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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대학 교육학부를 졸업한 이듬해인 2001년, 가난에 쪼들려서 생활비도 한푼한푼 쪼개쓰던 우리 집 형편에도 부모님은 나를 류학으로 떠밀었다. 딸한테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싶었나 보다.
2001년 10월 6일, 내 생애 첫 외국행이 이루어졌다. 연길에서 태여나서 소학교와 초중, 고중은 물론 대학까지 연변대학을 가는 바람에 기숙사 한번 못 들어보고 내 나이 20살 넘도록 집 떠나본 적이 거의 없던 내가 처음으로 향한 외국이 일본이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밟은 일본땅,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두웠던 기억 밖에 없었으니 꽤 늦은 저녁이다 싶었다. 오사카 칸사이(関西)공항에서 시내안으로 들어가는 뻐스에 앉아서 밖을 내다봤는데 주위는 왜 그렇게 불빛도 없고 어둑컴컴하던지…
발달국가라고 알고 있던 일본이 뭐 이런가 싶었던 것이 첫인상이였다. 시내로 들어가면 괜찮겠지 어느 정도 기대를 하면서 킨키(近畿)역에 내려서 보니 한밤중에 보이는 층집들이 다 4~5층 밖에 안된다. 중국처럼 오색찬란한 불빛은커녕 가로등이 겨우 어둠을 몰아낼 정도로 서있었으니 살짝 실망감이 들기도 했다.
언어학교에서 마련해준 기숙사까지 가는 길에 규동(牛丼)집이 있었는데 늦은 시간에도 참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마중 온 친구가 일본에서 유명한 음식이라며 규동벤또를 사주었다. 그 때 규동이 280엔일 때라 돈 없는 류학생들한테는 완전 고급음식이였다. 그 가격에 소고기도 먹고 배 불릴 수 있는 환상적인 음식이였으니까. 하지만 내가 먹고 싶어서 선택해서 먹는 것보다는, 돈 없을 때 먹었던 음식이라는 편견 땜에 솔직히 지금도 그리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나의 두근두근 일본생활은 시작되였다. 언어학교에서 배치한 기숙사는 방 두칸짜리 세집이였고, 거기에는 같은 시기에 함께 류학온 친구들 네명이 들었다. 오사카라 집도 널직했고 괜찮았다. 같은 처지의 친구들이 있어서 더 든든했다. 기숙사생활을 못해본 나한테는 더 재미나는 일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일어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였다. 다른 친구들은 그나마 중국에서 일어반을 다녀서 어느 정도는 아는데, 학교 때 영어반이였던 나는 죽으라는지, 살아라는지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다.
처음 반년은 길에서 누가 말을 걸어도 지레 겁 먹고 피해다녔고 누군가 초인종을 눌러도 혼자일 때면 문을 열지 못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을 못 알아듣는 건 더 힘들었다. 학생들 시험 보고 일어실력에 따라서 초급, 중급반으로 나눴지만 나는 이런저런 상황으로 시험도 안 보고 일년동안 일어공부를 했다는 가짜증명을 가지고 오다 보니 그냥 중급반에 들어갔던 것이다. 결국 일어는 문법 하나 제대로 배워보지 못하고, 완전 실천으로만 배운 셈이 되였다. 그런데 말하기를 좋아하는 내가 못 알아듣는 언어 땜에 말을 못한다니 완전 속이 뒤집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업시간이면 옆에 친구 보고 선생님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수도 없이 물어봤고, 몇달이 지나서 조금 일어가 귀에 익숙해지니 이번에는 알아는 들어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그렇게 한 반년이 지나서야 겨우 어느 정도 알아듣고 말도 할 수 있게 되였다.
알바는 같은 언어학교에 다니던 친구의 소개로 일본에 온 지 2주 만에 와인검품공장에 들어갔다. 시급도 엄청 짰지만 일어를 모르는지라 일단 일을 할 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같은 반에 같은 시기에 왔던 녀자애들 6명이 오전에 알바하고, 점심에 자전거 타고 수업 듣고, 수업이 끝나서는 또 자전거 타고 알바하러 갔다.
와인검품은 라인으로 내려오는 와인상자들을 하나씩 잡아서 병안에 이물질이 들어있는지, 라벨에 불량은 없는지 등등 검사였는데 한줄은 우리 류학생들이였고 다른 한줄은 일본아줌마들이였다.
