”
생김새는 같은 데 말투가 다르다. 식당이나 건설공사 현장 등 일상생활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중국동포들이다. ‘조선족’으로 불리는 이들이 한국 사회에 발 딛기 시작한 것은 1992년 한중수교 이후부터로, 한국 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지 20여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국내에서 2등 시민 혹은 미등록 체류자로 차별받고 있다. 누가 그들을 2등 시민으로 만든 것일까.
KIN(지구촌동포연대)은 13일 서울 재한조선족연합회 문화활동중심에서 ‘재외동포법 개정 운동, 중국동포 차별 철폐 및 자유왕래 이야기’ 제목의 KIN 네트워크 포럼 열었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로 주로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출신이다. 2011년 ‘위대한 탄생’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우승한 백청강도 조선족이다. 그들의 부모 혹은 조부모는 대부분 일제강점기 전후 중국으로 이주했다. 지금 조선족의 조상은 독립운동을 위해 혹은 일제의 강제 이주 정책 등 자의·타의로 중국으로 옮겨간 이들이다. 하지만 한국에 입국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조선족이라는 멸시와 사기, 미등록체류자라는 낙인이었다.
유봉순 재한조선족연합회장은 “한중수교 후 한국에서 살기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국 입국 붐이 일었다”고 말했다. 유 회장은 “조선족은 한국 입국 당시 집과 땅을 팔아 브로커(입국 중개인) 비용을 마련하는데 3개월은 브로커 비용을 갚기에도 너무 짧았다”며 “그 돈을 갚기 위해 부득이하게 불법체류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유 회장은 이어 “당시 중국에 온 한국 사람들은 ‘(한국에) 초청해주겠다’며 조선족에게 돈을 받아가고 입을 쓱 닦았다”며 “이렇게 사기 당한 가구만 3만 가구 10만 명 가량”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을 서럽게 한 것은 또 있었다. 정부의 재외동포 정책이다. 김대중 정부가 1999년 제정한 ‘재외동포의출입국과법적지위에관한법률(재외동포법)’이 실제로는 ‘노동력 관리’에 중점을 두는 법안이었기 때문이다.
유봉순(오른쪽 두번째) 재한조선족연합회장이 13일 서울 서대문구 재한조선족연합회 문화활동중심에서 진행된 KIN 네트워크 포럼에서 발표하고 있다. 사진=김유리 기자 | ||
1997년 한국 경제는 거품이 빠지면서 위기가 닥쳤다. 정부는 1994년엔 ‘산업연수생 제도’를 도입하면서 외국인력을 싼 값에 부렸으나 내국인 실업자가 늘자 외국인력을 귀국시키며 노동력 관리를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정된 것이 재외동포법이다. 물론 조선족과의 국제결혼으로 인한 피해 사례 증가 등도 재외동포법 제정에 한 몫 했다.
유 회장은 “미등록체류자가 된 조선족들이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없다보니 3D산업으로 몰리고 임금체불도 잦아졌다. 산업재해 각종 인신 모욕 등 비인권적 현실을 감내해야 했다”며 “심지어 2000년 들어서 정부는 미등록 조선족을 고용한 업주에게 2000~3000만 원 가량의 벌금을 물리고 조선족은 강제 추방하는 ‘인간사냥식’ 정책을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결국 그들은 또 다시 재외동포법 개정 운동을 시작했다. 1999년 ‘올바른’ 재외동포법 제정 운동에 이어 모든 동포에게 평등한 제외동포법 개정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배덕호 KIN 대표는 “재외동포법은 45년 8월 이전 출국한 동포를 동포 범주에서 제외함으로써 구소련과 중국, 일본 조선적(무국적) 동포를 제외하는 결과를 낳았다”며 “당시 미주·유럽 등 부자 나라 동포만 동포냐 가난한 나라에서 온 동포는 동포도 아니냐면서 법 개정 운동이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한국 헌법재판소는 2001년 재외동포법이 형평의 원리에 위배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 2003년 12월 31일까지 법개정을 주문했다. 유 회장은 “2003년 11월 15일부터 ‘공구리(콘크리트의 일본식 표현)’ 바닥에서 밤에는 스티로폼을 깔고 침낭 덮고 2000원짜리 도시락을 사 먹어가며 농성했다”며 “노무현 대통령 시절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국회에 법 개정을 요청하는 등 노력한 결과 2004년 2월 9일 동포로 인정받았다”고 회상했다.
재외동포법은 개정됐지만 끝난 건 아니었다. 출입국관리법과 여권법 등에 따른 조선족의 자유로운 왕래는 막혀있었다. 재외동포로서의 법적 지위는 인정받았지만 자유왕래와 취업 등 현실적인 제약은 여전했다. 재한조선족연합회와 불교·기독교 등 종교단체, 시민단체는 여전히 자유로운 출입국 정책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자진 출국하는 조선족에 한해 1년 후 합법적으로 재입국 할 수 있도록 하는 ‘동포귀국지원 프로그램’을 2005~2006년 두 차례 실시했다. 친척 초청으로 국내 입국할 수 있는 연령도 60세 이상에서 2003년 처음으로 30세 이상으로 하향 조정됐다.
이명박 정부 들어선 방문취업제도(2007년)를 도입해 입국 인원을 조절했다. 일할 능력을 증명하거나 제조업·농축산업 등에서 일정 기간 근무한 조선족에게만 영주권·초청권을 부여하는 등 관리 정책을 시행했다.
김용필 동포세계신문 편집국장은 “이명박 정부 이후부터는 내국인이 기피하는 업종으로의 조선족 동포 인력을 유도하기 위한 방안이 정책들이 추진됐다”며 “2012년 오원춘 사건 이후 단순노무분야 취업자에게 범죄경력증명서와 건강진단서 제출 등을 의무화하는 등 여러 관리제도가 생겨났다”고 말했다.
정부의 정책 자체가 노동력 특히 저임금 노동력 관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내국인이 기피하는 단순노무직에 종사했고 직업에 따른 차별을 고스란히 ‘조선족’이라는 낙인의 동창생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한국정부는 2015년 재외동포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개편에 들어갔다. 국무총리실 산하 재외동포정책위원회는 복수국적법 개정과 함께 국내외 거주 중인 조선족을 포함한 재외동포 비자 문제 등에 대한 정책 변경을 단행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진복자 재한조선족연합회 총무는 “우리 조상이 왜 한국을 떠났고 중국에서 뭘 했고 어떤 평가를 받았나, 또 우리는 왜 빚을 가득 짊어지고 한국으로 왔는가, 와서 무엇을 했는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꼼꼼히 생각해봐야 한다”며 “과거를 알고 역사를 아는 사람이 현실에서도 열심히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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