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0)
◇서문만옥(길림)
문우들과 함께 있는 필자(왼쪽 첫 사람)
올해 내 나이 75세,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아버지(서문화봉씨)의 령전 앞에서 “아버지의 꿈을 제가 이루었어요!”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어 가슴이 뿌듯해진다.
나는 아버지의 꿈대로 한평생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우며 가르치는 조선어문(한국어) 강사로 아직도 일하고 있다.
내가 우리말과 우리글 교수사업에 37년, 퇴직후에도 19년 지금까지 줄곧 견지하고 있는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아버지의 고향은 한국의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칠곡리 북실이였다. 아버지의 청년시절은 일제 강점기여서 마을에는 수시로 징병하는 일본군이 덮쳐들었다. 하는 수 없이 할아버지는 온 가족을 데리고 지금의 중국 길림시 합달만 철서마을로 피난 왔었다.
허나 ‘하늘아래 까마귀는 다 검다’고 몇년 후 일본놈들은 패하고 후퇴하면서까지 닥치는 대로 불 지르고 물건들을 빼앗고 날창으로 짐승들과 사람들을 마구 찔러죽였다.
어느 날, 또 갑자기 일제놈들이 마을에 쳐들어오는 기척소리가 요란스레 들리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차 천장 우로 은신하였다. 그 당시에 네댓살이였던 나는 부모가 시켰던 대로 방 한구석에 납작 엎디여 자는 척하였다. 방 복판에서 뛰놀다가는 마을 뒤 돌산 포태막에서 놈들이 마을을 향해 수시로 쏘아대는 기관총알이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기에 자칫하면 집안에서도 죽음을 당할 수 있었다.
그 날 늦은 밤중에 아버지는 놈들에게 식량 날라주는 일을 피하려고 ×××네 집 외딴 곳에 피신해있었다. 그런데 ×××앞잡이가 고자질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놈들에게 붙잡혀 뭇매를 호되게 맞고 비참하게 생목숨을 잃었다. 나의 아버지는 생전에 그토록 배우고 싶어했던 우리말과 우리글을 낫 놓고 ‘ㄱ’자도 배우지 못하고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에게도 원래는 언니와 오빠, 그리고 녀동생도 있었지만 모두가 병에 걸려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하였으며 몇년 못 가서 어머니도 화병으로 내가 11살 되던 해에 돌아가셔 나는 어린 고아가 되였다.
하마트면 버려질 번했던 이 고아는 12년 동안 학교의 요람속에서 선생님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랐다. 내가 아버지의 꿈을 이루게 되기까지 내 인생의 매 단계마다 아름다운 선생님들의 땀방울이 스며있다. 그 분들이야말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나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분들이다.
나는 소학교 4학년까지 편벽한 산골 조가툰학교에 다녔다. 날마다 10리 길을 왕복해야 했는데 몸이 쇠약한 나는 자주 결석하게 되여 공부성적이 떨어졌다. 그 때 강기덕선생님께서는 저녁마다 우리 집에 방문 오셔 과외지도를 해주었다. 몇년 동안 강기덕선생님의 지도로 나의 학습성적도 좋아졌으며 3학년부터 선생님의 제시로 《중국조선족소년아동보》까지 과외독서량을 넓혀 나는 조선어 과문 읽기에 흥취를 갖기 시작했다.
내가 소학교 5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기반가조선족소학교의 홍룡태선생님이였다. 어느 한번 작문 짓기 총결 시간에 홍룡태선생님께서는 내가 쓴 〈가을〉이란 시를 잘 썼다면서 표양까지 하였으며 학급의 벽보란에다 그 시를 붙여놓았다. 그 때로부터 우리 글을 읽고 쓰기에 더욱 큰 흥취를 갖게 되였다.
