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어머니 사랑이 저를 살렸습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6월27일 07시51분    조회:184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3)
◇신학봉(룡정)


1989년 겨울 가족이 함께


내 나이 금년에 80이라 지금으로부터 72년 전에 우리 집은 평안구 평안촌 3여(지금의 동성용진 평안촌 3툰)에서 살았다. 그때 나는 집에서 5리 떨어져 있는 평안소학교(동성소학교)에 다녔다. 하루는 동학들과 뛰놀다 다리를 상하여 걸을 수 없게 되자 어머니는 열흘이나 매일 아침 나를 학교에 업어가고 저녁에는 업어오군 하였다. 이렇게 소학교를 졸업할 때 나는 6년 개근상, 6년 우등상으로 종이와 연필을 탔다. 상을 타들고 집으로 달려오니 어머니는 너무 기뻐 저녁에 매 사람에게 닭알 2개씩 삶아 상으로 주시였다.

어머니는 일곱남매를 키우면서도 농사에는 못하는 일이 없고 어찌나 부지런한지 마당에는 닭과 오리가 우글우글거렸고 우리에는 돼지 두마리, 거기에다 염소, 개까지 기르다 보니 눈코뜰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 그래도 어머니는 애들이 무병하게 자라는 그 재미에 너무나 즐겁다고 하시였다.

겨울이 물러가고 갈아엎은 논판에 물이 잔잔히 들어오면 어머니는 논두렁 감기에 나섰다. 그런데 대부분 논이 진흙땅이다 보니 삽에 흙이 묻어나 힘만 곱절 들고 축도 나지 않았다. 하여 삽을 팽개치고 두 손으로 흙을 떠다 두렁을 감으니 보기도 좋고 효률이 높아 하루 100메터 이상씩 논두렁을 감았다. 하여 한다 하는 남자들도 혀를 차군 하였다.

모내기철이 되면 어머니는 헌신을 신고 물판(수상육모)에 쪽걸상을 깔고 앉아 벼모를 뜨면 하루에 30~40메터씩 뜬다. 저녁이면 손과 발이 빨갛게 된 어머니는 허리가 아파 쉬면서 앓음소리를 내군 하였다. 또 가을이 되여 낫을 두가락 갈아가지고 밭에 나서면 벼(4×6식)를 근 1무씩 베여 눕혔기에 젊은 남자들도 박수를 보내군 하였다. 겨울이면 농한기라 의례 쉬여야 했지만 어머니는 가마니 짜기 부업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일주일이 되면 가마니 80여장을 공소합작사에 싣고 가 팔아서는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군 하였다. 이렇게 힘든 줄 모르고 일하며 즐거워하시던 어머니에게도 무서운 재난이 닥쳐왔다.

세해(51년, 52년, 53년) 사이에 선후로 자식 세 남매를 하늘나라로 보냈으니 어머니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아팠고 얼굴은 10년 앓은 환자처럼 창백해졌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4년 5월 5일 중학교에서 원족 가는 날 내가 학교 운동장에 쓰러져 한광우(한어선생님)선생님이 나를 집까지 업어다 주다나니 선생님은 원족도 못 가시였다. 어머니는 너무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 날부터 앓기 시작한 것이 꼬박 6년이란 세월을 병마와 싸워야 했다. 밸 고장으로부터 륵막, 담낭, 동풍, 맹장에 58년도에는 요추결핵에 걸려 운신도 할 수 없어 대소변을 받아내는 신세가 되였다. 어머니는 오전 일이 끝나면 점심시간에 나를 수레에 싣고 5리도 넘는 공사 위생소로 갔다 오느라 점심도 못 자시고 오후 일 하러 나가군 하였다.

