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인생은 언제나 초보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4월27일 15시32분    조회:164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생은 언제나 초보


                 정련

[서울=동북아신문] 이해한다고 안다고 함부로 말했던 모든 상대에게 사과한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겪고 화를 내고 하는 과정이 얼마나 다른 건지, 요즘 초보로서 새로이 겪는 모든 것들 때문에 세삼스럽게 배우고 있다.

  사윤이가 학교에 갔다.

  요즘 “1학년” 이라고 부른다.

  애가 조금 쑥스러워 하지만 너무 좋아한다.

  어제는 사윤이와 함께 방과후 과정과 학원, 뭘 할 건지 같이 고민했다. 사윤이 반의 밴드에도 가입했고 선생님과 인사도 나눴다. 첫째를 막 학교에 보낸 나를 포함한 초보엄마들이 서로 친절한 모습을 보이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알 수가 없어서 어려워 하고 있다. 

  남편은 내가 사윤이를 낳고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나의 극도로 주관적이고 다혈질 적이고 조급한 성격을 받아준 남편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엄마가 되고 나서 이런 점들을 바꿔가고 있다기 보다는 나의 이러한 점들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나의 이런 변화를 남편은 고맙게도 알아봐 주었다.

   사윤이를 가졌을 때가 2009년, 리먼사태이후 시장에 NPL이 쏟아져 나오고 접해보지 못했던 포트폴리오가 나오는 내가 있던 그 업종의 가장 “호황”이라고 해야 할 시기였다. “호황”이라는 것은, 만삭 때까지 2~3개월 연속 주말 포함 1시 퇴근하던 시기라는 말이다. 나의 체력은 늘 훌륭했다. 나날이 무거워지는 몸을 끌고, 무탈하게 일도 잘 하고 있었고 살림도 큰 지장이 없었다. 그 때 우리 팀에서는 임산부가 있다고 항상 보양식만 찾아다녔던 것 같다. 오리고기, 장어 등등. 당시 팀에서 배속 아가의 태명을 공모했다. 사윤이의 태명은 “아람이”였는데, 그 당시 팀장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었다. 밤이 잘 익어서 터지기 전의 모습을 말하는 단어라고 한다. 나는 내가 임산부라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니트를 입고 배들 동그랗게 드러내고 다녔다. 배를 만지며 뱃속 그 아이가 마냥 오래 된 친구처럼, 하루 일과와 감정을 공유하면서 많은 수다를 나눴다. 그때가 내가 한창 사법고시 공부를 하고 있던 시기 인지라, 태교라고 따로 신경 쓸 여유가 전혀 없었고, 그 야근을 하는 틈틈이 고시 공부도 하고 출근 지하철에서는 스도쿠도 풀고 다녔다. 일은 엑셀을 돌리는 일이었으니, 그때 형들이, 니네 애는 태여나면서 미적분정도는 떼고 나오겠다고 늘 그랬다. 출산을 하면 N을 주는 우리 회사와는 달리, 그때의 임산부인 나는 대리 승진과 E와 상당 금액의 성과급도 받았다. 출산휴가를 준비하면서 지난 3년간의 나의 일을 정리하고 내가 만져왔던 나만 익숙한 평가판을 남들도 알아보기 쉽게 정비해서 동료형들에게 가르쳐주고 넘겨드렸다. 그래서 퇴사가 더 편해 졌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연말의 딜을 마무리하고 1월4일 출산예정일부터, 출산휴가를 시작했다.

  2010년 1월 4일은 서울 수십년 간 눈이 제일 많이 왔던 날이었다. 남편이 8시에 차를 갖고 출근을 했는데, 11시에 전화 와서, “너무 도착하고 싶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회사의 시무식은 대부분 직원들이 출근을 못하면서 흐지부지 됬다고 한다. 나는, 오늘 예정대로 배가 아파온다면 산부인과까지 걸어가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농담을 하고 있었다.

