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상지시에 거주하는 구대봉(65세)씨는 순박한 농민인데 그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보면 실로 자랑차다.
구대봉씨는 이전에 연수현, 상지현 등지의 여러 시골마을들에서 농사를 지으며 선후로 생산대의 보관원사업을 6년간, 재량사업을 7년간, 소대와 대대의 로년협회 회장사업을 도합 7년간 했다. 그러는 와중에 그는 소나 돼지를 사다 잡아파는 일, 물고기를 잡아다 파는 일, 국수를 만들어 파는 일, 마늘과 고등어를 사다 파는 일 등 장사를 다년간 억척스레 해 도합 10여만원을 벌었는바 이는 당시로 말하면 대단한 돈이였다. 이렇게 많은 돈을 벌자니 고생도 수없이 했다.
구대봉씨의 안해 리금실씨는 1990년에 한국에 나가 이러저러한 잡일을 닥치는대로 했는데 남편이 2001년에 한국에 나가자 둘이 같이 5년간 건설현장에서 미장공일을 했다. 이 일은 무척 힘들고 위험했는바 한번은 그들 부부가 같이 구루마에 모래를 그득 싣고 승강기에 오르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구루마를 번지는 바람에 대봉씨가 다리를 크게 다쳤다. 하지만 그는 진통제를 장복하며 계속 일을 했는데 그들의 일당이 한화로 15만원이였다.
더욱 잊을수 없는 것은 구대봉씨의 안해가 한국으로 떠나자 12살, 10살, 8살인 세 자식을 구대봉씨가 혼자 돌보았는데 한편으로는 힘겨운 농사일을 하면서도 날마다 새벽밥을 짓고 밤도와 빨래도 했다. 그런데 때로는 철없는 애들이 말썽을 부렸다. 하지만 구대봉씨는 엄마가 곁에 없는 그것들이 하도 측은해 차마 꾸지람도 못했다. 하여 3년간이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런데다 안해마저 곁에 없어 더욱 쓸쓸하고 고독했다.
구대봉씨는 이같이 각종일을 남달리 잘했을뿐만아느라 이름난 효자였다. 그는 형제 항렬로 셋째였는데 손우에는 누나와 형이 있고 손아래로는 녀동생이 있었으며 처가에는 딸 넷과 아들 둘이 있었다. 하지만 대봉씨가 친부모와 장모를 시종 모셨다.
구대봉씨의 부친은 치아가 무척 나빠 늘 죽을 쒀 드렸는가하면 경상적으로 빵을 만들어 대접했다. 그러느라고 며칠에 한번씩 밀가루, 사탕가루, 닭알을 1:1:1의 비례로 혼합해 과자방에 가져다 빵을 제조하군 했다. 그런가하면 몸이 허약한 아버지를 보신 시키느라고 개도 종종 잡았고 어머니에게도 효성이 지극했다. 하였기에 그의 어머니는 76세까지, 아버지는 91세에까지 앉아계셨다.
그 후에 구대봉씨는 년로하신 장모를 모셨는데 고생이 더없이 많았다. 로인님은 정신이 흐리마리해 쩍하면 사위를 욕하며 생트집을 잡았는가하면 밤이면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시도때도 없이 노래를 불러댔다. 하였기에 잠을 제개로 잘수없는 구대봉씨는 할수없이 지하에 내려가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런가하면 장모가 때로는 집을 뛰쳐나가 대봉씨가 전 동네를 헤매곤 했다. 그런데다 설상가상으로 대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해 늘 요와 속옷을 더럽혔다. 하였기에 빨래를 매일 해야 했고 팬티를 10여개나 사다놓았다. 그리고 수지도 무척 많이 들었는데 대봉씨가 장모를 모신 6년동안에 사드린 수지가 아마 차로 한차는 될 것이다. 이런 역경속에서도 대봉씨는 줄곧 장모를 살뜰히 보살폈다. 하기에 로인님은 87세까지 살아계셨다. 이러했기에 대봉씨는 상급에서 발급한 효자상을 여러번 탔다.
현재 구대봉씨는 비록 농사는 짓지 않지만 돈벌이에는 여전히 손을 떼지 않고있다. 이를테면 1쌍 3무인 책임포전을 해마다 1만400원씩 받기로하고 남에게 도급준 동시에 각기 72평, 82평, 150평되는 상가(商家)를 세채나 사 마트를 꾸려 이미 순수입 25만원을 벌었다. 그리고 차고(车库)도 5개나 사 하나에 매년 6000원씩 받기로하고 남에게 7년기한으로 도급주었다. 그런가하면 도합 150평인 아파트 2개를 사 자신과 아들이 살고있는데 자가용도 굴리고있다.
생활이 풍부해지가 대봉씨는 사화나 생활이 곤난한 분들(친척을 포함)에게 선후로 도합 10여만원이나 기부했다.
구대봉씨는 비록 평범한 농민이지만 이같이 돈을 억척스레 벌며 삶을 보람차게 엮어가기에 뭇사람들의 한결같은 호평을 받고있다. /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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