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2)
◇황혜영 (길림)
50년 전 추억의 색바랜 사진(왼쪽이 어린 시절 필자)
어제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더니 아침에 나가보니 아직 익지 못한 시퍼런 복숭아 열매가 나무 밑에 쭉 깔렸다. 복숭아를 볼 때마다 복숭아의 맛보다 그 씨가 어떨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해보는 나다. 복숭아씨가 중약재로 쓰인다는 것을 열두살 때 벌써 알았다. 그리고 복숭아씨를 떠올리면 동네 사진관으로 달려가던 두 소녀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다.
1966년 봄철에 우리 엄마와 옆집 어금의 엄마가 며칠 사이 두고 두 집의 막둥이를 낳게 되였다. 우리 엄마가 우로 딸 삼형제를 쭉 낳고 남동생 하나 밖에 없는데 또 딸을 낳았다고 우리 아버진 산원에도 안 가고 술만 마시면서 한숨만 푹푹 쉬고 옆집 어금이네는 어금의 아래로 련속 아들 셋인데 또 아들이라고 그 집 아버지도 어두운 얼굴빛이였다.
어금이와 나는 열두살 동갑 나이였다. 문화혁명 바람에 학교도 갈 수 없는 우리 둘은 나는 녀동생, 어금이는 남동생을 업고서야 밖에 나와 놀 수 있었다. 동란시기라 공급하는 쌀도 모자랐고 고기 같은 부식품도 판판 부족이였다. 3전에 하나씩 하는 얼음과자도 어른들은 잘 사주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다 우리 엄마가 애기 잘 본다고 한개 사주면 내 한입, 너 한입 하면서 나누어먹던 딱친구였다.
아이를 업고 동네를 돌다 나면 우리 동네 사진관을 지나게 되는데 사진관 창문에 이쁜 처녀, 멋진 총각들의 확대한 사진을 진렬해놓은 것을 부러워서 한참씩 들여다보게 되였다. 꿈 많은 소녀들이였으니 희망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우리 같이 사진 한번만이라도 찍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일촌짜리 두장에 31전 하는 돈을 얻을 수 없었다.
“우리 돈을 벌자.” 어금의 말에 내가 “어떻게? 어디 가서 벌거야?” 하니 “공소부에서 복숭아씨를 약재로 받는데 한근에 40전이래.” “그런데 어떻게 모으나? 얼마나 많은 복숭아라야 그 씨, 그것도 속에 있는 손톱 만한 종자 한근 모으자면 하늘에 별 따기지.” “길 다니면서 주으면 되지!” 담찬 어금의 말에 귀가 솔깃하지만 길에서 남이 먹다 뱉아던진 더러운 복숭아씨를 줏는다면 선비인 아버지께 욕을 먹는 건 열에 둘째 치고 집안 망신이라고 집에서 쫓겨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아도 녀자들이 머리채를 길게 땋고 다니는 것은 자산계급풍이라고 홍위병들이 을러메는 바람에 태여날 때부터 머리를 한번도 깎지 않고 오금 아래까지 할머니가 정성들여 키워준 머리채를 뭉청 베여버리고 집에 들어갔다가 “가시나가 꼬리 빠진 수탉 해가지고 이게 무어야?” 하시면서 비자루를 들고 쫓는 바람에 밤중에 엄마가 찾아헤맬 때까지 어두운 창고 안에 숨어있던 것이 바로 며칠전 일이였는데 말이다. 그 날 할머니는 오래오래 성을 내고 량심 없는 년이라고 날 욕했다고 엄마가 알려주셨다. 큰손녀만 너무 귀여워하신 할머니였다. 내 동생들은 단발머리에 서캐 껴도 대수로와하지 않고 내 머리만 매일 빗겨주고 씻어주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찡해난다.
“괜찮아. 우리 애기 볼 때 놀지 않고 같이 다니면서 모으자. 그걸 강변에 가 씻은 후 돌로 깨서 알만 가져다가 우리 집 창고 우에다 바싹 말리면 되지 않아?” 그 날부터 우리 둘만의 비밀계획이 실시되기 시작했다.
끼니때가 되여 어른들이 밥을 할 때면 우리는 애기를 업고 거리를 동쪽부터 서쪽까지 땅만 보면서 걸었다. 남이 먹고 뱉아버린 복숭아씨를, 그것도 찐득찐득하고 흙이 게발린 것을 무슨 금덩이나 되는 것처럼 환성을 올리면서 주어서는 들고 다니는 낡은 알루미늄 밥곽에 넣어모았다.
