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아버지의 꿈을 제가 이루었어요!'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월9일 08시43분    조회:108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0)

◇서문만옥(길림)

문우들과 함께 있는 필자(왼쪽 첫 사람)

올해 내 나이 75세,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아버지(서문화봉씨)의 령전 앞에서 “아버지의 꿈을 제가 이루었어요!”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어 가슴이 뿌듯해진다.

나는 아버지의 꿈대로 한평생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우며 가르치는 조선어문(한국어) 강사로 아직도 일하고 있다.

내가 우리말과 우리글 교수사업에 37년, 퇴직후에도 19년 지금까지 줄곧 견지하고 있는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아버지의 고향은 한국의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칠곡리 북실이였다. 아버지의 청년시절은 일제 강점기여서 마을에는 수시로 징병하는 일본군이 덮쳐들었다. 하는 수 없이 할아버지는 온 가족을 데리고 지금의 중국 길림시 합달만 철서마을로 피난 왔었다.

허나 ‘하늘아래 까마귀는 다 검다’고 몇년 후 일본놈들은 패하고 후퇴하면서까지 닥치는 대로 불 지르고 물건들을 빼앗고 날창으로 짐승들과 사람들을 마구 찔러죽였다.

어느 날, 또 갑자기 일제놈들이 마을에 쳐들어오는 기척소리가 요란스레 들리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차 천장 우로 은신하였다. 그 당시에 네댓살이였던 나는 부모가 시켰던 대로 방 한구석에 납작 엎디여 자는 척하였다. 방 복판에서 뛰놀다가는 마을 뒤 돌산 포태막에서 놈들이 마을을 향해 수시로 쏘아대는 기관총알이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기에 자칫하면 집안에서도 죽음을 당할 수 있었다.

그 날 늦은 밤중에 아버지는 놈들에게 식량 날라주는 일을 피하려고 ×××네 집 외딴 곳에 피신해있었다. 그런데 ×××앞잡이가 고자질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놈들에게 붙잡혀 뭇매를 호되게 맞고 비참하게 생목숨을 잃었다. 나의 아버지는 생전에 그토록 배우고 싶어했던 우리말과 우리글을 낫 놓고 ‘ㄱ’자도 배우지 못하고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에게도 원래는 언니와 오빠, 그리고 녀동생도 있었지만 모두가 병에 걸려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하였으며 몇년 못 가서 어머니도 화병으로 내가 11살 되던 해에 돌아가셔 나는 어린 고아가 되였다.

하마트면 버려질 번했던 이 고아는 12년 동안 학교의 요람속에서 선생님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랐다. 내가 아버지의 꿈을 이루게 되기까지 내 인생의 매 단계마다 아름다운 선생님들의 땀방울이 스며있다. 그 분들이야말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나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분들이다.

나는 소학교 4학년까지 편벽한 산골 조가툰학교에 다녔다. 날마다 10리 길을 왕복해야 했는데 몸이 쇠약한 나는 자주 결석하게 되여 공부성적이 떨어졌다. 그 때 강기덕선생님께서는 저녁마다 우리 집에 방문 오셔 과외지도를 해주었다. 몇년 동안 강기덕선생님의 지도로 나의 학습성적도 좋아졌으며 3학년부터 선생님의 제시로 《중국조선족소년아동보》까지 과외독서량을 넓혀 나는 조선어 과문 읽기에 흥취를 갖기 시작했다.

내가 소학교 5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기반가조선족소학교의 홍룡태선생님이였다. 어느 한번 작문 짓기 총결 시간에 홍룡태선생님께서는 내가 쓴 〈가을〉이란 시를 잘 썼다면서 표양까지 하였으며 학급의 벽보란에다 그 시를 붙여놓았다. 그 때로부터 우리 글을 읽고 쓰기에 더욱 큰 흥취를 갖게 되였다.

