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일본생활수기”시리즈를 내면서
1983년 당시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내각이 “류학생 10만명 계획”을 세운 후 세계로 향한 일본 고등교육의 대문이 열렸다.
80년대 국비류학, 사비류학으로 시작된 조선족의 일본에로의 이동은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정착의 시대를 넘어 “재일조선족”이라는 ‘고유명사’까지 이젠 세상에 나왔다.
그동안 우리 조선족류학생들이 선진국 일본에서의 학문의 길, 창업의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찬란하게 꿈꾸었던 일본생활도 결코 황홀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조선족(朝鮮族)은 끝없는 도전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러 도전족(挑戦族), 다국문화(多国), 이국문화(異国)의 대명사로도 되는, 이미 일본사회에서 홀시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로 떳떳이 자리매김했다. 아울러 이미 3세까지 기록하고 있는 재일조선족 10만명 시대를 맞아 이젠 많은 사람들이 “옛말 하며 살 때”도 된 것 같다.
일본조선족들의 험난했던 정착의 력사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현재 그리고 꿈으로 가득찬 멋진 미래까지 담은 생활이야기들은 분명히 우리들의 삶에 좋은 계시와 밑거름이 되여줄 것이다.
본지는 재일조선족 일본생활의 희로애락과 면면을 보여주는 일본생활수기들을 시리즈로 륙속 내놓는다. 재일조선족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지를 기대한다.
/길림신문사
시어머님(왼쪽) 생전 일본에 왔을 때 남긴 가족사진
아들이 인생의 전부였던 시어머님께서 돌아가신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매번 벽에 걸린 어머님의 사진을 볼 때마다 일본에서 7년간의 투병생활을 함께 해온 기억들을 떠올리군 한다. 어머님과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그동안의 일본생활에서 제일 소중했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남편은 중학교 때 깡패집단을 만든다고 밖에서 떠돌면서 말썽 부리는 아들이였다 한다. 그런 아들을 밤낮없이 뒤쫓아다니면서 사람 만들겠다고 악몽 같은 시기를 보내셨다는 어머님이시다. 몇년간에 걸친 어머님의 지극정성으로 바른길로 돌아선 남편이 명문법대 입학통지서를 받은 그 날 꿈인지 생시인지 정말 너무 기뻐서 얼마나 우셨는지 모른다는 어머님이시다.
그런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 더 배우고 싶습니다. 둘이 함께 일본으로 류학을 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을 때 경제상황이 어려운 예비며느리를 안스러워하시면서 나의 류학경비까지 20여만원을 선뜻이 내여주신 어머님이시다.
어머니가 한국에 가서 몇년간 힘들게 번 전부의 재산을 받아가지고 일본에 온 지도 어언 18년이다. 애티 났던 나도 이젠 개구쟁이 아이 넷을 가진 억척스러운 엄마로 탈바꿈했고 남편은 가정과 회사의 중임을 어깨에 짊어진 큰 가장이 되였다. 그런데 젊었을 때 고생을 많이 하셨던 어머님이 c형간염으로 시달리다가 간암으로 3년전에 돌아가시게 되였다.
외국에서 살면서 걱정만 끼쳐드린 우리 때문인 것 같고 우리가 너무 소홀해서 병이 많이 지체된 것 같아서 후회스럽기도 하다.
사실 남편이 대학원에 다닐 때 태여난 딸은 4살까지 중국에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끝에서 자랐다. 갓난 손녀 때문에 한밤중에도 몇번씩이나 일어나서 우유를 타주시고 기저귀를 바꿔주시고 얼마나 힘드셨을가? 말이 엄마이지 낳자마자 아이를 부모님께 맡겼던 나는 애를 데려온 후에도 힘들 때마다 울면서 시어머님께 전화로 하소연을 하였다. 하나하나 가르쳐주시고 모든 것을 받아주셨던 어머님, 그런 어머님이 처음 일본에 오셔서 건강검진을 받기 전까지 우리는 편찮으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 때 눈앞이 캄캄했던 우리는 치료를 위해 무작정 어머님을 일본으로 모셔왔다. 손녀를 키우면서 몇년간 힘드셔서 병이 더 중해진 것만 같았다. 나는 대학병원 교수님들을 찾아가서 제발 꼭 나을 수 있게 치료해달라고 조르는 일과 장기체재비자를 받기 위해 산더미 같은 자료를 작성하는 일에 정신이 없었다.
병치료를 시작하게 된 처음에는 보험도 없었던지라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어마어마한 치료비용도 쉽지 않았다.
2년 남짓한 애탄 노력 끝에 겨우 장기비자를 받았고 한달에 절반 이상은 입원치료가 계속되였다. 회사일에 바쁜 남편은 매일 저녁 늦게야 잠간 어머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말이 통하지 않는 어머님은 병원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셨다.
병원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집에서 오이짠지거나 김치를 가져다 드렸다가 간호사한테 들켜버려 무안해하시던 어머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간암환자라 소금을 거의 넣지 않고 만드는 병원음식만 드셨으니 얼마나 입맛이 없었을가? 가끔 아무리 병때문에 가리는 음식이 많다 하더라도 가끔은 입맛에 맞게 식사를 챙겨드렸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한다.
