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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베이비,조선족 "이모님"과의 동거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7월4일 10시47분    조회: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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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워킹맘들에게 조선족 베이비시터 ‘이모님’은 없어서는 안 될 특별한 동거인. 그녀들은 나보다 더 현실적인 모성애로 24시간 아이를 돌보는 대리‘엄마’이자,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고용된 헬퍼’다. 교포이자 외국인인 이상한 나라의 이모님이 일으킨 삶의 유쾌한 파장.
내 아이는 다른 사람 손에게 맡기고 백인의 아이를 돌보는 기분은 어떤가요?” 영화 <헬프>는 백인 여성의 돌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순간 어퍼컷을 맞은 것 같았다. 저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잖아! 출산 후 조선족 입주 베이비시터(일명 ‘이모님’)에게 육아를 맡기면서 나와 그녀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다. ‘당신은 나와 무슨 인연이 있어 바다 건너 이곳에 와서 내 아이를 돌보고 있나요? ‘내가알기론 현재 내 가족은 조선족 이모님이 돌보고, 천진의 이모님 가족은 중국인이 돌보고 있었다. 이모님은 종종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국제전화를 했다. 수화기에 대고 “우리 큰손주! 사랑해! 할머니가 많이많이 사랑해!”라고 애타게 목청을 높였다.

영화 <헬프>는 1960년대 가사와 육아를 전담했던 미국의 흑인 가정부들 이야기다. 할머니, 엄마의 대를 이어 가정부가 된 그들은 백인 중심 사회에서 식탁은 물론 화장실도 같이 못 쓰면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아이를 키웠다. 그 아이가 성인이 되어 아이를 낳으면 자기를 키운 유모를 다시 못되게 부려먹고는 했다. 모성애가 부족해 보이는 엄마가 히스테리를 부릴 때 지혜로운 흑인 유모는 아이를 끌어안고 눈을 맞추고 속삭였다. “넌 친절하고 똑똑하고 소중한 아이야!” 영화를 보며 나는 저 금발머리 아기는 자존감 있는 건강한 아이로 자랄 거야,라고 생각했다. 인종차별이 있던 1960년대 미국의 팔자 좋은 백인 엄마들과는 다른 이유로 2000년대 대한민국에는 유모가 필요하다. 한국의 워킹맘이 선택 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시댁과 친정의 도움을 받든가, 입주 베이비시터를 고용하든가. ‘이모님 시스템’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자, 많은 동료 워킹맘들이 조언했다. “이제부터 맘고생이 시작됐어요. 아마 여러 번 사람 바꿀 각오를 해야 될 거예요.” “조선족은 한국인과는 영 딴판이죠. 청결하지도 않고 고집도 세요.” “그 사람들은 돈이 최고예요. 다른 집에서 10만원만 더 준다고 해도 애 놔두고 나간다고 할걸요.” “CCTV 설치하는 것도 고려해 봐요. 섬세한 감시가 필요하다니까요.” “겪어 보면 알겠지만 이모님 시집살이가 따로 없어요. 이것 저것 반찬도 신경 써야지… 생활비가 배는 더 들어요.”

아이 키우는 친구들 집에서 가끔 얼굴을 본 조선족들은 광대뼈가 두드러진 검은 피부에 1970년대풍의 촌스러운 옷을 입고 마른 입술과 여윈 몸으로 집안을 종종거리며 다녔다. 펄 벅의 소설 <대지>에 나오는 바지런한 중국 여자 ‘오란’이 떠올랐다. 엄마들은 대체로 친절했지만, 안주인과 고용인이라는 상하관계는 분명히 했다. 부엌에서 일하는 조선족과는 함께 식사하는 법이 없었다. 아기 엄마를 ‘사모님’이라고 깍듯이 높여 부르는 집도 있었다.

