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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기를 걸친 우리 가문 이민이야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8월30일 16시20분    조회: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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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기를 걸친 우리 가문 이민이야기”
김영금《중국조선족백년실록》취재팀


내 고향 오도구

내가 살던 고향은 오도구라고 부르는데 훈춘으로부터 다섯번째 골안이라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란다. 우리 선조가 이 산골로 이주해온게 할아버지(김문삼, 金文三)가 여덟살 때이다.

당시 증조할아버지(김예빈, 金艺斌)는 세 아들, 딸 하나를 거느리고 조선 경원군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령을 넘어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더듬다가 이곳이 마음에 들어 정착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가족이 이곳에 온지가 어언 100년이 잘 된다. 그 사이 증조할아버지네 형제와 할아버지네 사형제, 아버지네 여섯형제, 엄마네 다섯형제, 우리네 여섯형제…… 뻗고 뻗은 수많은 친척들이 오도구골에서 분주히 살았다.
 


그때 오도구에는 만족 몇호가 살고 있었는데 동산밑으로 훈춘강이 흐르고 서산밑으로는 맑은 개울이 흘렀다고 한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포근하고 물 맑고 산 좋은 고장이였다.

어릴 때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방금 이 골안에 왔을 때는 몇십호밖에 안되고 대부분이 만족이였다고 한다. 갓 들어와서는 만족 장쾌손(본명 알수 없음)네 밭을 소작부쳤다고 한다. 후에 묵밭을 일구고 주로 피낟(돌피)과 조 감자를 심어 먹었다고 한다.

나의 고향집은 할아버지 때 지은것인데 이 집에서 나의 아버지, 삼촌, 고모 넷 그리고 우리 여섯형제중 다섯이 태여났다. 어릴 때 우리 집에는 13식솔이 사는데다 친척들이 많아 날마다 군일집 같았다. 할아버지의 삼촌되는 분은 우리 집에서 만년을 보냈고 우리 집에서 세상을 뜨셨다. 고모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의 삼촌, 나의 할아버지(그때 두 할아버지를 구별하기 위해 할아버지의 삼촌을 할아버지라 부르고 나의 친할아버지는 아바이라고 불렀다.)는 조선에서 로씨야로 떠돌다보니 30고개를 넘도록 장가를 못가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우리 집 웃방에서 조카의 며느리인 나의 어머니 손에서 진지상을 받으며 만년을 조용히 보내시였다.

나의 아버지(김만길, 金万吉)가 장가가서 이 대가정의 주인으로 되면서는 새벽부터 온 식구를 인솔해가지고 묵밭을 일구고 돌밭을 개간하였다. 우리는 대여섯살 때부터 아버지 따라 밭에 가서 돌을 주었다. 오도구골안에다 묵밭을 일구고 피낟을 심고 콩농사도 지었다. 김을 맬 때나 후치질할 때면 자갈에 부딪치는 호미, 보습 소리가 멀리에서도 쟁쟁히 들려왔다. 그만큼 돌이 많은 밭이였던것같다. 여름이면 아버지는 잔밥(우리 조무래기)들을 수레에 실어다 저 밭머리에다 부려놓고 일했다. 일여덟살쯤밖에 안되는 나와 나의 고모는 돌멩이를 주어내다 밭머리에 쌓군하였다. 돌이 어찌나 많았던지 밭머리에는 몇개의 ‘돌산’이 이루어져 늘 뱀들이 모여들었다. 비가 오다가 해가 반짝 나는 날에 뱀들이 돌담우에 얼기설기 누워있는것을 보면 몸이 우들우들 떨리군 하였다.

입쌀은 없어도 좁쌀과 피낟쌀 감자농사를 가득 지어 곡간과 움을 채웠다. 해방될 때에는 상중농의 수준에 치달아 빈하중농의 비판을 받았다. 그때 고향사람들은 돈을 몰랐다. 옷은 베를 짜서 지어입고 연필과 같은 학용품은 콩을 이고 유일한 상점인 합작사에 가서 바꾸어왔다.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었다. 그런 고향을 아버지는 내내 잊지 못하고 되돌아가 살고 싶다고 늘 말씀하셨다.
 

 


고급사에 생명처럼 아끼던 소를 바친 아버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밤마다 우사간에 다니더니 끝내는 우사간일을 맡아하셨다. 한전농사를 짓다가 수전농사를 짓게 된 아버지는 얼음이 설겅거리는 논판에서 일하다 랭병을 얻어 49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인민공사만세!”를 부를 때 아버지는 밥 한사발을 랭수에 말아먹으면 좋겠다는 가슴아픈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 아버지는 밭머리에다도 집주위에다도 꼭 같이 배나무, 오얏나무들을 줄지어 심어놓았다. 과일나무아래에는 머루넝쿨과 딸기넝쿨을 가득 심어놓았는데 어찌 보면 과수원같았다.

“마우재가 온다”

내가 일곱살 나던 해인 1945년, 산너머 “마우재”가 넘어와 왜놈들을 쫓아버리는것을 구경하였다. 그때도 지금도 고향사람들은 쏘련사람을 “마우재”라고 부른다. 어째 그렇게 부르는지 나는 지금도 모르고 있다.