퇴원하셔서 집에 오시면 어머니는 손군들에게 손수 물만두도 빚어주시고 내가 좋아하는 시루떡에 물김치도 담가주시군 하였다. 그 때는 갓 사업을 시작한 남편이 밤낮없이 일에 매달려있던 시기였다. 일본과 중국에 공장을 세우고 두곳을 수없이 드나들던 시기였고 2008년 경제위기에 크게 휘청거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우리 부부에게 있어서 일본에 와서 제일 힘들었던 한해였던 것 같다. 그런 시기였기에 병드신 어머님이 되려 우리를 보살펴주실 때가 많았다.
밖에서 힘들다는 리유로 집에 들어오면 저도몰래 애들한테 짜증을 내고 표정도 어두워지기가 일쑤였던 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님께서 날 부르셨다.
“시아버지가 중국에 혼자 계시니 아무래도 내가 중국에 돌아가야겠소. 식사나 제대로 챙겨 드시는지 내가 여기 있어도 마음이 불안해서 안되겠소. 그리고 아들며느리 회사가 나아질 때까지 아이들 내가 중국에 데려가서 키워줄게. 자네들은 여기서 열심히 노력하오. 다 잘될거요.”
“어머니, 그건 절대 안됩니다. 그래도 일본에서 치료하셔야지 지금 중국 가시면 안됩니다. 병도 중하신데 안됩니다. 안 그래도 지언이 아빠 요즘 회사 때문에 힘들어하는데 어머니까지 중국에 가신다면 아마 맥을 버릴 거예요. 어머니, 아들이 다시 꿋꿋이 일어설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주세요. 혹시 요즘 제가 짜증을 많이 내서 어머니가 불편하셨다면 제가 고칠게요. 그리고 어머니의 병도 꼭 일본에서 치료해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엉엉 울면서 어머님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
그동안 참고 또 참아왔던 나는 그 날 어머님 옆에 누워서 어머님 손을 잡고 지나온 설음들을 하소연하였다.
일본에 온 첫해 설날 아침 새벽에 신문배달하면서 ‘정녕 이런 인생을 살려고 일본에 왔던가? 우리의 꿈이 대체 무엇이였던가’ 하면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눈물을 흘렸던 일, 36도 넘어가는 찜통더위 속에서 닭고기뀀을 구우면서 코피를 흘렸던 일, 오후 4시부터 새벽 6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서 돌아오는 전차안에서 코를 골면서 자던 기억들, 아르바이트로는 전혀 여유가 생기지 않아서 보따리장사를 하려고 전철역 앞에서 소리치며 핸드폰줄을 팔던 기억들, 임신해서 36주까지 하루에 11시간씩 마트에서 일했던 기억들, 해산비용 때문에 중국으로 가면서 비행기를 못 타게 할가봐 허수아비처럼 큰 겨울옷을 입고 불룩이 나온 배를 가리웠던 기억들, 공장을 비울 수가 없어서 친정아버지의 림종을 지켜드리지 못했던 죄송했던 기억들...
아프신 어머님을 붙들고 엉엉 울고 나니 속이 시원해났다. 항상 그러하듯이 어머님은 나한테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바람벽과도 같은 분이셨다.
온집 식구들이 몇년을 하루와 같이 병마와 싸웠지만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도 어머님의 병에는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부작용 때문에 항암치료도 더는 진행할 수가 없게 되였고 애매한 진통제만 처방이 되였다. 대학병원 선생님들도 이제는 남은 시간에 함께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라고 했다.
어머님은 아버님이 계시는 중국으로 가신다고 결정했다. 그 날 손군들을 바라보며 “아빠엄마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여야 한다. 할머니는 우리 손자손녀들을 정말 사랑한다.”고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두달 후 어머님의 환갑상을 차려드리려 애들을 데리고 중국에 다녀왔고 한달이 좀 지난 후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달려간 우리 부부의 두 손을 잡은 채 어머니는 세상을 뜨셨다.
한평생 자식들을 위해 초불처럼 살아오시면서 항상 자식들의 앞날에 크나큰 희망과 포부를 품으셨던 어머님, 마지막으 로 가시는 길을 곁에서 지켜드릴 수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였다.
어머님이 지켜주시는 덕분이라 할가 힘들게 지탱해왔던 공장들도 이젠 순조롭게 확대되고 각 지역의 활성화와 발전에 조금이라도 공헌할수 있게 되였다.
일본에 모셔와서 완치되지는 못했지만 일본에서 태여나서 자란 우리 애들이 어머님의 병치료를 함께 거들어주었던 덕분에 할머니와 함께 했던 추억을 마음속에 간직하게 되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루는 병원에 가있는 나를 돕느라 집에서 동생을 지켰던 딸애가 동생의 기저귀를 바꿔주는데 동생이 그대로 일어나서 막 뛰여다니는 바람에 온 집안에 똥칠을 해놓아 어쩔바를 모르고 숨어서 울었던 일도 있었다. 요즘도 그 기억을 떠올리며 할머니를 그리는 딸애이다. 그리고 기억을 못하고 있는 우리 셋째와 막내에게 할머니의 이야기를 자주 해주는 우리 장남, 애들에게 할머니는 지울 수 없는 존재이다.
나는 우리한테 보여주었던 어머님의 강한 정신력을 떠올리게 되고 애들도 항상 따뜻했던 어머님의 미소를 기억하고 있다.
참다운 인생으로, 사회적인 공헌으로 어머님의 그 사랑에 보답을 하려 다짐하면서 오늘도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어머님 정말 보고 싶습니다!”
/재일조선족 류춘옥
원고기획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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