초중 3년은 길림조중을 다녔는데 나는 고아였기에 일등공조를 받았다. 학교에서는 나의 화식비나 학잡비, 심지어 의복까지 해결해주었다. 그 때 학급담임 장옥산선생님께서는 겨울철에 사업에 그처럼 바쁘시면서도 친히 나를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내 몸에 알맞는 솜옷과 솜바지, 운동화까지 사주었다. 장옥산선생님의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사랑은 나의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다.

몇년간의 초중시절에 모교 선생님들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받아 나는 동무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베풀 줄도 아는 착한 학생으로 성장했다.

이어 길림조중 사범반에서 공부하는 3년간 선생님들의 배려로 나의 꿈은 점차 현실에 가까와졌다. 내가 사범반에 들어가게 된 리유는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인민교사가 되여 후대를 양성하는 사업이야말로 가장 신성하며 한평생 우리 말과 글로 된 책을 벗으로 삼기 때문이였다

길림조중 사범반에서 나는 많이 성숙해졌다. 학급담임 마동찬선생님께서 나의 양기를 키워주기 위해 학급 선전 책임을 맡기고 매일 저녁 자습시간 10분을 리용하여 중국조선족중학생보를 전반 앞에 나가서 읽게 하였으며 학급의 흑판보까지 꾸리게 하였다.

사범시절 나를 배양하기 위해 정말 수고하신 선생님은 문학과임 장춘갑선생님이였다. 어느 한차례 작문짓기 총결시간이였다. 선생님께서는 〈위성을 띄우던 날 아침〉이란 제목으로 쓴 나의 작문을 범문으로 내세우고 긍정적인 평가를 많이 해주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우리 말 글짓기에서 더 큰 자신감을 갖게 되였다.

사범 졸업을 앞두고 조선어문 모의교수 임무를 내가 맡게 되였다. 장춘갑선생님께서는 소학 2학년 조선어문 〈적을 사로잡았습니다〉란 과문의 교수안 쓰기, 교수방법까지 자세히 지도하여주었다. 정식으로 모의교수를 하는 날, 나는 사범반의 70명 그리고 초중학년의 조선어문 선생님들 앞에서 성공적으로 실습교수 임무를 완성하였다. 처음 교단에 섰을 때 그 때 감회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9살 되던 해에 나는 사범반을 졸업하고 강북향 대툰조선족소학교에 배치받았다. 풋내기 교원이였던 나는 중심학교 당지부의 립보서기와 반경식교장선생님의 당지식 교육을 적극적으로 받아 26살이 되던 해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81년도 1월부터 나는 길림시 교원양성학교에서 소학 조선어문 교연원 사업을 맡게 되였다. 진수학교의 류문정서기와 민족교연부의 주임 전재철선생님의 적극적인 배려로 다년간의 끈질긴 노력으로 “뿌리 깊은 꿈나무에 열매가 주렁지게 되였다.”

나는 일찍 ‘길림시 강북향의 우수교사’, ‘길림시 룡담구 우수교사’ 그리고 ‘길림성 계속교육공작 우수보도원’인란 영예증서를 받았고 교수실기, 론문 등도 간행물에 발표했다.

이렇게 나는 1998년에 정년퇴직을 맞이했다.

나의 전반 인생을 되돌아보니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한 때는 우리말을 밖에서 하면 “촌티가 난다” 비난을 받았고 집이 없어 학교 울안에서 살 때는 모모단위에서 시내의 아빠트 살림집까지 준다면서 전업을 바꾸라는 분들도 있었다. 그리고 로씨야, 한국 등 해외로 나가 돈벌이할 기회도 있었지만 나는 우리 민족 교육 전선에서 절대 흔들리지 않고 앞만 보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퇴직한 후에도 내가 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쳐준 학생이 300여명이나 된다, 그들은 모두 한국 일본 조선 싱가포르 등 해외로 나가 취업을 하였다.

