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1)
◇강성범(룡정)
고마운 동창들과 함께
세월이 갈수록 내 가슴속에 력사의 한페지를 차지하며 지울 수 없는 흘러간 일들이 기억의 파문 따라 오늘도 머리속에 생생 떠오르며 이 가슴속을 깊이깊이 파고든다.
물은 건너보고 사람은 지내봐야 안다고 하루 건너 흥청망청 먹어라, 써라, 마셔라 할 때에는 형님동생하며 자별하게 지내다가도 백수건달로 추락돼 입에다 거미줄을 칠 지경에 이르면 흡사 옴병환자라도 되는 듯 슬슬 피하며 뿔뿔이 흩어져 눈앞에 얼씬거리지도 않는 것이 세상인정이기도 하다.
백수건달이였던 나도 세월과 더불어 생활이 나날이 향상돼 이젠 화려한 문화주택에서 현대화한 고급가전제품들을 구전히 갖춰놓고 세상에 부럼없이 호강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핸드폰도 고급으로 쓰면서 말이다.
나는 이 편리한 핸드폰을 사용할 때마다 어제날 가난에 쪼들리며 고생스럽던 간고한 나날들이 마음속에 알른거리며 선량하고 인자한 성품의 참다운 동창생들을 머리속에 떠올리게 된다.
지금은 남녀로소 핸드폰이 없는 사람이 없지만 20여년 전에는 벽돌장 만한 핸드폰은 큰 사치이고 고정전화기 가설 열풍이 세차게 일고 있었다. 나도 남들처럼 전화기를 갖춰놓고 싶었지만 출근하던 상점이 파산을 선고하고 안해마저 일자리가 마땅찮아 돈구멍이 막히면서 하루하루를 근근득식으로 연명해가는 형편이라 가설비만 해도 3,000원씩 하는 전화를 놓을 엄두도 감히 못 냈다.
이 때였다. 연길현2중(룡정고중) 초중 3학년 3반 옛 동창들은 나의 험악한 생활형편을 꿰뚫어보고 나에게 전화기를 가설하라며 저마다 돈지갑을 털어 모은 돈 3,900원이란 거액을 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천금 같은 그 돈은 실로 가물에 단비였다. 그 돈으로 생활에 보탬도 해야 했고 딸애의 학잡비도 대줘야 했다.
그 후 1998년 안해가 한국으로 돈 벌러 갔고 집안일이라곤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초중 2학년에 다니는 딸애의 뒤바라지를 해야 했다. 실로 곤난이 막심하고 살아갈 길이 막연했다.
그렇지만 물심량면으로 지원해주고 고무격려를 아끼지 않으면서 정신적 기둥이 되고 뒤심이 되여 따뜻한 보실핌을 안겨주는 듬직한 동창들이 있음으로 하여 나는 힘을 얻어 밥 짓기도 김치 담그기도 채를 볶는 것도 열심히 배워가지고 어머니 못지 않게 계획있게 딸애의 뒤바라지를 정성껏 잘해줄 수 있게 되였다.
딸애도 이를 악물고 간고소박하게 어려운 고비들을 넘기고 원만하게 학업을 마쳤으며 대학졸업 직전인 2006년 4월에 벌써 일자리를 찾아 북경에 취직했다. 지금 나의 딸애는 회사에서 중견인물로 활약하며 유족하면서도 행복한 한가족 생활을 영위해가고 있다.
고생끝에 락이라고 나는 지금 만사시름 다 놓고 근심걱정 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 딸애의 후원으로 해마다 부부동반하여 명승고적 유람을 다니며 여생을 한껏 즐기고 있다.
나는 행복할수록 어제날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어온 동창들의 은혜를 더욱 잊을 수 없다. 나는 이같은 참다운 동창들이 있음으로 하여 무한한 영광을 느낀다. 나도 우리 동창들을 본보기로 내 주위에서 나의 도움을 수요하는 사람들에게 자애를 베풀고 리해와 관용 그리고 사랑을 베풀면서 사람냄새 풍기는 보람찬 삶을 살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잊지 못할 나의 동창들이여, 항상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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