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100년의 숨결 두만강과 함께...하마래 강보금할머니와 그 일가의 이야기(1)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8월16일 15시06분    조회:92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백성이야기58] 100년의 숨결 두만강과 함께

—하마래 강보금할머니와 그 일가의 이야기 1,2,3

  구성: 머리말

         제1편  정착편 - 이주

        제2편  분투편 - 변강건설

        제3편 행복편 - 개혁개방

본지가 독자로 공개하는 사진자료 - 지난해 8월 31일 정오무렵 두만강수면이 급상승해 하마래마을 침습했던 정형 사진이다.강보금할머니의 외손자 손충권이 촌민들 대피지 천불붙이 산기슭에서 남긴 핸드폰 영상 기록이다.

홍수 전의  하마래마을, 홍수 때 사진속 이 구간은 피해가 크지 않았다.

머리말: 두만강 중류에 가면 전설의 변경마을 룡정시 삼합진 부유촌에‘천불붙이( 천불지산 지명에 대한 당지 사람들의 호칭)에 몸을 기대고 두만강에 발을 잠근’하마래(下马来)라는 산수간의 마을이 있는데 여기에는 조선족  60여 가구가 오붓이 살고 있다.

흥변부민 및 빈곤해탈 정책의 덕분으로 2014년에 민가 50채를 민속 풍격의 청기와 집으로 신축했고 마을길 포장 및 미화공사도 벌려 하마래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산수화속의 마을로 변신했었다. 그러던 하마래가 지난해(2016년)에 100년 일우의 홍수에 42집이 침수, 5집이 무너지고 3집이 위험주택으로, 통일 돌담과 울바자 수천메터 , 경작지 20여헥타르가 밀려나는 참상을 빚어냈다.

기자는 지난  1년사이에 하마래를 여러차례 다녀오면서 두만강과 100년의 숨결을 함께 해온 강보금(호적상으로는 강금복으로 오기됨)할머니와 그 자손  4대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발굴해낼 수 있었다. 이 가족의 이주, 정착, 분투의 이야기는 중국조선족력사와 삶의 한 단편을 보여줄 수 있는 소중한 이야기이다.

                                                            —편집자

..............................................................................................................................................................................

제1편 정착편 - 이주

명동골 강보금할머니와 원주민들

강보금할머니의 한 손녀가 찍어 모멘트에 올린 2년전의 사진- 강보금할머니가 며느리가 끄는 손밀차에 앉아 촌문화실로 가는 모습.

일전 기자가 하마래새마을 정자공원에서 포착한 강모금할머니의 모습, 촌문화실에는 못가지만 집 대문밖 정자공원에는 며느리의 권유로 잠간씩 소풍 나온다.

두만강 변경길(삼합-백금변경도로) 하마래구간, 그리고 하마래 사람들 기억속에 이런 한폭의 아름다운‘풍경화’가 비껴져 있다.구순에 가까운 꼬부랑 시어머니를 예순에 가까운 둘째 며느리가 손밀차에 모셔 앉히고 두만강 변경길을 거닌다. 두만강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송이산 천불붙이의 짙은 산내음을 맡으며 하마래마을 강보금할머니가 며느리의 부축을 받으며 촌문화실로 가고 있다.

강보금할머니는 올해에 90세로서 하마래의 좌상이다. 인젠 로환이 겹치여 문화실로 다니던 때도 강할머니한테는 2년전의 일로 멀어져가고 있다. 지난해 물난리가 났을 때 어쩌다가 집을 떠나갔다 온 강할머니이다.

“이런 늙은이를 물난리 때 촌에서 제일 먼저 하이야(승용차)로 아래 마을 조동에 실어다 주어 이틀간 피난시켰다오. 돌아와 보니 우리네 하마래가 큰 피해를 입었더구먼. 이런 물난리는 난생 처음이요.”강할머니는 기자에게 그때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강할머니네집은 다행히 침수되지 않았다. 하지만 강할머니는 하마래 수재 참상을 보고 들은후 마음이 너무 아파 매일이다 싶이 창가에, 대문가에 매달려 있다가 새마을이 다시 복구되는 모습을 창문너머로 바라보고서야 시름을 놓았다고 한다.