일본에 와서 첫 알바라 중국의 자유자재 문화에 적응됐던 우리들은 일본아줌마들과의 문화적 충돌도 꽤나 겪었다. 일하면서 제멋대로 웃고 떠들고 큰소리로 말하고…
하도 공장이라서 그리고 오사카라서 그 정도까지는 딱딱하진 않았지만 그런 제맘대로인 우리가 룰이 몸에 배인 일본아줌마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꼴보기 싫었을가. 가끔 일하면서 아줌마들끼리 쑥덕거리는데, 일어를 모르는 나야 죽어라는지 살아라는지 몰랐지만 조금 알아듣는 애들 말로는 우리 흉을 본다고 했다. 그걸 알고 가만히 있을 청춘들이 아니였다. 되는 일어 안되는 일어 다 써가면서 아줌마들하고 여러번 말싸움을 벌린 적도 있었다. 말다툼도 좋고 대화도 좋고 일어를 알아야 이 모든 게 가능한 거 아니겠나. 그들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나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할려고 학교 가서 하나를 배우면 그걸 어떻게 써먹을지, 아는 단어 모르는 단어 총동원했던 것 같다.
그게 제일 일어공부가 잘됐던 시기였다. 돌이켜보면 참 고마운 인연들이다. 그렇게 일년 가까이 알바를 하고 나니, 웬만한 대화는 할 수 있었고, 대화가 되니까 시급이 조금 높은 홀써빙 알바가 가능하게 되였다.
언어 배우는 게 힘든 것도 알바가 힘든 것도 비교가 안될 만큼 가장 힘든 건 따로 있었다. 웬지 모를 외로움과 그리고 허전함이였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수속 하기 전에 일년 동안 초중에서 물리를 가르친 적이 있었다. 교육대학을 졸업했으니까 당연한 길이였겠지만, 나는 그게 너무 좋았다. 애들도 너무 이뻤고, 애들이 따르는 것도 너무 뿌듯했다. 학부모회의 때 부모님들이 오셔서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술 한잔 권하는 것도 좋았고 모든 게 다 적성에 맞는 일이였다. 그렇지만 나한테도 류학의 선택이 생기니까 20대의 패기로 오긴 왔는데, 중국과는 너무나도 다른 생활에 적응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공부도 하고 알바도 하면서 언어학교 일년 반이 지났고, 비자를 위해서는 진학을 할지 취직을 할지의 기로에 놓여있었다.
진학이라… 대학교를 졸업하고 온 나로서는 여기서 다시 대학 4년을 다닌다는 게 너무나도 시간이 아까운 일이였다. 그렇다고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중국에서 배운 거랑 같은 전공으로 가야 되는데, 내 전공이 바로 교육이다 보니 대학원을 다녀봤자 일본에서의 취직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접 취직하자니 일어 배운 지 일년 반 밖에 안돼서 자신이 없었다. 고민 끝에 결국은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하고 오사카교육대학의 교수님한테 련락을 취했는데 며칠 안돼서 자기 연구실에 들어와도 된다는 확답을 받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뒤쪽 필자)
그런데 대학원에 합격됐다는 소식을 집에 알리고 나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왔다. 아빠가 많이 아프단다. 그동안 내 공부와 진학에 방해가 될가봐 나한테는 꽁꽁 숨겼다고 했다. 진단을 받았을 때는 이미 페암말기라는 통보와 몇개월이라는 시간 밖에 남지가 않았다고 했다.
그동안 알바하느라 돈이 아까워서 집 한번 못 갔는데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돌아가는 고향이 이런 일로일 줄이야. 이튿날로 곧장 집으로 향했다. 종양이 자란 위치가 애매해서 수술은 손도 못 댄단다. 그냥 방사선치료 밖에 못하는데, 그 후유증으로 아버지는 원래 없던 살이 더 빠져서 뼈만 앙상했고 머리도 싹 다 빠진 모습이였다. 눈물이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잘해드리는 건데, 불효자들의 뒤늦은 후회와 공동한 대사이다.
