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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언제나 초보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4월27일 15시32분    조회:1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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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언제나 초보


                 정련

[서울=동북아신문] 이해한다고 안다고 함부로 말했던 모든 상대에게 사과한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겪고 화를 내고 하는 과정이 얼마나 다른 건지, 요즘 초보로서 새로이 겪는 모든 것들 때문에 세삼스럽게 배우고 있다.

  사윤이가 학교에 갔다.

  요즘 “1학년” 이라고 부른다.

  애가 조금 쑥스러워 하지만 너무 좋아한다.

  어제는 사윤이와 함께 방과후 과정과 학원, 뭘 할 건지 같이 고민했다. 사윤이 반의 밴드에도 가입했고 선생님과 인사도 나눴다. 첫째를 막 학교에 보낸 나를 포함한 초보엄마들이 서로 친절한 모습을 보이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알 수가 없어서 어려워 하고 있다. 

  남편은 내가 사윤이를 낳고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나의 극도로 주관적이고 다혈질 적이고 조급한 성격을 받아준 남편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엄마가 되고 나서 이런 점들을 바꿔가고 있다기 보다는 나의 이러한 점들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나의 이런 변화를 남편은 고맙게도 알아봐 주었다.

   사윤이를 가졌을 때가 2009년, 리먼사태이후 시장에 NPL이 쏟아져 나오고 접해보지 못했던 포트폴리오가 나오는 내가 있던 그 업종의 가장 “호황”이라고 해야 할 시기였다. “호황”이라는 것은, 만삭 때까지 2~3개월 연속 주말 포함 1시 퇴근하던 시기라는 말이다. 나의 체력은 늘 훌륭했다. 나날이 무거워지는 몸을 끌고, 무탈하게 일도 잘 하고 있었고 살림도 큰 지장이 없었다. 그 때 우리 팀에서는 임산부가 있다고 항상 보양식만 찾아다녔던 것 같다. 오리고기, 장어 등등. 당시 팀에서 배속 아가의 태명을 공모했다. 사윤이의 태명은 “아람이”였는데, 그 당시 팀장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었다. 밤이 잘 익어서 터지기 전의 모습을 말하는 단어라고 한다. 나는 내가 임산부라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니트를 입고 배들 동그랗게 드러내고 다녔다. 배를 만지며 뱃속 그 아이가 마냥 오래 된 친구처럼, 하루 일과와 감정을 공유하면서 많은 수다를 나눴다. 그때가 내가 한창 사법고시 공부를 하고 있던 시기 인지라, 태교라고 따로 신경 쓸 여유가 전혀 없었고, 그 야근을 하는 틈틈이 고시 공부도 하고 출근 지하철에서는 스도쿠도 풀고 다녔다. 일은 엑셀을 돌리는 일이었으니, 그때 형들이, 니네 애는 태여나면서 미적분정도는 떼고 나오겠다고 늘 그랬다. 출산을 하면 N을 주는 우리 회사와는 달리, 그때의 임산부인 나는 대리 승진과 E와 상당 금액의 성과급도 받았다. 출산휴가를 준비하면서 지난 3년간의 나의 일을 정리하고 내가 만져왔던 나만 익숙한 평가판을 남들도 알아보기 쉽게 정비해서 동료형들에게 가르쳐주고 넘겨드렸다. 그래서 퇴사가 더 편해 졌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연말의 딜을 마무리하고 1월4일 출산예정일부터, 출산휴가를 시작했다.

  2010년 1월 4일은 서울 수십년 간 눈이 제일 많이 왔던 날이었다. 남편이 8시에 차를 갖고 출근을 했는데, 11시에 전화 와서, “너무 도착하고 싶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회사의 시무식은 대부분 직원들이 출근을 못하면서 흐지부지 됬다고 한다. 나는, 오늘 예정대로 배가 아파온다면 산부인과까지 걸어가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농담을 하고 있었다.

