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빠른 생활절주만큼이나 하루가 멀다하게 바뀌는 가게 간판들. 상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슈퍼가, 리발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헤어샵이, 식당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커피숍이 들어서는 거리에는 화려한 간판들이 자리싸움이라도 하듯이 옹기종기 개성을 자랑하고있다.
그런 틈바구니속에 수줍고 소박하게 이름을 내건 간판이 보인다. 연길시 신화거리에 위치한 “조선족옷수선집”이다.
3평방도 되나마나한 가게, 내부에는 재봉틀을 들여놓아 겨우 두어명이 비비고 들어설만한 자리이다. 지경자(49세)씨는 쿵짝거리며 흘러나오는 트로트음악에 몸을 살짝 맡긴채 재봉틀에 마주앉아 부지런히 손을 놀린다.
“웬만한 옷은 수선해서 입을수 있는데 쉽게 버리려하니까 그것이 문제예요.”
지경자씨는 1987년에 고중을 졸업하자마자 친구한테서 재봉일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그렇게 장장 20년을 쭉 재단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일찍 연길시지하상점에 자리잡고 일할때는 점심식사를 할 시간도 없을만큼 호황이였다.
지경자씨가 하는 일은 바지단의 길이를 맞춰 잘라주거나 터진 옷을 기워주거나 크거나 작은 옷을 몸에 맞게 고쳐주는 일이 전부였다. 자질구레한 일 같아도 단골들은 지경자씨의 남다른 손재간에 흡족해하며 차츰 옷을 리폼한다거나 재활용하는 일감도 가져오군 했다.
“그때는 로지하 5호매대로 통했어요. 단골들도 많았구요.”
그 많던 단골들을 떼운건 지경자씨가 2010년에 한국로무를 나가면서부터였다. 소학생 딸에게 보다 나은 조건을 마련해주고저 할머니한테 맡겨두고 남편과 함께 한국행을 택했다.
“자식을 위해 돈벌이를 나가기는 했지만 솔직히 1~2년이 지나니 딸의 모습이 어렴풋해지더군요. 저금통장에 수자는 나날이 불어나도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경자씨는 지난해 초 딸의 고중입시를 앞두고 남편은 한국에 남겨둔채 4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침 지인이 하던 가게자리가 나졌고 지난해 5월부터 이 자그마한 가게에 “입주”하게 된것이다.
“벌이는 정말 시원치 않습니다. 그래도 아침이면 딸에게 따뜻한 밥을 해먹여서 학교를 보내고 저녁이면 딸 먼저 집에 도착해 저녁밥을 짓는다는것이 꿈같이 행복합니다.”
가다오다 들리는 고객이 전부이고 한견지를 수선해서 받는 수선비도 얼마 안되지만 지경자씨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졌기때문이죠. 돈을 버는 일 보다 딸아이의 사춘기를 무사히 넘겨주고 학업을 위해 든든한 뒤심이 되여주는 일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그나마 안위가 되는건 간혹 모르고 들린 고객이 옛날 단골손님이라는것이다. 한쪽 팔에 장애를 가진 옛날의 한 단골손님은 지경자씨를 알아보고 옛날처럼 한쪽팔을 짧게 고쳐달라고 무져놓았던 옷들을 전부 들고 찾아온 사연도 있다.
곁에서 지켜주지 못한 사이 사춘기를 맞은 딸의 방황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미여지는듯 했다는 지경자씨, 일요일엔 무조건 가게문을 닫고 딸을 위해 하루시간을 짜낸다. 요즘은 또 딸과 함께 심리상담도 받고 엄마들이 듣는 자녀교육강좌에도 참가하며 엄마로서 최선을 다 하고있다.
초봄의 해는 노루꼬리만큼은 아니더라도 눈깜작할새에 서쪽으로 기울어진다. 지경자씨는 오늘도 미련없이 가게 셔터문을 드르륵 내리고 딸아이 먼저 집에 도착하기 위한 발걸음을 다그친다.
연변일보 글·사진 리련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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