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이야기58] 100년의 숨결 두만강과 함께
—하마래 강보금할머니와 그 일가의 이야기 1,2,3
구성: 머리말
제1편 정착편 - 이주
제2편 분투편 - 변강건설
제3편 행복편 - 개혁개방
본지가 독자로 공개하는 사진자료 - 지난해 8월 31일 정오무렵 두만강수면이 급상승해 하마래마을 침습했던 정형 사진이다.강보금할머니의 외손자 손충권이 촌민들 대피지 천불붙이 산기슭에서 남긴 핸드폰 영상 기록이다.
홍수 전의 하마래마을, 홍수 때 사진속 이 구간은 피해가 크지 않았다.
머리말: 두만강 중류에 가면 전설의 변경마을 룡정시 삼합진 부유촌에‘천불붙이( 천불지산 지명에 대한 당지 사람들의 호칭)에 몸을 기대고 두만강에 발을 잠근’하마래(下马来)라는 산수간의 마을이 있는데 여기에는 조선족 60여 가구가 오붓이 살고 있다.
흥변부민 및 빈곤해탈 정책의 덕분으로 2014년에 민가 50채를 민속 풍격의 청기와 집으로 신축했고 마을길 포장 및 미화공사도 벌려 하마래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산수화속의 마을로 변신했었다. 그러던 하마래가 지난해(2016년)에 100년 일우의 홍수에 42집이 침수, 5집이 무너지고 3집이 위험주택으로, 통일 돌담과 울바자 수천메터 , 경작지 20여헥타르가 밀려나는 참상을 빚어냈다.
기자는 지난 1년사이에 하마래를 여러차례 다녀오면서 두만강과 100년의 숨결을 함께 해온 강보금(호적상으로는 강금복으로 오기됨)할머니와 그 자손 4대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발굴해낼 수 있었다. 이 가족의 이주, 정착, 분투의 이야기는 중국조선족력사와 삶의 한 단편을 보여줄 수 있는 소중한 이야기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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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정착편 - 이주
명동골 강보금할머니와 원주민들
강보금할머니의 한 손녀가 찍어 모멘트에 올린 2년전의 사진- 강보금할머니가 며느리가 끄는 손밀차에 앉아 촌문화실로 가는 모습.
일전 기자가 하마래새마을 정자공원에서 포착한 강모금할머니의 모습, 촌문화실에는 못가지만 집 대문밖 정자공원에는 며느리의 권유로 잠간씩 소풍 나온다.
두만강 변경길(삼합-백금변경도로) 하마래구간, 그리고 하마래 사람들 기억속에 이런 한폭의 아름다운‘풍경화’가 비껴져 있다.구순에 가까운 꼬부랑 시어머니를 예순에 가까운 둘째 며느리가 손밀차에 모셔 앉히고 두만강 변경길을 거닌다. 두만강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송이산 천불붙이의 짙은 산내음을 맡으며 하마래마을 강보금할머니가 며느리의 부축을 받으며 촌문화실로 가고 있다.
강보금할머니는 올해에 90세로서 하마래의 좌상이다. 인젠 로환이 겹치여 문화실로 다니던 때도 강할머니한테는 2년전의 일로 멀어져가고 있다. 지난해 물난리가 났을 때 어쩌다가 집을 떠나갔다 온 강할머니이다.
“이런 늙은이를 물난리 때 촌에서 제일 먼저 하이야(승용차)로 아래 마을 조동에 실어다 주어 이틀간 피난시켰다오. 돌아와 보니 우리네 하마래가 큰 피해를 입었더구먼. 이런 물난리는 난생 처음이요.”강할머니는 기자에게 그때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강할머니네집은 다행히 침수되지 않았다. 하지만 강할머니는 하마래 수재 참상을 보고 들은후 마음이 너무 아파 매일이다 싶이 창가에, 대문가에 매달려 있다가 새마을이 다시 복구되는 모습을 창문너머로 바라보고서야 시름을 놓았다고 한다.
하마래에 정들어
기자한테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는 강보금할머니(왼쪽 세번째), 왼쪽 두번째 사람은 강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둘째 며느리, 오른쪽 사람은 강할머니네와 울바자를 사이두고 사는 둘째 딸.