  출산휴가는 냈고, 아이는 나오지 않고, 간만에 여유롭게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월 8일 금요일, 친구가 놀러  와서 같이 영화도 보고 같이 초밥도 먹고 신나게 놀았다. 사실은 초밥 먹으러 롯데백화점으로 가는 길에 배가 조금씩 아파왔는데, 이정도 아파서 애가 나온다면.. 에이 말도 안되,, 이러면서 친구 손을 잡고 눈길을 산책했던 것 같다. 때가 오후 2시쯤이였나. 그렇게 시름시름 조금씩 조금씩 규칙적으로 배가 아파왔는데도 잠시만… 하고 잠깐 섰다가 다시 가기를 반복했다. 남편이 11시가 넘어서야 퇴근해서 왔고, 낮에 혼자 본 “국가대표”를 남편과 다시 같이 봤다. 배가 조금 더 밀도 있게 아프기 시작했고, 나는 입원 준비 차 2주 이상 비울 집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끝나고 입원을 했을 때는 새벽 2시반쯤이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쓰나미처럼 아픔이 몰려왔고 간호사언니는 그렇게 아프다고 마구 힘주고 그러면 아이가 호흡을 할 수 마구 겁을 준다. 아이를 낳으려면 하늘이 노래져야 한다고 어른들이 많이 이야기했지만, 아이를 낳을 때보다 앞에 진통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1분마다 진통이 오는 건 사실인 것 같은데, 한번 왔을 때 1분에 끝나는지 10분에 끝나는 지 알 수 없고 큰 호흡을 하면서 아이에게 산소공급을 해줘야 하고 허벅지를 꼬집어서라도 그냥 참아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점심 12시에 드디어 이 아이와 만났다. 간호사언니는 막 나온 아이를 보고, “어머, 엄마 잖아…”라고 한다. 기적이 이런 건가, 12시간 이상을 부둥켜안고 아파했는데 아이가 나오는 순간, 세상에 내가 이렇게 멀쩡할 수 있다니 싶었다. 나는 신나게 아이를 낳았다고 문자를 돌리기 시작했다.

  입원실에 들어가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자궁수축이 잘 안된다고 시누이가 얼음덩이가 녹아서 물이 될 때까지 손으로 얼음을 잡고 나에게 냉 찜질을 해주셨다.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혼자가 되어 병실에 눕고 나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내가 엄마가 됬다고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아이는 낳았지만 내가 엄마라는 실감이 아직은 전혀 안들을 때였으니까. 그냥, 혼자서 아파하고 있을 때 늘 있을 법한 궁상인 것 같다. 엄마가 보고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었다.

  사람들이 쉽게 얘기하는 것처럼, 나랑 사윤이는 초보 엄마와 초보 아가로서 함께 잘 적응해 나갔다. 산후조리원에서 2시간에 한번씩 먹고 2시간씩 푹 자주는 그런 아가로 다른 엄마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1달이 되 가면서 이 아가는 많이 먹고 푹 자야 한다는 것을 터득하고 밤에 5시간 이상씩 자기 시작했다.

  결국, 내가 한 일은 별로 없다. 때가 되니 배가 아파와서 아이가 나왔고 때가 되니 아이고 먹고 자고 자라 준다.

  그냥, 누구나 때가 되면 겪어야 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을 유난스럽게 호들갑 떨고 그럴 것이 뭐가 있을까.

  친구가 그랬다. “대리”보다 “엄마”가 나에게 붙여진 가장 의미 있는 직급이라고. 그래서 때가 되어서 나도 인간으로서 조금 발전이라는 것을 해봐야 겠다는 욕심이 생겼고 나에게 있는 수 없는 “한계”와 “부족”한 것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무지”를 인정하면서 “과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는 내가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인내심이 좀 더 있을 수 있고 나에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이 이야기하는, 나는 “인간”이 되었다.

  사윤이가 3개월이 채 안되었을 때 회사 복귀를 위하여 첨으로 사윤이를 어린이집에 맡겼다. 집에 돌아왔는데 온통 사윤이 냄새여서 마음이 텅텅 빈 것 같고 뭘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라서 구석구석 대청소를 하고 이불이란 이불은 죄다 걷어서 빨았다. 워킹맘이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출산휴가 복귀하고 나서 주말 포함 야근의 시간이 3개월 이어졌다. 2010년은, IFRS를 준비하는 은행들에게 NPL이 이쓔가 되던 한해였고 나에게는 또 “호황”인 시장이었던 것이다. 사윤이 엄마로 애기 냄새 맡고 있던 내가 다시 직장인으로 몰입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진짜, 바빴다. 퇴사 전의 마지막 출장이 기억난다. 경남은행과 마지막 가격협상을 하기 위하여 마산에 갔었다. 새벽2시까지 합의를 보지 못하고 은행에서 나왔고 부산으로 넘어가서 서면에서 술을 마시고 다음날 부산역에서 마지막 숫자 작업과 마지막 협상카드를 던져놓고 올라왔던 것 같다. 그 시간 동안 사윤이는 자기 인생의 거사 “뒤집기”를 마침 아빠가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을 때 성공시켰고 신생아 옆에 눕혔더니 괴물처럼 보일 만큼 무럭무럭 자랐다.