  출산휴가는 냈고, 아이는 나오지 않고, 간만에 여유롭게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월 8일 금요일, 친구가 놀러  와서 같이 영화도 보고 같이 초밥도 먹고 신나게 놀았다. 사실은 초밥 먹으러 롯데백화점으로 가는 길에 배가 조금씩 아파왔는데, 이정도 아파서 애가 나온다면.. 에이 말도 안되,, 이러면서 친구 손을 잡고 눈길을 산책했던 것 같다. 때가 오후 2시쯤이였나. 그렇게 시름시름 조금씩 조금씩 규칙적으로 배가 아파왔는데도 잠시만… 하고 잠깐 섰다가 다시 가기를 반복했다. 남편이 11시가 넘어서야 퇴근해서 왔고, 낮에 혼자 본 “국가대표”를 남편과 다시 같이 봤다. 배가 조금 더 밀도 있게 아프기 시작했고, 나는 입원 준비 차 2주 이상 비울 집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끝나고 입원을 했을 때는 새벽 2시반쯤이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쓰나미처럼 아픔이 몰려왔고 간호사언니는 그렇게 아프다고 마구 힘주고 그러면 아이가 호흡을 할 수 마구 겁을 준다. 아이를 낳으려면 하늘이 노래져야 한다고 어른들이 많이 이야기했지만, 아이를 낳을 때보다 앞에 진통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1분마다 진통이 오는 건 사실인 것 같은데, 한번 왔을 때 1분에 끝나는지 10분에 끝나는 지 알 수 없고 큰 호흡을 하면서 아이에게 산소공급을 해줘야 하고 허벅지를 꼬집어서라도 그냥 참아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점심 12시에 드디어 이 아이와 만났다. 간호사언니는 막 나온 아이를 보고, “어머, 엄마 잖아…”라고 한다. 기적이 이런 건가, 12시간 이상을 부둥켜안고 아파했는데 아이가 나오는 순간, 세상에 내가 이렇게 멀쩡할 수 있다니 싶었다. 나는 신나게 아이를 낳았다고 문자를 돌리기 시작했다.

  입원실에 들어가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자궁수축이 잘 안된다고 시누이가 얼음덩이가 녹아서 물이 될 때까지 손으로 얼음을 잡고 나에게 냉 찜질을 해주셨다.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혼자가 되어 병실에 눕고 나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내가 엄마가 됬다고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아이는 낳았지만 내가 엄마라는 실감이 아직은 전혀 안들을 때였으니까. 그냥, 혼자서 아파하고 있을 때 늘 있을 법한 궁상인 것 같다. 엄마가 보고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었다.

  사람들이 쉽게 얘기하는 것처럼, 나랑 사윤이는 초보 엄마와 초보 아가로서 함께 잘 적응해 나갔다. 산후조리원에서 2시간에 한번씩 먹고 2시간씩 푹 자주는 그런 아가로 다른 엄마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1달이 되 가면서 이 아가는 많이 먹고 푹 자야 한다는 것을 터득하고 밤에 5시간 이상씩 자기 시작했다.

  결국, 내가 한 일은 별로 없다. 때가 되니 배가 아파와서 아이가 나왔고 때가 되니 아이고 먹고 자고 자라 준다.

  그냥, 누구나 때가 되면 겪어야 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을 유난스럽게 호들갑 떨고 그럴 것이 뭐가 있을까.

  친구가 그랬다. “대리”보다 “엄마”가 나에게 붙여진 가장 의미 있는 직급이라고. 그래서 때가 되어서 나도 인간으로서 조금 발전이라는 것을 해봐야 겠다는 욕심이 생겼고 나에게 있는 수 없는 “한계”와 “부족”한 것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무지”를 인정하면서 “과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는 내가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인내심이 좀 더 있을 수 있고 나에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이 이야기하는, 나는 “인간”이 되었다.