동생도 북경에서 소식 듣고 달려왔다. 아들딸들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으셨는지 병원에서는 암세포가 기적적으로 작아지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3주간 아빠를 모시고 병원에 다니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지냈다. 그러나 일본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은 다가왔고 더는 머물 수 없었던 나는 제발 아버지 병이 좋아지기를 바라면서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그런데 일본으로 돌아온 지 두달이 지나서 아빠가 돌아가셨다. 그 날도 알바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빨리 집에 전화해보라는 메세지가 왔다. 속이 덜컥 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갔다. 그래도 설마설마하면서 길가에 공중전화를 찾아다녔다. 2004년 그 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스마트폰 없고 국제전화 한번 하려면 무슨 카드 같은 걸 사서 공중전화로 할 때였다. 떨리는 심정으로 집에 전화하니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돌아갔다고 했다. 그 다음날 화장하니 돌아올 필요도 없다고 했다. 아빠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하고, 아빠의 림종도 지켜드리지 못하고, 아빠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울음도 안 나고 뭐가 뭔지 말로 표현이 안되는 착잡한 심정이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알려준 대로 고향쪽 방향에 대고 절을 올리고 멍하니 서있는데 그제야 울음이 터졌다.
불쌍했다. 시대를 잘못 만나 편안한 생활 한번 못하고 고생만 하시다가 60세도 못 넘기시고 세상 떠나신 우리 아빠, 그리고 맏며느리로 들어와서 평생 시집 뒤바라지, 남편 뒤바라지, 자식들 뒤바라지만 하다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게 된 우리 엄마, 두분 인생이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겨우 자식들이 어른이 되여서 우리도 잘살아볼가 싶었더니… 있을 때 잘하자, 엄마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2004년은 우리 집에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빠가 돌아가고 얼마 안돼서 집에 화재가 났다. 학생 둘이 있던 집이라 거의 책밖에 없었고, 불타기에는 딱 좋았으리라. 다행히 엄마는 무사했다. 그 화재 속에서도 엄마는 아빠사진이랑 우리 사진을 건지려고 애썼지만 혼자서 솟구쳐오르는 불을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없어진 것보다는 그런 걸 혼자 겪었을 엄마가 받는 정신타격이 더 컸을가봐 무서웠다. 하지만 역시 엄마는 강했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한해도 지나가고 나의 일본생활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2006년에 나는 드디여 대학원을 졸업했다. 일본에 왔으면 동경에서도 살아봐야 되지 않나는 생각에 취직은 동경으로 정했다. 일본에서의 취직도 순탄치는 않았다. 일본졸업생들은 보통 일년 전부터 취직을 위한 준비활동을 한다. 요즘은 더 어려워져서 일년 반 전부터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 시기가 되면 학생들은 취업에, 리력서 작성에, 면접에… 아주 분망하다. 금방 내정을 받으면 좋겠지만, 웬만히 우수하지 않고서는 일년 동안 몇십개의 회사에 지원서를 내고 1차면접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외국인들은 선택범위가 더 제한되여있었다. 그렇게 회사를 찾고, 지원서며 리력서를 작성하고… 면접준비까지의 과정도 하나의 공부였고 체험이였고, 힘들었지만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시간들이였다.
그렇게 시작해서 회사생활을 한 지도 어언 11년이 지났다. 중도에 회사도 여러번 바뀌였고, 일해본 업종도 수두룩하다. 그나마 참 위로가 되는 건 내가 한해한해 점점 더 괜찮은 나로 성숙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어제의 틀린 것들은 반성하면서 조금은 더 나은, 처음보다는 더 성장한 하나의 인간으로 나만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일본생활을 돌이켜보면 제일 기억에 남 는건 늘 처음 순간들이다. 처음에 일본땅을 밟는 순간부터, 처음 먹었던 밥 한끼, 처음 시작했던 알바, 처음에 만났던 사람들, 처음에 느꼈던 느낌들, 처음에 경험했던 일들… 처음 3년 동안이 제일 겪었던 게 많고 느꼈던 것이 많고 배웠던 것이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일본에 오지 않고 중국에 있었더라면 또 다른 삶을 살았을 건 분명하지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갖지 않는다. 나의 20대, 30대는 충분히 좋았다고 나는 자부한다. 올해가 지나면 40대가 되지만 외국에서의 40대도 기대된다.
/재일조선족 조은화
원고기획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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