어머니는 고양이 대골이 요추결핵에 좋다는 말을 듣고 왕복 60리도 넘는 석정골에 걸어서 갔다 오셨다. 어머니는 용하다는 한의원을 선후로 4명이나 모셔오다나니 나는 그들 한의원들의 자신만만한 통소리에 뜸만 400장, 침은 얼마나 맞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여러 의사들과 병원을 다녀도 효과가 없자 어머니는 나를 연변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받게 하고저 찾아갔다. 연변병원의 의사선생은 청진기로 가슴과 잔등을 검사하고 눈꺼풀도 번져보고 고무망치로 무릎도 두두려 보고 나서 “입원하지 말고 그 돈으로 환자 먹자는 것을 잘 먹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재차 입원시켜달라고 애원하시니 “집에 돌아가 마이싱(수입제 매우 긴장하였다)을 계속 맞으며 사과를 많이 먹이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청해에 있는 외삼촌(오장룡)에게 전보를 쳐 마이싱 50병이나 구입하였다. 지금은 문만 열면 상점이 수두룩하고 상점마다 갖가지 과실이 보기 좋게 진렬돼 있지만 당시에는 사과 한근을 사려 해도 연길이나 룡정으로 걸어가야 했다. 어머니는 사과를 사려고 한달에 두세번씩 연길이나 룡정으로 갔다 왔다. 이렇게 사다 먹은 사과가 넉달에 230근이나 되였다. 시월의 어느 하루 내가 먹을 사과가 없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오후 1시에 연길로 사과 사러 떠났다. 사과를 사가지고 돌아서니 4시가 되여 달음질 치다 싶이 걸었으나 해란강변에 도착하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한손에는 사과주머니를 쥐고 다른 손에는 신을 쥐고 한걸음 두걸음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만 돌을 빗디디며 물에 넘어져 사과주머니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어머니는 물속에서 손더듬으로 사과주머니는 찾았으나 신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 없었다. 그래도 불행중 다행이라 생각하며 어머니는 맨발바람으로 걸음을 재우쳐 7시 경에야 집에 들어섰다. 집식구들은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어머니를 보고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지만 어머니는 우선 나에게 사과를 먹으라고 꺼내주시는 것이였다. 나는 한입 떼고는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주사 맞는 시간을 아끼고저 병원에 다니며 며칠 간 강습을 받더니 주사 놓는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몇달 간의 치료와 간호를 거쳐 다리에 주먹 만큼 곪았던 자리가 터졌는데 최송학(공사병원 원장)선생님이 직접 와서 처치하였다. 얼마 후 외할머니가 사망하여 연길에 갔다가 하루 만에 돌아온 어머니가 내 환처를 보더니 흠칠 놀라는 것이였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일도 아니라면서 핀센트로 구데기를 집어내면서 눈물을 떨구시였다.

요추결핵에 걸려 일년 반 만에 어머니 손을 잡고 몇발자국 걸을 수 있게 되자 어머니는 보는 사람과마다 “우리 셋째가 살았다”고 자랑하였다. 그 후 얼마 간의 치료를 더 거치니 60년도에는 경한 로동에 참가할 수 있었고 61년도에는 정식 사원이 되였다.

하루는 길에서 중학교 때 반주임(박부길)선생을 만났는데 “네가 죽었다더니 웬 일이냐?”며 뒤걸음 치다가 돌에 걸려 넘어지기까지 했다. 나는 달려가 선생님의 손을 잡고 “어머니 사랑이 나를 살렸습니다!”고 했다. 이에 선생님은 “너의 어머니는 참말 위대한 분이구나!” 하며 감탄하는 것이였다.

62년도에 생산대 부대장으로 선거되여 앞뒤로 뛰여다녔고 그 해에 연변대학 조선어문 함수를 시작했으며 63년도에 한마을에 있는 처녀(안영숙)와 결혼하여 아기자기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나의 결혼식 날 난생처음으로 춤을 추시고는 눈물을 닦으시였다.

나의 세 자식중 아들며느리는 은행에서 사업하고 두 딸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나는 수요에 의하여 1965년부터 량종번식농장에서 일하게 되였고 1972년에는 해남 육종사업에 참가하여 겨우내 따뜻한 해남에서 보내기도 했다.

일생 동안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는 1975년 당년 68세로 위암에 걸려 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다시 올수 없는 하늘나라로 가시였다. 나는 지금도 상점에서 사과를 살 때면 어머니가 사과 사던 그 날 그 일이 생각나 가슴이 무거워지군 한다.