  사윤이가 3개월이 채 안되었을 때 회사 복귀를 위하여 첨으로 사윤이를 어린이집에 맡겼다. 집에 돌아왔는데 온통 사윤이 냄새여서 마음이 텅텅 빈 것 같고 뭘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라서 구석구석 대청소를 하고 이불이란 이불은 죄다 걷어서 빨았다. 워킹맘이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출산휴가 복귀하고 나서 주말 포함 야근의 시간이 3개월 이어졌다. 2010년은, IFRS를 준비하는 은행들에게 NPL이 이쓔가 되던 한해였고 나에게는 또 “호황”인 시장이었던 것이다. 사윤이 엄마로 애기 냄새 맡고 있던 내가 다시 직장인으로 몰입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진짜, 바빴다. 퇴사 전의 마지막 출장이 기억난다. 경남은행과 마지막 가격협상을 하기 위하여 마산에 갔었다. 새벽2시까지 합의를 보지 못하고 은행에서 나왔고 부산으로 넘어가서 서면에서 술을 마시고 다음날 부산역에서 마지막 숫자 작업과 마지막 협상카드를 던져놓고 올라왔던 것 같다. 그 시간 동안 사윤이는 자기 인생의 거사 “뒤집기”를 마침 아빠가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을 때 성공시켰고 신생아 옆에 눕혔더니 괴물처럼 보일 만큼 무럭무럭 자랐다.

  사윤이에게는 늘 미안하다. 엄마들이 첫째에 대한 마음이 대충 다 이럴 것 같은데, 나는 좀 더 많이 미안하다. 엄마가 목마를 시기에 많이 같이 못해줘서 미안하고 처음 고집부리고 뒤집어지고 소리지를 때 처음 음식을 거부하고 뱉을 때 미숙한 초보엄마로서의 모든 시행착오를 함께 겪어준 아이가 사윤이였으니. 항상 미안하다. 지금 또한 그렇다.

  학교에 따라가서 반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멍청한 초보 학부모 답게 말 한마디 못하고 손만 흔들어줬다. 시간이 펑크가 나서 첫날부터 낯선 사람들 손에 잡혀서 왔다 갔다를 여러번 했다고 한다. 물론, 사윤이는 뭐든 항상 스스로 잘 이겨내 줘서 초보 엄마가 큰 걱정을 안하게 늘 지켜줬다.

  “학교 어땠어? “

  “아직 익숙치 않은데, 괜찮은 것 같아. 뒷자리 애가 엄청 예뻐서 좋았어. ”

   저녁에 애들이 좋아하는 삼겹살집에 갔는데 사윤이가 음식을 다 먹고 나서 자리에 앉아서 잠들어버렸다. 웬간히 긴장 한게 아니었나 보다 싶어 너무 짠하고 그걸 웃으며 이겨내려고 하는 이 아이가 너무 대견스러웠다.

  사율이가 태어나면서 사윤이는 응석받이에서 대견스러운 언니가 되어버렸다. 산후조리원에 아가를 보러 와서도 아가가 만지면 부셔질까 조심스러워 했던 4살 짜리였다. 사윤이 품에 아가를 안겨주고 젖병을 쥐어 줬더니 조심스럽게 볼을 만지면서 젖병을 물렸다. 가끔은 살살 잔머리 굴려가면서 사율이 손에 장난감을 꼬셔 내기도 하고 사율이에게 야단치기도 하지만, 놀이터에 데려 갔다가 자기 화장실 급하다고 주변에 아주머니한데 사율이를 부탁하고 집으로 달려오는 멋진 언니다.

  사윤이가 “나도 소리지르고 야단치는 것이 나쁜 행동인지 아는데, 내가 성격이 나쁜 가봐, 잘 안 참아진다…“라고 고민한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 닮아서 그런 거야.. ”

  사윤이는 우리 시댁의 10년만의 아가 여서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래서 사윤이의 마음이 따뜻하고 사람을 좋아하나 싶기도 하다. 사촌 언니오빠들이 첫 월급으로 사윤이 옷을 사줄 정도 였으니, 사윤이가 사람을 안 좋아하는 것이 되려 이상 하겠지. 우리 집에 와주는 통닭아저씨한데 달려나가서 “저의 이름은 박사윤인데요,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라고 반갑게 인사도 해주고, “사율아 너도 나와서 인사 해야지…“하고 시키기도 한다. 세브에 갔을 때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는데 이 아이들이 동내 아이들을 친구라고 다 몰고 와서는 함께 놀기도 했다. 고모네 집에서 고모랑 고모부의 결혼사진을 집게 가져가서 늘 보겠다고 달라고 하는 아이다.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면 많이 미안해하는 그런 아이. 우리 사윤이를 자랑할 때 늘 하는 이야기가 참 정이 많고 사람을 좋아하는 아이라는 점이다.