“마우재”는 동쪽산으로 넘어오고 왜놈들은 서쪽산으로 도망쳤다. “산”과 “산”이 싸우는 바람에 어간에 끼운 마을사람들은 사흘동안이나 부엌바닥에 거적을 깔고 굶어서 누워있었다. 총알이 창문으로 비발치듯 들이퍼부었다. 땅바닥에 누워 두문불출한 사람들은 모두 눈이 멀뚱멀뚱해 살았는데 수수밭속으로 달아다닌 언덕집 큰아들은 총알에 맞아죽었다.

그해 공교롭게 마을에는 장티브스가 돌아 숱한 사람들이 앓아누웠다. 우리 마을에서는 그 병을 “머저리병”이라고 불렀다. 우리 집에는 둘째오빠가 한창 “머저리병”에 걸려 헛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달구지에 소를 메워가지고 앓고 있는 오빠를 이불에 둘둘 감아 싣고 다른 식구들은 걸어서 서쪽 산기슭을 에돌아 양지구골안으로 피난을 갔다. 피난가는 사람들이 먹을것을 이고 지고 장사진을 이루었다. 난리 때다 보니 세상에 제일 귀중한 물건이 먹을것이였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왜놈들이 우리 편인줄 알고 일본군대들이 가는 쪽으로 따라갔다. “마우재 온다!”하면 울던 아이들도 울음을 그치고 벌벌 떨던 때였으니깐.

골안어구에 들어서는데 일본군대들이 사정없이 총질하며 우리를 내쫓았다. 하는수없이 숲속에 눌러 앉아있는데 쏘련을 동네집처럼 드나들던 기만이라고 부르는 한 젊은이가 헐떡거리며 달려와 쏘련홍군(마우재)은 우리를 해방시키러 온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모두다 돌아와 큰길에 서서 “우라! 우라!”하고 외치라고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고 되돌아왔다. 워낙 집 떠나기를 죽기보다 더 무서워하던 마을사람들이라 차라리 “좋아라”하고 돌아왔던것이다. 

코대가 크고 머리, 눈이 노란 “마우재”들을 꼴딱꼴딱 실은 트럭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신작로길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는 동산에다 큰 구멍 뚫고 나온줄로 알았는데 후에 알고 보니 훈춘 장령자와 춘화의 분수령으로 해서 넘어왔다고 한다.
 


차에 앉은 코 크고 눈이 노란 “마우재”들이 사탕봉지와 과자봉지를 길 량켠 환영군중들에게 휙휙 내리 뿌렸다. 아이들은 과자를 줏고 어른들은 기만이를 따라 팔을 흔들며 “우라! 우라!”하고 외쳐댔다. “우라”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저녁에야 아버지가 어디서“우라”가 “만세”라는 뜻임을 알아왔다.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온 집식구들은 배를 끌어안고 웃어댔다.
 
“녀자애도 공부 잘하면 출세한다”

우리 조상들이 이주해오던 시기 오도구에 박씨네, 리씨네 등이 줄레줄레 모여오면서 큰 부락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후 일본군까지 둥지를 틀고 있어 일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300여명 잘 되였다.

해방후 내가 소학교를 다닐 때 우리 학교도 300여명 학생을 가진 농촌소학교였다. 만족과 한족은 2년에 한번씩 모집했는데 한반에 학생이 겨우 10여명 정도였다.

고급사가 시작되던 때 아버지는 나무잎처럼 무성한 자식들을 공부시키려고 훈춘근처인 신화촌으로 이사해왔다. 잇따라 친척들도 연줄연줄 훈춘근처로 이주하였는데 몇년도 안되여 신화촌과 대유수촌에 널려 살았고 다들 두번째 “오도구촌”이라 불렀다.

밤이면 호랑이와 승냥이가 살판치던 곳, 산마다 돌배, 머루, 다래, 딸기가 넘쳐나던 곳, 철따라 송어와 연어가 욱실거리던 훈춘강, 산천어를 잡아 봄이면 온마을 사람들이 산제사를 지내던 서쪽산 그리고 저녁마다 동네어른들이 모여와 귀신이야기로 밤을 패던 고향집이 지금은 까마아득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춘화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할머니가 3년동안 하숙집에 바치는 쌀과 남새(채소)를 몇달에 한번씩 실어다주었다. 그 길은 늘 호랑이가 내려오는 무서운 50리 산길이였다. 할머니는 공부 잘하는 나를 좋아하였다. 소학교, 중학교를 다닐 때 무슨 상을 타오면 할머니가 제일 기뻐하셨다. “녀자애도 공부 잘하면 출세한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와 나는 “출세”가 뭐인지 사실 잘 몰랐지만 아무튼 공부를 계속하면 이 산골을 벗어날수 있다는 뜻으로 리해했다.

어느날 문득 쓰딸린이 사망되였다는 비보가 전해왔다. 학생들은 누구를 불문하고 모두 책상에 엎드려 온 교실이 떠나갈듯이 울어대는 바람에 하루동안 수업이 정지되였다. 학교에서는 반기를 내리우고 애도를 표시하였다.

그때까지 우리 마을은 녀자애들이 18세되기전에 시집가서 아이를 낳았다. 고중을 다닌 사람이 없었다. “녀자애도 공부 잘하면 출세한다”는 할머니의 “명언”은 나더러 중학교, 고중, 대학을 거쳐 마침내 연길로  “출세” 하게 하였다. 자취생활하며 고중을 다닐 때 할머니는 농한기마다 와서 밥을 끓여주다가 석탄가스에 중독되여 세상을 뜰 번했다. 해방후 나는 고향마을의 초대 대학생이 되였다.▣(책임편집/김향덕)

<중국민족>잡지 2017년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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