나는 1990년에 농학원 실험농장에서 퇴직하고 만년을 더없이 유쾌히 보내고 있다. 사랑하는 어머니, 이 좋은 세상에 단 하루라도 곁에 있어주면 그 얼마나 좋으랴! 마음속에 할 말이 태산 같이 많은데…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9) ▩한창국(안도) 필자 한창국 지난 세기 70년대와 80년대에는 어느 마을에 가든 첫눈에 안겨오는 것이 담배건조실이였다. 지금의 현대식 담배건조실과는 많이 다른, 마을에서 제일 높이 지은 토목건물이기에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던 것이다. 담배를 건조할 때면 두사...
  • 2018-11-16
  • CCTV무대에서 조선말로 경극을 부르고 있는 리은화 중국의 3대 전통연극으로 불리우는 경극은 연극, 노래, 무용, 음악 등 모든 예술적인 요소가 총 집합된 종합예술로 중국의 오페라라고도 불리운다. “중국문화의 꽃”으로 명성이 높은 경극은 중국의 전통과 력사가 고스란히 배인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10...
  • 2018-11-09
  • 올해 10월중순의 어느 일요일, 장백조선족자치현 마록구진 과원조선족민속촌. 신랑신부를 대동한 조선족혼례행렬이 과원조선족민속촌대문안으로 들어선다. 언녕부터 대문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아줌마들이 우리 한복을 차려입고 너울너울 춤추며 신랑 신부를 마중한다. 신랑 신부와 친척 친구 행렬이 민속광장의 여러 곳을...
  • 2018-11-09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8) ▩김민철(연길)   하향 50주년 기념모임에서 수기 〈첫걸음〉을 발표하는 필자 김민철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첫걸음을 걷는다. 그러나 긴 세월 속에서 줄곧 기억에 생생하고 평생에 득이 되는 뜻깊은 첫걸음은 몇번 안된다. &n...
  • 2018-11-09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7) ▩박철원(연길) 필자 부부 지난날 없어서 못 먹던 세월이 지금은 싫어서 안 먹는 때가 되였다. 아빠트에 살면서 입쌀이며 밀가루를 마음대로 살 수 있고 고기며 해산물, 닭알, 우유, 과일이 풍성한 세월이다. 먹을 근심 없는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계획경제에 ...
  • 2018-11-02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5) ▩최진옥(화룡) 필자 최진옥 사무실에서 2010년 7월 28일, 내가 살고 있는 고장은 폭우의 영향으로 하천의 물이 급속하게 불어나면서 홍수방지표준이 낮은 제방들이 볼품없이 파괴되였다. 상급의 자금조달이 륙속 도착하면서 재해손실이 제일 심한 1만 2000여메터에...
  • 2018-10-26
  • 今年10月17日是第五个全国扶贫日,也是第26个国际消除贫困日,在全社会齐心聚力为消除贫困共同努力之际,为进一步弘扬残疾人事业,动员全社会力量开展助残脱贫活动,10月23日,延边春雨爱心会携手延边州肢体残疾人协会在州残疾人活动中心举办“爱心奉献、共享阳光”爱心传递捐赠活动。   延边春雨爱心会成立...
  • 2018-10-25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4) ▩리호송(연길)   필자 리호송 연서거리와 연서교는 연길에서 차량과 시민들로 늘 붐비는 주요한 거리의 하나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기억에 희미해질 정도로 몇년에 한번 거닐가 말가한 거리였다.   헌데 2014년 6월, 시가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단위가...
  • 2018-10-23
  • 웨이하이 조선족 노인 100세 축하연 진행     (흑룡강신문=웨이하이)김명숙 기자=“산둥에 100세 조선족 노인이 있대요.”   웨이하이시에 살고 있는 조선족 김정호 노인의 100세 축하연이 지난 14일 웨이하이시 모 호텔에서 치러져 화제가 되고 있다.   웨이하이애심여성협회 회원인 임옥영 여사의 ...
  • 2018-10-22
  • —연변이 낳은 조선족 성악가 방춘월의 추구와 도전 1990년대부터 연변의 방송과 무대를 주름잡으며 독특하고 매력적인 음색으로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방춘월, 오늘날 그는 멋진 실력으로 성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저명한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성악가 메조소프라노 방춘월은 현재 천진음악대학교의 성악교...
  • 2018-10-22