강보금할머니는 비록 운신이 어려웠지만 살아온 세월에 대한 기억만은 또렷했다.
그는 한생을 두만강, 천불붙이, 하마래와 함께 해온 분이다. 7살 때 4살 나는 동생과 함께 부모 따라 재비(강 량안에 매여 놓은 줄을 잡아당기면서 건너다니는 배)로 두만강을 건너와 천불붙이(산줄기 따라 덕수골, 서래골, 마래골, 명동골...등 ) 명동골의 다섯번째 골안에 발 붙였다가 하마래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골안으로 가면 땅을 일구고 곡식을 심어 먹고 살수있다는 걸 우리 부모는 알고 왔는지? ”
그해 초여름이였다고 한다. 강보금할머니는 명동골로 들어가면서 너무도 배고파 숲속에 보이는 주먹만큼한 애호박을 따서 식구들이 구워 먹던 기억을 떠올린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잊지 못할 거네.”라고 하면서 강보금할머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하였다.
옷 몇견지에 쟁가비 하나를 싼 보따리 하나에 갖고 온 낫, 호미, 곡괭이가 강보금네 전부의 가산이였고 굵은 나무가지들을 둘러 지은 막집이 그들의 이 땅에서의 첫‘집’이였다. 마을이라곤 띄염띄염 막집이 몇개 뿐이였고 인가라곤 ‘괴물같은 텁석부리 홀아비’ 대여섯 뿐이여서 그 골안은 소녀 강보금한테는 그토록 쓸쓸하고 무서웠다.
“그런 사람들도 가슴속에 부모 형제와 처자를 품고 있으며 따뜻한 마음과 정을 가진, 삶의 의욕이 강한 사람들이란 것을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소!”라고 말하며 강할머니는 창밖의 먼곳을 이윽토록 바라 보았다.
그 산골안 사람들에겐 감자가 식량이고 음식의 전부였다. 다행히 감자는 희한하게 크게 자라주어 골안사람들에게 그나마의 행운과 기쁨을 안겨주었다. 골안사람들은 감자를 송진나무불로 달군 돌 속에 묻어 익혀 먹었는데 감자를 먹다가도 호주머니에서 알소금 한알을 슬쩍 꺼내 혀끝으로 감빨군했다.
그런 처지였음에도 그들은 강보금네가 이주해 오니 채 여물지 않은 감자를 뚜져내 강보금네가 그해 보리고개를 넘기게 건네주었고 소녀 강보금한테는 언제나 제일 큰 감자알을 골라주군했다. 그후부터 강보금은 더는 그 골안이 무섭거나 쓸쓸하지 않았다.
동이 터서부터 해가 서산에로 기울 때까지 호미질, 곡괭이질에 여념없는 어른들의 뒤를 따라 맨발의 소녀 강보금도 동생을 돌보며 풀도 뽑고 나무뿌리도 털었다.
그렇게 그 다섯번째 골안에서 겨울을 두번 난후 그들은 지세가 좀 낮고 평평한 3호동네(세가구가 살던 동네여서 그렇게 불렀다고 함)로 내려와 살았는데 그 때 강보금네는 막집으로부터 통나무집을 마련해 살았다.
강보금할머니와 그의 남편 정성록은 각기 13살, 14살 나던 해에 3호동네에서 언약을 맺았다. 정성록네는 3호동네의 원조가구였다. 소금장사를 하면서 천불붙이 산줄기를 타고 다니던 정성록 부친이 처자(아들둘)를 거느리고 덕수골(룡정 섬바위에서 마주 보이는 골안, 현 지신진 소속)로부터 3호동네에로 와서 먼저 자리 잡았다. 강할머니네가 3호동네로 내려왔을 때는 정성록은 이미 부모를 여의고 4살우의 형님에 의지해 살고 있었는데 강보금의 부모가 성실하고 부지런한 그가 마음에 들어 맏딸인 강보금의 배필로 정했다.
강할머니네와 100메터 거리안에 살고 있는 강할머니의 맏딸(72세,오른쪽)이 색다른 음식을 해가지고 로모에게 맛보이러 왔다가 기자와 이야기하고 있다.
