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에 지독하게 빠져사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중독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이 빠져있는것이 즐거움이라면? 누구보다 재미있게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가꾸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부럽다”.
그런 즐거움에 중독된 “양치기” 아저씨가 반백이 넘어 국가1급 아마추어륙상선수로 된 이야기이다.
왜 그렇게 죽도록 뛰였을가? 김장선(63살)씨는 “달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답한다. 김장선씨는 아무것도 가진것 없는 자신을 빛나게 해준 마라손이 그저 고맙다고 한다.
훈춘시 춘성향의 한 시골마을이 그의 고향이다. 한국의 손기정 마라손선수를 우연히 신문에서 본 뒤로 마음속에 세상을 놀래우는 마라손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가난한 집안 형편때문에 “준비물”이 필요없고 특별히 돈이 들것도 없이 그저 달리면 될법한 마라손이였다. 다니던 학교에서 멀리 이사를 가는바람에 매일 왕복 20여리 길을 책가방을 멘채 달리군 했다. 하루도 달리기를 빼놓은적이 없다. 그에게는 훈련할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렇게 열심히 했지만 체육학교 학생모집에서 김장선씨는 뒤바라지가 힘들다는 리유로 경쟁자들에게 밀려났다. 오매불망 바라던 선수로서의 생활은 그렇게 물건너로 떠나보냈다.
그리고 얻은 직장이 연변종자양번식공장에서 양치기를 하는 일이였다.
“선수가 되겠다는 제 꿈을 한시도 버린적 없었어요. 오히려 더욱 굳혀졌죠.”
양을 치면서도 들판을 하루종일 미친듯이 뛰여다녔다고 한다. 남들처럼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기에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인 마라손이 안성맞춤했던것이다. 굽이굽이 이어진 깊은 산골을 달리다보면 간혹 발을 헛디뎌 아슬아슬할 때가 있다. 그래도 포기가 쉽지 않더란다.
그렇게 어려운 시간을 보내다 김장선씨에게 드디여 기회가 찾아왔다. 1993년 아주 우연한 기회에 한국의 김번일(한국 륙상 사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3관왕에 오른 림춘애선수의 코치)선생을 만나면서 그의 아마추어 마라손 선수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김번일선생의 지도로 체계적인 훈련을 받게 됐습지요. 너무 고마운분이죠.”
어려운 시기 김장선씨의 손을 잡아준 고마운 사람이였다.
그렇게 90년대부터, 나이 마흔에 대회에 나가기 시작한 김장선씨는 지금까지 모두 40여차례에 달하는 국내외 크고작은 마라손대회에 단골로 나갔다. 직장일에, 훈련에 밤잠을 줄여가면서도 힘든줄 몰랐다.
지금까지 참가한 국제마라손대회만도 9차례, 단 한번도 기권하지 않고 완주했다. 지난 2012년에는 나이 60을 넘겨서도 국제마라손대회에 참가해 42.195킬로메터를 완주했다.
발은 물집이 잡혀 엉망이다. 42.195킬로메터의 기나긴 려정끝에 결승점이 희미하게 보인다. 장시간의 달리기로 터질것 같은 심장과 지칠대로 지쳐버린 온몸의 근육을 가다듬으며 마지막 남은 힘을 쥐여짠다.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온몸이 축 늘어지고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다. 마라손의 진정한 매력이란 이런것일가?
“이세상인가, 저세상인가조차도 구분이 안될 정도이지요. 그 죽을만큼의 고통스러움을 이겨낸 뒤 느끼는 쾌감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마라손을 그만두기 힘들지요”라고 말하는 김장선씨이다. 발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목숨 걸고 뛰는 김장선씨. 그야말로 중독이란 말이 과장이 아니다.
그는 “직장도 퇴직했으니 이제 제 꿈은 조선족 올림픽선수를 배출하는거예요. 제가 못다 이룬 평생의 꿈입니다”라고 말한다. 아직 달리는것을 멈출 생각이 없다. “힘에 부칠 때가 오면 짧은 코스(赛程路线)에라도 꼭 나갈것”이라는 그에게는 달리는것 자체가 즐겁다.
글·사진 신연희 기자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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