  나나, 남편이나 초보 부모로서 교육철학 같은 것은 딱히 없다. 아이가 즐거워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냥 사회생활을 하면서 최소한의 메너와 배려 정도를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아이와 상의하고 아이의 결정을 존중해주려고 한다. 남편과 나의 육아관이 같다는 것이 참 고마운 일이고 남편이 기꺼이 책을 읽고 공부를 해가면서 아이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함께 겪어가는 초보 생활에 참 큰 힘이 된다.

  어제 사윤이랑 같이 방과후과정을 뭘 할 껀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사윤이가 하고 싶은 것, 엄마가 시키고 싶은 것을 일단 골라내고 계산기로 돈을 두드려보면서 뺄 것은 빼고, 협상과 밀땅을 하는 나름 진지한 시간이었다. 재미있는 건, 클래이 아트, 미술, 리듬줄넘기는 합의를 봤는데 방송 댄스는 아이가 너무 쑥스러워 해서 살짝 강제로 시켰다. 공부방은 재미있었는데 수학은 재미없어서 안하겠다고 했고 영어를 할 껀지 물어봤더니 하고싶지는 않은데 학교에서 등수가 밀리는 건 싫고, 지금부터 할까… 하면서 사윤이가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일단은 학교 공부만 하고 나중에 사윤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해도 늦지 않으니 일단은 하지 말자고 했다.

  사윤이는 5살부터 피아노와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고 둘 다는 안되니 하나만 고르라고 했더니 일주일을 고민한 아이다. 7살에 보내주기로 약속했다가 선생님마저도 이 아이가 피아노를 너무 간절하게 하고 싶어한다고 미리 좀 보내주면 안되겠냐고 하셔서 6살에 피아노를 시작했다. 지금도 피아노는 학원에서 열심히 배우고 싶어해서 학원은 피아노 하나만 일단 시작했다. 그때 포기한 미술이 방과후과정에 있어서 신나게 신청하자고 했다.

  우리는 사윤이가 말을 하지 못할 때부터 사윤이의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의견을 존중해주려고 노력했다. 엄마아빠가 원하는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원하는 아이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생각이 많다. 그들 스스로의 인생에 있어서 훨씬 합리적이고 진지하다. 사윤이는 그런 모습으로 초보 부모인 우리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우리 잘하고 있지? 응, 우리 잘하고 있는 것 같아.

  사윤이가 4살이 되면서 영아가 아닌 유아를 맡는 어린이집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사윤이가 기존 어린이집에서는 말이 다른 아이들보다 빠르다 보니 확실한 리더였다. 놀이를 하더라도 사윤이가 역할을 배분해주고 그랬다고 한다. 그런데 새로운 어린이집에 가서 보니 이미 말을 다 잘하고 자기들끼리 질서가 잡혀있는 아이들과 새로이 함께 하게 되어있었는데 사윤이는 자기가 하던 대로 “리더”놀이를 하려고 하니 애들이 따라주지 않는다. 선생님과 상담을 하는데 사윤이가 아이들이 말을 안 들으면 이러이러해서 너랑 놀지 않을꺼야.. 이런 식으로 자진 왕따가 되었다고 하신다. 남편과 상의했다. 그냥 내버려두고 자기가 왕따를 당해봐야 친구가 되기 위하여 자기가 해야 하는 것이 뭔지를 스스로 터득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사윤이에게 “친구”를 물어보면, 나는 어떤 친구를 좋아하는데 그 친구는 나 싫어해.. 라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 친구가 사윤이 싫어해서 속상했어? “

  “아니, 다른 친구랑 놀면 되지 뭐.”