하마래에 정들어

 

기자한테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는 강보금할머니(왼쪽 세번째), 왼쪽 두번째 사람은 강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둘째 며느리, 오른쪽 사람은 강할머니네와 울바자를 사이두고 사는 둘째 딸.

강보금할머니는 비록 운신이 어려웠지만 살아온 세월에 대한 기억만은 또렷했다.

그는 한생을 두만강, 천불붙이, 하마래와 함께 해온 분이다. 7살 때 4살 나는 동생과 함께 부모 따라 재비(강 량안에 매여 놓은 줄을 잡아당기면서 건너다니는 배)로 두만강을 건너와 천불붙이(산줄기 따라 덕수골, 서래골, 마래골, 명동골...등 ) 명동골의 다섯번째 골안에 발 붙였다가 하마래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골안으로 가면 땅을 일구고 곡식을 심어 먹고 살수있다는 걸 우리 부모는 알고 왔는지? ”

그해 초여름이였다고 한다. 강보금할머니는 명동골로 들어가면서 너무도 배고파 숲속에 보이는 주먹만큼한 애호박을 따서 식구들이 구워 먹던 기억을 떠올린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잊지 못할 거네.”라고 하면서 강보금할머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하였다.

옷 몇견지에 쟁가비 하나를 싼 보따리 하나에 갖고 온 낫, 호미, 곡괭이가 강보금네 전부의 가산이였고 굵은 나무가지들을 둘러 지은 막집이 그들의 이 땅에서의 첫‘집’이였다. 마을이라곤 띄염띄염 막집이 몇개 뿐이였고 인가라곤 ‘괴물같은 텁석부리 홀아비’ 대여섯 뿐이여서 그 골안은 소녀 강보금한테는 그토록 쓸쓸하고 무서웠다.

“그런 사람들도 가슴속에 부모 형제와 처자를 품고 있으며 따뜻한 마음과 정을 가진, 삶의 의욕이 강한 사람들이란 것을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소!”라고 말하며 강할머니는 창밖의 먼곳을 이윽토록 바라 보았다.

그 산골안 사람들에겐 감자가 식량이고 음식의 전부였다. 다행히 감자는 희한하게 크게 자라주어 골안사람들에게 그나마의 행운과 기쁨을 안겨주었다. 골안사람들은 감자를 송진나무불로 달군 돌 속에 묻어 익혀 먹었는데 감자를 먹다가도 호주머니에서 알소금 한알을 슬쩍 꺼내 혀끝으로 감빨군했다.

그런 처지였음에도 그들은 강보금네가 이주해 오니 채 여물지 않은 감자를 뚜져내 강보금네가 그해 보리고개를 넘기게 건네주었고 소녀 강보금한테는 언제나 제일 큰 감자알을 골라주군했다. 그후부터 강보금은 더는 그 골안이 무섭거나 쓸쓸하지 않았다.

동이 터서부터 해가 서산에로 기울 때까지 호미질, 곡괭이질에 여념없는 어른들의 뒤를 따라 맨발의 소녀 강보금도 동생을 돌보며 풀도 뽑고 나무뿌리도 털었다.

그렇게 그 다섯번째 골안에서 겨울을 두번 난후 그들은 지세가 좀 낮고 평평한 3호동네(세가구가 살던 동네여서 그렇게 불렀다고 함)로 내려와 살았는데 그 때 강보금네는 막집으로부터 통나무집을 마련해 살았다.

강보금할머니와 그의 남편 정성록은 각기 13살, 14살 나던 해에 3호동네에서 언약을 맺았다. 정성록네는 3호동네의 원조가구였다. 소금장사를 하면서 천불붙이 산줄기를 타고 다니던 정성록 부친이 처자(아들둘)를 거느리고 덕수골(룡정 섬바위에서 마주 보이는 골안, 현 지신진 소속)로부터 3호동네에로 와서 먼저 자리 잡았다. 강할머니네가 3호동네로 내려왔을 때는 정성록은 이미 부모를 여의고 4살우의 형님에 의지해 살고 있었는데 강보금의 부모가 성실하고 부지런한 그가 마음에 들어 맏딸인 강보금의 배필로 정했다.

강할머니네와 100메터 거리안에 살고 있는 강할머니의 맏딸(72세,오른쪽)이 색다른 음식을 해가지고 로모에게 맛보이러 왔다가 기자와 이야기하고 있다.

