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각이 제일 행복합니다!>>
80세 <<몽고로친>>의 감수
필자는30년간의 기자생활을 하면서 잊지 못할 대접을 두번 받았다.
처음은 2007년 11월 6일에 발표된 나의 글 <<후반전에 멋진 꼴을!>>(길림신문)을 읽고 <<…보약을 먹은듯 기적같이 회생하여>> <<천하에 하나 밖에 없는 뿌리조각을 내놓겠다>>며 운명 전날밤까지 뿌리조각에 미친 리인규(그때 년세79세)옹이 감사의 뜻으로 로친더러 토닭곰을 만들어 필자한테 보내온 것이고 다음은 도문의 <<독서3자매>>할머니들(김영희80세, 임봉금89세, 송해숙76세)이 지난 2월 13일에 필자에게 대접의 술상을 차린 것이다.
할머니들의 대접을 받게 되기는 지난 1월 15일에 필자가 도문 문화사회구역의 김영희할머니를 취재한후 그의 사적이 신문, 방송, 텔레비에 소개되자 김영희할머니가 전화로 세번이나 너무나 감사하다며 초청하기에 마련된 것이다.
송해숙은 <<독서삼매>>로71세에 <<연변독서왕>>(2010년)으로 평선된 신문인물이고 임봉금은 수십년간 독서를 견지하며 80세에 <<새출발>>잡지에 자작시 <<고목인생>>을 발표한 신문인물이며 김영희는 소학교졸업생으로 72세에 천자문공부를 시작해 천자문을 쓰고 외우고 풀이하는 신문인물이다.
김영희의 사적은 임봉금 송해숙에게 소개, 송해숙이 필자에게 소개하여 발표되였다.
이날 대접상은 김영희의 손맛에 송해숙이 마련한 <<된장>>술로 진주 같은 경험담과 시, 노래로 이어졌다.
<<죽기전에 몽고로친을 세상에 알리려고 …>>
내가 죽기전에 책임을 다했다며 기뻐하는 임봉금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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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로친들과 화토를 놀면서 <몽고로친>을 알았소. <<몽고로친>>은 공부도 잘하고 료리도 잘하며 베풀고 노래하며 얼굴마저 꽃처럼 아름다워 흠을 할데 한곳도 없는 표준로친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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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면 산나물을 캐서 동네에 나눠주고 심지어 도토리를 주어서 묵을 만들어 동네를 대접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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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로년세계>>를18년간 기마다 몽땅 읽었는데 몽고로친 같은 사적이 없습데. 그래서 내가 죽기전에 몽고로친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책임감으로 송아매를 찾았소. 송아매령감이 기자였다니까... 그런데 송아매가 오선생을 모셔올 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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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선족들이 정말 머리가 대단하오. 된장으로 술까지 만들다니… 오늘 기분이 제일 좋소!
<<김학송시인을 대접하고 싶은데…>>
매일 새벽부터 책과 동무한다는 송해숙이 하루의 시간표를 소개하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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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언니 같은 두분이 있는것이 정말 행복하오. 전번에 김아매한테서 아매의 친필천자문을 선물로받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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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김학송시인의 시집을 읽는데 시인의 민족애, 연변애, 고향애에 탄복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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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를 읽으면 때로는 나도 시를 쓰면 되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나오…
<<…언덕마다 들판마다 옛말이 숨 쉬는 곳
나무마다 바위마다 전설이 주렁진 곳
골마다 계곡마다 자음과 모음이
돌돌 여울져 흐르는 곳
여기는 연변 –
세상에 하나뿐인 조선족의 고향!
아리랑 장단에 얼씨구-
천만년 우리 노래 불러야 하리
후손만대 혼의 노래 불러야 하리
비상한 기억으로 김학송의 <<연변찬가>>를 읊던 송해숙은 흥에 겨워 춤동작을 하면서 동년의 노래를 부른다
우리들은 새중국의 앞날의 주인
… …
대기 따라 씩씩하게 앞으로 나가자
시는 삶의 기쁨과 환희를 스스로 찾아낼수 있는 눈이며 귀이다.