  “그래, 너만 안 속상하면 괜찮아, 어떻게 모든 친구가 다 나를 좋아해 주겠어.. “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 그때 나 싫어한다고 했던 그 친구 있지, 걔도 나 좋아한다… “

  사윤이는 잘 적응 해나가고 있었다.

  반년 채 안 지났을 때 였다. 5살이 되면서 또다시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친구들이 대체적으로 사윤이를 좋아하고 사윤이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사윤이의 역할 배분을 따르지 않는 아이가 있으면 사윤이는 다른 친구들에게 저 친구가 저러 저러하니 저 친구랑 놀지 마, 라고 했고 다른 친구들은 순진하게, 그러자.. 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과 또 상의했다. 이건 그냥 두면 안되는 일인 것 같았다. 우리는 사윤이가 다른 친구의 다른 생각을 들어주는 것에 대하여 이 사람들이 왜 저러지 싶을 정도로 폭풍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사윤이가 나한데 이런 말을 한다.

  “엄마는 참 똑똑한 것 같아.”

  “왜?”

  “엄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면 한번에 딱 알아 듣잖아.”

  “그건 니가 말을 정확하게 잘 해서 그래.”

  “근데 내 친구들 중에 내가 말을 하면 바로 알아듣는 애가 있고 뭔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애가 있어. 걔네들이랑 놀기가 너무 싫어.”

사윤이는 언어에 예민한 아이다.

  어떤 만화에서 “도깨비들은 별을 보는 것을 무척 좋아한대요.”라는 대사가 나왔는데 대부분의 3살짜리라면 “도깨비는 별을 좋아하는구나.. “라는 정보가 입력되었을 것 같은데 사윤이는 “무척”에 꽂히는 그런 아이다.

  “사윤아, 바깥 놀이를 하면 니가 달리기가 빨라 아니면 남자친구들이 빨라? “

  “남자친구들이 빠르지.”

  “그럼 남자친구들이 너 빨리 못 달린다고 너랑 안 놀아주니? “

  “아니지, “

  “그래, 아이들이 자라다 보면 어떤 일을 좀 먼저 잘하는 애들이 있고 좀 늦게 잘하는 애들이 있어. 특히 남자친구들은 말을 배우는 것은 여자친구들보다 보통 느려. 그러면 빨리 잘하는 애가 배려하고 놀아 주는 거지 늦게 잘하는 애가 놀아 주겠어? “

  “듣고 보니 그러네. “

  사윤이는 자기만의 사회생활을 제법 진지하게 잘 하고 있다.

  남편과 나는 늘 이렇게 대화한다.

  “우리 잘하고 있지? “

  “응, 우리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다른 사람을 오롯이 신뢰하는 것이란 이런거 구나, 하고 이 아이는 나에게 항상 가르침을 준다. 덕분에, 결정과 책임을 오롯이 넘겨줘도 이 아이들은 해낼 수 있겠구나를 회사에 와서도 살짝 시도를 해보게 되었고 그런 시도에 나와 함께 하는 아이들은 사윤이 만큼이나 “나 잘하고 있어”라는 자신감을 더 만들어준다.