우리 집에 이모님이 처음 왔던 날이 기억난다. 산후조리 한 달 동안 ‘산모는 황후처럼 대접 받아야 한다’며 정성껏 돌봐주던 산후관리사가 떠난 다음날이었다. 사람꼴도 못 갖춘 아기를 앞에 두고 몸과 마음이 연약해진 나는 이별의 순간에 고아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옛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남은 내게 새사람이 고울 리 없었다. 게다가 내 동포도 아니고 말만 통하는 외국인 조선족이 아닌가. 육십이 넘은 이모님과의 생활은 처음엔 불안과 의심으로 시작되었다. 첫 며칠은 “아기가 꽤 무거워요”라든가 “이 빨래를 꼭 삶아야 하나요?” 같은 사소한 언급에 맘이 상했다. 자연히 ‘저 사람이 과연 내 집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새 며느리 감시하는 시어머니 심보가 앞섰다. 내 침대에 아이를 눕히고 낮에 그 옆에서 잠을 청하는 것도 못마땅했고, 아기가 새벽에 깨서 우는데 듣지 못하고 코를 골며 자는 것도 둔해 보였다. 낯이 설어선지 목욕통에 똥을 싸며 우는 아기를 보면 내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몰래 전화통을 붙잡고 친구들에게 하소연하며 해고 사유를 찾았지만,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중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교포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것도 두려웠다.나와 눈이 마주치면 그녀는 “미안합니다~” 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내가 이모님에게 마음을 연 건, 어느 날 오후의 대화 때문이었다. “이모님은 어떻게 한국에 나오게 되셨어요?” 직업적인 기질이 발동한 나는 진지한 인터뷰어로서 그녀의 인생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젊은 시절 시집 와서 아들 둘을 낳고 일찍 남편을 여읜, 고생이 곧 인생인 어머니 세대의 스토리가 펼쳐졌다. “북한을 드나들며 장사도 했어요.” “북한에 가 봤다구요?” “북어며 옷가지며 보따리 이고 지고 국경을 넘어가서 물물교환을 했죠. 저는 사람 뼛가루도 먹어봤어요.” “뼛가루요?” “위가 너무 아파 죽겠는데, 화장터의 뼛가루를 먹으면 낫는다고 해서 그걸 먹었는데 신기하게 나았어요. 애들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안 해본 게 없어요.” 간간히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서서히 우리 ‘이모님’에게 정을 붙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처음에 갓난아이를 받아 들고 두려운 마음에 딱 도망가고 싶더란다. 다행히도 이모님은 성품이 바르고 천진난만했고, 작은 일에 행복해 했다. 아이와도 금세 사랑에 빠졌다.

생활비는 늘어나고 통장 잔고는 줄어갔지만, 이모님 등에 업혀 깔깔깔 웃는 딸아이를 보면 가슴이 벅찼다. 밥과 김치로 소박하게 식사하는 그녀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건 치킨. 치킨을 사서 집에 가는 날엔 허둥대며 걸음이 바빠졌다. 외롭게 이 도시를 떠돌던 남편과 나는 중국어로 ‘사랑합니다’와 ‘잘 먹겠습니다’를 배우면서 한 명보다 두 명이, 두 명보다 네명이 더 행복하다는 데 기꺼이 동의했다. 그 중심에 선하고 부지런한 ‘이모님’이 있었다.

나는 어느 날 최정례 시인의 시 ‘늙은 여자’를 읽었다. 책 읽는 내 옆에서 이모님이 아기를 등에 업고 창가에 서 햇빛을 쬐고 있었다. “한때 아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늙었다/ 한때 종달새였고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가 빠졌다/ 한때 연애를 하고/ 배꽃처럼 웃었기 때문에/ 더듬거리는 늙은 여자가 되었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나는 내 옆의 늙은 여자를 보았다. 순간 이모님과 아가가 한몸처럼 보였다. 할머니 등에 붙은 아기는 어린 할머니처럼 의젓해 보였고, 아기를 등에 업은 할머니는 나이 든 아기처럼 천진해 보였다. 할머니는 점점 종달새, 풀잎, 배꽃처럼 웃었고, 아기의 분홍 잇몸에선 새싹처럼 이가 나기 시작했다.

늘 평화만 지속된 건 아니었다. 긴장이 조성된 건 ‘이모’와 ‘고모’ 사이였다. 남편의 누이이자 딸아이의 고모는 우리 집안의 어른이자 그간 살림살이의 카운슬러였다. 그런데 고모가 시장을 봐서 냉장고를 정리해주면 이모는 은근히 싫은 티를 냈다. 부엌 지휘권자는 한 사람이어야 했다. 고모는 이모가 젖병 소독하는 방법이 맘에 안 들었고, 이모는 고모가 가끔 와서 잔소리만 한다고 입이 나왔다. 예전엔 고부 간 갈등이 문제였다면, ‘이모님’ 시스템이 정착된 지금은, 방문 가족들과의 관계 균형을 찾는 지혜가 필요했다.