지금도 나는 힘이 닿는 한 우리 민족의 후대 양성에 황혼을 아름답게 불태우고저 한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백성이야기65]  대련리공대학 부속고급중학교 김종식 특급교사의 성장이야기     수학교육연구에서 최고상인 ‘소보청수학교육상”을 받아안은 대련리공대학 부속중학교 김종식   락제생으로부터 수학교육연구분야에서 최고상인 ‘소보청(苏步青)수학교육상'을 받아안은 김종식(5...
  • 2017-12-01
  • 한 10년쯤전에는 고향의 지인들한테서 이런 이야기를 듣군 했었다. “일본에서는 밥 값을 제각기 낸다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인정머리 없어? 니들은 그러지 말라…” 물론, 우리도 아주 오래동안은 그것을 접수하지 못하고 고향친구들 모임에서 와리깡(割勘),즉 터치페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었다. 무사...
  • 2017-11-2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7) ◇김홍련(장춘) 장가계에서 려행 친구들 함께(앞사람이 필자 김홍련) 2011년 10월 25일, 열네살 천진란만하던 소녀시절에 만난 우리 동창생들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배낭을 메고 연길에서 떠나 천애지각 해남도까지 바라고 려행을 시작했다. 퇴직비로 생활하는 우...
  • 2017-11-2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6) ◇허인범(룡정) 안해와 함께 고향산 마루에서 평강벌을 내려다보며       /사진 신승우 찍음 9월 3일, 자치주 창립 65돐 경축의 기쁨을 안고 안해와 함께 고향산 마루에 올라서니 벼파도 설레이는 아득한 황금벌이 한눈에 안겨온다. 여기가...
  • 2017-11-27
  • 일본 지진에서 맺어진 고마운 인연 2011년 3월 11일 오후에 발생한 일본 동북지방의 태평양 해역 지진은 그 후에 일어난 쓰나미, 그리고 빈번한 여진과 더불어 사람들의 생활을 구축해왔던 기반시설에 큰 타격을 주었다. 우선 교통기관이 중단되였고 일부 지방의 통신이 차단되였으며 정전으로 모든 시설이 혼란상태에 빠졌...
  • 2017-11-24
  •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기억 속에서 도무지 지울 수 없는 날이다. 그날 나는 지인들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조금 늦어진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위는 식사하는 손님들과 커피타임중의 손님들로 법석하였다. 오후 2시 40분 쯤 (후에 14시 46분으로 밝혀 졌음)되였을 때, 레스토랑 건물이 상하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
  • 2017-11-24
  •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의 '김치' 수업. 19일 아침, 스테인리스(不锈钢) 소재로 꾸며진 은빛 주방에 오미자, 둥굴레 등 약재와 고운 빛갈을 자랑하는 매실 효소, 사과 효소 등이 담겨진 유리병이 나란히 줄지어 서있었다. 이곳은 바로 연길시 북산가두 단산사회구역에 위치한 사랑난로 약선료리공방. 료리와 사...
  • 2017-11-23
  •     ▲ 사진, 동포언론사 및 동포단체 대표들이 17일 오후 포항시청을 직접 방문해 ‘포항지진 피해 사랑나눔 성금 접수처’에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 왼쪽부터 재한동포문인협회 류재순 회장, 한중포커스신문 문현택 대표, 중국동포타운신문 김정룡 편집장, 포항시청 성금접수처 관계자, 중국동포한마음...
  • 2017-11-23
  •    (흑룡강신문=하얼빈)심양은 동북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우리 나라 중심도시중 하나이다. 이 고유한 큰 도회지의 한 모퉁이에 조선족이 한데 모여사는 서탑거리가 있다.   나는 늙으막에 다병하고 고적하여 정든 고향을 떠나 자식 따라 심양에 와서 만년을 보내고 있다. 딸집 이웃에 집을 잡다보니 동릉의...
  • 2017-11-21
  • 상가들이 빼곡이 들어선 일본 도쿄의 한 상업거리(자료사진) 일본에서의 서비스업은 “손님은 왕이다”를 넘어 “손님은 신(神)이다” 를 기본원칙으로 한다. 매일 오픈전의 미팅에서 “어서 오세요”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잠간만 기다려주세요&...
  • 2017-11-17
