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8)
◇양봉송(훈춘)
학생 유려화의 안내로 북경 이화원 명승지를 유람하며 남긴 기념사진
지난해 교사절은 통신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더불어 그 어느 해보다 제자들의 축하메시지가 많이 날아왔고 그 어느 해보다 정성어린 축하초대가 많았다.
여기에는 훈춘시제1실험소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향란을 비롯한 16명 제자들의 위챗을 통한 축하메시지가 들어있다. 몇몇 제자들은 교사절 전과 후에도 축하모임까지 마련하여 우리를 축하해주었다. 심지어 훈춘시 정화가 위생원에 근무하고 있는 최생화는 교사절 사이 출장 나갔었다면서 한주일이 지난 어느 날 우리 집에까지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이 같이 끈끈한 사제간의 도타운 정은 령장동물이라고 하는 인간에게만 있는, 금을 주고도 은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그처럼 소중한 감정이다.
그 축하메시지들 가운데서 북경에 있는 아동놀이감소프트웨어유한회사 경리 유려화의 메시지 내용만 보기로 하자.
한문으로 보내왔는데 번역하여 적어본다.
“경애하는 양선생님, 선생님의 가르침은 마치 봄바람 같고 급시우 같아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교사절을 맞으며 부디 항상 즐겁고 평안하시고 건강하시며 하시는 일들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유려화학생과의 소중한 인연은 훈춘5중 때 그의 시가 제5차 중국조선족중학생 전국 작문콩쿠르에서 수상하여 나도 지도교원의 자격으로 《조선족중학생보》에서 조직하는 여름철 야영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
유려화학생 외에도 현재 상해포동발전은행 대련성해지행 부행장으로 근무하는 정은화학생을 비롯한 훈춘5중 학생들 작품이 당시 각종 간행물에 220편이나 발표되였고 그 가운데서 61편이 수상하면서 18편 작품은 영예롭게 1등상을 받았다. 다년간 학생들 글짓기를 지도해온 나로서는 퇴직을 앞두고 이런 ‘구슬을 꿰여’ 더욱 빛내보려고 애써보았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문득 기회가 왔다.
2012년 5월 9일 나는《훈춘조선족사화》집필 일로 첫 북경행을 했다가 유려화학생과 련락이 닿았다.
북경에서는 조선족 집거구라고 할 수 있는 망경(望京)에서 내가 촌닭이 서울 구경하듯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데 먼곳에서 려화학생은 나를 알아보고 “선생님- 양선생님-” 하고 부르며 달려오는 것이였다. 그 부름이 어찌나 나의 가슴을 울리는지 나도 잰걸음으로 마주 걸어가 그를 맞아주었다. 그는 나의 두손을 잡고 마구 흔들며 “야-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냥 그대로이네.” 하면서 그처럼 기뻐하였다. 지나가는 길손들도 잠간씩 멈춰서며 부러운 눈길을 보내는 것이였다. 제자를 바라보는 나는 그야말로 흐뭇하고 자랑스러웠다. 초중시절 애숭이가 인젠 제법 어엿한 처녀모습으로 나타났으니 그의 스승으로서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으랴!
그는 먼저 그가 꾸리고 있는 회사부터 구경시켰다. 그 날은 토요일이여서 몇몇 주요 간부들만 있었는데 여러 층으로 된 회사의 구체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였다. 이 회사는 47명 직원을 두고 있었는데 모두 연구생 이상 학력을 가진 대학생들이였다. 다재다능한 인재들이 아니고서는 현대화 설비를 가지고 자동화로 움직이는 이 회사를 근본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였다.
점심때가 되자 그는 수려한 자연풍경을 배경으로 한 음식점에 가서 생전 보지도 먹어도 못 본 음식을 차려 나를 초대하였다. 성의껏 차린 음식을 먹으면서 나는 “왜 항공항천대학을 졸업하고 상응한 직업에 종사하지 않고 생뚱같은 기업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잖아도 이 때문에 부모님들과 마찰이 좀 있었고 부모님들의 애간장도 몹시 끓게 하였습니다. 그냥 저를 애숭이로만 보는 부모들로서는 리해할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 하지 않습니까? 그대로 그냥 야심차게 자기 주장을 고집하니 어머니는 통이 크게 10만원이란 거금을 내놓으면서 그럼 네 고집 대로 한번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우연이라고 할가요? 필연이라고 할가요?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나와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끌끌하고 패기 있는 북경적 한족대학생 총각이 혜성 같이 나타나 나의 꿈은 점차 꽃피고 열매 맺게 되였습니다.”
나는 그의 성공담을 들으며 너무 격동되여 “너의 어머니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어머니로 되기에 손색이 없구나.” 라고 하니 그도 눈물이 글썽하여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하였다.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는가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식사를 마치고 려화학생의 배치대로 중국의 명승지로 소문난 이화원을 관광하였다. 유람선에 올라앉아 수려한 이화원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려화학생은 많은 력사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었다. 나는 인상이 깊었다. 인젠 당당한 기업인으로서 어제를 모르고 어찌 오늘을 알며 오늘을 모르고 더구나 예측하기 어려운 래일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저녁에는 민족특색이 있는 음식점으로 나를 안내하였다. 식사를 하면서 려화는 나에게 지금도 작문써클을 하는가고 물어왔다. 이에 나는 “퇴직 후 3년간의 시간을 들여 《회룡봉 촌사》를 출판하고 이어 나의 교직생활 총화라고 할 수 있는 ‘훈춘5중 학생 작품집’을 출판해보려 했으나 출판비를 해결할 수 없어 그 희망을 접고 말았다.”고 했다. 이 때 려화학생이 “얼마면 그 책을 출판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왔다. 내가 “한 2만원 쯤이면 될 건데.”라고 하니 그는 “책을 출판하십시오. 우리들이 그 비용을 감당할 테니 근심 말구요.”라고 시원스레 말하는 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뜻밖에 연신 “고맙다. 정말 고맙다.”는 말 밖에 더 나가지 않았다.
어찌 이 뿐이랴. 려화학생은 또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까지 끊어줬다. 이렇게 나는 고희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보게 되였다! 희비가 엇갈렸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그는 나를 려관까지 바래다주고서야 아쉬운 작별을 고하였다. 나는 려화가 탄 택시가 나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저어 평생 잊을 수 없는 그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순간 저도 몰래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몇달 후 학생작품 220편을 담은 책 《자리정돈》이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드디여 출판되였다. 이 책의 출판에 유려화학생이 5000원이란 거금을 내고 기타 몇몇 학생들이 각각 1000원씩 후원하여 나의 오랜 소원을 풀게 된 것이였다.
청출어람이라고 우리의 모든 사업은 바로 이러한 후배들이 있음으로 하여 희망이 있고 전도가 밝은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본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봄바람 같고 급시우 같아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아로새겨질 것입니다.” 려화학생의 문자메시지는 나 뿐만이 아닌 모든 스승들에 대한 수천수만 제자들의 끈끈한 정이 배인 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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