  사윤이에게는 늘 미안하다. 엄마들이 첫째에 대한 마음이 대충 다 이럴 것 같은데, 나는 좀 더 많이 미안하다. 엄마가 목마를 시기에 많이 같이 못해줘서 미안하고 처음 고집부리고 뒤집어지고 소리지를 때 처음 음식을 거부하고 뱉을 때 미숙한 초보엄마로서의 모든 시행착오를 함께 겪어준 아이가 사윤이였으니. 항상 미안하다. 지금 또한 그렇다.

  학교에 따라가서 반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멍청한 초보 학부모 답게 말 한마디 못하고 손만 흔들어줬다. 시간이 펑크가 나서 첫날부터 낯선 사람들 손에 잡혀서 왔다 갔다를 여러번 했다고 한다. 물론, 사윤이는 뭐든 항상 스스로 잘 이겨내 줘서 초보 엄마가 큰 걱정을 안하게 늘 지켜줬다.

  “학교 어땠어? “

  “아직 익숙치 않은데, 괜찮은 것 같아. 뒷자리 애가 엄청 예뻐서 좋았어. ”

   저녁에 애들이 좋아하는 삼겹살집에 갔는데 사윤이가 음식을 다 먹고 나서 자리에 앉아서 잠들어버렸다. 웬간히 긴장 한게 아니었나 보다 싶어 너무 짠하고 그걸 웃으며 이겨내려고 하는 이 아이가 너무 대견스러웠다.

  사율이가 태어나면서 사윤이는 응석받이에서 대견스러운 언니가 되어버렸다. 산후조리원에 아가를 보러 와서도 아가가 만지면 부셔질까 조심스러워 했던 4살 짜리였다. 사윤이 품에 아가를 안겨주고 젖병을 쥐어 줬더니 조심스럽게 볼을 만지면서 젖병을 물렸다. 가끔은 살살 잔머리 굴려가면서 사율이 손에 장난감을 꼬셔 내기도 하고 사율이에게 야단치기도 하지만, 놀이터에 데려 갔다가 자기 화장실 급하다고 주변에 아주머니한데 사율이를 부탁하고 집으로 달려오는 멋진 언니다.

  사윤이가 “나도 소리지르고 야단치는 것이 나쁜 행동인지 아는데, 내가 성격이 나쁜 가봐, 잘 안 참아진다…“라고 고민한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 닮아서 그런 거야.. ”

  사윤이는 우리 시댁의 10년만의 아가 여서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래서 사윤이의 마음이 따뜻하고 사람을 좋아하나 싶기도 하다. 사촌 언니오빠들이 첫 월급으로 사윤이 옷을 사줄 정도 였으니, 사윤이가 사람을 안 좋아하는 것이 되려 이상 하겠지. 우리 집에 와주는 통닭아저씨한데 달려나가서 “저의 이름은 박사윤인데요,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라고 반갑게 인사도 해주고, “사율아 너도 나와서 인사 해야지…“하고 시키기도 한다. 세브에 갔을 때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는데 이 아이들이 동내 아이들을 친구라고 다 몰고 와서는 함께 놀기도 했다. 고모네 집에서 고모랑 고모부의 결혼사진을 집게 가져가서 늘 보겠다고 달라고 하는 아이다.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면 많이 미안해하는 그런 아이. 우리 사윤이를 자랑할 때 늘 하는 이야기가 참 정이 많고 사람을 좋아하는 아이라는 점이다.

  나나, 남편이나 초보 부모로서 교육철학 같은 것은 딱히 없다. 아이가 즐거워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냥 사회생활을 하면서 최소한의 메너와 배려 정도를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아이와 상의하고 아이의 결정을 존중해주려고 한다. 남편과 나의 육아관이 같다는 것이 참 고마운 일이고 남편이 기꺼이 책을 읽고 공부를 해가면서 아이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함께 겪어가는 초보 생활에 참 큰 힘이 된다.