  • 이 글은 현재 한국 고려대학교에서 비교문학과 비교문화 박사과정을 공부하고있는 한 조선족녀성(필명: 小葵-작은 해바라기)이 자신의 위챗계정에 중문으로 올린 글이다. 우리는 그녀의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의 한단락 경력을 빌어 우리들 인생의 깨우침을 공유하고저 이 글을 편역해 독자들에게 소...
  • 2017-11-14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3) ◇최선자(연길) 1987년 7월 22일 입당선서를 마치고 입당소개인 두분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왼쪽으로부터 당지부서기 경신성(한족), 필자 최선자, 교장 백경인(조선족). 1983년 3월의 어느 날, 나는 학교 령도로부터 절육수술을 받으라는 통지를 받고 아연해졌다. &ldquo...
  • 2017-11-14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2) ◇박명규(연길) 할아버지를 모시던 세월의 필자 박명규와 태봉선 부부의 모습 “할아버진 내가 모셔야겠소.” 이것은 44년 전 내가 북경병원으로 확진하러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한 말이였다. 어쩌면 엉클어진, 엉망이 된 가문의 뿌리를 정리하고 싶었던 아름다운...
  • 2017-11-14
  • 주로 중국음식과 한국음식 정도 밖에 몰랐던 나는 일본인들의 폭 넓은 음식 취향에 놀랐다. 호이꼬로(回鍋肉), 칭죠로스(青椒肉丝), 마보도후(麻婆豆腐) 등 중화료리의 료리명을 어린애들까지 술술 말하는 정도였고 처음 만나는 경우 교자(餃子)가 맛있다는 말로 수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아마 중국음식을 싫어하는 일본인...
  • 2017-11-13
  • 소학교졸업식에서 마츠시마선생님과 함께 아들애가 태여나서 여덟달만에 탁아소 생활을 시작했던 연유로 일본에 오자마자 집단생활에 제법 적응한 아들애 덕분에 엄마인 나의 일본생활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오늘날 어엿한 직장인으로 성장한 아들애가 부모의 노력외에도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고마운 일본인들과의 소중한 ...
  • 2017-11-13
  • 지도에 우리 민족 성씨로 명명된 행정촌이 있다는 사실에 언녕부터 호기심이 부쩍 동했는데 필자는 얼마전  박씨 두분 - 룡정시로혁명근거지건설추진회 박호만회장, 룡정시 모 광고공사 박청수경리와 함께 말타고 꽃구경식으로나마 박씨 성으로 이름진 박씨 마을-료녕성본계만족자치현소시(小市)진의 박보(...
  • 2017-11-13
  • 1990년대에 일본에 류학온 중국류학생들이라면 한두번쯤은 겪었을 일이 있다. 국제교류협회에서 조직한 만찬회에서 만난, 매사에 적극적인 류학생과 친절한 일본인이 근 두시간 정도에 걸친 이야기 끝에 작별인사를 하면서 일본인이 말했다. “기회가 되면 우리 집에 꼭 놀러 오세요.” 너무 기뻤던 류학생...
  • 2017-11-0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1) ◇리정화(연길) 필자 리정화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흰보라 날리며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눈부신 꽃세례 속에서 어린애들이 오구작작 웃고 떠들며 학교를 간다. 오리털 잠바에 털목도리, 털장갑, 따뜻한 신발… 추위를 막아주는 전신무장을 하고 아빠 엄마...
  • 2017-11-0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0) ◇박철원(연길) 필자 박철원 부부 오늘도 당교에서 함께 ‘충전’하며 나란히 1973년 28살에 결혼한 나는 올해 73세로 45년 혼인생활 남들의 부러움 속에서 오누이를 출세시키며 ‘잉꼬’라 불릴 만치 탄탄한 혼인생활을 이어왔다. 우리가 변치 않는 ...
  • 2017-11-07
  • 일본의 여러 지역에 많이 분포되여있는 고우반 일본에 와 본 중국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본 일이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중국인들이 일본에 오면 편리한 점이라 할가, 친절하게 느껴지는 점이 있다. 바로 우리가 한자대국에서 왔기때문이다. 거리에 나서면 한자로 된 간판들이 보여서 생소한 감이 어느 정도...
  • 2017-11-02
‹처음  이전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