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42)
◇황성환(돈화)
1948년 23세 때 전공 경축대회에 참가해 남긴 기념사진
작년 8월 20일은 나의 90세 생신날이였다. 나의 딸이 각방 노력하여 돈화시 홍기대가 서울식당에서 30여명 친척 친인들이 모여 즐거운 한때를 보내였다. 예전에는 ‘자고로 70고래희’라 하였는데 지금은 과학, 의술이 발달하여 ‘100세시대’라 하고 나도 90고령에 생신연을 맞게 되니 참 감개무량하다.
더구나 룡정에서 사는 조카며느리 송혜숙이 한국로무로 나가 있다가 돌아와 딸 황려송과 다섯살 먹은 손주녀석을 데리고 왔다. 큰할아버지께 인사드리라고 하니 구들에 넙적 엎드려 큰절을 하고 또 나의 볼에 뽀뽀를 하는데 내 인생처음으로 희비감으로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반갑다. 참 뜻깊은 오늘 하루 영영 잊을 수 없구나. 허허허.” “로할아버지, 목에 이건 뭐예요?” 꼬맹이가 내 목의 상처자국을 발견하고 금방 묻는 것이였다. “그건 할아버지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야.” “할아버지, 빨리 이야기해주세요.” 하고 졸라대자 나는 못이기는 체하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1948년 2월 어느 날 저녁이였다. 늦겨울 마지막 눈이 내려 땅우에 살짝 덮였다. 당시 패장이였던 나와 우리 패의 전우들은 상급의 전투명령을 받고 길림시교 구푸자라는 곳을 침점하고 있는 국민당 적군 한개 영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 부대는 장개석 직계부대로 남만즈군으로 특별교육을 받은 부대였다. “이들은 포로되면 눈을 뽑고 귀를 자르고 간을 뽑아먹는 악한 군이다. 절대 포로되지 말고 결사적으로 싸워야 한다.” 내가 전우들에게 한 말이다.
추격시간이 되자 나는 한켠으로 전사들을 지휘하면서 한켠으로는 적군이 주둔하고 있는 포대를 향하여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100메터까지 다가가도 총 한방 쏘지 않더니 50메터 쯤 되니 콩 볶듯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전투는 치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나의 옆에서 같이 달리던 김태준 반장이 적탄에 명중되여 쓰러진다. 돌볼 새 없이 적군 포대 앞까지 쳐들어가 한켠으로 수류탄을 던지며 토성을 뛰여넘어 쳐들어갔다. 이 때 윤병식 전우가 터지는 폭탄에 두눈을 부상당하고 쓰러졌다. 전사 한천혁동무는 적군과 치렬한 육박전을 하여 날창으로 적병 여섯을 즉살하며 “야! 이 장개석 국민당 개들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마침내 우리 패에서 동쪽 포대로 쳐들어가 계속 집안으로 쳐들어가려고 적군 포대 창구 앞을 지날 때였다. 날아오는 적탄 하나에 나는 목에 관통상을 입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목에서는 뜨거운 피가 샘물 솟듯 흘러나와 하얀 눈을 빨갛게 물들였다. 이 때 위생원이 총탄을 무릅쓰고 달려와 재빨리 붕대뭉치로 상처를 막고 대대위생소로 호송하였다.
련속 한달 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처해있었다. 절망한 간호원동지들이 죽기 전에 부모님이라도 와보라고 집주소대로 련계하였다. 소식을 듣고 어머니께서 달려오셨다. 개엿을 달여 조그마한 단지에 담아들고서 쏟아지는 눈물을 삼키며 아들 얼굴이나마 마지막으로 한번 보려고 오셨다. 짐작은 했어도 정작 목에 붕대를 칭칭 감고 깨여나지 못하는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그 자리에 물앉으며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몇날며칠을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간호원들의 정성어린 간호와 어머니의 간절한 부름에 40여일 만에 나는 끝내 혼수에서 깨여났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머니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꼭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꼭 살아야 하겠다고 이를 악물고 날마다 죽물을 한모금씩 더 마시고 침대에서 내려 활동을 하였다. 3개월이 되여 건강을 거의 회복하게 되자 인차 부대로 돌아왔다.
이번 전투에서 우리는 적군 한개 영을 완전히 소멸하고 많은 무기를 로획하였으며 수십명 적군을 포로함으로써 전 중국을 해방하는데 튼튼한 기초를 닦았다. 1948년 6월 우리 부대 독립6사에서는 경축대회를 열고 전투영웅을 표창하고 경험을 교류하였다. 그 전투에서 우리 전우들도 수십명이 희생되고 부상당했었다. 나는 이번 전투에서 지휘가 정확했고 곤난과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워 승리하였으며 또한 전투중 목에 중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건강을 회복함으로써 대공 1차와 소공 2차를 수여받았다.
우렁찬 박수갈채 속에서 앞가슴에 군공메달과 붉은꽃을 달고 전우들과 나란히 서서 표창을 받으면서 나는 목숨 걸고 피흘리며 적들과 싸우던 날들, 병실에서 이를 악물고 죽물을 넘기던 날들이 되살아나면서 그 나날들이 더없이 충실하고 영광스러워 격동된 마음을 억제 할 수 없었다.
그 후 나는 중국인민해방군 대부대와 함께 남하하여 만리장성을 날아넘고 황하, 장강을 뛰여넘어 싸워 끝내 전 중국의 해방을 맞이하게 되였다. 이 후에도 항미원조보가위국 전쟁에 참가해 사선을 넘나들었고 1956년 31세부터 돈와림업국에서 근무하다가 1984년 리직휴양을 맞이했다.
많은 혁명렬사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진 오성붉은기를 볼 때마다 어깨 나란히 같이 싸우던 전우들이 생각나고 총탄이 비발치는 전투들이 생각나고 모든 것을 주저없이 바치던 세월들이 생각난다. “오늘날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고 놀 수 있으며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다 수천만의 혁명선렬들의 희생으로 바꿔온 것이다. 그러니 꼭 오늘날의 행복을 소중히 여겨야 하느리라.” 나는 어린 증손주에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혁명선렬들이여 영생불멸하라. 조국이여 더욱 부유하고 강대해지라.
2015년 10월 6일 89세로 외손녀의 결혼잔치에 참가해 남긴 기념사진(군공메달을 단 분이 황성환로인)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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