 이렇게 나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의 학부모, 지금의 팀, 2017년, 모든 것에 있어서 나는 또다시 초보인 것이고 또다시 나의 부족함을 들춰내고 인정하면서 “인간”이 되가는 과정을 겪겠지. 감히 겪어보지 못하였던 것들에 아는 척을 하면서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거짓말”을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사과하며, 내가 겪는 순간순간이 초보이고 새로운 것임을 더 신선하게 더 생생하게 그리고 사윤이 만큼이나 진지하게 잘 살아갈 것이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연변가정연구소에서는 7월 30일 문화봉사자팀 평생교육프로그램 회지 《한 알의 씨앗》 종합본 출간의식을 개최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자”는 신조의 새싹을 피웠다. 2008년 11월 첫 강좌를 시작으로 이듬해에 첫 창간호가 출간되기까지 팀원들은 열심히 필기도 하면서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자신들의...
  • 2017-07-31
  • 위홍산: “긴급한 상황에서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홍수로 제방이 파손되여 마을이 큰 피해를 입게 되였을 때 과감히 자기의 농업용 뜨락또르 차바곤으로 제방을 보호한 촌민이 있다.   왕청현 천교령진 신화촌 촌민 위홍산(59세)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21일, 백년일우의 홍수가 들이닥쳐 제방이...
  • 2017-07-28
  • 재칭다오 동문들이 하얼빈 조1중 교장단일행을 뜨겁게 맞이하고 있다.       (흑룡강신문=칭다오)박영만 기자=헤이룽장성조선족상회 산둥분회 임홍길 회장을 위수로 하는 하얼빈조선족제1중학교 졸업생들이 오는 9월 30일 70돐을 맞이하는 하얼빈 모교에 현금 5만 위...
  • 2017-07-28
  • 43만원어치의 물품 조달   우리 주에 큰 범위 폭우가 내린 후 주적십자회는 제일 시간에 긴급예비안을 가동, 상급 적십자회에 재해정황, 긴급전이인원수와 필요되는 구조물자를 신청했다.   20일, 주적십자회는 이불 1000채와 천막 10개를 안도, 돈화, 왕청 등 홍수피해가 엄중한 지역에 보내주고 도문, 룡정 등...
  • 2017-07-28
  • “폭우로 홍수 피해를 입은 리재민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는가? 생활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연길시 북산가두 판사처 리금수부주임에게 기부금을 전해 주는 김봉숙(좌 1)   연길시 북산가두에서 살고 있는 맹인 김봉숙은 련며칠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자금...
  • 2017-07-27
  • 1987년 졸업을 앞두고 길림시 풍만수력발전소에서. 세상에 자기의 제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스승이 없고 또 자기의 스승을 존중하지 않는 제자도 없으리라. 교원생활 29년을 마치고 이미 10년전에 퇴직한 나에게 30년전의 제자 황해경이 전화를 걸어온 것은 3년전 가을의 어느날이였다. “선생님, 아무쪼록 로년에 신체...
  • 2017-07-26
  • 홍수는 지나갔지만 그렇다고 만사가 해결된게 아니다. 집이 통채로 홍수에 떠밀려갔고 논밭이 물에 잠겨 살길이 막막하다. 홍수방지, 재해대처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구경 뭘 할수 있을가? 요즘 협회나 췬에서 자원봉사, 의연금 모금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한곳에 어려움이 있으면 모두가 일...
  • 2017-07-25
  • ‘아름다운 추억’ 응모작품 (28) ◇조동관(장춘) 로인회 활동에서 연설하고 있는 필자 1970년대 중엽의 어느 한 초여름의 청명한 날씨였다. 서란시를 끼고 있는 영안대대 순인소대에서는 모내기 고조에 진입했다. 하긴 하지까지 가지 않고 다문 2-3일이라도 앞당길 예산이다. 논판에 심어놓은 모들은 새파랗게 ...
  • 2017-07-25
  • 취재후기 | 연해지역 조선족 탐방 남경편(1) 남경에서 15년 나를 살게한 힘 가족   연해지역 조선족탐방 오늘 만난 첫 주인공은 23세에 남경생활을 시작한 최군(39세)씨다. 최군과의 인터뷰는 “혹시 도문의 오지공장을 아십니까?”라는 물음으로 시작되였다. 굴뚝, 김장독을 만드는 오지공장, 그곳이 대학...