강보금(중간줄 왼쪽 두번째), 정성록(중간줄 왼쪽 세번째)부부가 부분적 자손들과 1975년에 명동공사에서 남긴 기념사진, 뒤줄 가운데 두 커플은 각각 이들 부부의 큰딸 부부(왼쪽 두번째, 세번째 사람), 둘째 딸 부부(오른쪽 두번째, 세번째 사람), 큰 아들이 참군 중이여서 사진에서 빠졌고, 정성록의 옆사람은 그의 둘째 아들, 기타 사람은 셋째, 넷째, 다섯째 딸이고 세 아이는 강보금의 외손자, 외손녀(나중엔 손자 손녀가 14명으로 늘어남)들이다.

강보금은 3호동네에서 18살에 맏딸을 출산했고 그뒤로 명동골 어구지인 소파리, 하마래로 이사해 내려와서 여덟 남매를 더 낳았는데 ( 모두 2남 7녀 출산, 넷째 딸이 출가전 요절, 셋째 딸과 둘째 아들이 50대 중반에 병으로 사망, 현재 6남매가 생존)그 사이 강보금의 형제도 아홉명(3남 6녀, 현재 6남매 생존)으로 늘어났다.

강보금할머니가 보관한 지난 세기 70년대의 사진이다. 사진속 흰 두건을 쓴 분은 강보금할머니의 모친 지천금, 이 가문의 이 땅에서의‘1세대 모친’이다. 그 왼쪽이 맏딸 강보금, 강보금의 남편은 그 뒤줄 왼쪽 두번째 사람, 지천금로인의  오른쪽에는 로인의  큰 며느리, 뒤줄 왼쪽 두번째 사람이 로인의 큰 아들, 그리고는 둘째 아들 부부, 셋째 아들 부부와 막내 딸, 아이들은 그의 부분적 손자, 손녀들(나중에는 손자 손녀가  40명)이다. 

강할머니의 셋째 남동생(지금은 올케와 그집 아들), 둘째 녀동생 강금봉(80세), 넷째 녀동생 강금녀(75세) 및 그들의 자식들 일부, 강할머니의 큰 딸, 둘째 딸, 다섯째딸, 둘째 아들네(지금은 둘째 며느리만 남아 강할머니와 같이 지냄)와 부분적 외손자, 외손녀, 증외손자, 증외손녀들이 하마래에서 살고 있는데 강할머니의 가족, 친적이 하마래촌민들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강보금할머니의 부친은 지난 세기 70년대에  63세로, 모친은 지난 세기 90년대에 83세로 다 하마래에서 세상 떴다.

강할머니는 해방을 맞던 때를 회억하면서 “정말 꿈만 같았다”고 되뇌이였다.

“그 명동골안‘산(山)사람’으로 살던 우리가 중국공산당의 덕분으로 좋은 세상을 보았고 나라의 좋은 정책으로 , 자식의 효도로 지금은 이 ‘궁궐’같은 집에서 살고  있지 않소? ”

지금 강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은 국가의 흥변부민, 빈곤해탈공사로 하마래서 통일로 신축한  63평방메터 되는 민속풍격의 새집인데 개인이 2만원 밖에 안냈다. 그 돈도 연길에 살고 있는 강할머니의 큰 아들이 대주었다고 한다.

강할머니네는 광복후 3호동네에서 소파리(옛 명동공사 소재지)로 이사해 오면서 흙집 한채 분배 받았는데 그 집이 강할머니가 든 첫 ‘창문이 달린 집’이였다. 그리고 당시 제비뽑기로 강보금한테는 새하얀 고무코신도 한컬레 차려졌다. 강할머니가 처음으로 신어보는 고무코신이였다.

“그땐 눈 만 떨어지면 일에 매달려 있었지, 그러다가도 달밤이면 자다가 일어나 달빛이 흐르는 마을과 집을 둘러보며 기뻐했고 그 코신을 처마밑에서 신어보고 또 신어보았네.”

강할머니는 해살웃음을 짓고 있었으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눈물은 세파에 시달린 량볼의 주름살을 타고 주르르 흘러 내린다...

광복후 소파리에는 야학당이 생겼다. 허나 그 대가정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눈코뜰 새 없었던 강할머니는 끝내 학당을 다니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이 지금도 할머니의 유일한 유감으로 남아있다.