사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이모님’이라는 존재는 외부자다. ‘식모’라는 이름으로 1960년대 도시로 유입된 농촌 처녀 이후 새롭게 대한민국 가정에 이식된 바다 건너 객식구. 문득 새로운 안주인으로 군림하려는 농촌 처녀의 욕망과 한 중산층 가정의 파멸을 그린 공포영화 <하녀>가 떠오른다. 부르주아 가정에 잠입해 가정을 해체시키는 수상한 식모들의 행각을 그린 박진규의 소설 <수상한 식모들>도 오버랩 되면서. 그녀들은 가사와 육아를 돕는 ‘메이드’인 동시에, 남편의 성욕을 자극해서 언제든 집안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젊은 도전자로 주부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물론 지금 대한민국 가정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을 성적인 라이벌로 생각하는 주부는 없다. 그러나 간혹 그녀들이 아파트 놀이터에 삼삼오오 모여 ‘주인집’ 흉을 보며 정보를 공유할 때는 괜스레 오싹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음식을 먹는 민족끼리도 ‘교포’와 ‘한국인’으로 계급이 나뉘고, 급여와 휴가 문제로 사소한 노사갈등도 생긴다. 어쨌든 국가가 해결해주지 않는 대한민국의 육아돌봄 시장에서 그들은 없어서는 안 될 인력이다. 조선족이 없었으면 워킹맘들은 어떻게 애키우며 회사를 다녔을까 싶을 만큼.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온 이모님에게 ‘친정 엄마’나 ‘친이모’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친구들도 의외로 많았다. 싱글맘인 친구는 딸아이가 초등학생이 될 때까지 10년이 넘도록 이모님과 살았다. 자신을 남편처럼 의지하던 이모님이 어느 날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는 이혼청구서를 받는 것 같았다고 했다.

“말인즉슨, 자기는 한창 돈을 벌어야 하는데 아이가 커서 할 일도 없는 이 집에서 월급 올려달라고는 차마 못하겠다. 그러니 나가겠다는 거지.” 친구는 화가 났지만, 잠시 후 냉정을 찾았다. “월급을 올려주는 대신, 한동네 사는 동생네집 아이를 며칠 더 봐주는 걸로 처리했어. 한편으로는 씁쓸하더라구. 10년 넘게 한집에서 살아왔어도 남은 남인 거지.” 반대로 이모님과 오손도손 잘 살았어도, 이쪽 사정으로 내보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럴 땐 마치 큰이모 시집 보내는 심정이 돼. 좋은 가정 만나서 맘 붙이고 다시 정착하길 바라면서.”

조선족 이모님과 관련된 사연 한두 가지 없으면, 진정한 워킹맘이 아니라고도 한다. 후배는 처음엔 젊은 이모님이 너무 맘에 들어 ‘언니 동생’처럼 지냈다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분이 결벽증을 드러내며 우리 가족한테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거에요. 할 수 없이 해고했죠. 그런데 그 뒤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더 가관이예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 세탁기 사용법도 몰라 끙끙대다 줄행랑 치는 사람, 나중엔 옴이라는 병을 가진 사람까지 왔어요. 별별 사람을 다 겪은 후에야 그 이모님께 전화해서 ‘돌아와달라’고 읍소했죠. 물론 저는 그 뒤 청소하는 파출부를 따로 고용해야 했지만요.” 아이가 이상한 말을 해서 녹음을 해봤더니 매일 낮에 이모님이 자기 남편을 집안으로 불러들였다는 이야기, 이유식 투정하는 아이에게 욕설을 퍼붓더라는 등의 ‘이모님 괴담’은 끝이 없다. 그러나 세상에 불운은 생의 양념처럼 있다. 나에게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할 뿐. 다행히도 나는 이제까지 큰 탈 없이 이모님과의 동거를 유지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아파트에 조선족들이 많아지면서 좋거나 싫거나 이모님이 브리지가 되어 전에 모르던 ‘이웃’이 부활되었다는 것이다. 이모님을 통해 6층 승희네가 해외로 휴가를 갔다거나 9층 민수네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도 안다. 3층 애기 엄마는 엘리베이터를 못 타게 해서 그 집 이모는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오르다 다리를 다쳤다거나, 허리가 꼬부라진 청소 할머니는 손자와 둘이 어렵게 산다는 이야기. 우리는 서로 이웃 이야기를 하면서 장단 맞춰 칭찬도 하고 흉도 본다. 그렇게 차가운 시멘트 아파트에 저녁 불빛처럼 이웃의 온기가 돌았다. 한번은 5층 여자가 나 몰래 경비 아저씨를 통해 우리 이모님을 스카우트 하려다 들통나 이웃끼리 얼굴 붉힐 뻔한 적도 있었다. 그때 든 생각은 어떻게 몰상식하게 내 ‘나와바리’의 식구를 ‘건드리나’였다.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지만, 내 딸은 이모님을 ‘엄마’라고 부른다. 하루에 채 2시간을 못 보는 나보다 24시간 붙어 있는 할머니가 ‘엄마’로 보이는 건 당연지사. 섭섭하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이모님이 딸아이 얼굴에 볼을 부비며 “하율아! 사랑해!”라고 할 때마다, 그 제비 같은 입에 이유식을 떠먹여줄 때마다 나는 내가 아기가 된 듯 행복감을 느낀다. 영화 <헬프>에서 “넌 친절하고 똑똑하고 소중한 아이야!”라고 일깨워주던 흑인 유모처럼, 우리 이모님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자존감을 딸에게 불어넣어 줄 것을 믿으며.

V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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