  • 2017-07-25
  • 19일 저녁 7시부터 안도현의 대부분 향, 진에 큰비, 폭우가 내려 20일 오후 2시까지 안도현의 평균 강수량은 55.3밀리메터에 달했고 신합향, 석문진 등 5개 향진의 25개 마을이 정도부동하게 피해를 입었다. 특히 명월진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홍수로 도시 전체가 침수상태에 빠졌다.  수대의 차량이 홍수에 떠밀려갔고...
  • 2017-07-23
  • 보다 많은 시민들이 곤트란쉐리에 대한 리해를 돕기 위해 곤트란쉐리에서는 종종 체험활동을 진행한다. 특히 7,8월은 “방학체험월”로서 많은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7월19일에도 한차례의 “친자활동(亲子活动)”을 진행, 후사모(후대사랑협회)와 함께 빵만들기 체험을 조직했다. 자상...
  • 2017-07-20
  •   (흑룡강신문=하얼빈)상지시에 거주하는 구대봉(65세)씨는 순박한 농민인데 그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보면 실로 자랑차다.   구대봉씨는 이전에 연수현, 상지현 등지의 여러 시골마을들에서 농사를 지으며 선후로 생산대의 보관원사업을 6년간, 재량사업을 7년간, 소대와 대대의 로년협회 회장사업을 도합 7년간 했다....
  • 2017-07-20
  • 윤수범동지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본인과 그의 가족들도 알고 있은지 오래 되고 우리도 일찍 알고 있었으니 모두 사상준비는 되여 있었으나 정작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접하고보니 정말 애통하기 그지없었다.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부분적 회원들과 함께 있는 윤수범(앞줄 오른쪽 세번째) 윤수범은 나...
  • 2017-07-19
  • ‘아름다운 추억’ 응모작품 (26) ◇양상태(길림) 1967년에 찍은 결혼기념사진 결혼사진을 보니 신혼생활이 눈앞에 삼삼히 떠오른다. 1967년 가을걷이가 끝난 후 어느 날 나와 자형은 소개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우리 동네와 20여리 상거한 합달만 마을에 선보러 갔다. 처녀 집에 도착하자 처녀의 식구들과 한...
  • 2017-07-18
  • 누군가를 한두번 돕기는 쉬워도 달마다 찾아가 꾸준히 관심하고 걱정하고 도와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외롭게 자라는 아이들에게 든든한 바람막이가 ...
  • 2017-07-13
  • 나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아버지이다. 그런데 십여년전부터 숱한 자식들이 생겼다. 십여넌전에 나는 우연하게 내가 살고 있는 주변에 불우한 아이들이 많다는 걸 발견하고 사랑애심협회를 꾸렸다. 여기저기 뛰여다니면서 모금해서는 불우한 애들에게 학용품을 사주고 대학 가는 애들에게 학비도 마련해 주고 사람...
  • 2017-07-10
  • 화룡 문화가두 문흥사회구역 독거로인 위해 대리가정 결성   화룡시 문화가두 문흥사회구역에서는 대리자녀봉사팀을 뭇고 사회구역 간부들이 독거로인들과 대리가정을 결성하여 독거로인에게 따뜻한 보살핌을 전해주고 있다.   문흥사회구역에는 독거로인이 도합 114명 있는데 로인들은 슬하에 자녀가 없거나 자...
  • 2017-07-05
  • 연길시 대흥마을 김광철대장에 대한 촌민들의 찬사 집집이 된장 가공산업을 벌려 ‘장마을’로 알려지는 연길시 의란진 구룡촌 대흥마을, 장맛뿐이 아니라 화목하고 인정 많은 대흥은 또한 살맛 나는 마을이란다. 그래서인지 대흥에서는 도시로 이사나간 집이 극히 적고 서로 좋은 일에...
  • 2017-07-03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3) ◇신학봉(룡정) 1989년 겨울 가족이 함께 내 나이 금년에 80이라 지금으로부터 72년 전에 우리 집은 평안구 평안촌 3여(지금의 동성용진 평안촌 3툰)에서 살았다. 그때 나는 집에서 5리 떨어져 있는 평안소학교(동성소학교)에 다녔다. 하루는 동학들과 뛰놀다 다리를 상하...
  • 2017-06-27
  • “아마도 박선생이 지구촌의 ‘해당화대통령’으로 불릴 것 갔습니다. 지금부터 품위 있게 ‘대통령걸음’을 련습하세요… 허 허 허” 지난 5월 7일 아침 식사 때 조선족의 “리시진” (김수철. 93세, 연변농학원 교수, 식물박사)이  40년하제자(박영호, 54)에게 술을...
  • 2017-06-26
‹처음  이전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