강보금(중간줄 왼쪽 두번째), 정성록(중간줄 왼쪽 세번째)부부가 부분적 자손들과 1975년에 명동공사에서 남긴 기념사진, 뒤줄 가운데 두 커플은 각각 이들 부부의 큰딸 부부(왼쪽 두번째, 세번째 사람), 둘째 딸 부부(오른쪽 두번째, 세번째 사람), 큰 아들이 참군 중이여서 사진에서 빠졌고, 정성록의 옆사람은 그의 둘째 아들, 기타 사람은 셋째, 넷째, 다섯째 딸이고 세 아이는 강보금의 외손자, 외손녀(나중엔 손자 손녀가 14명으로 늘어남)들이다.
강보금은 3호동네에서 18살에 맏딸을 출산했고 그뒤로 명동골 어구지인 소파리, 하마래로 이사해 내려와서 여덟 남매를 더 낳았는데 ( 모두 2남 7녀 출산, 넷째 딸이 출가전 요절, 셋째 딸과 둘째 아들이 50대 중반에 병으로 사망, 현재 6남매가 생존)그 사이 강보금의 형제도 아홉명(3남 6녀, 현재 6남매 생존)으로 늘어났다.
강보금할머니가 보관한 지난 세기 70년대의 사진이다. 사진속 흰 두건을 쓴 분은 강보금할머니의 모친 지천금, 이 가문의 이 땅에서의‘1세대 모친’이다. 그 왼쪽이 맏딸 강보금, 강보금의 남편은 그 뒤줄 왼쪽 두번째 사람, 지천금로인의 오른쪽에는 로인의 큰 며느리, 뒤줄 왼쪽 두번째 사람이 로인의 큰 아들, 그리고는 둘째 아들 부부, 셋째 아들 부부와 막내 딸, 아이들은 그의 부분적 손자, 손녀들(나중에는 손자 손녀가 총 40명)이다.
강할머니의 셋째 남동생(지금은 올케와 그집 아들), 둘째 녀동생 강금봉(80세), 넷째 녀동생 강금녀(75세) 및 그들의 자식들 일부, 강할머니의 큰 딸, 둘째 딸, 다섯째딸, 둘째 아들네(지금은 둘째 며느리만 남아 강할머니와 같이 지냄)와 부분적 외손자, 외손녀, 증외손자, 증외손녀들이 하마래에서 살고 있는데 강할머니의 가족, 친적이 하마래촌민들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강보금할머니의 부친은 지난 세기 70년대에 63세로, 모친은 지난 세기 90년대에 83세로 다 하마래에서 세상 떴다.
강할머니는 해방을 맞던 때를 회억하면서 “정말 꿈만 같았다”고 되뇌이였다.
“그 명동골안‘산(山)사람’으로 살던 우리가 중국공산당의 덕분으로 좋은 세상을 보았고 나라의 좋은 정책으로 , 자식의 효도로 지금은 이 ‘궁궐’같은 집에서 살고 있지 않소? ”
지금 강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은 국가의 흥변부민, 빈곤해탈공사로 하마래서 통일로 신축한 63평방메터 되는 민속풍격의 새집인데 개인이 2만원 밖에 안냈다. 그 돈도 연길에 살고 있는 강할머니의 큰 아들이 대주었다고 한다.
강할머니네는 광복후 3호동네에서 소파리(옛 명동공사 소재지)로 이사해 오면서 흙집 한채 분배 받았는데 그 집이 강할머니가 든 첫 ‘창문이 달린 집’이였다. 그리고 당시 제비뽑기로 강보금한테는 새하얀 고무코신도 한컬레 차려졌다. 강할머니가 처음으로 신어보는 고무코신이였다.
“그땐 눈 만 떨어지면 일에 매달려 있었지, 그러다가도 달밤이면 자다가 일어나 달빛이 흐르는 마을과 집을 둘러보며 기뻐했고 그 코신을 처마밑에서 신어보고 또 신어보았네.”
강할머니는 해살웃음을 짓고 있었으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눈물은 세파에 시달린 량볼의 주름살을 타고 주르르 흘러 내린다...
광복후 소파리에는 야학당이 생겼다. 허나 그 대가정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눈코뜰 새 없었던 강할머니는 끝내 학당을 다니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이 지금도 할머니의 유일한 유감으로 남아있다.
길림신문 김영자 기자
(제2편은 다음날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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