  어제 사윤이랑 같이 방과후과정을 뭘 할 껀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사윤이가 하고 싶은 것, 엄마가 시키고 싶은 것을 일단 골라내고 계산기로 돈을 두드려보면서 뺄 것은 빼고, 협상과 밀땅을 하는 나름 진지한 시간이었다. 재미있는 건, 클래이 아트, 미술, 리듬줄넘기는 합의를 봤는데 방송 댄스는 아이가 너무 쑥스러워 해서 살짝 강제로 시켰다. 공부방은 재미있었는데 수학은 재미없어서 안하겠다고 했고 영어를 할 껀지 물어봤더니 하고싶지는 않은데 학교에서 등수가 밀리는 건 싫고, 지금부터 할까… 하면서 사윤이가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일단은 학교 공부만 하고 나중에 사윤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해도 늦지 않으니 일단은 하지 말자고 했다.

  사윤이는 5살부터 피아노와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고 둘 다는 안되니 하나만 고르라고 했더니 일주일을 고민한 아이다. 7살에 보내주기로 약속했다가 선생님마저도 이 아이가 피아노를 너무 간절하게 하고 싶어한다고 미리 좀 보내주면 안되겠냐고 하셔서 6살에 피아노를 시작했다. 지금도 피아노는 학원에서 열심히 배우고 싶어해서 학원은 피아노 하나만 일단 시작했다. 그때 포기한 미술이 방과후과정에 있어서 신나게 신청하자고 했다.

  우리는 사윤이가 말을 하지 못할 때부터 사윤이의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의견을 존중해주려고 노력했다. 엄마아빠가 원하는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원하는 아이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생각이 많다. 그들 스스로의 인생에 있어서 훨씬 합리적이고 진지하다. 사윤이는 그런 모습으로 초보 부모인 우리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우리 잘하고 있지? 응, 우리 잘하고 있는 것 같아.

  사윤이가 4살이 되면서 영아가 아닌 유아를 맡는 어린이집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사윤이가 기존 어린이집에서는 말이 다른 아이들보다 빠르다 보니 확실한 리더였다. 놀이를 하더라도 사윤이가 역할을 배분해주고 그랬다고 한다. 그런데 새로운 어린이집에 가서 보니 이미 말을 다 잘하고 자기들끼리 질서가 잡혀있는 아이들과 새로이 함께 하게 되어있었는데 사윤이는 자기가 하던 대로 “리더”놀이를 하려고 하니 애들이 따라주지 않는다. 선생님과 상담을 하는데 사윤이가 아이들이 말을 안 들으면 이러이러해서 너랑 놀지 않을꺼야.. 이런 식으로 자진 왕따가 되었다고 하신다. 남편과 상의했다. 그냥 내버려두고 자기가 왕따를 당해봐야 친구가 되기 위하여 자기가 해야 하는 것이 뭔지를 스스로 터득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사윤이에게 “친구”를 물어보면, 나는 어떤 친구를 좋아하는데 그 친구는 나 싫어해.. 라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 친구가 사윤이 싫어해서 속상했어? “

  “아니, 다른 친구랑 놀면 되지 뭐.”

  “그래, 너만 안 속상하면 괜찮아, 어떻게 모든 친구가 다 나를 좋아해 주겠어.. “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 그때 나 싫어한다고 했던 그 친구 있지, 걔도 나 좋아한다… “

  사윤이는 잘 적응 해나가고 있었다.

  반년 채 안 지났을 때 였다. 5살이 되면서 또다시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친구들이 대체적으로 사윤이를 좋아하고 사윤이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사윤이의 역할 배분을 따르지 않는 아이가 있으면 사윤이는 다른 친구들에게 저 친구가 저러 저러하니 저 친구랑 놀지 마, 라고 했고 다른 친구들은 순진하게, 그러자.. 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과 또 상의했다. 이건 그냥 두면 안되는 일인 것 같았다. 우리는 사윤이가 다른 친구의 다른 생각을 들어주는 것에 대하여 이 사람들이 왜 저러지 싶을 정도로 폭풍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사윤이가 나한데 이런 말을 한다.

  “엄마는 참 똑똑한 것 같아.”

  “왜?”

  “엄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면 한번에 딱 알아 듣잖아.”

  “그건 니가 말을 정확하게 잘 해서 그래.”

  “근데 내 친구들 중에 내가 말을 하면 바로 알아듣는 애가 있고 뭔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애가 있어. 걔네들이랑 놀기가 너무 싫어.”

사윤이는 언어에 예민한 아이다.

  어떤 만화에서 “도깨비들은 별을 보는 것을 무척 좋아한대요.”라는 대사가 나왔는데 대부분의 3살짜리라면 “도깨비는 별을 좋아하는구나.. “라는 정보가 입력되었을 것 같은데 사윤이는 “무척”에 꽂히는 그런 아이다.