길림신문 김영자 기자

                                    (제2편은 다음날로 이어진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연변가정연구소에서는 7월 30일 문화봉사자팀 평생교육프로그램 회지 《한 알의 씨앗》 종합본 출간의식을 개최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자”는 신조의 새싹을 피웠다. 2008년 11월 첫 강좌를 시작으로 이듬해에 첫 창간호가 출간되기까지 팀원들은 열심히 필기도 하면서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자신들의...
  • 2017-07-31
  • 위홍산: “긴급한 상황에서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홍수로 제방이 파손되여 마을이 큰 피해를 입게 되였을 때 과감히 자기의 농업용 뜨락또르 차바곤으로 제방을 보호한 촌민이 있다.   왕청현 천교령진 신화촌 촌민 위홍산(59세)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21일, 백년일우의 홍수가 들이닥쳐 제방이...
  • 2017-07-28
  • 재칭다오 동문들이 하얼빈 조1중 교장단일행을 뜨겁게 맞이하고 있다.       (흑룡강신문=칭다오)박영만 기자=헤이룽장성조선족상회 산둥분회 임홍길 회장을 위수로 하는 하얼빈조선족제1중학교 졸업생들이 오는 9월 30일 70돐을 맞이하는 하얼빈 모교에 현금 5만 위...
  • 2017-07-28
  • 43만원어치의 물품 조달   우리 주에 큰 범위 폭우가 내린 후 주적십자회는 제일 시간에 긴급예비안을 가동, 상급 적십자회에 재해정황, 긴급전이인원수와 필요되는 구조물자를 신청했다.   20일, 주적십자회는 이불 1000채와 천막 10개를 안도, 돈화, 왕청 등 홍수피해가 엄중한 지역에 보내주고 도문, 룡정 등...
  • 2017-07-28
  • “폭우로 홍수 피해를 입은 리재민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는가? 생활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연길시 북산가두 판사처 리금수부주임에게 기부금을 전해 주는 김봉숙(좌 1)   연길시 북산가두에서 살고 있는 맹인 김봉숙은 련며칠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자금...
  • 2017-07-27
  • 1987년 졸업을 앞두고 길림시 풍만수력발전소에서. 세상에 자기의 제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스승이 없고 또 자기의 스승을 존중하지 않는 제자도 없으리라. 교원생활 29년을 마치고 이미 10년전에 퇴직한 나에게 30년전의 제자 황해경이 전화를 걸어온 것은 3년전 가을의 어느날이였다. “선생님, 아무쪼록 로년에 신체...
  • 2017-07-26
  • 홍수는 지나갔지만 그렇다고 만사가 해결된게 아니다. 집이 통채로 홍수에 떠밀려갔고 논밭이 물에 잠겨 살길이 막막하다. 홍수방지, 재해대처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구경 뭘 할수 있을가? 요즘 협회나 췬에서 자원봉사, 의연금 모금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한곳에 어려움이 있으면 모두가 일...
  • 2017-07-25
  • ‘아름다운 추억’ 응모작품 (28) ◇조동관(장춘) 로인회 활동에서 연설하고 있는 필자 1970년대 중엽의 어느 한 초여름의 청명한 날씨였다. 서란시를 끼고 있는 영안대대 순인소대에서는 모내기 고조에 진입했다. 하긴 하지까지 가지 않고 다문 2-3일이라도 앞당길 예산이다. 논판에 심어놓은 모들은 새파랗게 ...
  • 2017-07-25
  • 취재후기 | 연해지역 조선족 탐방 남경편(1) 남경에서 15년 나를 살게한 힘 가족   연해지역 조선족탐방 오늘 만난 첫 주인공은 23세에 남경생활을 시작한 최군(39세)씨다. 최군과의 인터뷰는 “혹시 도문의 오지공장을 아십니까?”라는 물음으로 시작되였다. 굴뚝, 김장독을 만드는 오지공장, 그곳이 대학...
  • 2017-07-25
  • 19일 저녁 7시부터 안도현의 대부분 향, 진에 큰비, 폭우가 내려 20일 오후 2시까지 안도현의 평균 강수량은 55.3밀리메터에 달했고 신합향, 석문진 등 5개 향진의 25개 마을이 정도부동하게 피해를 입었다. 특히 명월진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홍수로 도시 전체가 침수상태에 빠졌다.  수대의 차량이 홍수에 떠밀려갔고...