초중 3년은 길림조중을 다녔는데 나는 고아였기에 일등공조를 받았다. 학교에서는 나의 화식비나 학잡비, 심지어 의복까지 해결해주었다. 그 때 학급담임 장옥산선생님께서는 겨울철에 사업에 그처럼 바쁘시면서도 친히 나를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내 몸에 알맞는 솜옷과 솜바지, 운동화까지 사주었다. 장옥산선생님의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사랑은 나의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다.
몇년간의 초중시절에 모교 선생님들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받아 나는 동무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베풀 줄도 아는 착한 학생으로 성장했다.
이어 길림조중 사범반에서 공부하는 3년간 선생님들의 배려로 나의 꿈은 점차 현실에 가까와졌다. 내가 사범반에 들어가게 된 리유는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인민교사가 되여 후대를 양성하는 사업이야말로 가장 신성하며 한평생 우리 말과 글로 된 책을 벗으로 삼기 때문이였다
길림조중 사범반에서 나는 많이 성숙해졌다. 학급담임 마동찬선생님께서 나의 양기를 키워주기 위해 학급 선전 책임을 맡기고 매일 저녁 자습시간 10분을 리용하여 중국조선족중학생보를 전반 앞에 나가서 읽게 하였으며 학급의 흑판보까지 꾸리게 하였다.
사범시절 나를 배양하기 위해 정말 수고하신 선생님은 문학과임 장춘갑선생님이였다. 어느 한차례 작문짓기 총결시간이였다. 선생님께서는 〈위성을 띄우던 날 아침〉이란 제목으로 쓴 나의 작문을 범문으로 내세우고 긍정적인 평가를 많이 해주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우리 말 글짓기에서 더 큰 자신감을 갖게 되였다.
사범 졸업을 앞두고 조선어문 모의교수 임무를 내가 맡게 되였다. 장춘갑선생님께서는 소학 2학년 조선어문 〈적을 사로잡았습니다〉란 과문의 교수안 쓰기, 교수방법까지 자세히 지도하여주었다. 정식으로 모의교수를 하는 날, 나는 사범반의 70명 그리고 초중학년의 조선어문 선생님들 앞에서 성공적으로 실습교수 임무를 완성하였다. 처음 교단에 섰을 때 그 때 감회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9살 되던 해에 나는 사범반을 졸업하고 강북향 대툰조선족소학교에 배치받았다. 풋내기 교원이였던 나는 중심학교 당지부의 립보서기와 반경식교장선생님의 당지식 교육을 적극적으로 받아 26살이 되던 해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81년도 1월부터 나는 길림시 교원양성학교에서 소학 조선어문 교연원 사업을 맡게 되였다. 진수학교의 류문정서기와 민족교연부의 주임 전재철선생님의 적극적인 배려로 다년간의 끈질긴 노력으로 “뿌리 깊은 꿈나무에 열매가 주렁지게 되였다.”
나는 일찍 ‘길림시 강북향의 우수교사’, ‘길림시 룡담구 우수교사’ 그리고 ‘길림성 계속교육공작 우수보도원’인란 영예증서를 받았고 교수실기, 론문 등도 간행물에 발표했다.
이렇게 나는 1998년에 정년퇴직을 맞이했다.
나의 전반 인생을 되돌아보니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한 때는 우리말을 밖에서 하면 “촌티가 난다” 비난을 받았고 집이 없어 학교 울안에서 살 때는 모모단위에서 시내의 아빠트 살림집까지 준다면서 전업을 바꾸라는 분들도 있었다. 그리고 로씨야, 한국 등 해외로 나가 돈벌이할 기회도 있었지만 나는 우리 민족 교육 전선에서 절대 흔들리지 않고 앞만 보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퇴직한 후에도 내가 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쳐준 학생이 300여명이나 된다, 그들은 모두 한국 일본 조선 싱가포르 등 해외로 나가 취업을 하였다.
지금도 나는 힘이 닿는 한 우리 민족의 후대 양성에 황혼을 아름답게 불태우고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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