시는 살맛을 낸다. 살맛을 내는것이 흥이다. 흥이 나면 노래하고 춤을 춘다.
바로 송해숙이 시, 노래, 춤을 다하는 살맛을 내는 할머니였다.
<<이시각이 제일 행복합니다!>>
<<나는 이때까지 한시도 세월을 헛되게 보내지 않았소.>>
<<몽고로친>>이 너무나 감개무량하다며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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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에서5살에 부모 따라 두만강을 건너와 교화현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16살부터 농사일을 했소. 일을 잘한덕에 생산대 대장까지 했다오. 결혼후에 남편 따라 내몽고에가서 림시공부터 시작하여 별일을 다하다가 나중에 개인식당을 운영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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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식당이 잘되기로 돈을 주머니로 벌었는데 조선족며느리를 삶으려고 식당을 접고1982년에 도문에 이사 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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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돈벌이로 한국에 가서 10년을 일했소. 2007년에 귀국할 때 돌아가서 무슨 일을 시작할것인가를 생각하던 끝에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할 일로 글공부를 선택했소. 서울 동대문시장문고에서 한석봉의 천자문책을 골랐더니 책방주인이 어디에서 왔느냐며 로인이 글공부를 하려는데 책값을 내지 말고 그냥 가라며 놀라합데. 나는 중국서 왔다며5000원을 내놓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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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두시간씩 글공부를 견지하는데 다른 로인들이 <그 나이에 공부를 해 무슨 소용이 있냐?>며 리해를 못하는데 그것이 아닙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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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하루도 세월을 헛되히 보내지 않았소. 나의 사적이 신문에 날 줄을 생각도 못했소. 나에게는 오늘의 이시각이 제일 행복하오!
<<사회의 인정을 받는 것이 얼마나 값진가를 알게 되였다>>는 김영희는 몽고초원의 노래에 이어 노래 <<류랑자>>의 가사를 읊으며 눈굽을 적셨다.
<<나도 이 시각이 제일 행복합니다!>>
오늘의 이 시각이 필자한테도 제일 행복했다. 조실부모로 부모사랑을 모르고 살아온 필자는 사회의 누님과 어머님들의 뭉친 사랑이 이렇게 뜨겁고 무거운 것을 처음 느꼈다.
자기 설음으로 흐르는 눈물을 참느라고 애썼건만 막을수 없었다. 한동안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있는 필자를 다감한 그들이 어린애를 달래는듯 어서 빨리 당신들의 노래값을 내라고 재촉한다.
년상분들의 재촉에 례의적으로 생고집을 부릴수 없었다.
<<…나도 이시각이 제일 행복합니다!>>
<<…단 노래는 부르겠는데 눈물로 끝까지 부르겠는지는 장담할수 없습니다…>>
쓸쓸한 가을바람 불어 오면은
사랑하는 우리 엄마 보고 싶어요
엄마 죽어 나비되고 내가 죽으면
꽃이 될때 그때마다 안아 주세요
동생아 울지말고 어서 자거라
네가 울면 내눈에서 피가 흐른다
어머님의 그리움으로 목이 메여 노래의 끝자락을 끝내 놓쳐버렸다.
고생의 뿌리는 쓰고 고생의 열매는 달다더니 고생의 열매가 이렇게도 꿀맛인줄 69나이에 절감했다
이 시각이 정말 행복하였다. 김영희할머니의 문을 나설 때 필자를 바래는 할머니들을 필자가 팔이 더 길었더라면 세분을 한품에 안고 응석을 부리고 싶었지만 따로 따로 한분씩 포옹하였다.
여느 때와는 달리 남들로부터 걸음이 빠르다는 필자는 오늘따라 어쩐지 걸음이 축이 안나며 귀로에서 머리가 그냥 김영희할머님이 계시는 문화사회구역에 돌려졌다.
오기활
사진설명;
<<이 시각이 제일 행복합니다!>>
(왼쪽으로부터 송해숙, 임봉금, 김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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