  • 2017-07-23
  • 보다 많은 시민들이 곤트란쉐리에 대한 리해를 돕기 위해 곤트란쉐리에서는 종종 체험활동을 진행한다. 특히 7,8월은 “방학체험월”로서 많은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7월19일에도 한차례의 “친자활동(亲子活动)”을 진행, 후사모(후대사랑협회)와 함께 빵만들기 체험을 조직했다. 자상...
  • 2017-07-20
  •   (흑룡강신문=하얼빈)상지시에 거주하는 구대봉(65세)씨는 순박한 농민인데 그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보면 실로 자랑차다.   구대봉씨는 이전에 연수현, 상지현 등지의 여러 시골마을들에서 농사를 지으며 선후로 생산대의 보관원사업을 6년간, 재량사업을 7년간, 소대와 대대의 로년협회 회장사업을 도합 7년간 했다....
  • 2017-07-20
  • 윤수범동지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본인과 그의 가족들도 알고 있은지 오래 되고 우리도 일찍 알고 있었으니 모두 사상준비는 되여 있었으나 정작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접하고보니 정말 애통하기 그지없었다.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부분적 회원들과 함께 있는 윤수범(앞줄 오른쪽 세번째) 윤수범은 나...
  • 2017-07-19
  • ‘아름다운 추억’ 응모작품 (26) ◇양상태(길림) 1967년에 찍은 결혼기념사진 결혼사진을 보니 신혼생활이 눈앞에 삼삼히 떠오른다. 1967년 가을걷이가 끝난 후 어느 날 나와 자형은 소개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우리 동네와 20여리 상거한 합달만 마을에 선보러 갔다. 처녀 집에 도착하자 처녀의 식구들과 한...
  • 2017-07-18
  • 누군가를 한두번 돕기는 쉬워도 달마다 찾아가 꾸준히 관심하고 걱정하고 도와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외롭게 자라는 아이들에게 든든한 바람막이가 ...
  • 2017-07-13
  • 나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아버지이다. 그런데 십여년전부터 숱한 자식들이 생겼다. 십여넌전에 나는 우연하게 내가 살고 있는 주변에 불우한 아이들이 많다는 걸 발견하고 사랑애심협회를 꾸렸다. 여기저기 뛰여다니면서 모금해서는 불우한 애들에게 학용품을 사주고 대학 가는 애들에게 학비도 마련해 주고 사람...
  • 2017-07-10
  • 화룡 문화가두 문흥사회구역 독거로인 위해 대리가정 결성   화룡시 문화가두 문흥사회구역에서는 대리자녀봉사팀을 뭇고 사회구역 간부들이 독거로인들과 대리가정을 결성하여 독거로인에게 따뜻한 보살핌을 전해주고 있다.   문흥사회구역에는 독거로인이 도합 114명 있는데 로인들은 슬하에 자녀가 없거나 자...
  • 2017-07-05
  • 연길시 대흥마을 김광철대장에 대한 촌민들의 찬사 집집이 된장 가공산업을 벌려 ‘장마을’로 알려지는 연길시 의란진 구룡촌 대흥마을, 장맛뿐이 아니라 화목하고 인정 많은 대흥은 또한 살맛 나는 마을이란다. 그래서인지 대흥에서는 도시로 이사나간 집이 극히 적고 서로 좋은 일에...
  • 2017-07-03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3) ◇신학봉(룡정) 1989년 겨울 가족이 함께 내 나이 금년에 80이라 지금으로부터 72년 전에 우리 집은 평안구 평안촌 3여(지금의 동성용진 평안촌 3툰)에서 살았다. 그때 나는 집에서 5리 떨어져 있는 평안소학교(동성소학교)에 다녔다. 하루는 동학들과 뛰놀다 다리를 상하...
  • 2017-06-27
  • “아마도 박선생이 지구촌의 ‘해당화대통령’으로 불릴 것 갔습니다. 지금부터 품위 있게 ‘대통령걸음’을 련습하세요… 허 허 허” 지난 5월 7일 아침 식사 때 조선족의 “리시진” (김수철. 93세, 연변농학원 교수, 식물박사)이  40년하제자(박영호, 54)에게 술을...
  • 2017-06-26
‹처음  이전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