  “사윤아, 바깥 놀이를 하면 니가 달리기가 빨라 아니면 남자친구들이 빨라? “

  “남자친구들이 빠르지.”

  “그럼 남자친구들이 너 빨리 못 달린다고 너랑 안 놀아주니? “

  “아니지, “

  “그래, 아이들이 자라다 보면 어떤 일을 좀 먼저 잘하는 애들이 있고 좀 늦게 잘하는 애들이 있어. 특히 남자친구들은 말을 배우는 것은 여자친구들보다 보통 느려. 그러면 빨리 잘하는 애가 배려하고 놀아 주는 거지 늦게 잘하는 애가 놀아 주겠어? “

  “듣고 보니 그러네. “

  사윤이는 자기만의 사회생활을 제법 진지하게 잘 하고 있다.

  남편과 나는 늘 이렇게 대화한다.

  “우리 잘하고 있지? “

  “응, 우리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다른 사람을 오롯이 신뢰하는 것이란 이런거 구나, 하고 이 아이는 나에게 항상 가르침을 준다. 덕분에, 결정과 책임을 오롯이 넘겨줘도 이 아이들은 해낼 수 있겠구나를 회사에 와서도 살짝 시도를 해보게 되었고 그런 시도에 나와 함께 하는 아이들은 사윤이 만큼이나 “나 잘하고 있어”라는 자신감을 더 만들어준다.

 이렇게 나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의 학부모, 지금의 팀, 2017년, 모든 것에 있어서 나는 또다시 초보인 것이고 또다시 나의 부족함을 들춰내고 인정하면서 “인간”이 되가는 과정을 겪겠지. 감히 겪어보지 못하였던 것들에 아는 척을 하면서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거짓말”을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사과하며, 내가 겪는 순간순간이 초보이고 새로운 것임을 더 신선하게 더 생생하게 그리고 사윤이 만큼이나 진지하게 잘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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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2-11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0) ◇김규칠 구술 김숙자 대필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는 김규칠 로인 부부 내 나이 금년에 80이다. 긴 세월 수많은 일들을 겪다 보니 잊혀지지 않는 사연도 많다. 그런데 요즘 인정세태가 삭막해서 그런지 그 때 그 일이 어쩐지 더 자주 떠오르군 한다. 온 나라가 문화대혁...
  • 2017-12-11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나는 스승을 잘 만나 성공했다” 가수, ‘아리랑 난타’ 단장 아이수의 성공담에서 내가 한국 온 년도가 2004년이니 올해로 벌써 10년 하고도 3년이 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간 나의 한국생활에도 적지 않는 변화가 있어 자부를 느낀다...
  • 2017-12-11
  • 며칠전 묵직한 편지봉투 하나가 우리집에 날아왔다. ‘항상 감사합니다. 더 받은 송금료 164엔을 돌려 드립니다. 또 기회가 되면 잘 부탁합니다’ 짤막한 메모용지와 함께 동전 164엔이 들어 있는 봉투였다. 나는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영문을 물었다. 사실은 지인의 부탁으로 인터넷경매에서 옛...
  • 2017-12-10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9) ◇리희숙(안도) 애청자협회 열성자로 뛰고 있는 필자 리희숙 격정과 활력에 끓어넘치며 정열에 불타던 그 청춘시절, 걸탐스레 지식을 배워가며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던 학창시절을 마치고 ‘광활한 천지에는 할일이 많다’는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1965년...
  • 2017-12-0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8) ◇전영실(연길) 등산길에서의 필자 전영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취업통지서를 받고 우전국 인사과로 등록하러 갔던 때의 일이 어제런듯 눈앞에 삼삼하다. 한 나이 지긋한 책임일군이 반가이 맞아주며 “동무는 무슨 특장이 있소?” “어떤 일을 하고 싶소?” 하며...
  • 2017-12-05
  •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일본에 온지 일년후였다. 그때 야마모토 타마에(山本 多摩江)씨는 우리가 사는 지역의 국제교류협회 책임자였다. 영어에 능한 그녀는 외국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대부분의 일본인들에 비해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일본...
  • 2017-12-05
  • 각 지역 촌마다 빈곤해탈 난관 공략전이 치렬하게 펼쳐지고 있는 요즘, 누구보다 마음 한켠이 조급해나는 한 젊은이가 있다. 연거퍼 몇달동안 집에 내려가지 못한 채 농촌사업터에서 빈곤해탈사업을 위해 뛰여다니느라 낮과 밤을 잊은 그는 바로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축판공실 주임 홍광철(33살)씨다.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
  • 2017-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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