  • [가작상수상작품] 나와 로라스케트장의 인연  김경희   25년 전, 개혁개방의 거세찬 물결을 타고 나는 연변에서 제일 처음으로 체육관 실내에 로라스케트장을 운영하게 되였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남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잠시 그만두고 모험을 강행하며...
  • 2018-10-18
  • 은상수상작       내 가슴에 새겨진 모성애   최 영 숙 (연길)     얼마 전 “엄마가 많이 심해졌소. 이젠 며칠 버틸 것 같지 못하오.”라는 막내 녀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는 연길시광영원 특별간호실에 급히 달려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 계모는 두눈을 지그시 감고 얼굴을 찡그린...
  • 2018-10-16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3) ▩김삼철(룡정) 2001년 9월, 손자와 같이 ‘7자나무’ 앞에서. 내 나이 80이 다된 지금에도 ‘7자나무’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 아침 일찍 연길시장에 쌀 팔러 가는 어머니를 배웅하고 오후에는 돌아오는 어머니를 마중하던 행복했던 순간들이 영...
  • 2018-10-16
  • —가두에서 ‘나눔의 꽃’을 피워가는 홍봉옥을 만나다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고있는 홍봉옥할머니 무엇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특히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행을 꾸준히 한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
  • 2018-10-15
  • 연변부용장학회 장학금발급의식이 10월 12일, 룡정해란강호텔에서 있었다. 이는 2008년 연변부용장학회가 설립이후로 11년째 이어져온 행사로서 올해도 39명 연변의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게 되였다.   이날 부용장학회는 연변대학교의 15명 학생들과 5명의 연변과학기술대학 학생들에게 매인당 400딸라를, 룡정고...
  • 2018-10-12
  • 나는 어떤 사람일까?           초야   지인중에 부탁 고수가 있다. 자신이 잘할수 있는 일도 굳이 친구중 한놈을 시키는데, 부탁받는 친구들도 누구 하나 짜증내지 않고 일을 깔끔히 마무리짓는다. 곰곰히 생각해봤다. 자신의 일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뒤로 미루기 일쑤인 친구들이...
  • 2018-10-10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1) ▩리오로(장춘) 고중시절의 필자 어제 연길에 다녀왔다. 장춘에서 호화로운 고속렬차를 타고 두시간 17분 만에 연길서역에 도착했다. 소음이 적고 내부시설이 호화롭고 깨끗한 것도 자랑거리지만 장춘에서 연길까지 열몇시간이 걸리던 기차가 두시간 17분 만에 연길...
  • 2018-09-28
  • [편집자의 말] 제1기부터 제3기까지는 길림성 연변지역과 산재지역 학교의 학생 가족을 선정하여 영상에 담았다. 제4기에서는 흑룡강성에서 유구한 력사를 갖고 있는 해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를 선정했다. 를 순조롭게 펴낼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지와 협조를 해주신 흑룡강성 교육학원 민족교연부와 해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
  • 2018-09-20
  • 장춘시에서 조선족들이 결혼식과 회갑연을 올리거나 큰 행사를 치를 때면 장춘시명계식품유한회사에서는 빠짐없이 순대, 찰떡 등 조선족 전통음식을 제공한다. 음식에서 인정이 오간다고 여기서 조선족과 조선족사회를 위해 자기의 저그마한 성의를 보여주려는 명계식품회사 계영철 사장의 모습이 돋보인다. 행사뿐만이 아...
  • 2018-09-16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9) ▩김룡운(교하) 학교 열람실에서 필자 김룡운선생님 나는 산에 오르내리기를 좋아한다. 왜냐 하면 나는 동년을 산골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60년대에 아버지가 그 좋은 장춘 도회지를 버리고 우리 자식들을 이밥이라도 실컷 먹이겠다며 하향하여 두메산골에 가서 짐을...
  • 2018-09-12
‹처음  이전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