길 가면서 복숭아를 먹는 어른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들도 복숭아씨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는지 온 저녁 주어도 얼마 되지 않았다. 주은 것은 어금이네 창고 구석에 모았다가 낮에 가만히 강역에 가서 씻고 깨고 해서 모았는데 온 여름, 가을 내내 주었던 것 같다.
바싹 말린 복숭아씨를 조그마한 헝겊주머니에 넣어 팔러 가던 날 그 흥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의 인생에 처음으로 번 돈, 생각만 해도 벅찬 일이였다. 그 돈으로 우리 둘은 흰 대복에 붉은 넥타이를 매고 일촌짜리 사진 한장을 찍었다. 그 후 50년 세월이 흐르면서 학교 때의 상장이랑 결혼증이랑 다 분실되였지만 이 쬐꼬만 사진만은 색이 누렇게 바래면서도 나의 곁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
나는 이번 복숭아씨 줏기에서 어금이의 한다면 꼭 하고야 마는 끈질긴 정신, 어떠한 곤난도 이겨내는 강의한 의지를 배워둔 것 같다. 아버지가 양로단 길닦이 로동자이고 어머니는 직장이 없어 남의 애를 보고 거기다 오롱조롱 여섯형제나 되는 곤난한 가정이지만 어금이는 항상 활짝 핀 성격이고 언제나 나를 친동생처럼 보살폈다. 꼭 너네 아버지, 엄마처럼 선생님이 될 것이라고 오돌차게 말하곤 했다. 소설책이 재미 있어 나는 작가가 되지 선생은 안한다고 했었다.
문화혁명 후기에 시양로단에서 회계로, 단위의 공회위원으로 잘 나가던 그가 담차게도 시교육국 인사처를 찾아가서 자기의 리상은 선생님인데 전근시켜줄 수 없겠냐고 했단다. 마침 학교가 우후죽순처럼 흥성해지고 또 심산벽곡 소학교에 선생이 모자라 쩔쩔 매던 때라 인사처장이 그를 보고 시내의 안온한 생활을 버리고 시골 애들 왕질 할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이에 그는 “고중졸업생이고 열아홉살에 입당한 공산당원이니 믿어주세요.”라고 했다. 일주일 후에 발령이 나서 다른 사람들의 리해할 수 없다는 표정 속에서 그는 결연히 시골학교로 갔다. 그 후 연변대학에 추천받아 진수도 하고 본과함수도 하면서 소학교에서 중학교로 발탁되여 우수교원으로 정년퇴직하였으니 소녀 때 리상을 실현한 셈이다.
나도 어금이의 끈질긴 정신을 조금은 배운 것 같다. 변강산골에 하향한 5년 동안 오로지 대학교에 가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신문사통신원, 대대 리론보도원, 공청단 선전위원 등 일에 발벗고 나섰고 수리공정 건설장에 가서도 낮에는 흙덩이를 메여나르고 밤에는 책을 보곤 하였다. 그 덕에 대학교 입시 제도가 회복되자 합격되여 스물네살 나이에 대학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 끈질긴 정신으로 입당도 하고 자식도 잘 키워낸 것 같다. 평생 교단을 지키다 퇴직하고 륙십이 넘은 지금도 작가가 되려던 소녀 때 꿈을 버리지 못하고 글농사를 하려는 것도 어금의 끈질긴 정신을 본받아서가 아닐가 싶다.
싱싱한 복숭아 한구럭을 사온 지 여러날 되는데 누구도 먹어주지 않아 흐물흐물 썩으려 하는 것을 던지려다 씨 한알 까서 그 속살을 입에 넣으니 달크무레한데 마음은 씁쓸해난다. 세월의 바람에 부대껴 멀리 갔던 복숭아씨 줏던 한쪼각 추억이 하늘하늘 눈앞에 날려온다. 색바랜 사진 한장 나풀나풀 내게로 떨어지더니 두 소녀 활짝 웃어준다. 지금은 저마다 스마트폰이 있어 시시각각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우리 소녀 때는 일촌짜리 사진 한장 찍으려 해도 얼마나 어려웠는지 지금 애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현재의 필자 황혜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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